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요시히사 (15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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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마즈 요시히사는 1533년에 태어난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시마즈 다카히사의 아들이자 시마즈 가문의 제16대 당주였다. 그는 사쓰마, 오스미, 휴가 3개 국을 통일하여 규슈 제패를 노렸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로 인해 항복했다. 이후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가문 내 권력 다툼을 겪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가담했으나 영지를 보전했다. 만년에는 은거하여 가문의 권위를 유지하며 1611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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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요시히사 (1533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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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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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 | 시마즈 씨 |
계급 | 다이묘 |
영지 | 가고시마 |
출생지 | 이자쿠 성 |
사망지 | 고쿠부 성, 가고시마 |
아버지 | 시마즈 다카히사 |
어머니 | 셋쇼 |
형제자매 | 시마즈 요시히로 (형제), 시마즈 도시히사 (형제), 시마즈 이에히사 (이복 형제) |
혼인 여부 | 기혼 |
자녀 | 미히라 (시마즈 요시토라의 부인), 신조 (시마즈 아키히사의 부인), 가메주 (시마즈 히사야스, 후에 시마즈 다다쓰네 (이에히사)의 부인) 양자: 히사야스, 다다쓰네 (이에히사) |
가명 | 도라주마루 (어린 시절 이름) → 다다요시 → 요시타쓰 → 요시히사 |
법명 | 류하쿠 |
별칭 | 마타사부로, 사부로사에몬노죠 |
시호 | 다이코쿠토요치누시노미코토 |
계명 | 묘코쿠지덴 간묘손추안주 |
묘소 | 가고시마 시 이케노우에초의 후쿠쇼지 기리시마 시 고쿠부추오의 금강사 기리시마 시 고쿠부 가미이의 도쿠지안 |
관위 | 종5위하, 종4위하, 수리대부, 증종3위 |
경력 | |
소속 | 시마즈 씨 도요토미 씨 |
주군 | 아시카가 요시테루 → 요시아키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요토미 히데요리 |
주요 전투 | 다카바루 공성전 (1576년) 미미가와 전투 (1578년) 이와야 성 공성전 (1585년) 다치바나 공성전 (1586년) 규슈 정벌 (1586-1587년) |
가독 상속 | 1566년 |
은퇴 | 1587년 |
생몰 | |
출생 | 1533년 3월 4일 |
사망 | 1611년 3월 5일 |
2. 출신
헤이안 시대 이래의 명문가 고레무네씨(惟宗氏) 출신 고레무네노 다다야스(惟宗忠康)의 아들 시마즈 다다히사(島津忠久)가 가마쿠라 시대에 휴가국 시마즈 장원(島津荘)을 하사받아,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서는 사쓰마, 휴가, 오스미 3국의 슈고직(守護職)을 역임한 시마즈 가문 출신이다. 요시히사의 가계는 본래 시마즈씨의 분가인 이자쿠가(伊作家)였지만, 부친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가 본가의 시마즈 가쓰히사(島津勝久)의 양자가 되어, 요시히사는 본가 당주의 아들로 태어나게 되었다.[1]
시마즈 요시히사는 1533년 이사쿠 성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1] 어린 시절 이름은 토라주마루(虎寿丸)였지만, 마타사부로(又三郎)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성인식을 치른 후 타다요시(忠良)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서 한자를 받아 요시타츠(義辰)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요시히사(義久)로 개명했다.
어머니는 이리키인 시게사토(入来院重聡)의 딸인 셋쇼(雪窓)였다.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 도시히사, 시마즈 이에히사는 그의 형제였다. 1535년 이사쿠 성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1] 어린 시절 이름은 토라주마루(虎寿丸)였지만, 마타사부로(又三郎)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성인식(겐푸쿠)을 치른 후, 타다요시(忠良)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한자를 하사받아 요시타츠(義辰)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요시히사(義久)로 이름을 변경했다. 이모와 결혼했고, 이모가 사망한 후 다네가시마 토키타카의 딸이자 친척과 결혼했다.
3. 생애
1566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시마즈 씨족의 16대 당주가 되었다. 요시히로, 도시히사, 이에히사 형제들과 함께 규슈 통일을 위한 작전을 시작했다.
1572년 기자키 전투에서 이토 씨족에 승리하고, 1576년 다카바루 포위전 이후로도 계속 전투에서 승리했다.[8] 1578년 미미가와 전투에서 오토모 씨족을 격파하고 오토모 군대를 본거지까지 추격했으나, 영토를 점령하지는 않았다.[2] 1581년에는 115,000명의 병력으로 히고국 미나마타 성을 점령했다.[3] 1584년 초, 히젠국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류조지 씨족을 격파하고 아소 씨족도 격파했다.
1585년 지쿠고국 호리키리 성을 공격, 오토모의 이와야 성을 점령하여 지쿠젠국 침공을 초래했다. 1585년 중반까지 시마즈 씨족은 지쿠고, 지쿠젠, 히젠, 히고, 휴가, 오스미, 사쓰마를 장악하여[4] 오토모 영지를 제외한 규슈 대부분을 지배했고, 통일은 실현 가능한 목표가 되었다.[8]
1585년, 시마즈가 규슈 통일을 시도하는 동안, 다른 규슈 씨족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오토모 씨족과 류조지 씨족이 지원을 요청했고, 히데요시는 중재하여 요시히사에게 오토모와 평화 협정을 맺도록 요청했으나, 요시히사는 히데요시가 규슈 침략 입장이 아니라고 보며 조롱했다.
