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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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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헬무트 렌트는 독일 공군 야간 전투기 조종사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110대의 항공기를 격추하여 독일 공군 최고의 에이스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1918년 란츠베르크 안 데어 바르테에서 태어나 히틀러 청소년단 활동을 거쳐 1936년 공군에 입대했다. 초기에는 주간 전투기 조종사로 활동하며 폴란드 침공, 헬골란트 만 해전 등에서 활약했으며, 이후 야간 전투기 부대로 전출되어 6./NJG 1 편대장, II./NJG 2 부대 지휘관 등을 역임했다. 렌트는 1944년 10월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으며, 사후 참나무 잎, 검, 다이아몬드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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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렌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3년 헬무트 렌트
1943년 헬무트 렌트
출생일1918년 6월 13일
출생지피레네,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사망일1944년 10월 7일
사망지파더보른, 나치 독일
안장지슈타데 군인 묘지
군사 복무
소속 국가나치 독일
군종독일 국방군 공군
복무 기간1936년 – 1944년
최종 계급대령 (사후)
지휘제1야간전투비행단 제4비행집단
제2야간전투비행단 제2비행집단
제3야간전투비행단
부대제76중전투비행단
제1야간전투비행단
제2야간전투비행단
제3야간전투비행단
참전 전투/전쟁제2차 세계 대전
폴란드 침공
헬리골란트 만 해전 (1939년)
덴마크-노르웨이 작전
노르웨이 전역
독일 본토 방공전
수상 내역백엽검 다이아몬드 기사철십자장
기타 정보
별칭(없음)

2. 유년 시절과 초기 군 경력

헬무트 렌트는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랐으며, 어린 시절 글라이더 비행에 관심을 보였다. 학창 시절 히틀러 유겐트 활동을 거쳐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6년 공군에 입대했다.[4][5] 그는 공군 훈련 과정을 수료하고 1938년 소위로 임관했으며, 이후 전투비행단에 배치되어 체코슬로바키아 병합 관련 작전에 참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에는 제76 구축비행단 소속으로 메서슈미트 Bf 110 조종사로서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국경 근처 올라우에 배치되었다.[4][5]

2. 1. 출생과 가정 환경

렌트는 1918년 6월 13일 독일 브란덴부르크주 란츠베르크 안 데어 바르테 지구(현재 폴란드 서부 루부스주 피르차니)의 피레네에서 태어났으며, 헬무트 요하네스 지크프리트 렌트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루터교 목사인 아버지 요하네스 렌트와 어머니 마리 엘리자베스(결혼 전 성은 브라우네)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자녀 중 막내였다. 렌트에게는 베르너와 요아힘 두 형과, 케테와 우르술라 두 누나가 있었다. 그의 가족은 매우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으며, 아버지뿐만 아니라 두 형과 두 할아버지 역시 루터교 목사였다.

1924년 부활절부터 1928년 부활절까지 렌트는 피레네에 있는 지역 공립 초등학교에 다녔다. 이후 그의 아버지와 맏형 베르너는 란츠베르크에 있는 공립 중등학교 입학 시험을 준비시키기 위해 그를 집에서 가르쳤다. 1933년 2월, 렌트는 히틀러 유겐트의 하위 조직인 Deutsches Jungvolk|융볼크de에 가입했다. 1933년 3월부터 그는 청소년 소대장(Jungzugführer|융추크퓌러de)으로 활동했으며(1933년 3월 1일~1935년 4월 1일), 이후 기수(Fähnleinführer|페른라인퓌러de) 역할을 맡았다(1935년 4월 1일~1935년 11월 9일). 이후 Abitur|아비투어de 시험 준비를 위해 Deutsches Jungvolk|융볼크de를 떠났다. 헬무트는 1935년 12월 12일, 17세의 나이로 졸업 시험(Abitur|아비투어de)에 합격했다. 1936년 2월 2일, 그는 모린에서 8주간의 의무적인 국가 노동 봉사(Reichsarbeitsdienst)를 시작했다.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그는 1936년 4월 1일 공군에 사관후보생(Fahnenjunker|파넨준커de)으로 입대했다.

