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데르베르흐 회의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빌데르베르흐 회의는 1954년 네덜란드에서 처음 개최된 국제 회의로, 반미주의에 대한 우려와 대서양주의 증진을 목표로 시작되었다. 유럽과 미국의 정치, 경제, 국방 분야의 지도자들이 모여 현안을 논의하며, 단일 세계 공동체 형성을 지향한다는 비판도 있다. 회의는 채텀 하우스 규칙에 따라 진행되며, 비공개로 진행되어 투명성 부족과 음모론에 대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회의에는 정치 지도자, 기업인, 학자 등 120명에서 150명의 전문가가 참석하며, 유럽과 북미 출신이 주를 이룬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54년 시작된 행사 - 도쿄 모터쇼
도쿄 모터쇼는 일본자동차공업회가 주최하는 국제 자동차 전시회로, 일본 자동차 산업의 발전과 함께 성장하여 국제적인 행사로 발돋움했으며, 2023년에는 재팬 모빌리티 쇼로 명칭을 변경하고 모빌리티 관련 산업을 포괄하는 행사로 변화를 시도했다. - 비밀결사 - 흑수단
흑수단은 범세르비아주의를 내세우며 세르비아인이 거주하는 영토 통합을 목표로 활동한 세르비아의 비밀 결사 조직으로, 사라예보 사건에 관여하여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에 영향을 미쳤다. - 비밀결사 - Phantom in the Twilight
Phantom in the Twilight는 런던을 배경으로 인간의 공포에서 태어난 엠브라와 그들을 지키는 수호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2018년 일본-중국 합작 애니메이션으로, 유학생 바일 톤이 '카페 포비든'에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룬다.
빌데르베르흐 회의 | |
---|---|
회의 개요 | |
이름 | 빌더버그 회의 |
종류 | 연례 비공개 회의 |
설립일 | 1954년 5월 29일 |
공동 의장 | 마리-조제 크라비스 |
규모 | 약 150명 (초청), 소규모 핵심 그룹 |
웹사이트 | 빌더버그 회의 공식 웹사이트 |
역사 | |
최초 회의 장소 | 네덜란드 오스터베이크의 빌더버그 호텔 (Bilderberg Hotel) |
기타 | |
관련 용어 | 빌더버그 그룹, 빌더버그 클럽 |
2. 역사
빌데르베르흐 회의는 1954년 네덜란드 오스테르베이크의 빌데르베르흐 호텔에서 처음 개최되었으며, 이 호텔 이름이 회의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4][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유럽에서 확산되던 반미주의에 대한 우려와 대서양주의 증진의 필요성 속에서, 망명 폴란드인 정치인 요제프 레팅거와 네덜란드의 베른하르트 공자 등의 주도로 시작되었다.[8][9][10] 초기 회의의 성공 이후 연례적으로 개최되기 시작했으며, 냉전 시대에는 NATO 회원국과 미국 간의 비공식적인 소통 창구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68]
매년 북미나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개최되는 이 회의에는 정치, 경제, 학계, 언론 등 다양한 분야의 영향력 있는 인물 130~150명이 초청된다.[61] 회의는 엄격한 비공개 원칙(채텀하우스 룰) 하에 진행되며, 참석자 명단과 의제는 일부 공개되지만 회의 내용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다.[62] 이러한 비밀주의 때문에 외교 문제 평의회나 왕립 국제 문제 연구소와 더불어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비밀 조직이라는 음모론이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회의 사무국은 네덜란드 레이던에 위치해 있다.
1991년 이후로는 주로 5월 하순에서 6월 상순 사이에 회의가 열리는 경향이 있다. 2012년부터는 악사의 CEO였던 앙리 드 카스트리가 의장을 맡고 있다. 회의의 존재는 1970년대 무렵부터 점차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2. 1. 기원
첫 번째 회의는 1954년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네덜란드 오스테르베이크에 있는 '''빌데르베르흐 호텔'''(Hotel de Bilderberg|호텔 데 빌데르베르흐영어)에서 개최되었다.[4][5] 이 호텔 이름은 회의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 호텔은 아른험 시에서 서쪽으로 약 7km 떨어진 조용한 곳에 위치해 있다.[6] 당시에는 중간 규모의 가족 운영 호텔이었으나,[6] 현재는 네덜란드와 독일에 여러 호텔을 운영하는 빌데르베르흐 호텔 체인 소속이다.[7]회의는 망명 폴란드인 정치인 요제프 레팅거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당시 서유럽에서 반미주의가 확산되는 상황에 대한 우려에서 시작되었다.[8][9] 당시 미국에서는 조지프 매카시로 대표되는 극우 세력의 매카시즘 광풍 등 극단적인 반공주의 경향이 심화되었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과 파시즘을 경험한 유럽에서 반감을 일으켜 반미주의 확산의 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공산권의 인권 및 민주주의 침해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럽 지도자들은 미국과 공산권 양측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였고, 전쟁 복구와 각국의 이해관계로 인해 유럽 내 입장도 통일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팅거는 유럽과 미국의 지도자들이 모여 대서양주의를 증진하고, 정치, 경제, 국방 문제에 대한 협력을 통해 미국과 서유럽 문화 간의 이해를 높이는 국제 회의를 제안했다.[8][9] 레팅거는 네덜란드의 베른하르트 공자에게 이 구상을 제안했고,[10] 베른하르트 공자는 전 벨기에 총리 폴 반 제란트와 당시 유니레버 대표였던 폴 라이켄스와 함께 이를 추진하기로 했다. 유럽 측에서는 프랑스의 앙투안 피네, 영국의 데니스 힐리 등도 협력했다. 베른하르트 공자는 미국 측에 협조를 구하기 위해 당시 CIA 국장이었던 월터 베델 스미스에게 연락했고, 스미스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고문이었던 찰스 더글러스 잭슨에게 이 일을 맡겼다.[11] 해리 S. 트루먼 행정부 인사들, 데이비드 록펠러, 존 포스터 덜레스 등도 창설 과정에 관여했으며, 로스차일드 가문, 록펠러 가문,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 등 경제계 유력자들의 지원도 확보했다.
