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브로브니크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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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브로브니크 포위전은 1991년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중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크로아티아 최남단 도시 두브로브니크를 공격한 사건이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1991년 10월부터 12월까지 두브로브니크를 포위하고 포격하여 도시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사망하고 난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았으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지휘관들은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1992년 크로아티아군의 반격으로 유고 인민군은 철수했고, 이후 두브로브니크는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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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브로브니크 포위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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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분쟁 |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
날짜 | 1991년 10월 1일 ~ 1992년 5월 31일 |
장소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지역 |
결과 | 크로아티아의 승리 |
결과 상세 | 포위 해제 유고슬라비아군의 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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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1992년 4월) 신유고슬라비아 연방 (1992년 4월~) 두브로브니크 공화국 (~1992년 5월) |
지휘관 | |
지휘관 1 | 벨코 카디예비치 파블레 스트루가르 미오드라그 요키치 블라디미르 코바체비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아초 아폴로니오 모미르 불라토비치 밀로 주카노비치 파블레 불라토비치 |
지휘관 2 | 노이코 마리노비치 얀코 보베트코 (1992년 5월~) |
병력 규모 | |
병력 1 |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세르비아가 통제) 유고슬라비아 해군 몬테네그로 영토방위군 |
병력 1 규모 | 7천명 |
병력 2 |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 (~1991년 10월) 크로아티아 국방군 (~1991년 10월) 크로아티아 육군 (1991년 11월~) |
병력 2 규모 | 480~1,000명 (1991년 기준) |
사상자 및 피해 | |
사상자 1 | 165명 사망 |
사상자 2 | 194명 사망 |
피해 | 크로아티아 민간인 82~88명 사망 크로아티아인 16,000명 난민 발생 유고 인민군의 포격으로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등 사적지 큰 피해 |
2. 배경
1990년 8월 크로아티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지역은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이라는 이름으로 세르비아와 합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에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들을 반란 세력으로 규정했다. 1991년 3월 들어 분쟁이 격화되었고 이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면서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포했다. 3개월간의 독립 유예 기간을 거쳐 10월 8일에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을 지원하면서 크로아티아의 경찰만으로는 상황에 대처하기 어려워졌고, 1991년 5월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이 창설되었다. 11월에는 국가방위군이 크로아티아 육군(HV)으로 바뀌었다. 크로아티아군의 발전은 9월 도입된 유엔의 무기 금수 조치로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8월 26일 시작된 부코바르 전투로 크로아티아 내 군사 분쟁은 계속 고조되었다.
두브로브니크는 아드리아해 연안에 있는 항구 도시이자 크로아티아 최남단의 대도시이다. 두브로브니크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는 대부분 라구사 공화국 시절에 지어진 역사기념물과 오래된 건물이 많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1991년 기준 두브로브니크 지역 인구는 약 4만명으로, 82.4%가 크로아트인, 6.8%가 세르브인이었다. 도시 서쪽에는 펠레샤츠반도가, 동쪽에는 몬테네그로 국경의 코토르만 입구를 낀 프레블라카반도가 있다.[13] 크로아티아가 가진 두브로브니크 지역 영토는 폭 0.5~1.5 km의 얇은 해안지대로 매우 좁다.[14][15]
2. 1.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1990년 8월 크로아티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주로 세르브계가 많이 사는 달마티아 내륙 크닌 주변 지역,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지역 일부와 세르브계 인구가 많은 크로아티아 동부 지역 일부 마을을 중심으로 일어났다.[1][2] 이 지역은 나중에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이라는 이름으로 세르비아와 합병하겠다고 밝히자, 크로아티아 정부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을 반란으로 규정했다.[3] 1991년 3월 분쟁이 심해져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으로 확대되었다.[4] 1991년 6월에는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면서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포했다.[5] 이후 3개월간의 유예 기간을 거쳐 10월 8일에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했다.[7]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은 크로아트인 민간인을 향한 인종 청소를 시작해 1993년 초까지 자국 내 대부분의 비세르브인을 추방했다. 1993년 11월 기준 유엔보호구역 남부지구에는 크로아트인이 400명 이하만 남았고,[8] 북부지구까지 합쳐도 1,500~2,000명만 남았다.[9]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을 지원하면서 크로아티아의 경찰만으로는 상황에 대처하기 어려워졌고, 1991년 5월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이 창설되었다. 1991년 11월에는 국가방위군이 크로아티아 육군(HV)으로 바뀌었다.[10] 크로아티아군의 발전은 9월에 도입된 유엔의 무기 금수 조치로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11] 1991년 8월 26일 시작된 부코바르 전투로 크로아티아 내 군사 분쟁은 계속 심해졌다.[12]
