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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목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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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천 목씨는 고려 시대 목효기를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고려 시대에 목인길 등이 활약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34명 등 132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며 번성했다. 백제 왕족의 후예라는 설, 형제의 우애를 기리는 설, 당나라 학자의 후예라는 설 등 기원에 대한 여러 설이 전해진다. 주요 인물로는 백제의 목간나, 고려의 목덕창, 조선의 목첨, 목서흠, 목내선, 목만중, 독립운동가 목자상, 목치숙 등이 있다. 충정공 목서흠 묘역, 목인길 장군묘, 목장흠 선생 묘역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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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목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가문 정보
가문명사천 목씨
한자 표기泗川睦氏
종류씨족
국가한국
민족미상
본관경상남도사천시
시조목효기
저명한 인물목충
목자안
목진공
목호룡
목일신
목요상
목진석
웹사이트사천목씨종친회
주요 인물
과거 인물목만치
목간나
목덕창
목인길
목충
목자안
목진공
목세칭
목첨
목수흠
목서흠
목장흠
목취선
목대흠
목겸선
목행선
목내선
목천성
목임유
목임중
목임일
목창명
목호룡
목지경
목시경
목조수
목만중
목인재
목인배
목인회
목태림
목자상
목치숙
목일신
목연욱
목요상
목영준
목진석
목영만
현대 인물승우아빠
목진석
목진혁
목수정
집성촌
집성촌 위치서울특별시용산구 청파동
경기도동두천시(구 경기도양주군이담면)
경기도용인시 처인구
경상남도사천시 정동면
전라남도고흥군
통계 정보
2015년 인구8,848명

2. 역사

사천 목씨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번성한 가문이다. 시조는 고려 고종 때 요무장군낭장동정을 지낸 '''목효기'''이다.

목효기의 아들 목덕창은 합문지후를 지내면서 서북면 반란 평정 중 영주성(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에서 순절하였고, 사후 영주군에 봉해졌다. 목준평은 목덕창의 아들로 조봉대부로 비서윤을 지내고 보문각직제학에 이르렀다. 목인길은 목효기의 6세손으로 공민왕 때 병부상서와 첨의평리를 지내고, 친원파와 홍건적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으며, 1377년(우왕 3년) 문하찬성사에 올랐다.[4] 목충목자안목인길의 사촌 동생으로 밀직부사를 역임하며 왜구를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조선 시대에는 7세손 목진공이 1417년(태종 17년) 우부대언,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세종 때 호조참판에 올랐다. 사천 목씨는 조선 시대에 문과 급제자 34명, 과거 급제자 132명을 배출하였는데, 이는 현재 인구 천 명당 급제자 수 1위 성씨이다.[5]

11세손 목세칭의 아들 목첨은 1567년(선조 즉위년) 이조참판·도승지를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3형제가 문과에 급제하면서 현달하였다. 장남 목서흠은 예조참판을 거쳐 효종 때 중추부동지사에 이르렀고, 둘째 목장흠인조반정 이후 호조참판·도승지를 지냈으며, 막내 목대흠은 예조참의를 거쳐 강원부사로 선정을 베풀었다.

목장흠의 아들 목행선은 1633년(인조 11년) 식년 문과 전시(殿試)에 1등으로 장원(壯元)하였고, 대사성·승지·예조참의·황해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목창명은 1670년(현종 11년) 예문관검열, 1677년(숙종 3년)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병조판서에 이르렀다. 목서흠의 아들 목내선숙종남인(南人)의 중진으로 온건파 탁남(濁南)에 속하였다. 1689년(숙종 15년) 우의정에 이르렀고, 기사환국좌의정에 올랐다.

