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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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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현일은 조선 시대의 학자로,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하여 이기이원론을 옹호하고 율곡 이이의 이기일원론을 비판했다. 1627년 영덕에서 태어나 1704년에 사망했으며, 1688년 《율곡이씨사단칠정서변》을 저술하여 이이의 사단칠정론을 비판했다.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다가 서인에게 비판받아 유배되었으며, 사후에도 여러 차례 복권과 추탈을 겪었다. 저서로는 《갈암집》, 《수주관규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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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일
기본 정보
한글 이름이현일
한자 이름李玄逸
로마자 표기Lee Hyeonil
인물 정보
직업문신
성리학자
학문 분야성명리학
가족 관계
아버지이시명
어머니장계향

2. 생애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남인의 주요 인물인 이현일은 송명리학자 장흥효의 제자인 아버지 이시명음식디미방의 저자로 유명한 어머니 장계향 사이에서 태어났다. 장계향은 전처 소생 2명과 자신이 낳은 7남 3녀를 훌륭히 길러냈으며, 일곱 아들은 '칠현자(七賢者)'라 불렸고 이현일은 그중 셋째 아들이었다[1] . 그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대표적인 산림으로 평가받으며, 평생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기사환국 이후에는 남인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며 대사헌, 이조판서 등 주요 관직을 역임했으나, 갑술환국으로 인해 오랜 유배 생활을 겪었다.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를 지속하며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한편, 그는 기자에 대해 "립아동방만세지극(立我東方萬世之極)"이라 칭송하며, 기자의 조선 교화와 공적을 높이 평가하는 역사 인식을 보이기도 했다[2] . 사후에는 서인노론 세력의 정치적 공격으로 인해 여러 차례 관직과 시호가 추탈되었다가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복권되었다.

2. 1. 생애 초반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남인의 주요 인물인 갈암 이현일은 1627년 경상북도 영해군(현 영덕군)에서 학자 이시명음식디미방의 저자로 유명한 장계향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은 영남학파의 대표적인 산림으로 평가받으며, 어머니로부터 큰 인격적 영향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나타냈고 외할아버지인 학자 장흥효에게 배우며 성리학의 기초를 다졌다. 청년기에는 병자호란정묘호란 이후 시대적 과제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으나, 이후 학문 연구에 더욱 매진하여 깊이를 더했다.

2. 1. 1. 출생과 가계

갈암 이현일은 1627년 1월 11일 경상북도 영해군 창수면 인량리(仁良里, 현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나라골의 자운정 자택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의령 현감을 지낸 이함(李涵)이며, 아버지는 학자이자 참봉을 지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안동 장씨로 알려진 안동 장씨(安東張氏) 장계향(張桂香)으로, 유학자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딸이다. 이현일은 학자인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의 동생이며, 그가 태어난 나라골에는 현재 그의 직계 후손들이 살고 있다.

어머니 장계향은 유명한 요리책인 음식디미방의 저자로, 뛰어난 음식 솜씨로 영남 사대부 부인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다. 또한, 그녀는 영남 남인 사회에서 덕망 높은 어머니의 전형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이현일은 훗날 자신이 평소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무례하거나 비열한 말과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은 모두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회고했다.

이현일은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글을 잘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형제 중 둘째 형인 이휘일은 아들이 없던 삼촌 이시성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현일의 가계'''
구분관계이름비고
친가할아버지이함(李涵)
백부이시청
사촌이신일(李莘逸)이시청의 아들
삼촌이시형(李時亨)
사촌이전일(李傳逸)이시형의 아들
사촌이후일(李後逸)이시형의 아들
삼촌이시성(李時成)
사촌/형이휘일(李徽逸)이시성의 양자 (원래 이현일의 둘째 형, 1619년 ~ 1672년)
삼촌이시진(李時震)
사촌이덕생(李德生)이시진의 아들
아버지이시명(李時明)호 석계, 학자, 참봉
아버지의 배우자어머니 (본처)광산 김씨검열 김해(金垓)의 딸
이복 형이상일(李尙逸)1611년 ~ 1678년
이복 누나재령 이씨여국헌(余國獻)에게 출가
어머니 (생모)장계향(張桂香)1598년 ~ 1680년, 학자 장흥효의 딸, 음식디미방 저자
동복 형제자매이휘일(李徽逸)삼촌 이시성의 양자로 출계 (1619년 ~ 1672년)
동생이숭일(李嵩逸)1631년 ~ 1698년
동생이정일(李靖逸)1635년 ~ 1704년
동생이융일(李隆逸)1636년 ~ 1698년
동생이운일(李雲逸)
여동생재령 이씨김영(金영)에게 출가
여동생재령 이씨김이(金怡)에게 출가
본인 및 직계부인정부인 무안 박씨
아들이연(李연)
아들이구(李구)
아들이재(李栽)호 밀암(密庵), 1657년 ~ 1730년
아들이심(李심)자 계간(季幹)
재령 이씨김이현(金以鉉)에게 출가
재령 이씨홍억(洪億)에게 출가
재령 이씨김대(金岱)에게 출가
이름 미상
서자이?(李?), 이?(李?), 이반(李槃)
외가외할아버지장흥효(張興孝)1564년 ~ 1634년, 호 경당, 학자
외증조부장팽수(張彭壽)



이현일의 아버지 이시명은 송명리학자 장흥효의 제자였다. 이시명은 첫 부인 광산 김씨와 사별하고 두 아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스승 장흥효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자신의 딸 장계향과 혼인시켰다[1] . 장계향은 전처 소생의 두 아이와 자신이 낳은 7남 3녀, 총 열 명의 자녀를 훌륭하게 길러냈다. 그녀가 낳은 일곱 아들은 '칠현자(七賢者)'라 불렸으며, 이현일은 그중 셋째 아들이었다[1] .

