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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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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는 1827년 아순시온에서 태어난 파라과이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844년 육군 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853년 유럽을 방문하여 프랑스 제2제정과 나폴레옹 3세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1862년 파라과이 대통령이 된 후, 1864년 삼국 동맹 전쟁을 일으켰으나,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연합군에 맞서 싸우다 1870년 세로 코라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는 파라과이에서 영웅으로 존경받기도 하고, 삼국 동맹 전쟁을 일으켜 국가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은 어리석은 지도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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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로페스, 1870년경
이름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로마자 표기Francisco Solano López Carrillo
명예 칭호파라과이 원수
출생일1827년 7월 24일
출생지아순시온, 파라과이
사망일1870년 3월 1일
사망지세로 코라, 파라과이
안장 장소국립 영웅 묘지
아버지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
배우자엘리자 린치
정치
직위파라과이 대통령
부통령도밍고 프란시스코 산체스
임기 시작1862년 9월 10일
임기 종료1870년 3월 1일
이전 대통령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
다음 대통령시릴로 안토니오 리바롤라
호세 디아스 데 베도야
카를로스 로이자
잉크로 쓴 필기체 서명
서명
군사
소속파라과이 군대
복무 기간1844년–1870년
계급준장 (1845–1862)
사단장 (1862–1865)
파라과이군 원수 대통령 (1865–)
지휘코리엔테스 파라과이 원정군 사령관 (1845–1846)
미시오네스 주 파라과이 원정군 사령관 (1848–1852)
파라과이 전쟁 파라과이군 총사령관 (1864–1870)
주요 전투플라타 전쟁
대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1845–1852)
크림 전쟁
프랑스군 군사 아타셰 (1854)
파라과이 전쟁
훈장
수상 내역브라질 제국 그리스도 훈장 사령관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사령관
성 마우리치오와 라자로 훈장 사령관
교황청 그리스도 대훈장
파라과이 국가 공로 훈장 대십자

2. 생애와 경력

아버지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가 사망한 1862년,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는 파라과이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10년 임기의 파라과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남긴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하고자 했다.

1864년, 파라과이와 유사한 입장이었던 우루과이의 중립 문제를 둘러싸고 주변국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삼국동맹 전쟁이 발발했다. 로페스는 당초 아르헨티나 연방당 지도자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또한 우루과이에서는 콜로라도당이 브라질 제국의 지원을 받아 블랑코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하며 친브라질 정부가 들어섰다.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 협력하여 브라질에 맞서려던 로페스의 구상은 무너졌고, 오히려 파라과이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삼국 동맹을 상대로 고립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바르톨로메 미트레 대통령은 전쟁이 3개월 안에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전쟁은 5년 이상 이어졌다. 솔라노 로페스는 파라과이 국민을 이끌고 끝까지 항전했으나, 1870년 Battle of Cerro Corá|세로 코라 전투영어에서 브라질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했다.

이 전쟁으로 파라과이는 국토가 황폐화되고 인구의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는 등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로페스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다. 1926년 파라과이 의회는 로페스를 조국을 지킨 영웅으로 인정하며 처음으로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이후 1936년 쿠데타로 집권한 차코 전쟁의 영웅 라파엘 프랑코 대령 역시 로페스의 명예 회복을 공식화했다. 현재 로페스는 '마리스칼 로페스'(Mariscal López|마리스칼 로페스es, 로페스 원수)라는 칭호로 불리며 파라과이 국민들로부터 널리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로 자리 잡았다.

2. 1. 전쟁 이전의 삶

솔라노 로페스는 1827년 아순시온의 마노라(Manorá) 마을에서 태어났다.[4][5] 일부 자료에서는 1826년생이라는 기록도 있다.[6][7][8][9][10][11] 그의 아버지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는 오랜 기간 파라과이를 통치한 독재자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가 사망한 후인 1841년에 파라과이 대통령이 되었다. 아버지는 1844년, 17세의 솔라노 로페스를 파라과이 육군 준장으로 임명했다. 아르헨티나 내전 당시 솔라노 로페스는 아르헨티나 국경에 주둔한 파라과이군의 사령관을 맡았다.[12] 그는 리우데자네이루와 아순시온에서 요새화와 포병을 중심으로 초기 군사 교육을 받았다.

