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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토리 우노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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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핫토리 우노키치는 일본 제국의 교육자, 철학자, 관료이다. 1867년 후쿠시마현에서 태어나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도쿄 제국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문부성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고등사범학교 교수, 문부대신 비서관, 도쿄 제국대학 교수 등을 역임했다. 청나라와 독일에서 유학했으며, 베이징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귀국 후 도쿄 제국대학에서 중국 철학을 가르쳤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유교에 대해 강의했다. 경성제국대학 총장, 국학원대학장을 지냈으며, 제국학사원 회원이었다. 주요 업적으로는 중국 철학 연구와 유교의 종교성 논의가 있으며, 193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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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토리 우노키치
기본 정보
이름服部宇之吉 (핫토리 우노키치)
출생일1867년 6월 2일
출생지후쿠시마현
사망일1939년 7월 11일
배우자服部繁子 (핫토리 시게코)
학력 및 경력
출신 대학제국대학
근무지도쿄제국대학
京師大学堂(베이징대학)
하버드 대학교
학위문학박사
연구 분야
주요 관심 분야중국학
중국철학

2. 생애

핫토리 우노키치는 1867년 후쿠시마현 니혼마쓰번의 사무라이 가문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보신전쟁에서 아버지가 전사하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으며,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1873년 양부인 삼촌을 따라 도쿄로 이주하여 아자부 초등학교와 쿄리쓰 학원에서 공부했다.

1883년 대학 예비문(훗날 제1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887년 졸업하고, 제국대학 문과대학(훗날 도쿄대학 문학부)에 진학했다. 1890년 철학과를 졸업한 후, 총장 소토야마 마사이치의 추천과 하마오 아타루의 도움으로 문부성에 들어갔다. 이 시기 하마오의 중매로 도쿄대학 교수 시마다 시게요시의 셋째 딸 시게코와 결혼했다.

1891년 관료 생활을 그만두고 센다이의 제3고등학교 교사로 전직했으며, 이후 도쿄 고등사범학교 교수를 지냈다. 1897년에는 문부대신이 된 하마오의 추천으로 문부대신 비서관과 참사관을 잠시 겸임했으나, 1898년 다시 도쿄 고등사범학교 교수로 돌아와 도쿄 제국대학 문과 조교수를 겸임했다.

1899년 도쿄대학 조교수로 전임되었고, 같은 해 문부성의 명으로 독일 유학을 떠났다. 1900년 청나라 유학 중 의화단의 난을 겪었으며, 당시 베이징에 체류하던 일본인 및 일본군과 함께 농성하기도 했다.[2] 이후 독일 유학 중이던 1902년, 문부성의 명령으로 귀국하여 도쿄제국대학 교수로 임명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곧이어 청나라 베이징으로 파견되어 훗날 베이징대학교가 되는 경사대학당의 속성 사범관 총교습(사범학교장 격)으로 1909년까지 활동했다.

1909년 귀국 후 청나라로부터 문과 진사 학위를 받았으며, 도쿄대학에 복귀하여 중국철학 강좌 주임을 맡았다. 1915년에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1년간 유교에 대해 강의했으며, 이때 기증한 일본어 서적은 훗날 하버드 연경도서관 소장품의 일부가 되었다.[3] 1917년 6월 22일 제국학사원 회원이 되었다.[4]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소실된 유시마 성당의 재건을 위해 "성당 부흥 기성회"를 조직하고 주도하여 1935년 준공을 이끌었다. 1924년에는 의화단 배상금을 기반으로 한 동방 문화 사업의 일환으로 중국 베이징상하이에 연구소 설립을 위한 조사를 진행하고, 일중 공동 동방 문화 사업 총위원회 부총재를 맡았다. 같은 해 도쿄대학 문학부장(~1926년)에 임명되었다.

1926년부터 1927년까지는 일제강점기 조선에 설립된 경성제국대학교의 총장을 겸임했다. 1928년 도쿄대학에서 정년퇴임하고 명예교수가 되었으며, 1929년부터 1933년까지 고쿠가쿠인 대학 학장을 지냈다. 또한 1929년부터 사망 시까지 동방문화학원 이사장 및 도쿄 연구소(현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1933년에는 만주국의 정효서 등과 함께 "일만 문화 협회" 창립에 참여하여 이사로 활동했다.

1939년 사망하였으며, 묘지는 도쿄도 분쿄구고코쿠지에 있다.[1]

2. 1. 학창 시절

1873년, 양부인 삼촌의 가족과 함께 도쿄로 이주하여, 아자부 초등학교와 쿄리쓰 학원에서 공부했다.

1883년, 대학 예비문(훗날 제1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887년, 제1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국대학 문과대학(훗날 도쿄대학 문학부)에 입학했다.