2. 2. 학창 시절과 히틀러 유겐트

1924년 부활절부터 1928년 부활절까지 렌트는 피레네에 있는 지역 공립 초등학교에 다녔다. 그의 아버지와 맏형 베르너는 란츠베르크에 있는 공립 중등학교 입학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그를 집에서 가르쳤다. 1933년 2월, 헬무트는 히틀러 청소년단의 하위 조직인 ''융볼크''에 가입했다. 1933년 3월부터 그는 청소년 소대장, 즉 ''융추크퓌러''(1933년 3월 1일~1935년 4월 1일)로 활동했고, 기수, 즉 ''페른라인퓌러''(1935년 4월 1일~1935년 11월 9일)로 활동하다가 ''융볼크''를 떠나 ''아비투어'' 시험을 준비했다. 헬무트는 1935년 12월 12일 17세의 나이로 졸업 시험에 합격했다.

2. 3. 독일 공군 입대와 훈련

1936년 2월 2일, 렌트는 모린에서 8주간의 의무 국가 노동 봉사( Reichsarbeitsdienstde )를 시작했다.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그는 1936년 4월 1일 공군에 파넨준커(사관후보생)로 입대했다.

군사 훈련은 1936년 4월 6일 베를린 남서부 외곽 가토에 있는 제2 공군 항공 학교( Luftkriegsschule 2de )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1936년 4월 21일 국가 사회주의 충성 맹세를 했다. 비행 훈련은 1936년 8월 7일 가토에서 시작되었으며, 첫 비행은 하인켈 He 72 카데트( Kadettde ) 복엽기로 이루어졌다. 렌트는 1936년 9월 15일 포케-울프 Fw 44 슈티글리츠( Stieglitzde )로 첫 단독 비행을 했다. 당시 그의 비행 기록부에는 63번의 비행이 기록되어 있었다.

비행 훈련 중 오토바이 및 자동차 운전 교육을 받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심하게 부러지는 바람에 5개월 동안 비행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교실 훈련에 영향을 주지 않았고, 1937년 4월 1일 임관 시험을 통과하여 파엔리히( Fähnrichde , 견습 사관)로 진급했다. 1937년 10월 19일, 렌트는 비행 훈련을 마치고 A/B 면허를 받았다. 그는 1937년 11월 15일 조종사 자격증(날개)을 얻었다. 1938년 2월 1일 오버파엔리히( Oberfähnrichde , 선임 견습 사관)로, 1938년 3월 1일에는 로이테난트( Leutnantde , 소위)로 진급하며 정식 임관했다. 이때까지 그는 8가지 다른 유형의 항공기로 총 434번의 비행을 했고, 주로 단발 훈련기 주간 비행으로 112시간 48분의 비행 시간을 기록했다.

가토를 떠난 후, 렌트는 독일 북동부 투토우에 있는 중폭격기 승무원 학교( Große Kampffliegerschulede )에 배속되어 1938년 3월 1일부터 5월 30일까지 3개월간 관측병 훈련을 받았다. 이 과정을 마치기 직전, 그는 또다시 차에 치여 턱뼈 골절, 뇌진탕, 내출혈 등의 부상을 입었다. 부상에서 회복한 후 1938년 7월 1일, 제132 전투비행단 "리히트호펜"( Jagdgeschwader 132 "Richthofen"de , III./JG 132)의 제3 비행대대에 배속되었고, 같은 달 19일에 부상 후 첫 비행을 했다.

2. 4. 초기 군 경력

가토의 제2 공군 항공 학교(''Luftkriegsschule 2'')를 떠난 후, 헬무트 렌트는 독일 북동부의 투토우에 있는 중폭격기 승무원 학교(''Große Kampffliegerschule'', 그로세 캄프플리거슐레)에 배속되었다. 그는 1938년 3월 1일부터 5월 30일까지 3개월 동안 관측병 훈련을 받았다. 이 과정을 마치기 직전, 렌트는 차에 치여 턱뼈 골절, 뇌진탕, 내출혈 등의 부상을 입었다.

