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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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제궁정(Kaiserpfalz)은 중세 시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머물렀던 궁정을 의미한다. 독일어 '카이저'와 '팔츠'의 합성어로, '황제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황제는 수도가 아닌 각 지역을 순회하며 봉신들과 접촉했는데, 이 때 머무는 장소가 바로 황제궁정이었다. 황제궁정은 영주의 집이나 요새화된 사냥 별장, 또는 숙박 시설을 갖춘 대규모 영주 저택의 형태였으며, 라인 강, 마인 강 등 교통 요충지에 위치했다. 13세기 이후 황제궁정은 쇠퇴하고, 대신 언덕 꼭대기 성이나 자유 제국 도시가 황제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주요 황제궁정으로는 아헨, 고슬라, 프랑크푸르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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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궁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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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칭의 유래
''카이저팔츠''(Kaiserpfalz)는 "황제"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로,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카이저''(Kaiser)와 "궁전"을 뜻하는 라틴어 ''팔라티움''(palatium)에서 유래한 ''팔츠''(Pfalz)를 합쳐 만든 말이다(궁전 참조). ''쾨니히스팔츠''(Königspfalz)는 "왕"을 뜻하는 ''쾨니히''(König)와 "왕궁"을 뜻하는 ''팔츠''(Pfalz)를 합쳐 만든 말이다.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제국의 중세 황제들은 수도에서 통치하지 않고, 현지에서 봉신들과 직접 소통해야 했다. 이를 "순회 왕권" 또는 ''"순회 궁정"''이라고 불렀으며, 독일어로는 ''Reisekönigtum'' ("여행하는 왕국")이라고 했다.
메로빙거 왕조는 프랑크 왕국에서 군주가 영토 국가처럼 행정 관리의 지원을 받아 특정 토지 경계를 가진 영토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봉건 영주와 그들의 봉신 사이의 개인적인 종속 관계에 기반한 봉건적 원칙에 따라 통치했다(''Personenverbandsstaat'', "개인적 종속 국가").[2] 이러한 종속 관계는 지위나 토지의 할당을 포함하여 끊임없이 유지되고 갱신되어야 했다. 왕과 황제가 끊임없이 자신의 영토를 돌아다니며 ''호프타크''(궁정 일, 즉 제국의 권력자들과의 회의)와 궁정 회의(분쟁을 해결하고 권위를 입증하기 위해 범죄를 처벌)를 국가의 여러 지역에서 번갈아 개최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팔첸''(pfalzen)은 독일 왕국의 왕이 짓고 사용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올바른 용어는 "왕궁"을 뜻하는 ''쾨니히스팔츠''이다. ''카이저팔츠''는 19세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독일 왕이 교황에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칭호를 받으려면 즉위 후 몇 년이 지나거나 아예 하지 않은 이탈리아 원정(Italienzug)을 통해 황제 대관식을 치러야 비로소 황제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3. 순회 왕정의 전통
메로빙거 왕조는 프랑크 왕국에서 이미 영토 국가가 아닌, 봉건 영주와 봉신 사이의 개인적인 종속 관계에 기반한 봉건적 원칙에 따라 통치했다(''Personenverbandsstaat'', "개인적 종속 국가"). 이러한 종속 관계는 지위나 토지 할당을 포함하여 끊임없이 유지되고 갱신되어야 했다. 왕과 황제가 자신의 영토를 돌아다니며 ''호프타크''(궁정 일, 제국의 권력자들과의 회의)와 궁정 회의(분쟁 해결 및 권위 입증)를 여러 지역에서 번갈아 개최한 이유 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도로가 거의 없어 장거리 통신이 어려웠기 때문에, 궁정은 영토를 통제하기 위해 직접 그 존재를 보여주어야 했다. 또한, 13세기까지는 부적절한 운송 경로로 인해 지역 주민 외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장기간 식량을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왕실 궁정에 식량을 보내는 대신 궁정이 식량을 찾아 이동했다.