숙종목천성은 호조참의·좌부승지·형조참의 등을 지냈고, 목천성의 증손 목만중은 1786년(정조 10년) 문과에 장원(壯元)하였고, 1794년(정조 18년) 형조판서에 임명되었고, 1801년(순조 1년) 황사영 백서 사건이 발생하자 천주교 박해를 주도하였다. 1805년(순조 5년)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 후기와 조선 중기에 전성기를 누리던 사천 목씨는 갑술환국을 고비로 남인의 몰락과 함께 세력이 약화되었고, 목호룡신임사화 사건과 이인좌의 난을 주도한 목함경(睦涵敬)으로 명예가 다소 손상되기도 했다. 목첨, 목서흠, 목내선기로소에 들어갔고, 조선 500년 동안 연(連) 3대에 걸쳐 기로소에 이름을 올린 가문은 사천 목씨(泗川睦氏)가 유일하다.

일제 강점기에는 목자상, 목치숙, 목준상, 목일신 등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4]

2. 1. 기원

목씨의 기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존재한다.

  • 최초 목씨의 기록은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扶餘氏)를 비롯하여 백제의 귀족 8대 성씨인 연씨(燕氏)·사씨(沙氏)·해씨(解氏)·진씨(眞氏)·국씨(國氏)·목씨(木氏)·백씨(苩氏)·정씨(貞氏)가 대성팔족(大姓八族)으로 《수서(隨書)》와 《신당서(新唐書)》 등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광위장군(廣威將軍) 목간나북위(北魏)와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국이 가야를 침공해 가라국왕과 아들들이 백제로 도망쳐오자 목라근자(木羅斤資)가 군대를 이끌고 나가 구원했다.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목씨는 백제-가야의 교류 과정에서 세력을 키워 나갔던 것으로 보이며, 가야 지방의 소국들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 사천은 백제에 속했으나 6세기 법흥왕 때 신라에 정복된 지역이다. 그밖에 백제의 이름없는 무장 목만치(木滿致) 장군이 유명했다.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 성씨가 소멸되거나 변성되었다. 백제 왕족인 부여(扶餘)씨는 소멸되고 부여 서씨(扶餘 徐氏), 여씨(余氏) 등으로 변성되었다고 하고, 목(木)씨는 목(睦)씨로 변성되었다는 백제목씨변천설(百濟木氏變遷說)이 있다. 이후 항렬과 세계가 고려시대 이전까지는 분명하지 않아 고려시대 다시 정계에 등장한 목효기(睦孝基)를 시조로 한다.
  • 형제의 우애가 깊어 왕이 화목을 뜻하는 목(睦)을 성씨로 내렸다는 형제상목설(兄弟相睦說)이 전승되기도 하며, 설화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하는 고전 소설로 《목시룡전(睦始龍傳)》이 있다.
  • 641년(고구려 영류왕 22년) 고구려 영류왕의 요청에 의해 당(唐)나라의 8학사(八學士)인 목충(睦沖)·홍천하(洪天河)·은세통(殷世通)·위령(魏齡)·방비(房丕)·기모(奇牟)·길령(吉寧)·봉수현(奉守賢)이 유학과 문화 교류를 위해 고구려로 파견되었다고 한다. 이후 연개소문의 난으로 인해 신라로 피신하여 사천 지역에 세거(世居)하였다고 한다.

2. 2. 고려 시대

사천 목씨의 시조는 고려 고종 때 요무장군낭장동정(耀武將軍郞將同正)을 지낸 '''목효기'''이다.

목효기의 아들 목덕창은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내면서 서북 방면의 반란을 평정하다 영주성(靈州城: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에서 순절하였으며, 사후에는 영주군(靈州君)에 봉해졌다. 목덕창의 아들 목준평은 조봉대부(朝奉大夫)로 비서윤(秘書尹)을 지내고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렀다.

목효기의 6세손 목인길공민왕 때 병부상서(兵部尙書)와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고, 친원파와 홍건적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으며, 1377년(우왕 3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다.[4] 목인길의 사촌 동생인 목충목자안도 밀직부사를 역임하며 왜구를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2. 3. 조선 시대

7세손 목진공(睦進恭)은 1417년(태종 17) 우부대언,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세종조에 호조참판에 올랐다.[4]

사천 목씨는 조선조에 문과 급제자 34명, 과거 급제자 132명을 배출하였는데, 이는 현재인구 천 명당 급제자 수 1위 성씨이다.[5]

11세손 목세칭(睦世秤)의 아들 목첨(睦詹)은 1567년(선조 즉위) 이조참판·도승지를 역임하였고, 목첨의 아들 3형제가 문과에 급제하면서 현달하였다. 장남인 목서흠(睦敍欽)은 예조참판을 거쳐 효종조에 중추부동지사에 이르렀고, 둘째 목장흠(睦長欽)은 인조반정 후 호조참판·도승지를 지냈으며, 막내 목대흠(睦大欽)은 예조참의를 거쳐 강원부사로 선정을 베풀었다.

