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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요아힘 마르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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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스요아힘 마르세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전투기 조종사였다. 그는 1919년 12월 13일에 태어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거쳐 루프트바페에 입대했다. 영국 본토 항공전과 북아프리카 전역에 참전했으며, 특히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뛰어난 공중전 기량을 보여 '아프리카의 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42년 9월 30일, 작전 중 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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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요아힘 마르세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2년 중반의 마르세유 초상화
1942년 중반 마르세유의 초상
별명요헨 (동료), 아프리카의 별
개인 정보
출생일1919년 12월 13일
사망일1942년 9월 30일 (22세)
출생지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
사망지이집트 엘알라메인 근교 시디압델라흐만 인근
안장 장소데르나 영웅 묘지
토브룩 기념 정원 (재안장)
서명
군사 경력
소속[[파일:Balkenkreuz.svg|20px]] 나치 독일 루프트바페
복무 기간1938년–1942년
최종 계급하우프트만 (대위)
지휘제3./JG 27
부대제2교도비행단
제52전투비행단
제27전투비행단
주요 참전 전투제2차 세계 대전
독일 본토 방공전
영국 본토 항공전
발칸 전역
북아프리카 전역
서부 사막 전역
훈장

2. 어린 시절과 경력

한스요아힘 "요헨" 발터 루돌프 지크프리트 마르세이는 1919년 12월 13일 베를린-샤를로텐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장교 출신으로 베를린 경찰에서 근무한 지크프리트 게오르크 마르틴 마르세이였고, 어머니는 프랑스계 조상을 둔 샬롯 마리 요한나 폴린 게르트루트 리머였다.[1] 어린 시절 마르세이는 몸이 약해 심각한 유행성 독감으로 생사를 넘나들기도 했다.[2]

마르세이가 어릴 때 부모는 이혼했고, 어머니는 로이터라는 경찰관과 재혼했다. 마르세이는 한동안 의붓아버지의 성을 사용했으나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했고, 성인이 된 후 다시 아버지의 성인 마르세이를 사용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고, 이혼 후 한동안 함부르크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 이후 화해를 시도했으나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다시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3]

마르세이에게는 잉게보르크라는 누나가 있었다. 1941년 12월 말, 아테네에서 병가 중이던 마르세이는 어머니의 전보를 받고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그는 에 살던 누나가 질투심에 눈이 먼 연인에게 살해당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접했고, 이 사건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4]

프린츠-하인리히스-김나지움, 마르세이가 이 학교에 다녔다.


마르세이는 베를린의 폴크스슐레(1926–1930)를 다녔고, 10세부터는 베를린-쇤베르크에 위치한 프린츠-하인리히스-김나지움(1930–1938)에서 고등 교육을 받았다. 1938년 4월부터 9월까지는 국가노동봉사에서 복무했다.[5]

마르세이는 1938년 11월 7일 장교 후보생으로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에 입대하여 하르츠 지역의 케들린부르크에서 기본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규율을 잘 따르지 않는 성격 탓에 '반항아'라는 평판을 얻었고, 이는 그의 초기 군 경력에 걸림돌이 되었다.[6] 1939년 3월 1일에는 퓌르스텐펠트브루크 근처의 루프트크리그슐레 4(공군 사관학교)로 전출되었으며, 이곳에서 훗날 에이스 조종사가 되는 베르너 슈뢰어와 동기가 되었다.[7]

마르세이는 1939년 11월 1일 파견된 전투기 조종사 학교에서 훈련을 마쳤다. 그의 교관 중에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에이스 조종사였던 율리우스 아리히도 있었다. 1940년 7월 18일, 마르세이는 뛰어난 평가를 받으며 학교를 졸업하고 메르제부르크 서부 공항에 주둔한 Ergänzungsjagdgruppe|에르갠충스야크트그루페de 메르제부르크에 배속되었다.[8]

마르세이가 속한 부대는 전쟁 발발 시점부터 프랑스 공방전이 끝날 때까지 로이나 공장 상공에서 방공 임무를 수행했다.[9] 1940년 8월 10일, 그는 영국 침공 작전을 위해 칼레-마르크에 주둔한 제2 훈련 비행대로 전속되었다. 이곳에서도 그는 지휘관 헤르베르트 일레펠트로부터 뛰어난 조종사라는 평가를 받았다.[10]

3. 제2차 세계 대전

영국 본토 항공전 이후, 마르세유의 부대는 1941년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잠시 참여한 뒤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이동했다. 초기에는 엔진 고장으로 인한 불시착이나 적기에 격추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상관 에두아르트 노이만의 지도 아래 자신만의 독특한 공중전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3. 1. 영국 본토 항공전

