푈키셔 베오바흐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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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대독일 국가 사회주의 운동의 투쟁지"를 표방하며 나치당의 기관지로 활동한 신문이다. 1918년 툴레 협회가 뮌헨의 지역 신문을 인수하여 1919년 8월 푈키셔 베오바흐터로 개명되었으며, 1920년 나치당이 인수하여 디트리히 에카르트가 초대 편집장을 맡았다. 발행 부수는 나치당의 성장과 함께 증가하여 1944년에는 170만 부에 달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연합군의 침공으로 1945년 4월 30일 마지막 호가 발행되지 못하고 종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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푈키셔 베오바흐터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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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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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이름 | 푈키셔 베오바흐터 |
로마자 표기 | Völkischer Beobachter |
종류 | 신문 |
언어 | 독일어 |
정치 성향 | 나치당 |
폐간일 | 1945년 4월 30일 |
본사 위치 | 나치 독일 |
발행 부수 | 170만 부 (1944년) |
창간일 | 1920년 12월 25일 |
관련 단체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
슬로건 | "대독일 국가사회주의 운동의 투쟁 신문" (Kampfblatt der nationalsozialistischen Bewegung Großdeutschlands) |
2. 역사
1918년 툴레 협회가 카테 비어바우머의 재정 지원을 받아 뮌헨 베오바흐터를 인수하면서 푈키셔 베오바흐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1] 뮌헨 베오바흐터는 반유대주의적이고 스캔들을 다루는 격주 신문이었다. 1919년 8월, 뮌헨 베오바흐터는 ''푈키셔 베오바흐터''(Völkischer Beobachterde)로 개명되었다. '푈키셔'는 '민족의'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1920년 12월,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막대한 부채에 시달렸다. 툴레 협회는 6만 파피어마르크에 신문을 나치에게 판매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에른스트 룀 소령과 디트리히 에크하르트는 룀의 지휘관인 프란츠 리터 폰 에프 소장에게 독일군 자금으로 신문을 구매하도록 설득했고, 에크하르트의 집과 재산을 담보로 대출이 이루어졌으며, 아우크스부르크의 화학자이자 공장주인 고트프리트 그란델 박사가 보증인으로 나섰다. 나치가 신문을 인수한 후, 에크하르트는 초대 편집인이 되었고, 당의 주요 공식 기관이 되었다.
1921년, 아돌프 히틀러는 회사의 모든 주식을 취득하여 출판물의 유일한 소유자가 되었다.[2] 판매 수익만으로는 신문을 유지할 수 없었기에, 당원들에게 무이자 약속 어음을 판매하고, 헬레네 베흐슈타인과 같은 부유한 후원자들로부터 대출과 보조금을 받으며 유지되었다. 아만(Amann)이 성공적으로 확장한 도서 출판 회사가 나중에 재정적 기반이 되었다. 1926년에 창간된 ''일러스트레이티어 베오바흐터''도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추종자들에게 구독자가 되고 신문을 광고해야 할 의무가 반복적으로 상기되었다.[3]
나치 집권 이후, 선전부를 통해 신문을 읽을 것을 촉구했다.[4][5][6] 요제프 괴벨스는 ''푈키셔 베오바흐터''에 기사를 게재하여, 유대인 반대 조치를 비판한 미국과 공산주의 소련을 공격했다.[7][8]
1945년 4월과 5월 발행된 신문의 마지막 호는 배포되지 않았다.
소련의 고위 외교관 블라디미르 세묘노프에 따르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동독에서 전 나치 지지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들어진 위성 정당인 독일 국민민주당 (동독)의 신문 제목을 당원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푈키셔 베오바흐터''로 부르는 것을 제안했으나, 이 제안은 채택되지 않았다.[9]
2. 1. 초기 역사 (1918년 ~ 1920년)
1918년 툴레 협회가 카테 비어바우머의 재정 지원을 받아 뮌헨 베오바흐터를 인수했다.[1] 뮌헨 베오바흐터는 반유대주의적이고 스캔들을 다루는 격주 신문이었다. 1919년 8월, 뮌헨 베오바흐터는 ''푈키셔 베오바흐터''(Völkischer Beobachterde)로 개명되었다. '푈키셔'는 '민족의'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1920년 12월,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막대한 부채에 시달렸다. 툴레 협회는 6만 파피어마르크에 신문을 나치에게 판매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에른스트 룀 소령과 디트리히 에크하르트는 룀의 지휘관인 프란츠 리터 폰 에프 소장에게 독일군 자금으로 신문을 구매하도록 설득했다. 에크하르트의 집과 재산을 담보로 대출이 이루어졌으며, 아우크스부르크의 화학자이자 공장주인 고트프리트 그란델 박사가 보증인으로 나섰다. 나치가 신문을 인수한 후, 에크하르트는 초대 편집인이 되었다.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나치당의 주요 공식 기관이 되었다.
