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리트비체 호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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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리트비체 호수 사건은 1991년 3월 31일,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초기 플리트비체 호수 지역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이다. 크로아티아 경찰이 플리트비체 호수 지역을 탈환하려는 과정에서 SAO 크라이나군과 교전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크로아티아 경찰관 요시프 요비치가 사망하며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첫 번째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건 이후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개입하여 완충 지대를 설정했으나,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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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트비체 호수 사건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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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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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분쟁 명칭 | 플리트비체 호수 사건 |
다른 명칭 | (크로아티아어) (크로아티아어) 피의 플리트비체 성주간 |
일부 |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일부 |
날짜 | 1991년 3월 31일 |
장소 |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호수 |
결과 | 크로아티아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2 | [[File:Flag of Serbian Krajina (1991).svg|22px|border|SAO Krajina]] SAO 크라이나 |
지휘관 | |
지휘관 1 | 요시프 루치치 |
지휘관 2 | [[File:Flag of Serbian Krajina (1991).svg|23px|border|SAO Krajina]] 밀란 마르티치 |
병력 규모 | |
병력 1 | 약 300명 |
병력 2 | 약 100명 |
사상자 | |
사상자 1 | 1명 사망 7명 부상 |
사상자 2 | 1명 사망 13명 부상 29명 포로 |
관련 정보 |
2. 배경
1990년 크로아티아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이 승리하면서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간의 민족 갈등이 심화되었다. 유고 인민군은 크로아티아의 저항을 약화시키기 위해 영토방위군의 무기를 압수하였다. 1990년 8월 17일,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들이 무장 봉기를 일으키면서 민족 갈등은 반란으로 확산되었다.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의 크로아티아 독립 정책에 반발한 세르비아계는 1990년 7월 세르비아 국가위원회를 수립하였다. 밀란 바비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밀란 마르티치는 준군사 민병대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훗날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의 정치, 군사적 지도자가 되었다.
1991년 초, 크로아티아는 정규군이 없어 경찰 병력을 2만 명으로 늘렸다. 이 중 3천 명은 특수경찰이었고, 9천~1만 명의 예비경찰이 있었지만 무기가 부족했다.
세르비아계 지도자들은 1991년 3월 25일 플리트비체 호수에서 정치 집회를 열어 호수 지역을 SAO 크라이나에 편입할 것을 요구했다. 3월 28일, SAO 크라이나 특수경찰이 이 지역을 장악하고, 무장한 민간인의 도움으로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크로아티아 공무원들을 내쫓았다. 언론인 팀 주다는 이 움직임이 리카 및 바노비나 지역의 세르비아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를 장악하려는 전략적 목표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2. 1. 1990년 크로아티아 총선과 민족 갈등 심화
1990년 크로아티아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이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다수당이 되면서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간의 민족 갈등이 심화되었다. 유고 인민군은 크로아티아의 저항을 약화시키기 위해 크로아티아 영토방위군의 무기를 압수하였다. 1990년 8월 17일,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들이 무장 봉기를 일으키면서 민족 갈등은 반란으로 확산되었다. 이 반란은 크닌 인근 달마티아 연안의 세르비아계 인구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슬라보니아 등지로 확대되었다.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의 대통령의 크로아티아 독립 정책에 반발한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들은 1990년 7월 세르비아 국가위원회를 수립하였다. 이 위원회는 크닌 서남쪽 작은 마을의 치과의사였던 밀란 바비치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고, 크닌 경찰서장 밀란 마르티치는 준군사 민병대를 설립하였다. 이 두 사람은 훗날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 밀집 지역을 통합하여 독립을 선포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의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가 되었다.
1991년 초, 크로아티아는 정규군이 없어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경찰 요원을 2만 명으로 약 두 배 가까이 늘렸다. 이 중 가장 효과가 좋았던 것은 군대 조직을 따른 12개 대대 3천 명의 크로아티아 특수경찰 병력이었다. 또한 크로아티아 지역별로 예비경찰 16개 대대, 10개 중대 9천-1만 명을 수립하였으나 무기가 부족했다.