파라과이 공화국의 특명 전권 대사이자 준장인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1853년, 솔라노 로페스는 특명 전권 대사로 임명되어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 왕국 등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 그는 1년 반 이상 유럽에 머물렀으며, 특히 파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파라과이 군대를 위해 다량의 무기, 군수품, 여러 척의 증기선을 구매했다. 또한 유럽의 기술을 도입하여 파라과이 군대를 현대화했는데, 프랑스 법전과 프로이센식 군사 조직 체계를 채택했다.[13] 그는 새로운 철도 건설 계획을 세우고, 파라과이에 프랑스 이민자 정착촌을 건설하려는 외교 활동도 펼쳤으며, 남아메리카 최초로 전신을 설치하기도 했다. 로페스는 프랑스 제2제정을 높이 평가했으며, 특히 황제 나폴레옹 3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14] 이 영향으로 그는 파라과이 군대의 군복을 프랑스 군복과 유사하게 바꾸었고, 나폴레옹 3세의 왕관 복제품을 주문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15] 이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16] 유럽 체류 중 로페스는 파리에서 아일랜드 출신의 배우 엘리자 린치를 만나 파라과이로 데려왔고, 그녀는 그의 동반자이자 사실상의 영부인으로 평생을 함께했다.[28]

1855년 유럽에서 돌아온 솔라노 로페스는 아버지에 의해 전쟁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862년에는 파라과이 부통령으로 승진했다.[17][18]

1859년 11월, 로페스가 타고 있던 파라과이 증기선 '타쿠아리'호가 영국 해군 함선에 나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영국 정부가 자국 시민의 석방을 로페스의 아버지에게 압박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작전을 지휘했던 영국 영사 윌리엄 더걸 크리스티는 이후 에드워드 손튼으로 교체되었는데, 손튼은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보였다.[19]

1862년 아버지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가 사망하자, 솔라노 로페스는 파라과이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는 만장일치로 그를 10년 임기의 파라과이 대통령으로 선포했다.

3. 대통령직

왕좌: 로페스와 그의 내각


대통령에 취임한 로페스는 아버지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가 추진했던 보호무역주의와 국내 개발 중심의 정책 기조를 대부분 이어받았다. 하지만 외교 정책에서는 이전 파라과이 지도자들이 고수했던 엄격한 고립주의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인 국제 정책을 추구했다. 그의 목표는 라플라타 분지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던 아르헨티나브라질 제국 사이에서 파라과이를 신뢰할 수 있는 '제3의 세력'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로페스는 지역의 소국들과 정치적 연합을 구축하려 했으며, 특히 비슷한 처지에 있던 우루과이의 대통령 베르나르도 베로와 긴밀한 동맹 관계를 맺었다. 또한, 로페스는 모든 남성에 대한 의무 군 복무를 포함한 개혁과 함께 파라과이 군의 대규모 확장과 재편을 추진하며 군사력 강화에 힘썼다.

로페스는 아버지로부터 후계자로 일찍부터 인정받아, 1853년에는 전권대사 자격으로 약 1년 반 동안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 서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 이 방문 기간 동안 그는 특히 프랑스 제2제정과 황제 나폴레옹 3세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파라과이로 돌아온 그는 군 책임자가 되자마자 군복을 프랑스식으로 바꾸고, 나폴레옹 3세의 왕관 복제품을 만들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또한, 파리에서 아일랜드인 고급 매춘부(콜티잔)였던 엘리사 린치를 만나 그녀와 함께 귀국했다.[28]

이러한 로페스의 적극적인 대외 정책과 군비 증강은 주변국과의 긴장을 고조시켰고, 결국 1864년 우루과이 문제를 둘러싸고 삼국동맹 전쟁이 발발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 전쟁에서 파라과이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삼국 동맹을 상대로 싸웠으며, 5년 이상 지속된 전쟁 끝에 로페스는 1870년 에서 전사했다.

