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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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헌덕왕은 신라의 제42대 왕으로, 809년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했다. 즉위 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책봉을 받았으며, 잦은 조공과 군사 지원을 통해 당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했다. 국내적으로는 잦은 재해와 반란으로 혼란을 겪었는데, 특히 822년 김헌창의 난은 구 백제 지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졌다. 헌덕왕은 826년 재위 18년 만에 사망했으며, 경주 동천동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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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덕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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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휘 | 김언승(金彦昇) |
시호 | 헌덕(憲德) |
재위 기간 | 809년 - 826년 |
묘호 | 없음 |
생년 | 알 수 없음 |
몰년 | 826년 10월 |
부왕 | 혜충태자 인겸 |
모후 | 성목태후 |
왕후 | 귀승부인(貴勝夫人) |
신라 제41대 국왕 | |
즉위 | 41대 |
이전 국왕 | 애장왕 |
다음 국왕 | 흥덕왕 |
가계 | |
아버지 | 혜충태자 |
어머니 | 성목왕후 |
기타 | |
능묘 | 헌덕왕릉 |
2. 즉위 전
790년 원성왕의 사자로 당나라에 갔고, 귀국 후 대아찬이 되었다. 791년 전 시중 제공(悌恭)의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웠고, 794년에는 당시 시중 김숭빈이 물러나자 언승이 시중에 발탁되었다. 795년에는 이찬, 796년에는 병부령을 거쳐, 800년 애장왕이 즉위하면서 섭정이 되었다. 801년에는 왕의 행차를 총괄하는 책임자가 되었고, 그 후 상대등이 되었다. 809년 7월, 동생과 함께 애장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헌덕왕은 즉위하자마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선대 왕인 애장왕의 죽음을 알리고, 헌종에게 책봉을 받았다. 왕비는 정씨로 기록되었으나 실제로는 김씨였다.[6]
3. 즉위 후
822년 김헌창이 웅진(공주)을 도읍으로 장안국을 건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옛 백제 지역 대부분이 호응하여 왕권에 대항하는 큰 규모였다. 김헌창의 난은 한 달 만에 진압되었지만, 귀족 사병과 화랑 집단이 활약하면서 율령 체제 아래의 병제가 유명무실해졌음이 드러났다. 825년에는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고달산을 근거지로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북한산주 도독에 의해 진압되었다.
국내에서는 잦은 재해로 백성들이 굶주렸으나, 조세 감면이나 곡창 개방 등의 조치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도적들이 횡행하여 군대를 파견해 진압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816년에는 기근으로 인해 170명의 백성이 당나라 저장성 동부로 유입되었고, 비슷한 시기 일본으로 도망간 사람도 200명이 넘었다.[7][8]
반란 진압 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왕도 중심주의가 강하게 나타났고,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지방에는 7년간 조세를 면제하는 등 지방 통치에 소홀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왕권이 지방에 대한 간섭을 포기하고 지방 자치를 인정하는 듯한 정책으로 이어졌다.[9]
826년 10월에 헌덕왕이 사망하였다. 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의 사적 제29호로 비정되고 있다.
3. 1. 대외 관계
헌덕왕은 즉위 후 당나라에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쳤다. 810년 10월에는 왕자 김헌장을 보내 금은으로 만든 불상 등을 헌상하였다. 819년 7월에는 당나라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당 헌종의 징병 조칙에 따라 장군 김웅원 등 3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당나라를 지원하였다.[6]
812년 9월에는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여 동향을 살폈다. 선왕 대인수가 즉위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자, 826년 7월에는 한산주(경기도광주시) 이북의 주·군에서 1만 명을 징발하여 패강|대동강중국어을 따라 300리 장성을 쌓아 발해의 남하에 대비하였다.
3. 2. 국내 정치
헌덕왕은 즉위 직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애장왕의 죽음을 알리고, 당 헌종으로부터 신라왕으로 책봉되었다. 왕비는 정씨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김씨였다.[6] 이후에도 당나라에 왕자 김헌장을 보내 불상을 헌상하고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쳤다. 819년에는 당나라 이사도의 반란 진압을 위해 김웅원 등 3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지원하기도 했다.
