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 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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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 식가는 후지와라 후히토의 아들 후지와라노 우마카이를 시조로 하는 씨족이다. 쇼무 천황 치세에 정권을 주도했으나, 후지와라 히로쓰구의 난과 천연두 만연으로 인해 세력이 위축되었다. 이후 고켄 천황 시기에는 후지와라 난케, 홋케에 밀려났지만, 간무 천황 시대에 다시 중용되었다. 후지와라 오토무로, 후지와라 타비코 등 황후와 천황을 배출하며 헤이안 시대 초기의 번영을 이끌었으나, 사가 천황 이후 홋케의 후지와라 후유츠구에게 밀려 쇠퇴했다. 가마쿠라 시대까지 공경을 배출하며 명맥을 유지했으나, 결국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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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 식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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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정보 | |
가문명 | 후지와라 식가 |
가몬 | 늘어뜨린 등나무 (대표적인 가몬) |
가몬 명칭 | 늘어뜨린 등나무 (대표적인 가몬) ※ 각, 후지와라씨에 따라 다름. |
본성 | 후지와라 아손 |
가조 | 후지와라노 우마카이 |
종별 | 신별 (천신) |
출신지 | 야마토국 |
근거지 | 야마토국, 야마시로국 등 |
주요 인물 | 후지와라노 우마카이 후지와라노 모모카와 후지와라노 히로쓰구 후지와라노 오쓰구 후지와라노 다다부미 후지와라노 스케요 후지와라노 구스코 |
지류 | 해당사항 없음 |
2. 역사
우오나의 조상 우고는 나가야 왕 변 이후 참의로 승진하여 다른 형제들과 함께 쇼무 치세에서 정권을 주도했지만, 덴표 9년(737년) 천연두 만연으로 병사했다. 직후 다자이 소니로 좌천된 우고의 장남 히로쓰구는 덴표 12년(740년) 규슈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후지와라 히로쓰구의 난).
히로쓰구의 동생 요시츠구와 모모카와는 쇼토쿠 천황의 후계자로 고닌 천황을 옹립하여 도쿄·기비노 마키비를 대신해 정권의 중추로 나섰다. 이들은 각각 자신의 딸(오토무로, 타비코)을 황태자 야마베 친왕(후의 간무 천황)의 비로 삼는 후궁 정책을 펼쳤다. 이들 형제는 모두 간무 천황 즉위 전에 사망했지만, 오토무로는 황후가 되어 헤이제이·사가를 낳았고, 타비코는 준와 천황을 낳아 헤이안 초기 식가 번영의 초석을 다졌다.
간무 천황 시대에 타마로는 우다이진으로서 묘당의 수반을 맡았고, 타네츠구는 나가오카쿄 건설을 담당했다. 모모카와의 아들 오구시는 참의를 거쳐 사다이진까지 올랐다.
그러나 요시츠구 계가 단절되고, 야쿠코의 변으로 타네츠구의 아들들이 처벌되면서 식가는 점차 쇠퇴했다. 사가 천황의 신임을 받은 홋케의 후유츠구가 대두하면서 식가는 홋케에 압도되었다.
요시후사가 미나모토노 키요히메를 강가시키는 등 홋케가 권력을 강화하는 동안, 오구시는 장남보다 먼저 사망하는 등 식가는 유력한 인재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오구시는 준와, 닌묘 시대에 태각의 수반 자리를 유지했고, 요시노도 주나곤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요시노가 조와의 변에서 실각하고 오구시가 사망하면서 식가는 정치 중심에서 멀어졌다.
이후 타다후미, 사세 등이 등장했지만,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에는 유학으로 입신하는 가계만이 명맥을 유지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나오누시 계열에서 잠시 공경을 배출했지만, 카네토시를 마지막으로 식가의 공경 배출은 끊겼다. 엔도 씨와 이도 씨가 식가의 후예를 자칭했다.