첫 회의에는 서유럽 11개국 대표 50명과 미국 대표 11명이 참석했으며,[12] 각국에서 "보수적" 관점과 "자유주의적" 관점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두 명씩 초대되었다.[9] 회의는 3일간 매일 2회, 총 6회의 회의로 진행되었고, 공용어는 영어와 프랑스어였다. 회의 장소인 빌데르베르흐 호텔 외에도 인근 호텔 두 곳이 추가로 지정되어 참가자들의 숙박과 이동 편의를 제공했다.
회의의 성공적인 개최 이후, 연례 회의를 열기로 결정하고 레팅거를 상임 사무총장으로 하는 영구 운영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운영위원회는 회의 조직뿐만 아니라, 참석자 명단을 관리하여 비공식적인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역할도 담당했다.[13] 이후 3년간 회의는 프랑스, 독일, 덴마크에서 열렸다. 1957년에는 미국 조지아주 세인트 시몬스 섬에서 처음으로 회의가 개최되었으며, 이때 포드 재단으로부터 30000USD를 지원받았다. 포드 재단은 1959년과 1963년 회의에도 자금을 지원했다.[11]
일각에서는 EU와 유로의 창설, 1973년의 오일 쇼크 등이 빌데르베르흐 회의에서 결정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냉전 시기에는 유럽의 NATO 회원국과 미국 간의 가교 역할을 목표로 했다고 평가받는다.[68] 회의의 존재는 1970년대 무렵부터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2. 2. 초기 회의
1954년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네덜란드 오스테르베이크에 있는 '''빌데르베르흐 호텔'''(Hotel de Bilderbergnl)에서 첫 번째 회의가 열렸다.[4][5] 이 호텔의 이름은 이후 그룹의 명칭이 되었다. 이 호텔은 아른험 서쪽 약 7km 지점에 위치해 있다.[6]회의는 망명 폴란드인 정치인 요제프 레팅거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다. 그는 당시 서유럽에서 반미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우려했다.[8][9] 당시 미국에서는 조지프 매카시로 대표되는 극우 세력의 매카시즘 광풍으로 인한 파시즘적 경향에 대한 우려가 있었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의 기억이 생생한 유럽에서 반미 감정을 키웠다. 또한 공산권의 인권 및 민주주의 침해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럽 지도자들은 미국과 공산권 모두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레팅거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럽과 북미가 주요 문제에 대해 협력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NATO와 대서양 지역의 유력자들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비공식 국제 회의 창설을 구상했다. 그는 대서양주의를 증진하고 정치, 경제, 국방 문제에 대한 미국과 서유럽 간의 이해와 협력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8][9]
레팅거는 유니레버 초대 회장 폴 라이켄스( Paul Rykens영어 ) 등과 함께 네덜란드의 베른하르트 공자에게 이 아이디어를 제안했다.[10][64] 베른하르트 공자는 전 벨기에 총리 폴 반 제란트 및 라이켄스와 함께 이를 추진하기로 했다. 유럽 측에서는 프랑스의 앙투안 피네, 영국의 데니스 힐리 등에게도 협력을 요청했다. 베른하르트는 당시 CIA 국장이었던 월터 베델 스미스에게 연락했고, 스미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고문 찰스 더글러스 잭슨( Charles Douglas Jackson영어 )에게 이 일을 맡겼다.[11]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역시 존 포스터 덜레스 등에게 회의 창설 지원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로스차일드 가문, 미국의 록펠러 가문(데이비드 록펠러 포함),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 등 경제계 유력자들의 참여와 지원도 확보되었다. 미국 측에서는 잭슨, 록펠러, 잭 하인츠, 포드 재단 등이 창설을 주도했다.
