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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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효순은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으나 광해군 시기 이이첨 일당과 결탁하여 관직이 삭직된 인물이다. 본관은 청주이며, 좌의정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미 조달에 기여했으며, 광해군 시기에는 이조판서와 좌의정을 역임했으나 폐모론에 앞장섰다. 인조 반정으로 관직이 추탈되었으나, 이후 이완용의 상소로 1908년에 복권되었다. 사후에는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했으며, 복권 논쟁을 거쳐 1907년에 복권되었다. 저서로는 《신기비결》과 《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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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효순 | |
|---|---|
| 기본 정보 | |
![]() | |
| 본관 | 밀양 박씨 |
| 호 | 월탄(月灘) |
| 출생 | 1901년 12월 26일 |
| 사망 | 1981년 1월 13일 (향년 79세) |
| 직업 | 소설가, 시인, 극작가, 문학평론가 |
| 국적 | 대한민국 |
| 학력 | |
| 최종 학력 |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
| 가족 | |
| 배우자 | 한효순 |
| 자녀 | 6남 2녀 |
| 경력 | |
| 주요 경력 | 조선일보 학예부장 예술원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장 |
| 수상 | |
| 수상 내역 | 대한민국예술원상 3·1문화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
| 작품 | |
| 주요 작품 | 《밀다원 시대》 《아랑의 정조》 《다정불심》 《금삼의 피》 《자고 가는 저 구름아》 《여인열전》 《양녕대군》 《꿈하늘》 |
2. 생애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군을 무찌르고 군량미 조달에 힘쓰는 등 공을 세웠다. 그러나 광해군 시기에는 이이첨 등 대북파와 손잡고 반대파 숙청 및 폐모론을 주도하여 좌의정까지 올랐다.[2] 1623년 인조 반정 이후 사후 관직이 모두 추탈되었으나, 대한제국 시기인 1908년 4월, 이완용 등의 건의로 복권되었다.
2. 1. 초기 생애 (1543년 ~ 1592년)
본관은 청주이며, 자는 면숙(勉叔), 호는 월탄(月灘)이다. 1568년(선조 1년)에 생원이 되었고, 1576년(선조 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 이후 수찬(修撰)을 거쳐 영해 부사(寧海府使)까지 지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적 토벌을 선언하고 격문을 살포하여 의병을 규합했으며, 영해 지역에서 왜군을 격파하는 활동을 했다.2. 2. 임진왜란 시기의 활동 (1592년 ~ 1597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한효순은 왜적을 토벌하겠다는 격문을 뿌려 의병을 모았다. 이후 영해 지역에서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경상좌도 관찰사[2]로 특별히 승진하였으며, 순찰사를 겸임하며 군량미를 확보하는 데 힘썼다. 1594년에는 병조참판을 지냈고, 1596년에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세 지역을 총괄하는 체찰부사가 되었다. 1597년에는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었다.2. 3. 광해군 시기의 정치 활동 (1597년 ~ 1623년)
1597년 선조 30년에 중추부지사가 되었고, 1601년에는 병조판서, 한성부판윤,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04년에는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1605년 평안도관찰사와 중추부판사를 거쳐 1606년 우찬성이 되었다.광해군 즉위 후인 1610년에는 다시 이조판서가 되어 이이첨 등 대북파 세력과 손잡고 반대파 인물들을 조정에서 몰아내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1616년에는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1617년에는 폐모론을 주도적으로 제기하며 인목대비의 대비 지위를 박탈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고[2], 이에 반대하는 이항복과 기자헌 등을 탄핵하여 유배시키는 데 앞장섰다. 결국 1618년 폐모 주장을 관철시켜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2. 4. 몰락과 죽음 (1621년 ~ 1623년)
1621년(광해군 13년) 사망하였다. 그는 광해군 재위 시 이이첨 일파와 협력하여 정권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으며, 1616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1617년에는 폐모론을 주도하여 인목대비의 폐위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이에 반대하던 이항복, 기자헌 등을 탄핵하여 유배시키는 데 앞장섰다. 1618년에는 마침내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서궁에 유폐시키는 일을 실행하였다. 이러한 활동들은 그가 권력의 정점에 서게 했지만, 동시에 정치적 몰락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결국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이미 사망한 한효순 역시 사후에 관직이 모두 박탈되었다.3. 사후 평가와 논란
1623년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한효순 역시 관직을 모두 박탈당하고 역적으로 몰렸다. 이후 오랫동안 복권되지 못하다가, 1873년(고종 10년)에 이르러 이현일, 윤휴 등과 함께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신원 상소가 올라왔다. 하지만 당시 정계를 주도하던 서인 노론 세력의 최익현, 김평묵 등이 이를 강력히 반대하면서 복권은 무산되었다. 이들은 한효순 등을 남인이나 이인좌의 난 관련 인물들과 동일시하며 복권에 극렬히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시간이 흘러 대한제국 시기인 1907년(융희 1년) 이후, 내각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이 여러 차례 복권을 상소하였고, 마침내 1908년 4월에 공식적으로 복권되어 죄적에서 이름이 삭제되고 명예를 회복하였다.