목장흠의 아들 목행선(睦行善)은 1633년(인조 11) 식년 문과 전시(殿試)에 1등으로 장원(壯元)하였고, 대사성·승지·예조참의·황해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목창명(睦昌明)은 1670년(현종 11) 예문관검열, 1677년(숙종 3)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병조판서에 이르렀다.

목서흠의 아들 목내선(睦來善)은 숙종조에 남인(南人)의 중진으로 온건파 탁남(濁南)에 속하였다. 1689년(숙종 15) 우의정에 이르렀고, 기사환국좌의정에 올랐다.

숙종조에 목천성(睦天成)은 호조참의·좌부승지·형조참의 등을 지냈고, 목천성의 증손 목만중(睦萬中)은 1786년(정조 10) 문과에 장원(壯元)하였고, 1794년(정조 18) 형조판서에 임명되었고, 1801년(순조 1)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이 발생하자 천주교 박해를 주도하였다. 1805년(순조 5)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 후기와 조선 중기에 전성기를 누리던 사천 목씨는 갑술환국(甲戌換局)을 고비로 남인의 몰락과 함께 세력이 약화되었고, 목호룡(睦虎龍)의 신임사화 사건과 이인좌의 난을 주도한 목함경(睦涵敬)으로 명예가 다소 손상되기도 했다.

목첨(睦詹), 목서흠(睦敍欽), 목내선(睦來善)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조선(朝鮮) 500년 동안 연(連) 3대에 걸쳐 기로소에 이름을 올린 가문은 사천 목씨(泗川睦氏)가 유일하다. 기로소는 반드시 문과 급제를 거쳐 정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내고, 수(壽)가 70세 이상의 원로와 연로한 임금만 들어갈 수 있는 국가 최고의 예우 기관이다.

2. 4. 일제강점기 및 광복 이후

일제 강점기 목자상, 목연욱, 목치숙, 목준상, 목일신 등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일제에 탄압에 저항했다.[4]

3. 분파

사천 목씨의 분파는 다음과 같다.

파명(派名)세손(世孫)분파조(分派祖)비고
찬성공파6세손목인길(睦仁吉)
주부공파7세손목지유(睦之柳)
참군공파8세손목계남(睦繼男)
괴산공파9세손목철경(睦哲卿)
사부공파10세손목희증(睦希曾)
선전관공파
선천부사공파
직장공파11세손목세준(睦世準)종가
첨정공파직장공파 분파
직강공파직장공파 분파
사함공파직장공파 분파
사복시정공파직장공파 분파
집의공파직장공파 분파
감찰공파11세손목세규(睦世規)증 사헌부 감찰
부장공파11세손목세형(睦世衡)
현헌공파11세손목세칭(睦世秤)4개 공댁으로 분파
하담공댁현헌공파 분파
충정공댁현헌공파 분파, 김해,주부공,직강공,붕계공,용재공,감찰공,온양,성진공,안산,원주,진사공
고석공댁현헌공파 분파, 전설사공,중신공,정문공
다산공댁현헌공파 분파, 남간공,통덕랑공
해주공파11세손목세구(睦世矩)
장악원정공파목승조(睦承祚)