1586년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 평정이 시작되었다. 오토모씨 군대는 조소카베 모토치카, 센고쿠 히데히사, 소고 마사야스가 이끄는 시코쿠 군대의 지원을 받아 시마즈 군대를 지연시키고 히데요시 군대의 도착에 대비했다. 히데요시는 20만 명의 병력과 2만 마리의 짐을 동원하여 30만 명의 더 큰 군대를 위한 물자를 수송했다. 도요토미 히데나가는 25,000명의 병력과 3,000마리의 말을 이끌고 선봉대를 이끌었다.
1587년 4월, 히데요시는 시모노세키 해협에 도달하여 지쿠젠국과 지쿠고국을 거쳐 히고국의 요시히사를 공격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휘하의 모리씨 군대가 히데나가의 군대에 합류, 휴가국과 분고국에서 시마즈 군대를 격퇴했다. 시마즈는 선전했지만, 화포가 거의 없었고 규율과 훈련이 부족하여 질과 양 모두 우세한 적에게 꾸준히 압도당했다.
1587년 5월 말, 여러 섬의 다이묘들이 히데요시 편으로 돌아섰다. 6월에는 시마즈가 사쓰마국에서 패배, 히데요시는 가고시마성 포위전을 시작했다. 요시히사는 강화를 요청했고, 휴전이 합의되었다. 히데요시는 요시히로와 이에히사의 아들에게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지만, 요시히사는 처음에는 거부, 히데요시는 다시 시도했고 이번에는 성공했다.
시마즈 요시히사가 정복한 영토 대부분은 히데요시에 의해 가토, 고니시, 구로다 등 3명의 중신에게 주어졌고, 시마즈 씨는 사쓰마국과 오스미국, 휴가국의 절반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모리 씨는 규슈 북부에 영지를 받았고, 고바야카와는 지쿠젠을 얻었다. 요시히사는 항복의 표시로 머리를 깎았으며, 불교 승려가 되겠다고 했다. 법명은 ''류하쿠'' (龍伯)였다. 동생 요시히로가 군대를 통솔했지만, 요시히사는 여전히 영내의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들이 없었기에, 요시히로의 아들인 시마즈 타다츠네를 카메주 (亀寿)의 셋째 딸과 결혼시키고 후계자로 삼았다.[8]
영지가 히데요시에 의해 분할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요시히사를 후시미 성으로 초대했다. 이에야스와 가신들은 요시히사에게 규슈 통일 방법을 거듭 질문했고, 요시히사는 자신의 승리는 가신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요시히로가 이끄는] 나의 세 동생들과 우아이 사토카네와 야마다 아리노부와 같은 가신들이 같은 목표 아래 단결하여 훌륭하게 싸웠기 때문에, 나는 전투에서 용맹함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나는 단지 그들의 승리 소식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요시히사가 떠난 후, 이에야스는 가신들에게 "[요시히사는] 장군으로서 가신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했다. 이것이 훌륭한 장군이 해야 할 일이다"라고 말했다.
1611년 1월 21일, 고쿠부 성에서 병으로 사망했다.[7][8] 사후, 간메이손추안슈(貫明存忠庵主)라는 법명을 받았다.
3. 1. 유년기
덴분(天文) 2년(1533년) 2월 9일, 시마즈 다카히사의 적남으로 이자쿠성(伊作城)에서 태어났으며, 어릴적 이름은 '''도라주마루'''(虎寿丸)였다.
어렸을 적에는 얌전한 성격이었는데다, 세 동생이 워낙 각각 용맹하고 우수하였기 때문에 「어리석은 형과 현명한 동생의 살아 있는 예(愚兄賢弟の生きた見本)」라는 험담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부 시마즈 다다요시(島津忠良)는 「요시히사는 3주(사쓰마, 오스미, 휴가)의 총대장이 될 만한 재능과 덕을 스스로 갖추고 있으며, 요시히로는 뛰어난 무용과 지략으로 걸출하며, 도시히사는 자초지종을 따져 이해를 헤아리는 데 있어는 견줄 자가 없고, 이에히사는 군법과 전술의 묘를 얻었다」고 형제의 개성에 대한 평가를 내리며 요시히사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원복 직후에는 조부와 같은 '''다다요시'''(忠良)를 휘로 삼고, 통칭은 '''마타사부로'''(又三郎)라고 칭했다. 그 후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편휘 (「義」의 한 글자)를 받아 '''요시타쓰'''(義辰, 요시타쓰라고도 읽음), 그 후 '''요시히사'''로 개명하였다.[1]
3. 2. 3주 통일 (사쓰마, 오스미, 휴가)
덴분 23년(1554년), 시마즈 가문과 가모 씨(蒲生氏), 게도인 씨(祁答院氏), 히시카리 씨(菱刈氏) 등 사쓰마・오스미의 고쿠진(国人) 사이에 벌어진 이와쓰루기 성 전투에서 첫 출진하였다. 이후, 고쿠진과의 싸움에 참가하며, 고지 3년(1557년)에는 가모 씨가 항복하고 에이로쿠 12년(1569년)에는 오구치에서 사가라씨(相良氏)와 히시카리 씨를 몰아내고, 다음 해 겐키 원년(1570년)에는 도고 씨(東郷氏)와 게도인 씨가 항복하여, 마침내 사쓰마 통일이 이루어졌다.[8]
사쓰마 통일 도중이었던 에이로쿠 9년(1566년), 요시히사는 부친의 은거로 가독을 상속하여 시마즈 가문 제16대 당주가 되었다.