제1회 회의는 1954년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3일간 네덜란드 오스테르베이크의 빌데르베르흐 호텔에서 열렸다.[67] 회의 장소인 빌데르베르흐 호텔과 인근 호텔 두 곳(Fletcher Hotel-Restaurant Wolfheze영어, Hotel 's Koonings Jaght)을 통째로 빌렸으며, 참가자들에게는 숙식과 교통편이 제공되었다. 회의는 매일 3시간씩 두 차례, 총 6회 열렸고 공용어는 영어와 프랑스어였다. 유럽 11개국에서 베른하르트 공자, 레팅거 등 50명, 미국에서 잭슨, 록펠러, 하인츠 등 11명이 참석했다.[12] 참석자 명단은 각국에서 보수적 관점과 진보적(자유주의적) 관점을 대표하는 인물 두 명씩을 초대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9] 포드 재단은 이 첫 회의를 위해 3만달러를 지원했다.[11]
첫 회의의 성공에 힘입어 주최 측은 회의를 매년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레팅거를 상임 사무총장으로 하는 영구 운영위원회를 구성했다. 운영위원회는 회의 조직 외에도 참석자 명단과 연락처를 관리하여 이들이 사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비공식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13] 이후 3년간 회의는 프랑스, 독일, 덴마크에서 열렸다. 1957년에는 포드 재단의 추가 지원을 받아 미국 조지아주 세인트 시몬스 섬에서 첫 미국 회의가 개최되었다. 포드 재단은 1959년과 1963년 회의에도 자금을 지원했다.[11] 빌데르베르흐 회의는 냉전 시대에 유럽의 NATO 가맹국과 미국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평가받는다.[68]

2. 3. 발전과 변화
폴란드의 정치 활동가인 조제프 레팅거[63]는 대서양 공동체 성립을 구상하며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서는 반공주의적 사회 정치 상황이 극도로 심화되었고, 조지프 매카시로 대표되는 극우익 세력이 매카시즘 등 광신적인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파시스트 국가로 변모할 조짐을 보였다. 제2차 세계 대전과 파시즘의 기억이 생생했던 유럽에서는 이에 대한 반감이 커지며 반미주의 경향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한편 공산권에서는 인권과 민주주의 침해가 횡행하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럽 지도자들은 미국과 공산권 모두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였으며,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자국 영토의 부흥과 각국의 이해관계 충돌로 인해 통일된 입장을 갖기 어려웠다. 대서양 공동체 구상에는 미국과 유럽 양측의 협력이 필수적이었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실현이 어려워 보였다.이러한 상황에 대한 우려 속에서, 중요한 문제에 대해 유럽과 북미가 협력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레팅거는 유니레버 초대 회장인 폴 라이켄스(Paul Rykens영어) 등과 함께, NATO와 대서양 지역의 유력 인사들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정기적인 국제 비밀 회의 창설을 네덜란드의 베른하르트 왕자[64]에게 제안했다. 제안을 받아들인 베른하르트 왕자는 유럽 측에서 벨기에 전 총리 파울 판 제엘란트, 프랑스 총리 앙투안 피네, 그리고 이후 영국 재무장관을 지내고 약 30년간 운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게 될 노동당의 데니스 힐리 등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북미 측에서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과 데이비드 록펠러 등에게 회의 창설 참여를 요청했다. 요청을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CIA 국장 월터 베델 스미스, 훗날 국무장관이 되는 존 포스터 덜레스, 그리고 차기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자문역이었던 찰스 더글라스 잭슨(Charles Douglas Jackson영어) 등에게 회의 창설 지원을 지시했다. 또한 로스차일드 가문, 미국의 록펠러 가문,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 등 경제계 유력 인사들의 참여와 지원을 이끌어내며, 베른하르트 왕자의 주도로 회의가 창설되었다. 창설 과정에서 미국 측에서는 잭슨, 록펠러, 잭 하인츠, 포드 재단 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제1회 회의는 1954년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네덜란드 헬데를란트주 렌크의 오스터베이크(Oosterbeeknl)[65]에 위치한 빌데르베르흐 호텔(Hotel de Bilderberg)[66]에서 열렸다[67]. 3일간 매일 3시간씩 두 차례, 총 여섯 차례의 회의가 열렸으며, 공용어는 영어와 프랑스어로 지정되었다. 회의 장소인 빌데르베르흐 호텔뿐만 아니라 인근의 Fletcher Hotel-Restaurant Wolfheze와 Hotel 's Koonings Jaght 두 곳의 호텔도 참가자 숙소로 지정되었다. 참가자들에게는 숙박, 식사, 네덜란드 도착 후 호텔까지의 이동, 그리고 회의 장소와 숙소 간 이동 차량이 제공되었다. 그 외 비용은 참가자 각자 부담이었다. 아침 식사는 각자 숙박하는 호텔에서, 점심과 저녁 식사는 회의 장소인 빌데르베르흐 호텔에서 제공되었다. 최종적으로 유럽 11개국에서 베른하르트 왕자, 레팅거 등 50명, 미국에서 잭슨, 록펠러, 하인츠 등 11명이 참가했다. 포드 재단은 제1회 회의에 3만달러를 지원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회의 자금을 지원했다.
EU와 유로의 창설 구상이 이 회의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1973년 석유 파동 역시 이 회의에서 계획되었다는 설이 있다.
냉전 시대에는 유럽의 NATO 회원국과 미국 간의 가교 역할을 목표로 했다고 전해진다.[68]
1970년대 무렵부터 회의의 존재가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3. 구성 및 운영
빌데르베르흐 회의는 서유럽에서 반미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우려한 망명 폴란드인 정치인 Józef Retinger|요제프 레팅거pol 등에 의해 시작되었다.[8][9][63] 레팅거는 유럽과 미국의 지도자들이 모여 정치, 경제, 국방 문제에 대한 협력을 증진하고 대서양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국제 회의를 제안했다.[8][9]
레팅거는 네덜란드의 베른하르트 공자에게 이 아이디어를 제안했고,[10][64] 베른하르트 공자는 전 벨기에 총리 Paul van Zeeland|폴 반 제란트fra와 당시 유니레버 대표였던 Paul Rykens|폴 라이켄스nld와 함께 이를 추진하기로 했다. 베른하르트 공자는 당시 CIA 국장이었던 Walter Bedell Smith|월터 베델 스미스eng에게 연락했고, 스미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고문 Charles Douglas Jackson|찰스 더글러스 잭슨eng에게 이 일을 맡겼다.[11] 북미 측에서는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 아래 잭슨, 데이비드 록펠러, 잭 하인츠, 포드 재단 등이 창설을 주도했으며, 로스차일드 가문, 록펠러 가문,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 등 경제계 유력자들의 참여와 지원도 확보했다.
