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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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 7세는 1120년에 태어나 1180년에 사망한 프랑스 왕으로, 초기에는 성직자가 될 예정이었으나 형의 죽음으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그는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했으나, 제2차 십자군 원정 실패와 성격 차이로 인해 결혼이 무효화되었고, 헨리 2세와의 갈등을 겪었다. 루이 7세는 헨리 2세의 아들들의 반란을 지원하며 앙주 제국을 견제했지만, 군사적으로는 헨리 2세에게 자주 패배했다. 그는 파리를 프랑스의 수도로 발전시켰으며,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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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7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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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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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프랑크인의 왕 |
통치 기간 | 1137년 8월 1일 – 1180년 9월 18일 |
대관식 | 랭스, 1131년 10월 25일, 부르주, 1137년 12월 25일 |
이전 통치자 | 루이 6세 |
다음 통치자 | 필리프 2세 |
출생일 | 1120년 |
사망일 | 1180년 9월 18일 (59–60세) |
사망 장소 | 파리 |
매장 장소 | 바르보 수도원, 이후 (1817년) 생드니 대성당 |
왕조 | 카페 왕조 |
아버지 | 루이 6세 |
어머니 | 아델라이드 드 모리엔 |
결혼과 자녀 | |
배우자 |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1137년 7월 25일 결혼, 1152년 3월 21일 이혼) 콘스탄사 데 카스티야 (1154년 결혼, 1160년 10월 4일 사망) 아델 드 샹파뉴 (1160년 10월 18일 결혼) |
자녀 | 마리, 샹파뉴 백작부인 알리스 드 프랑스 마르그리트, 잉글랜드와 헝가리의 왕비 알리스, 벡생 여백작 필리프 2세, 프랑스 왕 아녜스, 비잔티움 황후 |
2. 초기 생애와 교육
루이는 1120년에 프랑스의 루이 6세와 모리엔의 아델라이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성직자가 될 예정으로 교육받아 학식이 풍부하고 매우 독실했으나, 1131년 형 필리프가 사고로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교황 인노첸시오 2세가 랭스 대성당에서 루이에게 기름을 붓고 왕관을 씌웠다. 루이는 유년 시절 대부분을 생드니에서 보냈으며, 쉬제 수도원장과 우정을 쌓았다. 쉬제는 훗날 루이 7세의 조언자가 되었다.
루이 7세는 말수가 적고 독서와 사색을 즐기는 아이였으며, 수도원에서 길러진 진지하고 독실한 성격은 평생 변하지 않았다. 에레노르와 결혼했을 당시에는 여성과의 교제 방법도 몰랐고, 결혼 후에도 성을 꺼려 부부 관계를 드물게 했으며, 기도를 아내보다 우선시하여 에레노르를 실망시켰다. 그러나 용감한 면도 보여 결혼 직후 에레노르의 권유로 탈몽생틸레르를 방문했을 때, 탈몽 영주 기욤 드 루제의 부대의 납치 시도를 받고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물리치고 에레노르를 기쁘게 했다.
2. 1. 출생과 가문
루이 7세는 1120년에 프랑스의 루이 6세와 모리엔의 아델라이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루이는 성직자가 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학식이 풍부하고 매우 독실했다. 그러나 1131년 그의 형 필리프가 사고로 사망하면서 루이는 예기치 않게 프랑스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131년 10월, 교황 인노첸시오 2세가 랭스 대성당에서 루이에게 기름을 붓고 왕관을 씌웠다. 루이는 유년 시절 대부분을 생드니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아버지의 조언자이자 훗날 루이의 재위 초기에도 그를 섬긴 쉬제 수도원장과 우정을 쌓았다.2. 2. 성직자 교육과 왕위 계승
루이 7세는 1120년에 프랑스의 루이 6세와 모리엔의 아델라이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루이는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그 결과 학식이 풍부하고 매우 독실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131년 그의 형 필리프가 사고로 사망하면서 루이는 예기치 않게 프랑스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1131년 10월, 루이 7세는 교황 인노첸시오 2세에 의해 랭스 대성당에서 기름 부음을 받고 왕관을 받았다. 그는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생드니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아버지의 조언자이자 훗날 루이 7세의 조언자가 된 쉬제 수도원장과 우정을 쌓았다.
어린 시절부터 루이 7세는 말수가 적고 독서와 사색을 즐기는 아이였다. 수도원에서 길러진 그의 진지하고 독실한 성격은 평생 변하지 않았다.
3. 통치 초기
루이 7세는 즉위 초기에 왕권을 활발하고 열정적으로 행사했다. 부르주아들이 코뮌을 조직하려던 오를레앙과 푸아티에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다. 그러나 부르주 대주교 자리가 비면서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와 격렬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루이 7세는 교황이 지지하는 피에르 드 라 샤트르 대신 자신의 측근인 카드르크를 대주교 후보로 내세웠고, 자신이 살아있는 한 피에르가 부르주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이에 교황은 루이 7세에게 파문을 내렸다.
