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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요리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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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헤이안 시대 후기의 귀족으로, 셋칸케의 기대주였으나 호겐의 난에서 패배하여 사망했다. 그는 섭정의 개혁을 옹호하며 강직한 성격으로 '악좌부'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정치 개혁을 추진했지만 주변의 반발과 고립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마사루코와 시메코의 입궐 경쟁에서 형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와 대립했고, 고노에 천황의 죽음 이후 실각했다. 호겐의 난에서 스토쿠 상황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하여 사망했으며, 사후에는 원령으로 여겨져 정1위 태정대신으로 추증되었다. 그는 학문에 능통했지만, 격정적인 성격과 남색 관계 등으로 평가가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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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요리나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그림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일본어 이름藤原 頼長 (ふじわら の よりなが)
출생1120년 5월
사망1156년 8월 1일
자녀후지와라노 모로나가 (아들)
후지와라노 가네나가 (아들)
후지와라노 마사루코 (양녀)
친척후지와라노 다다자네 (아버지)
후지와라노 다다미치 (형제)
신분
시대헤이안 시대 말기
관위종1위, 좌대신, 증정1위, 태정대신
주군스토쿠 상황
씨족후지와라 북가미도류
가족 관계
아버지후지와라노 다다자네
어머니후지와라노 모리자네의 딸
형제자매야스코
다다미치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여자
미쓰보네
배우자후지와라노 사치코 (도쿠다이지 사네요시의 딸)
미나모토노 모로토시의 딸
미나모토노 노부마사의 딸
자녀시게나가
가네나가
다카나가
노리나가
양녀: 마사루코
기타 정보
어릴적 이름쇼부와카
별명악좌부, 우지 좌대신
묘소교토부교토시가미교구이마데가와도리가라스마 히가시이리 아이코쿠지몬젠초의 쇼코쿠지

2. 생애

1120년에 태어난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격동적인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고 국토를 돌아다니며 매사냥과 사냥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고 썼는데, 글을 쓸 당시에도 이러한 원정의 상처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특히 중국 문학 및 유교 경전, 그리고 인도 논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고유의 작품은 거의 읽지 않았고, 훗날 일본어로 시를 한 편도 짓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아버지 타다자네의 총애를 받았다. 요리나가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구력사건
호안 원년 (1120년) 5월탄생
다이지 5년 (1130년)정월 3일: 동전상
다이지 6년 (1131년)정월 2일: 종4위하
조쇼 원년 (1132년)10월 7일: 정3위 (시라카와 아미타당 공양 · 행행의 상)
조쇼 2년 (1133년) 정월 2일종2위
조쇼 3년 (1134년)정월 5일: 정2위
조쇼 4년 (1135년) 2월 8일우근위대장 겸임
호엔 2년 (1136년)12월 9일: 내대신
호엔 5년 (1139년)8월 17일: 동궁부 겸임(황태자 · 데이닌 친왕)
호엔 6년 (1140년) (21세)2월 22일: 좌근위대장 사임
에이지 원년 (1141년) 12월 7일동궁부 사임(고노에 천황 즉위)
큐안 3년 (1147년) 3월 29일다치바나 시테이 겸대
큐안 4년 (1148년)12월 14일: 양어머니의 죽음으로 복해
큐안 5년 (1149년) 7월 28일좌대신. 종1위
큐안 6년 (1150년) 9월 26일도씨장자 겸대
큐안 7년 (1151년)정월 16일: 나이렌 선하
닌페이 3년 (1153년) 4월 11일병장 사퇴 상표
큐주 원년 (1154년) 12월 25일수행 병장 전과 같이 수여
큐주 2년 (1155년)4월 27일: 좌대신 · 내람 · 병장 사퇴 상표
큐주 3년 (1156년)2월 2일: 좌대신 유임 선지
안겐 3년 (1177년) 8월 3일정1위 · 태정대신 추증