첫 회의는 1954년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네덜란드 오스테르베이크(Oosterbeek)에 있는 Hotel de Bilderberg|빌데르베르흐 호텔nld에서 열렸으며, 이 호텔의 이름이 그룹의 명칭이 되었다.[4][5][66][67] 첫 회의에는 유럽 11개국 대표 50명과 미국 대표 11명이 참석했으며,[12] 각국에서 "보수적" 및 "자유주의적" 관점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초대되었다.[9] 회의의 공용어는 영어와 프랑스어였다.
회의의 성공으로 연례 회의 개최가 결정되었고, 레팅거를 상임 사무총장으로 하는 영구 운영위원회가 구성되었다.[13] 운영위원회는 회의 조직 외에도 참가자들의 비공식적 네트워크 구축을 목표로 했다.[13] 이후 3년간 회의는 프랑스, 독일, 덴마크에서 열렸으며, 1957년에는 포드 재단의 3만달러 지원을 받아 미국 조지아주 세인트 시몬스 섬에서 첫 미국 회의가 개최되었다. 포드 재단은 1959년과 1963년 회의에도 자금을 지원했다.[11]
이 그룹의 초기 목표는 대서양주의 증진, 미국-유럽 관계 강화, 그리고 또 다른 세계 대전을 예방하는 것이었다. Andrew Kakabadse|앤드루 카카바드세eng에 따르면, 빌데르베르흐 회의의 주제는 "전 세계적으로 자유 시장 자본주의와 그 이익에 대한 합의를 강화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5] 2001년, 창립 멤버이자 30년간 운영 위원이었던 Denis Healey|데니스 힐리eng는 "우리가 단일 세계 정부를 위해 노력한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일 수 있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빌데르베르흐에 속한 우리는 서로 싸우고 사람들을 죽이며 수백만 명을 집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영원히 계속할 수는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단일 공동체가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언급했다.[19]
회의는 채텀 하우스 규칙에 따라 비공개로 진행되며, 참가자들은 자유롭게 정보를 사용하되 발언자나 다른 참가자의 신원은 밝힐 수 없다.[19] 이는 참가자들이 언론의 주목을 의식하지 않고 솔직하게 토론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함이다.[20] 공식적으로 회의에서는 결의안 제안, 투표, 정책 성명 발표 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21][62] 사무국은 네덜란드 레이던에 있다.[62]
3. 1. 참가자
참가자는 120명에서 150명 사이이며, 정치 지도자, 산업, 금융, NATO, 학계 및 미디어 전문가가 포함된다.[8] 참가자의 약 2/3는 유럽 출신이고 나머지는 북미 출신이며, 1/3은 정치 및 정부 출신이고 나머지는 다른 분야 출신이다.[8][5] 역사적으로 참석자 명단은 은행가, 정치인, 대기업의 임원[14] 및 발렌베리 가문 소유의 복합 기업 지주 회사인 인베스터 AB와 에릭슨, ABB, IBM, 제록스, 로열 더치 쉘, 노키아 및 다임러와 같은 발렌베리 소유의 다른 다국적 기업의 이사에게 편중되어 있었다.[15]은행가이자 사업가인 마르쿠스 발렌베리 2세는 운영 위원회의 위원이었으며 1950년대부터 사망 전해인 1981년까지 22번 회의에 참석했다. 그의 손자 마르쿠스 발렌베리는 8번, 다른 손자인 야콥 발렌베리는 17번 참석했다.[18]
전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와 전 네덜란드 여왕 베아트릭스를 포함한 국가 원수들이 회의에 참석했다.[15][16] 이 그룹과 관련된 한 소식통은 2013년 ''The Daily Telegraph''에 이름이 공개되지 않은 다른 개인들이 때때로 그룹 회의에 "하루 동안만" 나타난다고 말했다.[17]
빌데르베르흐 회의 참석자의 약 2/3는 다국적 기업 또는 다국적 금융 기관의 경영자, 국제 미디어 관계자이며, 약 1/3은 각국의 정치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매년 미국에서 30명, 유럽 각국에서 80명, 국제 기구(유엔이나 국제 통화 기금) 등에서 10명 정도가 참석한다고 한다. 또한, 저명한 대기업이라도 자천으로는 참가자를 보낼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CIA나 NSA의 장관, 미국 합동참모의장 등이 참가하고 있다.
빌데르베르흐 회의는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나 기업, 기관의 전문가들이 모이는 회의이며, 유럽과 북미 외 지역 국가의 참석자는 상대적으로 적다.[69] 처음에는 유럽과 북미 간의 대화 촉진을 회의의 목적으로 개최되었지만, 세계화 등을 추진해 감에 따라, 다양한 국가와 멤버를 초대하게 되었다.[60] 유럽 및 북미 이외의 지역에서 참가자는 이란, 이라크, 뉴질랜드, 이스라엘, 파키스탄, 베네수엘라 등의 국적이 확인되고 있다. 2011년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회의에는 중국에서 당시 외교 차관 푸잉이 참가했다. 또한, 2009년 아테네에서 열린 회의에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참석했다.