2. 1. 나라 시대
조상 우고는 나가야 왕의 변 이후 참의로 승진하여 다른 형제들과 함께 쇼무 치세에서 정권을 주도했지만, 덴표 9년(737년)의 천연두 만연으로 병사하고 말았다. 게다가 직후 다자이 소니로 좌천된 우고의 장남 히로쓰구는 덴표 12년(740년) 규슈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패사하고 말았다(후지와라 히로쓰구의 난). 이 때문에 고켄 ~ 쇼토쿠 치세에 걸쳐 난케(도요나리·나카마로)나 홋케(나가테)가 뒤를 잇는 시기가 한동안 계속되었다.히로쓰구의 동생인 요시쓰구와 모모카와는 쇼토쿠 천황의 후계자로 고닌 천황을 옹립하는 데 성공하여 도쿄·기비노 마키비를 대신하여 정권의 중추로 나섰다. 또한, 그들은 각각 자신의 딸(오토무로·다비코)을 황태자 야마베 친왕(후의 간무 천황)의 비로 삼아 후궁 정책도 펼쳤다. 그들 형제는 모두 간무 천황의 즉위를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오토무로는 황후가 되어 헤이제이·사가 양 천황을, 다비코는 준와 천황을 낳아 헤이안 초기의 시케 번영의 초석을 다졌다. 간무조에서는 시케 일족이 중용되어, 우고의 4남 타마로는 우다이진이면서 묘당의 수반을 맡았고, 3남 기요나리의 아들인 다네쓰구는 나가오카쿄 조영 사업을 일임받는 등 했다.
2. 2. 헤이안 시대 초기
후지와라 우오나의 조상 우고는 나가야 왕의 변 이후 참의로 승진하여 다른 형제들과 함께 쇼무 천황 치세에서 정권을 주도했지만, 덴표 9년(737년) 천연두 만연으로 병사했다. 게다가 직후 다자이 소니로 좌천된 우고의 장남 히로쓰구는 덴표 12년(740년) 규슈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후지와라 히로쓰구의 난).히로쓰구의 동생인 요시츠구와 모모카와는 쇼토쿠 천황의 후계자로 고닌 천황을 옹립하여 도쿄·기비노 마키비를 대신해 정권의 중추로 나섰다. 이들은 각각 자신의 딸(오토무로, 타비코)을 황태자 야마베 친왕(후의 간무 천황)의 비로 삼는 후궁 정책을 펼쳤다. 이들 형제는 모두 간무 천황 즉위 전에 사망했지만, 오토무로는 황후가 되어 헤이제이·사가를 낳았고, 타비코는 준와 천황을 낳아 헤이안 초기 시케 번영의 초석을 다졌다.
2. 2. 1. 간무 천황 시대
후지와라 히로쓰구의 난 이후, 고켄 천황~쇼토쿠 천황 시대에는 난케(후지와라 도요나리, 후지와라 나카마로)와 홋케(후지와라 나가테)가 권력을 잡았다. 히로쓰구의 동생 후지와라 요시쓰구와 후지와라 모모카와는 고닌 천황을 옹립하여 도쿄, 기비노 마키비를 대신해 정권의 중심에 섰다. 이들은 딸들(후지와라 오토무로, 후지와라 다비코)을 간무 천황(야마베 친왕)의 비로 들여보내는 정책을 펼쳤다.간무 천황 즉위 후, 후지와라 시케 일족이 중용되었다. 우고의 4남 후지와라 다마로는 우다이진으로서 묘당의 수반을 맡았고, 3남 후지와라 기요나리의 아들 후지와라 다네쓰구는 나가오카쿄 건설을 담당했다.[2] 후지와라 모모카와의 아들이자 간무 천황의 의붓동생인 후지와라 오구시는 29세에 참의가 되어 헤이안쿄 조궁과 에조 정벌 중지를 건의했다.[2]
2. 2. 2. 쇠퇴
나가야 왕의 변 이후 다른 형제들과 함께 쇼무 치세에서 정권을 주도했던 우고는 덴표 9년(737년) 천연두 만연으로 병사하였다. 게다가 직후 다자이 소니로 좌천된 우고의 장남 히로쓰구는 규슈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패사하였다(후지와라 히로쓰구의 난). 이 때문에 고켄 ~ 쇼토쿠 치세에는 난케(토요나리·나카마로)나 홋케(나가테)가 권력을 이어받는 시기가 한동안 계속되었다.히로쓰구의 동생인 요시츠구와 모모카와는 쇼토쿠 천황의 후계자로 고닌 천황을 옹립하는 데 성공하여 도쿄·기비노 마키비를 대신하여 정권의 중추로 나섰다. 또한, 그들은 각각 자신의 딸(오토무로·타비코)을 황태자 야마베 친왕(후의 간무 천황)의 비로 삼아 후궁 정책도 펼쳤다.