사쓰마 통일 이전부터 휴가 마사키인(真幸院)의 귀속을 둘러싸고 휴가의 이토 요시스케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겐키 3년(1572년) 5월, 이토 요시스케는 중신 이토 스케야스(伊東祐安)에게 3천의 군세를 주고 시마즈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여, 이노성(飯野城)에 있던 요시히사의 동생 시마즈 요시히로와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시마즈 군은 이토 스케야스를 필두로 500명 이상을 전사시키는 압승을 거두었다.[8]
또한, 이와 병행하여 오스미 통일도 전개하여, 덴쇼 2년(1574년)에는 오스미 통일을 달성하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휴가는 덴쇼 4년(1576년)에 이토 가문의 다카하루 성(高原城)을 공략하여, 그것을 계기로 「총 48성(惣四十八城)」을 자랑하던 이토 가문의 지성 성주들이 차례로 배반하여, 이토 가문은 쇠퇴하였다. 결국 이토 요시스케는 분고의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에게 망명하여, 시마즈 가문의 비원인 3주 통일(사쓰마, 오스미, 휴가)을 달성하였다.
3. 3. 규슈 제패를 향한 전투
시마즈 요시히사는 요시히로, 도시히사, 이에히사 등 형제들과 함께 규슈 통일을 위한 작전을 시작했다.
1572년 기자키 전투에서 이토 씨족에 승리하고, 1576년 다카바루 포위전 이후로도 계속 전투에서 승리했다.[8] 1578년 미미가와 전투에서 오토모 씨족을 격파하고 오토모 군대를 본거지까지 추격했으나, 영토를 점령하지는 않았다.[2] 1581년에는 히고국 미나마타 성을 115,000명의 병력으로 점령했다.[3] 1584년 초에는 히젠국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류조지 씨족을 격파하고 아소 씨족도 격파했다.
1585년에는 지쿠고국 호리키리 성을 공격하고, 오토모의 이와야 성을 점령하여 지쿠젠국 침공을 초래했다. 1585년 중반까지 시마즈 씨족은 지쿠고국, 지쿠젠국, 히젠국, 히고국, 휴가국, 오스미국, 사쓰마국을 장악하여[4] 오토모 영지를 제외한 규슈 대부분을 지배했고, 통일은 실현 가능한 목표가 되었다.[8]
1585년 규슈 통일 시도 중에 다른 규슈 씨족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오토모 씨족과 류조지 씨족이 지원을 요청했고, 히데요시는 중재하여 요시히사에게 오토모와 평화 협정을 맺도록 요청했으나, 요시히사는 히데요시가 규슈 침략 입장이 아니라고 보며 조롱했다.
1586년 시마즈 요시히사는 오토모의 다치바나 성 공격을 위해 진격했고, 시마즈 군 지휘관들이 다치바나 성 근처에 도착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전 씨족 지도자였던 아내 다치바나 긴치요와 함께 성을 방어했다.[5] 이후 오토모 지도자들은 히데요시에게 도움을 설득하기 위해 오사카로 갔다. 히데요시는 외교 사절에 감명을 받아 도움을 주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요시히사는 히데요시가 침략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다른 씨족들을 자위 차원에서 공격했다고 주장하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히데요시는 거부하고 군대를 규슈로 이끌었다.
3. 3. 1. 미미가와 전투 (1578년)
이토 요시스케가 망명하자, 오토모 소린은 덴쇼 6년(1578년) 10월 대군을 이끌고 휴가국에 침공했다. 소린은 무시카(務志賀, 노베오카시 무시카)에 머물렀고, 다하라 쇼닌이 총대장이 되어 4만 3천의 군세를 이끌었다. 시마즈군은 야마다 아리노부를 다카 성(高城)에, 후방 사도와라에는 시마즈 이에히사를 배치했으나, 오토모 군이 휴가국에 침공하자 이에히사 등도 다카 성에 입성하여 수비병은 3천여 명이 되었다. 오토모 군은 다카 성을 포위하여 양군 간에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11월, 요시히사는 2만여 명의 군세를 이끌고 출진하여 사도와라에 도착했다. 시마즈 군은 오토모 군에게 기습을 가해 성공했고, 다카조가와(高城川)를 사이에 두고 오토모 군 맞은편에 포진했다. 오토모 군은 소린이 진중에 없어 결속력이 부족했다. 그러던 중 오토모 군의 다키타 시게카네가 독단으로 시마즈 군을 공격했고, 이에 사에키 무네타카가 가세했다. 무질서하게 공격해 오는 오토모 군을 상대로 요시히사는 "쓰리노부세"라는 전법을 사용하여 강을 건너 공격해오는 오토모 군에게 복병을 차례차례 내보내 오토모 군을 괴멸시켰다. 시마즈 군은 다키타 시게카네, 사에키 무네타카를 비롯한 주요 무장들의 수급 2천에서 3천을 얻었다(미미가와 전투).
3. 3. 2. 오키타나와테 전투 (1584년)
미미가와 전투에서 오토모 씨가 쇠퇴하자, 히젠 국의 류조지 다카노부가 두각을 나타냈다. 류조지 다카노부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아리마 하루노부가 야츠시로에 있던 요시히사·이에히사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응한 시마즈군은 덴쇼 10년(1582년), 류조지 측의 지지와 성을 함락시켜 300명을 쳐 죽였다. 이를 계기로 하루노부는 인질을 내어 시마즈 씨에게 복속했다. 이듬해, 아리마 씨의 친척인 안토쿠 성주 안토쿠 스미토시가 류조지 씨를 배반했다. 시마즈군은 야츠시로에 대기하고 있던 니이로 타다타카·카와카미 타다카타 등 1,000여 명이 원군으로 안토쿠 성에 들어가 후카에 성을 공격했다.