2. 2. 로그 혁명과 세르비아계의 반발
1990년 크로아티아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이 다수당이 되면서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간의 민족 갈등이 심해졌다. 유고 인민군은 크로아티아의 저항을 약화시키기 위해 영토방위군의 무기를 압수하였다. 1990년 8월 17일,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이 무장 봉기를 시작하면서 민족 갈등은 반란으로 확산되었다. 반란은 크닌 인근 달마티아 연안의 세르비아계 인구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슬라보니아 등지로 확대되었다.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은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의 대통령의 크로아티아 독립 정책에 반발하며 1990년 7월 세르비아 국가위원회를 수립하였다. 이 위원회에서 밀란 바비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밀란 마르티치는 준군사 민병대를 설립하였다. 이 두 사람은 나중에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의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가 되었다.
1991년 초, 크로아티아는 정규군이 없어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경찰 요원을 2만 명으로 늘렸다. 이 중 3천 명의 크로아티아 특수경찰 병력이 12개 대대로 구성되어 가장 효과적이었다. 또한, 예비경찰 16개 대대와 10개 중대(9천~1만 명)가 있었으나 무기가 부족했다.
세르비아계 지도자들은 세르비아계의 통제하에 영토를 통합하기 위해 1991년 3월 25일 플리트비체 호수에서 정치 집회를 열어 SAO 크라이나에 호수 지역을 편입할 것을 요구했다. 1991년 3월 28일, SAO 크라이나 특수경찰이 이 지역을 장악하고, 무장한 민간인의 도움으로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크로아티아 공무원들을 내쫓았다. SAO 크라이나가 플리트비체 호수에 주둔시킨 병력은 대략 백여 명이었다. 언론인 팀 주다흐는 이 움직임이 리카 및 바노비나 지역의 세르비아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를 장악하려는 전략적 목표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2. 3. 크로아티아의 군사력 강화 노력
1991년 초, 크로아티아는 정규군이 없어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경찰력 규모를 약 20,000명으로 두 배 늘렸다. 이 부대에서 가장 효과적인 부분은 군사 조직을 채택한 12개의 대대에 배치된 3,000명 규모의 특수 경찰이었다. 또한, 9,000~10,000명 규모의 지역별로 조직된 예비 경찰이 있었는데, 이들은 16개 대대와 10개 중대로 구성되었지만 무기가 부족했다.2. 4. 플리트비체 호수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
1990년 크로아티아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이 다수당이 되면서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간의 민족 갈등이 심해졌다. 유고 인민군은 크로아티아의 저항을 약화시키기 위해 크로아티아 영토방위군의 무기를 압수하였다. 1990년 8월 17일,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들이 무장 봉기(로그 혁명)를 일으키면서 민족 갈등은 더욱 커졌다. 이 봉기는 크닌 인근의 달마티아 연안,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슬라보니아 등 세르비아계 인구가 많은 지역을 중심으로 확대되었다.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들은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의 크로아티아 독립 정책에 반발하며 1990년 7월 세르비아 국가위원회를 수립하였다. 이 위원회는 크닌 서남쪽 작은 마을의 치과의사였던 밀란 바비치를 대통령으로, 크닌 경찰서장 밀란 마르티치를 준군사 민병대 지휘관으로 선출했다. 이들은 훗날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 밀집 지역을 통합하여 독립을 선포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의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가 되었다.
1991년 초, 크로아티아는 정규군이 없어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경찰 병력을 2만 명으로 늘렸다. 이 중 3천 명은 특수경찰 병력이었고, 12개 대대로 편성되어 군대 조직을 따랐다. 또한 16개 대대와 10개 중대로 구성된 9천~1만 명의 예비경찰이 있었지만, 무기가 부족했다.
세르비아계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는 영토를 통합하기 위해 1991년 3월 25일 플리트비체 호수에서 정치 집회를 열고 SAO 크라이나에 호수 지역을 편입할 것을 요구했다. 3일 후인 3월 28일, SAO 크라이나 특수경찰이 이 지역을 장악하고 무장한 민간인의 도움으로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크로아티아 공무원들을 쫓아냈다. SAO 크라이나가 플리트비체 호수에 주둔시킨 병력은 약 100명 정도였다.