이후 루이 7세는 테오발드 2세 드 샹파뉴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프랑스 왕실 집사인 라울 1세 드 베르망두아가 테오발드 2세의 여동생과 이혼하고 왕비의 여동생인 페트로닐라 드 아키텐과 결혼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샹파뉴는 부르주 분쟁에서 교황 편을 들었고, 2년간(1142~1144년) 이어진 전쟁은 왕실 군대가 샹파뉴를 점령하면서 끝났다. 루이 7세는 비트리앙페르토아 공격과 방화에 직접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교회에 피신한 1,500여 명이 화염 속에서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교회 당국은 루이 7세를 비난했고, 결국 루이 7세는 샹파뉴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테오발드에게 돌려주었으며, 피에르 드 라 샤트르를 부르주 대주교로 받아들였다.
1141년에는 툴루즈 원정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1135년부터 잉글랜드 왕국에서 발생한 내전(무정부 시대)에 개입하여, 잉글랜드 왕 스티븐을 지지하고 아들 우스타슈와 1138년 여동생 콩스탕스 드 프랑스를 약혼시켰다(1140년 결혼). 1141년에는 스티븐의 노르망디 공 지위를 인정했으나, 1144년 마틸다의 남편 제프루아 4세가 노르망디를 점령하자, 제프루아 4세의 노르망디 영유를 인정했다.
3. 1.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의 결혼

아키텐 공작 윌리엄 10세가 사망하자, 루이 6세는 1137년 7월 25일 자신의 아들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윌리엄 10세의 영토 상속녀)의 결혼을 신속하게 추진했다. 이를 통해 루이 6세는 아키텐 공국의 광대한 영토를 프랑스 왕실 소유지에 추가하려 했다. 1137년 8월 1일, 결혼 직후 루이 6세가 사망하면서 루이 7세는 왕위에 올랐다. 수도승 같은 루이 7세와 활기찬 엘레오노르의 결합은 실패할 운명이었다. 엘레오노르는 왕과 결혼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수도승과 결혼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루이 7세가 자란 일드프랑스 북부 궁정의 차갑고 내성적인 문화와 엘레오노르가 익숙한 아키텐의 풍부하고 자유분방한 궁정 생활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1120년에 루이 6세의 차남으로 태어나 성직자가 되도록 교육받았으나, 형인 필리프가 1131년에 급사함에 따라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당시 프랑스 왕실 카페 왕조는 아직 왕권이 굳건하지 못하여 직접적인 지배는 왕령에만 국한되었던 반면, 아키텐 공작 (푸아티에 가문 또는 라눌프 가문)은 광대한 영토와 더불어 수많은 유력 귀족들을 가신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1137년에 사망한 아키텐 공작 기욤 10세는 유언으로 딸인 알리에노르 다키텐의 후견을 루이 6세에게 맡겼는데, 루이 6세는 그녀의 남편으로 자신의 아들인 루이 왕세자를 선택하여, 혼인을 통해 아키텐을 손에 넣어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1137년 6월 18일, 루이 왕세자는 십자군 원정에 필적하는 규모의 행렬을 이끌고 보르도로 향했다. 그의 외숙부인 베르망두아 백작라울 1세, 블루아 백작 겸 샹파뉴 백작티보 4세, 생드니 대성당의 수도원장인 슈제르가 그를 따랐고, 루이 6세는 젊은 왕자에게 왕세자로서의 처신에 대해 세세한 주의를 주었으며, 슈제르를 통해 알리에노르와의 교제 방법을 가르치려 했다.
7월 1일에 왕세자 일행은 아키텐 영내에 도착했다. 11일, 보르도에 도착한 루이 왕세자와 대면한 알리에노르는 그의 어딘가 부족한 모습에 실망했지만, 정략에 의해 인생이 급변한 점에서 루이에게 공감했다. 그러나 아키텐 공작가에 비해 카페 왕조의 역사는 짧았고, 아키텐 공작령이 훨씬 풍요롭고 광대했기에, 알리에노르는 속으로 루이를 얕잡아 보았다.
25일, 보르도의 생탕드레 대성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이어진 대연회에는 1000명이나 초대되어 수일간 성대하게 열렸다. 8월 1일, 알리에노르와 루이 왕세자가 푸아티에에 도착한 그날, 루이 6세가 위독해졌기 때문에, 왕세자 부부는 파리로 급히 가서 루이 6세의 장례를 치르고 대관식도 거행했다. 이렇게 부부는 결혼과 거의 동시에 루이 7세 국왕과 알리에노르 왕비가 되었고, 루이 7세는 단독으로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4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알리에노르는 15세에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남프랑스 아키텐의 여영주로 자란 명랑한 알리에노르와 수도원에서 자라 매우 진지하고 독실한 루이 7세는 성격이 맞지 않았다. 알리에노르는 "왕과 결혼했다고 생각했더니, 승려였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루이 7세의 온화한 성격 때문에 불화는 표면화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마리, 알릭스의 두 딸이 태어났지만, 아들을 낳지는 못했다.
