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쓰노미야 도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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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쓰노미야 도쿠마는 1906년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 육군 유년 학교를 중퇴하고 미토 고등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다. 교토 제국대학에서 가와카미 하지메의 강의를 듣고 사회과학연구회에서 활동하며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었으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되었다가 전향 후 만주사변 관련 기업에 투자하여 자금을 모았다. 이후 정계에 입문하여 자유당,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을 역임하며 평화 공존 외교와 일중, 한일 국교 회복을 주장했다. 록히드 사건과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에 항의하며 자민당을 탈당, 무소속으로 활동하며 참의원 의원을 지냈다. 그는 한국의 김대중을 지원하고 평화주의, 군축을 주장했으며, 2000년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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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쓰노미야 도쿠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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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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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06년 9월 24일 |
출생지 | 일본 제국 도쿄부 |
사망일 | 2000년 7월 1일 |
학력 | 교토 제국대학 (현 교토 대학) 중퇴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일본 공산당→) (무소속→) (민주자유당→) (자유당→) (일본민주당→) (자유민주당→) (무소속→) 신자유클럽→무소속 |
칭호 및 훈장 | 정3위 훈1등욱일대수장 훈1등서보장 |
가족 (정치가) | 아버지: 우쓰노미야 타로 장인: 고마이 도쿠조 장남: 우쓰노미야 교조 (미노화겐 제약 전 사장) 손자: 우쓰노미야 도쿠이치로 (미노화겐 제약 사장) |
의회 경력 | |
직책 | 참의원 의원 |
선거구 | (도쿄 지방구→) 비례구 |
당선 횟수 | 2회 |
취임일 | 1980년 6월 23일 |
퇴임일 | 1992년 7월 7일 |
직책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 구 도쿄 2구 |
당선 횟수 | 10회 |
취임일 | 1952년 10월 2일 - 1976년 10월 28일 1976년 12월 5일 |
퇴임일 | 1979년 9월 7일 |
2. 생애
1952년 자유당 공천으로 총선에 출마해 당선된[20] 후,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민당이 창당되자 자민당 소속이 되었다. 자민당에서는 이시바시 단잔과 미키 다케오의 계보를 이었으며, 외교면에서 평화 공존 외교와 일소·일중·일한 국교 회복을 주장했다. 1956년 12월 총재 선거 때 이시바시를 도와 그가 총재로 당선되는 데 공헌했다. 기시 노부스케 등 자민당 보수파가 미국 중심의 외교를 전개할 때 아시아·아프리카 문제 연구회를 결성해 일중 국교 회복과 한국의 민주화, 비동맹 운동 국가와의 협력을 추진했다. 알제리 전쟁 때 국민해방전선을 원조하고[21] 직접 시찰하기도 했다. 알제리가 독립한 뒤인 1963년 11월에 알제리 독립기념식에 참석했고 1967년 11월에는 혁명기념식에 참석하여 대통령 우아리 부메디엔과 회담을 했다.[22]
이시바시 사망 후에는 자민당 내에서 사실상 고립되어 입각과 당직을 얻지 못했다. 1975년 미키 다케오 총리가 도쿄도지사 선거 출마를 요청했으나[23], "국회의원으로서의 책임과 집착이 있다"라며 거절했다.[24] 1976년 록히드 사건과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 자민당 내 미키 끌어내리기에 항의하며 자민당을 탈당하고 의원직도 사임했다.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고, 하토야마 구니오, 아소 요시카타와 함께 원내 회파 '무소속클럽'을 결성해 대표가 되었다.[25]
1979년 총선에서 낙선했지만, 1980년 참원선에 신자유클럽과 사회민주연합의 추천을 받아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선 이후 우쓰노미야 군축연구실을 설립하고 월간지 『군축문제자료』를 창간했으며, 초당파적 국제군축촉진의원연맹을 결성해 국제적인 군축·평화 촉진을 위한 정치 활동을 했다. 1983년 참원선 때 덴 히데오와 야시로 에이타 등이 중심이 되어 군소 정당인 MPD·평화와 민주 운동을 창당하자 추천인이 되었다.
1986년 참원선 때 야마모토 고타로 등이 평화 운동을 주체로 한 정당 '피스 스튜디오'를 창당해 우쓰노미야를 비례대표 1번으로 옹립하려 했으나 거절했다. 이후 고스기 다카시의 요청으로 신자유클럽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같은 해 8월 신자유클럽이 자민당에 흡수될 때 동참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남았으며, 다가와 세이이치가 진보당을 창당하는 것을 도왔다.