1940년 8월 24일, 영국 상공에서의 첫 공중전에서 마르세유는 숙련된 상대를 만나 4분간의 교전 끝에 격추시키며 첫 승리를 기록했다. 당시 그는 메서슈미트 Bf 109 E-3기를 조종하고 있었다. 영국 전투기는 엔진에 피탄되어 영국 해협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마르세유는 곧바로 다른 연합군 전투기들의 공격을 받았고, 기체를 급강하시켜 수면 위를 스치듯 비행하며 탈출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해면 위를 스치듯 날아가서 나는 도망쳤다. 아무도 추격해오지 않았고, 나는 칼레 근처로 귀환했다."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 행동은 부대 내에서 칭찬받지 못했다. 마르세유가 자신의 윙맨과 슈타펠(편대)을 버리고 단독으로 교전에 나섰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는 공중전의 기본 원칙을 어긴 행위였다.[1] 마르세유 자신도 이 승리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했으며, 공중전의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고 전해진다.[2]

1940년 9월 23일, 폭격기 호위 임무에서 귀환하던 중 마르세유의 Bf 109 E-7 (''제작 번호'' 5094)은 도버 상공에서 입은 전투 피해로 인해 엔진 고장을 일으켰고, 카프 그리네즈에서 약 19km 떨어진 해상에 불시착해야 했다. 영국 공군 제41 비행대대의 조지 베니언스(George Bennions) 또는 로버트 스탠포드 턱(Robert Stanford Tuck)이 마르세유를 격추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3][4] 마르세유는 하인켈 He 59 수상 구조기에 의해 구조되었는데, 그는 그날 그 위치에서 He 59에 의해 구조된 유일한 루프트바페 조종사였다.[4] 턱은 오전 9시 45분경 카프 그리네즈 근처에서 Bf 109 한 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마르세유의 상황과 일치한다.[5]

마르세유는 심한 피로와 저체온증으로 야전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부대에 복귀했을 때, 그는 지휘관 헤르베르트 일레펠트로부터 엄중한 질책을 받았다. 교전 중 자신의 편대장(슈타펠카피탄)이었던 아돌프 불(Adolf Buhl)을 엄호하지 못했고, 불은 결국 격추되어 전사했기 때문이다. 일레펠트는 마르세유의 비행 평가서를 찢어버렸고, 다른 조종사들 역시 그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 동료들과의 불화, 오만하고 반항적인 태도 등으로 인해 일레펠트는 결국 마르세유를 제2교도비행단(LG 2)에서 방출했다.[6]

1940년 9월 28일, 7번째 격추를 기록한 날 엔진 고장으로 테빌 근처에 불시착한 마르세유의 Bf 109 E-7 (''제작 번호'' 4091).


다른 일화에 따르면, 마르세유는 2대 1의 불리한 상황에서는 교전을 피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편대장에게 접근하는 적기를 발견하자 편대를 이탈해 단독으로 격추시킨 적도 있었다. 착륙 후 칭찬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명령 불복종으로 3일간의 구금 처분을 받았고, 진급에서도 누락되어 부대 내 유일한 펜리히(Fähnrich)으로 남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억압받고 있다고 느꼈다.[7]

LG 2 소속으로 총 7기의 공중전 승리를 기록한 마르세유는 1940년 10월 초, Jagdgeschwader 52(JG 52)의 제4 비행중대(4. Staffel)로 전출되었다. 이 부대에는 요하네스 슈타인호프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과 같은 에이스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 기간 동안 마르세유는 총 4대의 항공기를 전투 외적인 이유(불시착, 수리 등)로 손실시켰다.[8]

그러나 JG 52에서도 그의 생활 태도는 문제가 되었다. 12월 9일에는 동료 조종사를 "멍청한 돼지"(dußlige Saude)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루돌프 레쉬(Rudolf Resch) 중위로부터 5일간의 근신 처분을 받았다.[9] 그의 잦은 규율 위반, 미국 재즈 음악에 대한 애정, 여성 편력과 공공연한 "플레이보이" 생활 방식, 그리고 윙맨으로서의 역할 수행 미숙 등은 지휘관 슈타인호프의 인내심을 한계에 다다르게 했다. 결국 슈타인호프는 1940년 12월 24일, 마르세유를 Jagdgeschwader 27(JG 27)로 전출시켰다. 슈타인호프는 훗날 마르세유에 대해 "매우 재능 있는 조종사였지만 믿을 수 없었다"며, "그의 무책임한 업무 수행 방식이 내가 그를 내보낸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그는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상했다.[10]

새로운 부대의 비행단장(Gruppenkommandeur) 에두아르트 노이만은 마르세유의 문제점들을 인지하고 있었다. 노이만은 "그의 머리카락은 너무 길었고, 팔 길이만큼이나 되는 징계 기록을 가지고 왔다. 그는 격렬하고, 변덕스러우며, 다루기 힘들었다. 30년 후였다면 플레이보이라고 불렸을 것"이라고 회상했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이만은 마르세유의 조종사로서의 잠재력을 즉시 간파했다. 그는 "마르세유는 둘 중 하나가 될 운명이었다. 징계 문제가 계속되거나, 위대한 전투기 조종사가 되거나"라고 평가하며 그의 성장을 도왔다.[12]