3. 2. 왕권 강화와 분쟁
루이 7세는 즉위 초부터 왕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했다. 오를레앙과 푸아티에에서 코뮌을 조직하려던 부르주아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러나 부르주 대주교구의 공석을 두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와 갈등을 빚었다. 루이 7세는 교황의 후보 피에르 드 라 샤트르 대신 자신의 측근인 카드르크를 지지했고, 교황은 이에 파문으로 대응했다.이후 루이 7세는 테오발드 2세 드 샹파뉴와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 왕실 집사인 라울 1세 드 베르망두아가 테오발드 2세의 여동생과 이혼하고, 왕비의 여동생인 페트로닐라 드 아키텐과 결혼하도록 허락한 것이 원인이었다. 샹파뉴는 부르주 분쟁에서 교황 편을 들었고, 2년간(1142~1144년)의 전쟁은 왕실 군대가 샹파뉴를 점령하면서 끝났다. 루이 7세는 비트리앙페르토아 공격과 방화에 직접 참여했고, 이 과정에서 교회에 피신한 1,500여 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교회 당국의 비난을 받은 루이 7세는 샹파뉴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피에르 드 라 샤트르를 부르주 대주교로 받아들였다.
1141년 툴루즈 원정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루이 7세는 여동생 페트로니유와 기혼자였던 라울 1세를 결혼시키기 위해 성직자들을 동원하여 라울 1세와 첫 번째 아내를 이혼시켰다. 이는 엘레오노르의 오빠 티보 4세의 분노를 사 라울 1세와의 대립으로 이어졌고, 교회와 왕의 서임권 투쟁도 발생했다. 루이 7세는 부르주 대주교에 자신의 측근을 임명하려 했으나 로마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가 반대하여, 프랑스에 성무 정지 명령이 내려졌다.
1143년 루이 7세는 페트로니유와 라울 1세의 결혼에 반대하며 피에르 드 라 샤틀을 숨겨준 티보 4세를 공격하고자 비트리앙페르토아를 방화했다. 이 불길이 교회로 번져 피난민 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1135년부터 잉글랜드 왕국에서 발생한 내전(무정부 시대)에 개입하여, 잉글랜드 왕 스티븐을 지지하고 아들 우스타슈와 1138년 여동생 콩스탕스 드 프랑스를 약혼시켰다(1140년 결혼). 1141년에는 스티븐의 노르망디 공 지위를 인정했으나, 1144년 마틸다의 남편 제프루아 4세가 노르망디를 점령하자, 제프루아 4세의 노르망디 영유를 인정했다.
4. 제2차 십자군
1145년 크리스마스에 부르주에서 십자군을 일으킬 의지를 선언한 루이 7세는, 1146년 부활절 베젤레이에서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의 설교로 십자군 참여 열기를 더했다. 1147년 6월, 루이 7세와 왕비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는 제2차 십자군 원정을 위해 생드니 대성당을 출발, 육로로 시리아를 향했다. 메츠를 거쳐 헝가리 왕국에 도착하여 헝가리의 게자 2세와 독일의 콘라드 3세의 환대를 받았으며, 게자 2세는 루이 7세에게 아들 이슈트반의 대부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이후 프랑스와 헝가리는 오랫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루이 7세는 마누엘 1세 황제의 환대를 받았으나, 십자군 병사들과 현지인들 간의 충돌, 자금 부족, 마누엘 1세의 셀주크 왕조 내통 의혹 등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마누엘 1세에게서 일부 보급품을 받은 후, 프랑스 십자군은 콘라드 3세의 군대와 합류하여 로파디움에서 재편성될 때까지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1148년 1월 6일, 피시디아 협곡에서 셀주크 군대의 기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루이 7세는 카드무스 산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나, 많은 병사를 잃었다. 역사학자 오도 드 듀일에 따르면, 루이 7세는 왕실 근위대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무뿌리를 잡고 산비탈을 오르며 흉갑으로 화살을 막고 칼로 적을 베는 등 용맹을 떨쳤다고 한다.
3월 19일, 안탈리아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루이 7세는 왕비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의 삼촌인 안티오키아 공 레몽의 환대를 받았다. 엘레오노르는 레몽과 함께 알레포와 카이사레아 탈환을 주장했으나, 루이 7세는 예루살렘으로의 진군을 우선시하여 엘레오노르를 구금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이후 루이 7세는 콘라드 3세, 예루살렘의 볼드윈 3세와 연합하여 다마스쿠스를 포위했으나, 나흘 만에 작전이 중단되는 재앙을 맞았다. 1149년 부활절 이후 성지를 떠나기로 결정한 루이 7세는 아크레에서 출발하여 이탈리아를 통해 프랑스로 돌아왔고, 시칠리아의 로제르 2세와 교황 우르바노 3세를 방문한 후, 11월 파리에 도착했다.
4. 1. 십자군 원정 준비
루이 7세는 아키텐 공작 윌리엄 10세가 사망하자 그의 딸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과 1137년에 결혼하여 아키텐 공국의 광활한 영토를 프랑스에 추가하려 했다. 그러나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북부 일드프랑스의 궁정 문화와 아키텐의 자유분방한 궁정 생활의 차이, 그리고 종교적인 성격 차이 때문이었다. 둘 사이에는 마리와 알릭스 두 딸이 있었다.루이 7세는 즉위 초 오를레앙과 푸아티에에서 코뮌을 조직하려는 부르주아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부르주 대주교구 공석 문제로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와 갈등을 빚었고, 왕은 교황의 후보 피에르 드 라 샤트르에 맞서 자신의 후보를 지지하며 파문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루이 7세는 라울 1세 드 베르망두아의 이혼과 페트로닐라 드 아키텐과의 결혼을 허락하면서 테오발드 2세 드 샹파뉴와 전쟁을 벌였다. 2년간의 전쟁(1142~1144년) 동안 샹파뉴는 점령되었고, 루이 7세는 비트리앙페르토아 마을 공격에 직접 참여하여 많은 사람이 사망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이에 대한 속죄로 루이 7세는 1145년 크리스마스에 제2차 십자군 참전을 선언했고,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는 1146년 부활절 베젤레이에서 설교하여 십자군 참여를 독려했다.