2. 1. 2. 수학과 소년기

이현일은 영남학파의 주요 인물로서 퇴계 이황의 학문적 전통을 이은 대표적인 산림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9세 때 이미 글을 지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큼 일찍부터 재능을 보였다. 어린 시절에는 외할아버지인 장흥효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 장흥효는 퇴계 이황의 뛰어난 제자였던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 모두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학자였기에, 퇴계학파가 서애학파와 학봉학파로 나뉘는 상황 속에서도 두 학파의 학문적 전통을 모두 계승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이현일의 학문 역시 서애 문도들과 학봉 문도들 모두에게 인정받았으며, 영남 퇴계학파 내에서도 정통으로 여겨졌다.

그는 어려서부터 제자백가의 사상을 두루 접했으며, 경전과 역사서(자·사)는 물론, 음악(율려), 역법(성력), 군사학, 진법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깊이 있는 지식을 쌓았다. 청년기에는 병자·정묘 등 전란으로 인한 국가적 치욕을 씻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기개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마음을 돌려 육경을 비롯한 사서(四書)와 정주(程朱)의 학설을 깊이 탐구하며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2. 2. 학문 연구

이현일은 젊은 시절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에 매진하였다. 1646년1648년 두 차례 초시에 합격했으나 대과 응시를 포기하고 고향에서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1], 아들 이채, 조카 이만, 권두경, 이광정 등 많은 문인을 길러냈다.

그의 학문 활동은 퇴계학파의 입장에서 이루어졌으며, 중형 이휘일의 《홍범연의(洪範衍義)》 편찬에 참여하고 훗날 이를 완성하는 등 저술 활동에도 힘썼다. 또한 예송 논쟁 시기에는 남인 퇴계학파를 대표하여 서인의 예설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688년에는 이이의 사단칠정론을 비판하는 《율곡이씨사단칠정서변(栗谷李氏四端七情書辨)》을 저술하여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그의 성리학적 입장을 명확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1689년 기사환국 이후에는 남인을 대표하는 산림(山林)으로 인정받아 성균관 좨주, 이조참판, 대사헌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3] 남인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고 정책 결정에 참여했다. 이 시기 그는 향촌 사회 교화를 위한 향약 실시를 건의하기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3]

한편, 그는 기자에 대해 "립아동방만세지극(立我東方萬世之極)"이라 칭송하며 기자의 조선 교화를 높이 평가하는 등[2], 성리학적 이상 국가관에 기반한 역사 인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2. 2. 1. 성리학 연구와 저술

1646년(인조 24)과 1648년 두 차례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복시를 포기한 뒤 고향에 머물며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의 문하에서는 아들 이채, 조카 이만 외에도 권두경, 이광정 등 저명한 학자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1652년(효종 3)에는 중형 이휘일이 편찬하던 《홍범연의(洪範衍義)》 작업에 참여하였고, 이후 1686년에는 이를 이어 완성(續成)하였다.

학문 연구에 몰두하던 중에도 현실 문제에 대한 학문적 입장을 드러내기도 했다. 1666년(현종 7)에는 경상도 남인 퇴계학파를 대표하여 송시열, 송준길서인의 기년복 예설(朞年服禮說)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그는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남의 예에 따라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왕가와 사대부가를 동일하게 취급하려는 서인의 입장을 비판했다. 또한 송시열뿐 아니라 허목, 윤선도 등 다른 학자들의 예설(禮說)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복제소(服制疏)〉를 작성하기도 했다.

1688년(숙종 14년)에는 그의 성리학 연구의 중요한 결과물인 《율곡이씨사단칠정서변(栗谷李氏四端七情書辨)》 (또는 《율곡사단칠정서변(栗谷四端七情書辨)》)을 저술하여 8월에 출간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이이의 사단칠정론을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이현일은 이(理)와 기(氣)가 하나라는 이기일원론적 관점은 이(理)를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 만물의 근본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또한 사단(四端)은 공(公)적인 것으로 선(善)하지 않음이 없는 이발(理發)이며, 칠정(七情)은 사(私)적인 것으로 선과 불선(不善)이 섞여 있는 기발(氣發)이므로, 이 둘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이의 학설에 대한 중요한 반박으로, 당시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서인 학자들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훗날 기사환국 이후 성균관 좨주(祭主) 등의 관직을 역임할 때도 교육자로서의 역할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는 좨주 직을 사양하는 상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3]

> 지금 받은 국자(國子) 사유(師儒)의 직임은 어찌 중대하고도 어려운 직임이 아니겠습니까? 위로는 오교(五敎)를 펴서 밝게 임금 섬기기를 도(道)로써 하는 의리를 알게 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고금의 사변(事變)을 말해주어 널리 들어서 도학(道學)을 갖추게 해야 합니다.[3]

2. 3. 정치 활동

이현일은 학문적 명성을 바탕으로 허목, 윤휴, 권대운남인의 주요 인물들의 추천을 받아 정계에 입문하였다. 여러 차례 관직 제수를 사양했으나, 숙종과 남인들의 거듭된 요청으로 1677년 마침내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3] 그는 인조 반정 이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영남 남인의 기대를 받으며 활동을 시작했다.