3. 2. 북아프리카 전역

마르세이의 부대는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잠시 참여한 뒤 1941년 4월 10일 자그레브를 거쳐 아프리카로 이동했다. 4월 20일, 트리폴리에서 전선 비행장으로 이동하던 중 마르세이의 Bf 109 E-7 (''Werknummer'' 1259)에 엔진 문제가 발생해 사막에 불시착했다. 그의 비행대는 마르세이가 안전하게 착륙하는 것을 확인하고 떠났다. 마르세이는 이탈리아 트럭을 얻어 타거나 다른 비행장에서 도움을 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그는 보급 기지의 책임자인 한 장군을 설득하여 다음 날 작전에 투입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다. 장군은 마르세이의 인품에 감명받아 자신의 오펠 아드미럴 승용차와 운전사를 제공했고, 마르세이는 4월 21일 자신의 비행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마르세이는 1941년 4월 23일과 28일에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4월 23일 세 번째 출격 중, 자유 프랑스 공군 소속이자 영국 왕립 공군 제73 비행대대의 제임스 데니스 소위가 조종하는 호커 허리케인에 의해 격추되었다. 마르세이의 Bf 109 E-7 (''Werknummer'' 5160) 조종석 주변에 약 30발의 총탄이 명중했고, 마르세이는 토브루크 인근에 불시착해야 했다. 데니스는 약 한 달 뒤인 5월 21일에도 다시 마르세이를 격추했다. 마르세이의 Bf 109 E-7 (''Werknummer'' 1567)은 독일군 후방 토브루크 근처에 추락했다. 데니스는 전후 기록에서 자신이 마르세이를 유인하여 격추했다고 밝혔다.

두 번의 격추 사이인 4월 28일, 마르세이는 브리스톨 블렌하임 폭격기(영국 왕립 공군 제45 비행대 소속 ''T2429'')를 격추하여 조종사 B. C. de G. 앨런 소위를 포함한 탑승자 5명 전원을 사망케 했다. 폴란드군 병사 얀 인드리히는 이 공격을 목격했다.

에두아르트 노이만 비행대장(이후 1942년 6월 10일부터 ''Geschwaderkommodore'')은 마르세이의 잠재력을 보고 그의 능력 향상을 위해 자체 훈련을 하도록 격려했다. 이 시점까지 마르세이는 4월 23일 수송 중이던 항공기를 포함하여 총 4대의 Bf 109 E 전투기를 추락시키거나 손상시켰다. 그의 격추율은 낮았고 6월부터 8월까지는 승리를 기록하지 못했다. 또한 1941년 6월 14일과 토브루크 상공에서 지상 공격을 받아 시야를 잃고 불시착해야 했던 두 차례의 손상으로 좌절감을 겪기도 했다.

마르세이는 종종 적 편대 속으로 돌진하는 위험한 전술을 사용했기 때문에 사방에서 공격받아 기체가 수리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는 경우가 잦았고, 이로 인해 노이만은 그에게 인내심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마르세이는 굴하지 않고 육체 단련과 전술 개발을 포함한 자신만의 독특한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그는 뛰어난 상황 인식 능력, 사격술, 항공기 제어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특히 적기의 후방에서 공격하는 일반적인 방식 대신, 높은 각도의 편향 사격으로 측면에서 적기의 정면을 공격하는 독특한 전술을 개발했다. 그는 임무 후 복귀하는 길에 동료들과 함께 이 전술을 연습하며 편향 사격의 달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연합군 항공기를 꾸준히 격추하기 시작하면서, 마르세이는 자신이 격추한 조종사들을 직접 돌보는 이례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외딴 추락 지점까지 차를 몰고 가 구조를 돕기도 했다. 1941년 9월 13일, 그는 호주 왕립 공군 제451 비행대대의 팻 바이어스를 격추한 후, 바이어스의 비행장으로 날아가 그의 상태와 치료에 대한 정보를 담은 쪽지를 떨어뜨렸다. 며칠 후, 그는 노이만으로부터 헤르만 괴링이 이러한 비행을 금지했다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날아가 바이어스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두 번째 쪽지를 전달했다. 그의 동료 베르너 슈뢰어는 전후에 마르세이가 이러한 행동을 "항공기를 격추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한 "참회"로서 행했다고 말했다.

1941년 9월 24일, 마르세이의 자체 훈련은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군 (SAAF) 제1 비행대 소속 허리케인 4대를 격추하며 첫 다중 승리 출격을 기록했다. 이는 그의 19번째부터 23번째 승리에 해당했다. 10월 말, I. ''Gruppe''는 Bf 109 F-4/trop 기종으로 재장비되었다. 12월 중순까지 그는 총 25승을 기록했고 독일 십자 훈장 금장(Deutsches Kreuz in Goldde)을 수여받았다. 이때부터 마르세이는 한 번의 출격에서 여러 대의 적기를 격추하는 능력으로 동료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마르세이는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공중전의 극심한 G-포스를 견디기 위해 다리와 복근을 단련했으며, 시력 향상을 믿으며 우유를 많이 마시고 선글라스 착용을 피했다.

독일 전투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연합군 조종사들은 서로의 꼬리를 엄호하는 방어 대형인 "루프베리 서클"을 사용했다. 이 대형을 공격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지만, 마르세이는 종종 이 방어 대형의 위나 아래에서 고속으로 급강하하여 급선회를 실행하고, 단 2초간의 편향 사격으로 적기를 파괴했다. 그의 성공은 1942년 초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1942년 2월 8일에 4기(37~40번째 승리), 4일 후인 2월 12일에 다시 4기(41~44번째 승리)를 격추하여 총 46승을 기록했고, 이 공로로 철십자 기사 십자 훈장(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de)을 받았다.



