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 가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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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 가극단은 오페라 테너 후지와라 요시에에 의해 1934년 창단된 일본의 오페라 극단이다. 1939년 '후지와라 가극단' 명칭으로 첫 공연을 시작했으며,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를 중심으로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1981년 일본 오페라 진흥회가 설립되어 후지와라 가극단과 일본 오페라 협회의 사업을 위임받았으며, 2012년 공익 재단 법인으로 전환되었다. 현재까지 일본 오페라의 창조와 보급에 힘쓰고 있으며, 다양한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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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 가극단 - [인물]에 관한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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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934년 오페라 테너 후지와라 요시에가 후지와라 가극단을 창단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주세페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만프레드 구를리트의 지휘 아래 400회 이상 공연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1] 1957년부터 1965년까지 테너 아리고 폴라가 예술 감독을 맡았으나, 그가 떠난 후 쇠퇴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다.
1958년 성악가 오가 히로시가 '교육 오페라 연구회'를 창립하고, '일본 오페라 협회' 명의로 첫 공연을 가졌다.[14][15][16] 이들은 주로 일본인 작곡가에 의한 일본어 오페라 창작과 실연에 힘썼다.
1981년 후지와라 가극단과 일본 오페라 협회는 일본 오페라 진흥회로 통합되었다.[13][19] 일본 오페라 협회는 일본 오페라 부문의 명칭으로 남았고, 단체는 소멸했다. 이후 일본 오페라 진흥회는 오페라 및 성악 전반의 공연 활동과 가수 및 스태프 육성을 통해 음악 예술의 보급과 진흥에 힘쓰고 있다.
2. 1. 후지와라 가극단 창단과 초기 활동 (1934-1945)
1934년(쇼와 9년) 6월, 오페라 테너 후지와라 요시에는 히비야 공회당에서 푸치니의 《라 보엠》 공연을 가졌다[1]。「도쿄 오페라 컴퍼니 공연」이라고 칭했지만[2][3], 후지와라 가극단의 출발점이 되었다. 오쿠라 키시치로 등 후원자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흥행적으로는 수입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나, (초보나 다름없는 코러스를 제외하면) 음악적으로는 평론가들로부터 찬사가 쏟아졌다.이후 도쿄 오페라 컴퍼니 명의로 비제의 《카르멘》, 베르디의 《리골레토》 (마달레나 역으로 훗날의 대여배우, 스기무라 하루코가 출연), 푸치니의 《토스카》 등으로 착실히 무대를 쌓았다. 후지와라는 주역을 맡을 뿐만 아니라, 연출과 장치, 의상까지 손을 댔으며, 번역 가사 공연 시에는 아내 아키코가 종종 (야나기조노코의 필명으로) 참여했다.
「후지와라 가극단」이라는 명칭을 내건 첫 공연은 1939년 3월 26일부터 가부키자에서 열린 《카르멘》이었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베르디의 《춘희》와 《리골레토》의 교대 상연(유럽과 미국의 극장에서 상식인, 이른바 레퍼토리 상연)을 성공시켰고, 지휘자로는 만프레트 구를리트를 얻었다. 태평양 전쟁 중 1942년 11월에는 바그너의 《로엔그린》 일본 초연에서도 타이틀 역을 불렀다. 이처럼 후지와라 가극단은 일본에서 가장 수준 높은 오페라를 상연할 수 있는 컴퍼니가 되었고, 후지와라 요시에는 그 간판 배우로서의 지위를 굳혀갔다. 그러나 이러한 공연들도 흥행적으로 반드시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고, 후지와라는 자택의 피아노를 판매하는 등 어려움도 겪었다.
2. 2. 전후 발전과 해외 진출 (1946-1980)
1946년 1월, 제국 극장에서 『춘희』 공연을 재개하며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4] 같은 해, 기노시타 타모츠(테너)가 가극단에 합류하여, 후지와라 요시에와 함께 주역을 맡는 투톱 체제가 구축되었다.[4] 1947년 7월에는 탄호이저 전곡판을 일본에서 처음으로 공연하였다.[4]1950년에는 도쿄 아카사카에 오페라 연구소를 설립했다.[4] 이 연구소는 미쓰이 타카쿠니의 자금 지원을 받아 건설되었으며, 오케스트라 연습도 가능한 시설을 갖추었다.
1952년, 1953년, 1956년에는 미국 뉴욕 시티 오페라와 『나비 부인』을 공동 공연했다.[5] 이 공연은 일본인 배역을 모두 일본인 가수가 맡아 진행되었으며, 미야케 하루에(소프라노)가 나비 부인 역을 맡았다.