공조정랑,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며 당시 권력을 누리던 세 외척 가문(三戚家)의 용사가 부당함을 지적하고 당쟁의 폐단을 논하였다. 또한 부패한 관료들의 척결과 외척의 권력 농단을 규탄하였고, 실력에 따른 바른 인재 등용을 상주하는 등 당대의 시폐를 해소할 것을 건의하는 개혁적인 목소리를 냈다. 남인 정권 하에서 영남 남인과 퇴계학파의 입장을 정계에 반영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실용주의적 정책을 우선시했던 허목, 윤휴 중심의 근기 남인과는 정치적 견해 차이를 보이며 갈등을 겪기도 했다.[4] 특히 그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여 이기이원론에 기반한 도학 정치를 추구했으나,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근기 남인과는 다른 노선을 걸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다시 중용되어 성균관 좨주,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등 요직을 거쳤다. 이 시기 그는 인현왕후 폐위의 부당함을 지적하고[3], 과거 제도의 폐단을 비판하며 학문과 덕행 중심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또한 경신무옥과 임술무옥 희생자들의 신원 회복과 사면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인의 견제와 남인 내부의 갈등 속에서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는 한계를 보였고, 그가 추구했던 도학(道學)에 기반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이상은 현실 정치의 벽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다.[3]

2. 3. 1. 천거와 사양

1674년 학행으로 명성이 높아지자 허목, 윤휴, 권대운 등의 추천으로 영릉참봉(寧陵參奉)에 천거되었다. 그러나 곧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사퇴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인 1675년에는 장악원 주부, 공조좌랑, 사헌부 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1676년(숙종 2년)에는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었지만, 아버지의 삼년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와 공조좌랑에 임명되자, 서울로 올라가 임금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는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시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이 역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현일의 학문적 능력을 높이 평가한 허목윤휴는 계속해서 그가 관직에 나오기를 권유했다. 이러한 천거에는 근기 남인의 지도자였던 용주(龍洲) 조경(趙絅)과의 인연도 영향을 미쳤다. 이현일의 아버지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은 본래 파주에 살던 조경과 친분이 두터웠다.[3] 이현일은 42세 되던 해인 1668년, 아버지의 명으로 서울에 과거를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조경을 만나 그의 간결하고 단정하며 온화한 모습에 공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인연을 맺었다고 전해진다.[3]

2. 3. 2. 조정 출사와 활동

1674년 학행으로 명성이 높아지자 허목, 윤휴, 권대운 등의 추천으로 영릉참봉(寧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사퇴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에는 장악원 주부, 공조좌랑, 사헌부 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1676년(숙종 2)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후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와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상경하여 임금에게 사은(謝恩)하고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헌부지평에도 제수되었지만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남인의 주요 인물이었던 허목윤휴는 그의 학문적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계속 출사를 권유했다. 여기에는 근기 남인의 지도자였던 용주(龍洲) 조경(趙絅)과의 인연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현일의 부친 석계 이시명(李時明)은 파주에 살던 조경과 친분이 두터웠으며[3], 이현일 자신도 1668년 과거를 보러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조경을 만나 그의 간정(簡靖)함과 온아(溫雅)함에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 인연을 맺었다고 전해진다.[3]

결국 숙종허목, 권대운, 윤휴 등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1677년(숙종 3년) 선무랑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로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같은 해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면서 비로소 중앙 정계에 나아갔다. 그가 현명하고 학덕 높은 지사로 천거되어 출사하자, 인조 반정 이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영남 남인들은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1678년에는 공조정랑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권력을 누리던 세 외척 가문(三戚家)의 용사가 부당함을 지적하고 당쟁의 폐단을 논하였다. 또한 부패한 관료들의 척결과 외척의 권력 농단을 규탄하였고, 실력에 따른 바른 인재 등용을 상주하는 등 당대의 시폐를 해소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후 그는 숙종의 각별한 신뢰 하에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 때까지 공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했으며, 남인 정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면서 영남 남인의 입장과 퇴계학파의 입장을 충분히 정계에 반영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북인 계열인 근기 남인(近畿南人)과 다소 의견이 달라 실패하였다. 퇴계학파의 입장에서 이기이원론을 주장했지만 역시 실용주의 위주의 정책을 견지하던 근기 남인에 의해 외면당하였다.[4] 그는 허목윤휴북인 계열 인사들을 조정에 천거하는 것도 부당하게 여겼다. 이후 이현일은 근기 남인이 주도하는 정국 운영에 대체로 비판적,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때 그는 남인의 한 사람이었지만, 퇴계학파의 정통 인사로서 청남이나 탁남과는 또다른 정파인 영남 남인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1689년 산림(山林)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에 임명되었다. 이어 사헌부 장령을 거쳐 통정대부로 특진,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며, 이때 인현왕후(仁顯王后) 폐비 문제가 거론되자 당색은 달랐으나 국모를 함부로 폐하는 것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현왕후 폐위에 반대한 일로 근기 남인들과 다소 마찰이 생기기도 했다. 또한 윤선도를 복권시키는 문제에 참여하지 않은 일로 근기 남인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는 임술무옥의 신설(伸雪)과 희생자 및 연좌된 자들의 사면, 복권을 건의하였고, 6월에는 성균관 좨주(祭酒)에 임명되어 겸 경연참찬관을 겸하여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이어 예조참판성균관 좨주‧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에 겸임 제수되어 거듭 사임의 뜻을 표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8월에는 사헌부대사헌 겸 성균관 좨주 원자보양관에 올랐고, 9월에는 인현왕후를 위한 소를 올렸으나 왕의 윤허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근기 남인들에 의해 견제당한다. 11월에는 분황(焚黃)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2. 3. 3. 남인 정권 참여와 한계