유력 IT 기업 관계자로는 구글 회장 에릭 슈밋과 피터 틸 등이 매년 참석하고 있다. 또한 학술 관계에서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철학자 닉 보스트롬과 암스테르담 대학교의 이론 물리학자 로베르트 다이크라프의 참가가 확인된 적도 있다.
일본인 또는 일본 관련 초청은 천황, 황족, 정계, 재계 및 기업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한 번도 초청이 확인된 적이 없다. 2009년 아테네에서 열린 회의에 당시 국제 에너지 기구 사무총장을 맡고 있던 다나카 노부오가 참가했지만, 해당 기구의 대표, 에너지 관계 참고인으로서의 참석이며, 일본 관계자나 일본인으로서의 참가는 아니다.
=== 주요 참석 왕족 ===
국가 | 이름 | 비고 | 참석 연도 |
---|---|---|---|
네덜란드 | 베아트릭스 | 전 네덜란드 여왕, 회의 주최자 | |
네덜란드 | 클라우스 폰 암스베르크 | 베아트릭스 여왕 배우자 | |
네덜란드 | 빌럼알렉산더르 | 현 네덜란드 국왕 | |
영국 | 필립공 |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배우자 | 1965-1967 |
영국 | 찰스 3세 | 현 영국 국왕 | 1986 |
벨기에 | 필리프 | 현 벨기에 국왕 | 1992, 1993, 1996, 2007-2009, 2012 |
스페인 | 후안 카를로스 1세 | 전 스페인 국왕 | 1989, 2004 |
스페인 |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 전 스페인 왕비 | 1989-1992, 1996, 2008-2011, 2014 |
스페인 | 스페인 공주 크리스티나 | 스페인 공주 | |
스웨덴 | 칼 16세 구스타프 | 현 스웨덴 국왕 | 1995 |
덴마크 | 헨리크 | 마르그레테 2세 여왕 배우자 | 1966 |
덴마크 | 덴마크 왕자 악셀 | 덴마크 왕자 | 1955, 1957 |
노르웨이 | 하랄 5세 | 현 노르웨이 국왕 | 1984 |
노르웨이 | 호콘 | 노르웨이 왕세자 | 2011 |
리히텐슈타인 | 한스아담 2세 | 리히텐슈타인 공 | 1985-1987 |
룩셈부르크 | 장 | 전 룩셈부르크 대공 | 1994 |
바티칸 | 피에트로 파롤린 | 추기경, 국무원장 | 2018 |
=== 주요 참석 기업 ===
지역 | 기업명 |
---|---|
미국 | 아마존 |
구글 | |
화이자 | |
마이크로소프트 | |
OpenAI | |
페이스북 | |
파이낸셜 타임스 | |
하인츠 | |
페이팔 | |
팔란티어 | |
스타벅스 | |
링크드인 | |
워싱턴 포스트 | |
NBC 뉴스 | |
워너 브라더스 | |
유럽 | 알코아 |
에어버스 | |
ASML 홀딩 | |
악사 | |
BAE 시스템스 | |
BP 오일 | |
BASF | |
딥마인드 | |
다임러 | |
도이체 텔레콤 | |
글락소스미스클라인 | |
HSBC | |
머크 (독일) | |
노바티스 | |
네슬레 | |
로열 더치 쉘 | |
피아트 크라이슬러 | |
지멘스 | |
취리히 보험 그룹 |
=== 주요 참석 정부 기관 및 국제 기구 ===
지역 | 기관명 |
---|---|
미국 | 중앙정보국 (CIA) |
국가안보국 (NSA) | |
국방부 국방 정책 위원회 자문 위원회 | |
국방고등연구계획국 (DARPA) | |
미국 상무부 | |
미국 국무부 | |
외교 협회 (CFR) | |
미국 재무부 | |
미국 하원 | |
연방준비제도 | |
NASA 존슨 우주 센터 | |
유럽 | 유럽 의회 |
유럽 중앙 은행 (ECB) | |
유럽 중앙 은행 집행 위원회 | |
유럽 연합 (EU), 유럽 연합군 | |
영국 특수작전집행부 (SOE, 과거) | |
영국 정부통신본부 (GCHQ) | |
영국 재무부 | |
프랑스 대외안보총국 (DGSE) | |
중국 |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
3. 2. 조직 구조
회의는 약 18개국에서 각각 2명씩으로 구성된 운영 위원회가 조직한다.[23] 운영 위원회는 회의를 조직하는 것 외에도, 참가자들이 사적으로 서로 연락할 수 있도록 비공식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13] 제임스 A. 빌에 따르면, 운영 위원회는 프로그램 계획과 참가자 명단을 논의하기 위해 보통 1년에 두 번 만난다.[28]공식 직책으로는 의장과 명예 사무총장이 있다.[15] 그룹의 규칙상 별도의 회원 자격은 없으며, 이전 회의 참가자들은 연례 회의 보고서를 받는다.[24] 존재하는 유일한 범주는 "운영 위원회 위원"이다.[25] 위원회 외에도 운영위원회와 구성원이 중복되는 별도의 자문 그룹이 있다.[26]
초대 상임 사무총장은 요제프 레팅거였으며, 그가 1960년에 사망한 후 네덜란드 경제학자 에른스트 판 데어 버이겔(Ernst van der Beugel)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네덜란드의 베른하르트 공자는 초대 회의부터 의장을 맡았으나, 1976년 록히드 스캔들에 연루되면서 의장직을 사임했다. 명예 미국 사무총장직은 카네기 국제 평화 기금의 조지프 E. 존슨(Joseph E. Johnson), 프린스턴 대학교의 윌리엄 번디(William Bundy), 전 주 아프가니스탄 미국 대사인 시어도어 L. 엘리엇 주니어(Theodore L. Eliot Jr.), 조지타운 대학교 외교 연구소의 카시미르 A. 요스트(Casimir A. Yost) 등이 차례로 역임했다.[27]