4. 2. 원정과 실패
루이 7세는 1145년 크리스마스에 부르주에서 십자군을 일으킬 의지를 선언했고,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는 1146년 부활절 베젤레이에서 설교하여 십자군의 인기를 확보했다. 1147년 6월, 제2차 십자군에 참가하겠다는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루이 7세와 그의 왕비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는 생드니 대성당에서 출발하여 육로로 시리아로 가는 길에 메츠에 먼저 들렀다. 곧 그들은 헝가리 왕국에 도착했고, 이미 독일의 콘라드 3세 왕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헝가리의 게자 2세 왕에게 환영받았다. 루이 7세와의 좋은 관계 덕분에 게자 2세는 프랑스 왕에게 아들 이슈트반의 대부가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프랑스와 헝가리 왕국 간의 관계는 이후 오랫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게자 2세로부터 보급품을 받은 후 군대는 콘스탄티노플로 행군을 계속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마누엘 1세 황제에게 환영받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루이 7세는 검소한 생활 습관을 고수하며 지냈지만, 아리에노르는 화려한 궁정 문화에 매료되어 프랑스와는 다른 개방적인 분위기와 마누엘 1세의 매력에 이끌렸다. 그러나 십자군 병사들과 현지인들 사이에서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체류 중 군자금이 바닥난 루이 7세는 본국을 지키는 수저르에게 자금 조달을 요청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마누엘 1세가 셀주크 왕조와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마저 루이 7세의 불안을 증폭시켰다. 마누엘을 만나 일부 보급품을 받은 후 프랑스 십자군은 콘라드 3세의 군대에 합류했다. 루이는 콘라드 3세와 협의하여 독일군이 재편성될 때까지 로파디움에서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1148년 1월 6일에 피시디아 협곡에 도착했을 때 매복해 있던 셀주크 군대의 기습을 받아 본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 후위 부대를 지휘하던 루이 7세는 구원을 향해 분전하였고, 적군은 장시간 전투로 지쳐 있었기에 밤에 철수하였다(카드무스 산 전투). 이 전투에서 1000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고, 아리에노르의 측근인 조프루아 드 랑콩이 이끄는 선발대가 임의로 본대와 멀리 떨어져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어 랑콩은 푸아티에로 소환되었다. 아리에노르의 이 전투에 대한 동향은 불명확하지만, 랑콩의 군주였던 그녀에게도 비난이 미치고, 루이 7세의 측근들로부터 원한을 샀다. 역사학자 오도 드 듀일은 전투중 루이 7세가 왕실 근위대를 잃었지만, 기운을 잃지 않고 재빠르고 용감하게 나무뿌리를 움켜쥐고 산비탈을 올라갔으며, 그의 흉갑이 화살로부터 그를 보호했고, 피로 물든 칼로 바위를 방어하며 많은 머리와 손을 잘라냈다고 기록했다.
3월 19일에 안탈리아에서 해로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한숨 돌렸다. 거기서 아리에노르는 삼촌인 안티오키아 공 레몽과 함께 에데사 백령인 알레포와 카이사레아 탈환을 주장했다. 이때 아리에노르와 레몽은 친밀한 사이였으며, 근친상간을 저질렀다는 설과 남프랑스식 애정 표현이었다는 설이 있다. 루이 7세는 이에 반대하고 아리에노르를 구금한 채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는 독일의 콘라드 3세 왕과 예루살렘의 볼드윈 3세 왕과 연합하여 다마스쿠스를 포위했지만, 이는 재앙으로 끝났고, 불과 나흘 만에 작전이 중단되었다. 레몽은 전사했고, 7월의 다마스쿠스 공격(다마스쿠스 포위전)도 실패로 돌아가면서 제2차 십자군은 해산되었다. 루이 7세 부부는 1149년 부활절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해로 이탈리아를 거쳐 팔레르모에서 시칠리아 왕 루제로 2세에게 환영받고, 투스쿨룸에서 에우제니우스 3세 교황을 만난 후 11월 11일에 프랑스로 귀국했다.
5. 엘레오노르와의 이혼과 헨리 2세와의 갈등
엘레오노르와의 결혼은 십자군 원정 실패와 왕자 출산 실패로 파국을 맞았다. 1152년 3월 21일, 보장시 의회에서 근친혼을 이유로 결혼 무효가 선언되었지만, 실제로는 둘 사이의 불화와 왕위 계승자 생산 실패가 주된 원인이었다. 엘레오노르는 두 달 후인 5월 18일에 헨리 2세와 재혼하여 아키텐 공국을 헨리 2세에게 넘겨주었다. 이는 프랑스 왕실에 큰 타격이었으며, 루이 7세는 헨리 2세에게 맞서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하고 일드프랑스로 돌아갔다.