부상에서 회복한 후, 1938년 7월 1일 렌트는 ''야크트게슈바더'' 132 "리히트호펜"(III./JG 132) 제3비행단에 배속되었고, 같은 해 7월 19일 부상 이후 첫 비행을 실시했다.

1938년 9월 초, 렌트가 속한 7 비행대대(7./JG 132)는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을 준비하고 지원하기 위해 드레스덴 근처 그로센하인으로 이동했다. 렌트는 이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작전 순찰 비행을 수행했으며, 그의 비행대대는 1938년 9월 29일 다시 랑스도르프로 이동했다. 주데텐란트 합병 이후 긴장이 완화되자, 렌트의 부대는 메서슈미트 Bf 108 ''타이푼'' 기종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1938년 11월 1일, III./JG 132는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 사이에 위치한 퓌르스텐발데로 이동하여 II./JG 141로 개편되었고, 렌트는 제6 비행대에 배속되었다.

1939년 5월 1일, II./JG 141은 다시 I./''제르슈퇴러게슈바더'' 76(I./ZG 76)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동시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올로모우츠에 있는 비행장으로 이동했다. 이 부대는 메서슈미트 Bf 110으로 재장비되었으며, 렌트는 1939년 6월 7일 Bf 110으로 첫 비행을 했다. 렌트는 1939년 5월 12일, 다발 엔진 항공기 조종 능력을 증명하는 공군 고급 조종사 면허(''Erweiterter Luftwaffen-Flugzeugführerschein'', 통칭 'C 면허')를 취득했다. Bf 110으로 기종을 전환하면서 후방 사수석에 배치할 정규 무선 조작수(''Funker'')를 구하지 못했으나, 1939년 8월 14일 게프라이터(상병) 발터 쿠비슈와 함께 처음으로 Bf 110(기체 번호 M8+AH)에 동승하여 비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 8월 25일, I./ZG 76은 브레슬라우 남동쪽에 위치한 올라우의 비행장으로 배치되었다.

3.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헬무트 렌트는 Bf 110 조종사로서 폴란드 침공에 참전하여 첫 공중전 승리를 기록했다. 이후 헬골란트 만 해전과 노르웨이 침공(베저위붕 작전)에도 참여하여 전과를 올렸으며, 이 공로로 철십자 훈장 1급과 2급을 수여받았다.[38][21] 영국 본토 항공전에 잠시 참여한 후, 1940년 후반 창설된 야간전투비행단으로 전속되었다.[40][43]

렌트는 야간 전투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빠르게 격추 기록을 쌓아나갔다. 1941년 8월 30일, 총 24기 격추(야간 14기 포함) 기록으로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46] 이후 제2야간전투비행단 제2비행대대의 임시 지휘관을 거쳐 1942년 6월 6일에는 총 44기 격추(야간 34기)로 백엽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46] 1943년 1월 1일 소령(Major)으로 진급했고, 같은 해 8월 11일에는 제3야간전투비행단의 비행단장(Geschwaderkommodore)으로 임명되었다.[50] 총 73기 격추(야간 65기 포함)를 기록한 후, 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51] 1944년에는 중령(Oberstleutnant)으로 진급했으며, 총 110기의 확인된 격추 기록(야간 103기 포함)을 세워 백엽검다이아몬드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는 야간 전투기 조종사로서는 하인츠-볼프강 슈나우퍼와 함께 단 두 명만이 받은 최고 등급의 훈장이었다.[53]

렌트는 총 507회의 출격 임무를 수행했으며, 공식적으로 111기의 적기를 격추했다. 이 중 103기는 야간 격추 기록이었다. 그는 1944년 10월 5일 융커스 Ju 88 야간 전투기를 조종하여 이동하던 중 착륙 사고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이틀 뒤인 10월 7일 사망했다. 사후 대령(Oberst)으로 추서되었다.