마르세이는 불리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공격을 감행했지만, 그의 뛰어난 사격술 덕분에 목표물 양옆의 엄호기로부터 반격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빠르게 접근하고 이탈할 수 있었다. 그의 뛰어난 시력은 적을 먼저 발견하고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또한 탁월한 상황 인식 능력을 인정받았다.

전투에서 마르세이는 소규모 편대(리더-윙맨)로 작전하는 것을 선호했는데, 이는 북아프리카의 높은 가시성 조건에서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투 중 혼자 행동하며 윙맨을 안전 거리에 두어 오인 사격이나 충돌을 방지했다.



특히 루프베리 서클을 공격할 때, 마르세이는 일반적인 고속 선회 대신 스로틀을 줄이고 플랩을 내려 선회 반경을 극단적으로 줄이는 방식을 선호했다. 에밀 클라데는 다른 조종사들은 이런 기동을 효과적으로 할 수 없었으며, 속도를 이용해 단일 목표를 공격하고 위험 시 이탈하는 방식을 선호했다고 말했다. 클라데는 마르세이의 전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세유는 다른 대부분의 조종사의 방법과 크게 다른 자신만의 특별한 전술을 개발했습니다. (루프베리 서클을 공격할 때) 그는 매우 천천히 비행해야 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착륙 플랩을 작동시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위쪽 방어 서클보다 더 좁게 곡선을 비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와 그의 전투기는 하나의 유닛이었으며, 그는 다른 누구보다 그 항공기를 지휘했습니다.[1]


프리드리히 쾨르너 (36승 에이스) 역시 이를 독특하게 여겼다: "곡선에서 사격하는 것(편향 사격)은 조종사가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그는 더 이상 볼 수 없고 본능에 따라 진행해야 합니다."[1] 마르세이는 위에서 급강하하여 상대방 아래로 파고들어 발포한 뒤, 급강하 에너지를 이용해 다시 상승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의 성공은 승진으로 이어졌다. 1942년 5월 1일, 그는 이례적으로 빨리 오버로이트난트(중위)로 승진했고, 6월 10일에는 게르하르트 호무트의 뒤를 이어 3./JG 27의 ''슈타펠카피탄''(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친구 한스-아르놀트 슈탈슈미트와의 대화에서 마르세이는 자신의 전투 스타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종종 전투를 있어야 할 방식으로 경험합니다... 어떤 위치에서도 발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방법으로만 자신만의 특정 전술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적의 무리 한가운데로 돌입하여 내부에서 파괴할 수 있습니다.


1942년 5월 13일, 마르세이는 아인 알 가잘라 남동쪽 봄바 만 상공에서 호주 왕립 공군 제3 비행대대 소속 커티스 키티호크 12대와 교전 중 Bf 109가 손상되었으나 간신히 탈출했다. 그는 그래엄 페이스 비행 장교(''AL172'')를 격추(57번째 승리)한 후, 제프 친첸 비행 장교의 공격으로 유조와 프로펠러에 피탄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열된 기체를 몰고 기지로 귀환하기 전에 콜린 맥디아미드 상사(''AK855'')의 키티호크를 추가로 격추(58번째 승리)했다. 그의 Bf 109 수리에는 이틀이 걸렸다.

1942년 5월 26일, ''게네랄오버스트'' 에르빈 롬멜가잘라 전투 (작전명 테세우스)를 개시했다. 5월 30일, 마르세이는 65번째 승리를 기록했다. 그는 영국 왕립 공군 제250 비행대대의 그래엄 조지 버클랜드[2] 소위의 P-40을 격추했는데, 버클랜드는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사망했다. 착륙 후 마르세이는 추락 현장으로 차를 몰고 가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무덤을 표시한 뒤, 유감의 편지를 작성하여 버클랜드의 비행장에 투하했다.

마르세이의 독특한 공격 방식은 계속해서 높은 격추율을 기록하게 했다. 1942년 6월 3일, 그는 남아프리카 공군 제5 비행대대의 P-40 16대 편대를 공격하여 6대를 격추했는데, 그중 5대는 단 6분 만에 격추했다. 이 6명 중에는 로빈 파레(6승), 세실 골딩(6.5승), 앙드레 보타(5승) 등 3명의 에이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전투로 그의 총 격추 수는 75기에 달했다. 1942년 6월 6일, 그는 철십자 기사 십자 훈장과 참나무 잎(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 mit Eichenlaubde)을 수여받았다. 그의 윙맨 라이너 푀트겐("하늘을 나는 계산기"라는 별명을 가짐)은 이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모든 적들은 마르세유에 의해 선회하는 공중전에서 격추되었습니다... 그의 [총격] 패턴은 앞부분, 엔진 노즈에서 시작하여 일관적으로 조종석에서 끝났습니다... 이 공중전에서 그의 탄약 소비량은 360발(격추된 항공기당 60발)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르너 슈뢰어는 마르세이의 방식이 매우 위험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내가 본 가장 놀랍고 독창적인 전투 조종사였습니다. 그는 또한 여러 번 매우 운이 좋았습니다... 그는 전투 전투의 모든 기본 규칙을 위반했습니다. 그는 모든 규칙을 버렸습니다."

