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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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권은 삼국 시대 오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손견의 아들로, 형 손책의 뒤를 이어 19세의 나이로 강동 지역을 기반으로 한 오나라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유비와의 동맹을 통해 조조에 맞서 적벽대전에서 승리하는 등 세력을 확장했다. 229년 황제에 즉위하여 영토를 넓히고 내정을 다스렸으나, 말년에 후계자 문제로 인해 혼란을 겪었다. 그는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고 불교를 장려하는 등 문화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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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권 - 이릉 대전
이릉 대전은 221년부터 222년까지 유비가 손권의 오나라를 공격한 전투로, 육손의 화공 계책으로 유비가 대패하여 촉한이 큰 피해를 입고 형주를 완전히 상실하는 삼국 시대 판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다. - 182년 출생 - 문소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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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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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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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손권 |
로마자 표기 | Son Gwon |
자 | 중모 |
로마자 표기 | Jungmo |
시호 | 대황제 |
묘호 | 태조 |
출생 | 182년 |
사망 | 252년 5월 21일 |
출생지 | 후한 |
사망지 | 건업 (현재의 난징) |
묻힌 곳 | 자금산 |
정치 | |
정치 체제 | 동오 황제 |
재위 기간 | 229년 5월 23일 ~ 252년 5월 21일 |
즉위 전 | 오왕 |
후계자 | 손량 |
오왕 재위 기간 | 221년 9월 23일 ~ 229년 5월 23일 |
봉작 | 남창후 (219년 12월 ~ 221년 9월 23일)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손견 |
어머니 | 오열황후 |
배우자 | 반황후 사부인 서부인 보황후 대의황후 경회황후 원부인 |
자녀 | 손등 손려 손화 손패 손분 손휴 손량 손노반 손노육 |
연호 | |
연호 | 황무 (222년 ~ 229년) 황룡 (229년 ~ 231년) 가화 (232년 ~ 238년) 적오 (238년 ~ 251년) 태원 (251년 ~ 252년) 신봉 (252년) |
2. 생애
광화 5년(182년) 하비현승이었던 아버지 손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12] 춘추 시대의 병법가 손무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다녔으나, 초평 2년(191년) 혹은 3년(192년) 아버지가 형주의 유표와의 전투 중 전사하자[12] 형 손책을 따라 강동 지역을 전전했다. 15세에 양선현령에 임명되었고, 이후 형 손책의 강동 평정 과정에 참여하며 공을 세웠다.
건안 5년(200년), 형 손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19세의 나이로 그 뒤를 이었다.[18] 형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겼으나, 장소, 주유 등 신하들의 보좌를 받아 혼란을 수습하고 강동 지역의 지배 기반을 다져나갔다. 그는 노숙, 제갈근, 여몽, 육손 등 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세력을 키웠다. 집권 초기에는 이술의 반란을 진압하고, 사촌 손보, 동생 손익 등의 위협을 극복하며 내부 안정을 꾀했다. 또한 여러 차례 군사 작전을 통해 산월족 등 복종하지 않는 세력을 평정하며 지배력을 강화했다.[23]
208년 아버지의 원수인 황조를 토벌하여 복수하고 감녕을 얻었다. 같은 해, 조조가 형주를 침공하자 유비와 동맹을 맺고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여 강동을 지켜냈다. 이후 유비와 형주를 둘러싸고 협력과 갈등을 반복했다. 209년 여동생 손부인을 유비와 결혼시켜 동맹을 강화했으나,[126] 형주 반환 문제를 놓고 대립하다 214년 상강을 경계로 형주를 분할했다. 215년 합비를 공격했으나 장료에게 패배하기도 했다.[127]
219년 관우가 번성을 공격하는 틈을 타 배후를 기습하여 형주 남부를 점령하고 관우를 처형했다.[128] 이로써 유비와의 동맹은 완전히 파기되었고, 221년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위해 침공해왔다(이릉 대전). 손권은 위나라의 조비에게 형식적으로 신하의 예를 갖추어 오왕(吳王)으로 책봉받는 한편, 육손을 기용하여 222년 이릉에서 유비군을 대파했다.
이릉대전 이후 위나라가 아들 손등의 입조를 요구하자 이를 거절하고 222년 독자적인 연호 황무를 사용하여 사실상 독립을 선언했다. 이후 유비 사후의 촉한과 다시 동맹을 맺어 위나라에 공동으로 대항했다. 228년 석정 전투에서 조휴가 이끄는 위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229년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오(吳)라 하고 연호를 황룡(黃龍)으로 정했으며, 수도를 건업으로 옮겼다. 황제 즉위 후 영토 확장을 시도했으나, 230년 이주와 탐주 원정 실패,[129] 233년 요동의 공손연에게 배신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234년 제갈량의 북벌에 호응하여 합비를 공격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말년에는 후계자 문제로 큰 혼란을 겪었다. 241년 태자 손등이 사망하자, 242년 아들 손화를 태자로 삼았으나 다른 아들 손패를 총애하여 두 아들 사이에 파벌 싸움이 벌어졌다(이궁의 변). 이 과정에서 승상 육손을 포함한 많은 충신들이 희생되었다. 결국 250년 손패에게 자결을 명하고 손화마저 폐위시킨 뒤, 막내아들 손량을 태자로 삼았다.
252년 병세가 위독해지자 제갈각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71세(만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29] 자금산에 묻혔으며, 손량이 뒤를 이었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그를 "결단력이 있었으나 시기심이 많고 살육을 좋아했으며, 말년에는 더욱 심해졌다"고 평가했다.
2. 1. 초반 생애와 집권
광화 5년(182년), 아버지 손견이 하비현승으로 있을 때 손권은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12] 손견은 갓 태어난 손권의 비범한 풍모를 보고 장차 고귀한 지위에 오를 것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삼국지 기록에 따르면, 손권은 춘추 시대의 유명한 군사 전략가인 손무(孫武, 흔히 손자로 알려짐)의 후손이라고 한다.광화 7년(184년),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아버지 손견은 주준 휘하에서 반란 진압에 참전했고, 손권은 어머니 오씨 및 형제들과 수춘에 남았다. 중평 6년(189년), 손권의 가족은 주유의 고향인 여강군 서현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주유와 친분을 쌓았다.