작가 존 론슨(Jon Ronson)에 따르면, 이 그룹은 네덜란드에 작은 중앙 사무소를 두고 있으며, 이 사무소에서 매년 차기 회의를 개최할 국가를 결정한다. 회의 개최국은 4일 동안 호텔 전체를 예약하고, 케이터링, 교통 및 보안을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개최국은 바클레이(Barclays), 피아트 자동차(Fiat Automobiles), 글락소스미스클라인(GlaxoSmithKline), 하인즈(Heinz), 노키아(Nokia), 제록스(Xerox)와 같은 기업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자금을 조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9]
3. 3. 운영 방식
회의는 1년에 한 번[62], 1991년 이후로는 주로 5월 하순에서 6월 상순 사이에 개최된다. 회의는 약 18개국에서 각 2명씩 파견된 위원으로 구성된 운영 위원회에서 조직한다.[23] 운영 위원회는 보통 1년에 두 번 모여 프로그램 계획과 참가자 명단을 논의한다.[28] 공식 직책으로는 의장과 명예 사무총장이 있으며[15], 현재 의장은 악사의 CEO인 Henri de Castries|앙리 드 카스트리프랑스어(2012년~)이다. 빌데르베르흐 그룹에는 공식적인 회원 자격 제도는 없으나, 이전 참가자들에게는 연례 회의 보고서가 제공된다.[24] 존재하는 유일한 참가자 범주는 '운영 위원회 위원'이다.[25] 위원회 외에도 구성원이 일부 겹치는 별도의 자문 그룹이 있다.[26] 사무국은 네덜란드 레이던에 위치하며[62], 이곳에서 매년 회의 개최국을 결정한다.[29]회의 개최국은 4일간 회의 장소로 사용될 호텔 전체를 예약하고, 케이터링, 교통편, 보안 등을 준비해야 한다. 이러한 비용은 바클레이(Barclays), 피아트 자동차(Fiat Automobiles), 글락소스미스클라인(GlaxoSmithKline), 하인즈(Heinz), 노키아(Nokia), 제록스(Xerox)와 같은 기업들의 기부금을 통해 충당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9] 회의는 엄중한 보안 속에서 진행된다.[62]
회의는 채텀 하우스 규칙에 따라 진행된다. 이에 따라 참가자들은 회의에서 얻은 정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지만, 발언자나 다른 참가자의 신원을 밝혀서는 안 된다.[19] 이러한 규칙은 참가자들이 언론 보도의 부담 없이 솔직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주요 인물들의 실제 생각을 파악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설명된다.[20] 회의에서는 어떠한 결의안 제안이나 투표, 정책 성명 발표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21] 다만, 2009년 11월에는 유럽 이사회 의장 후보였던 헤르만 반 롬푀이를 지지하기 위해 브뤼셀의 발 뒤셰 성에서 만찬 회의를 주최한 사례가 있다.[22] 토의 내용은 비공개이며, 언론 보도가 금지된다.[62]
매년 북미와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정치, 관료, 다국적 기업 및 금융기관 대표, 학계 인사, 유럽 왕족 등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 130~150명이 초청된다.[61] 참가자 명단과 주요 의제는 웹사이트를 통해 일부 공개되지만[62], 구체적인 논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는다. 저널리스트나 칼럼니스트 등도 초청 대상에 포함되지만, 회의 내용을 기사화할 수는 없다.[62]
4. 비판과 논란
빌데르베르흐 회의는 창립 초기 대서양주의 증진과 미국-유럽 관계 강화를 목표로 했으나,[5] 시간이 흐르면서 "전 세계적으로 자유 시장 자본주의와 그 이익에 대한 합의를 강화하는 것"을 주요 의제로 다루게 되었다.[5] 그러나 회의 운영 방식의 핵심인 엄격한 비공개 원칙(채텀 하우스 규칙)[20]과 소수의 정재계 엘리트 중심의 참석자 구성[61] 때문에 지속적인 비판과 논란에 휩싸여 왔다.
주요 비판 지점은 회의의 투명성과 책임성 부족이다.[41][42] 고위 정책 결정권자들과 기업 대표, 로비스트 등이 비공개 석상에서 만나 논의하는 것에 대해 오랜 기간 로비 활동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어 왔다.[38][39][40] 일부 비평가들은 빌데르베르흐 그룹을 초국가적인 권력 엘리트 집단으로 간주하며, 이들이 민주적 통제를 벗어나 소수의 이익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비판한다.[43] 또한, 비공식적인 사적 모임임에도 불구하고 개최국의 공적 자금이 경비 등에 투입되는 점[61] 역시 비판의 대상이다.