덴쇼 12년 (1584년), 요시히사는 이에히사를 총대장으로 시마바라에 파견하고, 스스로는 히고 국의 미나마타까지 출진했다. 이에히사는 3,000명을 이끌고 시마바라만을 건너 안토쿠 성에 들어갔다. 아리마 세력과 합쳐 5,000여 명으로 류조지 군 2만 5천 (일설에는 6만)이라는 압도적인 병력에 맞서게 되었다. 이에히사는 오키타나와테라 불리는 습지대에서 류조지 타카노부를 비롯하여 일문·중신 등 3천여 명을 쳐 죽여 승리했다 (오키타나와테 전투). 얼마 지나지 않아 류조지 씨는 시마즈 씨의 군문에 항복하게 되었다.
3. 3. 3. 호사 전투 (1584~1586년)
덴쇼 12년(1584년), 류조지 씨가 시마즈 씨에 항복하고, 히고 국의 구마베 지카나가・지카야스 부자, 지쿠젠 국의 아키즈키 타네자네 등이 시마즈 씨에게 귀순하거나 화해했다. 덴쇼 13년(1585년), 요시히로를 총대장으로 한 시마즈 군이 히고 국의 아소 코레미츠를 무너뜨렸다(아소 전투). 이로써 히고 국을 완전히 평정하고 요시히로를 히고 수호대로 삼아 지배를 위임했다. 이 위기에 오토모 소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요시히사에게는 히데요시로부터 더 이상 규슈에서의 전쟁을 금지하는 서찰(「총무사령」)이 도착했다.[8]
시마즈 가문은 논의 끝에 요시히사의 결정으로 이를 무시하고 오토모 씨의 영지인 지쿠젠 국 공격을 명령했다. 덴쇼 14년(1586년) 7월, 요시히사는 야츠시로에 본진을 두고 지쿠젠 공격을 지휘했다. 시마즈 타다나가・이쥬인 타다무네를 대장으로 한 2만여 명이 오토모 측 지쿠시 히로카도의 가츠오 성을 공격했다. 시마즈 군의 공격에 히로카도는 아키즈키 타네자네의 중재로 항복했고, 요시히사는 히로카도를 다이젠지에 유폐했다. 이를 본 지쿠고의 하라다 노부타네・호시노 시게타네・구사노 이에키요 등, 히젠의 류조지 마사이에의 3,000여 기, 부젠의 조이 토모츠나와 나가노 코레후유의 3,000여 기 등, 다이묘와 지방 세력이 참전했다.[8]
지쿠젠・지쿠고에 남은 것은 다카하시 쇼운이 지키는 이와야 성,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지키는 타치바나 성, 다카하시 무네마스가 지키는 호만산 성뿐이었다. 7월, 시마즈 타다나가・이쥬인 타다무네를 대장으로 한 3만여 명이 이와야 성을 함락했다(이와야 성 전투). 그러나 이 전투에서 시마즈 측은 카미이 카쿠켄이 부상을 입고, 사망자 수천 명의 손실을 보았다. 직후 호만산 성도 함락했지만, 타치바나 성은 포기하고 분고 침공으로 방침을 전환했다. 시마즈 군은 철수할 때,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추격을 받아 타카토리 성・이와야 성・호만산 성을, 또한 유폐에서 탈출한 지쿠시 히로카도에게 가츠오 성을 빼앗겼다.[8]
요시히사는 히고 쪽에서 요시히로를 대장으로 한 30,700명, 휴가 쪽에서 이에히사를 대장으로 한 1만여 명에게 분고 공략을 명령했다. 그러나 요시히로는 시가 치카츠구가 지키는 오카 성을 비롯한 나오이리 군의 여러 성 공략에 시간을 낭비했기 때문에, 오토모 씨의 본거지를 공격하는 것은 이에히사뿐이었다. 이에히사는 토시미츠 소교가 지키는 츠루가 성을 공격했고, 토시미츠 소교가 전사했지만 저항은 계속되었다.[8]
12월, 오토모 군의 원군으로 센고쿠 히데히사를 군감으로 한 조소카베 모토치카・조소카베 노부치카・토가와 마사야스 등 총 6,000여 명의 도요토미 연합군의 선발대가 규슈에 상륙했다. 이에히사는 이를 맞이하기 위해 토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진했다. 전투는 적군과 아군 4,000여 명이 전사한 난전이었지만, 이에히사는 낚시 노부세 전법을 사용하여 도요토미 연합군을 압도했다. 조소카베 노부치카・토가와 마사야스가 전사하고, 도요토미 연합군이 궤멸하여 승리했다(토츠가와 전투).[8]
이 전투 후, 츠루가 성은 이에히사에게 항복했다. 오토모 요시무네는 싸우지 않고 북쪽으로 도망쳐 부젠과의 국경에 가까운 타카사키 산 성까지 도망쳤기 때문에, 이에히사는 거울 성과 코타케 성을 함락하고 북상하여 후나이 성을 함락했다. 이에히사는 오토모 소린이 지키는 우스키 성을 포위했다.[8]
3. 4.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1587년)
덴쇼 14년(1586년), 시마즈 다다나가와 이주인 다다무네를 대장으로 한 2만여 군세가 다카하시 쇼운이 지키는 이와야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이와야 성 전투).[5]
요시히사는 히고 방면에서 요시히로를 대장으로 한 3만 700여 명, 휴가 방면에서 이에히사를 대장으로 한 1만여 명의 군세로 분고 공략을 명하였다. 그러나 요시히로가 나오이라 군의 여러 성을 공략하는 데 애를 먹게 되어, 오토모 가문의 본거지를 공략하는 것은 이에히사 군뿐이었지만, 이에히사는 오토모 가문의 쓰루가 성을 함락시켰다. 오토모 군의 원군으로 센고쿠 히데히사, 조소카베 모토치카·노부치카 부자, 소고 마사야스 등 총 6천여 명의 도요토미 연합군 선발대가 규슈에 상륙하여, 헤쓰기가와(戸次川)를 사이에 두고 이에히사와 대치하였다. 전투는 양군 도합 4천여 명이 전사한 난전이었으나, 도요토미 측의 장수 조소카베 노부치카, 소고 마사야스가 전사하자 도요토미 연합군의 전열이 붕괴하여 시마즈 군이 대승을 거두었다(헤쓰기가와 전투).
