창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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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기병은 고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 오스만 제국, 인도 등에서 기병의 주된 역할을 담당했던 군사 병과이다. 중세 시대에는 란스를 주 무기로 하는 중기병이 기사 계급을 중심으로 운용되었으며, 17세기 이후에는 흉갑 기병, 기총 기병, 용기병 등으로 분화되었다. 근대에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충격 전술의 가치를 입증하며 활약했으나, 20세기 초 이후에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예식용으로만 사용되었다. 현재 일부 국가에서는 전통 유지를 위해 창기병 부대를 운용하고 있으며, 장비로는 기병창, 사브르, 헬멧, 카빈총 등을 사용하고, 보병 대열 파괴와 적 보병 소탕을 주 임무로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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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병은 고대부터 근세까지 전 세계에서 활약한 중장갑 기병으로,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며 창, 검, 활 등의 무기를 사용했으나, 화기의 발달로 쇠퇴하여 현대에는 기갑부대가 그 역할을 계승하고 일부 의장대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창기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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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및 역사 | |
기원 | 기원전 700년경 |
개요 | |
종류 | 경(輕)기병 중(重)기병 |
무장 | 창 |
시대별 변천 | |
17세기 ~ 19세기 | 유럽 |
2. 역사
창을 장비한 기병은 전 세계에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유럽의 창기병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영어로는 Lancer영어(랜서), 프랑스어로는 Lancier프랑스어(랑시에), 이탈리아어에서는 Lanciereit(란치에레), 독일어에서는 Lanziererde(란치엘러) 또는 Uhlande 혹은 Ulande(울란), 폴란드어에서는 Ułanpl(우완)이라고 불리는 병과가 창기병에 해당한다. 중국에도 란스에 상당하는 병기로서 삭(槊) 혹은 마창(馬矟)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었으며, 수 말의 단웅신이 그 사용자로 알려져 있다.[17]
17세기 초 서유럽의 기병은 흉갑 기병, 창 기병, 기총 기병(하크버스총 기병 및 카빈총 기병), 용기병으로 나뉘었고, 중장갑 기병은 사라졌다. 경장갑 기병은 많은 경우 창 기병으로 불렸고, 기승 화승총병은 승마 전투를 주 임무로 하는 기총 기병과 하마 전투가 주 임무인 용기병으로 나뉘었다. 당시 용기병은 18세기와 달리 여전히 기승 보병이며, 보병용 머스킷총뿐만 아니라 일부에서는 장창(파이크)을 휴대하기도 했다. 