2. 2. 나치당의 인수와 초기 활동 (1920년 ~ 1923년)
1919년 8월, 반유대주의적이고 스캔들을 다루는 격주 신문이었던 ''뮌헨 베오바흐터''는 ''푈키셔 베오바흐터''(Völkischer Beobachter)로 개명되었다.[13]1920년 12월,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막대한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치의 전신인 독일 노동자당의 초기 당원이었던 에른스트 룀 소령과 아돌프 히틀러의 초기 멘토 중 한 명인 디트리히 에크하르트는 룀의 지휘관인 프란츠 리터 폰 에프 소장에게 독일군 자금으로 신문을 구매하도록 설득했다. 에크하르트의 집과 재산을 담보로 대출이 이루어졌으며, 에크하르트의 친구이자 당의 자금 지원자였던 아우크스부르크의 화학자이자 공장주인 고트프리트 그란델 박사가 보증인으로 나섰다.[13][14] 나치가 신문을 인수한 후, 에크하르트는 초대 편집인이 되었다. 이는 당의 주요 공식 기관이었다.
기간 | 편집장 | 비고 |
---|---|---|
1920년 12월 ~ 1921년 5월 15일 | 디트리히 에크하르트 | 초대 편집장 |
1921년 5월 15일 ~ 1921년 8월 12일 | 헤르만 에세르 | |
1921년 8월 12일 ~ 1923년 | 디트리히 에크하르트 |
2. 3. 발전과 성장 (1923년 ~ 1945년)
1919년 8월, 툴레 협회가 인수하여 『푈키셔 베오바흐터』로 개명된 이 신문은, 1920년 12월에 디트리히 에카르트의 주도로 나치당이 매입하면서 당의 주요 공식 기관이 되었다.[13] 초기에는 뮌헨의 정육점 길드의 업계지였던 Münchener Beobachter|뮌헨 베오바흐터de였다.[13]1921년, 아돌프 히틀러는 회사의 모든 주식을 취득하여 출판물의 유일한 소유자가 되었다.[2] 판매 수익만으로는 신문을 유지할 수 없었기에, 당원들에게 무이자 약속 어음을 판매하고 부유한 후원자들로부터 대출과 보조금을 받으며 유지되었다.[3] 나치 집권 이후, 선전부를 통해 신문을 읽을 것을 촉구했다.[4][5][6] 요제프 괴벨스는 ''푈키셔 베오바흐터''에 기사를 게재하여, 유대인 반대 조치를 비판한 미국과 공산주의 소련을 공격했다.[7][8]
1945년 4월과 5월 발행된 신문의 마지막 호는 배포되지 않았다.[9]
2. 3. 1. 발행 부수 증가
푈키셔 베오바흐터의 발행 부수는 처음 약 8,000부였으나, 루르 점령 기간 동안 수요가 급증하면서 1923년 가을에는 25,000부로 증가했다.[13] 1923년 11월 9일 맥주 홀 폭동 실패 이후 나치당이 금지되면서 신문 발행이 중단되었지만, 1925년 2월 26일 당이 재창당되면서 다시 발행되었다. 발행 부수는 나치 운동의 성공과 함께 증가하여 1931년에는 120,000부 이상, 1941년에는 120만 부, 1944년에는 170만 부에 달했다.[13] 1933년에는 31만 부, 1940년에는 98만 2천 부가 판매되었다.2. 3. 2. 편집진 변화
1919년 8월, 툴레 협회가 인수한 『푈키셔 베오바흐터』의 초대 편집장은 였다.[13] 1921년 5월 15일, 마흐하우스가 사임하고 헤르만 에세르가 잠시 편집장을 맡았다가, 같은 해 8월 12일에 디트리히 에카르트가 편집장이 되었다.[13]1923년 루르 점령 기간 동안 신문 수요가 급증하면서, 발행 부수는 25,000부로 증가했다.[13] 같은 해, 아돌프 히틀러는 에카르트의 알코올 중독이 신문 운영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를 편집자로 임명했다. 히틀러는 에카르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며 "그의 업적은 영원하다!"라고 말했지만, 에카르트는 일간 신문과 같은 큰 사업을 운영할 체질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1923년 11월 9일 뮌헨 폭동 실패 이후 나치당이 금지되면서 신문 발행이 중단되었다가, 1925년 2월 26일 당이 재창당되면서 다시 발행되었다. 1938년에는 가 편집장이 되었고, 그는 이 신문의 마지막까지 편집장 직책을 맡았다.[13]
2. 4. 종말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연합군의 침공으로 발행이 점점 어려워졌다. 1945년 4월 30일에 남독일에서 마지막 호가 인쇄되었지만, 미국군의 침공으로 발행되지는 못했다.[13]3. 주요 내용 및 특징