전쟁 직후, 국토가 황폐화되고 인구의 절반 이상을 잃은 파라과이에서 로페스는 나라를 파멸로 이끈 독재자로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1926년 파라과이 의회에서 조국을 방어한 영웅으로서 처음 명예가 회복되었고, 1936년 쿠데타로 집권한 차코 전쟁의 영웅 라파엘 프랑코 대령에 의해 다시 한번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다. 현재 파라과이에서는 '마리스칼 로페스'(로페스 원수)라는 칭호로 불리며 국민적 영웅으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3. 1. 삼국동맹 전쟁의 발발



대통령에 취임한 솔라노 로페스는 전임자들이 추진했던 보호무역주의와 국내 개발 정책을 대부분 계승했다. 그러나 그는 파라과이 지도자들이 전통적으로 선호했던 엄격한 고립주의 외교 정책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인 국제 정책을 추구했다. 그의 목표는 라플라타 분지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는 아르헨티나브라질 제국 사이에서 파라과이를 신뢰할 수 있는 '제3의 세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로페스는 파라과이가 지역 패권을 다투는 강대국들과 경쟁하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한 소국들의 정치적 연합을 구상했다. 그는 우루과이의 대통령 베르나르도 베로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베로 역시 양대 강국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에 두 지도자는 빠르게 동맹을 결성했다. 로페스는 모든 남성에 대한 의무 군 복무 제도를 도입하는 등 파라과이 군의 대대적인 확장과 개편에 착수했다. 이를 통해 파라과이는 당시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잘 훈련된 군대 중 하나를 보유하게 되었으나, 장비는 부족한 상태였다. 프랑스와 영국에서 신무기를 구매했지만, 전쟁 발발 후 동맹국들의 봉쇄로 인해 실제 파라과이에 도착하지는 못했다.

솔라노 로페스의 마지막으로 알려진 사진, 사진작가 도메니코 파로디가 1870년경 촬영


1863년, 파라과이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브라질 제국은 베난시오 플로레스가 이끄는 콜로라도당의 반란을 군사적, 정치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 반란은 블랑코당 정부의 베르나르도 베로와 그의 후계자 아타나시오 아기레를 겨냥한 것이었다. 궁지에 몰린 우루과이 블랑코당 정부는 파라과이에 여러 차례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로페스는 브라질에 서한을 보내 우루과이 영토 점령은 파라과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라며 아기레 정부 지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브라질은 이 경고를 무시하고 1864년 10월 12일 우루과이를 침공했다. 이에 로페스는 즉각 대응하여 아순시온 항구에 정박 중이던 브라질 상선 '마르케스 데 올린다'(Marquês de Olindapt)호를 나포하고, 배에 타고 있던 브라질 마토 그로소 주지사를 투옥했다. 다음 달인 1864년 12월, 로페스는 공식적으로 브라질에 선전포고하고 마토 그로소 주로 군대를 파견했다. 파라과이군은 코룸바 시를 점령하고 약탈했으며, 막대한 양의 무기와 탄약, 특히 화약을 확보하여 최소 1년간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물자를 얻었다.[20] 하지만 주도인 쿠이아바까지 점령하지는 못했다.