숙종허목, 권대운, 윤휴 등 당시 남인 세력의 핵심 인물들이 거듭 출사를 요청함에 따라, 이현일은 1677년(숙종 2년) 선무랑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로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해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면서 중앙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인조 반정 이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영남 남인들은 학문과 덕망이 높은 이현일의 출사에 큰 기대를 걸었다. 1678년에는 공조정랑사헌부지평에 임명되어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세 외척 가문(三戚家)의 인사 등용 문제를 비판하고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또한 부패한 관료의 척결, 외척의 권력 남용을 강하게 규탄하며 실력에 따른 공정한 인재 등용을 주장하는 등 당대의 정치·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한 개혁안을 적극적으로 건의하였다.

이현일은 숙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 정권이 실각하기 전까지 공조정랑,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했다. 그는 남인 정권의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영남 남인과 퇴계학파의 입장을 정계에 반영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북인에 뿌리를 둔 허목, 윤휴 중심의 근기남인(近畿南人) 세력과의 견해 차이로 인해 뜻을 이루기 어려웠다. 특히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여 이기이원론을 중시했던 이현일의 입장은 실용주의적 정책을 우선시했던 근기남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 그는 허목윤휴북인 계열 인사를 조정에 등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로 인해 이현일은 근기남인이 주도하는 정국 운영에 대해 대체로 비판적이면서도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비록 남인에 속했지만, 청남이나 탁남과는 구별되는 영남 남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독자적인 위치에 있었다.

1690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이현일은 이조참판을 거쳐 세자시강원 찬선에 임명되어 세자책례(世子册禮)에 참석하였고, 이후 대사헌, 이조참판 등에 거듭 임명되었다. 그러나 서인 세력과의 대립뿐만 아니라, 같은 남인 내에서도 근기남인, 청남 등과의 갈등으로 인해 여러 차례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럼에도 숙종은 그를 퇴계 이황의 학문적 정통 계승자로 인정하고 깊이 신뢰하여 어떻게든 조정에 머물게 하려 하였다.

1692년에 다시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거듭된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관직에 나아갔다. 그는 왕에게 상소를 올려 승보(陞補)·학제(學製)·도회(都會)·잡과(雜科) 등 기존 제도의 폐단을 지적하고, 학문·덕행·문예 중심의 정자학교(程子學校) 제도를 따라 과거 제도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과거 시험에서 일부 특권층 자제들이 학연, 인맥 등을 이용한 매관매직이나 대리 시험과 같은 부정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에 대한 감독 강화와 적극적인 시정 및 개혁을 건의하였다.

이어 그는 경신무옥과 임술무옥의 희생자들에 대한 신원 회복과 사면을 건의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곧이어 병조참판에 제수되었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우참찬에 임명되어 다시 상경하였다. 마침내 이조판서에 올라 조정의 인사권을 담당하게 되었으나, 서인의 견제는 물론 같은 남인 집권 세력 내에서도 그가 경연에만 전념하기를 바라는 등 정치적 견제를 받아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3] 결국 이현일이 꿈꾸었던 도학(道學)에 기반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이상은 현실 정치의 벽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하였다.[3]

2. 3. 4. 인현왕후 폐위 반대와 오해

1689년 산림(山林)으로 인정받아 특별히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에 임명되었고, 이후 사헌부장령을 거쳐 통정대부로 승진하며 공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이때 인현왕후(仁顯王后) 폐비 문제가 불거지자, 이현일은 남인이었음에도 당파를 넘어 국모를 함부로 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하며 사직소를 올렸다. 그러나 숙종은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

인현왕후 폐위에 반대한 일과 윤선도 복권 문제에 참여하지 않은 일 등으로 인해 같은 남인 내에서도 근기남인들과 다소 마찰을 빚기도 했다. 1689년 9월에는 다시 인현왕후를 위한 상소를 올렸으나 왕의 윤허를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근기남인들의 견제를 받게 되었다.

이후 1689년(숙종 15) 재이(災異, 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를 이유로 구언(求言)이 내려졌을 때, 이현일은 이에 응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 내용 중 폐비된 인현왕후를 별궁에 거처하게 하여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이 상소문의 일부 구절("自絶于天")이 문제가 되었다.[3] 서인 세력은 이현일이 폐비를 반대하고 별궁 보호를 주장한 이 구절을 문제 삼아, 그가 실제로는 인현왕후 폐비 여론을 주도한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여 몰아갔다.