모모카와의 아들이자 간무 천황의 의붓동생(누나인 타비코는 천황의 뇨고)이었던 오구시는 29세에 참의로 승진하여, 나가오카쿄 이후 건설된 헤이안쿄 조궁과 에조 정벌의 중지를 건의했다. 헤이조에서는 관찰사 제도 설치 등 정치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사가조를 거쳐 타비코를 어머니로 하는 준와 천황이 즉위하자 그 외척으로서 우다이진을 거쳐 사다이진에 이르렀다.
그러나 요시츠구의 외아들 타쿠미가 사고사하면서 헤이제이·사가 양 천황의 외척인 요시츠구계가 단절되었다. 사가조가 되자 타네츠구의 아들로 헤이 제이 천황의 쇼지로서 권세를 잡았던 야쿠코와 그의 형 나카나리가 반란을 꾀하다 단죄된 야쿠코의 변이 발생했다. 여기에 사가 천황·단린 황후의 신임을 받은 홋케의 후유츠구가 대두하면서 사가조 이후 시케는 점차 홋케에 압도되어 갔다.
후유츠구의 아들 요시후사는 사가 상황의 황녀 미나모토노 키요히메를 강가하는 등 아버지처럼 상황과 황태후에게 깊이 신임받았다. 반면 오구시는 장남 이에오보다 먼저 죽는 등, 시케는 이후 유력한 인재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오구시는 후유츠구 사후, 준와·닌묘 치세에 15년 이상 태각의 수반 자리를 유지했고, 사촌 조카 요시노도 지방관으로서 치적을 올려 주나곤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요시노는 쇼와노 변에서 실각했고, 직후 오구시가 사망하면서 이후 시케가 다시 정치 중추에 서는 일은 없어졌다.
이후 후지와라 스미토모의 난을 평정한 타다후미, 아코 사건에 관여한 사세 등을 배출했지만,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에는 유학으로 입신하는 가계로서 몇몇 가문이 혈통을 유지했을 뿐이다. 가마쿠라 시대 나오누시 계열인 나가미치(나오누시의 11대손)가 정원 원년(1232년) 종삼위에 서임되어 타다후미 이래 285년 만에 시케 출신 공경이 나왔다. 이후 아들 미츠카네·모토나가가 각각 겐겐 4년(1246년)·코안 6년(1283년)에 공경(종삼위)이 되었다. 모토나가 계통은 1대에 한정되어 공경에 서임되었지만, 미츠카네 계통은 카네토모, 이에토모, 아츠츠구(카네토모 양자)로 이어지며 공경을 배출했고, 카네토모는 오구시 이래로 정이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에토모의 아들 카네토시가 오안 6년(1373년) 종삼위가 되고 메이토쿠 원년(1390년) 사망한 것을 마지막으로 시케 출신 공경 배출은 끊어졌다. 시케는 도쇼 등을 남기지 못한 채 역사에서 사라졌다. 다만, 셋츠 와타나베 씨 중 하나인 엔도 씨와 야마토국 토호인 이도 씨는 시케의 후예를 자칭했다.