이후 로페스는 아기레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우루과이에 군대를 보내려 했으나, 아르헨티나 영토 통과를 요청했을 때 바르톨로메 미트레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 그 사이 브라질은 아기레 정부를 전복시키고 자신들의 동맹인 베난시오 플로레스를 대통령으로 세워 우루과이를 사실상 종속국으로 만들었다.[12]

로페스는 의회를 소집하여 자신에게 파라과이 군대의 '원수 대통령'(Mariscal Presidentees) 칭호와 전시 특별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는 대원수에 해당하는 계급으로, 로페스는 생전에 이 계급에 오른 유일한 파라과이인이었다. 1865년 4월 13일, 로페스는 코리엔테스 만에서 아르헨티나 군함 두 척을 나포하며 아르헨티나에도 선전포고했다. 다음 날에는 코리엔테스 시를 점령하고 아르헨티나 지지자들로 구성된 임시 정부를 세웠으며, 파라과이가 코리엔테스주엔트레리오스주를 병합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응하여 1865년 5월 1일, 브라질은 아르헨티나, 그리고 브라질의 영향력 하에 들어간 우루과이와 함께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파라과이의 기존 정부를 전복시키고, 파라과이에 무기나 전쟁 물자가 남지 않을 때까지 공동으로 전쟁을 수행할 것을 규정했다. 또한 전쟁 후 파라과이 영토의 절반 이상을 연합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조약의 내용은 비밀에 부쳐졌으나, 이후 공개되면서 파라과이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불평등 조약이라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고, 파라과이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기도 했다.[21] 이로써 파라과이는 세 나라를 상대로 한 힘겨운 전쟁, 즉 삼국동맹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3. 2. 삼국동맹 전쟁



취임 후 로페스는 전임자들의 보호무역주의와 내부 개발 정책을 대체로 계승했지만, 외교 정책에서는 큰 변화를 보였다. 이전 지도자들이 선호했던 엄격한 고립주의에서 벗어나, 라플라타 분지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제국 사이에서 파라과이를 신뢰할 만한 '제3의 세력'으로 만들려는 야심 찬 국제 정책을 추진했다.

로페스는 파라과이가 지역 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한 소국들의 정치적 연합을 모색했다. 그는 비슷한 처지에서 강대국의 위협을 느끼던 우루과이 대통령 베르나르도 베로와 동맹을 맺었다. 로페스는 모든 남성에 대한 의무 군 복무를 도입하는 등 파라과이 군대의 대대적인 확장과 재편에 착수했다. 이를 통해 파라과이는 당시 지역에서 가장 잘 훈련된 군대 중 하나를 보유하게 되었으나, 프랑스와 영국에서 주문한 신무기는 전쟁 발발 후 동맹국들의 해상 봉쇄로 인해 제대로 도착하지 못했다.

1863년, 브라질 제국우루과이 내전에서 베난시오 플로레스가 이끄는 콜로라도당 반군을 지원하며 베르나르도 베로의 블랑코당 정부를 압박했다. 로페스는 브라질의 우루과이 영토 점령은 파라과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블랑코당 정부 지지 의사를 밝혔으나, 브라질은 이를 무시하고 1864년 10월 우루과이를 침공했다. 이에 로페스는 아순시온 항구에 정박 중이던 브라질 상선 '마르케스 데 올린다'호를 나포하고 브라질 마토 그로소 주지사를 투옥했으며, 12월에는 브라질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하고 마토 그로소주를 침공했다. 파라과이군은 코룸바를 점령하고 약탈했으며, 막대한 양의 무기와 탄약을 확보했으나[20] 주도인 쿠이아바까지 점령하지는 못했다.

로페스는 우루과이의 아타나시오 아기레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려 했으나, 아르헨티나 영토 통과 요청은 대통령 바르톨로메 미트레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 사이 브라질은 아기레 정부를 전복시키고 친브라질 성향의 베난시오 플로레스를 대통령으로 세워 우루과이를 사실상 위성 국가로 만들었다.[12]

이에 파라과이 의회는 로페스에게 '원수 대통령'(Mariscal Presidente) 칭호와 전시 특별 권한을 부여했다. 1865년 4월 13일, 로페스는 아르헨티나에 선전포고하고 다음 날 코리엔테스를 점령했으며, 파라과이가 코리엔테스주엔트레리오스주를 병합한다고 선언했다.