1958년에는 이탈리아 유학 후 귀국한 소프라노 쿠와바라 에이코 주연으로 『토스카』를 일본 최초로 원어로 상연했다.[6] 1967년에는 대한민국에서 『카르멘』을 공연했다.[5]
1972년에는 시모야가와 케이스케가 후지와라 요시에의 뒤를 이어 2대 총감독으로 취임했다.[7] 1976년 3월 22일에는 초대 총감독 후지와라 요시에가 사망했다.
2. 3. 일본 오페라 협회 창립과 활동 (1958-1980)
1958년, 성악가 오가 히로시[14]가 '교육 오페라 연구회'를 창립했다.[5][15] 첫 공연은 1958년 6월 25일 핫토리 타다시의 『테코나』(주연: 나카무라 쿠니코)였으며, '일본 오페라 협회' 명의로 주최되었다.[16] 1960년에 '일본 오페라 연구회'로 개칭되었으나,[15] 이후에도 주최 명의는 '일본 오페라 연구회'와 '일본 오페라 협회'가 혼용되었다. 이들은 주로 일본인 작곡가에 의한 일본어 오페라 창작과 실연에 힘썼다. 1970년에 '일본 오페라 협회'로 명칭이 통일되었다.[15]스탭은 공연마다 일정하지 않았고, 다수의 인물이 참여했으며, 작곡가가 직접 연주하는 경우도 많았다.
참여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분야 | 주요 인물 |
---|---|
작곡가 | 시미즈 오사무, 마키노 유타카, 미키 미노루, 코야마 키요시게, 핫토리 타다시, 칸노 히로카즈, 벳쿠 사다오, 이시게타 마레이, 사토 마코토, 이케베 신이치로, 시바 유쿠, 로시니, 오오구리 히로시, 하야시 히카루, 마츠모토 타미노스케, 미즈노 슈코, 와타나베 카즈오, 아쿠타가와 야스시, 콘도 케이, 카즈키 오사무[17][18] |
지휘자 | 핫토리 타다시, 코바시 미노루, 엔도 마사코, 와타나베 카즈오, 야마다 카즈오, 마츠모토 타미노스케, 칸노 히로카즈, 와카스기 히로시, 아키야마 카즈요시, 코바야시 켄이치로, 무라카와 치아키, 아라야 토시하루, 모리 타다시, 츠츠미 슌사쿠, 하야시 히카루, 호시데 토요, 다카하시 세이야, 마츠모토 노리히사, 와타나베 아키오, 마에다 코이치로, 나카지마 요시후미, 니시모토 신야, 히로이 타카시[17][18] |
연출가 | 아오야마 케이오, 하야노 스로우, 칸제 히데오, 타케우치 토시하루, 토미타 히로유키, 타케치 테츠지, 아라키 마코토, 쿠리야마 마사요시, 이나가키 쥰, 키요미즈 오사무, 가하라 나츠코, 테라사키 히로노리, 하야카와 쇼지, 타다이 마스오, 야스이 타케시, 우야마 히토시[17][18] |
무대 감독 | 쿠라타 아키오, 카와와 타카시, 코바야시 시로, 카와시마 요, 타카야 세이지, 하야시 미요시, 카네코 케이조, 토키 야츠오, 우루오 타다히사, 타다이 마스오, 타하라 스스무, 타카하시 타카히코, 무라카미 토시오, 아라이 마사토[17][18] |
가수 | 오가 히로시, 스가야 쇼조, 미야모토 카즈코, 카와구치 유지, 타나카 요시노리, 사카이 토모하루, 이노우에 젠사쿠, 이이무라 타카오, 오카다 아리히로, 히로세 쿄코, 스즈키 마코토, 키쿠치 미키코, 나카야마 마사에, 코가 카즈코, 오오모리 소노코, 야스이 시에코, 우츠시카와 스미야, 후지와라 슌스케, 토모타케 마사노리, 쿠스노세 카즈토, 스즈키 야스오, 이노우에 요코, 니시나 오카히코, 네지카네 마사오, 마츠야마 이쿠오, 스나하라 미치코, 마니와 사토루, 나카자와 케이, 하라다 시게오, 후루사와 이즈미, 사카모토 카즈코, 오오츠키 요시아키, 오오쿠라 타마코[17][18] |
1977년, 오가 히로시가 일본 오페라 협회 총감독으로 취임했다.[19]
일본 오페라 협회는 미키 미노루의 『춘금초』, 단 이쿠마의 『저녁 해오라기』, 시미즈 오사무의 『수선사 이야기』를 반복 상연하여 일본 오페라의 대표작으로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춘금초』는 1975년 초연도 일본 오페라 협회가 맡았으며, 1976년 예술제 주최 공연이기도 하다.[20] 또한 미즈노 슈코의 『천수 이야기』도 1979년 일본 오페라 협회가 초연했다.