3. 1. 폴란드 침공

1939년 9월 1일 금요일 04시 45분, 독일군이 폴란드 국경을 넘으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헬무트 렌트는 Bf 110을 조종하며 04시 44분에 오라우(Orava)에서 이륙하여 크라쿠프(Kraków) 상공 임무를 수행하는 하인켈 He 111 폭격기를 호위했다.[21] 독일의 폴란드 침공 계획 암호명은 "백색 작전(Fall Weiß)"이었다.

침공 이틀째인 1939년 9월 2일 16시 30분, 렌트는 우치(Łódź) 방향으로 비행하던 중 폴란드의 PZL P.11 전투기를 격추하며 전쟁 중 첫 공중전 승리를 기록했다. 폴란드 공군력이 약화되면서 Bf 110의 주 역할은 폭격기 호위에서 지상 공격 임무로 전환되었다. 렌트와 그의 무선수 발터 쿠비쉬는 9월 5일 지상에 있던 쌍발 단엽기 한 대를 파괴했고, 9월 9일에는 PZL P.24 한 대를 추가로 파괴했다.

1939년 9월 12일, 렌트의 Bf 110은 폴란드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우현 엔진에 피격당했다. 그는 독일군 전선 후방 지역에 불시착해야 했다. 폴란드 작전 기간 동안 렌트는 5번 이상의 임무를 더 수행하며 대공포 1문을 파괴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1939년 9월 21일 철십자 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폴란드 침공 작전 종료 후, 렌트가 속한 I./ZG 76 부대는 1939년 9월 29일 슈투트가르트 지역으로 이동하여 프랑스와 영국에 대비한 서부 국경 방어 임무를 맡았다. 1939년 10월 초부터 12월 중순까지 I./ZG 76는 슈투트가르트와 루르 지역의 여러 비행장에서 작전을 수행했으며, 1939년 12월 16일에는 북쪽의 예버(Jever)로 재배치되었다.

3. 2. 헬골란트 만 해전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영국 공군은 주로 독일 만(헬골란트 만)의 독일 군함에 대한 폭격 임무에 집중했다. 1939년 12월 18일, 영국 공군은 빌헬름스하펜 항구를 대상으로 대규모 폭격을 감행했는데, 이는 헬골란트 만 해전으로 알려진 전투의 일부였다[28]노퍽에서 이륙한 24대의 비커스 웰링턴 폭격기가 3개 비행대대 편대로 헬골란트를 향해 비행했다. 2대는 기체 결함으로 임무를 중단했으나, 나머지 22대는 공격을 계속했고 동프리슬란트 제도 상공에서 독일의 플라이어 레이더에 포착되었다[28]

헬무트 렌트는 접근하는 영국 폭격기 편대를 요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렌트는 웰링턴 폭격기 3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고, 이 중 2대는 각각 14시 30분과 14시 45분에 격추된 것으로 확인되었다[29]。확인된 2대는 모두 제37 비행대대 소속이었으며, 보르쿰 인근 얕은 바다에 추락했다. 렌트가 주장한 세 번째 격추는 같은 지역의 모래 언덕에 불시착한 제37 비행대대 소속 웰링턴기일 가능성이 있다[30]

북해 상공에서의 이러한 전투 성과는 렌트를 소위 '국민 영웅'으로 만들었다. 헬골란트에서의 그의 활약은 나치 독일의 선전 담당자들에게 좋은 소재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많은 팬레터를 받게 되었다. 편지를 보낸 이들 중에는 젊은 여성들이 많았는데, 그중 엘리자베스 페테르센(Elisabeth Petersen)도 있었다. 렌트는 그녀의 편지에 답장했고, 두 사람은 함부르크의 한 호텔에서 만남을 가졌다. 이후 1940년 2월에는 힐셰그에서 함께 스키를 타기도 했다[31]