제5의 기병종으로서 경기병도 존재했지만, 30년 전쟁 (1618년~1648년) 중반에는 거의 사라졌다. 16세기 후반 위그노 전쟁에 참전한 장군 드 라 누는 단총의 총탄 살상력이 기병창보다 훨씬 높고, 여러 자루를 소지하여 여러 번 공격할 수 있으며, 다루기 쉬워 난전에서도 유효하다고 했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유럽 최초의 군사 대학 교장이었던 발하우젠은 1616년에 기병창의 이점을 주장하며 버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동시대에 다른 계보에 속하는 창 기병이 융성했던 폴란드의 사례처럼, 기병창이 단총에 단순히 열등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적극적으로 단총을 활용하려 했던 네덜란드의 적국인 스페인이 경장창 기병을 마지막까지 유지한 국가 중 하나였다. 즉, 서유럽에서 창 기병의 소멸은 단총으로 대표되는 전술이나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16세기에 중장갑 기병이 소멸한 것과 마찬가지로 더 큰 배경에서 이야기되어야 한다.[18]
창 기병에 적합한 인적 자원은 귀족이나 그 외 뛰어난 전사에 의존하여 항상 소수였고, 장비나 군마에 필요한 비용은 중장갑 기병 정도는 아니지만 도입과 운용에 고액이 들었다. 반면 흉갑 기병에 요구되는 능력은 사람과 군마 모두 창 기병에 비해 낮아 도입 및 운용 비용이 저렴하고 규모 확대가 용이했다. 이러한 수적 우세와 단총의 기술적 이점이 결합되어 모든 것을 결정지었으며, 이는 폴란드에서 창 기병 "후사리아"가 군사 제도로서 붕괴된 것을 설명할 수 있다.[18]
30년 전쟁에서 창 기병은 거의 사라졌고, 1600년까지 서유럽에서 기병창은 버려졌다. 경장창 기병과 프랑스의 중장갑 기병 "샹담리"도 주 무기를 단총으로 바꾸고 흉갑 기병이 되었다. 30년 전쟁에서 기본적인 기병은 중기병인 흉갑 기병, 기총 기병, 용기병, 경기병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기병 종류에 관한 논의는 흉갑 기병과 기총 기병의 비교에 집중되었고, 흉갑 기병은 야전에서 결승 병종으로서 지위를 차지하여 정면 싸움에서 다른 모든 기병을 격파할 수 있었다. 반면 기총 기병은 이론상 흉갑 기병의 지원 병종이며, 기병용 소총(아르케부스총, 카빈총, 반드리총 등)을 무기로 하고 기승 화승총병을 조상으로 하는 사격을 중시하는 기병이었다. 당시 용기병과 달리 이미 진정한 기병으로서 승마 전투를 주체로 변모했다. 그 결과 기총 기병은 경장을 살린 기동, 장사정 기총 사격, 칼을 든 승마 습격, 보조 무기인 단총을 이용한 근거리 사격 등 전술적 역할을 하는 범용 기병이 되었다. 두 기병 종류는 시대가 지나면서 거의 차이가 없어졌고, 그 과정에서 "경장 흉갑 기병"이 탄생했다. 이는 갑옷 일부를 줄이고 기총을 갖게 된 흉갑 기병이거나 흉갑과 투구를 지급받은 기총 기병이었다. 경장 흉갑 기병은 소전투에서, "중" 기총 기병은 회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의도적이거나 자금 문제일 수 있었는데, 가난한 흉갑 기병은 흉갑만으로 몸을 보호하고 단총 2자루만 무장했고, 부유한 기총 기병은 경장 흉갑 기병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18]
구스타브 아돌프는 스웨덴 기병을 개혁하여 30년 전쟁에 투입했다. 당시 스웨덴 기병은 빈약한 군마와 미숙한 병사로 이루어져 흉갑 기병이 거의 없었고, 그는 주력 기병인 기총 기병에서 기총을 빼앗고 단총과 칼만 주 무기로 하고 흉갑, 배갑, 면갑만 지급했다. 이는 기총 기병의 폐지이자 주력 기병의 경장 흉갑 기병화였다. 군마 부족과 전장에서 갑옷 부족으로 경장 흉갑 기병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경우도 많았고, 후년에 갑옷 가치가 하락하여 굳이 공급할 필요가 없었기에, 구스타브 아돌프의 스웨덴 기병은 북부 독일 신교도 군대에서 시도되던 경장 기병에 가깝다. 