1865년 5월 1일, 브라질, 아르헨티나, 그리고 새로 들어선 우루과이의 플로레스 정부는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로페스 정부가 전복되고 파라과이에 무기가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며, 전쟁 후 파라과이 영토의 절반 이상을 분할 점령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가혹한 조약 내용은 공개되자 국제적인 비난을 샀고, 오히려 파라과이에 대한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21]

야타이티 코라 회담


아르헨티나 대통령 미트레는 전쟁이 3개월 안에 끝날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전쟁은 5년 이상 지속되었다. 로페스는 초반에 계획했던 아르헨티나 연방주의자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의 지원 확보에 실패하고, 우루과이마저 적으로 돌아서면서 삼국 동맹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전쟁 초기인 1865년 6월 11일, 리아추엘로 해전에서 파라과이 해군이 브라질 해군에게 궤멸당하면서 파라과이는 주요 강들의 제해권을 상실하고 아르헨티나에서 철수해야 했다.

1866년 9월, 로페스는 미트레에게 야타이티 코라 회담을 제안하며 평화 협상을 시도했다.[22] 그러나 미트레는 삼국 동맹 조약의 완전한 이행을 요구했고, 로페스가 이를 거부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전황이 악화되자 로페스는 극도의 편집증에 사로잡혀 내부 반대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 1868년에는 자신의 형제와 매제, 내각 각료, 군 장교, 성직자, 외국 외교관 등 수백 명의 주요 인사들을 음모 혐의로 체포하여 처형했다(산 페르난도 학살). 심지어 70세의 어머니에게 매질을 가하고 처형을 명령하기도 했다.[23] 전쟁 중 간호사로 활약하며 '미국의 잔다르크'라 불린 라모나 마르티네스도 로페스에 의해 노예 신세가 되기도 했다.[24]

로페스는 국민을 이끌고 끝까지 저항했으나, 연합군의 압박 속에 계속 밀려났다. 1869년 수도 아순시온이 함락된 후에도 북부 산악 지대에서 항전을 이어갔지만, 결국 1870년 3월 1일 세로 코라 전투에서 브라질군에게 포위되어 전사했다. 그의 죽음으로 삼국 동맹 전쟁은 막을 내렸다.

전쟁으로 파라과이는 국토가 황폐화되고 인구의 절반 이상을 잃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 직후 로페스는 침략 전쟁을 일으켜 나라를 파멸시킨 독재자로 평가받았으나, 1926년 파라과이 의회에서 처음으로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고, 1936년 쿠데타로 집권한 차코 전쟁의 영웅 라파엘 프랑코에 의해 다시 한번 명예가 회복되었다. 현재 파라과이에서는 '마리스칼 로페스'(로페스 원수)로 불리며 조국을 지킨 영웅으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3. 2. 1. 세로 코라 전투

연합군은 1869년 1월 1일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을 점령했고, 로페스와 그의 군대 및 정부의 남은 세력은 시골 지역으로 밀려났다. 1869년 말까지 로페스는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파라과이 북쪽 국경까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1870년 2월 14일 세로 코라 전투에 도착했다. 로페스를 추격하기 위해 두 개의 부대가 파견되었는데, 당시 그는 북쪽 숲에서 약 200명의 병력과 함께 있었다. 상당한 규모의 브라질군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접하자, 로페스와 함께 있던 일부 관리들은 그를 버리고 조제 안토니우 코레이아 다 카마라 장군이 지휘하는 연합군에 합류하여 로페스의 위치를 알리는 정찰병 역할을 했다.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의 죽음


이 소식을 들은 로페스는 남은 참모 장교들과 마지막 전쟁 회의를 열었다. 다가오는 전투에 대한 행동 방침, 즉 열대 우림 언덕으로 도망칠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회의 결과, 그들은 끝까지 싸워 전쟁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브라질군은 1870년 3월 1일 로페스의 진영에 도착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로페스는 나머지 군대와 분리되었고, 그의 보좌관과 몇 명의 장교만이 그를 따랐다. 그는 창에 배를 찔리고 칼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어 혼자서는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그들은 로페스를 아키다방구이 강으로 데려갔으나, 증원군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버려두고 떠났다.