2. 4. 일본 오페라 진흥회 설립과 통합 (1981-현재)
1981년, 시모야가와 토모스케는 오페라 공연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재단법인 일본 오페라 진흥회를 설립했다.[13][19] 같은 해 4월 1일, 후지와라 요시에가 창단한 후지와라 가극단과 오가 히로시가 이끌던 일본 오페라 협회는 일본 오페라 진흥회로 사업을 통합했다.[19] 일본 오페라 협회는 오페라 공연 사업 부문에서 일본 오페라 부문의 명칭으로 남게 되었고, 단체는 소멸했다.2012년 4월 1일, 일본 오페라 진흥회는 내각부의 인정을 받아 공익 재단 법인으로 전환했다.[19] 이 법인은 오페라 및 성악 전반의 공연 활동과 가수 및 스태프 육성을 통해 음악 예술의 보급과 진흥을 목표로 한다.
2019년 6월 25일 현재, 이 법인의 주요 임원은 다음과 같다.
직책 | 이름 | 비고 |
---|---|---|
이사장 | 사타케 야스미네 | 도쿄스타은행 전 이사회 의장 |
상무이사 | 오리에 타다미치 | 후지와라 가극단 총감독, 쇼와 음악 대학 특임교수 |
상무이사 | 고오리 아이코 | 성악가, 일본 오페라 협회 총감독 |
상무이사 | 시모야가와 토모스케 | 학교법인 토세이 학원 이사장 |
상무이사 | 오이시 슈지 | 공익재단법인 가나가와 필하모니 관현악단 전 전무이사 |
2. 4. 1. 후지와라 가극단 (법인화 이후)
1985년(쇼와 60년) 이가라시 키요시가 총감독으로 취임했다.[19] 외국인 아티스트를 적극적으로 초빙하는 방침을 취했으며, 1986년(쇼와 61년)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무도회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자막을 사용했고, 이후 급속히 정착되었다.[5]1999년(헤이세이 11년) 이가라시 키요시가 신국립극장 예술감독으로 취임함에 따라, 일본 오페라 진흥회 상임 이사였던 시모야카와 토모스케가 제작에 복귀했다.[7] 2003년(헤이세이 15년) 9월부터는 베이스 성악가인 오카야마 히로유키가 공연 감독으로 취임했고, 2014년(헤이세이 26년)부터 총감독으로 취임했다. 2015년(헤이세이 17년) 4월부터는 바리톤 성악가인 오리에 타다미치가 신 공연 감독으로 취임했고, 2016년(헤이세이 28년)에 총감독으로 취임했다.[19]
1981년(쇼와 56년) 법인화 이후, 2018년(헤이세이 30년) 12월까지의 공연 횟수는 238회에 달한다.[22] 적극적인 외국인 아티스트 초빙, 신 연출, 이탈리아 오페라를 중심으로 한 프로그램 구성은 2020년(레이와 2년)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2. 4. 2. 일본 오페라 협회 (법인화 이후)
1981년(쇼와 56년) 법인화 이후에도 오가 히로시가 총감독을 계속 맡았다.[22] 1984년(쇼와 59년) 제39회 문화청 예술제 주최로 하라 카즈코의 '축하 노래가 흐르는 밤에'를 공연했다.[22] 1988년(쇼와 63년) 10월에는 문화청 파견으로 폴란드 "바르샤바의 가을" 음악제에 이시이 칸의 '가사토 세이엔'으로 참가하여 첫 해외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22] 1995년(헤이세이 7년) 제50회 기념 문화청 예술제 주최로 이치야나기 토시의 '모모' 제작을 담당했다.[22]2012년도(헤이세이 24년도)에는 이와타 타츠무네의 새로운 연출의 '천수 이야기', 2013년도(헤이세이 25년도)에는 아라이 마사토의 새로운 연출의 '춘금초', 2015년도(헤이세이 27년도)에는 미우라 야스히로의 새로운 연출의 '가사토 세이엔' 등, 일본 오페라 협회가 제작하여 정착시켜온 일본 오페라 레퍼토리 작품을 새로운 연출로 상연하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22]