3. 1. 인조반정 이후의 평가
1623년 인조 반정으로 인해 관직을 모두 빼앗기고 사실상 역적으로 취급받았다.1873년(고종 10년) 이현일, 윤휴, 목내선, 정인홍, 정도전 등과 함께 한효순을 복권시켜야 한다는 신원 상소가 올라왔다. 하지만 당시 서인 노론 세력이었던 최익현과 김평묵 등은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 이들은 상소를 통해 한효순 등의 신원을 요구한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특히 남인인 윤휴나 이인좌의 난 관련자들과 한효순을 동일시하며 복권에 극렬히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최익현과 김평묵은 1876년까지 이러한 주장을 굽히지 않아 복권 논의는 결국 무산되었다.
이후 대한제국 시기인 1907년(융희 1년) 이후 이완용이 여러 차례 복권을 상소하였고, 마침내 1908년 4월에 윤휴, 이현일 등과 함께 복권되었다.
그가 남긴 편저로는 《신기비결》과 《진설》이 있다.
3. 2. 복권 논쟁 (1873년 ~ 1908년)
1873년(고종 10) 이현일, 윤휴, 한효순, 목내선, 정인홍, 정도전 등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신원 상소가 올라왔다. 이에 면암 최익현과 중암 김평묵 등 서인 (노론) 계열 인사들은 이를 강하게 반대했다.1873년부터 1876년까지 최익현과 김평묵 등은 상소를 통해 이현일, 한효순, 목내선 등의 신원을 요구한 이들을 추율(追律)로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남인인 윤휴 이후 서인(노론)과 남인은 원수가 되었으며, 만약 서양과의 조약 체결 후 민암, 목내선, 이인좌, 정희량, 이현일 등의 후손들이 백성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난을 일으킨다면 올바른 선비들이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복권 여론에 반대하여 결국 무산시켰다.
이후 최익현과 김평묵이 모두 사망한 뒤 복권 논의가 다시 이루어졌다. 1907년(융희 1년) 이후 이완용이 여러 차례 복권을 상소하였고, 그 결과 1908년(융희 2년) 1월 이완용 등의 건의로 작위와 시호가 먼저 회복되었다.[4] 같은 해 4월 30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최종적으로 복권되어 죄적에서 삭제되고 명예가 회복되었다.[3]
3. 3. 이완용과의 관계와 복권 (1907년 ~ 1908년)
1907년(융희 1년) 이후,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은 여러 차례 한효순의 복권을 상소하였다.[3]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08년(융희 2년) 1월에는 이완용 등의 건의에 따라 한효순의 작위와 시호가 먼저 회복되었다.[4] 이어서 같은 해 4월 30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의 최종 건의가 받아들여져 한효순은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3] 이로써 그는 죄적에서 이름이 삭제되고 모든 명예를 회복하게 되었다.[3]4. 관련 작품
5. 저서
- 《신기비결》
- 《진설》
참조
[1]
간행물
PPL_6JOb_A1543_1_0014363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2]
문서
전란 중의 임시 분도
[3]
서적
죽은 좌의정 한효순 외 77명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에 관하여 보고하다
순종실록
1908-04-30
[4]
서적
한효순, 정인홍 등에게 죄명을 벗겨주고 작위와 시호를 회복시켜 주다
순종실록
1908-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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