이 지역은 인구 밀도가 낮았고 세르비아인들에게 명백한 위협은 없었다. 언론인 팀 주다는 이러한 움직임이 리카 및 바노비나 지역의 세르비아 마을을 연결하는 공원 남북을 잇는 도로를 장악하여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3. 전개
크로아티아는 플리트비체 호수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자그레브 안팎의 루치코 대테러부대, 라키테, 슬레메 특수경찰과 카를로바츠, 고스피치 지역 경찰력을 추가로 투입했다. 요시프 루치치 지휘 하에 경찰 병력은 버스, 승합차, 병력수송장갑차를 이용해 플리트비체 호수로 진격했다. 1991년 3월 30일에서 31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루츠코 부대가 코라나강 다리를 장악했고, 리치코 페트로보 셀로를 통한 보조병력과 류보노 고개를 장악한 쿠므로베츠 특수경찰부대가 주력 부대의 측면을 엄호했다. 크로아티아가 동원한 총 공격군은 약 300명이었다.
1991년 부활절 오전 7시 직전, 경찰 부대는 플리트비체 호수 인근 SAO 크라이나군 바리케이드에서 기습당했다. SAO 크라이나군은 크로아티아 경찰 차량을 공격하다 2시간 30분 후 국립공원 우체국으로 후퇴했다. 크로아티아군은 깊은 눈 때문에 방해를 받았지만 6명의 부상자를 내며 진격, 오전 11시에 목표를 달성했다. 작전 완료 직전 요시프 요비치가 SAO 크라이나군 기관총에 맞아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최초의 크로아티아군 전사자가 되었다.
직후 유고슬라비아 공군이 밀 Mi-8 헬리콥터를 보내 양측 부상자를 수송하고 1시간 30분 후 철수했다. 이는 안톤 투스 유고 공군 최고지휘관이 요시프 볼코바츠 크로아티아 내무부 장관 요청에 따라 파견한 것이었다. 플리트비체 호수 전투가 끝나고 남쪽 코레니차에서 산발적인 총격이 있었다. 같은 날 오후 플리트비체 호수에 크로아티아 경찰서가 설치되고 토미슬라브 일리치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경찰서에는 고스피치에서 재배치된 경찰관 90명이 배치되었다.
같은 날 저녁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직은 비상회의를 열어 충돌을 논의했다. 세르비아계 대표 보리사브 요비치 주장으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개입, 지역 장악 및 추가 전투를 막기로 했다. 세르비아 의회도 긴급의회를 열어 충돌을 전쟁 명분으로 간주, 크라이나 세르비아계에 "모든 필요한 지원"을 결의했다. 다음 날 SAO 크라이나는 호수 지역을 세르비아 영토로 편입, 세르비아 헌법과 법률 준수를 결의했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유고슬라비아 연방 유지를 위한 크로아티아 독립 저지 목적과 유고 인민군을 통한 크로아티아 정부 전복 시도를 비난했다.
3. 1. 크로아티아 경찰의 플리트비체 호수 탈환 작전
크로아티아는 플리트비체 호수 지역을 되찾기 위해 자그레브를 중심으로 루치코, 라키테, 슬레메 특수 경찰 부대와 카를로바츠, 고스피치에서 차출한 경찰 병력을 추가로 투입했다. 요시프 루치치가 지휘하는 경찰 병력은 버스, 승용차, 장갑차를 이용해 플리트비체 호수 지역으로 이동했다.루치치가 직접 지휘한 라키테 특수 경찰 부대(SPU) 180명은 짙은 안개 속에서 자그레브에서 오는 주요 도로를 따라 코라나강 다리를 통해 도착했다. 1991년 3월 30일에서 31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루치코 부대가 이 다리를 확보했다. 보조 부대는 리치코 페트로보 셀로를 통해 플리트비체 호수로 접근했고, 쿠므로베츠 SPU는 호수와 고스피치 사이 지역에 배치되어 주력 부대의 우익을 확보하기 위해 류보보 고개를 점령했다. 총 공격 병력은 약 300명이었다.
1991년 부활절인 3월 31일 오전 7시 직전, 진격하는 경찰 호송대는 플리트비체 호수 근처 SAO 크라이나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에서 매복 공격을 받았다. SAO 크라이나군은 크로아티아 경찰 차량을 공격했고, 2시간 30분 후 국립공원 우체국으로 후퇴했다. 깊은 눈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크로아티아군은 6명의 부상자를 내며 진격하여 오전 11시에 목표를 달성했다. 작전 완료 무렵, 요시프 요비치가 후퇴하는 SAO 크라이나군을 엄호하던 기관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에서 크로아티아군의 첫 번째 전사자가 발생했다.