결국 이현일은 자신의 본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인현왕후를 모해하려 한 인물로 매도되었고, 마침내 노론에 의해 '명의죄인(名義罪人)'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3] 노론은 이 사건을 광해군이이첨이 인목대비 폐모를 주장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엮어 이현일을 악의적으로 중상하고 비방하였다. 이로 인해 평생 명의(名義)를 지킨 인물로 존경받던 도학자가 오히려 명의를 어긴 죄인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다.[3]

2. 3. 5. 인사권 장악과 개혁 시도

1690년(숙종 15년) 이조참판세자시강원 찬선을 지냈고, 이후 대사헌과 이조 참판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으나, 서인 및 근기남인 등 다른 정치 세력과의 갈등으로 인해 번번이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그를 퇴계 이황의 학문적 계승자로 인정하고 신임하여 조정에 계속 머물게 하려 했다.

1692년에는 다시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그는 왕에게 상소를 올려 기존의 승보(陞補)·학제(學製)·도회(都會)·잡과(雜科) 등의 제도를 폐지하고, 학문·덕행·문예를 중시하는 정자(程子)의 학교 제도를 따라 과거 제도를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과거 시험에서 일부 특권층 자제들이 학연이나 인맥 등 매관매직과 같은 부정한 방법으로 합격하거나, 다른 사람을 대신 시험 보게 하는 등의 폐단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에 대한 감독 강화와 적극적인 시정 및 개혁을 건의하였다.

이후 경신무옥과 임술무옥의 희생자들에 대한 신원(伸雪)과 사면 등을 건의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조참판에 제수되었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우참찬으로 임명되어 다시 조정에 나왔다. 마침내 이조판서가 되어 조정의 인사권을 장악하였으나, 서인의 견제는 물론 같은 남인 세력으로부터도 경연에만 전념하라는 요구를 받으며 실질적인 권력 행사에서 배제되는 정치적 견제를 받았다.[3] 이로 인해 이현일이 꿈꾸었던 도학적 경세제민의 포부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3]

2. 4. 유배와 최후

1694년 갑술환국 이후 서인 세력의 탄핵을 받아 기나긴 유배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함경북도 홍원현으로 유배되었으나, 집권 세력인 서인들의 계속된 문제 제기로 결국 더 험한 곳인 종성군으로 옮겨져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유배지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했으며, 《수주관규록》, 《돈전수어》 등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1697년 고령을 이유로 감형되어 호남의 광양현으로 유배지가 옮겨졌고, 이후 영해군 갈은리를 거쳐 1699년 마침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석방 후에는 안동 금양 등지에 머물며 성리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그는 영남학파의 거두로서 이황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하여 이기호발설을 지지하였고, 이이의 학설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학문적 입장은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노론과의 지속적인 긴장 관계를 야기했다.

1704년 10월, 안동군 임하면 금소리의 금양재사(錦陽齋舍)에서 향년 77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신은 여러 차례 이장된 끝에 1832년 영해 인량리에 부인과 함께 합장되었다.[3]

사후에도 그는 순탄치 못한 평가를 받았다. 인현왕후를 보호하려던 본래 의도와는 달리[3], 서인노론 세력에 의해 인현왕후를 모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낙인찍혔다.[3] 그의 저술 역시 금서를 넘어 '흉서(凶書)'로 취급되어 탄압받았으며[3], 관직과 시호가 여러 차례 추탈되었다가 복권되는 과정을 반복했다. 이러한 정치적 박해 속에서도 그의 학문은 아들 이재, 외증손 이상정, 그리고 유치명, 김흥락 등으로 이어지며 영남학파의 중요한 학맥을 형성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1909년(융희 3년)에 이르러서야 그의 관직과 시호가 최종적으로 회복되었다. 그가 말년을 보낸 안동 금소에는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글씨로 새겨진 '갈암 선생 금양유허비'가 남아 있으며[3], 영양군 석보면 주남리에는 그가 머물렀던 남악정(南嶽亭)이 있다.[3]

2. 4. 1. 유배와 저술 활동

1694년(숙종 19년) 4월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이현일은 조사기(趙嗣基)를 변호하다가 서인 세력인 사간원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이로 인해 처음에는 함경북도 홍원현으로 유배되었으나, 서인 안세징(安世徵) 등은 유배지가 편하다는 이유로 다시 탄핵하였다. 결국 그는 더 험한 곳인 종성군으로 이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처벌을 받았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이현일은 좌절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종성 유배지에서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학동과 청년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퇴계학파의 입장에서 조식(曺植) 등 선배 유학자들의 학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수주관규록 (愁州管窺錄)》을 저술하여 1695년에 완성하였다. 이어 1697년(숙종 23년) 봄에는 《돈전수어(惇典粹語)》를 편찬하였다.

1697년에는 고령을 이유로 감형되어 그해 5월, 유배지가 호남의 광양현으로 옮겨졌다. 그는 53일간의 육로와 뱃길을 거쳐 7월 15일 광양에 도착했으며[3], 1698년 3월에는 섬진강변 영해군 갈은리(葛隱里)로 다시 옮겨가 그곳에서도 후학들을 가르쳤다. 마침내 1699년 2월,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이 내려져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2. 4. 2. 석방과 죽음

1700년 4월, 이현일은 안동의 임하현 금소역(琴詔驛)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근처 금양(錦陽)에 집을 짓고 문인들을 받아들여 가르쳤다. 1701년(숙종 27년) 8월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석방 명령이 다시 거두어졌으나, 압송되지는 않았다.