1890년, 제국대학 문과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2. 2. 교육자 및 관료 경력

1890년 제국대학 문과 철학과를 졸업한 후, 총장 소토야마 마사이치의 추천과 하마오 아타루의 도움으로 문부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1891년 관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문부성을 나와 센다이의 제3고등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1894년 제3고등학교가 일시 폐지되자 도쿄로 돌아와 도쿄 고등사범학교 교수가 되었다.

1897년 문부대신이 된 하마오 아타루의 추천으로 문부대신 비서관 겸 문부성 참사관으로 임명되었으나, 1898년 다시 도쿄 고등사범학교 교수로 돌아왔고, 도쿄 제국대학 문과대학 조교수를 겸임하게 되었다. 1899년 도쿄 제국대학 조교수로 전임하였고, 같은 해 문부성의 명령으로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 기간은 4년이었으며, 1900년 청나라 유학 중 의화단의 난을 겪기도 했다.[2]

1902년 독일 유학 중 문부성의 명령으로 귀국하여 도쿄 제국대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광서 신정 하의 청나라 베이징으로 건너가, 훗날 베이징 대학이 되는 경사대학당의 속성 사범관 총교습(사범학교장·교육학부장에 해당)으로 1909년까지 재직했다. 1909년 귀국 후에는 청나라로부터 문과 진사 학위를 받았으며, 도쿄 제국대학으로 복귀하여 중국철학 강좌 주임을 맡았다.

1915년에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일본 강좌 교수로 초빙되어 1년간 유교에 대해 강의했다. 이때 아네자키 마사하루와 함께 훗날 하버드 연경도서관의 소장품이 되는 일본어 서적을 기증했다.[3] 1917년 6월 22일에는 제국학사원 회원이 되었다.[4]

1924년부터 1927년 9월까지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장을 역임했으며, 1926년 4월부터 1927년 7월까지는 일제강점기 조선에 설립된 경성제국대학교의 총장을 겸임했다. 1928년 3월 도쿄 제국대학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하고 같은 해 6월 명예교수가 되었다. 이후 1929년 2월부터 1933년 9월까지 고쿠가쿠인 대학 학장을 지냈으며, 동방문화학원 이사장 및 도쿄 연구소(현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소장을 1939년까지 역임했다. 1933년에는 만주국의 정효서 등과 함께 일만 문화 협회 창립에 참여하여 이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 주요 경력 ===

연도내용
1891년 9월제3고등중학교 교수
1894년 9월도쿄 고등사범학교 교수
1897년 11월문부대신 비서관 겸 문부성 참사관
1898년 9월도쿄 고등사범학교 교수 재임
1899년 5월도쿄 제국대학 문과대학 조교수 겸임
1899년 9월도쿄 제국대학 문과대학 조교수 전임
1899년 - 1902년·독일 유학
1902년 7월도쿄 제국대학 교수,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02년 - 1909년 경사대학당 총교습
1909년도쿄 제국대학 중국철학 강좌 주임
1915년하버드 대학교 일본 강좌 교수
1917년 6월제국학사원 회원
1924년 9월 - 1927년 9월도쿄 제국대학 문학부장
1926년 4월 - 1927년 7월경성제국대학교 총장 겸임
1928년 3월도쿄 제국대학 교수 정년퇴임
1928년 6월도쿄 제국대학 명예교수
1929년 2월 - 1933년 9월고쿠가쿠인 대학 학장
1929년 - 1939년동방문화학원 이사장 및 도쿄 연구소장
1933년일만 문화 협회 이사


2. 3. 말년

1917년 6월 22일, 제국학사원 회원이 되었다.[4]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유시마 성당이 소실되자, "성당 부흥 기성회"를 조직하여 재건에 힘썼다(1935년 준공). 성당 어서문 앞에 서 있는 “유시마 성당” 비석은 핫토리의 글씨이다.

1924년에는 의화단 배상금을 기금으로 하는 “동방 문화 사업”에 참여했다. 이 사업의 중국(베이징, 상하이) 연구소 설립을 위한 조사차 중국을 방문하여 여러 곳에서 강연을 했다. 또한 일중 공동의 동방 문화 사업 총위원회 부총재가 되었다. 과거 의화단 사건에 연루된 경험이 있었기에 이 활동에 특히 힘썼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도쿄대학 문학부장(~1926년)을 역임했다.

1926년부터 1927년까지는 경성제국대학교 총장을 겸임했다. 1928년 도쿄대학에서 퇴관하고 명예교수가 되었다. 이후 1929년부터 1933년까지 고쿠가쿠인 대학 학장을 지냈으며, 1929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동방문화학원 이사장 및 도쿄 연구소(현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1933년에는 만주국의 정효서 등과 함께 “일만 문화 협회” 창립에 참여하여 이사에 취임했다.