4. 항렬자

21세22세23세24세25세26세27세28세29세30세31세32세33세
○석(錫)원(源)○
원(沅)○
○상(相)
○신(信)
○근(根)
영(榮)○
연(然)○
용(容)○
충(忠)○
○균(均)
○규(圭)
○재(載)
○중(重)
진(鎭)○
종(鍾)○
현(鉉)○
전(銓)○
○수(洙)
○영(永)
○구(求)
○승(承)
정(楨)○
동(東)○
본(本)○
수(秀)○
○찬(燦)
○희(熙)
○성(性)
○환(煥)
희(喜)○
재(在)○
기(基)○
규(奎)○
○호(鎬)
○용(鎔)
○탁(鐸)
○회(會)
태(泰)○
순(淳)○
숙(淑)○
한(漢)○
○병(秉)
○종(種)
○모(模)
○식(植)


5. 주요 인물

사천 목씨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34명을 포함하여 총 132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현재 인구 천 명당 급제자 수 1위 성씨이다.[5][18]


  • '''목간나'''(木干那, ?~?) : 백제의 장군이자 귀족이다. 남제서에 언급되는 대성팔족 중 하나인 목씨 출신으로, 동성왕북위의 침공을 격퇴하여 광위장군(廣威將軍) 면중후(面中侯)에 봉해졌다.
  • 목만치(木滿致) : 백제의 권신이자 무신이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며, 《삼국사기》의 목협만치(木劦滿致)와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주요 인물인 목덕창은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냈다. 고려 원종 때 서북면병마사영(西北面兵馬使營)의 기관(記官) 최탄(崔坦)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영주(靈州) 수령이었던 목덕창은 이를 평정하다 평안북도 의주 영주성(靈州城)에서 전사하였다. 사후 영주군(靈州君)에 봉해졌다.

조선시대 주요 인물인 목진공은 7세손으로, 조선 태종조에 대호군(大護軍), 의흥부 진무(義興府鎭撫), 판전사시사(判典祀寺事), 우부대언(右副代言) 등을 역임하였고, 1417년(태종 17년)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421년(세종 3년)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 1422년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올랐다.

갑술환국 이후 남인이 몰락하면서 사천 목씨의 세력도 약화되었고, 목호룡신임사화 고발과 이인좌의 난 주도로 명예가 실추되기도 했다. 하지만, 목첨, 목서흠, 목내선 3대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면서, 조선에서 유일하게 3대 연속 기로소에 이름을 올린 가문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목자상, 목연욱, 목치숙, 목준상, 목일신 등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탄압에 맞섰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명단
목겸선, 목내선, 목대흠, 목만중, 목서흠, 목선항, 목성선, 목승석, 목시경, 목시윤, 목용석, 목인규, 목인배, 목인수, 목인회, 목임유, 목임일, 목임중, 목장흠, 목조수, 목조영, 목종하, 목지경, 목창명, 목천성, 목천수, 목천임, 목천현, 목철경, 목첨, 목취선, 목태석, 목행선



조선시대 무과 급제자
명단
목경현, 목세빈, 목임춘, 목재흠, 목중형, 목천서, 목천익, 목춘휘, 목흥윤



조선시대 생원시 급제자
명단
목규석, 목돈화, 목만중, 목사연, 목성관, 목세탐, 목승평, 목시경, 목시윤, 목안중, 목원응, 목인규, 목인재, 목인회, 목일중, 목임화, 목장흠, 목제인, 목조순, 목종하, 목중신, 목중정, 목천규, 목천상, 목천운, 목천장, 목천현, 목치상, 목형석, 목황중



조선시대 진사시 급제자
명단
목겸선, 목경우, 목기선, 목낙선, 목내선, 목달경, 목무경, 목사영, 목상경, 목상순, 목성관, 목성함, 목양석, 목용석, 목유석, 목윤경, 목윤중, 목인배, 목인수, 목인휘, 목임유, 목임일, 목임장, 목임중, 목임최, 목조눌, 목조수, 목조열, 목조우, 목존선, 목중광, 목중도, 목지경, 목지선, 목창만, 목창명, 목창조, 목천건, 목천광, 목천근, 목천린, 목천성, 목천임, 목천조, 목태석, 목행선, 목회경, 목효범, 목후경, 목희경