2016년(헤이세이 28년) 4월부터 코오리 아이코가 일본 오페라 협회 총감독 보좌를 맡았으며,[22] 2017년(헤이세이 29년) 4월부터 코오리 아이코가 일본 오페라 협회 총감독으로 취임했다.[22] 같은 해 7월 31일, 전 총감독 오가 히로시가 사망했다.[22]
1981년(쇼와 56년) 법인화 이후, 2018년(헤이세이 30년) 3월까지의 공연 횟수는 82회에 달한다.[22] 2020년(레이와 2년) 현재에도 "일본의 전통 문화에 뿌리를 둔 오페라의 창조와 보급"에 힘쓰고 있다.[22]
3. 주요 작품
후지와라 가극단과 일본 오페라 협회는 다양한 오페라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후지와라 가극단
- 1946년 1월: 제국 극장에서 『춘희』 공연 (무대 공연 재개)
- 1947년 7월: 『탄호이저』 공연 (전곡판 일본 초연)[4]
- 1952년: 제1차 미국 공연 『나비 부인』[5]
- 1953년: 제2차 미국 공연 『나비 부인』, 청년 그룹 제1회 공연 푸치니 『외투』 (일본 초연)[5]
- 1956년: 제3차 미국・캐나다 공연 『나비 부인』[5]
- 1958년: 일본 최초 원어 『토스카』 상연[6]
- 1967년: 한국 공연 『카르멘』[5]
- 1969년 5월: 『라 보엠』[8]
- 1977년: 치마로사 『비밀 결혼』[5][9]
- 1986년: 베르디 『가면무도회』 (본격적인 자막 사용 시작)[5]
- 1997년: 도니체티 『사랑의 묘약』
- 일본 오페라 협회
- 1958년 6월 25일: 핫토리 타다시 『테코나』 (첫 공연)[16]
- 미키 미노루 『춘금초』 (초연: 1975년 11월)[20]
- 단 이쿠마 『저녁 해오라기』
- 시미즈 오사무 『수선사 이야기』
- 미즈노 슈코 『천수 이야기』 (초연: 1979년 3월)
일본 오페라 협회는 주로 일본인 작곡가의 일본어 오페라 창작과 실연에 힘썼다. 협회에 참여한 주요 스태프는 다음과 같다.
분야 | 주요 인물 |
---|---|
작곡가 | 시미즈 오사무, 마키노 유타카, 미키 미노루, 코야마 키요시게, 핫토리 타다시, 칸노 히로카즈, 벳쿠 사다오, 이시게타 마레이, 사토 마코토, 이케베 신이치로 등[17][18] |
지휘자 | 핫토리 타다시, 코바시 미노루, 엔도 마사코, 야마다 카즈오, 와카스기 히로시, 아키야마 카즈요시, 코바야시 켄이치로 등[17][18] |
연출가 | 아오야마 케이오, 하야노 스로우, 칸제 히데오, 타케우치 토시하루, 쿠리야마 마사요시 등[17][18] |
무대 감독 | 쿠라타 아키오, 코바야시 시로, 타카야 세이지, 하야시 미요시 등[17][18] |
가수 | 오가 히로시, 스가야 쇼조, 미야모토 카즈코, 카와구치 유지, 나카자와 케이, 하라다 시게오 등[17][18] |
3. 1. 후지와라 가극단
1934년 오페라 테너 후지와라 요시에에 의해 창단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주세페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만프레드 구를리트의 지휘 아래 400회 이상 공연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4] 1957년부터 1965년까지는 테너 아리고 폴라가 예술 감독을 맡았다. 그 후 쇠퇴기를 겪었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다. 1980년 이후 일본 오페라 재단이 운영하고 있으며, 이 재단은 일본 오페라 협회도 관리한다.1946년 1월, 제국 극장에서 『춘희』로 공연을 재개했다. 같은 해 가을, GHQ의 공직 추방으로 도쿄 음악학교 주임 교수직을 잃은 기노시타 타모츠(테너)가 합류하여, 후지와라 요시에와 함께 주역 투톱 체제를 이루었다. 그러나 후지와라가 출연하지 않으면 티켓 판매가 감소했다고 한다.
1947년 탄호이저를 공연했다(전곡판 일본 초연).[4]
1950년 도쿄 아카사카에 오케스트라 연습이 가능한 "가극 연구소"를 건설했다(미쓰이 타카쿠니 자금 지원). 고노에 히데마로의 ABC 교향악단도 한때 이 연구소에서 연습했다.