이러한 개혁 배경에는 폴란드 창 기병 "후사리아"에 대한 자군 기병의 약점과 흉갑 기병이 없는 상태에서 지원 병종인 기총 기병이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대신 중시된 것은 범용성이었고, 경장 기병은 기존 기총 기병이 담당하던 정찰 임무나 회전 외 소규모 충돌, 회전에서 밀집 승마 습격을 수행했다. 이들은 회전에서 결승 병종에 특화된 흉갑 기병이나 회전 외 활동에 특화된 경기병보다 각 임무에서 능력이 떨어졌지만, 비용 대 효과는 뛰어났다. 17세기에 다른 여러 나라들이 이 범용성 높은 기병을 모방하여 "기병"이라는 기병 종류가 되었다. 또한 1631년 용기병 역할을 재정의하여 기승 시에도 사격과 전투를 요구하고 기총 기병 역할을 맡게 했다. 이 흐름도 보편화되어 18세기에 용기병은 밀집 승마 습격을 할 수 있는 진정한 기병이 되었다.[18]
30년 전쟁 중 스웨덴군과 같은 이유로 다른 여러 나라 흉갑 기병의 갑옷 경장갑화도 진행되었지만, 흉갑 기병이라는 기병 종류는 살아남았다. 일부 흉갑 기병은 갑옷을 완전히 버렸지만, 여전히 큰 군마에 타고 최소한의 갑옷을 착용한 기병의 승마 습격은 회전에서 필요했다. 17세기 초 갑옷이 이상적이었던 흉갑 기병은 경장 흉갑 기병과 경장 기병의 영향을 받아 갑옷을 줄여 17세기 말에는 흉갑과 배갑만 남겼다. 17세기 후반 "기병"은 전문화되었던 다양한 기병 종류의 역할을 모두 포함하여 조총 기병(선발 기병), 흉갑 기병, 일반 기병도 "기병"이라는 하나의 종류로 통합되었다. 이는 특정 기병 종류보다 중기병 역할, 즉 승마 습격에 중점을 둔 범용성 있는 모든 종류의 기병을 나타낸다. 나머지 경기병은 유명한 3가지 종류가 있었고, 모두 동유럽 기원이다. 크로아티아 경기병 "크로아트", 헝가리 경기병 "후사르", 코사크 경기병 "코사크"이다. 이 중 후사르는 17세기에 민족성을 잃고 서유럽 여러 나라에서 보편화되어 헝가리인 외 다양한 사람들이 맡게 되어 이후 "표기병"이라 불렀다. 크로아트는 거의 표기병과 동화되었다. 코사크만 독자성을 잃지 않았지만, 활동 범위는 폴란드와 러시아 주변에 한정되었다.[18]
17세기 말 서유럽 기병은 보편화된 헝가리 기원의 경기병인 표기병, 승마 전투에 주력하기 시작한 중기병인 용기병, 회전에서 주력 기병인 중기병인 기병의 3종류로 나뉘었다. 무장에서 기병창이 거의 폐지되었지만, 독자적으로 발전한 폴란드에서는 발칸 반도 기원의 경기병과 서유럽 장갑 기병이 섞인 창 기병 "후사리아"와 지원 병종 "판체르니"가 기병창을 든 기병으로 살아남아 18세기 말 서유럽에 환류하여 기병창을 부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18]
기병 종류 변화를 보면 단총이 기병창에 뒤지지 않고, 오히려 창에 애착을 가진 "후사리아"조차 놓을 수 없었던 만능 병기였다. 16~17세기 단총 기병 전술로 악명 높은 것은 카라콜(선회 사격) 전술이다. 종대형으로 접근하여 횡렬마다 말머리를 돌려 단총 사격 후 장전과 재사격을 위해 대열 뒤로 돌아가고, 뒤 열이 진출하여 사격을 반복하는 전술이다. 그러나 카라콜 전술 명칭은 부정확할 수 있다. 서유럽 초기 기병 전술 교본을 기록한 크루소는 돌진하는 기병에 좌우로 열어 측면, 배후에서 역습하는 기동으로 카라콜을 그렸는데, 이는 선회 사격과 다르다. 크루소는 흉갑 기병끼리 전투로 설명했지만, 대 창 기병 전술로도 유효했고, 마우리츠가 스페인군 창 기병 대항책으로 네덜란드군 흉갑 기병에 실시했다. 명칭과 상관없이 선회 사격 카라콜 전술은 "라이터"에 의해 사용되었다. "라이터"도 항상 이 전술을 쓴 것은 아니다. 1553년 지바스하우젠 전투에서 적 눈의 흰색이 구별될 정도로 접근하여 단총을 쏘고 돌진했고, 1562년 프랑스 드뢰 전투에서 "라이터"의 카라콜 전술은 총기 지원이 부족한 스위스 창병 방진에 일방적 공격을 가해 큰 피해를 입혔다. 이는 기존 기병창을 주력으로 한 중장갑 기병이나 창 기병은 불가능했고, 화승총 기병이 스코틀랜드 기병대에 큰 손해를 입힌 1547년 핑키 클루 전투의 재현이었다. 이는 카라콜 전술, 즉 기승 지속 사격 전술이 과거 중기병을 괴롭혔던 장창병 밀집 대형에 대한 중기병 측 답변이었음을 의미한다. 이 점만 보아도 카라콜 전술은 의미가 있었지만, 현대에는 어리석은 전술로 꼽힌다. 이 무렵 총기 지원 없는 밀집 보병대는 거의 사라졌고, 총병과 장창병을 협조시킨 밀집 보병대를 상대할 때 사격전에서 승산 없는 이 전술은 불리했다. 재장전을 위해 최전열이 후퇴할 때 창 기병 역습에도 취약하고, 정밀한 움직임은 전장에서 복잡하여 숙련 낮은 라이터는 감당하기 어려웠다.[18]