큐슈 정벌|규슈 평정일본어
덴쇼 15년(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 정벌이 시작되었다. 도요토미 히데나가가 이끄는 모리·고바야카와·우키타 군 등 총 15만여 군세가 부젠에 도착하여 휴가를 경유하여 진군하였다. 이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끄는 10만여 군세가 고쿠라에 상륙하여, 히고를 경유하여 사쓰마를 목표로 진군하였다. 도요토미 군의 상륙을 알게 된 요시히사와 이에히사는 분고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게 되어, 오토모 군의 추격을 받으며 퇴각하였다. 부젠·분고·지쿠고·지쿠젠·히젠·히고의 각 다이묘와 고쿠진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차례차례 도요토미 군에 항복하였다.
히데나가 군은 야마다 아리노부 등 1500인이 농성하는 다카 성을 포위하였다. 또한 히데나가는 다카조가에서 떨어져 있는 네자로자카(根白坂)에 진을 치고 배후를 치고 들어올지도 모를 시마즈 군에 대비하였다. 시마즈 군은 요시히로와 이에히사 등 2만여 군세가 네자로자카로 일제히 공격해 들어가지만, 도리어 큰 희생을 치르고 본국으로 패주하였다(네자로자카 전투).
시마즈의 본령 사쓰마까지 도요토미 군이 진격해오자 이즈미 성(出水城) 성주 시마즈 다다토키는 싸우지 않고 항복하고, 이전부터 히데요시와 교섭하고 있던 이주인 다다무네도 스스로 인질이 되어 히데나가에게 항복, 이에히사마저 성을 내어주고 항복하였다. 요시히사는 가고시마에 돌아가 삭발하고 이름을 류하쿠(龍伯)라 고쳤다. 그 뒤, 이주인 다다무네 등과 함께 센다이(川内)의 다이헤이지에서 히데요시와 회견하고 정식으로 항복하였다. 그러나 요시히사는 항복했지만, 요시히로·도시히사·니이로 다다모토・기타고 도키히사 등은 계속 항전하였다. 요시히사는 그들에게 항복을 명령했으나, 도시히사는 불복하고 히데요시의 가마에 화살을 쏘는 사건을 일으켰다.
3. 5. 도요토미 정권 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시마즈 가문의 영지를 분할하여 요시히사에게 사쓰마국 1국을 안도하고, 동생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오스미국 1국, 조카이자 사위인 시마즈 히사야스에게 휴가국 모로카타 군을 할당하였다. 이주인 다다무네에게는 히데요시가 직접 오스미 기모쓰 군을 주었다.[8]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이후, 시마즈 가문은 이전의 세력을 잃고 도요토미 정권에 복속하게 되었다. 시마즈 가문은 가타나가리(칼 몰수)에 제대로 응하지 않고, 교토에 보내는 병력도 충분하지 않아 도요토미 정권의 의심을 샀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시마즈 가문의 불복종에 대한 소문을 요시히로에게 알리기도 했다.[8]
히데요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켜 다이묘들에게 출병을 명했으나, 시마즈 가문은 할당된 군역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히데요시는 시마즈 가문의 불복종에 대한 책임을 물어 시마즈 도시히사의 처형을 요구했고, 요시히사는 도시히사에게 자결을 명했다. 1593년에는 히사야스가 조선에서 병사하여, 그의 동생 다다쓰네가 후계자가 되었다.[8]
히데요시 사후, 사천 전투 등에서의 군공을 인정받아 시마즈 가문은 5만 석을 추가로 받았다.[10] 그러나 시마즈 가문 내부에서는 권력 다툼이 심화되어, 다다쓰네가 이주인 다다무네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요시히사는 이 사건에 대해 자신은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사전에 요시히사의 승인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11]
3. 5. 1. 료덴 체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시마즈 가문의 영지로 요시히사에게 사쓰마국 1국을 안도하고,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오스미국 1국, 시마즈 히사야스(요시히사의 조카이자 사위)에게 휴가국 모로카타 군을 할당하였다. 또한, 이주인 다다무네에게는 히데요시가 직접 오스미국 기모쓰 군을 영지로 주었다.[26] 하지만, 시마즈 가신들의 반발이 거셌고, 이토 스케타카와 다카하시 모토타네 등은 시마즈 가신들이 퇴거하지 않는다고 도요토미 히데나가에게 호소하였다.
도요토미 정권과의 절충은 주로 요시히로가 담당하였다. 그러나 시마즈 가문은 가타나가리(刀狩)에도 좀처럼 응하지 않았고, 교토에 체재시키는 병사도 충분히 보내지 않았다. 이 즈음 교토에서는 시마즈 가문에서 요시히사와 가신들이 도요토미 정권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고, 이시다 미쓰나리가 가신을 통해 요시히로에게 그 사실을 내밀히 알리기도 하였다. 또한 도요토미 정권에서 중용된 이주인 다다무네에 대한 가문 내의 반감도 높아져 갔다.