3. 3. 노르웨이 작전과 영국 본토 항공전

1940년 4월 8일, 베르너 한센 중대장의 지휘 아래 제76구축항공단(I./ZG 76) 소속 Bf 110 8기가 노르웨이 침공(베저위붕 작전) 준비를 위해 예버에서 질트 섬의 베스터란트로 이동했다.[32] 독일의 작전 계획("베저위붕")은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와 남쪽의 크리스티안산에서 북쪽의 나르비크까지 6개 주요 항구를 수륙 양용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33] 동시에 Ju 52 수송기가 낙하산 부대를 투하하여 오슬로의 포르네부 공항을 확보할 예정이었다. 제76구축항공단 제1중대(1./ZG 76)는 공중 엄호와 지상 공격 지원을 맡았다.[34]

작전 당일 아침 일찍 포르네부로 향하던 렌트는 노르웨이 공군의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 1기를 격추했는데, 이는 그의 초기 공중전 기록 중 하나이다.[35] 독일 낙하산 부대를 태운 Ju 52 수송기들이 격렬한 대공 사격을 받는 동안, 렌트의 편대(''Rotte'')는 지상 목표물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렌트의 Bf 110 오른쪽 엔진이 피격되어 비상 착륙해야 했다. 그는 무장 부사수 발터 쿠비슈(Walter Kubisch)와 함께 노르웨이 지상군과 항복 협상을 벌였고, 그 사이 비행장은 독일군에게 점령되었다.[36]

같은 날 오후 6시 50분, 렌트와 중대장 한센은 손상되지 않은 다른 Bf 110을 타고 포르네부에서 다시 출격했다. 40분간의 비행 동안 영국 공군 제210비행대 소속 쇼트 선더랜드 비행정을 발견하여 교전 끝에 격추했다. 이 격추는 한센의 전과로 기록되었다.[37]

렌트는 1940년 5월 13일 철십자 훈장 1급을 수여받았으며, 이후 트론헤임으로 이동했다.[38] 1940년 6월 2일, 렌트와 그의 요기(僚機) 테네스(Thönes)는 각각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 1기씩을 격추했다고 보고했다. 이들은 영국 공군 제263비행대 소속기였다. 렌트는 또한 브리스톨 블레넘 폭격기 1기를 격추하여 자신의 7번째 격추 기록을 세웠다. 1940년 7월 1일, 그는 오버로이트난트(중위)로 진급했다.[39]

렌트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는 단기간 참여했다. 1940년 8월 15일, I./ZG 76 소속 Bf 110 21기가 요크셔뉴캐슬어폰타인 지역을 폭격하는 He 111 폭격기 편대를 호위하는 임무에 투입되었다. 이 임무에서 I./ZG 76은 7대의 Bf 110을 잃었다. 이는 렌트의 98번째 출격이었으며, 그가 구축항공단(Zerstörergeschwader) 소속으로 수행한 마지막 임무이기도 했다.[40] 이후 그는 야간 전투 비행단으로 전속되었다.

3. 4. 야간 전투기 조종사 경력

1940년 6월경, 영국 공군 폭격 사령부의 독일 영공 침입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자 헤르만 괴링은 야간전투부대의 창설을 지시했다. 창설 임무를 맡은 장교는 제1구축비행단 비행대장 볼프강 팔크였다[41]. 야간전투부대는 기존 부대를 핵심으로 빠르게 확장되었다. 1940년 10월까지 제1야간전투비행단(NJG 1)은 3개 비행대대를 갖추었으나, 제2야간전투비행단(NJG 2)과 제3야간전투비행단(NJG 3)은 아직 창설 중이었다[42]. 헬무트 렌트는 처음에 야간전투부대 배속에 불만을 품었으며, 8월 말에는 "이제 야간 전투로 전속될 참이다. 전혀 내키지 않아. 곧바로 영국으로 향하겠지만"이라고 적었다[43].