단총은 기병창보다 살상력과 취급성이 뛰어나고, 창 기병보다 낮은 질의 군마와 숙련도로 운용 가능하여 수를 갖추기 쉬웠다. 그 결과, 기존 중장갑 기병과 창 기병은 서유럽에서 사라졌다.[18]
평균적으로 사기와 숙련도가 낮았던 16세기 기병은 종대형을 취할 수밖에 없었지만, 질 낮은 병사 훈련 교련으로 기병 조직화는 진행되었다. 프랑스 단총 기병은 카라콜 전술에 빠지기도 했다. 내전이자 종교 전쟁이었던 위그노 전쟁에서는 사격전 후 칼을 들고 근접전을 하기도 했다. 라이터 유행을 받아들인 그들은 개별 국면에서 중장갑 기병에 압도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가벼운 무장, 경쾌한 군마, 칼과 단총을 이용해 기동력으로 단열 대형 적을 격파했다. 다른 기병 종류와 협동도 진행되어 16세기 전반부터 기승 화승총병을 창 기병 전방에 배치하는 전술이 일반화되었고, 중장갑 기병이나 창 기병 등 중기병 공격에 앞서 지원 사격을 하여 적 대열에 틈을 만들었다. 많은 경우 이를 지원하는 단총 기병이 후방에 대기했고, "라이터"와 창 기병을 조합하여 상호 지원하게 되었고, 총병과 기병 협동도 진전되었다. 1587년 쿠트라 전투나 1590년 이브리 전투처럼 보병과 협동하며 사격 후 칼을 들고 습보로 백병 승마 습격을 하는 전술은 효과적이었다. 칼에 의한 돌격은 스웨덴 기병에게도 중요했지만, 독일 기병에게도 중요 전술이 되었다. 브레진스키에 따르면 1630년까지 그들은 카라콜 고집을 버렸고, 사기가 굳건하면 흉갑 기병 갑옷은 스웨덴 기병 칼날에도 유효했고, 흉갑 기병이 근거리에서 단총을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여 스웨덴 기병을 압도하기도 했다.[18]
17세기 후반~18세기 초 기병 접근전 주요 무기는 단총에서 칼로 바뀌었다. 이는 기병 갑옷이 대부분 사라져 단총 살상력이 불필요해졌고, 접근전이 길어지면 기병은 단총 개머리판보다 칼날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사격 후 칼로 바꾸어 접근전을 하면 카라콜 궤도를 취하기 어려워지는 효과도 있었다. 총만 의지하면 접근전에서 불안이 앞서는 경우가 있었다.[18]
기병은 공격적으로 사용하고, 기세를 죽이지 않고 소음으로 혼란을 초래하지 않도록 칼을 무기로 하며, 총격에 의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대열 종심은 얇게 하고, 공격 전 타 병종 원호를 받아 적을 혼란시키고, 재빨리 전속력으로 돌진하며, 교전 후 아군 원호를 받으며 재집결하여 다음 교전에 대비하고, 대전술에서 예비를 다수 확보하여 결정적 순간에 투입한다. 이것이 근세 서유럽 전장에서 병사들이 배운 백병 승마 습격 원리였다.[18]
신체에 닿지 않고 대형을 무너뜨리는 것은 심리 영역이며, 기병 무기로 칼과 창이 선호된 이유이다. 단총은 기병 접근전용 무기로서 칼보다 나은 점도 있어 17세기 전반~중반 접근전에서 단총과 칼이 마주했다. 그러나 무기 비교 외 심리적으로 백병은 인간의 근원적 공포심에 작용하고, 다루기 어려운 창이 선호된 것도 창끝의 심리적 힘이 영향을 미쳤다. 거대한 말과 칼날, 창끝은 심리에 작용하는 공포로 적 규율과 대형을 무너뜨리고 군사적 해를 달성했다. 중기병 승마 습격은 칼만 의지하게 되었지만, 칼 우월성은 명확하지 않았고, 단총이 기병을 약화시킨 것도 아니었다.