두브로브니크는 크로아티아 최남단의 대도시이자 아드리아해 연안의 항구 도시이다. 두브로브니크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는 대부분 라구사 공화국 시절에 지어진 역사기념물과 오래된 건물이 많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1991년 기준 두브로브니크 지역 인구는 약 4만명으로, 82.4%가 크로아트인, 6.8%가 세르브인이었다. 도시 서쪽에는 펠레샤츠반도가, 동쪽에는 몬테네그로 국경의 코토르만 입구를 낀 프레블라카반도가 있다.[13] 크로아티아가 가진 두브로브니크 지역 영토는 폭 0.5~1.5 km의 얇은 해안지대로 매우 좁다.[14][15]
2. 2. 두브로브니크의 전략적, 문화적 중요성
아드리아해 연안에 있는 항구 도시이자 크로아티아 최남단의 대도시인 두브로브니크는 두브로브니크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구시가지라고 불리는 도심은 대부분 라구사 공화국 시절에 지어진 역사기념물과 오래된 건물이 많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다. 1991년 기준 두브로브니크 지역의 인구는 약 4만명으로, 이 중 82.4%가 크로아트인, 6.8%가 세르브인이었다. 도시 서쪽으로는 펠레샤츠반도가, 동쪽으로는 몬테네그로 국경의 코토르만 입구를 낀 프레블라카반도가 있다.[13] 두브로브니크 지역은 폭 0.5~1.5 km밖에 되지 않는 얇은 해안지대로 이루어져 있어, 크로아티아가 가진 영토는 매우 좁다.[14][15]3. 전조
크로아티아를 물리치기 위한 유고 인민군의 전략적 계획에는 두브로브니크를 포함한 크로아티아 최남단을 나머지 지역으로부터 포위하기 위한 공격이 포함되었다.[23] 유고 해군은 두브로브니크로 향하는 모든 해상로를 봉쇄했다.[18] 9월 30일 제2작전집단의 첫 사령관이었던 예브렘 초키치 장군이 헬리콥터 추락으로 사망하자, 10월 5일 루지노브스키 장군이 임시대행을 맡았고, 10월 12일 파블레 스트루가르가 정식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5][26]
3. 1. 유고슬라비아의 프로파간다
1991년 중순 유고슬라비아 국방부 장관 벨코 카디예비치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참모총장 블라고예 아지치 등 유고 인민군 최고지휘관은 두브로브니크 지역을 공격, 점령하는 작전을 입안했다.[25]1991년 9월 유고 인민군과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 지도자는 몬테네그로 영토 보장, 민족 충돌 방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존속을 위해 두브로브니크를 공격하고 무력화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당시 몬테네그로의 총리 밀로 주카노비치는 크로아티아 국경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볼셰비키 지도 제작자" 탓에 엉망이 되었다고 비난했다.[16]
파블레 스트루가르 유고 인민군 장군은 크로아티아군 3만 명과 테러리스트 7천 명, 쿠르드족 용병이 몬테네그로를 공격하고 코토르만을 점령할 것이라는 선전성 주장을 펼쳤다. 이로 인해 몬테네그로의 많은 사람들은 크로아티아가 실제로 침공을 시작했다고 믿게 되었다.[17] 이러한 선전 확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언론은 몬테네그로의 《포베다》였다.[18] 1991년 7월, 세르비아 고위 관료 미할 케르테스는 닉시치에서 열린 정치 집회에서 몬테네그로 서쪽 네레트바강까지 영토를 넓혀 "바다의 닉시치"가 될 두브로브니크를 수도로 하는 새로운 세르브인의 국가를 수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19]
1991년 9월 16일, 크로아티아 상황 악화를 이유로 몬테네그로의 유고 인민군이 동원되었다. 9월 18일, 주카노비치 총리는 탈영병과 동원에 불응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하며[18] "크로아티아 국경을 제대로 완전히 그릴 것"을 촉구했다.[21] 이러한 군사 동원과 몬테네그로 정부의 선전은 두브로브니크 공격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한 베오그라드의 유고 연방정부 보증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22]
3. 2. 몬테네그로의 군사 동원
1991년 중순, 유고슬라비아 국방부 장관 벨코 카디예비치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참모총장 블라고예 아지치 등 유고 인민군 최고지휘관은 두브로브니크 지역을 공격하여 점령한 뒤, 헤르체고비나 서부로 진격하여 달마티아 북부의 유고 인민군 제9(크닌)군단과 합류하는 대규모 공세 작전을 입안했다. 예브렘 초키치 장군은 두브로브니크 공세 계획을 아지치 참모총장에게 제출하여 승인받았다.[25]1991년 9월, 유고 인민군과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 지도자는 몬테네그로 영토 보장, 민족 충돌 방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존속을 위해 두브로브니크를 공격하고 무력화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당시 몬테네그로의 총리 밀로 주카노비치는 크로아티아의 국경은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볼셰비키 지도 제작자" 탓으로 엉망이 되었다고 비난했다.[16] 유고 인민군 장군 파블레 스트루가르는 크로아티아군 3만 명과 7천 명의 테러리스트, 쿠르드족 용병이 몬테네그로를 공격하고 코토르만을 점령할 것이라는 선전성 주장을 펼쳤다. 이로 인해 많은 몬테네그로 사람들이 크로아티아가 실제로 침공을 시작했다고 믿게 되었다.[17] 이러한 선전 확산에 가장 크게 기여한 언론은 몬테네그로의 《포베다》였다.[18] 1991년 7월, 세르비아 고위 관료 미할 케르테스는 닉시치에서 열린 정치 집회에서 몬테네그로 서쪽 네레트바강까지 확대되어 "바다의 닉시치"가 될 두브로브니크를 수도로 하는 새로운 세르브인의 국가가 수립될 것이라고 주장했다.[19]
1991년 9월 16일, 크로아티아의 상황 악화를 이유로 몬테네그로의 유고 인민군이 동원되었다. 9월 17일, 유고 인민군 제2(티토그라드)군단의 라디오 방송 호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예비군이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20] 9월 18일, 주카노비치 총리는 탈영병과 동원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가혹한 처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하며[18] "크로아티아의 국경을 제대로 완전히 그릴 것"을 촉구했다.[21] 이러한 군사 동원과 몬테네그로 정부의 선전은 두브로브니크 공격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한 베오그라드의 유고 연방정부의 보증과는 완전히 상반되었다.[22]
9월 23일, 유고 인민군 포병은 코나블레 마을 동쪽 비탈리나 마을과 두브로브니크 동쪽 브르가트 마을을 공격했다.[18] 9월 26일, 유고 인민군은 동헤르체고비나 작전집단의 이름을 제2작전집단으로 변경하고 연방 국방부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참모본부의 직속 지휘 병력으로 전환했다.[24] 10월 1일, 몬테네그로 내무부 장관 파블레 불라토비치는 공화국 특수경찰부대에 동원령과 함께 "몬테네그로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공화국 사이 국경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전투 작전 수행"을 하는 유고 인민군을 지원하라는 비밀 임무를 내렸다.[27]
4. 전투 서열
두브로브니크 포위전 당시 유고 인민군과 크로아티아군의 전투 서열은 다음과 같다.
유고 인민군은 두브로브니크 지역을 차단하고 점령하기 위해 제2작전집단 예하 제2 티토그라드 군단과 제9 보카코토르스카 해양부문군구를 투입했다. 제2 티토그라드 군단은 제1니키치여단을, 제9 보카코토르스카 해양부문군구는 제5, 제472차량화여단을 배치했으며, 작전경계선은 두브로브니크 인근을 남북으로 지나는 선이었다.[28] 이 외에도 제16국경순찰대, 제107해안포병집단, 헤르체그노비, 코토르 등지의 영토방위군 부대도 동원했다.