13세기부터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는 고정된 왕실 거주지가 수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팔레 드 라 시테''와 ''웨스트민스터 궁전''이 대표적인 예이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세습 군주제가 아닌 선출 군주제의 전통이 우세했기 때문에(제국 선거, 신성 로마 제국의 왕실 및 제국 선거 목록 참조) 수도가 발전하기 어려웠다. 왕들은 각기 다른 지역 출신이었고, 제국과 반항적인 지역 통치자들을 통제하려면 자신의 고향에만 머무를 수 없었다. 그 결과, 왕과 황제는 근대까지 제국을 순회했다. 16세기 중반 카를 5세 황제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페르디난트 1세)가 호프부르크로 주요 거주지를 옮겼고, 이후 대부분의 합스부르크 황제들이 그곳에 거주했다. 그러나 빈은 제국의 공식 수도가 아닌 합스부르크 세습 국가(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수도였다. 황제들은 프랑크푸르트와 아헨에서 선거와 대관식을, 여러 곳에서 제국 의회를 개최했다. 레겐스부르크 영구 의회는 1663년부터 1806년까지 레겐스부르크에 있었다. 루돌프 2세(루돌프 2세)는 프라하에, 비텔스바흐 황제 카를 7세(카를 7세)는 뮌헨에 거주했다.
4. 목적, 위치, 특징
13세기부터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는 고정된 왕실 거주지가 빠르게 성장하고 상응하는 인프라를 개발하는 수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팔레 드 라 시테''와 ''웨스트민스터 궁전''이 각각 주요 거주지가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진정한 세습 군주제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불가능했다. 대신 선출 군주제의 전통이 우세했다''(참조: 제국 선거, 신성 로마 제국의 왕실 및 제국 선거 목록)''. 이는 매우 다른 지역 출신의 왕들이 선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그들이 제국과 반항적인 지역 통치자들을 통제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고향 지역과 사저에만 국한될 수 없었다. 그 결과, 왕과 황제는 근대까지 제국을 돌아다녔다.[2]
"궁정"이라는 일반적인 개념과는 달리, ''팔츠''는 영구적인 거주지가 아니라 황제가 일정 기간, 최대 몇 달 동안 머무는 장소였다. 여정표에 따르면 군주는 몇 주 이상 머무는 경우가 드물었다. 또한, ''팔츠''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웅장한 궁전은 아니었고, 일부는 하르츠의 보트펠트와 같은 작은 영주의 집이나 요새화된 사냥 별장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왕과 그의 동반자들을 위한 식사와 숙박 시설을 제공하는 대규모 영주 저택(''Gutshöfe'')으로, 종종 수백 명의 직원과 수많은 손님과 그들의 직원 및 말을 포함했다. 숙소는 대부분 석조 본관 주변에 나무 부속 건물이 있었다. 라틴어로, 그러한 왕실 영주는 ''villa regia'' 또는 ''curtis regia''로 알려졌다. 현대 라틴어 문서에서 주로 언급되는 것은 (''pfalz''가 아닌) 이러한 표현이다. 떠돌이 통치자가 잠시 머물면서 주권적 의무를 수행하는 ''pfalz''와 달리, ''왕실 영지''(Königshof)는 왕국이 소유한 작은 영주 저택이 있는 농장에 불과했으며, 왕들이 가끔 환승역으로 사용했다.[2]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동일한 라틴어 표현을 사용하여 문서에 언급되었다.
''팔츠''는 종종 로마 시대의 도시 유적지, 즉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근처에 위치했으며, 대부분은 라인 강, 마인 강 및 다뉴브 강과 같이 항해 가능한 강에 위치하여 빠르고 편안한 여행을 가능하게 하고 물품 공급을 쉽게 했다. 오래된 주교구는 종종 이러한 장소에 위치했으며, 주교가 자신의 왕조적 목표를 추구하는 공작보다 일반적으로 왕에게 더 충성스럽다는 이점도 있었다. 왕은 심지어 서임권 투쟁까지 주교를 임명했다.[3] 또한, 그러한 건물들은 종종 왕실 영지 한가운데나 중요한 수도원 근처 시골에 위치했다. ''팔츠''와 더 작은 왕실 영지는 일반적으로 30km 간격으로 건설되었으며, 이는 당시 왕실 말과 전차의 하루 여정에 해당했다. (개별 기수는 마른 땅에서 훨씬 더 먼 거리를 이동했다.)