그 직후, 유고슬라비아 공군은 양측의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밀 Mi-8 헬리콥터를 보냈고, 1시간 30분 후 현장을 떠났다. 이 헬리콥터는 당시 유고슬라비아 공군 사령관이었던 안톤 투스 대장의 지시에 따라 요시프 볼코바치 크로아티아 내무부 장관의 요청으로 파견되었다. 플리트비체 주변 전투가 끝날 무렵, 남쪽 티토바 코레니차 근처에서 산발적인 총격전이 보고되었다. 같은 날 오후, 플리트비체 호수에 크로아티아 경찰서가 설치되었고, 토미슬라브 일리치가 서장으로 임명되었다. 경찰서에는 고스피치에서 재배치된 약 90명의 경찰관이 배치되었다.
3. 2. SAO 크라이나군의 기습과 교전
자그레브를 중심으로 루치코, 라키테, 슬레메 특수 경찰 부대와 카를로바츠, 고스피치에서 차출된 추가 경찰력이 요시프 루치치의 지휘 하에 플리트비체 호수 지역 탈환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버스, 승용차, 장갑차를 이용해 플리트비체 호수 지역으로 접근했다. 1991년 3월 30일에서 31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루치코 부대가 코라나강 다리를 확보했고, 180명 규모의 라키테 특수 경찰 부대(SPU) 주력 부대는 짙은 안개 속에서 자그레브 방면 주요 도로를 따라 이동했다. 리치코 페트로보 셀로를 통한 보조 부대와 류보보 고개를 점령한 쿠므로베츠 SPU는 주력 부대의 측면을 엄호했다. 크로아티아 공격 병력은 총 300명 규모였다.1991년 부활절인 3월 31일 오전 7시 이전, 플리트비체 호수 인근에서 SAO 크라이나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에서 크로아티아 경찰 호송대가 매복 공격을 받았다. SAO 크라이나군은 2시간 30분간 교전 후 국립공원 우체국으로 후퇴했다. 크로아티아군은 깊은 눈으로 진격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오전 11시에 목표를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요시프 요비치가 SAO 크라이나군의 기관총에 맞아 사망하며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에서 크로아티아군 첫 전사자가 발생했다.
전투 직후, 유고슬라비아 공군은 밀 Mi-8 헬리콥터를 파견해 양측 부상자를 수송했다. 헬리콥터는 안톤 투스 대장의 지시에 따라 요시프 볼코바치 크로아티아 내무부 장관의 요청으로 파견되었다. 플리트비체 전투 종료 후, 남쪽 티토바 코레니차 인근에서 산발적인 총격전이 보고되었다. 같은 날 오후, 플리트비체 호수에 크로아티아 경찰서가 설치되었고, 토미슬라브 일리치가 서장으로 임명되었다. 경찰서에는 고스피치에서 재배치된 약 90명의 경찰관이 배치되었다.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은 이날 저녁 긴급 회의를 소집했고, 보리사브 요비치 세르비아 대통령 대표의 주장에 따라 유고 인민군(JNA)이 개입, 지역 통제 및 추가 전투를 막도록 지시받았다. 세르비아 의회도 긴급 회의를 열어 충돌을 사실상의 ''카수스 벨리''로 간주하고, 크라이나 세르비아인들에게 "모든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기로 했다. 다음 날, SAO 크라이나는 해당 영토가 세르비아에 편입되었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크로아티아 당국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막기 위해 불안을 조장하고, 유고 인민군(JNA)이 크로아티아 정부를 전복시키려 한다고 비난했다.