1952년 NHK 의뢰로 도미한 후지와라는 뉴욕 시티 오페라에서 활동했던 조셉 로젠스톡을 방문, 『나비 부인』 공연 수준에 분개하여 일본인 배역을 모두 일본인 가수가 맡는 공연을 제안했다. 미야케 하루에(소프라노) 등 20명이 참가한 제1차 미국 공연[5]은 성악진은 호평받았으나, 후지와라의 협상 능력 부족으로 극단에 큰 자금 부담을 안겼다. 후지와라는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주선으로 일본흥업은행에서 100만엔(200만 엔이라고도 함)을 융통받아 탕감받았다. 1953년 제2차 미국 공연 『나비 부인』[5], 같은 해 청년 그룹 제1회 공연 푸치니 『외투』(일본 초연, 1966년까지 활동)[5], 1956년 제3차 미국・캐나다 공연 『나비 부인』[5]을 공연했다.
1958년 이탈리아 유학에서 돌아온 쿠와바라 에이코(소프라노) 주연으로 일본 최초 원어 『토스카』를 상연했다.[6]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를 주축으로 활동했다.[7] 1967년 한국 공연 『카르멘』[5], 1969년 『라 보엠』에서 아와쿠니 야스히코가 연출 조수를 맡았다.[8]
1972년, 공동 창립자이자 오랜 협력자인 시모야가와 케이스케(베이스・바리톤)가 후지와라 요시에의 위촉으로 2대 총감독 및 단체 운영을 계승했다.[7] 1976년 3월 22일 후지와라 요시에가 사망했다. 1977년 치마로사 『비밀 결혼』부터 아와쿠니 야스히코를 연출로 기용,[5][9] 아와쿠니는 1978년도 제6회 비너 발드 오페라상[10], 1980년 예술선장 문부대신 신인상을 수상했다.[11]
1978년부터 시모야가와 토모스케(시모야가와 케이스케 아들)가 제작을 담당했다. 1980년 3월 18일 시모야가와 케이스케 사망,[12] 시모야가와 토모스케가 단체 대표가 되었다.[13] 1981년 4월 1일, 시모야가와 토모스케가 설립한 재단법인 일본 오페라 진흥회에 사업을 위임, "후지와라 가극단"은 오페라 공연 사업 부문에서의 서양 오페라 부문 명칭이 되고 단체는 소멸했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시모야가와 토모스케가 제작을 담당했다. 1985년 이가라시 키요시가 총감독으로 취임,[19] 외국인 아티스트 초빙에 힘썼다. 1986년 베르디 『가면무도회』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자막을 사용, 이후 급속히 정착했다.[5]
1993년 아와쿠니 쥰(아와쿠니 야스히코 아들)이 연출 조수로 참여, 1997년 도니체티 『사랑의 묘약』으로 연출가 데뷔했다. 현재도 아와쿠니 쥰이 신연출을 포함한 많은 연출을 담당한다.
1999년 이가라시 키요시의 신국립극장 예술감독 취임으로, 시모야가와 토모스케가 제작에 복귀했다.[7] 2003년 오카야마 히로유키(베이스)가 공연 감독, 2014년 총감독으로 취임했다. 2015년 오리에 타다미치(바리톤)가 신 공연 감독, 2016년 총감독으로 취임했다.[19]
1981년 법인화 이후 2018년 12월까지 공연 횟수는 238회이다.[22] 외국인 아티스트 초빙, 신연출, 이탈리아 오페라 중심 프로그램 구성은 2020년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3. 2. 일본 오페라 협회
1981년(쇼와 56년) 3월 27일, "고액의 경비가 소요되는 오페라 공연을 경제적으로 안정시키자[13]"라는 목적으로 시모야가와 토모스케가 재단법인 일본 오페라 진흥회를 설립했다.[19] 같은 해 4월 1일, 후지와라 가극단과 일본 오페라 협회로부터 사업을 위임받아 사업을 시작했다.[19]4. 구성원
구분 | 역할 | 이름 |
---|---|---|
후지와라 가극단 | 초대 총감독 | 후지와라 요시에 |
2대 총감독 | 시모야가와 케이스케 | |
단원 | 미야케 하루에, 쿠와바라 에이코, 오카야마 히로유키, 오리에 타다미치 외 | |
일본 오페라 협회 | 총감독 | 오가 히로시, 코오리 아이코 |
단원 | 나카자와 케이, 하라다 시게오 외 | |
제작 | 시모야가와 토모스케 | |
연출 | 아오야마 케이오, 아와쿠니 야스히코, 아와쿠니 쥰 외 |
1981년 이후 이가라시 키요시, 오카야마 히로유키, 오리에 타다미치 등이 후지와라 가극단 총감독을 역임했으며, 아와쿠니 쥰 등 새로운 연출가들이 등장했다.[19]
4. 1. 후지와라 가극단
후지와라 가극단은 패전 후 반 년도 채 안 된 1946년(쇼와 21년) 1월, 제국 극장에서 『춘희』로 무대 공연을 재개했다. 같은 해 가을, GHQ에 의한 공직 추방으로 도쿄 음악학교 주임 교수직을 잃은 기노시타 타모츠(테너)가 가극단에 합류했다. 10년 넘게 모든 공연의 주역 테너를 후지와라 요시에가 맡아왔던 상황에서 벗어나 주역은 투 톱 체제가 되었지만, 후지와라가 출연하지 않으면 티켓 판매가 즉시 감소했다고 한다.1947년(쇼와 22년) 7월에는 탄호이저 공연을 열었다[4](전곡판은 일본 초연).