1942년 6월 17일, 마르세이는 100번째 공중전 승리를 기록하며 루프트바페에서 11번째로 이 기록을 달성한 조종사가 되었다. 그는 2개월간의 휴가를 위해 독일로 돌아갔고, 다음 날 철십자 기사 십자 훈장과 참나무 잎과 검(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 mit Eichenlaub mit Schwerternde) 수훈이 결정되었다. 수여식은 1942년 6월 28일 라슈텐부르크의 ''퓌러 본부''에서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직접 이루어졌다.

8월 6일, 그는 약혼녀 한네-리에스 퀴퍼와 함께 북아프리카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8월 13일, 로마에서 베니토 무솔리니를 만나 이탈리아 최고 무공 훈장인 군사 용맹 황금 메달(Medaglia d'Oro al Valor Militareit)을 받았다. 이탈리아 체류 중 마르세이는 잠시 행방불명되어 로마의 게슈타포 책임자 헤르베르트 카플러가 실종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소문에 따르면 그는 이탈리아 여성과 함께 있었으며, 결국 설득되어 부대로 복귀했다. 이례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약혼녀를 로마에 남겨두고 마르세이는 8월 23일 전투 임무에 복귀했다. 1942년 9월 1일은 그의 가장 성공적인 날로, 하루 동안 17대의 연합군 항공기(105~121번째 승리)를 격추했다. 이 중 8대는 단 10분 만에 격추한 것이었다. 이 공로로 그는 레지아 아에로노티카 비행대대로부터 폭스바겐 퀴벨바겐을 선물 받았는데, 이탈리아 동료들은 차체에 "Otto"(이탈리아어로 '8')라고 써주었다. 이는 서방 연합군을 상대로 한 조종사가 하루에 기록한 최다 격추 기록이었다. (종전 후 분석에 따르면 실제 격추는 8~9대, 손상 3~4대로 추정된다.) 9월 한 달 동안 그는 총 54기를 격추하며 가장 생산적인 달을 보냈다.

1942년 9월 3일, 마르세이는 6기(127~132번째 승리)를 추가로 격추했지만, 캐나다 에이스 제임스 프란시스 에드워즈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의 활약은 루프트바페 선전 잡지 ''데어 아들러'' 1942년 14호, ''베를리너 일루스트리에르테 차이퉁'', ''디 베어마흐트'' 등에도 실리며 그를 슈퍼스타로 만들었다.

전투기의 측면 모습으로, 왼쪽에서 본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메서슈미트 Bf 109 F-4/trop, W.Nr. 8673 – 3./JG 27 – 하우프트만 한스-요아힘 마르세유, 1942년 9월


그러나 3일 후 에드워즈는 마르세이의 친구 귄터 슈타인하우젠을 격추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다음 날인 9월 7일에는 또 다른 절친한 친구 한스-아르놀트 슈탈슈미트가 작전 중 실종되었다. 이러한 개인적인 손실과 가족의 비극은 마르세이에게 큰 정신적 부담을 주었다. 그는 말수가 줄고 침울해졌으며, 밤에는 몽유병 증상을 보이는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해석될 수 있는 증상들을 겪었다.

마르세이는 9월에도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9월 15일에는 하루에 7기(145~151번째 승리)를 격추했다. 그러나 9월 15일 임무 직후 불시착 과정에서 팔이 부러져 9월 16일부터 25일까지 비행이 금지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푸카에 주둔한 이탈리아 제4 ''스토르모'' 소속 에이스 에마누엘레 안노니 중위의 마키 C.202 '96–10'을 시험 비행했으나, 독일기와 반대 방향으로 작동하는 스로틀 조작 실수로 엔진을 꺼뜨려 동체 착륙으로 비행을 마쳤다.

마르세이는 친구 슈탈슈미트의 격추 기록(59기)을 불과 5주 만에 따라잡았지만, 연합군의 압도적인 물량 공세는 수적으로 열세인 독일 조종사들에게 극심한 부담을 주었다. 당시 독일 전투기 가용 전력은 65대에 불과했던 반면, 영국군은 약 80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투의

3. 3. '아프리카의 별'

마르세유는 자신의 전투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공중전 중 발생하는 극심한 G-포스(g-force)를 견디기 위해 다리와 복근을 단련했으며, 시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선글라스 착용을 피하고 우유를 많이 마셨다.

독일 전투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연합군 조종사들은 서로의 꼬리를 엄호하는 방어 대형인 "루프베리 서클"을 사용했다. 이 전술은 공격하는 적기가 항상 방어하는 조종사의 시야에 노출되게 만들어 효과적이었다. 그럼에도 마르세유는 종종 이 방어 대형의 한가운데로 위나 아래에서 고속으로 급강하하여, 급격한 선회를 하며 약 2초간의 편향 사격으로 적기를 격추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의 이러한 성공은 1942년 초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1942년 2월 8일에는 37번째부터 40번째까지, 4일 후에는 41번째부터 44번째까지의 공중전 승리를 기록했고, 같은 달 총 46승을 달성하며 철십자 기사 십자 훈장( 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de )을 수여받았다.