반면, 전투 초기 두브로브니크의 크로아티아군은 480명에 불과했고, 이 중 훈련받은 군인은 50명뿐이었다.[34] 이들은 1989년 유고 인민군에 의해 무장 해제되어 무기 상태도 열악했다.[35] 그러나 막사 전투 이후 다른 지역에서 병력이 증원되고, 코르출라섬에서 노획한 무기가 보급되면서[32] 11월에는 1천여 명으로 늘어났다.[40] 또한 크로아티아 해군 자원병으로 구성된 두브로브니크 무장보트전대가 유고슬라비아 해군의 봉쇄에 맞서기 위해 조직되었다.[43][44]
4. 1. 유고 인민군
유고 인민군(JNA)은 제2작전집단 소속의 제2 티토그라드 군단과 제9 보카코토르스카 해양부문군구에 두브로브니크 지역을 차단하고 점령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제2티토그라드군단은 제1니키치여단을, 제9보카코토르스카 해양부문군구는 제5, 제472차량화여단을 투입했다. 두 군단 간 작전경계선은 두브로브니크 인근 남북으로 이어졌다.[28]제2작전집단은 제16국경순찰대와 제107해안포병집단, 헤르체그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 바르, 모이코바츠, 비옐로폴레, 트레비네의 영토방위군 부대도 동원했다. 제2작전집단은 스트루가가 총지휘했고, 제9 보카코토르스카 해양부문군구는 미오드라그 요키치 부제독이 지휘했다.[29] 요키치는 공격 시작 몇 시간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한 크르스토 주로비치 제독을 대신해 지휘관이 되었다.[30] 제472차량화여단을 지휘했던 노이코 마리노비치 소장은 유고 인민군이 공격 계획을 반대하던 주로비치 제독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마리노비치는 9월 17일 지휘관직에서 사임하고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으로 귀순했다.[31]
유고 인민군 제2작전집단은 처음에 7천 명의 병력을 배치했고, 공세 기간 내내 비슷한 규모를 유지했다.[32][33]
4. 2. 크로아티아 방어군
전투가 시작될 당시 두브로브니크 지역의 크로아티아군은 480명이었고, 이 중 훈련받은 군인은 50명뿐이었다.[34] 실질적으로 두브로브니크를 방어하는 병력은 거의 없었다.[32] 유일한 정규군 부대는 스르지산 꼭대기의 나폴레옹 시대 제국요새에 주둔한 경보병 소대였다. 나머지 부대는 1989년 유고 인민군이 크로아티아 영토방위군을 무장 해제하면서 무기를 빼앗겨 무장 상태가 좋지 못했다.[35]1972년 이후 두브로브니크에는 유고 인민군 주둔지나 무기고가 없어서 9월 막사 전투 시기에도 노획한 무기와 탄약이 거의 없었다.[22] 9월 26일 코르출라섬의 유고 인민군에게서 노획한 소총 200정과 76mm, 85mm 포 4문을 두브로브니크로 보냈다.[32][36] 즉석에서 제작된 장갑차도 보급되었다.[37]
크로아티아 육군, 경찰, 크로아티아 국방군 병력이 타 지역에서 증원되어[38][39] 11월에는 1천여 명의 병력이 시가지를 방어했다.[40] 9월 19일에는 노이코 마리노비치가 두브로브니크 방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당시에는 부적합하다고 평가받았다.[36][41]
처음 두브로브니크 영토방위군으로 조직된 부대[36]는 1991년 12월 28일 크로아티아 육군 제75독립대대로 재편성되었고, 나중에 제116보병여단 산하로 강화되어 1992년 2월 13일 제163보병여단으로 발전했다.[42] 크로아티아 해군의 자원병 부대인 두브로브니크 무장보트전대는 여러 크기의 선박 23척과 117명의 자원군으로 구성되었으며, 9월 23일 유고슬라비아 해군의 봉쇄에 대응하기 위해 수립되었다.[43][44]
5. 전개
1991년 10월 1일, 유고 인민군(JNA)은 두브로브니크를 향해 공세를 시작하면서 포위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유고 인민군은 두 방향으로 진격했는데, 제2티토그라드군단은 도시 북쪽 포포보폴레평원을 거쳐 서쪽으로 이동하여 두브로바치코프리모레 지역으로 남하하면서 라브노 마을을 파괴했다.[23][45] 이는 두브로브니크를 서쪽에서 포위하기 위함이었다.[23] 제9보카코토르스카 해양부문군구는 코토르만에서 코나블레를 통과하여 두브로브니크 동남쪽 35km 지점까지 진출했다.[46]
유고 인민군은 유고슬라비아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진격했다.[30] 코나블레 지역에는 크로아티아 방어군이 없었고, 두브로바치코프리모레에는 극히 일부만 존재했다. 공세 첫날, 유고 인민군 포병은 스르지언덕과 자르코비차곶을 공격했고,[48] 유고슬라비아 공군은 미코얀-구레비치 MiG-21기로 리예카두브로바치카 해안의 코몰라츠 마을을 폭격하여[49] 두브로브니크의 전력 및 상수도 공급을 차단했다.[50]
이후 며칠간 유고 인민군은 느리게 전진하며 포격을 지속했다. 10월 4일에는 슬라노 마을을 점령하여 아드리아해 고속도로를 차단하고 두브로브니크를 포위했다.[47] 10월 15일, 크로아티아는 몬테네그로에 평화회담을 제안했지만, 세르비아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이를 거부했다.[53]
10월 23일, 유고 인민군은 구시가지를 포함한 두브로브니크 시내에 대한 지속적인 포격을 시작했고,[58] 다음 날 미국 국무부는 유고 정부에 항의했다.[57] 10월 26일, 유고 인민군은 자르코비차를 점령하고, 10월 27일에는 두브로브니크를 내려다보는 고지대 대부분을 점령했다.[48][52][61]
11월에도 유고 인민군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특히 11월 9일부터 12일까지는 구시가지, 그루주, 라파드, 플로체 등지에 대규모 포격이 집중되었다. 유선 유도 미사일이 사용되기도 했으며,[52] 유럽 공동체 감독 활동(ECMM)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휴전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66]
11월, 해방의 호송대로 명명된 민간 선박 호송대가 리예카에서 출발하여 10월 31일 두브로브니크에 도착했다. 이 호송대는 스테판 메시치 유고슬라비아 대통령과 프라뇨 그레구리치 크로아티아 총리 등 주요 인사와 1천여 명의 시위대가 탑승하고 유고 해군의 방해를 뚫고 그루주 항구에 도착했다.[70][71][72]
12월 6일에는 구시가지에 가장 심한 포격이 가해져 민간인 13명이 사망하고, 대학중앙도서관이 파괴되는 등 큰 피해가 발생했다.[60][74][75] 이 공격은 국제사회의 강력한 비난을 받았다.[74]
5. 1. 유고 인민군의 공세 (1991년 10월 ~ 12월)