조선시대 음관
명단
목승석, 목양석, 목용석, 목인배, 목인재, 목인회, 목태석


5. 1. 역사적 인물


  • '''목효기'''(睦孝基) : 사천 목씨의 시조. 고려 고종 때 요무장군낭장동정(耀武將軍郞將同正)을 지냈다.
  • '''목덕창'''(睦德昌) : 목효기의 아들.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내면서 서북 방면의 반란을 평정하다 영주성(靈州城: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에서 순절하였으며, 사후에는 영주군(靈州君)에 봉해졌다.[4]
  • '''목준평'''(睦俊平) : 목덕창의 아들. 조봉대부(朝奉大夫)로 비서윤(秘書尹)을 지내고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렀다.
  • '''목인길'''(睦仁吉, 1317년 ~ 1398년) : 목효기의 6세손. 공민왕 때 병부상서(兵部尙書)와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고, 친원파와 홍건적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으며, 1377년(우왕 3)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다.[4]
  • '''목충'''(睦忠) : 목인길의 사촌 동생.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며 왜구를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7]
  • '''목자안'''(睦子安) : 목인길의 사촌 동생.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며 왜구를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 '''목진공'''(睦進恭, ? ~ 1426년) : 목효기의 7세손. 조선 태종조에 우부대언(右副代言),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등을 지내고, 세종조에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올랐다.
  • '''목세칭'''(睦世秤, 1487년 ~ ?) : 목진공의 후손. 사림파의 일원으로 기묘사화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향리에서 학문을 닦았다. 아들 목첨이 현달하여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목첨'''(睦詹, 1515년 ∼ 1593년) : 목세칭의 아들. 1567년(선조 즉위) 이조참판·도승지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고 선릉(宣陵)·정릉(靖陵)을 보살피다 병사하였다. 사후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8]
  • '''목서흠'''(睦敍欽, 1571년 ~ 1652년) : 목첨의 장남. 예조참판을 거쳐 효종조에 중추부동지사에 이르렀다. 충정공 목서흠 묘역(忠貞公 睦叙欽 墓域)은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7호로 지정되었다.[9]
  • '''목장흠'''(睦長欽, 1572년 ~ 1641년) : 목첨의 차남. 인조반정 후 호조참판·도승지를 지냈다.[10]
  • '''목대흠'''(睦大欽, 1575년 ~ 1638년) : 목첨의 막내. 예조참의를 거쳐 강원부사로 선정을 베풀었다.[11]
  • '''목행선'''(睦行善, 1609년1661년) : 목장흠의 아들. 1633년(인조 11) 식년 문과 전시(殿試)에 1등으로 장원(壯元)하였고, 대사성·승지·예조참의·황해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 '''목겸선'''(睦兼善, 1609년 ~ ?) : 목서흠의 아들. 효종 때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수찬·검상(檢詳)·부응교·사인(舍人)·집의(執義) 등을 역임하였다.
  • '''목내선'''(睦來善, 1617년 ~ 1704년) : 목서흠의 아들. 숙종조에 남인(南人)의 중진으로 온건파 탁남(濁南)에 속하였다. 1689년(숙종 15) 우의정에 이르렀고, 기사환국좌의정에 올랐다.[12]
  • '''목창명'''(睦昌明) : 목행선의 아들. 1670년(현종 11) 예문관검열, 1677년(숙종 3)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병조판서에 이르렀다.
  • '''목천성'''(睦天成) : 목서흠의 증손. 호조참의·좌부승지·형조참의 등을 지냈다.
  • '''목만중'''(睦萬中, 1727년 ~ 1810년) : 목천성의 증손. 1786년(정조 10) 문과에 장원(壯元)하였고, 1794년(정조 18) 형조판서에 임명되었고, 1801년(순조 1)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사건이 발생하자 천주교 박해를 주도하였다.[13]
  • '''목자상'''(睦子商, 1870. 2. 1 ~ 1910. 8. 4) : 독립운동가. 1906년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14]
  • '''목치숙'''(睦致淑, 1885. 2.23 ~ 1928. 4.20) : 독립운동가. 1919년 고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15]
  • '''목준상'''(睦俊相, 1891. 1. 6 ~ 1949. 2.15) : 독립운동가. 1919년 평택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199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16]
  • '''목연욱'''(睦然旭, 1916. 9. 1 ~ 1949.1.11) : 독립운동가.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17]