2. 3.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
후지와라 히로쓰구의 난 이후, 난케와 홋케에 밀려 쇠퇴했던 식가는 후지와라 요시츠구와 후지와라 모모카와가 고닌 천황 옹립에 성공하면서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섰다. 이들은 딸들을 간무 천황의 비로 보내는 후궁 정책을 펼쳤다. 오토무로는 황후가 되어 헤이제이, 사가를 낳았고, 타비코는 준와 천황을 낳아 식가 번영의 기반을 다졌다.[1]간무 천황 시대에는 식가 일족이 중용되었다. 타마로는 우다이진으로서 묘당의 수반을 맡았고, 타네츠구는 나가오카쿄 건설을 담당했다. 모모카와의 아들 오구시는 참의를 거쳐 사다이진까지 올랐다.[1]
그러나 요시츠구 계가 단절되고, 야쿠코의 변으로 타네츠구의 아들들이 처벌되면서 식가는 점차 쇠퇴했다. 사가 천황의 신임을 받은 홋케의 후유츠구가 대두하면서 식가는 홋케에 압도되었다.[1]
요시후사가 미나모토노 키요히메를 강가시키는 등 홋케가 권력을 강화하는 동안, 오구시는 장남보다 먼저 사망하는 등 식가는 유력한 인재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오구시는 준와, 닌묘 시대에 태각의 수반 자리를 유지했고, 요시노도 주나곤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요시노가 조와의 변에서 실각하고 오구시가 사망하면서 식가는 정치 중심에서 멀어졌다.[1]
이후 타다후미, 사세 등이 등장했지만,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에는 유학으로 입신하는 가계만이 명맥을 유지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나오누시 계열에서 잠시 공경을 배출했지만, 카네토시를 마지막으로 식가의 공경 배출은 끊겼다. 엔도 씨와 이도 씨가 식가의 후예를 자칭했다.[1]
3. 주요 인물
이름 | 출생-사망 | 가계 | 비고 |
---|---|---|---|
후지와라 우마카이 | ? - ? | 후지와라 후히토의 셋째 아들 | 시케(式家) 창립자 |
후지와라 히로쓰구 | ? - 740년 | 우마카이의 장남 | 후지와라 히로쓰구의 난을 일으켰으나 패사 |
후지와라 요시쓰구 | ? - ? | 우마카이의 차남 | 내대신.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난 진압에 공이 있음 |
후지와라 키요나리 | ? - ? | 우마카이의 셋째 아들 | |
후지와라 타마로 | ? - ? | 우마카이의 넷째 아들 | 우대신 |
후지와라 츠나테 | ? - 740년 | 우마카이의 다섯째 아들 | 형 히로쓰구와 함께 패사 |
후지와라 모모카와 | ? - ? | 우마카이의 여덟째 아들 | 고닌 시대의 권신 |
후지와라 쿠라시타마로 | ? - ? | 우마카이의 아홉째 아들 |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난 진압에 공이 있음 |
후지와라 오토무로 | ? - ? | 요시쓰구의 딸 | 간무 천황의 황후. 헤이제이 천황・사가 천황의 어머니 |
후지와라 타네츠구 | ? - ? | 키요나리의 장남 | 나가오카쿄 조궁사가 되었으나 암살당함 |
후지와라 나카나리 | ? - ? | 타네츠구의 차남 | 약코의 변에서 패사 |
후지와라 약코 | ? - ? | 타네츠구의 딸 | 헤이제이 천황의 총비. 약코의 변의 중심 인물 |
후지와라 오구시 | ? - ? | 모모카와의 장남 | 좌대신 |
후지와라 타비코 | ? - ? | 모모카와의 딸 | 간무 천황의 부인. 준와 천황의 어머니 |
후지와라 타이시 | ? - ? | 모모카와의 딸 | 증 헤이제이 천황의 황후 |
후지와라 나오누시 | ? - ? | 쿠라시타마로의 아들 | 약코의 남편 |
후지와라 요시노 | ? - ? | 쿠라시타마로의 손자 | 조와의 변에서 실각 |
후지와라 모토리와 | ? - ? | 타네츠구의 손자 | 신라와 내통한 혐의로 추포됨 |
후지와라 사세 | ? - ? | 타네츠구의 증손 | 유학. 아코 사건으로 유명 |
후지와라 타다후미 | ? - ? | 오구시의 증손 | 정동대장군 |
후지와라 나카후미 | ? - ? | 쿠라시타마로의 후예 | 가인 |
라이고 | ? - ? | 키요나리의 후예인 덴다이 종의 승려 | 원령 전설로 알려짐 |
후지와라 아키히라 | ? - ? | 쿠라시타마로의 후예 | 유학자, 한시인. 『혼초몬즈이』 편자. 『아키히라 왕래』, 『신원악기』의 작가 |
후지와라 아츠모토 | ? - ? | 아키히라의 아들 | 유학자, 한시인 |
후지와라 아츠미츠 | ? - ? | 아키히라의 아들 | 유학자, 한시인 |
메이센 | ? - ? | 아키히라의 아들 | 피리의 명수 |
4. 계보
- 후지와라 우마카이 - 후지와라 후히토의 셋째 아들. 시케(式家) 창립자이다.