3. 3. 유고슬라비아 공군의 개입
크로아티아 경찰이 목표를 달성한 직후, 유고슬라비아 공군이 개입했다. 양측 부상자 수송을 위해 밀 Mi-8 헬리콥터가 도착했고, 1시간 30분 후 현장을 떠났다. 이 헬리콥터는 당시 유고슬라비아 공군 최고 지휘관이었던 안톤 투스 대장이 요시프 볼코바츠 크로아티아 내무 장관의 요청에 따라 파견한 것이었다. 플리트비체 호수 주변 전투가 종료된 후, 남쪽 티토바 코레니차 인근에서 산발적인 총격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있었다.같은 날 저녁,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직은 이 충돌에 대해 논의하기 위한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보리사브 요비치 세르비아 대표의 주장에 따라, 유고 인민군(JNA)은 현장을 장악하고 추가적인 충돌을 막기 위해 개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세르비아 의회 역시 긴급 회의를 소집하여 이 충돌을 사실상의 전쟁 명분으로 간주하고, 크로아티아 정부와 충돌하는 크라이나 지역 세르비아인들에게 "필요한 모든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결의했다. 다음 날, SAO 크라이나는 이 지역이 세르비아 영토에 통합되었으며,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 점령 지역에 세르비아 헌법과 법률을 적용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유고슬라비아가 느슨한 연방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독립을 추진하려는 크로아티아의 의지를 꺾기 위해 불안을 조장했다고 비난했다. 또한 유고 인민군이 크로아티아 정부를 전복시키려 한다고 비난했다.
3. 4.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직 비상회의와 세르비아의 지원 결의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직은 1991년 3월 31일 저녁, 플리트비체 호수 사건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세르비아의 보리사프 요비치 대통령 대표의 주장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은 개입하여 해당 지역을 통제하고 추가적인 전투를 막도록 지시받았다. 세르비아 의회도 긴급 회의를 열어 이 충돌을 사실상의 ''카수스 벨리''(개전 명분)로 간주하고, 크로아티아와의 분쟁에서 크라이나 세르비아인들에게 "모든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기로 투표했다.다음 날, SAO 크라이나는 해당 영토가 세르비아에 편입되었다는 결의안을 채택했으며,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 점령 지역에서 세르비아 헌법과 법률이 채택되었다. 크로아티아 당국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유고슬라비아가 느슨한 연방으로 변형되지 않으면 독립을 선언하려는 크로아티아의 결의를 꺾기 위해 불안을 조작했다고 비난했다. 또한 밀로셰비치가 JNA를 통해 크로아티아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고 비난했다.
3. 5. 유고 인민군의 완충 지대 설정과 크로아티아의 반발
1991년 4월 1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은 플리트비체 호수에서 교전 당사자들을 분리하기 위해 완충 지대를 설정하고 제1 및 제5 군관구의 병력을 배치했다. 배치된 병력은 다음과 같다.- 바냐 루카 주둔 제329 기갑여단의 기갑 대대
- 델니체 주둔 제6 산악 여단의 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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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예카 주둔 제13 프롤레타리아 자동차화 여단의 대공 포병 포대
제5 군관구는 플리트비체 호수에 전방 지휘소를 설치했으며, 플리트비체 호수에 배치된 JNA 병력은 대령 이반 슈티마츠가 지휘했다.
JNA 개입을 총괄 지휘한 제5 군관구 사령관 소장 안드리야 라셰타는 언론에 자신의 병사들이 어느 쪽도 보호하지 않으며, 불특정 기간 동안 민족 간의 대립을 막기 위해 그곳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정부는 JNA의 움직임에 격분했다. 투지만 대통령의 보좌관 마리오 노빌로는 JNA가 크로아티아 관리들에게 플리트비체를 떠나지 않으면 경찰을 공격하겠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투지만은 라디오 연설에서 JNA의 행동 방침이 바뀌지 않으면 적대적인 점령군으로 간주하겠다고 말했다. 4월 2일, JNA는 크로아티아 당국에 최후 통첩을 전달하여 경찰의 플리트비체 철수를 요구했다. 특수 경찰은 같은 날 플리트비체를 떠났지만, 새로 설치된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90명의 경찰관은 그 자리에 남았다.
4. 여파
플리트비체 호수 사건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초기에 발생한 무력 충돌로, 크로아티아의 전반적인 상황을 악화시키고 민족 갈등을 심화시켰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은 양측을 분리하기 위해 개입했지만, 이 지역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인근 플라슈키에서는 지역 경찰서에서 크로아티아인 경찰들이 쫓겨나고 세르비아인 관료로 교체되었다. SAO 크라이나와 크로아티아 양측은 사보르스코-리치카 야세니차-오구린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여 봉쇄했고, 여름에는 봉쇄 지역이 확대되어 JNA 차량만 통행이 가능해지면서 식량, 의약품, 전력 부족이 심화되었다.