초평 2년(191년) 혹은 3년(192년), 아버지 손견이 형주의 유표와의 전투 중 황조의 부하에게 전사하자,[12] 당시 원술 휘하에 있던 형 손책을 따라다니며 여러 지역을 전전했다. 초평 4년(193년), 손책이 원술 휘하에 정식으로 들어가자 여범을 통해 가족들을 단양태수이자 외숙부인 오경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 양주자사 유요는 손책과 원술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여 오경을 쫓아냈다. 당시 유요의 세력권 안에 있던 손권과 가족들은 주치의 도움으로 구출되어[13] 역양과 부릉 등지로 피신했다. 흥평 2년(195년), 손책이 유요를 격파한 후 진보를 보내 가족들을 다시 안전한 곳으로 맞이했다.

손권은 명랑하고 도량이 넓으며, 생각이 깊고 결단력이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형 손책은 중요한 일을 계획할 때 항상 손권과 상의했으며, 그의 의견을 높이 사 자신도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했다.[15] 손책은 연회에서 손님들에게 손권을 가리키며 "이분들이 당신의 장수가 될 사람들이다"라고 말한 일화도 있다.
건안 원년(196년), 15세의 나이로 양선현의 현령(陽羨縣令)에 임명되었고,[14] 이후 추천을 받아 봉의교위(奉義校尉) 대행을 맡았다. 그는 반장, 주태와 같은 인재를 적극적으로 등용했으며, 그의 명성은 점차 아버지 손견과 형 손책에 버금가게 되었다. 학창 시절 만난 주환과 호종 등도 훗날 오나라의 중요한 신하가 되었다.
건안 4년(199년), 손책을 따라 여강태수 유훈을 격파하고, 이어 사선(沙羨)에서 황조를 물리치는 등[16] 형의 강동 평정 과정에 참여하며 공을 세웠다. 이때 행봉의교위(行奉義校尉)에 임명되었다. 건안 5년(200년) 초, 조조가 손책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손권과 동생 손익을 허로 초빙하여 관리로 삼으려 했으나, 그들은 응하지 않았다.[17]
그러나 같은 해, 손책이 허공의 식객에게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18] 26세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손책은 임종 직전, 장사 장소 등이 손견의 삼남 손익을 추천했음에도 불구하고[122] 19세의 손권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형의 죽음에 손권은 크게 슬퍼하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으나, 장소는 그를 격려하며 상복을 벗고 군대를 시찰하게 하여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이끌었다. 훗날 손권은 아버지 손견을 무열황제(武烈皇帝)로 추존하고, 형 손책은 장사환왕(長沙桓王)으로 추증했다.[123]
2. 2. 집권 초기: 혼란 수습과 기반 강화
200년 형 손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18세[19](또는 19세)의 어린 나이로 뒤를 이었다. 형의 죽음에 크게 슬퍼했으나, 장소의 격려로 군복을 입고 형이 다스리던 지역을 순방하며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오나라가 지배하던 지역은 회계, 오군, 단양, 예장, 여강, 여릉 등 강동 6군이었으나, 아직 지배력이 완전하지 않았고 군신 관계도 불안정했다.[124] 일부 신하들은 어린 손권을 의심하여 떠나려 했고, 특히 여강태수 이술은 조조에게 투항하기도 했다. 손권은 조조에게 이술의 죄를 알린 뒤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술을 격파하고 여강을 되찾았다.장소와 주유는 손권의 자질을 알아보고 충성을 다짐했으며, 형 손책이 사신으로 보냈던 장굉도 돌아와 손권을 보좌했다. 장굉의 설득으로 조조는 손권을 토로장군() 겸 회계태수로 임명했다.[19] 손권은 장소를 스승으로 예우하고, 주유, 정보, 여범 등을 군사 지휘관으로 삼았으며, 노숙, 제갈근 등 유능한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그는 민정은 장소와 장굉에게, 군사 문제는 주유, 정보, 여범에게 맡기는 등 적재적소에 인재를 활용했다. 또한 여몽, 주치, 고옹, 보직, 시의, 엄준, 여대, 서성, 주환, 낙통 등 많은 인재들이 그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집권 초기 손권은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사촌 형 손보는 조조와 내통하다 발각되어 유폐되었고, 동생 손익과 숙부 손하는 부하에게 살해당했으며, 사촌 형 손고가 반란을 꾀하기도 했다. 또한 복종하지 않는 산월족의 위협도 계속되었다. 손권은 이러한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거나 장수들을 파견하여 반란 세력을 진압했다. 이술을 토벌하여 3만 명의 병사와 백성을 얻었고, 정보 등과 함께 여러 차례 군사 작전을 벌여 불복종 지역을 평정했다.[23] 206년에는 주유, 손유, 능통 등을 이끌고 산월족의 마둔, 보둔을 토벌하여 1만 명이 넘는 포로를 얻는 등 산월족과의 싸움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손권은 강동 지역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고 내정을 안정시켰다.
202년 원소를 격파한 조조는 손권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으나, 손권은 주유 및 어머니 오부인과 상의한 끝에 이를 거절했다. 같은 해 오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손권은 아버지 손견의 원수인 형주 목 유표의 부하 황조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203년 강하를 공격하여 황조의 수군을 격파했으나,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산월족의 반란으로 회군해야 했다.[23] 이후 여범에게 파양(鄱陽)을 평정하게 하고, 정보에게 낙안(樂安)을 토벌하게 했다. 건안(建安), 한흥(漢興), 남평(南平)의 불복종 민족들이 다시 반항하자, 하제에게 명하여 진압하게 했다. 207년에도 황조를 공격하여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왔다. 208년 봄, 손권은 다시 황조를 공격하여 여몽이 수군을 격파하고 능통, 동습 등이 성을 함락시켜 마침내 황조를 죽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이 과정에서 황조의 부장이었던 감녕을 얻었다.
2. 3. 황조 토벌과 적벽대전
당시 오나라가 지배하던 지역은 회계, 오군, 단양, 예장, 노릉 등이었지만, 이들 군 내에서도 험준한 오지까지는 완전히 복종시키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군신 관계도 제대로 정착되지 않아[124] 주군을 쉽게 바꿀 수 있는 불안정한 시대였다. 그러나 주유와 장소는 손권이 장차 대업을 이룰 인물이라 예견하고 정성을 다해 섬겼다. 손권은 장소를 스승으로 예우하고, 주유, 정보, 여범 등을 군사 지휘관으로 임명했으며, 노숙과 제갈근 같은 우수한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이후 이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복종하지 않는 지역을 토벌하도록 명했다. 한편, 조조는 손책의 죽음을 기회 삼아 손권을 공격하려 했으나, 오나라 사자로 허도에 머물던 장굉의 설득으로 오히려 손권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했다. 조조는 손권을 토로장군에 임명하고 회계태수를 겸임하게 했다.202년 원소를 격파한 조조는 손권에게 편지를 보내 아들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손권은 주유 및 어머니 오씨 부인과 상의한 끝에 인질을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오씨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203년 손권은 황조를 토벌하기 위해 출정하여 그의 수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황조의 거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산악 지대 불복종민들의 불온한 움직임 때문에 회군하여 이들을 진압해야 했다. 207년에도 다시 황조를 공격하여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았다. 208년 봄, 손권은 또다시 황조를 공격했다. 황조는 수군으로 방어하려 했으나 여몽에게 격파당했다. 이어 능통, 동습 등이 정예병을 이끌고 공격하여 마침내 거성을 함락시켰고, 황조는 병사 풍칙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손권은 아버지 손견의 원수를 갚았으며, 이 과정에서 황조의 부장이었던 감녕을 얻게 되었다.