1154년, 루이 7세는 카스티야의 콘스탄스와 재혼했지만, 콘스탄스는 아들을 낳지 못하고 마르가레트와 알리스 두 딸만 낳았다. 1157년, 헨리 2세는 루이 7세에게 아들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자신의 아들 젊은 왕 헨리와 루이 7세의 딸 마르가레트의 결혼을 추진했다. 루이 7세는 이를 수락하고 1158년 기소르 조약을 통해 두 사람을 약혼시키고 지참금으로 기소르와 벡생 백작령을 주었다.
1160년 콘스탄스가 사망하자 루이 7세는 샹파뉴의 아델과 재혼했고, 헨리 2세는 즉시 자신의 아들과 마르가레트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루이 7세는 앙주 세력의 확장을 경계했지만, 재정 및 군사력 부족으로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1159년 툴루즈에서 헨리 2세가 툴루즈 백작 레이몽 5세를 공격했을 때, 루이 7세는 소수의 병력으로 툴루즈에 들어가 자신의 누이를 방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헨리 2세가 공격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1169년에는 르 퓌 주교의 요청으로 오베르뉴의 폴리냐크 자작을 제압하고 그 영지를 프레보로 바꾸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대립에서 알렉산데르 3세를 지지하여 황금 장미를 받기도 했다.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케트와 헨리 2세의 갈등에서 루이 7세는 베케트를 지원하며 중재를 시도했지만, 베케트의 강경한 태도에 "성인 이상이 되고 싶은가?"라고 묻기도 했다.
루이 7세는 헨리 2세의 아들들의 반란을 지원하며 헨리 2세를 견제하려 했으나, 아들들 간의 불화와 루이 7세 자신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실패했다. 1177년 교황의 중재로 두 왕은 비트리앙페르투아에서 평화 협정을 맺었다.
5. 1. 결혼 무효와 엘레오노르의 재혼
왕실 재정과 군사력에 큰 손실을 초래한 성지 원정은 엘레오노르와의 갈등을 촉발하여 결혼 무효로 이어졌다. 왕실 부부가 남자 상속인을 낳았다면 엘레오노르와의 결혼이 계속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못했다. 보장시 의회는 루이와 엘레오노르가 너무 가까운 친족이어서 결혼이 불법이라고 선언하며 빠져나갈 구실을 찾았다. 따라서 1152년 3월 21일 결혼이 무효화되었다. 친족 관계라는 구실이 무효화의 근거였지만, 사실 그것은 루이와 엘레오노르 사이의 적대 관계와 그들의 결혼이 프랑스 왕위 계승자를 낳을 가능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1152년 5월 18일, 엘레오노르는 앙주 백작이자 미래의 영국 왕 헨리 2세와 결혼했다. 그녀는 그에게 아키텐 공국을 주었고, 세 딸과 다섯 아들을 낳았다. 루이는 자신의 종주의 허락 없이 결혼한 헨리에 맞서 효과적이지 못한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헨리와 엘레오노르의 적들은 굴욕을 당했고, 그들의 군대는 패주했으며, 땅은 황폐해졌고, 재산은 약탈당했다. 루이는 병에 걸려 일드프랑스로 돌아갔다.십자군 원정 중에 알리에노르와 루이 7세의 불화는 결정적이 되었고, 1150년에 알리에노르는 둘째 딸 알릭스 드 프랑스를 낳았지만, 십자군 실패로 비난을 받고 남편의 신뢰를 잃어 국정에서 멀어져 고립되었다. 한편, 십자군의 고난을 거쳐 정치가로 성장한 루이 7세는 쉬제를 중용하고 알리에노르를 멀리하며 이별을 결심했지만, 그녀의 부정을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은 것과 두 공주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같은 해 앙주 백작 조프루아 4세와 분쟁이 발생했고, 이 문제에서 화해에 힘쓰고 루이 7세 부부의 중재에도 힘쓴 쉬제의 존재도 있어 주저했지만, 이듬해 1151년 1월 13일에 쉬제가 죽자 루이 7세는 이혼에 기울었고, 감당할 수 없는 알리에노르에게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1151년 8월, 앙주 백작 조프루아 4세는 장남인 노르망디 공작 앙리(영명: 헨리, 후일 잉글랜드 왕 헨리 2세)를 데리고 신하로서의 맹세를 하기 위해, 그리고 루이 7세의 푸아티에 대리인 질로 베를레와 싸워 포로로 잡았기 때문에 베르나르두스에게 파문당했기에, 변명도 겸하여 프랑스 궁정을 예방 방문한다. 회담은 베르나르두스의 베를레 석방을 조건으로 한 파문 해제 제안을 조프루아 4세가 거절했기 때문에 결렬되었고, 알리에노르는 이때 아직 앙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같은 해 9월 7일에 조프루아 4세가 사망하고, 앙리가 앙주 백작도 겸임하게 되었다.