- 후지와라 히로쓰구 - 우마카이의 장남. 후지와라 히로쓰구의 난을 일으켰으나 패사하였다.
- 후지와라 요시츠구 - 우마카이의 차남. 내대신.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난 진압에 공이 있었다.
- 후지와라 키요나리 - 우마카이의 셋째 아들.
- 후지와라 타마로 - 우마카이의 넷째 아들. 우대신.
- 후지와라 츠나테 - 우마카이의 다섯째 아들. 형 히로쓰구와 함께 패사하였다.
- 후지와라 모모카와 - 우마카이의 여덟째 아들. 고닌 시대의 권신이었다.
- 후지와라 쿠라시타마로 - 우마카이의 아홉째 아들.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난 진압에 공이 있었다.
- 후지와라 오토무로 - 요시츠구의 딸. 간무 천황의 황후. 헤이제이 천황・사가 천황의 어머니.[1]
- 후지와라 타네츠구 - 키요나리의 장남. 나가오카쿄 조궁사가 되었으나 암살당했다.
- 후지와라 나카나리 - 타네츠구의 차남. 약코의 변에서 패사하였다.
- 후지와라 야쿠코 - 타네츠구의 딸. 헤이제이 천황의 총비. 약코의 변의 중심 인물.[4]
- 후지와라 오구시 - 모모카와의 장남. 좌대신.
- 후지와라 타비코 - 모모카와의 딸. 간무 천황의 부인. 준와 천황의 어머니.[2]
- 후지와라 타이시 - 모모카와의 딸. 헤이제이 천황의 황후.[3]
- 후지와라 나오누시 - 쿠라시타마로의 아들. 야쿠코의 남편.
- 후지와라 요시노 - 쿠라시타마로의 손자. 조와의 변에서 실각하였다.
- 후지와라 모토리와 - 타네츠구의 손자. 신라와 내통한 혐의로 추포되었다.
- 후지와라 사세 - 타네츠구의 증손. 유학. 아코 사건으로 유명하다.
- 후지와라 타다후미 - 오구시의 증손. 정동대장군.
- 후지와라 나카후미 - 쿠라시타마로의 후예. 가인.
- 라이고 - 키요나리의 후예인 덴다이 종의 승려. 원령 전설로 알려져있다.
- 후지와라 아키히라 - 쿠라시타마로의 후예. 유학자, 한시인. 『혼초몬즈이』 편자. 『아키히라 왕래』, 『신원악기』의 작가.
- 후지와라 아츠모토 - 아키히라의 아들. 유학자, 한시인.
- 후지와라 아츠미츠 - 아키히라의 아들. 유학자, 한시인.
- 메이센 - 아키히라의 아들. 피리의 명수.