5. 2. 근현대 인물


  • 목만중(睦萬中, 1727년 ~ 1810년) : 1759년(영조 3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도사(都事)를 지냈다. 1786년(정조 10) 문과 중시에 장원, 도정(都正)·태산 현감을 지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영의정 심환지(沈煥之)와 함께 남인·시파(時派) 계열의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주도하였다. 후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저서에 《여와집》이 있다.[13]
  • 목자상(睦子商, 1870. 2. 1 ~ 1910. 8. 4) : 경기 양주(楊州) 사람이다. 1906년 2월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이 되어 양주(楊州)·연천(漣川)·포천(抱川) 등지에서 활동하며 8,000여 평의 소유 농지를 처분하여 의병 활동비로 제공하였다. 1907년 8월 황재호(黃在浩) 휘하 80여 명의 의병진에 입진하여 양주군 내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동지 오수영(吳壽永)·이주현(李周賢)과 같이 영근면(嶺斤面) 및 이담면(伊淡面)에서 1908년 8월 및 11월에 걸쳐 2회 동안 군자금 8400JPY을 모집하다가 피체되어 1909년 3월 9일 경성 지방 재판소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동년 8월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 포장)을 추서하였다.[14]
  • 목치숙(睦致淑, 1885. 2.23 ~ 1928. 4.20) : 일명 목홍석. 전남 고흥(高興) 출신. 1919년 3월 3일 전남 고흥군 고흥면에 거주하는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 입학을 위하여 서울에 가던 중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에 직접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1매를 가지고 고향인 고흥(高興)에 돌아왔다. 그는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 위하여 동군(同郡) 남양면(南陽面) 신흥리(新興里)에 사는 예수교인 이형숙(李亨淑)·손재곤(孫在坤)·최세진(崔世珍)·조병호(曺秉鎬)·이석완(李錫琬)에게 국제정세(國際情勢)와 독립만세운동의 필요성 등을 역설(力說), 찬동을 받아 고흥읍 장날인 4월 14일에 거사(擧事)하기로 약정하였다. 1919년 4월 7일 동지 오석주(吳錫柱)에게 태극기 80여 매와 독립선언서 100여 매를 제작케 하는 한편 고흥읍과 강동면 내(江東面內)의 예수교인에게 연락하여 동지 규합을 부탁하고 동월 10일에는 동지 한익수(韓翊洙)에게 조선독립고흥단(朝鮮獨立高興團) 이름으로 자체 선언서 10여 매를 작성하도록 하여 거사일인 4월 14일 고흥 장터로 모이도록 하였다. 그러나 심한 강우(降雨)로 인하여 시위를 못하고 고흥군수(高興郡守) 순천법원 지청장(順天法院支廳長)과 순천 헌병 분대(順天憲兵分隊) 감독 보조원 등에게 독립선언서를 우송하였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1919년 6월 13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25일 대구복심법원과 10월 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당하여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20년 8월 25일 고흥읍내 기독교 청년들의 발기로 고흥기독교청년회(高興基督敎靑年會)를 창립, 총회를 열고 회장으로 피선되었으며 조선청년회연합회에 가입하여 무학 남녀 아동들의 계몽을 위하여 야학회를 설치하고 한글, 한문, 산술 등을 가르쳤다. 1923년 2월 26일 고흥기독교청년회(高興基督敎靑年會) 주관으로 조선 물산 사용을 장려하고 조선산 의복을 입게 하며 토산품 사용과 단연 실행(斷煙實行)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4월 19일 배일사상(排日思想)의 고취를 위하여 기독교의 교리를 전도하면서 교회 건립 확장과 찬조금 460JPY을 모집하여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15]