마르세유는 많은 조종사들이 불리하다고 여기는 상황에서도 공격을 감행했다. 그의 뛰어난 사격술 덕분에 목표물의 양옆에서 비행하는 적기의 반격을 피할 만큼 빠르게 접근하여 공격할 수 있었다. 또한 그의 뛰어난 시력은 적에게 발견되기 전에 먼저 적을 포착하여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공격 기회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뛰어난 상황 인식 능력으로도 인정받았다.

그의 독창적인 전투 방식은 소규모 편대(리더-윙맨) 운용으로 이어졌는데, 그는 이것이 시계가 좋은 북아프리카 상공에서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인 전투 방식이라고 믿었다. 마르세유는 전투 시 혼자 교전하며 윙맨을 안전 거리에 두어, 윙맨이 실수로 자신을 쏘거나 충돌하는 상황을 피했다.

특히 루프베리 서클과 같은 공중전 상황에서 연합군 항공기를 공격할 때, 마르세유는 일반적인 방식인 최고 속력 유지 대신, 스로틀을 급격히 줄이고 플랩을 내려 속도를 늦추고 선회 반경을 줄이는 것을 선호했다. 에밀 클라데는 다른 조종사들은 이런 방식을 효과적으로 구사하지 못했으며, 대신 속도를 이용해 단독으로 적에게 급강하 공격을 하고 불리하면 이탈하는 방식을 선호했다고 증언했다. 클라데는 마르세유의 전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르세유는 대부분의 다른 조종사들과는 상당히 다른 자신만의 특별한 전술을 개발했다. (루프베리 서클 공격 시) 그는 매우 느리게 비행해야 했다. 심지어 실속하지 않기 위해 착륙 플랩까지 내려야 할 정도였다. 당연히 그는 방어 서클 안쪽에서 더 작은 반경으로 선회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와 그의 전투기는 하나였고, 그는 누구보다도 항공기를 완벽하게 제어했다.[1]


프리드리히 쾨르너(36승 에이스) 역시 그의 방식이 독특했다고 평가했다. "선회 중 사격(편향 사격)은 조종사가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기술이다. 적은 방어 서클을 그리며 비행하고 있고, 공격기는 이 서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항공기를 급선회시키면 선회 반경은 더 작아지지만, 대부분의 경우 목표물이 날개 아래로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 조종사는 더 이상 목표물을 볼 수 없고 본능에 의존해야 한다."[1] 마르세유는 위에서 급강하하여 적기 아래로 파고든 뒤, 적기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발사하고, 급강하로 얻은 에너지를 이용해 다시 상승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근접 공격을 수행했다.

전투기 조종사로서의 성공은 그에게 빠른 승진과 더 많은 책임을 안겨주었다. 1942년 5월 1일, 그는 이례적으로 빠르게 오버로이테넌트로 진급했으며, 1942년 6월 10일에는 I./JG 27 지휘관으로 임명된 게르하르트 호무트 오버로이테넌트의 뒤를 이어 3./JG 27의 ''슈타펠카피탄''으로 임명되었다.

친구 한스-아르놀트 슈탈슈미트와의 대화에서 마르세유는 자신의 전투 스타일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나는 종종 전투를 있어야 할 방식으로 경험한다. 나는 영국군의 한가운데서 모든 위치에서 발포하고 결코 잡히지 않는 자신을 본다. 우리의 항공기는 슈탈슈미트, 숙달해야 하는 기본 요소이다. 어떤 위치에서도 발포할 수 있어야 한다. 왼쪽 또는 오른쪽 회전, 롤 아웃, 등 뒤에서, 언제든지. 이 방법으로만 자신만의 특정 전술을 개발할 수 있다. 전투 과정에서 적이 예측할 수 없는 공격 전술 – 상황에서 비롯되는 예측 불가능한 일련의 움직임과 행동, 항상 같지 않고 항상. 그래야만 적의 무리 한가운데로 돌입하여 내부에서 파괴할 수 있다.


마르세유는 1942년 5월 13일에 아인 알 가잘라 남동쪽의 봄바 만 상공에서 제3 비행대대 RAAF의 12대 커티스 키티호크와의 공중전에서 Bf 109가 손상되어 간신히 탈출했다. 윙맨과 함께 마르세유는 키티호크를 공격했다. 그가 호주 조종사 그래엄 페이스 비행 장교(''AL172'')를 격추한 후, 마르세유의 Bf 109는 제프 친첸 비행 장교가 메셔슈미트 중 하나에 피해를 입혔다고 보고한 유조와 프로펠러에 명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세유는 과열된 항공기를 기지로 되돌리기 전에 또 다른 키티호크(콜린 맥디아미드 상사, ''AK855'')를 격추할 수 있었다. 마르세유의 Bf 109 수리에는 이틀이 걸렸다. 공중전 승리는 57승과 58승으로 기록되었다.