같은 해 208년, 형주목 유표가 죽자 조조는 형주를 침공했고, 유표의 후계자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했다. 남쪽으로 피신한 유비는 제갈량을 손권에게 사자로 보내 동맹을 제안했다. 손권은 조조와의 개전과 항복 사이에서 고심했는데, 제갈량의 설득과 주유, 노숙 등의 주장을 받아들여 유비와 동맹을 맺고 조조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 무렵 조조로부터 "이번에 수군 80만 대군을 정비하여 그대와 오나라 지역에서 사냥(전쟁)을 하고 싶다"는 협박성 편지가 도착했다. 손권의 신하들은 조조의 압도적인 군세(실제로는 약 22만 명으로 추정되나 조조는 80만 명이라 주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장소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항복을 주장했다. 논의가 길어지며 손권의 마음도 흔들렸지만, 주전파인 주유[125]는 조조군이 북방 출신이라 수전에 익숙하지 않고, 먼 원정으로 지쳐 있으며, 형주를 막 점령하여 민심이 불안정하고, 역병까지 돌고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며 항전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에 손권은 결단을 내리고 책상 모서리를 칼로 내리치며 "앞으로 항복을 입에 담는 자는 이 책상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항전 의지를 굳혔다.

손권은 주유에게 3만 명의 수군 중심 병력을 맡겼고, 주유는 유비군(약 1만 명)과 연합하여 방어 태세를 갖췄다. 조조군은 실제로 역병으로 인해 전투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주유는 부하 장수 황개가 자신에게 불만을 품고 조조에게 투항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계책을 사용했다. 황개는 거짓 항복 편지를 보내 조조를 속였고, 투항하는 척하며 조조의 함대에 접근했다. 이후 황개가 이끄는 배들은 조조 함대에 불을 질렀고, 바람을 타고 불길이 번지면서 조조의 함대는 대부분 불타버렸다. 조조는 육로로 급히 후퇴했지만, 퇴각 과정에서 손권과 유비 연합군의 추격으로 많은 병력을 잃었다. 이 전투가 바로 적벽대전이다.
2. 4. 유비와의 동맹과 갈등
208년 형주목 유표가 죽고 조조가 형주를 침공하자, 유표의 뒤를 이은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했다. 남쪽으로 피신한 유비는 제갈량을 손권에게 사자로 보내 동맹을 제안했다. 당시 조조는 "수군 80만 군세를 정비하여 그대와 오나라 지역에서 사냥을 하고 싶다"라는 편지를 보내 손권을 압박했고, 손권 진영에서는 장소를 비롯한 많은 신하들이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주장했다. 손권은 결정을 망설였으나, 제갈량의 설득과 주유[125]의 강력한 항전 주장에 힘입어 유비와 동맹을 맺고 조조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손권은 책상 모서리를 칼로 자르며 "앞으로 항복을 입에 담는 자는 이 책상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이후 벌어진 적벽 대전에서 손권-유비 연합군은 조조군을 크게 격파했다.209년, 주유는 1년간의 공방 끝에 조인을 남군에서 몰아내고 그 지역을 평정했다. 손권은 주유를 남군태수로 임명했고, 유비는 좌장군으로서 형주목을 맡아 공안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손권은 조조를 함께 견제할 동맹 세력을 유지하고자, 여동생 손부인을 부인과 사별한 유비와 결혼시켜 우호 관계를 다졌다. 손부인은 무예를 즐기고 성격이 강인한 여장부였다고 전해진다.[126] 한편, 주유는 유비의 의도를 의심하여 손권에게 유비를 연금하고 그의 군대를 흡수할 것을 제안했으나, 손권은 유비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이를 거절했다.
214년,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자 손권은 약속했던 형주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유비는 양주를 얻으면 돌려주겠다고 답하며 이를 미루었다. 이에 분노한 손권은 여몽을 파견하여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무력으로 점령했고, 형주를 지키던 관우와 대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조가 한중을 침공하자 유비는 익주마저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손권과 화해했다. 양측은 형주를 동서로 나누어 동쪽은 손권이, 서쪽은 유비가 다스리기로 합의했다(상강 조약).
217년, 손권은 조조에게 형식적으로 항복했는데, 이는 형주를 둘러싼 유비와의 계속된 불화 때문으로 보인다. 219년, 관우가 조인이 지키는 번성을 공격하기 위해 북진하자, 손권은 이를 형주를 완전히 장악할 기회로 여겼다. 손권은 여몽이 병에 걸렸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 관우를 방심하게 한 뒤, 은밀히 전쟁을 준비했다. 관우가 주력군을 이끌고 번성으로 이동하자 손권은 즉시 관우의 배후를 공격하여 형주를 점령하고, 결국 관우를 사로잡아 처형했다.[128] 이로써 손권과 유비의 동맹은 완전히 파기되었다.