5. 평가
후지와라 식가는 나가야 왕의 변 이후 참의로 승진하여 쇼무 천황 치세에서 정권을 주도했던 조상 우고를 두었으나, 우고는 덴표 9년(737년) 천연두 만연으로 병사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우고의 장남 후지와라 히로쓰구는 다자이 소니로 좌천된 후 덴표 12년(740년) 규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사하였다(후지와라 히로쓰구의 난). 이로 인해 고켄 ~ 쇼토쿠 치세에는 난케(후지와라 토요나리, 후지와라 나카마로)나 홋케(후지와라 나가테)에 밀려 힘을 쓰지 못했다.
히로쓰구의 동생 후지와라 요시츠구와 후지와라 모모카와는 쇼토쿠 천황의 후계자로 고닌 천황을 옹립하여 도쿄, 기비노 마키비를 대신해 정권의 중심에 섰다. 그들은 각각 자신의 딸(후지와라 오토무로, 후지와라 타비코)을 황태자 야마베 친왕(후의 간무 천황)의 비로 삼는 후궁 정책을 펼쳤다. 두 형제는 간무 천황의 즉위는 보지 못하고 사망했지만, 후지와라 오토무로는 황후가 되어 헤이제이 천황, 사가 천황을 낳았고, 타비코는 준와 천황을 낳아 헤이안 시대 초기 시케 번영의 초석을 다졌다. 간무 천황 시대에는 시케 일족이 중용되어 우고의 4남 후지와라 타마로는 우다이진으로서 묘당의 수반을 맡았고, 3남 후지와라 키요나리의 아들 후지와라 타네츠구는 나가오카쿄 조영을 담당했다.
후지와라 모모카와의 아들이자 간무 천황의 의붓동생이었던 후지와라 오구시는 29세에 참의로 승진, 헤이안쿄 조궁과 에조 정벌 중지를 건의했다. 헤이제이 천황 시대에는 관찰사 제도 설치 등 정치 개혁에 참여했고, 사가 천황, 준와 천황 시대에는 외척으로서 사다이진까지 올랐다.
그러나 후지와라 요시츠구의 외아들 후지와라 타쿠미가 사고사하고, 후지와라 타네츠구의 아들 후지와라 야쿠코와 후지와라 나카나리가 야쿠코의 변으로 단죄되면서 시케는 점차 쇠퇴했다. 사가 천황이 홋케의 후지와라 후유츠구를 신임하면서 홋케에 밀려났다.
후지와라 요시후사가 미나모토노 키요히메를 강가시키는 등 황태후의 신임을 받은 반면, 오구시는 장남보다 먼저 사망하는 등 시케는 유력한 인재를 배출하지 못했다. 오구시는 닌묘 천황 시대까지 태각의 수반 자리를 유지했고, 사촌 조카 후지와라 요시노도 주나곤으로 승진했지만, 쇼와노 변으로 실각하고 오구시마저 사망하면서 시케는 정치 중심에서 멀어졌다.
이후 후지와라 스미토모의 난을 평정한 후지와라 타다후미, 아코 사건에 관여한 후지와라 사세 등이 나왔지만,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에는 유학으로 입신하는 가계 몇몇이 혈통을 유지했을 뿐이다. 가마쿠라 시대 후지와라 나오누시 계열 후지와라 나가미치가 종삼위에 서임되어 285년 만에 공경이 나왔다. 그 후에도 아들, 손자가 공경에 올랐고, 후지와라 카네토모는 정이위까지 올랐다. 그러나 후지와라 카네토시가 종삼위에 오른 것을 마지막으로 시케의 공경 배출은 끊겼고, 시케는 도조 등도 남기지 못한 채 역사에서 사라졌다. 다만 엔도 씨와 이도 씨는 시케의 후예를 자칭했다.
참조
[1]
문서
桓武天皇皇后。平城天皇・嵯峨天皇母。
[2]
문서
桓武天皇夫人。淳和天皇母。
[3]
문서
平城天皇妃。
[4]
문서
藤原縄主室。平城天皇尚侍。薬子の変の中心人物。
[5]
문서
桓武天皇宮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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