렌트는 독일 남서부의 잉골슈타트에서 야간 전투 훈련을 마친 뒤, 1940년 10월 1일 새로 창설된 제1야간전투비행단 제6편대의 편대장(Staffelkapitän)으로 임명되었다. 이 편대는 네덜란드 아른험 북쪽 약 13km 지점의 데렌 공군 기지에 주둔했다. 1941년 5월 11일 밤에서 12일 새벽 사이, 렌트는 함부르크 임무 중이던 영국 공군 제40비행대 소속 웰링턴 IC 폭격기 2대를 격추하며 첫 야간 공중전 승리를 기록했다. 이 두 격추는 각각 1시 40분 주더슈타펠과 2시 49분 노르트슈트란트 상공에서 이루어졌다[44].

1941년 7월 1일, 렌트는 네덜란드 레이와르던에 주둔한 제1야간전투비행단 제4편대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이 기지는 프리슬란트 해안에 위치하여 북해 연안 경계 비행과 연합군의 야간 폭격 임무 저지에 유리했다[45]. 렌트가 지휘한 편대는 종전까지 루프트바페에서 가장 성공적인 야간전투부대 중 하나였다. 이 편대에는 헬무트 볼터스도르프 중위, 루드비히 베커 소위(44기 격추, 1943년 2월 전사), 에크몬트 툴 리페-바이센펠트 소위(51기 격추, 1944년 3월 네덜란드에서 비행 사고로 사망), 레오폴트 페레르(41기 격추), 폴 길드너 중위(46기 격추, 1943년 2월 네덜란드에서 비행 사고로 사망), 지크프리트 네이 상사(12기 격추, 1943년 2월 전사)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1941년 8월 30일, 렌트는 총 24기 격추(야간 14기 포함)의 공적으로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46].

1941년 11월 1일, 렌트는 새로 창설된 제2야간전투비행단 제2비행대대의 임시 비행대장(Gruppenkommandeur)으로 임명되었다[47]. 비행대장으로서 첫 격추는 11월 7일 밤에서 8일 새벽 사이에 이루어졌으며, 그의 야간 격추 기록을 20으로 늘렸다. 이는 그의 1941년 마지막 격추 기록이었다. 그는 베를린으로 향하던 영국 공군 웰링턴 1C 폭격기를 아클람 근교에서 격추했고, 이 전투로 뉴질랜드 공군 소속 승무원 6명이 사망했다. 이 전과로 렌트는 국방군 보고에 처음으로 이름이 언급되었으며(총 6회), 국방군 보고에서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큰 영예였으며, 군 복무 기록에도 기재되었다[48].

1942년 1월 1일, 렌트는 대위(Hauptmann)로 진급했다. 같은 해 6월 6일에는 총 44기 격추(야간 34기 포함)를 달성한 공적으로 백엽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46]. 훈장은 6월 28일과 29일 총통 대본영(FHQ)에서 수여되었으며, 수여 당시 그의 격추 기록은 야간 39기를 포함해 총 49기였다[49]. 1942년 말까지 렌트는 총 56기를 격추하며 독일 공군 최고의 야간 전투기 에이스가 되었다. 1943년 1월 1일 소령(Major)으로 진급했고, 같은 해 8월 11일에는 제3야간전투비행단의 비행단장(Geschwaderkommodore)으로 임명되었다[50]. 총 73기 격추(야간 65기 포함)를 기록한 후, 렌트는 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이 소식은 8월 4일 전보로 통보받았다[51]. 검 수여식은 라스타르부르크의 총통 대본영에서 이루어졌다[52].

1944년 1월, 렌트는 하룻밤 사이에 이른바 '중폭격기'인 4발 엔진 전략 폭격기 3기를 격추했으나, 자신의 기체도 반격으로 손상되어 불시착해야 했다. 1944년 3월 22일 밤에는 단 22발의 포탄으로 폭격기 2대를 격추했으며, 6월 15일에는 7분 동안 57발의 사격만으로 아브로 랭커스터 3대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렸다. 중령(Oberstleutnant)으로 진급한 렌트는 총 110기의 확인된 격추 기록에 대한 공적으로 백엽검다이아몬드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을 받은 야간 전투기 조종사는 렌트와 하인츠-볼프강 슈나우퍼(121기 격추) 단 두 명뿐이었다[53].