221년, 유비는 촉한의 황제로 즉위한 뒤 관우의 복수를 위해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침공했다(이릉 대전). 손권은 조비가 세운 위나라에 신하의 예를 갖추어 오왕으로 책봉받는 한편, 육손을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유비의 공격을 막게 했다. 222년, 육손은 화공으로 유비군을 대파하여 촉한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이릉대전 이후 위나라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조비가 손권의 아들 손등을 인질로 요구하자 손권은 이를 거부하고 222년 독자적인 연호 황무를 사용하여 사실상 독립을 선언했다. 위나라가 침공해왔으나 반장 등이 이를 격퇴했다. 유비가 죽은 후, 촉한의 실권을 잡은 제갈량은 오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고, 손권 역시 이에 호응하여 223년 이후 오와 촉은 다시 동맹 관계를 회복하여 위나라에 공동으로 대항하게 되었다. 이 동맹은 263년 촉한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2. 5. 위나라와의 관계 변화와 형주 점령
조조는 손책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손권을 공격하려 했으나, 오나라 사자로 허도에 머물던 장굉의 설득으로 오히려 손권을 토로장군에 임명하고 회계태수를 겸임시켰다. 202년 원소를 격파한 조조는 손권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지만, 손권은 주유 및 어머니 오씨 부인과 상의한 끝에 이를 거절하며 조조와의 관계에서 자주적인 태도를 보였다.208년 황조를 토벌하여 아버지 손견의 원수를 갚고 감녕을 얻은 해, 형주목 유표가 죽자 조조는 형주를 침공했다. 유표의 뒤를 이은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했고, 남쪽으로 피난 온 유비는 제갈량을 사자로 보내 손권에게 동맹을 제안했다. 조조로부터 수군 80만으로 오나라를 공격하겠다는 협박성 서신이 도착하자 손권 내부에서는 항복론이 우세했으나, 주유와 노숙 등의 주전론과 제갈량의 설득에 힘입어 손권은 유비와 동맹을 맺고 조조에 맞서기로 결단했다. 손권은 책상 모서리를 자르며 항복을 주장하는 자를 처단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125] 이어진 적벽대전에서 손권-유비 연합군은 황개의 거짓 항복과 화공을 이용해 조조의 대군을 크게 격파했다.
209년 주유가 조인을 물리치고 남군을 점령하자, 손권은 주유를 남군태수로 삼고 유비를 형주목으로 인정하여 공안에 근거지를 마련하게 했다. 또한 유비와의 동맹 강화를 위해 여동생 손부인을 유비와 혼인시켰다.[126] 211년 손권은 본거지를 말릉으로 옮겼고, 이듬해 건업(建業)으로 개명하며 수도를 정비했다. 213년 조조가 유수구를 침공하자 손권은 직접 방어에 나서 한 달 넘게 대치했다. 손권이 직접 배를 타고 조조 진영을 정찰했을 때, 그의 군대가 매우 정돈된 모습을 보이자 조조는 "자식을 낳는다면 손권 같은 이를 원한다"고 감탄하며 물러갔다고 전해진다.
214년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자 손권은 약속했던 형주 반환을 요구했으나 유비가 거절하자, 여몽을 보내 장사, 영릉, 계양 3개 군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이로 인해 관우와 대치하며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으나, 조조가 한중을 침공하자 유비는 익주 방어를 위해 손권과 화해했다. 결국 형주의 동쪽(장사, 계양, 강하)은 손권이, 서쪽(남군, 영릉, 무릉)은 유비가 차지하는 것으로 상강을 경계로 형주를 분할했다. 215년 손권은 10만 대군으로 위의 합비를 공격했으나 장료의 분전으로 실패하고, 퇴각 중 기습을 받아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 전투에서 진무가 전사하자 손권은 크게 슬퍼하며 직접 장례를 치렀다.[127]
217년 조조가 다시 유수구를 공격해왔으나 여몽의 활약으로 격퇴했다. 그러나 위의 하후돈이 대군을 이끌고 주둔하고 있어 군사적 돌파가 어렵자, 손권은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했다. 특히 형주 문제로 유비와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손권은 조조에게 형식적으로 항복하고 동맹을 맺었다. 조조는 손권의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하며 그가 차지한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공식화해주었다. 이로써 손권은 명목상 조조의 신하가 되었지만 실질적인 독립 세력으로 남았다.
219년 관우가 조인을 공격하기 위해 번성으로 북진하자, 손권은 이를 형주 전체를 장악할 기회로 여겼다. 여몽에게 병을 핑계로 소환하는 척하며 비밀리에 전쟁 준비를 시켰고, 관우가 방심한 틈을 타 배후를 기습하여 강릉과 공안 등 형주 남부를 점령했다. 고립된 관우는 결국 사로잡혀 처형되었고,[128] 미방 등은 손권에게 귀순했다. 이로써 손권은 오랫동안 원했던 형주 지역 대부분을 확보하게 되었다.
220년 조조가 사망하고 아들 조비가 헌제를 폐위하고 위나라 황제로 즉위하자, 손권은 위에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221년 촉한의 유비가 황제를 칭하고, 형주를 되찾고 관우의 복수를 위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침공했다(이릉대전).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하여 방어를 맡기는 한편, 위의 침공을 막기 위해 조비에게 계속 사신을 보내며 낮은 자세를 취했다. 조비가 진귀한 진상품을 요구하자 신하들은 반발했지만, 손권은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요구를 들어주었다. 222년 육손이 이릉에서 화공으로 유비군을 대파하면서 오나라는 큰 위기를 넘겼다.

이릉대전 승리 후, 위나라와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조비가 손권의 아들 손등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으나 손권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이에 위나라는 조진, 하후상 등을 보내 오나라를 침공했지만, 반장 등이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이후 손권은 촉한과 다시 동맹을 복원하여 위나라에 공동으로 대항하는 구도를 형성했다.
228년, 오나라 장수 주방이 거짓으로 위에 투항하는 척하여 위의 대사마 조휴를 유인했다. 손권은 육손과 함께 석정에서 조휴의 군대를 매복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는 위나라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오나라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229년 손권은 마침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연호를 황룡(黃龍)이라 정했다. 이로 인해 한나라의 정통성을 주장하던 촉한과의 관계가 잠시 긴장되었으나, 제갈량의 노력으로 동맹은 유지되었고 위나라를 공동으로 공격하여 영토를 나누기로 하는 조약까지 체결했다. 같은 해 수도를 건업으로 다시 옮겼다.
2. 6. 이릉 대전과 황제 즉위
219년 관우가 조인이 지키는 번성을 공격하며 북진하자, 형주를 노리던 손권은 이를 기회로 삼았다. 손권은 여몽이 병에 걸렸다고 소환하는 척하며 비밀리에 전쟁 준비를 했고, 이에 속은 관우가 형주의 수비 병력까지 북진시키자 그 배후를 공격했다. 결국 손권은 형주를 점령하고 관우를 사로잡아 처형했으며, 미방 등은 투항했다.[128]220년 조조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조비가 헌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위나라의 황제(문제)로 즉위했다. 이듬해인 221년에는 촉한의 유비 역시 황제를 칭했다. 손권은 외교적 안정을 위해 위에 신하의 예를 갖추었고, 조비로부터 오왕(吳王)으로 책봉되었다.