1942년 5월 30일, 마르세유는 자신의 65번째 승리—제250 비행대대 RAF의 파일럿 장교 그래엄 조지 버클랜드[2]가 그의 전투기의 수평 꼬리에 충돌하여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사망하는 것을 목격한 후 또 다른 자비 작전을 수행했다. 착륙 후 그는 추락 현장으로 차를 몰았다. P-40은 연합군 측에 착륙했지만 독일 영토에서 사망한 조종사를 발견했다. 마르세유는 그의 무덤을 표시하고, 그의 서류를 수집하고, 그의 신원을 확인한 다음, 버클랜드의 비행장으로 날아가 유감의 편지를 전달했다.

그가 완성한 대형을 돌파하는 그의 공격 방식은 높은 비율의 승리를 낳았고, 공격당 빠른 속도로 여러 승리를 거두었다. 1942년 6월 3일, 마르세유는 16대의 커티스 P-40 전투기 대형을 공격하여 제5 비행대대 SAAF의 항공기 6대를 격추했으며, 그 중 5대는 6분 만에 격추했으며, 로빈 파레(6승), 세실 골딩(6.5승) 및 앙드레 보타(5승)를 포함한 세 명의 에이스가 포함되었다. 보타는 손상된 전투기를 불시착시켰다. 이 성공으로 그의 점수가 더욱 높아져 70번째에서 75번째 승리가 기록되었다. 마르세유는 1942년 6월 6일에 철십자 기사 십자 훈장과 참나무 잎( 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 mit Eichenlaubde )을 받았다. 그의 윙맨 라이너 푀트겐은 ''Fliegendes Zählwerk''("비행 계산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적들은 마르세유에 의해 선회하는 공중전에서 격추되었다. 그는 발포하자마자 적기를 힐끗 보기만 하면 되었다. 그의 [총격] 패턴은 앞부분, 엔진 노즈에서 시작하여 일관적으로 조종석에서 끝났다. 그가 어떻게 이것을 할 수 있었는지, 심지어 그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는 모든 공중전에서 가능한 한 스로틀을 낮추었다. 이것은 그가 더 좁은 회전을 할 수 있게 했다. 이 공중전에서 그의 탄약 소비량은 360발(격추된 항공기당 60발)이었다.


그러나 슈뢰어는 마르세유의 방식을 맥락에 맞게 설명했다. "그는 내가 본 가장 놀랍고 독창적인 전투 조종사였다. 그는 또한 여러 번 매우 운이 좋았다. 그는 10대 1로 수적으로 열세인 싸움에 뛰어드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고, 종종 혼자 싸우다가 우리가 그를 따라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전투 전투의 모든 기본 규칙을 위반했다. 그는 모든 규칙을 버렸다."

1942년 6월 17일, 마르세유는 자신의 100번째 공중전 승리를 주장했다. 그는 이 업적을 달성한 11번째 루프트바페 조종사였다. 마르세유는 그 후 2개월의 휴가를 위해 독일로 돌아갔고, 다음 날 철십자 기사 십자 훈장과 참나무 잎과 검( 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 mit Eichenlaub mit Schwerternde )을 받았다. 프리젠테이션은 1942년 6월 28일 라슈텐부르크의 퓌러 본부( Führerhauptquartierde )에서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이루어졌다.

8월 6일, 그는 약혼녀 한네-리에스 퀴퍼와 함께 북아프리카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8월 13일, 로마에서 베니토 무솔리니를 만나 용기에 대한 최고의 이탈리아 군사 훈장인 군사 용맹 금메달( Medaglia d'Oro al Valor Militareit )을 받았다.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 마르세유는 잠시 사라졌고, 독일 당국은 로마의 게슈타포 책임자인 헤르베르트 카플러가 제출한 실종자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그는 마침내 발견되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는 이탈리아 소녀와 도망쳤고 결국 그의 부대로 돌아가도록 설득되었다. 이례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 부주의에 대해 마르세유에게 어떤 결과도 내려지지 않았다.

로마에 약혼녀를 남겨두고 마르세유는 8월 23일 전투 임무로 돌아갔다. 1942년 9월 1일은 마르세유의 가장 성공적인 날이었으며, 17대의 연합군 항공기(105–121호)를 파괴하고 9월 한 달 동안 54승을 기록하여 그의 가장 생산적인 달이었다. 주장된 17대의 항공기에는 10분 만에 8대가 포함되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레지아 아에로노티카( Regia Aeronauticait ) 비행대대에서 퀴벨바겐을 받았다. 이탈리아 동료들은 그 위에 "Otto"( Otto|오토it , '8')를 칠했다.