4. 사생활

독일 장교는 결혼하기 위해 공식적인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는 대체로 형식적인 절차였으나, 렌트가 엘리자베스 페터슨(Elisabeth Petersen)과 결혼하려 했을 때는 상황이 복잡했다. '엘리자베스 페터슨'의 본명은 헬레네(레나) 세노코스니코바(Helene (Lena) Senokosnikova)로, 1914년 4월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당시 제3제국에서는 러시아인을 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신원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했다.[54] 그녀의 배경과 인종적 혈통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진 후, 1941년 3월 15일 독일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두 사람은 1941년 9월 10일 함부르크 벨링스부텔에서 결혼했으며, 두 딸을 두었다.[55] 첫째 딸 크리스티나(Christina)는 1942년 6월 6일에 태어났고, 둘째 딸 헬마(Helma)는 렌트가 비행 사고로 사망한 직후인 1944년 10월 6일에 태어났다.[56]

헬무트 렌트의 두 형인 요아힘(Joachim)과 베르너(Werner)는 고백교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나치 당국과 갈등을 겪었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가 이끌던 고백교회는 독일 내 개신교 교회를 나치화하려는 제국의 시도에 강하게 반대했다. 특히 국가 사회주의의 원칙, 그중에서도 아리아인 조항의 시행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바르멘 선언을 통해 고백교회는 국가가 통제하는 독일 복음주의 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고백교회 신자였던 형 베르너 렌트는 반나치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1937년에 처음 체포되었다.[57] 1942년 6월에는 다른 형 요아힘이 강단에서 소위 '묄더스 서한'(Möldersbriefde)을 낭독했다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 이 편지는 영국의 흑색선전 기관인 정치전쟁집행부(Political Warfare Executive영어)의 책임자였던 세프톤 델머가 만든 선전물이었다. 베르너 묄더스가 쓴 것처럼 꾸며진 이 편지는 그의 삶에서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증언하는 내용이었지만, 실제로는 국가 사회주의 정권에 대한 충성보다 신앙을 우선시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58]

5. 죽음

1944년 10월 5일, 렌트는 Ju 88 G-6 기종("D5+AA")을 타고 슈타데에서 파더보른 남쪽 5km 지점에 있는 노르트보르헨으로 향하는 정기 비행 중이었다.[4][5][60] 당시 비행기에는 오랜 동료 무선 통신병 발터 쿠비쉬를 포함한 3명의 승무원이 함께 타고 있었다.[60] 렌트는 제1야간전투비행단장인 한스 요아힘 야브스를 만나 작전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었다.[60]

파더보른/노르트보르헨 비행장에 착륙 접근 중, 왼쪽 엔진이 갑자기 멈추면서 기체가 급격히 기울었다.[4][5][60] 렌트는 기체를 안정시키려 했으나 통제력을 잃고 고압선에 충돌하며 추락했다.[4][5][60] 이 사고로 렌트를 포함한 승무원 4명 모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4][5] 구조되었지만, 쿠비쉬와 다른 승무원 한 명은 사고 당일 사망했고, 다음 날 아침 또 다른 한 명이 사망했다.[60] 렌트 본인도 사고 이틀 뒤인 1944년 10월 7일에 결국 숨을 거두었다.[4][5][60]

렌트의 국장은 1944년 10월 11일 베를린의 총통 관저에서 거행되었다.[61] 나치 독일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 원수가 나치 독일 군기가 덮인 렌트의 관 앞에서 경례했으며, 기사십자 철십자장 수훈자 6명이 의장대를 맡았다.[61] 다음 날인 10월 12일, 렌트와 사고로 함께 사망한 3명의 승무원은 슈타데의 군 묘지에 함께 안장되었다.[61]

6. 사후 평가 및 논란

1964년 7월 18일, 독일 육군 항공대의 로텐부르크 기지가 그의 명예를 기려 "렌트 막사"(Lent-Kasernede)로 명명되었다.[62]