812년에는 발해에 사신을 보내 동향을 살폈다. 선왕 즉위 후 긴장이 고조되자, 826년에는 한산주 이북에서 1만 명을 징병하여 패강에 300리 장성을 쌓아 발해의 남하에 대비했다.
국내에서는 잦은 재해로 백성들이 굶주렸으나, 조세 감면이나 곡창 개방 등의 조치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도적들이 횡행하여 군대를 파견해 진압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816년에는 기근으로 인해 170명의 백성이 당나라 저장성 동부로 유입되었고, 비슷한 시기 일본으로 도망간 사람도 200명이 넘었다.[7][8] 819년에는 각지에서 도적들이 봉기했으나, 여러 주의 도독과 태수가 진압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방 세력은 왕권에 제대로 복속되지 않았고, 수도 경주 중심의 정치에 반발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려 했다. 822년 김헌창이 웅진(공주)을 수도로 장안국을 건국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옛 백제 지역 대부분이 이에 호응하여 왕권에 대항했다. 김헌창의 난은 한 달 만에 진압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귀족 사병과 화랑 집단이 활약하면서 율령 체제 아래의 병제가 유명무실해졌음이 드러났다. 825년에는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고달산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북한산주 도독에 의해 진압되었다.
반란 진압 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왕도 중심주의가 강하게 나타났고,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지방에는 7년간 조세를 면제하는 등 지방 통치에 소홀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왕권이 지방에 대한 간섭을 포기하고 지방 자치를 인정하는 듯한 정책으로 이어졌다.[9]
3. 3. 김헌창의 난
822년 3월, 김헌창이 웅진(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을 수도로 삼아 장안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반란을 일으켰다.[6] 이 반란에는 무진주(지금의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청주(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 웅천주(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완산주(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 사벌주(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등 5개 주와 국원(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 서원(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금관(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3소경 등 옛 백제 지역 대부분이 가담하여 헌덕왕의 왕권에 대항하는 큰 규모였다.[6] 이는 당시 지방 세력이 경주 중심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헌창의 난은 한 달 만에 진압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귀족들의 사병과 화랑 집단이 큰 역할을 하였고, 국가의 공식적인 군사력은 힘을 쓰지 못했다.[6] 825년에는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고달산(지금의 경기도 여주시)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북한산주 도독에 의해 진압되었다.[6]
이러한 반란 진압 후, 헌덕왕은 반란을 빨리 알린 사람들을 중시하고,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지역에는 세금을 면제해 주는 등 지방 통치보다는 경주 중심의 정책을 펼쳤다.[9]
4. 사망
헌덕왕은 재위 18년 만인 826년 10월에 사망하여 시호를 헌덕왕으로 받았다. 천림사 북쪽에 묻혔다고 하며, 그 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의 사적 제29호로 비정되고 있다. 사망 연도에 대해서는 『구당서』 신라전에는 대화 5년(831년)에, 『신당서』 신라전에서는 장경·보력 연간(821년~827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지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헌덕왕기 말문의 분주에서는 『고기』에 "재위 18년인 보력 2년 병오 4월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구당서』의 기록이 부정되었다.[9]
5. 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혜충태자 김인겸 |
어머니 | 성목태후 |
왕후 | 귀승부인 김씨(貴勝夫人 金氏) - 헌덕왕의 숙부인 각간 김예영(金禮英)의 딸이다. 809년 당나라로부터 왕후에 책봉받을 때는 성덕왕 대의 시중이자 경덕왕 대 황룡사종의 시주인 이찬 김효진(金孝眞) 또는 김효정(金孝貞)의 이름을 딴 정씨(貞氏)를 성으로 사용하였다. |
장남 | 김헌장 |
차남 | 김장렴 |
3남 | 심지왕사心地王師 |
며느리 | 정교부인 - 김충공의 딸, 삼국유사에서는 왕후로 나옴 |
조부 | 원성왕 |
조모 | 김씨(연화부인, 숙정부인 김씨한국어) |
부친 | 혜충태자 (750–791/792), 추존 왕 혜충왕 |
모친 | 성목태후 김씨 |
배우자 | 귀승부인 김씨 - 예영태자의 딸 |
아들 | 미상 |
참조
[1]
뉴스
https://www.idaegu.c[...]
2023-06-19
[2]
뉴스
https://www.idaegu.c[...]
2023-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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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三国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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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三国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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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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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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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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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本後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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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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