2. 1. 셋칸케의 기대주

다이지 5년(1130년), 후지와라노 아쓰미쓰가 가져온 여러 이름 후보 가운데 무네타다가 "미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와 우지 공 (후지와라노 요리미치)의 함자를 하나씩 따자"고 제의하여 '요리나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원복 후 정5위하 관위를 얻어 시종, 고노에노쇼조, 이요노곤노카미를 거쳐 우콘노에노곤노주조가 되었다. 덴쇼 원년(1131년) 종3위에 오르고, 이듬해 산기를 거치지 않고 곤노주나곤으로 승진했다. 조쇼 2년(1133년) 도쿠다이지 사네요시의 딸 고시(幸子)와 혼인했다. 조쇼 3년(1134년) 곤노다이나곤이 되었고, 누이 야스코 (다카노인)가 도바 상황의 황후가 되면서 황후궁대부를 겸하게 되었다. 호엔 2년(1136년) 나이다이진 겸 우콘노에노다이쇼가 되었다. 호엔 5년(1139년) 동궁부 겸 사콘노에노다이쇼가 되었다. 규안 5년(1149년) 사다이진으로 승진했다.

2. 2. 마사루코(多子)・시메코(呈子)의 입궐 경쟁

시라카와 상황의 인세이(院政) 아래서 곤경에 처했던 후지와라 셋칸케는 도바인의 인세이가 시작되면서, 요리나가의 이복 누이 야스코(泰子)가 도바 상황의 황후가 되어 숨통이 트였다. 후사가 없었던 형 다다미치는 덴지(天治) 2년(1125년) 요리나가를 양자로 들였으나, 고지 2년(1143년)에 아들 모토미치(基実)가 태어나자 셋칸 지위를 자기 소생에게 물려주고자 아버지 다다자네(忠実) 및 요리나가와 대립하게 되었다.[9]

규안 6년(1150년) 정월, 고노에 천황의 원복(元服)을 요리나가가 주관하였고, 엿새 뒤에 요리나가의 양녀 마사루코(多子)가 입궐하여 뇨고(女御)가 되었다. 그러나 2월에 형 다다미치도 고레미치(藤原伊通)의 딸 시메코(呈子)를 양녀로 맞이했고, 도바인에게 "셋칸이 아닌 자의 딸은 황후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10] 시메코는 도바인의 총비 비후쿠몬인(美福門院)의 양녀이기도 했기에 다다미치는 비후쿠몬인과의 제휴로 셋칸 지위를 보장받고자 했던 것이다. 도바 법황은 마사루코를 황후, 시메코를 중궁으로 삼는 중재안을 제시했으나, 다다자네・요리나가 부자와 다다미치의 대립은 더욱 깊어졌다.

결국 다다자네는 셋칸케의 정저(正邸)・히가시산조도노(東三条殿)와 보물인 주키다이반(朱器台盤)을 압수해 씨장자(氏長者) 지위와 함께 요리나가에게 주고, 다다미치와는 의절했다. 이듬해 닌표 원년(1151년) 정월, 다다자네는 다다미치에게 양도했던 후지와라노 모로자네 · 모로미치(藤原師通) 부자의 일기 정본까지 압수해 요리나가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도바 법황은 다다미치를 간파쿠(関白)로 유임시키면서 요리나가에게는 나이란(内覧) 선지를 내려, 간파쿠와 나이란이 병립하는 이상 사태가 벌어졌다.[11][12]

2. 3. 집정과 고립

쇼토쿠 태자의 십칠조 헌법에 따라 천하를 발란반정(撥亂反正), 즉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는 것을 목표로 한[16] 요리나가는 집정 대신이 된 후 의욕적으로 정치 개혁에 착수했다. 오슈 후지와라 씨의 후지와라노 모토히라에게 장원 연공 증액을 요구하여 1153년에 관철시키는 등 강경한 정책을 추진했다.[7] 그러나 율령과 유교 윤리를 중시하고 현실 정치를 무시하는 요리나가의 정책은 주변의 반발을 샀다. 특히 인(院)의 근신(近臣)이었던 중・하급 귀족들의 반발을 초래해 고립되었고, 고노에 천황마저 요리나가를 꺼렸다.[17]