히데요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켜 각 다이묘들에게 출병을 명하였다. 그러나 시마즈 가문은 히데요시가 할당한 군역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했고, 가신 중 한 명은 히고국 나고야 성으로 향하는 도중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시마즈 가문의 불복종 자세를 본 히데요시는 불복종자의 대표로 시마즈 도시히사의 목을 요구했고, 요시히사는 도시히사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또한, 1593년 조선에서 히사야스가 병사하자, 히사야스의 동생 다다쓰네가 형수와 결혼하여 후계자가 되었다.
1594년, 요시히로는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겐치(検地, 농지 면적과 수확량 조사) 실시를 요청하였다. 조사 결과, 시마즈 가문의 석고(石高)는 늘어났으나, 요시히사의 직할령을 오스미국과 휴가국으로 옮기고, 요시히로에게 가고시마 주변의 요충지가 주어졌다.[26] 이는 히데요시 정권이 요시히로를 사실상의 시마즈 가문 당주로 여겼기 때문이며, 영지 안도의 주인장(朱印状)도 요시히로의 이름으로 내려졌다. 당주의 자리에서 쫓겨난 요시히사는 오스미국 도미쿠마 성으로 옮겨 갔지만, 시마즈 가문에 전해지는 가보는 요시히사가 가지고 가서 보유하였고, 시마즈 영내에서의 실권은 여전히 요시히사가 쥐고 있었다. 이것을 료덴 체제(両殿体制)라고 한다.
히데요시 사후 임진왜란에서의 군공을 평가받아 시마즈 가문은 5만 석의 가증을 받았다.[27] 그러나 가문 내의 알력이 격화되어, 다다쓰네가 이주인 다다무네를 참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요시히사는 미쓰나리에게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였으나, 사전에 요시히사에게 양해를 얻었다는 설도 있다.[28] 사건 뒤에는 가신들에게 다다무네의 아들 이주인 다다자네와 연락을 취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아내었다고 한다. (쇼나이의 난)
3. 5. 2. 쇼나이의 난 (159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시마즈 가문의 영지로 먼저 요시히사에게 사쓰마 1국을 안도하고, 요시히로에게 오스미 1국, 요시히로의 아들 히사야스(요시히사는 아들이 없어서 요시히로의 아들인 히사야스와 자신의 셋째 딸을 결혼시켜 후계자로 삼고 있었다)에게 휴가 모로카타 군을 할당하였다. 또한 이때, 이주인 다다무네에게도 히데요시가 직접 오스미 기모쓰 군을 영지로 주었다. 한때 규슈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시마즈 가신단의 반발이 거세어, 이토 스케타카와 다카하시 모토타네 등 시마즈의 옛 영지를 안도받은 영주들은 시마즈 가문의 가신들이 퇴거하지 않는다고 도요토미 히데나가에게 호소하였다.
도요토미 정권과의 절충은 주로 요시히로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마즈 가문은 가타나가리에도 좀처럼 응하지 않고, 교토에 체재시키는 병사도 충분히 보내지 않았다. 이 즈음 교토에서는 시마즈 가문에서는 요시히사와 가신들이 도요토미 정권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져 있어서 이시다 미쓰나리가 가신을 통해 요시히로에게 그 사실을 내밀히 알리기도 하였다. 또한 도요토미 정권에서 중용된 이주인 다다무네에 대한 가문 내의 반감도 높아져가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켜, 각 다이묘들에게 출병을 명하였다. 그러나 시마즈 가문은 히데요시가 할당한 군역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한데다, 가신 중 한 사람은 히고 나고야 성으로 향하는 도중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시마즈 가문의 불복종 자세를 느낀 히데요시는 불복종자의 대표로서 도시히사의 목을 요구하여, 요시히사는 도시히사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또한 분로쿠 2년(1593년), 조선에서 히사야스가 병사하여, 히사야스의 동생 시마즈 다다쓰네가 형수와 결혼하여 후계자가 되었다.
히데요시 사후, 조선에서의 전투가 끝나자, 사천 전투 등의 군공을 평가받아 시마즈 가문은 5만 석의 가증을 받았다.[10] 그러나 가문 내의 갈등은 심해져, 다다쓰네가 이주인 다다무네를 참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요시히사는 자신은 몰랐다고 미쓰나리에게 알렸지만, 사전에 요시히사의 승낙을 얻었다는 설도 있다.[11] 사건 후에는 가신들로부터 다다무네의 아들 이주인 다다자네와 연락하지 않겠다는 기청문을 받았다.