같은 해 7월, 관우의 복수를 명분으로 유비가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침공하자 이릉 대전이 발발했다.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삼아 방어를 맡겼다. 동시에 위나라의 침공 가능성을 막기 위해 조비에게 계속 사자를 보내고, 조비가 상아, 진주 등 귀한 예물을 요구하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목숨이 나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며 요구를 들어주었다고 한다. 222년 육손은 이릉에서 화공으로 유비의 촉한군을 대파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릉 대전 이후 위나라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문제가 손권의 아들을 조정 관직에 임명한다는 명분으로 인질을 요구했으나 손권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결국 위나라는 조진, 하후상 등을 보내 오나라를 공격했지만, 반장 등이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했으며 손권은 이 공로로 반장을 우장군으로 진급시켰다. 이릉 대전 이후 손권은 촉한에 사자를 보내 유비 사후의 촉한과 다시 동맹 관계를 회복했다.
2. 7. 황제 즉위 이후: 영토 확장과 내정
229년(황룡 원년) 손권은 여러 신하들의 권고로 마침내 황제에 즉위하였다. 아버지 손견을 무열황제(武烈皇帝)로 추존하였다.황제 즉위 후, 손권은 영토 확장과 내정 안정에 힘썼으나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230년에는 잦은 전쟁으로 인한 인구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위온(衛溫)과 제갈직(諸葛直)에게 병사 1만 명을 주어 바다 건너 이주(夷洲)와 탐주(亶洲)를 찾아 주민을 징발하도록 명령했다. 이 섬들은 오늘날의 타이완이나 류큐 제도로 추정된다. 노숙과 장굉(혹은 권굉) 등이 강력히 반대했음에도 원정은 강행되었다. 함대는 탐주를 찾지 못하고 이주에 도착하여 수천 명의 주민을 사로잡아 231년 돌아왔으나, 항해 중 질병 등으로 파견된 병력의 80~90%를 잃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손권은 이 실패의 책임을 물어 위온과 제갈직을 처형했는데, 이는 그의 통치에 쇠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당시 태자였던 손등은 이러한 손권의 판단력 약화를 우려하여 232년 서방 제국의 통치를 육손에게 맡기고 건업으로 돌아와 241년 사망할 때까지 머물렀다.
232년, 손권은 해상 활동에서 또 다른 실패를 겪었다. 유번의 조언을 무시하고 요동군의 공손연에게 말을 사기 위해 주하(周賀)와 배잠(裴潛)을 파견했다. 심지어 반대한 유번을 황량한 창오군으로 유배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유번의 예측대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주하와 배잠은 돌아오는 길에 위나라 군대에 붙잡혀 목숨을 잃었다. 손권은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유번을 다시 불렀으나, 그는 이미 유배지에서 사망한 후였다.
이듬해인 233년, 공손연이 오나라에 사신을 보내 신하가 되기를 청하자 손권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연왕(燕王)으로 봉하고 구석을 하사했다. 장소를 비롯한 거의 모든 고위 관리들이 공손연을 신뢰할 수 없다며 반대했지만, 손권은 듣지 않고 1만 명의 군사와 많은 금은보화를 실어 요동으로 보냈다. 그러나 군대가 도착하자 공손연은 오나라 사절 장미(張彌)와 허안(許晏)을 죽이고 군사와 재물을 빼앗아 위나라에 바치는 배신 행위를 저질렀다. 격분한 손권은 직접 함대를 이끌고 공손연을 치려 했고, 육손의 반대조차 처음에는 막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진정하고 계획을 실행하지는 않았으며, 이후 자신의 판단 착오를 인정하고 직접 장소의 집을 찾아가 사과하며 관계를 회복하려 했다.
234년, 촉한의 제갈량이 마지막 북벌을 감행하자 손권도 이에 호응하여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의 합비를 공격했다(합비 전투). 동시에 육손과 제갈각에게는 양양을 공격하게 하여 위나라 군대를 분산시키려 했다. 하지만 위나라 장수들은 손권의 주력군이 합비에 집중된 것을 간파하고 양양 방면의 공격은 막아내면서 합비는 만총 등이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결국 손권은 식량 부족과 조예가 직접 이끄는 구원군 도착으로 인해 별다른 성과 없이 철수해야 했다.
235년, 위나라 황제 조예가 오나라를 얕보는 듯한 태도로 진주, 옥, 거북 등딱지 등 보물과 말을 교환하자고 제안했을 때, 손권은 암묵적인 모욕을 감수하고 제국의 실리를 우선하여 말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교환에 응했다. 이는 손권이 때때로 감정보다 현실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238년, 요동의 공손연이 위나라 사마의의 공격을 받게 되자 손권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손권은 과거 공손연에게 당한 배신을 기억했지만, 사마의가 고전할 경우 얻을 이익을 고려하여 즉각 거절하지는 않고 상황을 관망했다. 그러나 사마의가 예상보다 빠르게 공손연을 제압하자, 손권은 계획했던 군사 행동을 실행하지 않았다. 같은 해, 손권은 감찰관 여의가 권력을 남용하고 부정행위를 저지른 사실을 밝혀내고 처형했다. 또한 제갈각, 보즐, 주환, 여대 등 중신들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최근 국정 운영에서의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앞으로 잘못이 있다면 거리낌 없이 지적해달라고 당부하며 신뢰를 재확인하려 노력했다.
241년, 위나라 황제 조예가 239년 사망한 것을 계기로 손권은 위나라에 대한 마지막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때 은례(殷禮, 혹은 殷札)가 제안한 촉한과 협력하여 4개 전선에서 위나라를 공격하는 전략을 거절했고, 결국 별다른 성과 없이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같은 해, 오랫동안 손권을 보좌하며 신망이 두터웠던 태자 손등이 병으로 사망하여 후계 구도에 불안정성을 더하게 되었다.

2. 8. 말년의 실정과 후계 문제
230년 손권 통치의 쇠퇴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위온과 제갈직 장군에게 1만 명의 병력을 주어 전설의 섬 이주(夷洲)와 탐주(亶洲)를 찾도록 보냈는데, 이는 노숙과 보즐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되었다. 이 섬들은 대만이나 류큐 제도로 추정된다. 함대는 이주를 찾아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았으나, 병력의 80~90%가 질병으로 사망하는 큰 손실을 입고 231년 돌아왔다. 손권은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지 않고 위온과 제갈직을 처형했다. 이러한 손권의 판단력 저하를 우려한 황태자 손등은 232년 건업으로 돌아와 241년 사망할 때까지 머물렀다.232년 손권은 요동군의 공손연에게 말을 사기 위해 주하와 배잠(裴潛)을 파견했으나, 유엽의 반대를 무시하고 그를 창오군으로 유배 보냈다. 유엽의 예측대로 계획은 실패했고, 주하와 배잠은 귀환 중 위나라 군대에 사로잡혀 살해당했다. 손권은 이를 후회하고 유엽을 다시 부르려 했으나 그는 이미 유배지에서 사망한 후였다.