  • 목준상(睦俊相, 1891. 1. 6 ~ 1949. 2.15) : 1919년 3월 11일 진위군 평택(平澤) 읍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나자, 평택에서는 일찍부터 만세운동을 일으키려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목준상은 평소 뜻을 같이하는 이도상(李道相) 등과 함께 3월 11일 평택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시위 운동을 일으키기로 작정하였다. 이곳은 서울과 교통이 비교적 빈번하였기 때문에 서울과 연락·정보가 빨랐던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서울에서 전달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면서 거사 준비를 추진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11일, 목준상 등은 평택 장날 평택역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군중들을 선동하였다. 그러자 장내에 있던 군중들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렇듯 만세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들에게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16]
  • 목연욱(睦然旭, 1916. 9. 1 ~ 1949.1.11) :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17]
  • 목욱상(睦頊相) : 도회의원, 주조주정회사 대표
  • 목일신(睦一新) : 한국의 아동문학가, 항일운동가, 동요 작사가
  • 목성표(睦聖表) : 초대 국무총리 심사실장
  • 목정배(睦禎培) : 동국대학교 교수,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초대 총장, 한국불교학회 회장
  • 목요상(睦堯相) : 서울대학교 법대 졸업, 사법고시 13회, 11·12·15·16대 국회의원, 대한민국 헌정회 회장
  • 목영준(睦榮埈) : 서울대학교 법학 학사, 연세대학교 법학 박사, 사법고시 19회,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 헌법재판소 재판관
  • 목창균(睦昌均) : 제14·15대 서울신학대학교 총장, 전국신학대학교협의회 회장
  • 목연수(睦演洙) : 제3대 국립 부경대학교 총장, 제4대 열린사이버대학교 이사장
  • 목진휴(睦鎭烋) : 웨스트버지니아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 국민대학교 행정학과 명예교수
  • 목돈상 :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고대 안암병원 5대 병원장
  • 목철균 : 서울대학교 학사·석사, 노스다코타 주립 대학교 대학원 이학박사, 가천대학교 교수
  • 목영만(睦榮晩) : 제8대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행정고시 25회)
  • 목정은(睦楨銀) : 의사,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분당차여성전문병원 병원장, 관동대학교제일병원 병원장
  • 목혜정 : 건국대학교 생명공학과 교수, 여성생명과학상 펠로십 수상
  • 목사균 : 서울대학교 졸업, 조선일보 기자, 광고국장, 상무이사
  • 목영재 : 의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 목하균 : KBS 방송기술연구소 수석연구원, 연구소 소장
  • 목진요 : 연세대학교 교수, 미디어아티스트
  • 목영대 : 정당인, 前진보신당 의정지원단 단장
  • 목영진 : 음악감독,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대학원 음악 석사
  • 목수정 : 작가. 프랑스 파리제8대학교 대학원 공연예술학 석사
  • 목진석 : 대한민국 바둑 국가대표 감독, 프로 바둑 기사
  • 목명균 : 부산지방법원 판사
  • 목찬수 : 전주지방검찰청 검사
  • 목서윤 : 전주 MBC 아나운서
  • 목진혁 : 파주시의회 민주당 의원
  • 목나경 : 롯데 자이언츠 치어리더
  • 목은정 : 한복 디자이너,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 목소영 : 6대·7대 성북구의회 민주당 의원
  • 승우아빠 : 셰프, 온라인콘텐츠창작자(본명:목진화)
  • 목춘수 : 대한민국의 성우(EBS 성우극회 특기)
  • 목지원 : 고려대학교 졸업, KBS 부산 아나운서
  • 목지훈 : NC 다이노스 투수
  • 목혜민 : KGC인삼공사 배드민턴 선수