3. 6. 세키가하라 전투와 전후 처리 (1600년)
1600년 (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 때, 교토에 있던 요시히로는 서군에 가담했다. 요시히로는 본국에 여러 차례 원군을 요청했으나, 요시히사도 다다쓰네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29]
하지만, 요시히사와 다다쓰네는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의 고니시 유키나가의 히고국 영지인 우토 성, 무기시마 성(야쓰시로 성)이 가토 기요마사의 군세에 포위되자, 고니시 세력을 구원하기 위해 여러 장수와 군세를 보내 가토 기요마사의 군세와 교전했다. 시마즈 세력은 가토 측의 속임수에 빠져 혼고가 전사했다. 고니시 영지의 우토 성이 가토 세력에 의해 함락되자, 무기시마 성(야쓰시로 성)의 성주 대리였던 고니시 유키시게 등을 받아들인 후, 시마즈 군세는 철수했다.[12] 또한, 시마즈 군세는 히고 히토요시의 사가라 군세와 협력하여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인 사시키로 침공하여 사시키 성을 공격했다.[13]
세키가하라 본 전투 이후, 같은 해 9월 말에는 이에야스에 의해 히데타다를 총대장으로 하는 사쓰마 원정이 계획되었다.[14] 한편, 세키가하라 본 전투 이후에도 전투가 계속되던 규슈에서는, 같은 해 10월 25일에 지쿠고 야나가와 성을 함락시킨 구로다 조스이와 가토 기요마사 등에 의해, 구로다, 가토, 나베시마, 다치바나 등 규슈 다이묘 연합 군세에 의한 사쓰마 공격이 계획되었고, 이 계획이 구로다 조스이에 의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보고되었다.[12]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같은 해 11월 12일에 이에야스가 구로다 조스이에게 보낸 서찰에 의해 중지 명령이 내려졌다.[15] 또한, 이러한 계획과 병행하여 진행되던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중개로 한 구로다 조스이, 가토 기요마사 등에 의한 시마즈와의 강화도 이에야스가 중지 서찰을 발급하기 전날인 11월 11일에는 이미 성립되어, 규슈에서는 사쓰마 공격 계획은 취소되었다.[12]
시마즈 요시히사는 서군에 가담한 것은 친동생 요시히로가 한 일이며, 시마즈 가문의 당주인 자신(요시히사)은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강화 교섭을 시작했다. 이 강화 교섭은 2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교섭에서는 이에야스 측에서 요시히사의 상락을 조건으로 제시했지만, 요시히사는 가신인 가마다 마사치카나 시마즈 타다나가, 시마즈 타다츠네 등을 대신 상락시키고, 병이나 금전 부족, 길을 수리 중, 상락을 준비 중 등의 다양한 이유로 거절하는 등, 끝까지 이에야스의 요구대로 상락하지 않았다. 교섭은 요시히사가 영지의 안도를 요구하고, 이에야스가 보증하는 단계를 거쳤지만, 서찰이 이에야스 친필의 기청문이 아니라는 점을 요시히사가 따졌기 때문에, 이에야스가 자신의 이름으로 기청문을 다시 발급하여 영지 안도에 대한 추가적인 보증을 했다. 2년 동안 이에야스가 시마즈 측에 양보를 거듭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에야스의 요구인 요시히사의 상락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은 채, 1602년(게이초 7년) 12월에 요시히사의 대리인으로 시마즈 타다츠네를 상락시킴으로써 시마즈 영지의 안도가 확정되었다. 이러한 시마즈의 영지 안도는 다치바나 무네시게, 구로다 조스이, 가토 기요마사 등이 이에야스에게 적극적으로 건의하고 중재함으로써 실현되었다.[12]
요시히사를 대신하여 상락하려던 타다츠네는 상락 시에 요시히사로부터 "상락은 충효에 어긋나는 행위"라며 반대받았다.[16] 타다츠네는 요시히사나 요시히사의 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상락했기 때문에, 요시히사는 타다츠네의 상락을 추인하고 "병 때문에 상락할 수 없어서, 대신 타다츠네가 상락한다"라는 이유를 적은 서찰을 보냈다. 시마즈 가문은 가이에키를 면하고 본령 안도 처분을 받을 수 있었다.
3. 7. 만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영지를 인정받은 후인 1602년(게이초 7년), 가보인 '고주부쓰(御重物)'와 당주 자리를 정식으로 다다쓰네에게 물려주고 은거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에도 막부와 자주 서신을 교환하는 등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죽을 때까지 가문 내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가졌다. 그 즈음의 체제를 '산덴 체제(三殿体制)'라고 부른다.[30]
1604년(게이초 9년)에는 오스미에 고쿠부 성(별명은 마이쓰루 성(舞鶴城))을 축성하여 거성으로 삼았다.
그러나 딸 가메주와 다다쓰네의 불화로 다다쓰네와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었다고 한다. 다다쓰네와 가메주 부부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외손자 시마즈 히사노부를 다음 후계자로 세우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또한, 요시히로·다다쓰네 부자가 적극적으로 추진한 류큐 출병에도 반대한 것으로 여겨진다. 1610년(게이초 15년) 경에는 "류하쿠 님(龍伯, 요시히사), 이신 님(惟新, 요시히로), 주나곤 님(中納言, 다다쓰네)이 서로 소원해게 되어, 부리는 사무라이도 세 분이 달라, 세간에는 불온한 소문이 흐르고 있다"고 한다.[30]
1611년(게이초 16년) 1월 21일, 고쿠부 성에서 병사하였다. 향년 79세.[7][8] 사후, 간메이손추안슈(貫明存忠庵主)라는 법명을 받았다. 가고시마의 후쿠쇼지가 있던 자리에 묻혔으며, 그의 묘비는 그의 일족 지도자들의 묘비와 함께 남아있다. 고쿠분, 교토시의 이마 쿠마노 칸논지(今熊野観音寺), 고야산에도 그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요시히사의 초상화는 남아있지 않지만, 다이헤이지에는 히데요시에게 항복하는 모습을 묘사한 요시히사의 청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그가 죽은 후에 제작되었다.