2. 1. 고대 ~ 중세
유럽에서는 고대부터 중세에 걸쳐 창은 기병의 주 장비로 사용되었다.[15] 창을 장비한 기병의 돌격은 보병에게 큰 위협이었다.[15] 중세 중기부터 중세 후기의 유럽에서는 랜스를 주요 무기로 하는 중기병에 중장비를 갖춘 기사가 포함되었지만, 중기병이 전부 기사였던 것은 아니며, 많은 수가 직업 군인이었고, 기사를 섬기는 자도 적지 않았다.[16]보병의 부흥과 기병의 쇠퇴는 총기의 도입과 발달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속설이며, 오히려 총기는 보병에 대해 상대적 우위를 유지하려는 기병에게 도입되어 일정한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18] 그 배경에는 중세에도 기사(중장갑 기병)는 무적이 아니었고, 중세가 진행되면서 기사의 역할이 기병창을 휴대하고 승마 습격에 특화되어 갔다는 사실이 있었다. 적의 대열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기승한 기사의 돌격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중세 후기에 이르러 군대가 종종 그들을 중심에 두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기사(중장갑 기병)를 운용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중세 후기의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는 창이나 할버드를 대표로 하는 장병기로 무장한 보병에게 훈련을 시켜 밀집 대형이나 방어 대형을 갖추게 하고, 기사에 의한 승마 습격을 격퇴하는 능력을 획득하고 있었다.[18] 한편 브리튼 제도 사람들은 이 밀집 보병을 깨뜨린다는 관점에서 전훈을 이해하고, 스코틀랜드인과의 여러 전투를 통해 기병이 규율 있는 보병대를 격파하기 위해서는 다른 병기, 특히 투사 병기로 무장한 병종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 결과 독자적인 전술을 발전시켜 궁병과 기병 (때로는 하마하여 밀집 장갑 보병이 되고, 때로는 기승하여 승마 습격을 감행했다)의 유연성 있는 공동이 탄생했으며, 이는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군의 승리의 근간이 되었다.[18]
중세 기사(중장갑 기병)의 절대적인 전장에서의 우위는 잘못된 것이지만, 이를 과도하게 파악하는 것도 잘못이다. 중세 말기인 15세기는 오히려 판금 갑옷 기술이 최종적으로 완성된 시기이며, 중장갑 기병의 힘이 가장 강해지고 기병이 중요시된 시대였다고도 할 수 있다. 당시 군대의 비율을 보면 기병과 보병의 비율이 동일하거나 기병 쪽이 다수인 사례가 적지 않았다. 중장갑 기병의 강화는 "창조"라고 불리는 단위의 강화였으며, 증강된 "창조"는 중장갑 기병 1명과 그를 지원하는 2~5명으로 구성되었다. 프랑스 상비군의 초석이 된 샤를 7세의 칙령군에서는 중장갑 기병 1명, 종기병 1명, 기승 궁병 2명, 종복과 시동 각 1명으로 구성된 총 6명(비전투원 3명 포함)의 기승병으로 구성되었다. 기승 궁병은 하마하여 싸우는 경우가 많았고, 활이 아니라,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노병인 경우도 있었다. 즉, "창조"란 충격력을 사용하는 중장갑 기병을 군의 중핵으로 하면서, 지원 병종인 경기병과 궁병을 조합한 전투 단위이며, 이를 강화하는 것은 총기의 대규모 도입 이전에 유럽이 다시 제병 협동을 더 중시하는 방향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총기는 더욱 진전해 가는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보병뿐만 아니라 16세기 초 이후에는 기병에게도 사용하게 된다.[18]
16세기 초까지 기병은 대략 중장갑 기병, 경장한 갑옷을 착용한 경장갑 기병, 기승 궁병 또는 총병, 그리고 동유럽과 아시아(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경기병으로 분류되었고, 1548년의 저서에서 듀 브레는 기병의 종류로 중장갑 기병, 경장갑 기병, 경기병, 기승 화승총병의 4가지를 들고 있다.[18]