이러한 비밀주의는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에 걸쳐 다양한 음모론[45][20][46]이 확산되는 배경이 되었다. 음모론은 그룹의 의도에 대해 상반된 해석을 내놓기도 하는데, 좌파 진영에서는 주로 자본주의적 지배와 기업 권력 강화를 위한 비밀 모임이라고 비판하는 반면,[47] 우파 진영에서는 세계 정부 수립이나 글로벌 계획 경제를 추진하는 집단으로 보기도 한다.[48]
빌데르베르흐 회의는 왕립 국제 문제 연구소(RIIA), 외교 문제 평의회(CFR), 삼극위원회 등 다른 국제적인 영향력을 가진 조직들과 멤버를 공유하는 경우가 많아[79] 이들 조직 간의 연계성에 대한 의혹과 비판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4. 1. 투명성 및 책임성 문제
이 단체의 웹 페이지에 따르면, 회의는 채텀 하우스 규칙에 따라 진행된다. 이 규칙에 따라 참가자들은 회의 중 얻은 정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지만, 특정 발언을 한 연사나 다른 참가자의 신원은 공개할 수 없다. 2011년 전 회장 에티엔 드 아비뇽은 이러한 방식이 참가자들이 언론 보도에 대한 부담 없이 솔직하게 의견을 나누고, 주요 인물들의 실제 생각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설명했다.[20] "빌데르베르흐의 미국 친구들"은 2008년 보도 자료를 통해 빌데르베르흐의 유일한 활동은 연례 회의이며, 회의에서는 어떤 결의안 제안, 투표, 정책 성명 발표도 없다고 밝혔다.[21] 그러나 2009년 11월에는 연례 회의 외에 유럽 이사회 의장 후보였던 헤르만 반 롬푀이를 지지하기 위한 만찬 회의를 브뤼셀의 발 뒤셰 성에서 개최한 사례가 있다.[22]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사생활 보호와 비밀 유지 운영 방식[41] 때문에 빌데르베르흐 회의는 투명성과 책임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42] 특히 고위 정책 입안자들이 기업 로비스트들이나 국제투명성기구의 고위 관계자들과 비공개 회의에서 만나는 점[40] 때문에 오랫동안 로비 활동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38][39]
이안 리차드슨과 같은 비평가들은 빌데르베르흐를 초국가적인 권력 엘리트 집단으로 간주하며, 이들이 기존의 세계 거버넌스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전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다만, 이들 비평가 대부분은 빌데르베르흐 그룹과 관련된 여러 음모론을 뒷받침할 충분한 증거는 없다고 보며, 음모론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거리를 둔다.[43] 일례로, 2017년 6월 영국 논평가 찰리 스켈튼은 가디언지에 기고한 글에서 음모론적인 추측 대신 빌데르베르흐 그룹이 발표한 의제에 나타난 세계관 자체를 비판하기도 했다.[44]
4. 2. 음모론
이 단체는 회의를 채텀 하우스 규칙에 따라 진행하며, 참가자들은 회의 중 얻은 모든 정보를 사용할 수 있지만, 연사나 다른 참가자의 이름은 공개할 수 없다.[20] 2011년 전 회장 에티엔 드 아비뇽은 이러한 비밀주의가 참가자들이 언론 보도의 부담 없이 솔직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주요 인물들의 실제 생각을 파악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설명했다.[20] 단체 측은 연례 회의 외에 다른 활동은 없으며, 회의에서 결의안 제안, 투표, 정책 성명 발표 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밝혔다.[21] 그러나 2009년 11월, 유럽 이사회 의장 후보였던 헤르만 반 롬푀이 지지를 위한 만찬 회의를 주최한 사례가 있다.[22]엄격한 사생활 보호와 비밀 유지를 보장하는 운영 방식[41] 때문에 빌데르베르흐 회의는 투명성과 책임성 부족으로 비판받아 왔으며[42], 이는 다양한 음모론[45][20][46]이 제기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안 리차드슨과 같은 비평가들은 빌데르베르흐를 초국가적인 권력 엘리트로 간주하며, 이들이 "기존 세계 거버넌스 시스템의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전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43] 다만, 이러한 비판가들 중 다수는 음모론자들이 제기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보며 거리를 둔다.[43] 예를 들어, 2017년 가디언지에 기고한 찰리 스켈튼은 음모론적 추측 대신 빌데르베르흐 그룹이 발표한 의제에 나타난 세계관 자체를 비판했다.[44]
비밀스러운 회의는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에 걸쳐 다양한 음모론을 낳았다.[45][20][46] 좌파 또는 특정 정치 성향이 없는 일부 사람들은 빌데르베르흐 그룹이 자본주의 지배와 기업 권력을 은밀하게 강요하거나 지지한다고 비난하는 반면,[47] 우파는 이 그룹이 세계 정부와 글로벌 계획 경제를 강요하거나 이를 준비한다고 비난한다. 우파 이론가들은 이 그룹을 음모의 중심적인 지휘부로 보는 경향이 있는 반면, 좌파 및 비정치적 이론가들은 이 그룹을 국제적인 기업 이익을 증진하는 여러 기관 중 하나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48]