요리나가는 여러 사건을 일으켜 물의를 빚었다. 1151년 9월에는 도바 법황의 총신 후지와라 이에나리의 저택을 파괴했고,[7] 1152년에는 닌나지 경내에 게비이시를 보내 승려와 충돌했다.[7] 1153년 5월에는 이와시미즈 하치만구로 도망친 죄인을 강제로 끌어내 유혈 사태를 일으켰고,[7] 같은 해 6월에는 가미가모 신사 경내에서 고후쿠지 승려를 포박하면서 소란을 피웠다.[7] 홋쇼지 행차 때 주나곤 후지와라노 사네히라의 가마를 부수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요리나가의 기강 확립 의도도 있었지만, 사찰 세력과의 대립을 격화시켰다. 1154년 4월, 엔랴쿠지 승려들이 만산 저주 사건을 일으키면서 요리나가는 대립 세력의 분노를 샀고, 법황의 신뢰마저 잃게 되었다.[7]

1155년 7월 23일, 고노에 천황이 붕어하자, 요리나가는 아내의 상을 이유로 조정에 출사하지 못했다. 그 사이 고노에 천황의 죽음이 다다자네・요리나가의 저주 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나이란 지위마저 잃고 실각했다.[7] 이후 고노에 천황의 영혼이 무녀에게 빙의되어 저주 사실을 폭로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요리나가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18]

2. 4. 호겐의 난

호겐 원년(1156년) 7월 2일, 도바 법황이 사망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7월 5일, "스토쿠 상황과 좌부(左府, 후지와라노 요리나가)가 힘을 합쳐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뒤엎으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수도 안의 무사들에 대한 단속이 실시되었다.[27]

도바 법황의 초칠일인 7월 8일, 후지와라노 다다자네・요리나가의 장원에서 군병 징발을 금지하는 고시라카와 천황의 윤지(綸旨)가 내려졌다. 이와 동시에 구란도(蔵人)・다카시나노 도시나리(高階俊成)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 휘하 병사들이 히가시산조도노를 몰관했다. 이는 모반죄인에게 적용하는 재산 몰수 형벌로, 요리나가를 국가를 뒤엎으려 한 모반자로 간주한 것이었다.

셋칸케의 씨장자가 하루아침에 모반자로 전락하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셋칸케의 가사(家司)였던 다이라노 노부노리(平信範)는 자신의 일기 《효한키(兵範記)》에서 "차마 붓으로 일일이 다 적지도 못하겠다"며 한탄했다.

모반자로 몰린 요리나가는 군사 행동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스토쿠 상황을 끌어들였다. 시라카와기타도노(白河北殿)에는 상황 측근 귀족들과 다이라노 이에히로(平家弘), 미나모토노 다메요시(源為義), 다이라노 다다마사(平忠正) 등 무사들이 결집했으나, 그 전력은 셋칸케의 사병 집단에 한정되어 매우 약소했다. 군사 회의에서 미나모토노 다메토모(源為朝)가 고시라카와 천황 측 거점인 다카마쓰도노(高松殿) 야간 기습을 주장했으나, 요리나가는 고후쿠지 승병 등 야마토국(大和) 원군을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고시라카와 천황 측은 무사를 동원해 시라카와기타도노를 기습 공격했고, 전투는 천황 측의 승리로 끝났다. 요리나가는 탈출 과정에서 미나모토노 시게사다(源重貞)가 쏜 화살에 목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는 나라(奈良)로 가서 아버지 후지와라노 다다자네를 만나려 했으나 거절당하고, 결국 7월 14일 배 위에서 절명(또는 자결)했다. 향년 37세였다.[19][20]

요리나가의 유해는 한냐노(般若野)에 묻혔으나, 신제이(信西)의 명으로 파헤쳐져 검시당하는 치욕을 당했다. 요리나가의 아들들은 유배되었고, 대부분 유배지에서 죽었으나, 유일하게 살아남은 후지와라노 모로나가(師長)는 훗날 태정대신(太政大臣)까지 올랐다가 다시 유배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호겐의 난 이후 요리나가는 오랫동안 '조정과 나라를 뒤엎으려 한 죄인'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안겐(安元) 3년(1177년) 잇따른 대사건으로 인해 그의 원령을 달래기 위해 정1위 태정대신이 추증되었다.