1991년 10월 1일, 유고 인민군(JNA)은 두브로브니크를 향해 공세를 시작했다. 유고 인민군은 두 방향으로 진격했는데, 제2티토그라드군단은 도시 북쪽 포포보폴레평원을 거쳐 서쪽으로 이동하여 두브로바치코프리모레 지역으로 남하하면서 라브노 마을을 파괴했다.[23][45] 이는 두브로브니크를 서쪽에서 포위하기 위함이었다.[23] 제9보카코토르스카 해양부문군구는 코토르만에서 코나블레를 통과하여 두브로브니크 동남쪽 35km 지점까지 진출했다.[46]유고 인민군은 10월 1일 오전 5시부터 진격을 시작했으며, 유고슬라비아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았다.[30] 코나블레 지역에는 크로아티아 방어군이 없었고, 두브로바치코프리모레에는 극히 일부만 존재했다. 이날 유고 인민군에서 발생한 유일한 사상자는 체피쿠체 마을에서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의 기습으로 발생했다.[47] 공세 첫날, 유고 인민군 포병은 스르지언덕과 자르코비차곶을 공격했고,[48] 유고슬라비아 공군은 미코얀-구레비치 MiG-21기로 리예카두브로바치카 해안의 코몰라츠 마을을 폭격하여[49] 두브로브니크의 전력 및 상수도 공급을 차단했다.[50] 12월 말까지 두브로브니크는 보트로 공급되는 담수와 도시 내 몇몇 발전기에서 나오는 전기에 의존해야 했다.[51]
이후 3일 동안 유고 인민군은 느리게 전진했다. 10월 2일에는 스르지언덕, 제국요새, 자르코비차를 포격했고, 다음 날에는 두브로브니크의 벨베데레 호텔과 아르헨티나 호텔을 공격했다.[48] 10월 4일, 유고 인민군 제2군단은 슬라노 마을을 점령하여 아드리아해 고속도로를 차단하고 두브로브니크를 포위했다.[47] 10월 5일에는 플로체구가 포격을 받았고, 다음 날 유고 공군은 제국요새를 폭격했다.[52]
10월 15일, 크로아티아는 몬테네그로에 평화회담을 제안했지만, 세르비아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이를 거부했다.[53] 10월 16일, 유고 인민군 제9보카코토르스카 해양부문군구 부대가 차브타트를 점령했다.[56] 10월 18일에는 두브로브니크의 플로체구가 공습을 받았고,[52] 다음 날 휴전이 발효되었지만 곧바로 위반되었다.[57] 10월 20일, 유고 공군은 두브로브니크를 공격했고, 10월 22일에는 유고 해군이 라파드 지역의 난민 수용 호텔을 포격했다.[52]
10월 23일, 유고 인민군은 구시가지를 포함한 두브로브니크 시내에 대한 지속적인 포격을 시작했고,[58] 다음 날 미국 국무부는 유고 정부에 항의했다.[57] 10월 24일, 제9해양부문군구는 주파두브로바치카와 브르가트를 점령했고,[59] 유고 해군은 로크룸섬을 포격했다.[52] 다음 날 유고 인민군은 두브로브니크 시에 즉시 항복하고 선출된 공무원은 전부 사임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60] 10월 26일, 유고 인민군은 자르코비차를 점령하고, 10월 27일에는 두브로브니크를 내려다보는 고지대 대부분을 점령했다.[48][52][61] 유고 인민군 제2군단의 서남쪽 방면 진격은 훨씬 느렸으며, 이 과정에서 트르스테노 수목원 대부분이 파괴되었다.[62] 유고 인민군의 진격으로 15,000명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이 중 약 7천 명은 10월경 해상으로 두브로브니크를 탈출했고, 나머지는 도시 내 호텔 및 다른 지역으로 대피했다.[50]
10월 30일부터 11월 4일까지 유고 인민군은 두브로브니크 서부 지역인 그루주, 라파드, 바빈쿠크, 아르헨티나 호텔을 공격했다.[52][60] 11월 3일에서 4일 사이에는 유고 인민군 제472차량화여단 제3대대가 소화기와 저격으로 구시가지와 아르헨티나 호텔을 공격했다.[30][52][60] 다음 날에는 제국요새가 포격을 받았다.[52] 11월 7일, 유고 인민군은 정오까지 두브로브니크가 항복하라는 새로운 최후통첩을 발표했으나 거부되었고, 요키치는 유고 인민군이 구시가지를 파괴로부터 구할 것이라고 말했다.[60] 같은 날 슬라노 인근에서 전투가 재개되었다.[63]
11월 9일부터 12일까지 유고 인민군 포병과 유고 해군은 구시가지, 그루주, 라파드, 플로체, 벨베데레, 엑스첼시오르, 바빈쿠크, 티레나, 제국요새, 아르헨티나 호텔을 향해 포격을 재개했다. 유선 유도 미사일을 사용하여 구시가지 항구의 보트를 공격했고,[52] 그루주 항구의 일부 대형 선박도 불에 탔다. 제국요새는 11월 9일, 10일, 13일에 유고 인민군의 공격을 받았다.[52] 이후 유럽 공동체 감독 활동(ECMM)의 중재로 11월 말까지 소강상태가 지속되었지만, 11월 중순 ECMM 요원들이 유고 인민군의 공격을 받아 철수하면서 중재는 베르나르 쿠슈네르와 유니세프 임무 책임자인 스테판 디 미스투라가 이어받았다. 11월 19일과 12월 5일에 휴전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현장에서는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66] 11월 24일 유고 인민군 제2군단이 도시 방어선을 수스체판-스르지–벨베데레 호텔 선으로 밀어버렸고,[67] 같은 날 유고 인민군은 점령지에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을 세우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68][69]
11월, 해방의 호송대로 명명된 민간 선박 호송대가 리예카에서 출발하여 여러 곳을 거쳐 10월 31일 두브로브니크에 도착했다. 이 호송대는 스테판 메시치 유고슬라비아 대통령과 프라뇨 그레구리치 크로아티아 총리 등 주요 인사와 1천여 명의 시위대가 탑승하고 유고 해군의 방해를 뚫고 그루주 항구에 도착했다.[70][71][72] 돌아올 때는 두브로브니크에서 빠져나오는 난민 2천여 명을 태웠다.[73]
12월 2~3일, 유고 인민군은 구시가지를 향해 보병 무기 사격을 재개했고, 12월 4일에는 제국요새에 박격포 포격이 이어졌다.[66] 12월 6일 오전 5시 48분경에는 구시가지에 가장 심한 포격이 일어났다. 이 공격으로 민간인 13명이 사망했으며, 두브로브니크 도심의 대학중앙도서관이 파괴되고 리베르타스 호텔에서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관들이 유고 인민군의 추가 포격으로 사망했다.[60][74][75] 이 공격은 국제 언론, 유네스코 사무총장 페데리코 마요르 사라고사, 유엔 사무총장 특사 사이러스 밴스, ECMM에게서 강력한 비난을 받았다.[74]
제국요새는 구시가지 포격이 시작된 지 몇 분 후인 5시 50분부터 공격을 받았다. 유고 인민군 제472차량화여단 제3대대가 두 방향에서 동시에 진격했다. 오전 8시 보병이 제국요새 앞에 도착했고, 방어군은 요새 안으로 후퇴해 도움을 요청했다. 마리노비치는 크로아티아 육군 포병에 요새에 직접 포격을 가할 것을 요구했고, 특수경찰부대를 파견해 방어선을 강화했다. 오후 2시경 유고 인민군은 공격을 중단했다.[76] 이날 두브로브니크 무장보트전대 최초의 함정 스베티 블라호호가 침몰했다.[77]
5. 1. 1. 두브로브니크 포위