이후 고향에서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는 영남학파의 주요 인물로서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아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지지하였고, 이이의 학설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여러 저서를 남겼는데,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문집: 《갈암집 (葛庵集)》
  • 《돈전수어(惇典粹語)》
  • 《충절록(忠節錄)》
  • 비평서: 《수주관규록 (愁州管窺錄)》
  • 《신편팔진도설(新編八陳圖說)》
  • 《율곡이씨사칠서변(栗谷李氏四七書辨)》
  • 공저 (형 이휘일과 함께): 《홍범연의 (洪範衍義)》


특히 이이의 이기일원론 등을 정면으로 비판한 《율곡이씨사칠서변》이 간행되자, 서인 세력은 다시 그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는 영남학파의 정통 학자로 존경받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1703년 7월에는 《존주록(尊周錄)》을 편찬하였다.

1704년에는 영해군 인덕리(仁德里)로 잠시 이주했다가 다시 안동군 금소로 돌아와 금양에서 요양했다. 결국 1704년 10월, 안동군 임하면 금소리 금양재사(錦陽齋舍)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이는 77세였다.

사후 그의 시신은 영해군 금양에 처음 묻혔다가, 1705년 1월 안동 금소리 금양 북쪽 기슭으로 옮겨졌고[3], 1706년에는 다시 안동 남쪽 영해군 신사동 언덕으로 이장되었다. 최종적으로 1832년(순조 32) 영해 서쪽 인량리 행정(杏亭)의 사향(巳向) 언덕에 부인과 합장되었다.[3] 신도비는 묘소로 가는 길가에 세워져 있다.[3]

인현왕후를 보호하려 했던 본래 의도와 달리, 오히려 인현왕후를 해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낙인찍히는 비극을 겪었다.[3] 그의 저술 또한 금서를 넘어 '흉서(凶書)'로 취급되어, 간행하거나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죄인 취급을 받는 상황이 사후 200년 동안 이어졌다.[3]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노론은 율곡 이이의 학설을 비판한 그를 적대시하여, 사후에도 여러 차례 관직과 증직, 시호를 박탈하고 문집을 불태우는 등 박해를 가했다.

하지만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그의 학문은 영남 지역에서 제자들에 의해 꾸준히 이어졌다. 그의 학통은 아들 밀암(密菴) 이재(李栽)를 거쳐 외증손자인 대산 이상정(李象靖)에게 이어졌고, 이상정의 제자인 정재 유치명, 김성일의 종손인 서산 김흥락 등으로 계승되었다. 그의 학문이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09년(융희 3년) 이후의 일이다.

그가 유배에서 풀려나 후학을 가르치다 생을 마감한 안동 금소에는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글씨로 새겨진 '갈암 선생 금양유허비'가 세워져 있다.[3] 또한, 영양군 석보면 주남리에는 그가 머물렀던 정자인 남악정(南嶽亭)이 남아 있다.[3]

2. 4. 3. 추탈과 복권

1689년(숙종 15) 재이(災異)로 인한 구언(求言)에 응하여 올린 상소에서, 이현일은 폐비된 인현왕후를 별궁에 거처하게 하여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 그러나 이 상소문의 일부 구절('自絶于天')을 서인, 특히 노론 세력은 문제 삼아, 그가 인현왕후 폐비 여론을 주도한 것처럼 몰아갔다. 이는 이현일의 본래 의도와는 정반대되는 해석이었다.

결국 이현일은 인현왕후를 모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노론에 의해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낙인찍혔다.[3] 노론은 광해군이이첨의 인목대비 폐모론과 같은 선상에 놓고 그를 중상하고 비방했다. 평생 명의를 지킨 도학자로 존경받던 인물이 오히려 명의의 죄인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 것이다.[3]

사후 그의 관직과 명예는 여러 차례 추탈과 복권을 반복했다.

  • 1710년(숙종 36): 죄명이 풀림.
  • 1711년: 복관되었으나 곧바로 환수됨.
  • 1718년: 영해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됨.
  • 영조 즉위 후: 그의 신원을 청하던 문인들이 처벌받음. 제자 김성탁은 복권 운동에 나섰다가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함.
  • 1720년(경종 즉위년): 다시 복권됨.
  • 1728년(영조 5): 소론남인이 정치적으로 거세되면서 다시 관직이 추탈됨.
  • 1795년(정조 19) 10월: 정조의 특별 명령으로 복관됨.
  • 1801년(순조 즉위년): 정조 사후 노론에 의해 다시 추탈됨.
  • 1853년(철종 4): 다시 복관되었으나 또다시 환수됨.


1871년(고종 8)에는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나 이 역시 환수되었다. 1873년 복권 여론이 일었으나, 노론의 강경파인 화서학파 최익현, 김평묵 등이 결사적으로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1909년(융희 3)에 이르러서야 관직과 시호가 모두 최종적으로 회복되었다.