1991년 5월 2일, SAO 크라이나의 집권당인 세르비아 민주당은 플리트비체 호수 지역에서 크로아티아 경찰을 철수하라는 조직적인 행진과 정치 집회를 열었다. 밀란 바비치와 보이슬라브 셰셸이 이끄는 이 행진은 플리트비체 호수 인근에서 유고 인민군의 저지로 전진하지 못하고 티토바 코레니차로 돌아갔다.
유고 인민군은 7월 1일 크로아티아 경찰이 유고 인민군 장교 2명을 납치했다는 구실로 플리트비체 호수 경찰서를 봉쇄했다. 7월 6일부터 SAO 크라이나 병력과 유고 인민군은 플리트비체 호수 동남쪽의 티토바 코레니차-고스피치 도로가 있는 류보로 고개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이달 말까지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을 몰아내고 고개를 장악하였다. 여름 내내 유고 인민군은 4월에 플리트비체 호수에 배치한 병력을 이용하여 리카 지역의 크로아티아군과 지속적으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8월 30일 유고 인민군이 플리트비체 경찰서를 점거하고 다음 날 고스피치 전투가 시작되면서 격렬해졌다.
이 사건으로 크로아티아 경찰관 요시프 요비치가 사망했으며, 여러 문헌에서 그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최초의 사망자로 기록된다. 1994년 그의 고향 아르자노에 추모비가 세워졌고, 전쟁 후에는 그가 사망한 장소에 추모비가 세워져 매년 추모식이 열린다.
4. 1. 인명 피해와 체포
이 사건으로 크로아티아 경찰관 요시프 요비치가 사망했다. SAO 크라이나 측에서는 라이코 부카디노비치가 전투 중 사망하여, 전쟁 중 첫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부상자는 총 20명이며, 이 중 7명이 크로아티아 경찰이었다. 크로아티아 경찰은 SAO 크라이나 병사 29명을 체포했고, 이 중 18명은 반란 혐의로 기소되었다. 체포된 사람 중에는 고란 하지치도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났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하지치의 석방이 선의의 표시라고 설명했지만, 요시프 볼코바츠는 하지치가 1991년 크로아티아 정부와 협력했기 때문에 풀려났다고 주장했다. 전투 이후, 이탈리아인 관광객 400여 명이 플리트비체 호수에서 대피했다.플리트비체 호수에서의 충돌은 크로아티아의 전반적인 상황을 악화시켰고, 분쟁의 격화를 초래했다. 인근 플라슈키에서 크로아티아 경찰 병력이 지역 경찰서를 떠나 세르비아 장교로 교체되었다. SAO 크라이나군과 크로아티아군 모두 사보르스코-리치카 야세니차-오굴린 도로에 로드블록을 설치했다. 여름까지, 봉쇄는 플라슈키 북쪽과 사보르스코 남쪽으로 확대되었으며, 이곳에서 크로아티아 당국은 4월 2일 30명 규모의 경찰서를 추가로 설립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차량만 로드블록을 통과할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해 그 지역의 식량, 의약품 및 전력 부족이 발생했다.
5월 2일, 세르비아 민주당은 플리트비체 호수로의 시위 행진을 조직하고 크로아티아 경찰의 플리트비체 철수를 요구하는 정치 집회를 열었다. 밀란 바비치와 보이슬라브 셰셸이 이끄는 행진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에 의해 플리트비체 호수에 도달하는 것이 막혔고 티토바 코레니차로 돌아가야 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7월 1일 크로아티아 경찰이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장교 2명을 납치하여 투옥했다는 구실로 플리트비체 호수 경찰서를 봉쇄했다. 7월 6일까지, SAO 크라이나군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플리트비체 호수 남동쪽의 류보보 고개, 티토바 코레니차-고스피치 도로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크로아티아 국민 방위대를 후퇴시키고 그 달 말까지 고개를 점령했다. 여름 동안,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4월에 플리트비체 호수에 배치된 부대를 사용하여 리카에서 크로아티아군과 계속 교전했다. 전투는 8월 30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플리트비체 호수 경찰서를 점령하면서 더욱 격화되었고, 다음 날 고스피치 전투가 시작되었다.