이탈리아 전쟁에서는 기병뿐만 아니라 다양한 병종으로 새로운 전투 방식이 시도되었고, 그중에서도 총기는 이때까지 아르케부스총(소구경으로 경량인 화승총)이라고 불리는 어깨 사격식의, 현대에도 익숙한 소총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중장갑 기병도 장창병도 부족했던 스페인군은 1503년의 체니올라 전투에서, 아직 발전 중인 아르케부스총으로 무장한 보병이라도 야전 진지를 조합하면 중장갑 기병을 격파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1세기 전에 긴 훈련과 일정 이상의 체격을 필요로 했던 장궁병이 달성한 것을 보다 쉽게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의 획기로 간주되지만, 이 전술 자체에는 새로운 점이 거의 없었고, 장궁병의 운용 사례 외에도 반세기 전부터 선진적인 지역에서는 총기를 진지와 조합하여 사용하고 있었다.[18]
2. 2. 17세기 ~ 19세기
창기병은 이 시기에 들어와서 모든 유럽 국가들, 오스만 제국과 인도 군대에서 기병의 주요 역할을 맡았으나, 오스만 제국 군대에서는 전투에서의 기동성을 늘이기 위하여 무거운 갑옷을 버리는 일이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잘 쓰이지 않았다. 폴란드 후사르는 유럽에서 갑옷을 사용하던 마지막 기병이었다. 18세기와 19세기 시기에 기마전에서는 창의 가치를 놓고 광범한 논의를 하였다. 한 가지 주요한 예외는 폴란드에서 나타났는데, 화기 무기들의 지출 비용 때문에 폴란드 소작인들이 창을 다시 전통적인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 창기병들의 랜스는 거의 3m 길이에 3kg 정도였다.[2] 멕시코-미국 전쟁 시기 로스앤젤레스 공성전에서 캘리포니아 창기병대는 미국 해병들을 쫓아버리고 일시적으로 도시를 재함락하였다. 물론 랜스가 돌격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창기병들은 랜스가 근거리에서는 효과가 없는 약점으로 다른 기병에게 상처를 입기 쉽다.[3] 19세기 후반기 많은 기병 부대는 랜스의 초기 쇼크 공격과 군도의 근접전에 유익함을 고려하여 첫 번째 줄에 랜스를 든 기병과 두 번째 줄에 군도를 든 기병대를 배치하였다.
2. 3. 20세기 ~ 현재


1914년 무렵, 영국, 인도, 프랑스, 프로이센, 이탈리아,[4] 칠레, 포르투갈, 일본, 스페인, 오스만, 벨기에, 아르헨티나, 러시아, 샴 군대를 포함한 여러 군대에서 창을 계속 사용했다. 거의 모든 독일 기병대(흉갑 기병, 헝가리 기병, 용기병, 울란)는 주 무기로 강철 튜브 창(''stahlrohrlanze'')을 유지했다.[5] 1914년에도 각 러시아 정규 기병 연대(헝가리 기병, 울란, 용기병)의 기병 절반이 현역에서 창을 휴대했으며, 모든 코사크도 창을 휴대했다.[6]
영국 기병대는 제2차 보어 전쟁 이후 1903년에 의례용을 제외하고 창을 폐지했으나, 1909년부터 1928년까지 현역 무기로 다시 도입되었다.[7][8] 프랑스 육군에는 창 기병 연대가 없었지만, 1914년 26개 용기병 연대와 일부 경 기병 부대는 강철 창을 휴대했다. 프랑스는 이전에 영국 기병대가 사용하던 인도 대나무 창을 시험했지만, 충돌의 충격에 너무 약하다고 평가했다.[9] 1920년까지 존재했던 6개의 이탈리아 ''창기병'' 연대[10]는 균형과 취급 용이성으로 유명한 1870년 모델의 물푸레나무 창을 휴대했다.[11]
(제11 기병 연대 "스페인")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 창과 사브르 중 어느 것이 기병에게 더 효과적인 ''백병전 무기''(근접 무기)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어느 쪽도 현대적인 화기나 포병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일부 군대는 전쟁 기간 동안 계속해서 창을 사용했지만, 1914년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초기에 충돌한 후 서부 전선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동부 전선에서는 기병이 여전히 역할을 수행했으며,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군대에서 창이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12]
1920년대와 1930년대 동안 대부분의 군대에서 현역 창의 사용이 중단되었다. 독일 기병은 1927년까지, 영국 기병은 1928년까지 창을 현역 무기로 유지했다. 다른 일부 군대는 의례적인 목적으로만 창을 든 기병 부대를 유지했다. 폴란드 기병대는 1934년[13] 또는 1937년[14]까지 창을 무기로 버리지 않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까지 훈련 및 의례용으로 계속 사용했다.