로페스가 보좌관과 단둘이 있을 때, 카마라 장군이 6명의 병사와 함께 도착하여 그에게 항복을 요구하며 목숨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로페스는 이를 거절하고 "¡Muero con mi patria!"(조국과 함께 죽겠다!)라고 외치며 칼로 카마라를 공격하려 했다. 카마라는 병사들에게 로페스를 무장 해제하라고 명령했고, 로페스는 그를 제압하려던 병사들과 싸우던 중 사망했다. 이 사건은 삼국 동맹 전쟁의 종식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4. 유산

파라과이 내에서는 그가 끝까지 군대를 이끈 용감한 지도자였는지, 아니면 파라과이를 승리할 수 없는 전쟁으로 이끌어 국가를 파멸 직전까지 몰아넣은 어리석은 지도자였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이러한 논쟁은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너 독재 정권 시절 국가 역사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이 공식적으로 채택되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반면, 일부 라틴 아메리카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그를 강력한 이웃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야심에 맞서 작은 나라의 권리를 지키려 했던 투사로 평가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솔라노 로페스와 그의 아버지가 외세 자본의 영향에서 벗어난 "유일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로서 파라과이를 지키려 했던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랑시아의 유산을 계승했다고 주장한다.[25]

파라과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로페스의 최후의 말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두 가지 주요 주장이 있는데, 하나는 "''Muero por mi patria''"("나는 내 조국을 위해 죽는다")이고 다른 하나는 "''Muero con mi patria''"("나는 내 조국과 함께 죽는다")이다. 후자는 루이스 바스 데 카몽이스의 유언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후안 실바노 고도이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로페스 원수는 자신과 함께 파라과이의 독립도 사라질 것이라는 깊은 확신 속에서 죽었다. 그는 연합군이 아순시온에 자국 정부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고 삼국 동맹군 편에서 싸운 파라과이인들로 구성된 "임시 정부"를 세웠다는 사실을 알고 이러한 확신을 굳혔다.



아순시온에 있는 솔라노 로페스의 흉상


3월 1일은 파라과이의 국경일인 "영웅의 날"(Día de los Héroes|디아 데 로스 에로에스es)로, 솔라노 로페스의 희생을 기리는 날이다. 이는 독립기념일 다음으로 중요한 국경일로 여겨진다. 로페스는 오늘날까지도 파라과이에서 가장 위대한 국민 영웅 중 한 명으로 추앙받으며, 그의 유해는 아순시온의 영웅들의 국립 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아순시온에서는 2008년 파라과이 총선에서 페르난도 루고가 승리했을 때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면 시민들이 국기를 들고 국립 묘지 앞 거리에 모여 축하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산티아고 페냐 파라과이 대통령과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외무장관이 솔라노 로페스의 초상화 앞에서 만나는 모습, 2024년 2월


2007년,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제2기갑포병연대의 이름을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원수의 이름으로 명명했다.[26] 이 행사에는 양국의 국가가 연주되었고 양국 군 고위 장성들이 참석했다. 당시 아르헨티나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벤디니 중장은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라과이 육군과 아르헨티나 육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파라과이 육군 사령관의 방문으로 영광을 누리는 아르헨티나 육군은 우리 민족의 아버지들, 위대한 조국을 꿈꿨던 호세 데 산마르틴 장군과 바로 로페스 원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26]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로페스 원수는 부하들에게 땅에 대한 정신과 사랑을 불어넣어 항복하기보다는 죽음을 택하게 했습니다. 그는 지도자, 선구자, 그리고 민중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아는 사람의 모범입니다. 저는 이 포병 부대의 병사들이 이 용감한 파라과이 군인의 모범을 따르고 부대 이름에 걸맞게 행동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26]