최소한, ''팔츠''는 대강당 또는 ''Aula Regia''가 있는 ''팔라스'', 황실 성당 (''Pfalzkapelle'') 및 영지 (''Gutshof'')로 구성되었다. 왕과 황제는 여기서 국정을 수행하고, 제국 법정 회의를 열고, 법정일(''Hoftag'')에 제국의 중요 인사들과 만났으며 중요한 교회 축제를 축하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황제를 대신하여 해당 지역의 사법권을 행사하는 팔츠 백작에 의해 관리되었다. 이러한 백작들 중 가장 강력한 자인 라인 팔츠 백작은 결국 선제후의 선제후령 팔라티네이트 칭호로 상승하게 된다.
통치자들이 방문한 ''팔츠''는 그 기능에 따라 달랐다.
여름에는 종종 군사 작전을 포함하여 전국을 여행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더 짧은 시간만 머물렀으며, 궁전, 수도원 또는 도시가 없는 곳에서는 종종 천막 캠프를 사용했다.[4] 더 큰 궁전은 종종 특별한 권리를 가진 도시 (예: 제국 직할지)에 있었지만, 주교의 자리 또는 제국 수도원일 수도 있었다.
5. 카이저팔츠의 쇠퇴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몰락 이후 13세기 중반, 황제 공위 시대 동안 황제의 권력은 일시적으로 붕괴되었다. 허약한 왕들이 연이어 선출되었지만, 아무도 주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제후들과 주교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하려 했다. 그들은 덜 강력한 귀족들을 억압하고, 도시의 지배자들(귀족, 길드)과 싸웠으며, 불법적으로 황제의 봉토를 점유하고, 관세, 새로운 세금, 심지어 황제의 ''레갈리아''를 도입했다. 봉건 분쟁, 주먹의 법, 강도 귀족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의 요새화되지 않은 ''황제궁정''은 더 이상 독일 왕들에게 충분한 안전을 제공하지 못했다. 대부분은 버려지거나, 도시나 지역 제후들에 의해 용도가 변경되거나, 새로운 개발로 인해 사라지거나, 낡아졌다.
''황제궁정'' 대신, 황궁이 건설되었는데, 이는 뉘른베르크 성이나 트리펠스 성과 같은 언덕 꼭대기 성이었다. (일반적으로 도시, 저지대, 계곡 또는 강둑에 위치했던 ''황제궁정''과는 달리) 왕들은 또한 자유 제국 도시에 머무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들은 오래 전에 옛 황실 수도원의 번영을 넘어섰고 충성심이 강했다. 이 도시의 지배적인 귀족들은 왕들을 관대하게 접대했을 뿐만 아니라, 야콥 푸거처럼 거액의 대출로 그들의 전쟁 자금을 댔다.