이듬해 1152년, 앙리는 신하로서의 맹세를 하기 위해 프랑스 궁정을 재방문했다. 알리에노르는 11살 연하인 앙리에게 강한 관심을 가지고, 무정부 시대 잉글랜드의 스티븐 왕의 부당함과 토벌을 주장하는 앙리를 지지하며, "루이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보물을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루이 7세는 이별을 결심하고, 3월 21일에 근친혼이라는 이유로 결혼 무효가 성립되었다(사실상의 이혼). 마리와 앨리스는 적출자로 인정되었고 친권은 루이 7세에게 넘어갔고, 알리에노르가 신하로서 충성을 계속 유지하는 한 루이 7세는 그녀의 재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등의 조건이 정해졌다.
5. 2. 헨리 2세와의 대립
루이 7세는 왕실 재정과 군사력에 큰 손실을 초래한 성지 원정으로 엘레오노르와 갈등을 겪었고, 결국 결혼은 무효가 되었다. 왕실 부부가 아들을 낳았다면 결혼이 계속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못했다. 보장시 의회는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가 너무 가까운 친족이어서 결혼이 불법이라고 선언했다. 1152년 3월 21일, 결혼은 무효화되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친족 관계였지만, 실제로는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 사이의 적대감과 프랑스 왕위 계승자를 낳을 가능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1152년 5월 18일, 엘레오노르는 앙주 백작이자 훗날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결혼했다. 엘레오노르는 헨리 2세에게 아키텐 공국을 주었고, 3명의 딸과 5명의 아들을 낳았다. 루이 7세는 자신의 종주 허락 없이 결혼한 헨리 2세에 맞서 전쟁을 벌였지만,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의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굴욕을 당했다. 루이 7세는 병에 걸려 일드프랑스로 돌아갔다.
1154년, 루이 7세는 카스티야 왕 알폰소 7세의 딸 카스티야의 콘스탄스와 결혼했다. 하지만 콘스탄스는 아들을 낳지 못하고, 마르가레트와 알리스 두 딸만 낳았다. 1157년, 헨리 2세는 루이 7세가 아들을 낳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자신의 상속인 젊은 왕 헨리와 루이 7세의 딸 마르가레트의 결혼을 추진했다. 루이 7세는 이 제안에 동의했고, 1158년 기소르 조약에 따라 두 사람을 약혼시키고 지참금으로 노르망디의 도시 기소르와 주변 벡생 백작령을 주었다.
1160년 10월 4일, 콘스탄스가 출산 중 사망하자 루이 7세는 5주 후 샹파뉴의 아델과 결혼했다. 헨리 2세는 즉시 자신의 아들 헨리와 마르가레트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루이 7세는 앙주 세력의 위험을 인지했지만, 재정과 군사 자원이 부족하여 효과적으로 대항하지 못했다. 1159년, 헨리 2세의 공격을 받은 툴루즈 백작 레이몽 5세를 돕기 위해 툴루즈를 방문했을 때, 루이 7세는 소수의 호위대와 함께 도시로 들어가 백작 부인인 자신의 누이를 방문한다고 주장했다. 헨리 2세는 자신의 봉신이 도시 안에 있는 동안 공격할 수 없다며 퇴각했다.
1169년, 루이 7세는 르 퓌 주교로부터 폴리냐크 자작이 오베르뉴를 통과하는 여행객들을 공격하는 것을 막아달라는 청원을 받았다. 루이 7세는 노네트에서 자작을 포위 공격했고, 그 백작령은 프레보로 바뀌었다.
루이 7세 치세에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프랑스 남동부 아를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1159년 교황 선출 분쟁이 일어나자, 루이 7세는 알렉산데르 3세를 지지했다. 프리드리히 1세가 생장드로즈느에서 루이 7세를 만나려던 두 차례의 시도가 실패한 후(1162년 8월 29일과 9월 22일), 루이 7세는 1163년부터 1165년까지 생에 거주했던 알렉산데르 3세를 확실히 지지하게 되었다. 루이 7세의 충실한 지지에 대한 보답으로 교황은 그에게 황금 장미를 수여했다.
루이 7세는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케트를 지지하며 헨리 2세와의 화해를 시도했다. 루이 7세는 베케트의 완고함에 짜증을 내며, 베케트가 헨리 2세의 화해 제안을 거절하자 "성인 이상이 되고 싶은가?"라고 질문하기도 했다.
루이 7세는 헨리 2세의 아들들의 반란을 지원하여 헨리 2세를 약화시키려 했고, 플랜태저넷 가문의 분열을 조장했다. 그러나 헨리 2세 아들들 사이의 경쟁과 루이 7세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동맹(1173~1174)은 깨졌다. 1177년, 교황의 개입으로 두 왕은 비트리앙페르투아에서 합의했다.