6. 문화재


  • 충정공 목서흠 묘역(忠貞公 睦叙欽 墓域):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7호.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2번지 일대에 조성된 사천 목씨 묘역이다. 한성 판윤을 지낸 목진공과 그의 6세손 목서흠, 두 손자 목임기·목임일, 목임일의 아들 목천현 등의 묘가 있다. 묘역 서쪽에는 사천 목씨 영단(靈壇)과 6기의 비석이 있으며, 인근에는 재실(齋室)인 모현재(慕賢齋)가 있다. 영단에는 시조 목효기(睦孝基) 이래 6세의 단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묘가 모두 북한 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 목인길 장군묘(睦仁吉 將軍墓): 사천목씨(泗川睦氏) 찬성공파(贊成公派)의 파조(派祖) 묘로, 경상남도 사천시 정동면 수청리 산 47번지 이구산(尼丘山) 자락에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호승예불(胡僧禮佛)"이라 불린다.
  • 기로연회도(耆老宴會圖): 1690년(숙종 16년)에 그려진 화첩 그림이다. 8폭 병풍으로, 서울대학교 소장본에는 8폭이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모임 참석자를 묘사한 중앙의 2폭이 소장되어 있다. 1689년 기사환국 이후 복권된 영의정 권대운남인 세력인 좌의정 목내선 등을 자신의 저택에 초대해 재집권을 자축하는 연회를 베푼 장면이 담겨있다.
  • 목장흠 선생묘 및 신도비(睦長欽 先生墓-神道碑):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목장흠의 묘와 신도비이다. 묘는 정부인 의령 남씨와 합장묘이며, 묘역에는 혼유석, 장대석, 상석, 향로석, 묘표, 망주석 등이 있다. 신도비는 1691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대사간 황시(黃屎)가 지었고 홍문관교리 이진휴(李震休)가 글자를 썼다.
  • 목행선 선생 묘역(睦行善 先生 墓域): 경기도 동두천시 향토유적 제2호. 목행선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경기도사로 백성들의 진휼에 힘썼으며, 효종 때 황해도 관찰사로 선정을 베풀었다. 묘비는 배위(配位) 파평 윤씨, 경주 이씨와 합부(合附)되어 있고, 묘역이 새로 단장되어 있다.
  • 여와(餘窩) 목만중 초상화 : 1794년(정조 18)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을 때 그려진 실제 초상화이다.
  • 목원규 효자정문(睦源逵 孝子旌門): 목원규는 1828년(순조 28)에 용인에서 태어나 효성이 지극하여 칭송을 받았다. 1891년(고종 28)에 효자 정문을 받고 정려각이 세워졌다. 정려각은 조선시대 정려각의 모범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
  • 목일신 공원 : 경기 부천시 소사구 괴안동에 위치한 목일신 선생을 기념하기 위한 공원이다. 목일신은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이자 항일운동가, 동요 작사가, 시인으로, 동요 "자전거"를 작사했다.

참조

[1] 웹사이트 KOSIS https://kosis.kr/sta[...] 2022-11-19
[2] 웹사이트 『고려사』 네이버 2012-11-16
[3] 웹사이트 사천목씨(泗川睦氏) 한국학중앙연구원(韓国学中央研究院) 2005-11-30
[4] 웹사이트 『고려사』 권114, 열전27 https://terms.naver.[...]
[5]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사천 목씨
[6] 웹사이트 『고려사』 권114, 열전27 https://terms.naver.[...]
[7] 웹사이트 《고려사》 권133 열전 권제46 신우(禑王) 3년 4월 http://db.history.go[...]
[8] 웹인용 목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14-11-06
[9] 웹인용 목서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14-11-06
[10] 웹인용 목장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14-11-06
[11] 웹인용 목대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14-11-06
[12] 웹인용 목내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14-11-06
[13] 웹인용 목만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14-11-06
[14] 문서 註·판결문(1909. 3. 9 경성지방재판소) ·사천목씨세보(七) 33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1권 88·89면
[15] 문서 註·판결문(1919. 6. 13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판결문(1919. 7. 25 대구복심법원) ·판결문(1919. 10. 2 고등법원)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493면 ·3·1운동실록(이용락) 533면 ·사천목씨가승(고흥일가편, 1968년 여름) 27면 ·사천목씨세보(권지중)(종친회, 1988. 5월) 455·456면 ·고흥군사(고흥군사편찬위원회, 1961. 7. 20) 231면 ·고흥군지(권지2) (고흥군, 1966년판) 의사편 2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559·60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466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0권 486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478면 ·동아일보(1920. 9. 19, 1921. 7. 20, 1923. 3. 4, 1925. 4. 24)
[16] 문서 註·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116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171·172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405∼406面
[17] 문서 註·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0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413·617면
[18]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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