3. 인물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 다다자네의 명을 따르지 않고 말을 달리며 산과 들을 돌아다녔지만, 낙마 사고로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은 후 마음을 고쳐 학문에 정진했다.[28] 조카 지엔은 《구칸쇼》에서 요리나가를 "일본 제일의 대학자[23], 화한(和漢)의 재주를 두루 쌓은 자"라고 평가할 정도로 중국과 일본의 방대한 서적을 섭렵했다. 1142년 10월 니이나메노마쓰리(大嘗祭) 때에는 의식 관련 조사를 밤새워 진행하고, 의례가 끝난 뒤에도 열흘 간에 걸쳐 그 방대한 식전 행사의 내용을 기록하는 등, 사무 능력도 뛰어났다.

유학을 좋아하고 누구나 인정하는 박식한 사람이었으나, 의외로 와카(和歌)와 한시(漢詩)에는 서툴렀다고 한다. 군담소설 《호겐 이야기》에는 와카를 지어보라는 법황의 명에 "시가 같은 것은 취미로 즐길거리일 뿐이지, 조정의 정치에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라며 거절했다는 기록이 있다. 요리나가가 남긴 일기 《다이키(台記)》에는, 국화주를 즐기는 귀족들 사이에서 "나는 딱히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마시지 않았다거나, 일식이 일어나자 "일식은 기상현상일 뿐 두려울 게 없다"며 태연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성격이 격렬하고 타인에게 엄격하여 '속이 검고 용서가 없는 빡빡한 인간'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고, '악좌부'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여기서 '악'은 현대 일본어의 '사악하다'는 의미보다는 성질, 능력, 행동 등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데서 오는 공포와 경외의 표현에 가깝다.[25] 태정관(太政官) 관인을 죽인 범인이 사면되자 자신의 하인(이자 남색 상대) 하타노 기미하루(秦公春)를 시켜 범인을 죽이게 하고, 이를 '하늘을 대신해 벌을 주었다'고 일기에 기록하는 등 사적인 복수에도 적극적이었다.[29]

사생활에서는 남색을 즐겼다는 사실을 일기에 기록했는데, 일본 사학자 도노 하루유키(東野治之)와 고미 후미히코(五味文彦)의 연구에 따르면, 요리나가의 남색 상대로는 하인 하타노 기미하루(秦公春) ・ 하타노 기미토(秦兼任) 외에도 후지와라노 다다마사(藤原忠雅) ・ 후지와라노 다메미치(藤原為通) ・ 후지와라노 기미요시(藤原公能) ・ 후지와라노 다카스에(藤原隆季) ・ 후지와라노 이에아키라(藤原家明) ・ 후지와라노 나리치카(藤原成親) ・ 미나모토노 나리마사(源成雅), 무사 미나모토노 요시카타(源義賢) 등이 있었다. 고미 후미히코는 이들 중 네 명이 인(院)의 근신으로 권세를 떨치던 후지와라노 이에나리의 친족이라고 지적한다.

후지와라노 다다미치에게서 앵무새공작(孔雀)을 선물 받았을 때, 사람의 말을 하는 앵무새를 신기하게 여겨 관찰하고 "이 앵무새는 혀가 사람처럼 동그랗게 되어 있어서 사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듯한데, 중국에서 건너왔으면 중국말을 해야 할 것을 일본말을 하고 있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고 일기에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헤이안 시대 일본의 앵무새 관찰 기록으로서 진귀한 사료로 꼽힌다.

4. 평가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뛰어난 학식과 개혁 의지를 가진 정치가였다. 17세에 우대신(右大臣), 1150년에는 좌대신(左大臣)에 오르는 등 빠르게 승진했다. 요리나가는 섭정 정치의 옹호자였으며, 인세이(院政) 시대의 '새로운 인물'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섭정 정치의 개혁 필요성을 인식하고, 재임 기간 동안 다양한 정치 개혁을 시행했다. 예를 들어, 좌대신 재직 시절에는 폐지되었던 궁정 관행과 의식을 검토하고, 관리들의 기강 해이를 바로잡고자 노력했다.[3]