1939년에 사망했으며, 묘지는 도쿄도 분쿄구고코쿠지에 있다.[1]

3. 주요 업적 및 활동

핫토리 우노키치는 철학과 출신으로 서양철학과 그 방법론을 배웠으나, 주로 중국철학, 특히 『의례』 등 예학, 종법, 정전제와 같은 제도사 연구에 집중했다. 그는 서양 논리학과 중국 철학을 강의했으며, “공자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유교종교적 측면을 논하기도 했다.[11]

학문 연구 외에도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다. 1900년 청나라 유학 중 의화단의 난을 겪으며 베이징의 일본 공사관에 카리노 나오키, 시바 고로 등 다른 일본인 및 일본군과 함께 농성하기도 했다.[2] 이 경험은 훗날 동방 문화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배경이 되었다. 1902년, 광서 신정 하의 청나라 정부 요청으로 베이징대학교의 전신인 경사대학당의 속성 사범관 총교습(사범학교장·교육학부장 격)으로 임명되어 중국 근대 교육 발전에 관여했다. 1909년 귀국 후, 청나라로부터 문과 진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전통적인 과거 시험 합격이 아닌 외국인에 대한 공로상으로 수여된 것이었다. 이후 도쿄 제국대학으로 복귀하여 중국철학 강좌 주임을 맡았다.

1915년에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일본 강좌 교수로 초빙되어 1년간 유교에 관한 강의를 진행했다. 이때 함께 간 아네자키 마사하루와 함께, 훗날 하버드 연경도서관의 중요한 소장품이 되는 일본어 서적들을 기증했다.[3] 1917년 6월 22일에는 제국학사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4]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유시마 성당이 소실되자, “성당 부흥 기성회”를 조직하여 재건 운동을 주도했고, 1935년에 성당이 준공되었다. 현재 성당 어서문 앞에 서 있는 “유시마 성당” 비석은 그의 글씨이다. 그는 유교 진흥을 위한 단체인 사문회의 총무이사를 거쳐 말년에는 부회장을 맡았으며, 일본홍도회의 부회장도 역임하는 등 관련 활동에 깊이 관여했다.

1924년, 의화단 사건 배상금을 기금으로 하는 동방 문화 사업의 일환으로 중국 내 연구소 설립을 위한 조사를 위해 중국을 방문하여 여러 곳에서 강연했으며, 일본중국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동방 문화 사업 총위원회의 부총재를 맡았다. 과거 의화단 사건에 연루되었던 경험 때문에 이 활동에 특히 힘을 쏟았다.

교육 행정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하여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장(1924년~1926년), 일제 강점기 조선의 경성제국대학교 총장(1926년~1927년 겸임), 고쿠가쿠인 대학 학장(1929년~1933년), 동방문화학원 이사장 및 부설 도쿄 연구소(현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소장(1929년~1939년) 등 여러 교육기관의 요직을 역임했다.

또한 궁내성 어용걸 및 동궁직 어용걸로서 다이쇼 천황쇼와 천황에게 진강(학문 강의)을 하고 궁중의 여러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1] 1933년에는 만주국의 정효서 등과 교류하며 “일만 문화 협회” 창립에 참여하여 이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4. 수상

5. 가족 관계

아내인 하토리 시게코(服部繁子일본어)는 시마다 시게요시(島田重礼일본어)의 셋째 딸이다. 그녀는 중국 방문 시 추진(秋瑾중국어)과 서태후(西太后중국어)와 교류했고, 남편 우노키치와 함께 중국에서 여학교 설립에 참여했다.[12][13]

시마다 칸(島田翰일본어)은 아내의 남동생이며, 안이 쇼타로(安井小太郎일본어)는 아내의 언니의 남편으로, 핫토리 우노키치의 경사대학당(京師大学堂중국어) 동료였다.

참조

[1] 웹사이트 中国哲学の泰斗(たいと) 服部宇之吉(はっとりうのきち) 二本松市公式ウェブサイト https://www.city.nih[...] 2022-11-23
[2] 서적 北京籠城日記
[3] 논문 ハーバード大学イェンチン図書館の和漢医籍 http://jsmh.umin.jp/[...] 日本医史学会
[4] 간행물 官報 1917-06-23
[5] 간행물 官報 1891-12-22
[6] 간행물 官報 1897-02-12
[7] 간행물 官報 1906-12-28
[8] 간행물 官報 1909-04-21
[9] 간행물 官報 1914-05-01
[10] 간행물 官報 1919-07-02
[11] 서적 儒教とは何か
[12] 서적 中国近代の思想文化史 岩波書店〈岩波新書〉
[13] 논문 清末中国における日本女子教育受容の研究 https://ousar.lib.ok[...] 岡山大学
[14] 서적 國譯漢文大成經子史部第一卷『四書・孝經』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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