1991년 10월 1일 유고 인민군(JNA)은 두브로브니크를 향한 공세를 시작했다. 제2티토그라드군단은 도시 북쪽 포포보폴레평원을 통해 서쪽으로 진군했고,[23] 두브로브니크를 서쪽에서 포위하기 위해 두브로바치코프리모레 지역으로 남쪽으로 향하며 라브노 마을을 파괴했다.[45] 제9보카코토르스카 해양부문군구는 두브로브니크에서 동남쪽으로 약 35 km 떨어진 코토르만에서 코나블레를 통과하는 경로로 진격했다.[46]
진격은 오전 5시부터 시작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았다.[30] 코나블레에는 크로아티아 방어군이 없었고 두브로바치코프리모레에는 극히 일부만 있었으며, 체피쿠체 마을에서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의 기습으로 유고 인민군에서 유일한 사상자가 발생했다.[47] 첫날 유고 인민군 포병은 스르지언덕과 자르코비차곶을 공격했고,[48] 유고슬라비아 공군은 미코얀-구레비치 MiG-21기로 리예카두브로바치카 해안의 코몰라츠 마을을 폭격해[49] 두브로브니크의 전력선과 상수도선을 끊었다.[50] 12월 말까지 두브로브니크는 보트로 공급되는 담수와 도시 안 몇몇 발전기에서 공급되는 전기에 의존했다.[51]
이후 3일간 유고 인민군은 느리게 전진했다. 10월 2일 스르지언덕, 제국요새, 자르코비차를 포격했고, 다음 날 벨베데레 호텔과 아르헨티나 호텔을 공격했다.[48] 10월 4일 슬라노 마을을 점령해 아드리아해 고속도로를 차단하여 두브로브니크를 포위했다.[47] 10월 5일에는 플로체구가 포격을 맞았고, 다음날 유고 공군이 제국요새를 폭격했다.[52]
10월 15일 크로아티아는 몬테네그로에 평화회담을 제안했지만 세르비아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거부했다.[53] 10월 16일 유고 인민군 제9보카코토르스카 해양부문군구 부대가 차브타트를 점령했다.[56] 10월 18일 두브로브니크의 플로체구 공습이 있었다.[52] 10월 20일 유고 공군이 두브로브니크를 공격했고, 10월 22일에는 유고 해군이 라파드 지역의 난민 수용 호텔을 포격했다.[52]
10월 23일 유고 인민군은 성벽 내 구시가지를 포함한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지속적인 포격을 시작했고,[58] 다음 날 미국 국무부는 유고 정부에 항의했다.[57] 10월 24일에는 제9해양부문군구가 주파두브로바치카와 브르가트를 점령했고,[59] 유고 해군은 로크룸섬을 포격했다.[52] 10월 26일 유고 인민군은 자르코비차를 점령하고 10월 27일에는 두브로브니크가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고지대 거의 대부분을 점령했다.[48][52][61] 유고 인민군의 진격으로 15,000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약 7천명이 해상으로 두브로브니크에서 탈출했고 나머지는 도시 내 호텔 및 다른 지역으로 대피했다.[50]
유고 인민군은 10월 30일부터 11월 4일까지 두브로브니크 서부 지역인 그루주, 라파드, 바빈쿠크와 아르헨티나 호텔을 공격했다.[52][60] 11월 3일에서 4일 사이 유고 인민군은 구시가지와 아르헨티나 호텔을 공격했다.[30][52][60] 11월 7일 유고 인민군은 두브로브니크가 항복하라는 새로운 최후통첩을 발표했지만 거부되었고, 요키치는 유고 인민군이 구시가지를 파괴로부터 구할 것이라고 말했다.[60]
11월 9일부터 12일까지 유고 인민군 포병과 유고 해군은 구시가지, 그루주, 라파드, 플로체와 호텔들을 포격했다. 유선 유도 미사일을 사용해 구시가지 항구의 보트를 공격했고,[52] 그루주 항구의 일부 대형 선박도 불에 탔다. 11월 중순 유럽 공동체 감독 활동(ECMM)이 중재를 통해 휴전에 대해 협상했지만, ECMM 소속 요원이 유고 인민군의 공격을 받아 철수했고, 이후 중재는 베르나르 쿠슈네르와 유니세프의 임무 책임자인 스테판 디 미스투라가 이어받았다. 11월 19일과 12월 5일에 휴전 합의가 나왔으나 성과는 없었다.[66] 11월 24일 유고 인민군 제2군단이 도시 방어선을 수스체판-스르지–벨베데레 호텔 선으로 밀어버렸다.[67] 같은 날 유고 인민군이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을 세우려 시도했으나[68] 실패했다.[69]
11월, 처음으로 성공한 도시 보급 시도는 "해방의 호송대"로 10월 31일 두브로브니크 도착에 성공했다. 리예카에서 출발하여 규모가 커져 최대 29척 규모였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 스테판 메시치와 전 크로아티아의 총리 프라뇨 그레구리치 등이 탑승한 호송대는 유고 해군의 방해를 받았으나, 결국 그루주의 두브로브니크 항구까지 도착했다.[70][71][72] 돌아올 땐 두브로브니크에서 빠져나오는 난민 2천여명을 태웠다.[73]
12월 2~3일 유고 인민군은 구시가지를 향한 보병 무기 사격을 재개했고, 12월 4일에는 제국요새에 박격포 포격이 이어졌다.[66] 12월 6일 오전 5시 48분경에는 구시가지에 가장 심한 포격이 일어났다. 이 공격으로 민간인 13명이 사망하며 포위전 기간 가장 많은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74][75] 두브로브니크 도심의 대학중앙도서관도 파괴되었으며, 리베르타스 호텔에서는 화재 진압 소방관을 죽이기 위해 유고 인민군이 추가로 포격을 가했다.[60] 국제 언론, 페데리코 마요르 사라고사, 사이러스 밴스, ECMM에게서 강력한 비난과 항의를 받았다.[74]
제국요새는 구시가지 포격이 시작된 지 몇 분 후인 5시 50분부터 공격을 받았다. 오전 8시가 되자 보병이 제국요새 앞에 도착했고 방어군은 요새 안으로 후퇴해 도움을 요청했다. 마리노비치는 크로아티아 육군 포병에 요새에 직접 포격을 가할 것을 요구했고 특수경찰부대를 파견해 제국요새 방어선을 강화했다. 오후 2시경 유고 인민군은 공격을 중단했다.[76] 이날 두브로브니크 무장보트전대 최초의 함정 스베티 블라호호가 침몰했다.[77]
5. 1. 2. 구시가지 포격
10월 23일 유고 인민군은 성벽 내 구시가지를 포함한 두브로브니크 시내에 대한 지속적인 포격을 시작했고,[58] 다음 날 미국 국무부는 유고 정부에 항의했다.[57] 10월 24일에는 유고 해군이 로크룸섬을 포격했다.[52]10월 30일부터 11월 4일까지 유고 인민군은 두브로브니크 서부 지역인 그루주, 라파드, 난민들이 머물던 호텔이 있는 바빈쿠크와 아르헨티나 호텔을 목표로 포격을 계속했다.[52][60] 11월 3일에서 4일 사이에는 유고 인민군 제472차량화여단 제3대대가 소화기와 저격으로 구시가지와 아르헨티나 호텔을 공격했다.[30][52][60]
11월 9일부터 12일까지 유고 인민군 포병과 유고 해군은 구시가지, 그루주, 라파드, 플로체와 벨베데레, 엑스첼시오르, 바빈쿠크, 티레나, 제국요새, 아르헨티나 호텔을 향해 포격을 재개했다. 구시가지 항구의 보트를 공격하는 데 유선 유도 미사일을 사용했고,[52] 페리선 아드리아티츠호[64]나 미국 소유 범선 펠라기츠호[65]는 포격에 불타 침몰하는 등 그루주 항구의 일부 대형 선박도 피해를 입었다.