1950년(쇼와 25년)에는 도쿄 아카사카에 오케스트라 연습도 가능한 "가극 연구소"를 건설했다(미쓰이 타카쿠니의 자금 지원). 연구소에는 한때 고노에 히데마로의 ABC 교향악단도 연습장을 두었다.
1952년(쇼와 27년) NHK의 의뢰를 받아 외국 음악가 초빙을 위해 도미한 후지와라는 뉴욕 시티 오페라에서 오랫동안 일본에서 활동했던 조셉 로젠스톡을 방문했다. 후지와라는 동 가극장에서의 『나비 부인』 상연 수준이 낮아 분개하여 일본인 역을 모두 일본인 가수가 부르는 공연을 제안했다. 가극단 20명이 참가한 제1차 미국 공연[5]은 미야케 하루에(소프라노)의 나비 부인을 시작으로 하는 성악진은 일정 수준의 평가를 받았지만, 후지와라의 협상 능력 부족으로 가극단에 막대한 자금 부담을 안겨주었다(후지와라는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의 주선으로 일본흥업은행에서 100만엔(200만 엔이라고도 함)을 융통받아 나중에 탕감받았다고 한다). 1953년(쇼와 28년) 제2차 미국 공연 『나비 부인』[5]. 같은 해 후지와라 가극단 청년 그룹 제1회 공연 푸치니 『외투』(일본 초연, 이후 '청년 그룹'으로 1966년(쇼와 41년)까지 활동)[5]。1956년(쇼와 31년) 제3차 미국・캐나다 공연 『나비 부인』[5]。
1958년(쇼와 33년)에 이탈리아 유학에서 돌아온 소프라노 가수 쿠와바라 에이코의 주연으로 일본 최초로 원어로 『토스카』를 상연했다[6]。이후에도 후지와라 가극단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주축으로 삼았다[7]。1967년(쇼와 42년) 한국 공연 『카르멘』[5]。1969년(쇼와 44년) 5월의 『라 보엠』에서 아와쿠니 야스히코가 연출 조수를 맡았다[8] (이후 아와쿠니는 1970년(쇼와 45년) 도이).
1972년(쇼와 47년), 단의 공동 창립자이자 제1회 공연 이래의 협력자였던 베이스・바리톤 가수 시모야가와 케이스케가 후지와라 요시에의 위촉으로 2대 총감독과 단의 운영을 계승했다[7]。1976년(쇼와 51년) 3월 22일, 초대 총감독 후지와라 요시에가 사망했다. 1977년(쇼와 52년), 치마로사 『비밀 결혼』부터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아와쿠니 야스히코를 연출로 기용[5][9]。 아와쿠니는 1978년(쇼와 53년) 제6회 비너 발드 오페라상[10], 1980년(쇼와 55년) 예술선장 문부대신 신인상을 수상[11]。
1978년(쇼와 53년)부터 시모야가와 토모스케(시모야가와 케이스케의 아들)가 제작을 담당했다. 1980년(쇼와 55년) 3월 18일, 시모야가와 케이스케가 사망[12]。시모야가와 토모스케가 단체의 대표가 되었다[13]。1981년(쇼와 56년) 4월 1일, 시모야가와 토모스케가 설립한 재단법인 일본 오페라 진흥회에 사업을 위임했다. "후지와라 가극단"을 오페라 공연 사업 부문에서의 서양 오페라 부문의 명칭으로 하고, 단체는 소멸했다.