233년 공손연이 신하가 되겠다고 제의하자 손권은 기뻐하며 그를 연왕(燕王)으로 봉하고 장소 등 대부분 신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만 명의 군대를 보내 지원하려 했다. 그러나 공손연은 배신하여 손권이 보낸 사신 장미(張彌)와 허안(許晏)을 죽이고 군대를 빼앗았다. 격분한 손권은 직접 공손연을 공격하려 했으나, 보즐 등의 만류로 결국 진정하고 계획을 실행하지 않았다. 그는 장소의 집을 직접 찾아가 사과하기도 했다.
234년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에 호응하여 손권은 직접 위나라의 합비를 공격하고, 육손과 제갈근은 양양을 공격했다. 그러나 위나라 장수들은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고, 손권은 합비를 포위했으나 식량 부족과 조예의 증원군 도착으로 결국 철수했다.
238년 사마의가 공손연을 공격하자 손권은 이전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인 지원 요청 거절은 하지 않았으나, 사마의가 신속하게 공손연을 정복하자 대규모 공격 계획은 실행하지 않았다. 같은 해, 감찰관 여일의 권력 남용을 파악하고 처형했으며, 제갈근, 보즐, 주환, 여대 등에게 편지를 보내 최근 행정 문제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잘못을 지적해달라며 신뢰를 재확인하려 했다.
241년 조예 사후 위나라에 대한 마지막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으나, 은례가 제안한 촉한과의 연합 작전은 거절했고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241년 황태자 손등이 죽자 후계 문제가 불거졌고, 이는 손권 말년의 큰 실정으로 이어졌다. 242년 손화를 황태자로 삼았으나, 다른 아들 손패 역시 편애하여 황태자와 동등한 대우를 해주었다. 이로 인해 신하들은 손화파와 손패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고옹의 뒤를 이은 승상 육손은 적자와 서자의 차별을 두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상소했으나, 손패파의 모함으로 죄를 뒤집어쓰고 유배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였다. 손권이 보낸 사자의 문책에 육손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후 후계 다툼은 더욱 격화되었다. 손권은 딸 손노반의 험담에 넘어가 손화의 어머니 왕부인을 질책했고, 왕부인은 공포 속에서 사망했다. 손권은 손화와 손패가 지지 세력과 접촉하는 것을 막았지만 손패의 음모를 막지는 못했다. 여몽이 손화를 보호하려고 개입하려 하자, 손패는 그에게 많은 죄를 덮어씌웠고, 손권은 크게 분노하여 여몽을 반복해서 꾸짖어 좌절 속에서 죽게 만들었다.[129]
250년 손권은 손패가 손화를 계속 공격하는 것에 지쳐, 손패에게 자결을 명하고 그의 일파를 처형했으며, 동시에 아무 죄 없는 손화를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시켰다. 대신 막내아들 손량을 황태자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손화의 폐위를 반대한 사위 주거(손권의 딸 손노육의 남편)를 포함한 수십 명의 신하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이 무렵 손권은 위나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국경 근처의 제방 여러 곳을 파괴하여 대규모 홍수를 일으키려 했다.
251년 손권은 손량의 어머니 반씨를 황후로 책봉했다. 이는 그의 재위 기간 중 처음이자 마지막 황후 책봉이었다(이전에 총애했던 보연사는 사후 황후로 추존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말, 손화가 무죄임을 깨닫고 그를 다시 부르려 했으나, 손량의 즉위를 지지하던 딸 손노반과 손준의 만류로 실행하지 못했다. 자신이 늙었음을 인지한 손권은 손준의 추천으로 제갈각을 손량의 섭정으로 임명했다.
252년 손권이 임종에 가까워지자 반황후가 살해되었는데, 그 경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오나라 관리들은 시녀들이 황후의 성질을 견디지 못해 살해했다고 주장했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손권 사후 반황후가 황태후로서 권력을 장악할 것을 두려워한 고위 관리들의 음모 가능성을 제기했다. 252년 4월, 손권은 제갈각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71세(만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29] 손량이 즉위했으며, 손권은 자금산의 능에 안장되었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손권을 "시기심이 많고 살육하는 데는 과감했으며 말년에 이르러서는 그런 모습이 더 심해졌다"고 평가했다.
3. 문화
강승회의 영향을 받아 불교를 숭배하였으며, 강남 지역에 여러 사찰을 건립하였다. 적오 10년(247년), 강승회의 설득으로 불교에 귀의한 것을 기념하여 건초사를 세웠다.[130] 이후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보은사를, 부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용화사를 건립하는 등 불교 진흥에 힘썼으며, 이로 인해 중국 강남 지역에 불교가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학문을 좋아하여 『시경』, 『서경』, 『예기』, 『국어』, 『좌전』, 『사기』, 『한서』, 『동관한기』 등 다양한 경전과 역사서를 두루 읽었으나, 『역경』만은 읽지 않았다고 전해진다.[15] 또한 예서, 초서, 행서 등 서예에도 능숙하여[90], 당나라의 서예가 장회관은 그의 저서 『서고(書估)』에서 손권의 글씨를 “기재견발 절세난구(奇材見抜 絶世難求)”라고 높이 평가했다.[91]
무예에도 뛰어나, 장료는 손권이 말을 잘 다루고 기마 궁술에 능했다고 언급했다. 건안 23년(218년)에는 직접 말을 타고 아정(庱亭)에서 호랑이를 사냥하기도 했다. 여섯 자루의 보검(寶劍)과 세 자루의 보도(寶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각기 이름이 붙여져 있었다.[92]