2001년, 창립 멤버이자 30년간 운영 위원이었던 데니스 힐리는 "우리가 단일 세계 정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된 것이지만 완전히 부당하지는 않다...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단일 공동체가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다.[19] 이는 종종 세계 정부 음모론의 근거로 인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2005년, 전 회장 에티엔 드 아비뇽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세계 단일 정부 추구설에 대해 "음모를 믿는 사람들은 항상 있을 것"이라며 "만약 우리가 세계의 비밀 정부라면,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일축했다.[46] 데이비드 록펠러 역시 자서전에서 빌데르베르흐 회의를 "매우 흥미로운 토론 그룹"이라면서도 "합의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언급하며 음모론과는 거리를 두었다.[75]
탐사 저널리스트 칩 버렛에 따르면, 빌데르베르흐 그룹에 대한 우익 포퓰리즘 음모론은 1964년 필리스 슐래플리가 자비 출판한 저서 ''A Choice, Not an Echo''에서 시작되었다.[49] 이 책은 공화당(미국)이 빌데르베르흐 그룹 멤버가 지배하는 엘리트 지식인들에게 비밀리에 통제되며, 그들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세계 공산주의로 가는 길을 열 것이라는 음모론을 제기했다.[50]
쿠바의 전 대통령 피델 카스트로는 2010년 쿠바 공산당 기관지 ''그란마''에 기고한 글에서 다니엘 에스툴린의 2006년 저서 ''빌더버그 클럽의 비밀''을 인용하며,[51] 이 책이 "국경을 초월하고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 세계 정부를 설치하기 위해" 대중을 조작하는 "사악한 파벌과 빌더버그 로비스트"에 대해 설명한다고 주장했다.[47]
미국에서는 존 버치 협회,[48][52] 정치 운동가 필리스 슐래플리,[52] 작가 짐 터커,[53] 정치 운동가 린든 라루쉬,[54] 음모론자 알렉스 존스,[5][55][56] 정치인 제시 벤츄라[57] 등이 빌데르베르흐 관련 음모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렉스 존스는 다큐멘터리 "Endgame: Blueprint for Global Enslavement"에서 빌데르베르흐 회의를 다루기도 했다. 미국 외 인물로는 리투아니아 작가 다니엘 에스툴린[58]과 영국 정치인 나이젤 파라지[59] 등이 있다.
빌데르베르흐 회의는 왕립 국제 문제 연구소(RIIA), 외교 문제 평의회(CFR), 삼극위원회와도 관련이 있으며, 이들 조직과 멤버가 중복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음모론의 소재가 된다.[79] 이 때문에 빌데르베르흐 회의의 정보가 중복 멤버를 통해 다른 조직으로 전달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79] 회의 멤버에는 데이비드 록펠러나 헨리 키신저 같은 중도파(국제 협조주의)뿐 아니라 네오콘 성향의 인물들도 포함되며,[83] 회의 논의 내용이 G7, NATO, EU 등의 정상 회담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도 있다.[83]
1991년 회의에 당시 아칸소 주 주지사였던 빌 클린턴이 초대되었고, 1년 반 뒤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1993년 회의에는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가 초대되었고, 4년 뒤 영국 총리가 되었다.[82] 이러한 사례는 그룹이 정치 지도자를 미리 선정하거나 중요한 정책 방향을 결정한다는 음모론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작가 다니엘 에스툴린은 빌데르베르흐 그룹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주장들을 제기했다.[87]
- 빌데르베르흐는 MI6의 창조물이며 RIIA의 지령 하에 있다는 소문이 상류 계급 사이에 퍼져 있다.
- 매년 회의 결정에 따라 각국 정부, 재계 공작 및 언론을 통한 여론 조작이 이루어진다.
- 최종 목표는 서방에 의한 세계 통일 권력 수립이며, 이를 위해 언론 및 인터넷 통제, 국민 총 주민등록번호제[84]와 "인체 내 이식 칩"[85] 도입, 인터넷 감시, 암호화폐를 통한 국제 통화 통합, 인구 억제 등을 추진한다.
- 1997년 캐나다 회의에서 퀘벡주 분리 및 미국 통합 계획을 논의하려 했으나, 자신과 제임스 P. 터커 등의 폭로 활동[86]으로 캐나다 언론(토론토 스타 등)의 주목을 받아 계획이 좌절되었다고 주장한다.[87]
5. 역대 의장
(1911–2004)
네덜란드군 감찰관 (1970–1976)
왕립 네덜란드 공군 감찰관 (1953–1970)
왕립 네덜란드 해군 감찰관 (1946–1970)
왕립 네덜란드 육군 감찰관 (1945–1970)
네덜란드군 최고 사령관 (1944–1945)

히르셀 남작
(1903–1995)
영국 보수당 당수 (1963–1965)
외무 장관 (1960–1963, 1970–1974)
추밀원 의장 (1957, 1959–1960)
상원 원내대표 (1957–1960)
영국 연방 관계 장관 (1955–1960)
귀족원 의원 (1951–1963, 1974–1995)
국회의원 (1931–1945, 1950–1951, 1963–1974)

(1919–2016)
독일 총리 (대행) (1974)
부총리 (1969–1974)
외무부 장관 (1969–1974)
자유민주당 대표 (1968–1974)
연방경제협력개발부 장관 (1961–1969)
유럽 의회 의원 (1956–1961)
연방 하원 의원 (1953–1974)
(1907–2005)

(1919–2018)
외무 장관 (1979–1982)
에너지부 장관 (1974)
보수당 의장 (1972–1974)
국방부 장관 (1970–1974)
상원 원내대표 (1963–1964)
무임소 장관 (1963–1964)
해군 장관 (1959–1963)
호주 고등 판무관 (1956–1959)
귀족원 의원 (1941–2018)

(1932년 출생)
유럽 위원 (내부 시장, 관세 동맹 및 산업) (1977–1981)

(1954년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