나치당의 기관지였던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초기에는 반유대주의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를 주로 다루는 격주 신문이었다. 1918년 툴레 협회가 인수하고 1919년 8월에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1920년 12월,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전신)의 초기 당원이었던 에른스트 룀과 디트리히 에크하르트는 독일군 자금을 통해 신문을 인수하도록 설득했다. 에크하르트는 초대 편집장이 되었고, 신문은 당의 주요 공식 기관이 되었다.[2] 1921년, 아돌프 히틀러는 회사의 모든 주식을 취득하여 출판물의 유일한 소유자가 되었다. 이후 당원들에게 무이자 약속 어음을 판매하고 부유한 후원자들에게 대출 및 보조금을 받아 신문을 유지했으며, 1926년 창간된 ''일러스트레이티어 베오바흐터''도 성공을 거두었다.
나치가 권력을 잡는 동안 이 신문은 당 활동을 보도하며 거의 끊임없는 성공을 제시했다.[4] 요제프 괴벨스는 ''푈키셔 베오바흐터''에 유대인 반대 조치를 비판한 미국을 공격하고,[7] 공산주의 소련을 공격하는 기사를 게재했다.[8]
발행 부수는 처음 약 8,000부였지만, 1923년 가을 루르 점령 기간 동안 인기가 높아져 25,000부로 증가했다. 1923년 11월 9일 뮌헨 폭동 이후 나치당이 불법화되면서 신문도 휴간되었지만, 1925년 2월 26일 당이 재결성되면서 복간되었다. 발행 부수는 나치의 부상에 따라 증가하여 1931년에는 12만 부, 1944년에는 170만 부에 달했다. 1945년 4월과 5월에 발행된 신문의 마지막 호는 배포되지 않았다.
3. 1. 나치 이념 선전
나치당의 공식 기관지였던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나치 이념을 대중에게 널리 퍼뜨리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 반유대주의 선전: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반유대주의적인 기사를 지속적으로 게재하여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편견을 조장했다. 요제프 괴벨스는 이 신문을 통해 유대인 반대 조치를 비판한 미국을 공격하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7]
- 반공주의 선전: 공산주의 소련을 공격하는 기사를 게재하여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켰다.[8]
- 나치 지도자 찬양: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지도자들의 활동과 연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이들을 영웅시했다. 나치가 권력을 잡는 동안 당 활동을 보도하며 거의 끊임없는 성공을 제시했다.[4] 히틀러가 공개 연설을 금지당했을 때, 그의 견해를 전파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 여론 조작: 선전부는 신문에 보도될 내용을 수정하여 여론을 조작하고, 포스터에 신문을 읽을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도록 지시했다.[5][6]
이처럼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단순한 신문을 넘어 나치 정권의 강력한 선전 도구로서 기능하며, 독일 국민들의 의식을 나치 이념에 맞게 통제하고 조작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3. 2. 선동적 보도
"대(大)독일 국가 사회주의 운동의 투쟁지"(Kampfblatt der nationalsozialistischen Bewegung Großdeutschlandsde)라고 칭했던 이 신문은, 반(反) 유대주의적인 기사를 통해 대중을 선동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3]이 신문의 기사 중 가장 악명 높은 사례는 1940년 6월 6일 점령하 폴란드 총독 한스 프랑크와의 인터뷰이다.[14]
3. 3. 주요 기사 및 논란
이 신문의 기사 중 가장 악명 높은 것은 1940년 6월 6일 점령하 폴란드 총독 한스 프랑크와의 인터뷰이다.[14] 그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내가 7명의 폴란드인의 총살을 명령했다는 것과 같은 것을 매번 전단으로 알려야 한다면, 필요한 종이를 마련할 나무가 폴란드의 숲에는 없을 것이다."[14]4. 관련 인물
푈키셔 베오바흐터와 관련된 주요 인물과 그 역할은 다음과 같다.