행사가 끝난 후, 파라과이 육군 사령관은 해당 부대에 로페스의 초상화를 증정했다. 그러나 바르톨로메 미트레가 창간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수 성향 신문 ''라 나시온''은 사설에서 "독재자에 대한 부조리한 경의"라는 제목 아래 "아르헨티나 국기를 짓밟은 독재자의 이름을 군 부대에 붙이는 것은 프랑스나 폴란드가 연대 중 하나를 '아돌프 히틀러'라고 부르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다"고 비판했다.[27]

삼국동맹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사망하는 등 극심한 고난을 겪었지만, 로페스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했다. 1926년 파라과이 의회는 처음으로 조국을 지킨 영웅으로서 로페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1936년 쿠데타로 집권한 차코 전쟁의 영웅 라파엘 프랑코 대령 역시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오늘날 그는 '마리스칼 로페스'(로페스 원수)로 불리며 파라과이 국민들로부터 널리 존경받고 있다.

참조

[1] 서적 The Paraguayan War 1864–1870: The Triple Alliance at Stake in la Plata Bloomsbury Publishing
[2] 웹사이트 El Prendedor de Madame Lynch http://www.abc.com.p[...] 2019-05-05
[3] 서적 The history of Paraguay, with notes of personal observations, and reminiscences of diplomacy under difficulties Lee & Shepard; Lee, Shepard, and Dillingham
[4] 웹사이트 Francisco Solano López https://www.portalgu[...] 2023-06-11
[5] 뉴스 La sangre guaraní de Belgrano, Bioy y el Che http://blogs.lanacio[...] La Nacion 2016-12-28
[6] 서적 Solano López: soldado de la gloria y el infortunio Ediciones Nizza
[7] 서적 Francisco Solano López and the Ruination of Paraguay: Honor and Egocentrism Rowman and Littlefield
[8] 서적 To the Bitter End: Paraguay and the War of the Triple Alliance Greenwood
[9] 서적 Tragedy of Paraguay Knight
[10] 서적 The Paraguayan War: Causes and Early Conduct https://library.oape[...] University of Calgary Press
[11] 웹사이트 Francisco Solano López https://www.britanni[...] Encyclopedia Britannica
[12] 서적 Paraguay: A Country Study GPO for the Library of Congress
[13] 서적 Paraguay und Europa. Die diplomatischen Beziehungen unter Carlos Antonio Lopez und Francisco Solano Lopez 1841–1870 Colloquium Verl.
[14] 문서 Hanratty
[15] 서적 Power Mad! Metafora
[16] 서적 I Die with My Country: Perspectives on the Paraguayan War, 1864–1870 Nebraska Press
[17] 웹사이트 Historical list http://www.abc.com.p[...] ABC Digital 2012-02-29
[18] 웹사이트 Gallery http://vicepresidenc[...] Vicepresidency of Paraguay 2012-06-29
[19] 웹사이트 TRATADO DE LAS PUNTAS DEL ROSARIO (Guerra del Paraguay) http://www.lagazeta.[...]
[20] 서적 History of Paraguay Lee and Shepard, Publishers
[21] 서적 The War in Paraguay: With a Historical Sketch of the Country and Its People and Notes Upon the Military Engineering of the War Longmans, Green, and Company
[22] 서적 Breve Historia del Paraguay El Lector
[23] 서적 Power Mad! Metafora
[24] bachelorThesis Construcción de identidades, imaginarios y representaciones en el "Álbum Grafico de la República del Paraguay" : La creación de una idea de nación https://dspace.unila[...] ORUÉ POZZO, Anibal 2019-12-18
[25] 서적 Open Veins of Latin America Monthly Review Press
[26] 웹사이트 Bautizan unidad militar Argentina en honor al prócer paraguayo Mariscal Francisco Solano López http://www.soldadosd[...] 2008-01-22
[27] 뉴스 La Nación 2007-12-06
[28] 문서 伊藤(20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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