1958년(쇼와 33년) 성악가 오가 히로시[14]가 "교육 오페라 연구회"로 깃발을 올렸다[5][15]。 첫 공연은 1958년(쇼와 33년) 6월 25일 핫토리 타다시의 『테코나』(주연: 나카무라 쿠니코. 주최 "일본 오페라 협회" 명의)[16]。1960년(쇼와 35년)에 "일본 오페라 연구회"로 개칭[15]。이후에도 주최 명의는 "일본 오페라 연구회"와 "일본 오페라 협회"가 혼재했지만, 모두 주로 일본인 작곡가에 의한 일본어 오페라 창작과 실연에 힘썼다. 1970년(쇼와 45년)에 "일본 오페라 협회"로 개칭[15]。
스탭은 연목에 따라 일정하지 않고, 다수의 인물이 관여했으며, 작곡가에 의한 자작자연도 많았다.
작곡가 | 지휘자 | 연출가 | 무대 감독 | 가수 |
---|---|---|---|---|
1977년(쇼와 52년) 오가 히로시가 일본 오페라 협회 총감독 취임[19]。
미키 미노루의 『춘금초』, 단 이쿠마의 『저녁 해오라기』, 시미즈 오사무의 『수선사 이야기』를 반복 상연하여 일본 오페라의 대표작으로 정착시킨 점은 특기할 만하다. 그중에서도 『춘금초』는 초연(1975년(쇼와 50년) 11월)도 일본 오페라 협회였으며, 1976년(쇼와 51년) 예술제 주최 공연이기도 하다[20]。 또한 미즈노 슈코의 『천수 이야기』도 일본 오페라 협회가 초연(1979년(쇼와 54년) 3월)이다.
1981년(쇼와 56년) 4월 1일, 시모야가와 토모스케가 설립한 재단법인 일본 오페라 진흥회에 사업을 위임。「일본 오페라 협회」를 오페라 공연 사업 부문에서의 일본 오페라 부문의 명칭으로 하고, 단체는 소멸한다.
1981년(쇼와 56년) 4월 이후에도 1984년 (쇼와 59년)까지 시모야카와 토모스케가 제작을 담당했다. 1985년(쇼와 60년)에 총감독으로 이가라시 키요시가 취임[19]했다. 외국인 아티스트를 적극적으로 초빙하는 방침을 취했다. 1986년 (쇼와 61년) 베르디 『가면무도회』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자막을 사용했고, 이후 급속히 정착[5]했다.
1993년(헤이세이 5년) 10월부터 아와쿠니 야스히코의 아들인 아와쿠니 쥰이 연출 조수로 참여하여, 1997년(헤이세이 9년) 도니체티 『사랑의 묘약』으로 연출가 데뷔를 했다. 현재도 아와쿠니 쥰이 신 연출을 포함한 많은 연출을 담당하고 있다.
1999년 (헤이세이 11년) 이가라시 키요시의 신국립극장 예술감독 취임에 따라, 일본 오페라 진흥회 상임 이사[7]인 시모야카와 토모스케가 제작에 복귀했다. 2003년 (헤이세이 15년) 9월부터 베이스 성악가인 오카야마 히로유키가 공연 감독으로 취임했다. 2014년(헤이세이 26년)부터 오카야마가 총감독으로 취임했다. 2015년(헤이세이 17년) 4월부터 바리톤 성악가인 오리에 타다미치가 신 공연 감독으로 취임했고, 2016년(헤이세이 28년)에 총감독으로 취임했다[19].
1981년(쇼와 56년) 법인화 이후, 2018년(헤이세이 30년) 12월까지의 공연 횟수는 238회에 달한다[22]. 적극적인 외국인 아티스트 초빙과 신 연출, 이탈리아 오페라를 중심으로 한 프로그램 구성은 2020년(레이와 2년)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역대 단원(전 단원 포함, 현 단원은 외부 링크 참조)은 다음과 같다.
- 후지와라 요시에
- 아오야마 게이오
- 이토 카즈히로
- 우에모토 노리히사
- 오오타니 레이코
- 오오누키 유우코
- 오가사와라 카즈노리
- 오카야마 히로유키
- 오리에 타다미치
- 카와무라 아야
- 키타무라 쿄이치
- 쿠사부에 요시코
- 코지마 켄지[23]
- 사토 미에코
- 사노 나리히로
- 시모야가와 케이스케
- 스나카와 료코
- 세키 타네코
- 타카나미 레이코
- 츠카다 쿄코
- 로베르토 디 칸디도
- 나가토 미호
- 나카무라 요시코
- 나미오카 소이치로
- 난조 토시아키
- 노다 히로코
- 하야시 야스코
- 호리우치 야스오
- 미야케 하루에
- 미야모토 료헤이[24]
- 무라카미 토시아키
- 모로타 히로미
- 유리 아케미
- 요시타 아키라
- 와시타다 다이스케
- 옥사나 스테파뉴크
4. 2. 일본 오페라 협회
1981년 3월 27일, "고액의 경비가 소요되는 오페라 공연을 경제적으로 안정시키자[13]"라는 목적으로 시모야가와 토모스케가 재단법인 일본 오페라 진흥회를 설립했다.[19] 같은 해 4월 1일, 후지와라 가극단과 일본 오페라 협회로부터 사업을 위임받아 사업을 시작했다.[19]1981년 4월 이후에도 오가 히로시가 계속 총감독을 맡았다. 1984년 제39회 문화청 예술제 주최·하라 카즈코의 『축하 노래가 흐르는 밤에』를 공연했고, 1988년 10월에는 문화청 파견으로 폴란드 "바르샤바의 가을" 음악제에 이시이 칸의 『가사토 세이엔』으로 참가하여 첫 해외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1995년 제50회 기념 문화청 예술제 주최·이치야나기 토시의 『모모』 제작을 담당했다.