1966년 7월 18일, 런던 소더비 경매에 헬무트 렌트의 훈장 다수가 출품되었다. 익명의 입찰자가 총 500GBP에 일괄 낙찰받았는데, 구매자는 전 전투기 총감이었던 아돌프 갈란트였다. 갈란트는 독일 연방 국방부를 대신하여 구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훈장은 헬무트 렌트의 장녀가 어머니와 상의하여 판매한 것으로, 수술 비용 마련을 위해 급히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독일 연방 국방부는 이 훈장들을 라슈타트의 국방사 박물관(Wehrgeschichtliches Museum Rastattde)에 기증했다.[63]

7. 훈장 내역

렌트의 참나무 잎, 검, 다이아몬드가 드레스덴의 연방군 군사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조종사 휘장 (1937년 11월 15일)
  • 주데텐란트 메달
  • 나르비크 방패 (1941년 1월 30일)
  • 부상 휘장 (1939년)
  • * 흑색 (1941년 7월 14일)
  • * 은색 (1943년 12월 22일)
  • 철십자 훈장 (1939년)
  • * 2급 (1939년 9월 21일)
  • * 1급 (1940년 5월 11일)
  • 루프트바페 명예 잔 (1941년 6월 26일)
  • 금색 루프트바페 전선 비행 죔쇠 (구축기 조종사)
  • 깃발 "300"이 있는 금색 루프트바페 야간 전투기 조종사 전선 비행 죔쇠
  •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색 합동 조종사-관측 휘장
  • 독일 십자 훈장 금장 (1942년 4월 9일, II./Nachtjagdgeschwader 2 소속 하우프트만(대위))
  • 참나무 잎, 검, 다이아몬드가 있는 철십자 기사 십자 훈장
  • * 기사 십자 훈장 (1941년 8월 30일, 6./Nachtjagdgeschwader 1 소속 오버로이테난트(중위)이자 슈타펠카피탄(중대장))
  • * 98번째 참나무 잎 (1942년 6월 6일, II./Nachtjagdgeschwader 2 소속 하우프트만(대위)이자 그루펜코만도어(비행단장))
  • * 32번째 검 (1943년 8월 2일, IV./Nachtjagdgeschwader 1 소속 마요르(소령)이자 그루펜코만도어(비행단장))
  • * 15번째 다이아몬드 (1944년 7월 31일, Nachtjagdgeschwader 3 소속 오버스트로이테난트(중령)이자 게쉬바데르코모도어(연대장))

8. 진급 내역

wikitext

날짜계급비고
1936년 4월 1일판넨준커사관생도
1937년 4월 1일페른리히소위
1938년 2월 1일오버페른리히선임 소위
1938년 3월 1일로이중위
1940년 7월 1일오버로이대위
1942년 1월 1일하우프트만대위
1943년 1월 1일마요르소령
1944년 3월 1일오버르스트로이테난트중령
사후오버르스트대령


참조

[1] 문서 List of German World War II night fighter aces
[2] 문서 Organization of the Luftwaffe during World War II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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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22] 서적
[23] 서적 Helden der Wehrmacht
[24] 서적
[25] 서적
[26] 서적
[27] 서적
[28] 서적
[29] 서적
[30] 서적
[31] 서적
[32] 서적
[33] 서적
[3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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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서적
[37] 서적
[38] 서적
[39] 서적
[40] 서적
[41] 서적
[42] 서적
[43] 서적
[44] 서적
[45] 서적 Die Wehrmachtberichte 1939–1945
[46] 서적
[47] 서적
[48] 서적
[49] 서적
[50] 서적
[51] 서적
[52] 서적
[53] 서적
[54] 서적
[55] 서적
[56] 서적
[57] 서적
[58] 서적
[59] 서적
[60] 서적
[61] 서적
[62] 웹사이트 Helmut Lent http://www.lexikon-d[...] 2009-12-02
[63] 서적
[64] 서적
[6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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