또한 무창에서 구리와 철을 채취하여 천 자루의 검과 만 자루의 칼을 제작하게 했다. 이 무기들은 모두 길이가 삼척 구촌(三尺九寸)이었고, 칼의 머리 부분은 네모난 형태였다. 남방의 구리와 월나라의 숯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소전체로 “대오(大吳)”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대외 교류에도 관심을 보여 요동반도와 동남아시아 항로를 개척하였다. 이를 통해 고구려, 부남, 림읍, 당명, 인도 등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었다. 황무 5년(226년)에는 로마에서 온 상인 진론(秦論)을 만나기도 했다.[98]
4. 손권을 섬긴 사람들
손권을 섬긴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인물 | 자 | 인물 | 자 |
---|---|---|---|
동습 | 원대(元代) | 서성 | 문향(文響) |
감녕 | 흥패(興覇) | 소비 | |
감택 | 덕윤(德潤) | 손환 | 숙무(叔武) |
고옹 | 원탄(元歎) | 순우단 | |
노숙 | 자경(子敬) | 엄준 | 만재(曼才) |
능조 | 여대 | 정공(定公) | |
능통 | 공적(公績) | 여몽 | 자명(子明) |
마충 | 여범 | 자형(子衡) | |
미방 | 자방(子方) | 이이 | |
반장 | 문규(文珪) | 오경 | |
반준 | 승명(承明) | 우번 | 중상(仲翔) |
보즐 | 자산(子山) | 육손 | 백언(伯言) |
사섭 | 위언(威彦) | 육항 | 유절(幼節) |
사인 | 군의(君義) | 장굉 | 자강(子綱) |
인물 | 자 | 인물 | 자 |
장소 | 자포(子布) | 주치 | 군리(君理) |
장승 | 중사(仲嗣) | 주태 | 유평(幼平) |
장휴 | 숙사(叔嗣) | 주환 | 휴목(休穆) |
장흠 | 공혁(公奕) | 진무 | 자열(子烈) |
전종 | 자황(子璜) | 태사자 | 자의(子義) |
정병 | 덕추(德樞) | 풍칙 | |
정보 | 덕모(德謨) | 하제 | 공묘(公苗) |
정봉 | 승연(承淵) | 한당 | 의공(義公) |
정봉 | 황개 | 공복(公覆) | |
제갈각 | 원손(元遜) | ||
제갈근 | 자유(子瑜) | ||
주방 | 자어(子魚) | ||
주연 | 의봉(義封) | ||
주유 | 공근(公瑾) |
형 손책 사후, 18세의 어린 나이로 뒤를 이은 손권은 형의 죽음에 크게 슬퍼했으나, 장소(동오)의 권유로 슬픔을 거두고 세력 안정에 힘썼다. 손책의 많은 신하들이 어린 손권을 따르지 않고 떠나려 했으나, 장소와 주유는 손권의 자질을 알아보고 그를 섬기기로 결정했다. 또한 조조에게 사신으로 갔던 장굉(한나라)도 돌아와 손권을 보좌했다. 손권은 어머니 오부인의 조언에 따라 장소와 장굉에게는 민정을, 주유, 정보, 여범에게는 군사 문제를 맡겼다. 장굉의 요청으로 조조는 당시 조조의 통제를 받던 헌제의 이름으로 손권을 '토로장군'(討虜將軍중국어)으로 임명했고, 이 칭호는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손권은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발탁하여 자신의 고문으로 삼았는데, 이 시기에 여몽과 주굉과 같은 인물들과 가까워졌으며, 이들은 훗날 오나라의 중신이 되었다. 또한 육손, 부지, 구용, 시이(동오), 연준, 서성, 주환 등 많은 인재들이 그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손권은 인품 있는 인물을 발탁하여 중용하고, 상황 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하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그는 장소와 장굉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하들을 격식 없이 이름이나 자로 불렀다고 한다.
5. 가계
삼국지에 따르면 손권은 춘추 시대의 군사가이자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무(손자로 더 잘 알려짐)의 후손이라고 한다.[10] 진수는 『삼국지』 본문에서 아버지 손견이 손무의 자손이라고 전하고 있다.[11]
- 부친: 손견
- 모친: 오부인
- 배우자 및 자녀
구분 | 이름 | 자녀 |
---|---|---|
정실 | 사씨 부인 (사굉(謝煚)의 딸) | 자녀 없음 |
계실 | 서씨 부인 (서곤(徐琨)의 딸) | 자녀 없음 |
황후 | 반숙 | 7남: 손량 (자명, 폐제, 제2대 황제) |
측실 (추존 황후) | 보련사 | 장녀: 손노반 (대호, 전공주) 3녀: 손노육 (소호, 주공주) |
측실 (추존 경회황후) | 왕씨 | 6남: 손휴 (자렬, 경제, 제3대 황제) |
측실 (추존 대의황후) | 왕씨 (왕로구(王盧九)의 딸) | 3남: 손화 (자효, 남양왕, 추존 문황제) - 손호 (말제)의 아버지 |
측실 | 원씨 부인 (원술의 딸) | 자녀 없음 |
측실 | 조씨 부인 (조달의 여동생) | 자녀 없음 |
측실 | 사희(謝姬) | 4남: 손패 (자위, 노왕) |
측실 | 중희(仲姬) | 5남: 손분 (자양, 제왕) |
생모 불명 | 해당 없음 | 장남: 손등 (자고, 선태자) 차남: 손려 (자지, 건창후) 차녀: 유찬(劉纂)의 부인 딸: 등윤의 부인[121] |
- 양자
- 능렬(凌烈) - 능통의 장남
- 능봉(凌封) - 능렬의 동생
6. 연호
연호 | 한자 (병음) | 사용 기간 | 원년 간지 |
---|---|---|---|
황무 | 黃武|Huángwǔ중국어 | 222년 ~ 229년 | 임인 |
황룡 | 黃龍|Huánglóng중국어 | 229년 ~ 231년 | 기유 |
가화 | 嘉禾|Jiāhé중국어 | 232년 ~ 238년 | 임자 |
적오 | 赤烏|Chìwū중국어 | 238년 ~ 251년 | 무오 |
태원 | 太元|Taìyuán중국어 | 251년 ~ 252년 | 신미 |
신봉 | 神鳳|Shénfèng중국어 | 252년 | 임신 |
7. 대중문화 속의 손권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오나라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가 묘사된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유비와의 동맹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온 제갈량은 장소 등 오나라의 신하들과 설전을 벌인 후 손권을 만난다. 손권이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을 고려하자, 제갈량은 한나라 황실의 후예이자 인품과 민심을 얻은 유비와 손권을 비교하며 반박했다고 묘사된다. 이에 손권이 크게 화를 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정사가 아닌 소설적 허구이다.
중국의 보컬로이드 뤄톈이가 부른 權御天下|권어천하중국어라는 곡은 손권을 주제로 하고 있다.
여러 게임에서도 손권이 등장한다.
- 코에이(Koei)의 게임 시리즈 삼국무쌍(Dynasty Warriors)과 무쌍OROCHI(Warriors Orochi)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 모바일 게임 퍼즐앤드래곤(Puzzle & Dragons)의 '삼국지 신' 시리즈에도 등장한다.