2012년도에는 이와타 타츠무네의 새로운 연출의 『천수 이야기』, 2013년도에는 아라이 마사토의 새로운 연출의 『춘금초』, 2015년도에는 미우라 야스히로의 새로운 연출의 『가사토 세이엔』 등, 일본 오페라 협회가 제작하여 정착시켜온 일본 오페라의 레퍼토리 작품을 새로운 연출로 상연하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2016년 4월부터 코오리 아이코가 일본 오페라 협회 총감독 보좌를 맡았으며, 2017년 4월부터 일본 오페라 협회 총감독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7월 31일, 전 총감독 오가 히로시가 사망했다.
1981년 법인화 이후, 2018년 3월까지의 공연 횟수는 82회에 달한다. 2020년 현재에도 "일본의 전통 문화에 뿌리를 둔 오페라의 창조와 보급"에 힘쓰고 있다.
5. 수상 경력
연도 | 상 이름 | 비고 |
---|---|---|
1984년 | 제35회 예술선장 문부대신상·음악 부문 | 재단법인 일본 오페라 진흥회 |
1985년 | 제13회 지로 오페라상 특별상 | 일본 오페라 협회 |
1986년 | 제16회 모빌 음악상·서양 음악 부문 | 후지와라 가극단 |
2000년 | 제9회 미쓰비시 신탁 음악상 | 후지와라 가극단 공연 『맥베스』 |
2015년 | 제13회 미쓰비시 UFJ 신탁 음악상 장려상 | 후지와라 가극단 공동 제작 공연 『랭스로의 여행』 |
6. 한국과의 관계
1967년, 후지와라 가극단은 한국에서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을 공연했다.[13] 이는 전후 한국과 일본 간 문화 교류의 초기 단계에서 이루어진 오페라 공연으로 주목할 만하다.
7. 평가
후지와라 가극단은 1934년 오페라 테너 후지와라 요시에가 창단한 일본의 대표적인 오페라단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주세페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만프레드 구를리트의 지휘 아래 400회 이상 공연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4]
후지와라 가극단은 서양 오페라를 일본에 소개하고 번역하는 데 힘썼을 뿐만 아니라, 일본 창작 오페라 발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일본 오페라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특히, 1946년 (쇼와 21년) 1월, 제국 극장에서 『춘희』를 통해 무대 공연을 재개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는 GHQ에 의한 공직 추방으로 도쿄 음악학교 주임 교수의 자리를 잃은 기노시타 타모츠가 가극단에 참가하여 주역 투톱 체제를 구축하였다. 1947년 (쇼와 22년) 7월에는 탄호이저 공연(전곡판은 일본 초연)을 열었다.[4]
또한, 1952년 (쇼와 27년)부터 미국, 1956년 (쇼와 31년) 미국・캐나다, 1967년 (쇼와 42년) 한국 등에서 해외 공연을 통해 국제 교류를 활발히 하며 일본 오페라의 위상을 높였다.[5]
1958년 (쇼와 33년)에는 이탈리아 유학에서 돌아온 소프라노 가수 쿠와바라 에이코의 주연으로 일본 최초로 원어로 『토스카』를 상연하는 등[6], 이탈리아 오페라를 중심으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며 일본 오페라의 발전을 이끌었다.[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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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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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藤原歌劇団公演《ラ・ボエー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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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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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益財団法人日本オペラ振興会 定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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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音楽大学オペラ情報センタ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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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嶋 健二(読み)コジマ ケンジ
https://kotobank.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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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本 良平(読み)ミヤモト リョウヘ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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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Opera Vol.11-郡 愛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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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益財団法人 日本オペラ振興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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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音楽大学オペラ情報センター
2020-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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