3. 사상

이현일은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주요 인물로서, 1688년에는 율곡 이이의 사단칠정론을 비판하는 《율곡이씨사단칠정서변(栗谷李氏四端七情書辨)》을 저술하여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옹호하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이는 이이를 따르는 서인 세력의 견제를 받는 배경이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이현일은 남인의 핵심 이론가이자 산림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유현(儒賢)으로 천거되어 성균관 사업, 이조참의, 성균관좨주, 이조참판, 예조참판, 대사헌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정무에 참여했다. 특히 성균관좨주의 역할에 대해 큰 비중을 두었으며, 그 직책을 사양하는 상소에서 "위로는 오교(五敎)를 펴서 밝게 임금 섬기기를 도(道)로써 하는 의리를 알게 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고금의 사변(事變)을 말해주어 널리 들어서 도학(道學)을 갖추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교육자로서의 소임을 강조했다.[3] 허목윤휴 사후 남인을 대표하는 산림으로 존경받았으나[3], 근기남인 등 남인 내부 세력의 견제를 받기도 했다.

3. 1. 퇴계학 계승과 이기논쟁

이현일은 영남학파의 주요 인물로서 퇴계 이황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산림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어려서 외할아버지인 장흥효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장흥효는 퇴계 이황의 제자인 류성룡김성일 모두에게서 배운 학자였다. 이로 인해 이현일은 서애학파와 학봉학파로 나뉜 퇴계학파의 학문적 흐름을 모두 계승한 인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학문은 영남 퇴계학파 내에서 정통으로 여겨졌다.

이현일은 퇴계학파의 적통으로서 퇴계 학설의 절대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조목, 김성일, 류성룡 등 퇴계의 다른 제자들은 스승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기본적으로 지지했지만, 이를 절대적인 진리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식의 학문을 일부 계승한 장현광이나 류성룡의 제자인 정경세 등 일부 영남 학자들은 율곡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나 이기일원론을 수긍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성혼과 같이 퇴계 학설에 우호적이면서도 이이의 견해를 존중하는 분위기도 존재했다. 특히 기호 지방에서는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이의 학설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이현일은 이이의 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이기호발설이야말로 올바른 학설임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섰다.

1688년(숙종 14년), 이현일은 이이의 사단칠정론을 비판하는 《율곡이씨사단칠정서변(栗谷李氏四端七情書辨)》을 저술하고 같은 해 8월에 출간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만약 이이의 주장처럼 이(理)와 기(氣)가 하나라면, 이는 너무나 허무한 것이 되어 만물의 근본이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또한 사단칠정론에 대해서도, 사단(四端)은 공(公)적인 것이므로 악(惡)이 섞일 수 없는 순수한 이발(理發)이며, 칠정(七情)은 사(私)적인 것으로 선(善)과 악(惡)이 섞여 나타나는 기발(氣發)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理)에서 발하는 것과 기(氣)에서 발하는 것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이의 이기일원론을 반박했다.

이처럼 이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이현일은 이이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서인 세력에게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다. 이전에도 허목이나 윤휴, 윤선도 등이 이이를 비판했을 때 서인들은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이현일의 체계적인 비판에 대해서는 더욱 강경하게 대응했다. 서인들은 이현일의 학문을 의도적으로 폄하하고 정치적으로 매장하려 시도했다. 예를 들어, 서인들은 "이현일은 학문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선비라는 이름만 빌려 좋은 벼슬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강연에서는 시류에 영합하여 잘못되고 어리석은 말을 많이 했다"는 등의 비난을 퍼부었으며,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를 숙종실록과 같은 공식 기록에 남기기도 했다.

3. 2. 실학적 경향

1692년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된 이현일은 당시 과거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왕에게 올린 상소에서 승보(陞補)·학제(學製)·도회(都會)·잡과(雜科) 등의 제도를 폐지하고, 학문·덕행·문예를 중시하는 정자학교(程子學校)의 제도를 따를 것을 주장했다. 이는 기존 과거 제도의 형식적인 측면보다 실질적인 학문과 인성을 중시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또한 이현일은 당시 과거 시험에서 일부 특권층 자제들이 학연이나 인맥을 통해 합격자를 미리 정하는 매관매직이나, 다른 사람을 대신 시험 보게 하는 등의 부정이 만연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감독 강화와 적극적인 시정 및 개혁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현일의 개혁적인 구상은 당시 서인 세력의 견제와 집권 남인 내부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실현되기 어려웠다.[3] 결국 그가 꿈꾸었던 도학에 기반한 경세제민의 포부는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3]

4. 저서 및 작품


  • 《갈암집 (葛庵集)》
  • 《율곡사칠변 (栗谷四七辨)》
  • 《홍범행의 (洪範行義)》: 형 이휘일과 함께 저술하였다.
  • 《돈전수어 (惇典粹語)》
  • 《존주론 (尊周論)》
  • 《신편팔진도설 (新編八陳圖說)》
  • 《영모록 (永慕錄)》
  • 《충절록 (忠節錄)》
  • 《존주록 (尊周錄)》
  • 《성유록 (聖諭錄)》
  • 《수주관규록 (愁州管窺錄)》: 비평서이다.
  • 《율곡이씨사칠서변 (栗谷李氏四七書辨)》

5. 가족 관계


  • '''할아버지''': 이함(李涵)