일부 현대 기갑 기병 부대는 역사적, 의례적 이유로 여전히 창기병 연대로 지정되어 있다. 스페인(왕립 경호대 호위 기병대의 국왕 창기병 부대와 제11 기병 연대의 부르봉 창기병 그룹), 영국(왕립 창기병), 인도(제2 창기병 (가드너의 기병) 및 제20 창기병), 벨기에(제1/3 창기병 대대), 포르투갈(제2 창기병 연대), 파키스탄, 이탈리아(제5 노바라 창기병, 제6 아오스타 창기병, 제8 몬테벨로 창기병), 호주(제12/16 헌터 강 창기병, 제1/15 로열 뉴 사우스 웨일스 창기병), 아르헨티나(제2 전차 기병 연대 "헤네랄 파스 창기병"), 캐나다(로드 스트라스코나 기병), 칠레(제5 기병 연대 "창기병"), 미국(매사추세츠 주 방위군의 국립 창기병)에 이러한 예가 있다.
창기병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브라질 육군의 ''드라괴스 다 인데펜덴시아''(제1 근위 연대)와 콜롬비아 육군의 정예 군인들은 란세로라고 불린다.
포르투갈 국가 공화 경비대의 기마 부대는 기마 퍼레이드에서 창을 휴대하며,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페루와 같은 남미의 많은 기병 연대도 마찬가지다. 현대 이탈리아의 연대 "란치에리 디 몬테벨로"(8)는 1920년까지 전투 무기로 사용된 창을 휴대하고 퍼레이드 분견대를 열었다.
3. 장비 및 전술
일반적인 창기병의 장비는 기병창, 사브르, 헬멧, 카빈총이었다. 창의 전체 길이는 2미터에서 3미터 전후였으며, 끝에는 종종 작은 깃발이 붙어 있었다.[2] 창기병은 돌격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쳤지만, 창이 백병전에서 사브르에 대항하여 사용될 때 어설프고 쉽게 빗나가는 무기임이 증명되면서 근접전에서 다른 기병대에게 더 취약할 수 있었다.[3] 19세기 말에는 유라시아 군대의 많은 기병 연대가 1열에 주요 무기로 창을 가진 기병과 2열에 사브르만 가진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즉, 창은 초기 충격을 위해, 사브르는 뒤이은 백병전을 위해 사용되었다.
창기병의 주 임무는 보병 대열의 파괴, 그리고 적 보병의 소탕이었다. 창기병은 여러 열의 횡대를 이루어 돌격했다. 정면 돌격은 자살 행위이므로, 여간해서는 실행하지 않았다. 보통은 기동력을 살려 적 보병의 측면 혹은 후면으로 돌아간 다음 돌격했다.
4. 주요 국가별 창기병
창기병은 오스만 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와 인도 군대에서 기병의 주요 역할을 맡았다. 오스만 군에서는 전투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중갑옷을 버리는 경우가 많아 창기병이 잘 쓰이지 않았다. 폴란드 후사르는 유럽에서 갑옷을 사용하던 마지막 기병이었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기마전에서 창의 가치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충격 전술로서의 가치가 부각되었다. 19세기 후반, 많은 기병 부대는 랜스의 초기 충격 공격과 군도의 근접전에서의 유용성을 고려하여 1열에는 랜스, 2열에는 군도를 든 기병을 배치하기도 했다.
1914년에는 영국, 인도, 프랑스, 프로이센, 이탈리아,[4] 칠레, 포르투갈, 일본, 스페인, 오스만, 벨기에, 아르헨티나, 러시아, 샴 군대를 포함한 여러 군대에서 창을 계속 사용했다. 1914년에도 각 러시아 정규 기병 연대 (헝가리 기병, 울란, 용기병)의 기병 절반이 현역에서 창을 휴대했으며, 모든 코사크도 창을 휴대했다.[6]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대부분의 군대에서 창의 사용이 중단되었지만, 일부 국가는 의례용으로 창기병 부대를 유지했다.
현대에도 일부 기갑 기병 부대는 역사적, 의례적 이유로 창기병 연대로 불리기도 한다. 스페인, 영국, 인도, 벨기에, 포르투갈, 파키스탄, 이탈리아, 호주, 아르헨티나, 캐나다, 칠레, 미국 등에 창기병 부대가 남아있다.
4. 1. 폴란드 창기병 (울란)
폴란드 창기병은 '후사르'로도 불리며,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폴란드 군대의 주력 기병이었다. 후사르는 독특한 날개 장식과 중무장, 그리고 강력한 돌격력으로 유명했다. 폴란드 창기병은 다른 국가에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유럽 창기병 발전에 기여하였다.