6. 주요 카이저팔츠 목록
| 카이저팔츠 |
|---|
| 아헨 |
| 아델베르크 |
| 아이블링 |
| 알비스하임 |
| 알텐부르크 |
| 알트외팅 |
| 알차이 |
| 아모르바흐 |
| 안데르나흐 |
| 안스바흐 |
| 아르네부르크 |
| 아른슈타트 |
| 아우프하우젠 |
| 아우크스부르크 |
| 바덴바덴 |
| 발크슈테트 |
| 밤베르크 |
| 바르도비크 |
| 바첸호펜 |
| 벨게른 |
| 베라츠하우젠 |
| 베르슈타트 |
| 비브리히 |
| 비어슈타트 |
| 빈겐 암 라인 |
| 뵈켈하임 |
| 보트펠트 |
| 보트만 |
| 본 |
| 보파르트 |
| 보이네부르크 |
| 브란덴부르크 |
| 브라운슈바이크 |
| 브라이자흐 |
| 브라이텐바흐 |
| 브라이팅겐 |
| 브레멘 |
| 브루흐잘 |
| 브뤼겐 |
| 뷔르겔 |
| 뷔르슈타트 |
| 북스테후데 |
| 칼베 |
| 캄 |
| 에거 (현재 체브) |
| 코헴 |
| 코르베이 |
| 달렌 |
| 데렌부르크 |
| 디에덴호펜 |
| 돌렌도르프 |
| 도나우에싱엔 |
| 도나우슈타우프 |
| 도나뵈르트 |
| 도른부르크 |
| 도르트문트 |
| 뒤스부르크 |
| 뒤렌 |
| 두를라흐 |
| 에베르스베르크 |
| 에브라흐 |
| 엡스도르프 |
| 에카르츠베르가 |
| 아이히슈테트 |
| 아이젠베르크 |
| 아이스펠트 |
| 아이스레벤 |
| 엘텐 |
| 에레스부르크 |
| 에르푸르트 |
| 에름슈베르트 |
| 에르비테 |
| 에슈베게 |
| 에센 |
| 에슬링겐 암 네카어 |
| 에텐슈타트 |
| 에터츠하우젠 |
| 오이서탈 |
| 플라머스하임 |
| 포르히하임 |
|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
|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 |
| 프라이징 |
| 프리츨라어 |
| 프로세 안 데어 엘베 |
| 풀다 |
| 퓌르트 |
| 간데르스하임 |
| 게베제 |
| 게렌 |
| 겔더스하임 |
| 겔른하우젠 |
| 게르머스하임 |
| 게른로데 |
| 게른스하임 |
| 게르스퉁겐 |
| 기비헨슈타인 |
| 기볼데하우젠 |
| 기엔겐 |
| 괴핑겐 |
| 고슬라 |
| 고테른 |
| 그레베나우 |
| 그로네 |
| 그로스젤하임 |
| 귄츠부르크 |
| 구스테트 |
| 하인바흐 |
| 하이나 |
| 할버슈타트 |
| 할레 |
| 함머슈타인 |
| 하르스펠트 |
| 하르츠부르크 |
| 하젤바흐 |
| 하셀펠데 |
| 하슬로흐 |
| 하펠베르크 |
| 하이드스펠트 |
| 하일브론 |
| 하일리겐베르크 |
| 하일리겐슈타트 |
| 하임스하임 |
| 헬프타 |
| 헬름슈테트 |
| 헤마우 |
| 헤르브레히팅겐 |
| 헤르포르트 |
| 헤렌브라이팅겐 |
| 헤르스펠트 |
| 헤르슈텔레 |
| 헤르츠베르크 |
| 헤슬로흐 |
| 힐데스하임 |
| 힐바르트하우젠 |
| 히르사우 |
| 히르샤이드 |
| 호엔알트하임 |
| 호엔슈타우펜 |
| 호엔트비엘 |
| 혼슈테트 |
| 홀렌슈테트 |
| 호른부르크 |
| 일젠부르크 |
| 임프스하우젠 |
| 잉겔하임 |
| 잉골슈타트 |
| 인닝 |
| 카이저슬라우테른 |
| 카이저스베르트 |
| 캄바 |
| 카셀 |
| 카스텔 |
| 카우풍겐 |
| 카이나 |
| 켈하임 |
| 켈스터바흐 |
| 케셀 |
| 키르히베르크 |
| 키르헨 |
| 키르호젠 |
| 키센브뤼크 |
| 키싱엔 |
| 키칭겐 |
| 코블렌츠 |
| 쾰른 |
| 콤부르크 |
| 쾨니히달룸 |
| 쾨니히슬루터 |
| 콘스탄츠 |