12월 2~3일 유고 인민군은 구시가지를 향해 보병 무기 사격을 재개했고, 12월 4일에는 제국요새에 박격포 포격이 이어졌다.[66] 12월 6일 오전 5시 48분경에는 구시가지에 가장 심한 포격이 일어났다. 당시 구시가지는 82mm 미사일 48발, 82mm 박격포탄 232발, 120mm 박격포탄 364발, 유선 유도 미사일 22발을 맞았다. 또한 두 곳에 분화구와 같은 큰 구멍이 생겨 이보다 더 중화기도 사용했다고 추정된다. 포격은 구시가지의 중앙 거리인 스트라둔 거리와 스트라둔 동북쪽 지역에 집중되었으며, 구시가지의 다른 지역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공격은 오전 11시 30분 들어 잦아들었다. 이 공격으로 민간인 13명이 사망하며 포위전 기간 중 가장 많은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74][75] 2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두브로브니크 도심의 대학중앙도서관도 파괴되었으며, 리베르타스 호텔에서는 아침 일찍 맞은 포격으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관을 공격하기 위해 유고 인민군이 추가로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60] 12월 6일 구시가지 공격은 국제 언론, 유네스코 사무총장 페데리코 마요르 사라고사, 유엔 사무총장 특사 사이러스 밴스, ECMM에게서 강력한 비난과 항의를 받았다. 이날 늦게 유고 인민군은 유감 성명을 발표하고 철저한 조사를 약속했으나, 12월 7일 유고 인민군 대표가 구시가지를 방문해 피해 상황을 조사한 이후 추가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74]
5. 2. 크로아티아군의 반격 (1992년 5월)
1991년 12월 7일 휴전 협상이 합의된 후, 두브로브니크를 포위한 유고 인민군은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61][78] 1992년 1월 사라예보 협정에 따라 전투가 중단되었고, 유엔 보호군(UNPROFOR)이 평화 유지를 위해 배치되었다.[79][80] 그러나 두브로브니크 지역은 예외였고, 유고 인민군은 두브로바치코프리모레에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스톤 외곽까지 도달했다.[82][83]1992년 초, 막사 전투에서 유고 인민군의 무기를 대량 노획하면서 크로아티아 육군의 작전력이 증대되었다.[78][84] 유고 인민군이 크로아티아에서 철수한 후, 스릅스카 공화국군(VRS)으로 이름이 바뀐 세르브계 보스니아인 군대가 설립될 준비를 했다. 1992년 1월 9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인 공화국이 선언되었고, 1992년 4월 초 스릅스카 공화국군 포병이 사라예보를 포격하면서 보스니아 전쟁이 시작되었다.[85][86] 크로아티아 육군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과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HVO)를 지원하기 위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파견되었다.[87]
1992년 4월, 유고 인민군은 헤르체고비나 서부와 남부에서 공세를 시작했다. 유고 인민군 제4군구는 모스타르 남쪽 네레트바강 동안 대부분 지역 점령을 목표로 했다.[88] 4월 6일 모스타르 주변 전투와 시가지 포격이 시작되었고,[89] 4월 11일 유고 인민군은 스톨라츠의 크로아티아군/방위평의회 부대를 밀어냈다.[90] 5월 7일 휴전이 성립되었지만, 다음날 공격이 재개되어 모스타르 대부분과 네레트바강 서안 일부를 장악했다.[88][90] 5월 12일, 보스니아 주둔 유고 인민군은 스릅스카 공화국군으로 흡수되었다.[91][92] 크로아티아는 유고 인민군의 움직임을 플로체항과 스플리트를 겨냥한 공격의 서막으로 보았다.[93] 이에 대응하기 위해 얀코 보베트코 장군이 남부 전선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크로아티아 육군 지휘구조를 개편하고 제1근위여단과 제4근위여단을 포함한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83][94]

스릅스카 공화국군과 유고 인민군은 4월 11일 스톤 북쪽을 공격하여 크로아티아 육군 제115보병여단을 밀어냈다. 4월 23일 전선이 안정화되었고, 4월 27일 크로아티아가 반격하여 일부 지역을 탈환했다. 5월 17일, 보베트코는 2개 근위여단에 대대적인 공격을 명령했다. 제1근위여단은 슬라노로 진격하고, 제4근위여단은 두브로바치코프리모레 배후지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다. 동시에 유고 인민군은 국제 사회의 압력을 받아 코나블레로 후퇴했다.[95]
제1근위여단은 제115보병여단의 지원을 받아 5월 21일 체피쿠체를, 5월 22~23일에 슬라노를 점령했다. 두브로브니크 무장보트전대가 슬라노에 병력을 상륙시켰지만 격퇴당했다.[96] 5월 23~24일 밤, 유고 인민군은 수스체판과 두브로브니크 북쪽 외곽을 공격했다. 5월 26일, 유고 인민군은 모코시차와 자르코비차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97] 제163보병여단은 두브로브니크로 진격해 제1대대는 브르가트와 주파두브로바치카에, 제2대대는 오소이니크에 배치되었다.[95] 5월 29일, 제4근위여단이 라브노를 탈환했다.[98] 5월 31일, 제163여단 제2대대가 유고 인민군을 리예카두브로바치카 제방을 따라 아드리아해 고속도로 구간이 내려다보이는 골루보브카멘 산악지대로 밀고 들어갔지만, 고지 점령에는 실패했다. 이 여단은 6월 15일 제145보병여단에게 구출되었다. 두브로브니크는 6월 16일까지 유고 인민군의 포격을 계속 받았고, 6월 30일까지 간헐적으로 포격을 받았다.[97] 6월 7일, 제1근위여단과 제4근위여단이 슬라노 북쪽 오라호브도 인근까지 진격하며 공세를 끝마쳤다.[96]
6. 여파
두브로브니크 포위전은 군사적인 결과보다는 유고 인민군(JNA)의 대규모 약탈과 두브로브니크 시내, 특히 구시가지에 대한 포격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국제 언론의 반응과 보도는 부코바르 전투 이후 형성된 유고 인민군과 세르비아의 행동이 야만적이며 크로아티아를 지배하려는 야욕이라는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61] 유네스코는 포위전 기간 두브로브니크를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했으며, 1992년 1월 14일 뉴욕 타임스에는 라이너스 폴링을 대표로 한 노벨상 수상자 104명이 유고 인민군의 무절제한 파괴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전면광고를 게재했다.[99] 이 사건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에서 신유고 연방의 국제 외교적, 경제적 고립을 심화시켰고,[61] 유고슬라비아와 세르비아는 서방 세계에서 "침략국"으로 인식되었다.[100] 1991년 12월 17일 유럽 경제 공동체는 1992년 1월 15일을 기점으로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인정하기로 합의했다.[101]