그러나 요리나가는 지나치게 강직하고 급진적인 성격으로 인해 '악좌부(悪左府), 즉 '사악한 좌대신'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구칸쇼(愚管抄)는 그를 일본 최고의 학자라고 칭송하면서도, 성급한 기질을 지적했다. 일설에는 그가 일본 문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일본인의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의 곧은 성격과 태도는 당시 헤이안 귀족 사회의 유유자적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3]

1155년 고노에 천황(近衛天皇)의 죽음 이후 벌어진 왕위 계승 분쟁에서 요리나가는 후지와라노 타다미치(藤原忠通)와 대립했다. 결국 고시라카와 천황(後白河天皇)이 즉위하고, 요리나가는 자신의 학문적 지위를 인정받아 태자의 개인 교습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요리나가는 스토쿠(스토쿠 천황) 상황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미나모토(源氏)와 타이라(平氏)의 지원을 받은 고시라카와 천황 측에 패배했고, 요리나가는 전투 중 화살에 맞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3]

요리나가의 죽음은 섭관 정치의 몰락과 무사 정권의 등장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의 개혁 정치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당시 경직된 귀족 사회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5. 가계

아버지후지와라노 다다자네
어머니후지와라노 모리자네의 딸
아내후지와라노 사치코 (도쿠다이지 사네요시의 딸)
아내미나모토노 모로토시의 딸
아내미나모토노 노부마사의 딸
양녀후지와라노 타시 (1140-1202) - 고노에, 니조 두 천황의 황후, 도쿠다이지 킨요시의 딸


참조

[1] 웹사이트 Historiographical Institute The University of Tokyo https://www.hi.u-tok[...] 2020-08-12
[2] 웹사이트 2019 Kambun Workshop : The Taiki of Fujiwara no Yorinaga http://www.uscppjs.o[...] 2020-08-12
[3] 서적 The Economic Aspects of the History of the Civilization of Japan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04
[4] 웹사이트 Fujiwara no Kin'yoshi • A History of Japan - 日本歴史 https://historyofjap[...] 2021-09-26
[5] 간행물 Why Did Saigyo Become a Monk? An Archeology of the Reception of Saigyo's Shukke https://scholarsarch[...] 2010-10-01
[6]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7] 문서 『中右記目録』天治2年4月13日条
[8] 문서 『台記』12月9日条
[9] 서적 保元・平治の乱と平氏の栄華 清文堂出版
[10] 문서 『台記』2月11日条
[11] 문서 『宇槐記抄』久安7年正月10日条
[12] 간행물 中世前期の摂関家と天皇 日本史研究
[13] 문서 『台記』仁平4年6月20日条
[14] 문서 『[[本朝世紀]]』6月3日条・『[[宇槐記抄]]』仁平3年6月8日・21日条
[15] 문서 院政期の大学寮と学問状況
[16] 문서 『[[春秋公羊伝]]』哀公14年
[17] 문서 『宇槐記抄』10月1日条
[18] 문서 天狗説話の展開――『愛宕』と『是害房』 http://publications.[...]
[19] 문서 頼長の負傷については、主要な武将に戦死者がいないことから不慮の突発事とする説([[河内祥輔]])、新手の軍勢が投入され放火戦術まで採られていることから激しい戦闘を裏付けるものとする説([[元木泰雄]])がある。
[20] 문서 [[興福寺]]の僧・玄顕による朝廷への申告では、母方の叔父で興福寺にいた[[千覚]]の房に担ぎ込まれ死去したという。
[21] 간행물 藤原師長の政治史的位置-頼長流の復権と貴族社会-
[22] 문서 『台記』天養2年6月7日条
[23] 문서 ここで言う「学生」は、現代における[[在籍者 (学習者)|学生]]とは異なり、学者という意味である。
[24] 간행물 公開講演 因明研究の現状と課題 http://id.nii.ac.jp/[...] 大谷大学佛教学会
[25] 문서 「[[僧兵|悪僧]]」「[[悪党]]」の項も参照されたい。
[26] 서적 中世の家と性
[27] 문서 후지와라 씨의 수호신으로 모셔졌던 신이다.
[28] 문서 《다이키》 고지 원년(1142년) 12월 30일조
[29] 문서 《다이키》 규안 원년 12월 17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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