1920년대에 랜스는 예식용으로나 쓰였고 대부분 국가의 군대에서 무기로서의 활용은 중지되었다. 단, 폴란드 기병은 1934년까지 랜스를 무기로 사용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도 훈련용 무기로 사용되었다.
4. 2. 프랑스 창기병
나폴레옹 전쟁 동안, 창기병은 충격 전술의 가치가 분명해지면서 많은 참전 국가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전쟁 중 폴란드인들은 자발적으로 또는 비자발적으로 여러 군대의 모집원이 되었다. 폴란드 창기병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프랑스 군대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가장 유명한 것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황제 근위대의 제1 연대 샤보 레제-랑시에 드 라 가드 엠페리얼이었다.[2]역사학자 알레산드로 바르베로에 따르면,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 창은 "거의 3m 길이에 무게는 약 3kg였으며, 나무 자루에 강철 촉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들이 "무섭도록 효율적"이었다고 덧붙인다. 파펠로테 앞 고지대에서 전투를 지켜본 프랑스 제1군단 제4사단장 뒤뤼트는 나중에 "나는 창이 칼보다 얼마나 우월한지 이전에 깨달은 적이 없다"고 썼다.[2]
창기병은 돌격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쳤지만, 창이 백병전에서 사브르에 대항하여 사용될 때 어설프고 쉽게 빗나가는 무기임이 증명되면서 근접전에서 다른 기병대에게 더 취약할 수 있었다.[3]
4. 3. 독일 창기병 (울란)
거의 모든 독일 기병대(흉갑 기병, 헝가리 기병, 용기병, 울란)는 주 무기로 강철 튜브 창(''stahlrohrlanze'')을 사용했다.[5]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 창과 사브르 중 어느 것이 기병에게 더 효과적인 근접 무기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현대 화기 및 포병에는 둘 다 적합하지 않았다. 일부 군대는 전쟁 기간 동안 창을 계속 사용했지만, 1914년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초기에 충돌한 후 서부 전선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동부 전선에서는 기병이 여전히 역할을 수행했으며,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군대에서 창이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12]
독일 기병은 1927년까지 창을 현역 무기로 유지했다.
4. 4. 영국 창기병
영국은 제2차 보어 전쟁 이후 1903년에 의례용을 제외하고 창을 폐지했다가, 1909년부터 1928년까지 현역 무기로 다시 도입했다.[7][8]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에는 창과 사브르 중 어느 것이 기병에게 더 효과적인 ''백병전 무기''(즉, 근접 무기)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현대적인 화기 및/또는 포병에는 적합하지 않았다.1920년대와 1930년대 동안 대부분의 군대에서 현역 창의 사용이 중단되었다. 영국 기병은 1928년까지 창을 현역 무기로 유지했다. 다른 일부 군대는 의례적인 목적으로만 창을 든 기병 부대를 유지했다.
일부 현대 기갑 기병 부대는 역사적, 의례적 이유로 여전히 창기병 연대로 지정되어 있다. 영국에는 왕립 창기병이 존재한다.
참조
[1]
서적
Warriors & Weapons of Early Times
[2]
서적
(제목 없음)
[3]
백과사전
Encyclopædia Britannica, Eleventh Edition
[4]
서적
I Lancieri di Milano 1859–1985
Editrice Militare Italiana
1985
[5]
서적
Mons. Retreat to Victory
1960
[6]
서적
The Russian Army 1914–18
[7]
서적
The Cavalry Lance
[8]
서적
Men at Arms Series British Cavalry Equipment 1800–1941
[9]
서적
Les Dragons 1914
Histoire & Collections
2009
[10]
서적
Great Regiments
Weidenfeld and Nicolson
1969
[11]
서적
I Lancieri di Milano 1859–1985
Editrice Militare Italiana
1985
[12]
서적
Russian Hussar
[13]
서적
The Polish Army 1939–45
[14]
서적
The Cavalry Lance
[15]
서적
図解 ナポレオンの時代 武器・防具・戦術大全
レッカ社
[16]
서적
図説 中世ヨーロッパ 武器・防具・戦術百科
原書房
[17]
서적
武器と防具 中国編
新紀元社
[18]
서적
近世近代騎兵合同誌
サークル騎兵閥
[19]
서적
戦闘技術の歴史4 ナポレオンの時代編
創元社
[20]
서적
兵士の歴史大図鑑
創元社
[21]
서적
世界の刀剣歴史図鑑
原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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