인물 | 역할 및 관계 |
---|---|
아돌프 히틀러 | 1921년 NSDAP 장악 후, 회사 주식 전부를 인수하여 출판물의 유일한 소유자가 됨.[2] 히틀러 연설 금지 시기에는 그의 견해를 전파하는 주요 수단으로 활용됨. |
요제프 괴벨스 | 유대인 반대 조치를 비판한 미국과[7] 공산주의 소련을 공격하는 기사를 게재.[8] |
디트리히 에크하르트 | 독일 노동자당 초기 당원. 에른스트 룀과 함께 프란츠 리터 폰 에프에게 독일군 자금으로 신문 구매를 설득.[2] 인수 후 초대 편집인 역임. |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 1923년 에크하르트 사망 후 편집장 취임. |
막스 아만 | 1922년 4월부터 프란츠 에어 출판사 책임자로 발행 담당.[2] |
에른스트 룀 | 독일 노동자당 초기 당원. 디트리히 에크하르트와 함께 프란츠 리터 폰 에프에게 독일군 자금으로 신문 구매 설득.[2] |
프란츠 리터 폰 에프 | 에른스트 룀과 디트리히 에크하르트의 설득으로 독일군 자금 지원.[2] |
Wilhelm Weiss|빌헬름 바이스de | 1938년부터 신문 폐간 시까지 편집장 역임. |
이들 외에도 신문 초기 재정 지원에 기여한 카테 비어바우머, 대출 보증을 선 고트프리트 그란델, 부유한 후원자였던 헬레네 베흐슈타인 등이 푈키셔 베오바흐터와 관련이 있다.
4. 1. 편집자
초대 편집장은 툴레 협회가 신문을 인수할 당시 주도했던 디트리히 에크하르트였다.[2] 에크하르트는 에른스트 룀과 함께 프란츠 리터 폰 에프 소장에게 독일군 자금으로 신문을 구매하도록 설득한 인물이기도 하다.[2] 1923년 에크하르트가 사망하자 알프레트 로젠베르크가 편집장 자리를 이어받았다.[2] 로젠베르크는 나치당의 주요 이론가 중 한 명으로, 그의 편집 하에 신문은 더욱 반유대주의적이고 국가사회주의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1938년에는 Wilhelm Weiss|빌헬름 바이스de가 편집장으로 취임하여[2] 신문 폐간 시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2]
이름 | 재임 기간 | 비고 |
---|---|---|
디트리히 에크하르트 | 1920년 12월 ~ 1923년 | 뮌헨 폭동 이후 사망 |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 1923년 ~ 1938년 | |
Wilhelm Weiss|빌헬름 바이스de | 1938년 ~ 1945년 | 신문 폐간 시까지 재임 |
4. 2. 나치당 관련 인물
인물 | 역할 및 관계 |
---|---|
아돌프 히틀러 | 1921년 NSDAP를 장악한 후 회사의 모든 주식을 취득하여 출판물의 유일한 소유자가 됨.[2] 히틀러가 공개 연설을 금지당했을 때, 그의 견해를 전파하는 주요 수단. |
요제프 괴벨스 | 유대인 반대 조치를 비판한 미국을 공격하고,[7] 공산주의 소련을 공격하기 위해 푈키셔 베오바흐터에 기사를 게재.[8] |
디트리히 에크하르트 | 독일 노동자당 초기 당원. 에른스트 룀과 함께 프란츠 리터 폰 에프에게 독일군 자금으로 신문 구매를 설득.[2] 신문 인수 후 초대 편집인 역임. |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 1923년 에크하르트 사망 후 편집장 취임. |
막스 아만 | 1922년 4월부터 프란츠 에어 출판사 책임자로서 발행 담당.[2] |
에른스트 룀 | 독일 노동자당 초기 당원. 디트리히 에크하르트와 함께 프란츠 리터 폰 에프에게 독일군 자금으로 신문 구매를 설득.[2] |
프란츠 리터 폰 에프 | 에른스트 룀과 디트리히 에크하르트의 설득으로 독일군 자금을 지원하여 신문 구매.[2] |
Wilhelm Weissde | 1938년부터 신문 마지막까지 편집장 역임. |
5. 한국과의 관계
(빈 문자열)
6. 기타
1920년 12월,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막대한 부채에 시달렸다. 툴레 협회는 6만 파피어마르크에 나치에게 신문을 판매하겠다는 제안을 수락했다. 에른스트 룀 소령과 디트리히 에크하르트는 룀의 지휘관인 프란츠 리터 폰 에프 소장에게 독일군 자금으로 신문을 구매하도록 설득했다. 에크하르트의 집과 재산을 담보로 대출이 이루어졌으며, 아우크스부르크의 화학자이자 공장주인 고트프리트 그란델 박사가 보증인으로 나섰다. 나치가 신문을 인수한 후, 에크하르트는 초대 편집인이 되었다.