| 코스하임 |
| 크라이스도르프[6] |
| 크로이츠나흐 |
| 라덴부르크 |
| 람퍼트하임 |
| 랑엔 |
| 랑에나우 |
| 랑엔젠 |
| 라우펜 |
| 라우펜 암 네카어[7] |
| 라우터탈 (오버프랑켄) |
| 라이스니크 |
| 라이츠카우 |
| 리히텐베르크 |
| 림부르크 안 데어 하르트 |
| 링겐 |
| 리페함 |
| 립스프링 |
| 로너슈타트 |
| 론스하임 |
| 로르흐 |
| 로르슈 |
| 루스테나우 |
| 뤼그데 |
| 뤼네부르크 |
| 마스트리흐트 |
| 마그데부르크 |
| 마인츠 |
| 마르크뢰닝겐 |
| 메클렌부르크 |
| 마이센 |
| 멤레벤 |
| 멤밍겐 |
| 멩겐 |
| 메링 |
| 메르제부르크 |
| 민덴 |
| 민더스도르프 |
| 미르스도르프 |
| 뫼겔도르프 |
| 모스부르크 |
| 뫼르펠덴 |
| 모스바흐 |
| 뫼취 |
| 뮐하우젠 |
| 뮌덴 |
| 뮌너슈타트 |
| 뮌스터 |
| 뮌스터아이펠 |
| 나부르크 |
| 난슈타인 |
| 나테하임 |
| 나움부르크 |
| 노이부르크 |
| 노이딩겐 |
| 노이엔부르크 성 (프라이부르크) |
| 노이하우젠 |
| 노이스 |
| 니더알테이히 |
| 니엔부르크 |
| 니어슈타인 |
| 네이메헌 |
| 노르트하우젠 |
| 노르트하임 |
| 뉘른베르크 |
| 누스도르프 |
| 오베르테레스 |
| 옥센푸르트 |
| 오퍼딩겐 |
| 오어드루프 |
| 오름 |
| 오펜하임 |
| 오셔슬레벤 |
| 오스나브뤼크 |
| 오스터하우젠 |
| 오스터호펜 |
| 오스테로데 |
| 파더보른 |
| 파사우 |
| 페가우 |
| 파이팅 |
| 포르츠하임 |
| 푀데 |
| 폰도르프 |
| 프뤼름 |
| 퀘들린부르크 |
| 람스파우 |
| 라스도르프 |
| 레겐스부르크 |
| 레메 |
| 라이버스도르프 |
| 라이헤나우 |
| 라인바흐 |
| 리에코펜 |
| 리테부르크 |
| 로클리츠 |
| 로다흐 |
| 로딩 |
| 로어 |
| 롬멜하우젠 |
| 뢰제베크 |
| 로젠부르크 |
| 로텐부르크 옵 데어 타우버 |
| 로트바일 |
| 뤼데스하임 |
| 륄츠하임 |
| 자알펠트 |
| 재킹겐 |
| 잘츠 |
| 잘츠베델 |
| 삼스베겐 |
| 장트 고아르 |
| 자스바흐 암 카이저슈툴 |
| 샤트부흐 |
| 쉬넨 |
| 시어링 |
| 쇠닝겐 |
| 쉴러 |
| 슈바비슈 그뮌트 |
| 슈바비슈 할 |
| 슈바르첸브루크 |
| 슈바르츠라인도르프 |
| 제, 젬. 루프부르크 |
| 제하우젠 |
| 자이드만스도르프 |
| 자인트슈테트 |
| 젤리겐슈타트 |
| 신지히 |
| 십텐펠데 |
| 조에스트 |
| 졸링겐 |
| 쇨머링겐[8] |
| 존트하임 안 데어 브렌츠 |
| 슈파이어 |
| 슈타트암호프 |
| 슈타펠제 |
| 슈탈바움[9] |
| 스틸 |
| 슈테가우라흐 |
| 탕어뮌데 |
| 타우버비쇼프스하임 |
| 텐슈테트 |
| 탕겔슈테트 |
| 팅가우 |
| 토르 |
| 튄겐 |
| 틸레다 |
| 트레벤 |
| 트레부르 |
| 트라이스 |
| 트리어 |
| 트리펠스 |
| 위버링겐 |
| 울름 |
| 위트레흐트 |
| 파이힝겐 안 데어 엔츠 |
| 펠덴 |
| 페르덴 |
| 빌리히 |
| 빌마어 |
| 플라텐 |
| 푈클링겐 |
| 프레덴 |
| 바트가센 |
| 바렌 |
| 바이블링겐 |
| 발베크 |
| 발트자센 |
| 발도르프 |
| 발트하우젠 |
| 발트하우젠 |
| 베크마어 |
| 바일부르크 |
| 바인하임 |
| 바인스베르크 |
| 바이제나우 |
| 바이센부르크 |
| 베르벤 |
| 베르덴 |
| 베를라 |
| 비덴브뤼크 |