4. 인물 및 일화
-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흥미를 느껴 혼다 다다카쓰에게 명하여 요시히사의 조카인 시마즈 도요히사를 오사카로 초청하여 미미가와 전투의 전말을 들었다. 도요히사가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간 뒤, 이에야스는 '요시히사는 듣던 것보다 훨씬 무서운 대장이다. 옛날의 구스노키 마사시게에도 전혀 밀리지 않는 지휘이다.'라고 감탄하였다고 한다.[31][18]
- 요시히사는 에도 시대 초기에 고쿠부 지방(현 가고시마현 기리시마시 고쿠분)에서 담배 생산을 장려하였다고 한다(《다이 니혼 농공전》). 남규슈는 빈곤한 고장으로 환금성이 높은 농산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담배 수입은 이후 사쓰마번의 귀중한 수입원이 되었다.
- 요시히사는 스스로를 훈계하기 위하여 침실에 역사상 희대의 악인의 초상을 걸어두고 자기 전에 하루를 반성하는 습관이 있었다. 훗날 미국의 해군 원수 니미츠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가신이 왜 악인의 초상화를 걸어두었는지 묻자, "좋은 행위는 자신이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쁜 행위는 자신도 모르게 해버리는 것이다. 항상 이 녀석들의 얼굴을 보고, 이 녀석들과 같은 짓은 하지 않겠다, 그렇게 마음먹으면, 길을 잃는 일은 없다"라고 대답했다.
-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서는 드물게도 요시히사 본인의 당시 초상화는 남아있지 않아 용모에 관해서는 불명이다. 가고시마현 사쓰마센다이시의 다이헤이지에 후세에 만들어진 요시히사 항복 동상이 있다.
- 요시히사는 지용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호소카와 유사이로부터 고킨슈를 전수받거나, 간파쿠 고노에 사키히사 등과 친분이 두터웠던 교양인이기도 했다고 한다.
- 1586년, 요시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친서를 받아 오토모 소린과 화의를 맺고 도요토미 가문에 신종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1월 11일에 호소카와 유사이 앞으로 화의와 신종을 거절하는 답장을 보냈다. 이 내용은 히데요시의 출신이 미천함을 심하게 지적하는 내용이어서, 그 후 시마즈 가문을 대하는 히데요시의 심증을 굉장히 해쳤을 가능성이 있다.[32][33]
- 오키타나와테 전투와 분고 침공전 등으로 출진할 때, 제비를 뽑아 길흉을 점치기도 했다. 특히 분고 침공전에 대해서는 몇 번이나 제비를 뽑았기 때문에, 가신 가미이 카쿠켄도 일기 등에서 한탄하고 있다. 후세의 저작이나 학자에게도 이 점은 ‘우유부단’하다고 비판받는 경우가 많다. 단, 제비로 길흉을 점치는 것은 요시히사 뿐만아니라, 부친 다카히사를 비롯한 다른 센고쿠 다이묘도 했던 일이기 때문에, 이 점만을 가지고 우유부단하고 단정하는 것은 의문점이 있다. 또한, 분고 침공전 때 몇 번이나 제비를 뽑은 것은 이 싸움에 의해 도요토미 정권과의 전면 충돌하게 되는 것을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지적도 있다.[34][21]
- 어느 날, 요시히사는 이에야스에게 전투에서의 공적 이야기를 요구받았다. 요시히사는 "동생들과 가신단을 보내어 전투를 치르게 하고 승리했을 뿐이며, 자신의 공로는 하나도 없다"라고 대답했고, 이에야스는 "스스로 손을 쓰지 않고 승리를 얻는 것 이야말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필적하는 대장의 길이다"라고 감탄하고 있다.
- 요시히사의 거성의 성문이 너무나 소박해서, 동생이 "타국의 사신이 왔을 때 부끄럽지 않겠어?"라고 말하자, "널빤지로 지붕을 덮어 훌륭하게 만들더라도, 백성들이 지쳐 있다면, 사신은 국주의 정치가 좋지 않다는 것을 간파할 것이다. 사신이 될 정도의 자는, 여러 가지 일에 주의하는 자다. 도중에, 당국의 땅을 지나 풍속, 생활을 보고, 풍요롭게 번영하고 있는지, 성문이 조악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성문은 훌륭한데 민중이 피로해하는 쪽이 문제다"라고 반박했다.
- 요시히사의 막내 동생 시마즈 이에히사는 정실의 자식이 아니라, 첩에게서 태어난 아들이며, 또한 그 어머니는 고귀한 신분이 아니었다. 형제 넷이서 함께 가고시마 요시노에서 말 몰이를 했을 때, 도시히사가 "말의 털색은 대개 어미 말과 닮았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겠지요"라고 말했다. 요시히사는 도시히사의 말을 눈치채고, "어머니를 닮는 경우도 있겠지만, 무조건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다. 아버지 말을 닮는 말도 있고, 사람도 같은 것이라고 해도, 사람은 짐승이 아니니, 마음의 덕이라는 것이 있다. 학문을 하고 덕을 닦으면, 부모보다 낫고, 또한 덕을 소홀히 하면, 부모보다 못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 요시히사에게 순사한 자 15명 중에는 "곤노조(히고 모리히데)"라는 자가 있었다. 어느 날, 출입 금지 구역인 요시히사의 사냥터에서 꿩 사냥을 하던 곤노조는, 요시히사가 온 것을 보고 도망쳤지만, 곤노조는 쫓기는 도중에 삿갓을 떨어뜨린다. 요시히사가 삿갓을 보고 보니 주인의 성명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요시히사는 미소를 지으며, 이름 부분을 지웠다. 곤노조는 이 행위로 목숨을 건졌고, 이 일을 은혜로 여겨 순사했다.[22]
5. 사세구(辞世の句)
世の中の 米と水とを くみ尽くし つくしてのちは 天つ大空|요노나카노 코메토미즈토오 쿠미츠쿠시 츠쿠시테노치와 아메츠오오조라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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