5. 3. 토마스 베케트와의 관계
루이 7세는 헨리 2세에 대항하기 위해 토마스 베케트를 지지하고 그와 헨리 2세의 화해를 시도했다. 그러나 베케트의 완고함에 "성인 이상이 되고 싶은가?"라고 묻기도 했다.루이 7세는 헨리 2세의 아들들의 반란을 지원하여 헨리 2세를 약화시키고 플랜태저넷 가문의 분열을 조장하려 했다. 그러나 헨리 2세 아들들 간의 갈등과 루이 7세 자신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이들 사이의 동맹(1173~1174)은 깨졌다. 결국 1177년 교황의 개입으로 두 왕은 비트리앙페르투아(Vitry-en-Perthois)에서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6. 앙주 제국과의 외교전 및 말년
루이 7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프랑스 남동부 아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자, 교황 선출 분쟁에서 프리드리히 1세의 적인 알렉산데르 3세를 지지했다. 1162년 두 차례의 만남 시도가 실패한 후, 1163년부터 1165년까지 생에 거주했던 알렉산데르 3세를 확실히 지지했고, 교황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황금 장미를 수여했다.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과 헨리 2세의 갈등에서, 루이 7세는 베켓을 지지하며 헨리 2세와의 화해를 시도했다. 루이 7세는 경건함 때문만이 아니라 헨리 2세를 견제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지만, 베켓의 완고함에는 짜증을 내기도 했다.
1165년, 루이 7세의 세 번째 부인이 필리프 2세를 낳았고, 그는 루이 7세의 상속자가 되었다. 카페 왕조의 전통에 따라 1179년 랭스에서 필립 2세를 왕위에 올렸지만, 루이 7세는 이미 마비 증세를 앓고 있어 의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1180년 9월 18일 파리에서 사망하여 바르보 수도원에 매장되었고, 1817년 생드니 대성당으로 유해가 옮겨졌다.
6. 1. 헨리 2세 아들들과의 관계
루이 7세는 헨리 2세의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지원하여 헨리 2세를 약화시키려 했다. 헨리 2세가 아닌 그의 아들들을 프랑스 앙주 영토의 봉건적 봉신으로 삼아 플랜태저넷 가문의 분열을 조장했다. 그러나 헨리 2세 아들들 사이의 경쟁과 루이 7세 자신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그들 사이의 동맹(1173~1174)은 깨졌다. 1177년 교황의 개입으로 비트리앙페르투아(Vitry-en-Perthois)에서 두 왕은 합의에 이르렀다.1169년, 루이 7세는 몽미라유(Montmirail)에서 헨리 2세와 회담하여 그의 세 아들(젊은 헨리 왕, 리처드 1세, 제프리 2세)과 충성 서약을 맺고, 각자에게 헨리 2세의 영토를 분할 상속할 것을 제안했다. 헨리 2세는 이를 승낙하여 젊은 헨리 왕에게 노르망디, 앙주, 메인, 투레인을, 리처드에게 아키텐을, 제프리에게 브르타뉴를 할당하고, 루이 7세에게 충성 의식을 치르게 하였다. 리처드와 루이 7세의 딸 아델의 약혼도 성사되었으나, 헨리 2세는 결혼을 미루고 아델을 곁에 두어 논란이 되었다.
1173년, 젊은 헨리 왕이 헨리 2세에 반발하여 루이 7세에게 도망쳤다. 이는 헨리 2세가 막내 아들 존에게 영토를 할당한 것이 원인이었다. 젊은 헨리 왕, 리처드, 제프리,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 에일리노르도 가세하여 아키텐과 잉글랜드에서 헨리 2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루이 7세는 젊은 헨리 왕을 지지했고, 프랑스 여러 봉건 영주들과 스코틀랜드 왕 윌리엄 1세도 끌어들여 반란을 확대했다. 루이 7세는 젊은 헨리 왕과 함께 노르망디 등을 공격했다.
그러나 헨리 2세는 반격하여 1174년 1월에 에일리노르를 사로잡고, 윌리엄 1세도 포로로 잡았다. 아들들도 9월에 항복했다. 루이 7세는 노르망디에서 철수했고, 앙주 제국의 내전은 헨리 2세에 의해 조기에 진압되어 루이 7세의 계획은 실패했다. 이후 병약해진 루이 7세는 1177년 9월 21일에 헨리 2세와 화해했다.
6. 2. 말년과 죽음
루이 7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프랑스 남동부 아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자, 교황 선출 분쟁에서 프리드리히 1세의 적인 알렉산데르 3세를 지지했다. 1162년 두 차례의 만남 시도가 실패한 후, 루이 7세는 1163년부터 1165년까지 생에 거주했던 알렉산데르 3세를 확실히 지지했고, 교황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황금 장미를 수여했다.루이 7세는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을 지지하며 헨리 2세와의 화해를 시도했다. 그는 경건함과 헨리 2세를 견제하려는 목적 উভয়으로 베켓을 지지했지만, 베켓의 완고함에 짜증을 내기도 했다.
루이 7세는 헨리 2세의 아들들의 반란을 지원하며 헨리 2세를 약화시키려 했다. 그는 헨리 2세의 아들들을 프랑스 앙주 영토의 봉건적 봉신으로 삼아 플랜태저넷 가문의 분열을 조장했지만, 헨리 2세 아들들 간의 경쟁과 루이 7세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동맹(1173~1174)은 깨졌다. 1177년 교황의 개입으로 비트리앙페르투아에서 두 왕은 합의에 이르렀다.
1165년, 루이 7세의 세 번째 부인은 필리프 2세를 낳았고, 그는 루이 7세의 상속자가 되었다. 1179년, 루이 7세는 랭스에서 필립 2세를 왕위에 올렸지만, 이미 마비 증세를 앓고 있어 의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1180년 9월 18일 파리에서 사망하여 바르보 수도원에 매장되었고, 1817년 생드니 대성당으로 유해가 옮겨졌다.