'''조부모 및 방계 가족'''
관계이름비고
백부이시청-
사촌이신일(李莘逸)이시청의 아들
삼촌이시형(李時亨)-
사촌이전일(李傳逸)이시형의 아들
사촌이후일(李後逸)이시형의 아들
삼촌이시성(李時成)-
사촌이휘일(李徽逸, 1619-1672)이시성의 양자 (원래 이현일의 둘째 형)
삼촌이시진(李時震)-
사촌이덕생(李德生)이시진의 아들


  • '''아버지''': 이시명(李時明)
  • '''어머니 (적모)''': 광산 김씨(光山金氏) - 검열(檢閱) 김해(金垓)의 딸. 아버지 이시명의 본부인이다.
  • * '''이복 형''': 이상일(李尙逸, 1611-1678)
  • ** '''이복 형수''': 풍산 류씨 - 류진(柳袗)의 딸이자 류성룡의 손녀이다.
  • * '''이복 누나''': 재령 이씨
  • ** '''이복 매부''': 여국헌(余國獻)
  • '''어머니 (생모)''': 정부인 안동 장씨(貞夫人 安東 張氏, 1598-1680) - 학자 경당 장흥효의 딸이다.


송명리학자 장흥효는 자신의 제자인 이시명이 부인과 사별하고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자신의 딸 장계향과 혼인시켰다.[1] 장계향은 전처 소생 2명과 자신이 낳은 8명을 더해 총 7남 3녀를 길러냈으며, 이들은 '칠현자(七賢者)'라 불렸다. 이현일은 장계향의 셋째 아들이다.[1]

'''형제자매'''

관계이름생몰년배우자비고
이휘일(李徽逸)1619-1672-삼촌 이시성의 양자로 출계
동생이숭일(李嵩逸)1631-1698초배: 조씨 (조정헌(趙廷헌)의 딸)
후배: 오씨 (오이건(吳以健)의 딸)
동생이정일(李靖逸)1635-1704남씨 (남필대(南必大)의 딸)
동생이융일(李隆逸)1636-1698김씨 (김초(金礎)의 딸)
동생이운일(李雲逸)-권씨 (권적(權積)의 딸)
여동생재령 이씨-김영(金영)
여동생재령 이씨-김이(金怡)



'''자녀'''

구분이름자(字) / 호(號)생몰년배우자비고
아들이연(李연)--김씨 (김묵(金默)의 딸)
아들이구(李구)--김씨 (김초(金礎)의 딸)
아들이재(李栽)호: 밀암(密庵)1657-1730의성 김씨 (김학규(金學逵)의 딸)
아들이심(李심)자: 계간(季幹)-조씨(趙氏)
재령 이씨--김이현(金以鉉)
재령 이씨--홍억(洪億)
재령 이씨--김대(金岱)
서자이?(李?)---첩 소생
서자이?(李?)---첩 소생
서자이반(李槃)---첩 소생


  • '''외할아버지''': 장흥효(張興孝, 1564-1634)
  • '''외증조부''': 장팽수(張彭壽)

6. 기타

(내용 없음)

6. 1. 관련 문화재

6. 2. 사후 평가

인현왕후를 보호하려던 본의와 달리, 오히려 인현왕후를 모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낙인찍혔다.[3] 그의 저술 또한 금서를 넘어 '흉서(凶書)'로 취급되어, 간행하거나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동일한 죄인으로 간주되는 상황이 사후 200년 동안 이어졌다.[3]

그는 퇴계학파의 정통으로 인정받았으나, 율곡 이이의 이기일원론을 정면으로 비판했기 때문에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노론으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사후에도 노론 정권 하에서 관직과 증직, 시호가 여러 차례 박탈되었으며, 그의 문집을 간행했을 때는 관련자를 처벌하고 문집을 수거하여 불태우는 등 박해가 계속되었다.[3]

이러한 정치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하에서는 많은 문인이 배출되었으며 그의 학문은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꾸준히 계승되었다. 퇴계학은 아들 밀암(密菴) 이재(李栽)를 거쳐 외증손인 대산 이상정(李象靖)에게 이어졌고, 이상정의 문인인 정재 유치명 등을 통해 학봉 김성일의 종손인 서산 김흥락 등으로 학통이 이어졌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1909년(융희 3년) 이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3]

유배지에서 풀려나 후학을 양성하다 생을 마감한 안동 금소에는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글씨로 새겨진 갈암 선생 금양유허비가 세워져 있다.[3] 또한, 갈암의 정자인 남악정(南嶽亭)이 영양군 석보면 주남리에 남아 있다.[3]

6. 3. 일본과의 관계

이현일은 조선정복한 후, 기자조선을 건국한 중국 은나라의 정치가 기자에 대해 "립아동방만세지극(立我東方萬世之極)"[2]이라고 주장하며, 기자가 조선인을 교화한 공적을 찬미하고 조선에서의 기자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2]

참조

[1] 뉴스 張桂香 http://world.kbs.co.[...] KBSワールドラジオ 2013-02-14
[2] 뉴스 朝鮮儒者中華認同的新解釋 ─「天下」與「國家」的整合分析 http://www.mh.sinica[...] 中央研究院 2017-06
[3] 웹사이트 "[종가기행 ⑨] 葛庵 李玄逸17세기 남인 대표하는 山林의 명수… 당쟁 휘말려 고초" http://weekly.hankoo[...]
[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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