1991년 10월에서 12월 사이 유고 인민군은 두브로브니크 주변 약 1,200 km2에 달하는 영토를 점령했으나, 1992년 5월 유고 인민군이 크로아티아군의 공세로 동쪽으로 철수하면서 탈환되었고, 이후 크로아티아군의 타이거 작전과 코나블레 전투를 통해 모든 영토를 회복했다.[94][102][103]
당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정부는 유고 인민군의 두브로브니크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시가지의 피해를 부인하려 했다. 세르비아 라디오 텔레비전은 구시가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두브로브니크 주민이 자동차 타이어에 불을 붙여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을 반복하며[118] 유고 인민군은 공격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119] 몬테네그로의 관리와 언론은 두브로브니크 공격을 "평화를 위한 전쟁"[120] 또는 "봉쇄 조치"라고 불렀다.[121] 2010년 세르비아에서 시행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0%가 두브로브니크를 포격한 세력이 누구인지 몰랐고, 14%는 포격이 전혀 없었다고 믿었다.[122] 2000년 6월, 몬테네그로의 대통령 밀로 주카노비치는 두브로브니크 공격에 대해 크로아티아에 사과했으나,[123] 몬테네그로 내 주카노비치 반대파나 세르비아 정부는 이 사과를 비난했다.[125]
2007년 몬테네그로의 영화 감독 코차 파블로비치는 《라트 자 미르》(Rat za mir, "평화를 위한 전쟁"이란 뜻)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포위전 기간의 프로파간다 역할, 모린 수용소 포로들의 증언, 유고 인민군 병사와의 인터뷰를 공개했다.[126][127] 2011년 몬테네그로 라디오 텔레비전은 전쟁 기간 동안 텔레비전이나 신문사가 기록을 파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남은 아카이브 영상을 담은 《라트 자 두브로브니크》(Rat za Dubrovnik, "두브로브니크 전쟁"이란 뜻)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128][129] 2012년에는 해상 봉쇄를 뚫고 두브로브니크에 인도적 지원을 전달하려는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콘보이 리베르타스》(Konvoj Libertas)가 개봉되었다.[130]
6. 1. 인명 피해
포위전 기간 크로아티아인 민간인 82명에서 88명이 사망했으며,[75] 크로아티아군 병사 194명이 사망했다.[104] 1991년 10월에서 12월 사이 크로아티아군 병사 94명이 사망했다.[105] 1992년 10월 말 기준 두브로브니크 인근에서 발생한 모든 군사작전으로 군인 총 417명이 사망했다.[106] 유고 인민군은 165명이 사망했다.[107]코나블레 및 두브로브니크 주변 지역에서 발생한 난민 15,000명 이상이 두브로브니크 시내로 도피했으며, 약 16,000명의 난민이 두브로브니크에서 해상 피난로를 통해 크로아티아 내 다른 지역으로 대피했다.[51] 유고 인민군은 포로를 구금하기 위해 빌레차 수용소와 모린 수용소 두 곳의 포로 수용소를 운용했다. 공세 기간과 그 이후 대부분 코나블레 출신 민간인 432명(빌레차 140명, 모린 292명)이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당했다.[108] 유고 인민군과 세르비아계 준군사조직, 민간인이 포로를 학대했으며, 여기에는 구타와 살해 위협 등이 있었다.[109] 이들 중 상당수는 1991년 12월 12일 크로아티아가 가진 전쟁포로와 교환되었다.[110] 두 수용소는 1992년 8월까지 운영되었다.[111]
6. 2. 재산 피해

두브로브니크 포위전은 유고 인민군의 대규모 약탈과 두브로브니크 시내, 특히 구시가지를 향한 포격으로 큰 피해를 낳았다.[61] 이 사건은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1991년 12월 17일 유럽 경제 공동체는 1992년 1월 15일을 기점으로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인정하기로 합의했다.[101]
포위전 기간 동안 두브로브니크 지역의 11,425개 건물이 피해를 입었다. 이 중 886채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1,675채는 지속적인 피해를 입었으며,[112] 재산 피해 금액은 로 추산되었다.[113] 특히 구시가지 내 건물의 55.9%가 손상되었고, 11.1%가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며, 1%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불에 탄 바로크 양식 호화 건물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115]
유고 인민군은 박물관, 기업, 개인 주택 등을 약탈했다. 차브타트에 있던 블라호 부코바츠 기념관 건물 내 모든 전시물과 쿠파리 마을 내 호텔에 있던 모든 집기가 약탈당했으며,[56] 슬라노의 성 예로니모 프란치스코회 수도원도 약탈 표적이 되었다.[50] 유고 인민군은 약탈 사실을 인정했지만, 약탈 재산을 세르브인 난민에게 분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약탈된 재산이 약탈자의 개인 주택으로 옮겨지거나 암시장에 팔렸다고 추정된다.[116] 두브로브니크 공항 내 장비들도 약탈되어 포드고리차 공항이나 티밧 공항으로 옮겨졌다.[117]
당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정부는 두브로브니크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다. 세르비아 라디오 텔레비전은 구시가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두브로브니크 주민이 자동차 타이어에 불을 붙여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며[118] 유고 인민군은 공격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119] 몬테네그로의 관리와 언론은 두브로브니크 공격을 "평화를 위한 전쟁"[120] 또는 "봉쇄 조치"라고 불렀다.[121] 2010년 세르비아에서 시행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0%가 두브로브니크를 포격한 세력이 누구인지 몰랐고, 14%는 포격이 전혀 없었다고 믿었다.[122]
2000년 6월, 몬테네그로의 대통령 밀로 주카노비치는 두브로브니크 공격에 대해 크로아티아에 사과했다.[123] 크로아티아에서는 이 사과를 환영했지만,[124] 몬테네그로 내 주카노비치 반대파나 세르비아 정부는 이 사과를 비난했다.[125]
6. 3. 전쟁 범죄 혐의