1164년 11월,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이 헨리 2세와의 대립으로 프랑스에 망명하자 루이 7세는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와 협력하여 베켓을 숨겨주고 헨리 2세와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지만, 베켓은 1170년 12월 19일 헨리 2세의 신하들에게 암살당했다. 루이 7세는 헨리 2세에게 베켓을 잉글랜드로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젊은 헨리 왕의 대관식을 다시 거행할 것을 제안했고, 베켓 암살 이후인 1172년에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루이 7세는 앙주 제국을 붕괴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1169년, 몽미라유 회담에서 헨리 2세와 그의 세 아들(젊은 헨리 왕, 리처드 1세, 제프리 2세) 사이에 영토 분할 상속을 제안했다. 리처드와 루이 7세의 딸 아델의 약혼도 성사되었지만, 헨리 2세는 결혼을 미루고 아델을 곁에 두어 논란이 되었다. 몽미라유 회담에서 왕자들은 루이 7세에게 충성했기 때문에, 그는 왕자들에 대한 종주권을 가지게 되어 앙주 제국을 흔들 수 있었다.
1173년 3월, 젊은 헨리 왕이 헨리 2세에 반발하여 루이 7세에게 도망쳤다. 루이 7세는 젊은 헨리 왕을 지지했고, 프랑스 여러 봉건 영주들과 스코틀랜드 왕 윌리엄 1세도 반란에 가담했다. 루이 7세는 젊은 헨리 왕과 함께 노르망디 등을 공격했지만, 헨리 2세의 반격으로 실패했다. 1174년 9월, 아들들이 항복하고 루이 7세는 노르망디에서 철수했다. 이후 병약해진 루이 7세는 1177년 9월 21일에 헨리 2세와 화해했다.
1179년 8월, 아들 필립의 공동 통치자 대관식 직전, 필립이 병에 걸렸고, 루이 7세도 병에 걸려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는 병 치유를 위해 잉글랜드에 있는 베켓의 묘소를 방문했고, 귀국 후 회복된 필립을 맞이하여 11월 1일에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루이 7세는 이미 체력이 약해져 대관식에 참석할 수 없었고, 1180년 4월 28일, 필립과 이자벨 드 에노의 결혼을 지켜본 후, 9월 18일에 생퐁 수도원에서 서거했다.
그의 유해는 1817년 생드니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7. 유산 및 평가
루이 7세는 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사색적인 성격이었으며, 수도원에서 자란 영향으로 평생 독실한 신앙심을 유지했다.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지만, 탈몽생틸레르 방문 중 납치 시도를 물리치거나 제2차 십자군의 카드무스 산 전투에서 용맹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버지 루이 6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파리를 프랑스의 수도로 확고히 했으며, 통치 기구를 정비하고 생드니 수도원과 파리 대학교를 지원하여 파리를 정치, 종교,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엘레오노르가 가져온 남프랑스 문화를 싫어하여 이혼 후에는 궁정에서 기사도 문학과 연애시를 추방하고 수도원 교육을 장려했다. 엘레오노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에게는 엄격한 교육을 시켰으며, 특히 장녀 마리가 어머니의 영향을 받을까 염려하여 결혼을 늦추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리는 결혼 후 어머니와 같이 문예 후원자로 활동했다.
내정에서는 도시의 코뮌에 특권을 주어 왕권 강화에 힘썼고, 주교좌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여 왕권의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특정 가문이 주요 직책을 세습하고, 왕의 직할령 관리인 프레보(Prévôt)에게도 세습과 업무 도급이 나타나는 등, 행정 체계 정비는 다음 왕인 필리프 2세의 과제로 남았다.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의 이혼 전후로 루이 7세의 행동에는 변화가 나타났다. 결혼 생활 중에는 아내의 마음을 얻기 위해 무모한 군사 행동을 감행하기도 했지만, 이혼 후에는 신중하고 전략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왕조 존속을 위해 아들을 원했던 루이 7세의 심경 변화와 성장으로 인한 자의식의 발현으로 해석된다.
앙주 제국에 대항하여 외교적 수완을 발휘, 플랜태저넷 왕조의 가족 불화를 이용하여 내란을 선동했다. 헨리 2세와의 갈등에서 종주권을 활용하고, 헨리 2세의 세 아들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헨리 2세를 포위하기도 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는 헨리 2세에게 자주 패배하여 결국 화해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왕국 최초의 왕령을 발표하고 왕실 편찬 사업을 시작한 것도 루이 7세 시대의 업적이다. 역사가 앙리 피렌느는 루이 7세를 "무인으로서도 정치가로서도 뛰어난 점이 없었지만, 그러한 군주 아래서 왕권이 증대된 것은 더욱 특징적"이라고 평가했다.
월터 맵과의 대화에서 "프랑스 왕의 소유물은 빵과 포도밭과 작은 축제 정도"라고 말한 것에서 루이 7세의 소박함과 겸손함을 엿볼 수 있다. William of Newburgh영어는 루이 7세의 경건함과 친절함을 칭찬하면서도, 그의 단순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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