요비치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첫 번째 희생자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 그를 기리는 기념비는 1994년 그의 출생지인 아르자노에 세워졌다. 전쟁 후, 그의 사망 현장에 기념비가 세워졌고, 매년 충돌 기념식이 열린다. 충돌과 요비치의 죽음은 플리트비체 호수에서 매년 기념된다.
4. 2. 갈등 심화와 도로 봉쇄
플리트비체 호수에서의 충돌은 크로아티아의 전반적인 상황을 악화시켰고, 민족 분쟁을 심화시켰다. 유고 인민군(JNA)의 개입으로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가 분리되었으나, 충돌 이후 이 지역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인근 플라슈키에서는 지역 경찰서에서 크로아티아인 경찰들이 쫓겨나고 세르비아인 관료로 교체되었다.SAO 크라이나와 크로아티아 양측 모두 사보르스코-리치카 야세니차-오구린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여 도로를 봉쇄했다. 여름이 되면서 도로 봉쇄 지역은 플라슈키 북쪽에서 사보르스코 남쪽까지 확대되었으며, 크로아티아 정부는 1991년 4월 2일에 30개나 되는 경찰서를 새로 설치했다. 도로가 봉쇄된 곳에서는 유고 인민군 차량만 통행이 가능했으며, 지역의 식량, 의약품, 전력 부족이 가속화되었다.
1991년 5월 2일, SAO 크라이나의 집권당인 세르비아 민주당은 플리트비체 호수 지역에서 크로아티아 경찰을 철수하라는 조직적인 행진과 정치 집회를 열었다. 밀란 바비치와 보이슬라브 셰셸이 이끄는 이 행진은 플리트비체 호수 인근에서 유고 인민군의 저지로 전진하지 못하고 티토바 코레니차로 돌아갔다.
4. 3. 유고 인민군의 공세와 전쟁 확산
플리트비체 호수 사건으로 크로아티아 경찰관 요시프 요비치가 사망했고, SAO 크라이나 측에서는 라이코 부카디노비치가 사망하여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에서 양측 첫 사상자가 발생했다. 총 2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그 중 7명은 크로아티아 경찰이었다. 크로아티아 경찰은 SAO 크라이나 병사 29명을 체포했고, 이 중 18명은 반란 혐의로 기소되었다. 체포된 사람 중에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대통령이 되는 고란 하지치도 있었으나 곧 풀려났다. 전투 이후 이탈리아인 관광객 400여 명이 플리트비체 호수에서 피난했다.이 사건으로 크로아티아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민족 갈등이 심화되었다. 유고 인민군(JNA)의 개입으로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가 분리되었지만, 인근 플라슈키에서는 크로아티아계 경찰이 쫓겨나고 세르비아계 관료로 교체되는 등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양측은 사보르스코-리치카 야세니차-오구린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고, 여름에는 봉쇄 지역이 확대되어 JNA 차량만 통행이 가능해지면서 식량, 의약품, 전력 부족이 심화되었다.
5월 2일, 세르비아 민주당은 플리트비체 호수에서 크로아티아 경찰 철수를 요구하는 행진과 집회를 열었으나, JNA에 의해 저지되었다. 7월 1일, JNA는 크로아티아 경찰이 JNA 장교 2명을 납치했다는 구실로 플리트비체 호수 경찰서를 봉쇄했다. 7월 6일부터 SAO 크라이나 병력과 JNA는 티토바 코레니차-고스피치 도로의 류보로 고개를 공격하여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을 몰아내고 고개를 장악했다. 여름 내내 JNA는 리카 지역에서 크로아티아군과 계속 전투를 벌였으며, 8월 30일 플리트비체 경찰서를 점령하고 다음 날 고스피치 전투가 시작되면서 전투가 격화되었다.
여러 문헌에서 요시프 요비치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최초의 사망자로 기록된다. 1994년 그의 고향 아르자노에 추모비가 세워졌고, 전쟁 후에는 그가 사망한 장소에 추모비가 세워져 매년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4. 4. 요시프 요비치 추모
요시프 요비치는 이 사건으로 사망한 유일한 크로아티아 경찰관이었다. 여러 문헌에서 그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최초의 사망자로 기록되고 있다. 1994년 그의 출생지인 아르자노에 추모비가 세워졌고, 전쟁 후에는 그가 사망한 장소에 추모비가 세워져 매년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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