| 비헤 |
| 비스바덴 |
| 비슬로흐 |
| 빌데스하우젠 |
| 빔펜 |
| 빈터바흐 |
| 뵐피스 |
| 보름스 |
| 뷔르츠부르크 |
| 부르첸 |
| 자텐 |
| 차이츠 |
| 출피히 |
| 주스마르스하우젠 |
| 주트펜 |
7. 참고 문헌
- 아돌프 에거스: 《10세기와 11세기 초의 왕실 영지》, H. Böhlaus Nachfolger, 1909
- 루츠 펜스케: 《독일 왕궁: 중세 고등 시대의 역사 및 고고학 연구 기여, 지배적 대표성의 중심지: 역사, 건축 및 의례》, 막스 플랑크 역사 연구소, Vandenhoeck & Ruprecht, 1963
- 파울 그림: 《할레 및 마그데부르크 지역의 고고학적 궁정 연구의 현황과 과제》, 아카데미-베를라그, 1961
- 귄터 빈딩: 《독일 왕궁, 카롤루스 대제부터 프리드리히 2세까지 (765–1240)》. 다름슈타트, 1996
- 알렉산더 톤: 《바르바로사 성, 황제 궁정, 왕궁 또는 카시미르 성?》 (황제)라우테른의 예를 바탕으로 중세 고등 시대의 "궁정" 개념의 관련성과 타당성에 대한 연구. In: 《팔츠 역사 및 민속학 카이저슬라우테른 연보》. 카이저슬라우테른, 1.2001, 109–144쪽.
- 알렉산더 톤: 《... ut nostrum regale palatium infra civitatem vel in burgo eorum non hedificent.》 12세기와 13세기의 성 연구를 위한 "궁정" 용어의 관련성과 타당성에 대한 연구: 《13세기의 성 건축》. 바르트부르크-게젤샤프트에서 발행, 성 및 궁전 연구를 위한 게르만 국립 박물관과 공동 발행. 성 및 궁전 연구. Vol. 7. 도이처 쿤스트베르라그, 뮌헨, 2002, 45–72쪽.
- 게르하르트 슈트라이히: 《독일 중세 시대의 성과 교회. 궁정, 성 및 영주 저택의 종교 지형학 연구》, 2권, 중세사 콘스탄츠 실무 그룹에서 발행, 토르베케-베를라그, 1984
참조
[1]
웹사이트
Eintrag Pfalz
http://www.duden.de/[...]
[2]
서적
Karolingische Königshöfe am Mittelrhein
Verlag Vandenhoeck & Ruprecht
1970
[3]
서적
Das frühe Mittelalter
Fischer
2000
[4]
서적
Friedrich Barbarossa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90
[5]
서적
Die Fugger. Geschichte einer Augsburger Familie (1367–1650)
Kohlhammer
2006
[6]
웹사이트
Die Geschichte von Kraisdorf
http://www.kraisdorf[...]
[7]
간행물
Die Reginswindis-Tradition von Lauffen. Königliche Politik und adelige Herrschaft am mittleren Neckar
http://www.mgh-bibli[...]
2014-02-21
[8]
웹사이트
Zeitschrift des Harz-Vereins für Geschichte und Altertumskunde
http://legacy.fordha[...]
[9]
웹사이트
Ortsteil Stallbaum
http://www.mein-po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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