두브로브니크 포위전은 군사적 결과와는 별개로, 유고 인민군(JNA)의 대규모 약탈과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포격으로 인해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1991년 10월부터 12월까지 유고 인민군은 두브로브니크 주변 1,200 km2에 달하는 영토를 점령하면서 민간인과 문화 유산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94]포위전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인 민간인 82명에서 88명이 사망했으며,[75] 크로아티아 군인 194명이 사망했다.[104] 유고 인민군은 165명이 사망했다.[107] 코나블레 및 두브로브니크 주변 지역에서 15,000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하여 두브로브니크 시내로 피난했고, 약 16,000명의 난민이 해상 피난로를 통해 크로아티아 내 다른 지역으로 대피했다.[51]
유고 인민군은 빌레차와 모린 수용소 두 곳의 포로 수용소를 운영하며, 포로로 잡힌 사람들을 구금하고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가했다.[108] 특히, 코나블레 출신 민간인 432명이 이 수용소에 구금되어 고통을 겪었다.[108] 이들 중 상당수는 1991년 12월 12일 크로아티아 측 전쟁 포로와 교환되었지만,[110] 두 수용소는 1992년 8월까지 운영되었다.[111]
두브로브니크 지역의 11,425개 건물이 포위전 중 피해를 입었으며, 이 중 886채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1,675채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112] 재산 피해 금액은 로 추산되었다.[113] 특히, 구시가지 내 건물의 55.9%가 손상되었고, 11.1%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며, 1%는 완전히 소실되었다.[115] 유고 인민군은 박물관, 기업, 개인 주택 등을 약탈하여 추가 피해를 입혔으며, 차브타트에 있던 블라호 부코바츠 기념관과 쿠파리 마을 내 호텔, 슬라노의 성 예로니모 프란치스코회 수도원도 약탈 대상이 되었다.[56][50] 두브로브니크 공항의 장비들도 약탈되어 포드고리차 공항이나 티밧 공항으로 옮겨졌다.[117]

이러한 만행에 대해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파블레 스트루가르, 미오드라그 요키치 등 유고 인민군 고위 관계자들을 기소했다.[133][134] 스트루가르는 민간인 공격, 군사적 필요성이 없는 파괴 행위, 전시국제법 위반 등의 혐의로 7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고,[138] 요키치는 살인, 민간인 학대, 전쟁법 위반 등의 혐의로 7년 형을 선고받았다.[139]
몬테네그로 정부는 1991년과 1992년 모린 수용소에서 포로 학대를 저지른 혐의로 전 유고 인민군 병사 6명을 기소했으며,[145] 이 중 4명이 2013년 7월 유죄 판결을 받았다. 또한, 모린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많은 포로들이 몬테네그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보상을 받았다.[146]
크로아티아는 2008년 트레비네 시장이자 두브로브니크 공격 당시 헤르체고비나 동부의 세르브계 보스니아인 지도자였던 보지다르 부추레비치를 민간인 공격 혐의로 기소했다.[147][148] 2009년에는 유고 인민군 장교 10명을 추가로 기소했다.[25]
6. 3. 1. 국제사회의 반응
두브로브니크 포위전은 유고 인민군(JNA)의 대규모 약탈과 구시가지를 포함한 두브로브니크 시내 포격으로 인해 국제사회의 큰 비난을 받았다. 국제 언론은 이 사건을 부코바르 전투 이후 형성된 유고 인민군과 세르비아에 대한 부정적 인식, 즉 이들의 행동이 야만적이며 크로아티아 지배 야욕을 드러낸다는 인식을 강화하는 계기로 보았다.[61]
사라고사 시장, 밴스 특사, 유럽 공동체 감시단(ECMM)의 항의 외에도,[74] 1992년 1월 14일 《뉴욕 타임스》에는 라이너스 폴링을 포함한 노벨상 수상자 104명이 유고 인민군의 파괴 행위를 중단하라는 전면 광고를 게재했다.[99] 유네스코는 포위전 기간 동안 두브로브니크를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했다.
두브로브니크 포위전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에서 신유고 연방이 국제적으로 외교적, 경제적 고립을 겪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61] 유고슬라비아와 세르비아는 서방 세계에서 "침략국"으로 인식되었다.[100] 1991년 12월 17일, 유럽 경제 공동체는 1992년 1월 15일부터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인정하기로 합의했다.[101]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정부는 유고 인민군의 두브로브니크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시가지의 피해를 부인하려는 시도를 했다. 세르비아 라디오 텔레비전은 구시가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주민들이 타이어를 태워서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며,[118] 유고 인민군은 공격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119] 몬테네그로의 관리와 언론은 두브로브니크 공격을 "평화를 위한 전쟁"[120] 또는 "봉쇄 조치"라고 불렀다.[121] 2010년 세르비아에서 실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0%는 누가 두브로브니크를 포격했는지 몰랐고, 14%는 포격 자체가 없었다고 믿었다.[122]
2000년 6월, 몬테네그로의 대통령 밀로 주카노비치는 크로아티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두브로브니크 공격에 대해 사과했다.[123] 크로아티아는 이 사과를 환영했지만,[124] 몬테네그로 내 주카노비치 반대파와 세르비아 정부는 이를 비난했다.[125]
2007년 몬테네그로의 영화 감독 코차 파블로비치는 《라트 자 미르》(Rat za mir, "평화를 위한 전쟁"이란 뜻)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포위전 기간의 프로파간다 역할, 모린 수용소 포로들의 증언, 유고 인민군 병사와의 인터뷰를 공개했다.[126][127] 2011년 몬테네그로 라디오 텔레비전은 전쟁 기간 동안 텔레비전이나 신문사가 기록을 파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남은 아카이브 영상을 담은 《라트 자 두브로브니크》(Rat za Dubrovnik, "두브로브니크 전쟁"이란 뜻)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128][129] 2012년에는 해상 봉쇄를 뚫고 두브로브니크에 인도적 지원을 전달하려는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콘보이 리베르타스》(Konvoj Libertas)가 개봉되었다.[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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