신문은 초기 판매 수익만으로는 유지하기 어려웠다. 당원들에게 무이자 약속 어음을 판매하고, 헬레네 베흐슈타인과 같은 부유한 후원자들로부터 대출과 보조금을 받았다. 아만(Amann)이 확장한 도서 출판 회사가 재정적 기반이 되었고, 1926년 창간된 ''일러스트레이티어 베오바흐터''도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추종자들에게 구독 및 신문 광고 의무가 반복적으로 상기되었다.[3]
나치가 권력을 잡는 동안, 신문은 일반 뉴스와 당 활동을 보도하며 거의 끊임없는 성공을 제시했다.[4] 선전 담당자 지침에는 경찰 허용 시 모든 포스터에 신문 선전을 포함하고, 모든 회의를 신문에 발표하되, 보고서는 수정 후 선전부로 보내도록 했다.[5] 포스터는 신문을 읽을 것을 촉구했다.[6] 요제프 괴벨스는 ''푈키셔 베오바흐터''에 유대인 반대 조치를 비판한 미국을 공격하고,[7] 소련을 공격하는 기사를 게재했다.[8]
1945년 4월과 5월 발행된 신문의 마지막 호는 배포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세묘노프에 따르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동독에서 전 나치 지지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들어진 위성 정당인 독일 국민민주당 (동독)의 신문 제목을 ''푈키셔 베오바흐터''로 할 것을 제안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9]
참조
[1]
웹사이트
Volkischer Beobachter 1945
http://www.wartimepr[...]
Wartime Press
[2]
서적
The Unknown Hitler : His Private Life and Fortune
National Press Books
[3]
웹사이트
Völkischer Beobachter – Historisches Lexikon Bayerns
https://www.historis[...]
2023-11-03
[4]
웹사이트
Nazis Battle for Harburg
https://research.cal[...]
[5]
웹사이트
Propaganda
https://research.cal[...]
[6]
문서
Early Nazi Posters
https://research.cal[...]
[7]
웹사이트
Goebbels on the United States (1939)
https://research.cal[...]
[8]
웹사이트
Goebbels on the attack on the Soviet Union (July, 1941)
https://research.cal[...]
[9]
서적
A Failed Empire: The Soviet Union in the Cold War from Stalin to Gorbachev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0]
웹사이트
Writing the News
http://www.ushmm.org[...]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11]
간행물
Football with Friends? How the German Sporting Press Covered the German–Danish Sports Collaboration, 1939–1944
[12]
문서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
https://kotobank.jp/[...]
[13]
문서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https://kotobank.jp/[...]
[14]
서적
Rising '44
Macmil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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