이는 서방 연합군 공군에서 한 조종사가 하루에 격추한 항공기 수였다. 단 세 명의 조종사만이 이 점수를 맞출 수 있었고, 한 조종사만이 이를 넘어섰다. 에밀 랑은 1943년 11월 4일 동부 전선에서 소련 공군의 전투기 18대를 격추했다. 종전 후 분석에 따르면 그날의 실제 결과는 마르세유가 격추한 8~9대와 추가로 3~4대가 손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1942년 9월 3일, 마르세유는 6승(127–132호)을 주장했지만, 제임스 프란시스 에드워즈 영국-캐나다 에이스의 사격을 받았다. 루프트바페가 발행한 격주 선전 잡지 ''데어 아들러''( Der Adlerde )는 또한 1942년 14호에서 그의 행동을 보도했다. 마르세유는 전투기 조종사를 슈퍼스타로 대우하는 선전을 통해 유명해졌고,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자신의 이미지가 담긴 엽서에 서명했다. ''데어 아들러'' 외에도 그의 업적은 ''베를리너 일루스트리에르테 차이퉁''( Berliner Illustrierte Zeitungde )과 ''디 베어마흐트''( Die Wehrmachtde )에 게재되었다.

3일 후 에드워즈는 마르세유의 친구 귄터 슈타인하우젠을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 날인 1942년 9월 7일, 또 다른 절친한 친구 한스-아르놀트 슈탈슈미트가 작전 중 실종되었다. 이러한 개인적인 손실은 마르세유의 마음에 큰 부담을 주었고, 그의 가족 비극과 함께.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인생의 마지막 몇 주 동안 더욱 침울해졌다. 전투의 압박은 또한 밤에 지속적인 몽유병을 유발했으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해석될 수 있는 다른 증상도 유발했다. 마르세유는 이 사건을 결코 기억하지 못했다.

마르세유는 9월에도 여러 승리를 거두었으며, 9월 15일에는 7승(145–151호)을 포함했다. 9월 16일부터 25일까지, 9월 15일 임무 직후 불시착으로 팔이 부러져 마르세유는 점수를 늘리지 못했다. 그 결과 에두아르트 노이만은 그에게 비행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같은 날, 마르세유는 푸카에 기반을 둔 96a ''스쿼드리아'', 9° ''그루포'', 4° ''스토르모''에서 이탈리아 에이스 ''테넨테'' 에마누엘레 안노니의 마키 C.202 '96–10'을 시험 비행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비행은 동체 착륙으로 끝났다. 마르세유는 이탈리아 항공기의 스로틀 제어가 독일 항공기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작동하여 실수로 엔진을 껐다.

마르세유는 불과 5주 만에 친구 한스-아르놀트 슈탈슈미트의 59승에 거의 육박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막대한 물질적 우위는 수적으로 열세인 독일 조종사들에게 심각한 압박을 가했다. 이 당시 독일 전투 부대의 전력은 112대(65대 운용 가능)였고, 영국은 약 800대를 보유했다. 마르세유는 전투의 광적인 속도로 인해 신체적으로 지쳐가고 있었다. 9월 26일 마지막 전투 후 마르세유는 스핏파이어 편대와의 15분간의 전투 끝에 쓰러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마르세유의 158번째 주장이었다. 1942년 9월 26일 오후에 착륙한 후 그는 신체적으로 지쳐 있었다. 여러 보고서에서 마르세유의 분대원들이 마르세유의 신체 상태에 대해 눈에 띄게 충격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마르세유는 자신의 전투 후 기록에 따르면, 고고도에서 시작하여 저고도로 내려온 치열한 공중전에서 스핏파이어 조종사와 교전했다고 한다. 마르세유는 그와 그의 상대가 서로의 꼬리에 붙잡으려고 노력했던 방법을 이야기했다. 둘 다 성공했고 발포했지만 추적자는 매번 공격자에게 반격할 수 있었다. 마침내 연료가 15분밖에 남지 않자 그는 태양으로 올라갔다. RAF 전투기가 따라왔고 섬광에 갇혔다. 마르세유는 좁은 회전과 롤을 실행하고 100m 거리에서 발포했다. 스핏파이어는 불이 붙었고 날개를 잃었다. 조종사가 안에 있는 채로 땅에 추락했다. 마르세유는 "그는 내가 지금까지 만난 가장 터프한 적이었다. 그의 회전은 놀라웠다... 마지막 싸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썼다. 그 조종사와 그의 부대는 신원을 알 수 없다.

참조

[1] 기타 Hans-Joachim Marseille – The Star of Africa AV-Medienproduktion 1990
[2] 웹사이트 http://www.raafdb.co[...]
[3] 웹사이트 MGFA on Marseiile http://www.die-linke[...] Military History Research Office (Germany) 2013
[4] 지도 30°53'26.80"N and 28°41'42.87"E. https://maps.google.[...] Google Maps 2007-09-25
[5] 웹사이트 Hans-Joachim Marseille http://www.warbirdsr[...]
[6] 서적 1994
[7] 기타 Hans-Joachim Marseille – The Star of Africa AV-Medienproduktion 1990
[8] 서적 1994
[9] 서적 2007
[10] 웹사이트 MGFA on Marseiile http://www.die-linke[...] Military History Research Office (Germany) 2013
[11] 지도 30°53'26.80"N and 28°41'42.87"E. https://maps.google.[...] Google Maps 2007-09-25
[12] 웹사이트 Hans-Joachim Marseille http://www.warbirds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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