-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의 전략 게임 토탈 워: 삼국(Total War: Three Kingdoms)에서는 손씨 세력의 플레이 가능한 인물로 등장한다.
- 수집형 카드 게임 매직: 더 개더링(Magic: The Gathering)의 ''포털 삼국지''(Portal Three Kingdoms) 세트에는 "손권, 오의 군주(Sun Quan, Lord of Wu)"라는 이름의 카드가 있다.
- 중국의 카드 게임 삼국살(三國殺)에는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손권 영웅 카드가 있다.
- 수집형 카드 게임 유희왕에는 손권을 모티브로 한 "고대 전사 - 탁월한 손무(Ancient Warriors - Masterful Sun Mou)" 카드가 있다.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손권을 다루었다.
참조
[1]
書籍
Jiankang Shilu vol. 2
[2]
書籍
Jiang Biao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7
[3]
웹사이트
East Asian History Sourcebook: Chinese Accounts of Rome, Byzantium and the Middle East, c. 91 B.C.E. – 1643 C.E.
http://www.fordham.e[...]
Fordham University
2000-00-00
[4]
서적
Rome's Eastern Trade: International Commerce and Imperial Policy, 31 BC – AD 305
(ISBN 0-415-24219-3)
2001-00-00
[5]
문서
繁体字の表記、簡体字の表記、ピン音
[6]
문서
ピン音
[7]
書籍
三国志 呉志 諸葛恪伝
[8]
웹사이트
下邳和狄塘地名谈:下邳是孙权的出生地。《邳州志》记载:“孙坚作下邳丞时生权,方颐大口,目有精光。”孙权6岁时,随父离开下邳;
https://www.dy001.cn[...]
202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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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孫權傳
https://24h.pchome.c[...]
2022-11-18
[10]
書籍
建康実録 呉上 太祖上
[11]
書籍
三国志 呉志 孫破虜討逆伝、四庫全書、異苑、幽明録、裴子語林
[12]
書籍
後漢紀 巻二十七
[13]
書籍
三国志 呉志 朱治伝、江表伝
[14]
書籍
三国志 呉志 呂範伝
[15]
書籍
江表伝
[16]
書籍
呉録
[17]
書籍
三国志 魏志 陳登伝
[18]
書籍
三国志 魏志 陳矯伝
[19]
書籍
三国志 呉書 張紘伝
[20]
문서
魯粛の提案
[21]
書籍
三国志 呉志 呉主伝・張昭伝
[22]
書籍
三国志 魏志 劉馥伝
[23]
書籍
三国志 呉志 程普伝
[24]
문서
狩猟の意味
[25]
書籍
三国志 蜀志 先主伝
[26]
書籍
後漢書・資治通鑑・襄陽記
[27]
書籍
三国志 呉志 周瑜伝・後漢紀・建康実録
[28]
書籍
三国志 呉志 周瑜伝・資治通鑑
[29]
書籍
三国志 呉志 周瑜伝・建康実録
[30]
書籍
輿地紀勝 巻三十三・集古録跋尾
[31]
書籍
三国志 呉志 周魯呂伝・程黄韓蔣周陳董甘凌徐潘丁伝・晋書
[32]
書籍
三国志 呉志 魯粛伝・資治通鑑
[33]
書籍
三国志 呉志 周魯呂伝・資治通鑑
[34]
書籍
三国志 呉志 周魯呂伝・程黄韓蔣周陳董甘凌徐潘丁伝・後漢書・資治通鑑・荊州志
[35]
書籍
献帝春秋
[36]
書籍
交広志
[37]
書籍
三国志
[38]
書籍
三国志
[39]
書籍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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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籍
呉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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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志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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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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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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集解
[45]
書籍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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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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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籍
三国志
[48]
書籍
献帝春秋
[49]
書籍
三国志
[50]
書籍
三国志
[51]
書籍
三国志
[52]
書籍
建康実録
[53]
書籍
晋書
[54]
書籍
晋書
[55]
書籍
三国志
[56]
書籍
三国志
[57]
書籍
三国志
[58]
書籍
三国志
[59]
書籍
三国志
[60]
書籍
三国志
[61]
문서
陸遜#逸話
[62]
書籍
方輿紀要
[63]
書籍
三国志
[64]
書籍
三国志
[65]
書籍
資治通鑑
[66]
書籍
呉書
[67]
書籍
魏書
[68]
書籍
魏書
[69]
書籍
三国志
[70]
書籍
三国志
[71]
서적
建康実録
呉中 太祖下
[72]
서적
三国志
呉志 呉主伝・資治通鑑
[73]
서적
晋紀
漢晋春秋
[74]
서적
三国志
呉書 陸凱・弟陸胤伝
[75]
서적
大越史記全書
交趾志
[76]
서적
三国志
呉志 諸葛恪伝・呉書
[77]
서적
諡法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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細説三国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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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志
呉志 呉主伝・江表伝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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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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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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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志演義
四十三回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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呉書「朱治伝」・弁亡論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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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書
謝鯤伝
[85]
문서
嫵媚
[86]
서적
魏略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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襄陽記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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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志
蜀志 費禕伝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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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志
呉志 陸凱伝
[90]
서적
書史会要
[91]
문서
[92]
서적
太平御覧
巻三百四十一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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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志
蜀志 劉巴伝・零陵先賢伝
[94]
문서
[95]
서적
三国志
魏志 賈詡伝・荀勗別伝
[96]
서적
三国志
呉志 諸葛恪伝・諸葛恪別伝
[97]
서적
三国志
蜀志 費禕伝・費禕別伝
[98]
서적
梁書
海南伝
[99]
서적
柏楊版資治通鑑
[100]
서적
明太祖宝訓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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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堂書鈔
巻四十
[102]
서적
三国志
蜀書 先主伝
[103]
서적
魏略
[104]
서적
太平御覧
卷69引呉地記
[105]
서적
呉志
諸葛瑾伝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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与吴王書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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費禕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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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預伝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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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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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孫権の婚姻関係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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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遜伝
[113]
문서
孫権の婚姻関係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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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泰伝・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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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表伝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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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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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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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 巻八十六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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滕胤伝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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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익
[123]
문서
손권이 손책을 황제로 추증하지 않은 이유
[124]
문서
손책의 육강 토벌과 신하들의 충성심
[125]
문서
적벽대전에서의 황개의 거짓 항복
[126]
서적
사람을 품는 능굴능신의 귀재 유비: 속내를 감추고 은밀히 지배한다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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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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