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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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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학보는 삼국 시대 유비 휘하에서 영릉 태수를 지냈으며, 손권과의 분쟁 중 항복했다가 다시 오나라로 돌아가 정위까지 승진했다. 손권에게 책임을 추궁당하여 자결했다.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영릉 태수로 임명되어 관우의 휘하에 있었고, 손권이 파견한 태수를 관우가 물리치자 여몽의 계략에 속아 항복했다. 이후 유비에게 돌아갔으나 다시 손권에게 귀부하여 정위가 되었다. 은번이라는 인물과 친하게 지냈으나, 은번이 위나라의 첩자임이 밝혀지면서 학보 역시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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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보
기본 정보
이름郝普 (Hǎo Pǔ, 하오 푸)
子太 (Zǐ Tài, 쯔 타이)
출생생년 미상
출신지형주의양군
사망미상
소속유비손권
직위정위

2. 생애

정위(손권)작위소속유비손권



유비 휘하에서 영릉태수를 지내다 여몽의 계략에 빠져 오나라에 투항하게 되었고, 이후 오나라에서 정위까지 승진하였다. 그러나 위나라 첩자 은번과의 관계로 인해 손권에게 추궁을 받자 자살하였다.[1]

촉한의 양희는 저서 『계한보신찬』에서 학보를 미방, 사예, 반준과 함께 "위, 오 두 나라의 웃음거리가 된 자들"이라고 평가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2. 1. 유비 휘하 시절

214년(건안 19년), 유비익주를 평정하고 학보를 영릉 태수로 임명하여 관우의 휘하에 두었다. 같은 해, 손권은 유비가 반환을 주저하던 장사, 영릉, 계양 3군에 태수를 파견하였으나, 관우는 이들을 모두 쫓아냈다. 이에 손권은 직접 군세를 이끌고 육구(陸口)에 주둔하였고, 노숙을 파구(巴丘)에 주둔시켜 관우를 포위하였으며, 여몽에게 3군을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장사군과 계양군은 바로 항복하였으나, 영릉군의 학보는 항복하지 않고 그대로 수비하였다.[1]

얼마 후, 유비는 군세를 이끌고 공안(公安)에 주둔하였고, 관우는 3군을 탈환하기 위해 장사군 익양현(益陽縣)으로 향하였다. 손권은 여몽에게 노숙을 구원할 것을 명하였는데, 이때 여몽은 학보의 옛 친구인 남양군 사람 등현지(鄧玄之)를 불렀다. 여몽은 등현지를 영릉으로 보내 학보에게 "유비는 한중에서 하후연에게 포위당했고, 관우는 남군에서 손권에게 격파당했다"라는 거짓 정보를 전하게 하였다. 등현지의 말을 들은 학보는 전의를 잃고 항복하였으나, 여몽을 만난 후 등현지의 말이 거짓임을 알고 부끄러워 그 자리에서 엎어졌다.[1]

이후 유비와 손권은 화친하였고, 학보는 유비에게 돌아갔으나 얼마 후 손권에게 다시 돌아갔으며, 정위까지 승진하였다.[1]

2. 2. 여몽의 계략과 오나라 투항

214년(건안 19년), 유비익주를 평정한 후 학보는 영릉태수에 임명되어 관우의 밑에 있었다. 그 해, 손권은 유비가 반환을 주저하던 장사, 영릉, 계양 3군에 태수를 파견했으나, 관우는 이들을 쫓아냈다. 손권은 직접 군을 이끌고 육구에 주둔하고, 노숙을 파구에 주둔시켜 관우를 포위했으며, 여몽에게 3군을 공격하도록 했다. 장사군과 계양군은 바로 항복했으나, 영릉군의 학보는 항복하지 않고 그대로 수비하였다.

얼마 후 유비가 군을 이끌고 공안에 주둔하자, 관우는 3군을 탈환하기 위해 익양으로 향했다. 손권은 여몽에게 노숙을 구원할 것을 명했는데, 이때 여몽은 학보의 옛 친구인 남양 사람 등현지를 불렀다. 여몽은 등현지를 영릉으로 보내 학보에게 "유비는 한중에서 하후연에게 포위당했고, 관우는 손권이 남군에서 격파하였다"라는 거짓 정보를 알리게 했다. 등현지의 말을 들은 학보는 전의를 잃고 항복했으나, 여몽을 만난 후 등현지의 말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되자 부끄러워 그 자리에서 엎어졌다.[1]

2. 3. 오나라에서의 관직 생활과 최후

230년(황룡 2년), 동오에 투항한 청주 사람 은번(隱蕃)은 그 재능으로 정위감(廷尉監)에 임명되었다. 학보는 은번과 친하게 지냈으며, 좌장군(左將軍) 주거와 함께 은번이 왕좌지재(王佐之才 : 왕을 보좌할 만한 재능이 있음)라며 칭찬하였고, 심지어는 은번이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함을 불평할 정도였다.[1] 그러나 은번은 사실 위나라에서 보낸 첩자임이 밝혀졌고, 손권은 은번을 죽였다. 학보 또한 손권이 책임을 추궁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

3. 평가

건안 19년(214년), 유비익주를 평정한 후 하오푸는 영릉 태수로 임명되었으나, 손권과의 갈등 속에서 거짓 정보에 속아 항복했다가 다시 유비에게 돌아갔다. 이후 오나라에서 정위까지 승진했지만, 나라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자살했다.[1]

촉한의 양희가 저술한 『계한보신찬』에서는 미방, 사예, 반준과 함께 "위, 오 두 나라의 웃음거리가 된 자들"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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