1992년 참원선에 불출마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1997년 미노화겐제약을 주식회사로 개편했다. 2000년 7월 1일 폐렴으로 사망했다. 향년 93세. 사후에 정3위에 추서됐다.[28]
2. 1. 초기 생애 및 학창 시절
1906년 9월 24일 도쿄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육군 대장으로 조선군 사령관을 역임한 우쓰노미야 다로였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제 부립 제1중학교를 거쳐 도쿄 육군 유년 학교에 25기로 입학했으나[18] 중퇴했고, 구제 미토 고등학교(지금의 이바라키 대학)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시절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다.1928년 교토 제국대학(지금의 교토 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하여 일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선구자인 가와카미 하지메의 강의를 듣고 사회과학연구회에 참여했다. 3·15 사건 이후 우쓰노미야는 사회과학연구회의 리더 역할을 맡았으며, 미즈타 미키오의 경호를 맡았다. 이후 논문이 불경죄에 해당한다며 체포되어 대학에서 퇴학당했다.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는데, 1930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년 정도 수감 생활을 하다가 전향을 표명하면서 석방됐다.[19]
2. 2. 기업인 활동
1938년 옥중에서 전향을 표명하고 석방된 우쓰노미야 도쿠마는 만주사변과 관련된 군수기업 주식에 투자하여 큰돈을 벌었다. 이를 바탕으로 같은 해 합자회사 미노화겐제약을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19] 회사 이름은 장인인 고마이 도쿠조가 지었다고 한다. 회사 경영과 함께 '다카스기 슌스케'라는 필명으로 요미우리 신문 경제란에 군부와 혁신관료를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다.[4] 1997년에는 합자회사였던 미노화겐제약을 주식회사로 개편했다.2. 3. 정치 활동
1928년 교토 제국대학 재학 중 가와카미 하지메의 강의를 듣고 사회과학연구회에 참여하는 등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었다. 3·15 사건 이후 사회과학연구회의 리더를 맡았으며, 미즈타 미키오의 보디가드로 활동했다. 논문이 불경죄에 해당하여 체포되면서 대학에서 퇴학당했고, 일본공산당에 입당했으나 1930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년 정도 복역 후 전향을 표명하며 석방되었다.[18]만주사변 관련 군수기업 주식에 투자하여 큰돈을 벌었고, 1938년 합자회사 미노화겐제약을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했다. 회사 경영과 함께 '다카스기 슌스케'라는 필명으로 『요미우리 신문』 경제란에 군부와 혁신관료를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다.[19]
정계 입문 후에는 군축과 대공산권 평화 외교를 주장했다. 좌파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실업가로서 경제적 자유주의를 옹호하며 계획 경제에 비판적이었다. 혼합 경제나 공영 기업에도 비판적이었고, 교육 민영화를 주장했다. 농지 개혁은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정부의 농업 통제 강화에는 우려를 표했다. 노동 운동에 대한 경계심도 있었지만, 공산주의·사회주의 세력과는 상호 관용 관계 구축을 목표로 했다.[17]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전 외상 등과 함께 중일 국교 회복에 힘썼다. 중일 국교 회복 전, 일본 측은 중일 전쟁 배상 문제를 우려했으나, 우쓰노미야는 중국 정부 고위 관계자로부터 "일본 정부에 배상을 요구할 생각은 없다"는 방침을 듣고 안심했다고 한다.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대통령 후보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탄압으로 일본 망명 중이던 김대중을 보호하고 지원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 진상 규명과 김대중의 원상 회복을 주장하며 김대중을 지원했다.[21] 박정희 대통령 암살 후 서울의 봄 당시, 전두환이 일으킨 5·17 비상 계엄령 확대 조치로 김대중이 사형 판결을 받자, 스즈키 젠코 총리에게 김대중의 구명을 호소하여 사형 집행 회피와 감형에 기여했다.
북한의 김일성과 회담했을 때, 후계자를 김정일로 결정한 김일성에게 "정치가는 일대에 한정해야 합니다"라고 간언했고, 김일성은 "진정한 친구의 직언은 기쁜 것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1980년 창간한 월간지 『군축문제자료』는 평화·군축을 위한 정보 잡지로, 우쓰노미야 군축연구실에서 2010년까지 30년간 발행되었다. 우쓰노미야는 사재를 털어 평화·군축 활동과 잡지 발행을 지속했다.
매춘 부패 사건 관련 요미우리 신문 기자의 오보로 인해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여, 요미우리 신문이 이례적인 취소 기사를 게재하고 해당 기자를 징계하는 사건이 있었다.
2. 3. 1. 중의원 의원 시절
1952년 자유당 공천으로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20]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자 자민당 소속이 되었다. 자민당 내에서 이시바시 단잔, 미키 다케오 계보에 속했으며, 평화 공존 외교와 일소·일중·일한 국교 회복을 주장했다.[5] 기시 노부스케 등 자민당 보수파의 미국 중심 외교에 반대하며 아시아·아프리카 문제 연구회를 결성하여 일중 국교 회복, 한국 민주화, 비동맹 국가와의 협력을 추진했다. 알제리 전쟁 당시 국민해방전선을 원조하고[21] 직접 시찰하기도 했다.[6]1975년 도쿄도지사 선거 출마 요청을 받았으나, "국회의원으로서의 책임과 집착이 있다"라며 거절했다.[24][9]
1976년 록히드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과 자민당 내 미키 끌어내리기에 항의하며 자민당을 탈당하고 의원직도 사임했다.[10]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하토야마 구니오, 아소 요시카타와 함께 원내 회파 '무소속클럽'을 결성하고 대표를 역임했다.[25][11] 1979년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했다.
2. 3. 2. 참의원 의원 시절
1980년 참의원 통상선거에 신자유클럽과 사회민주연합의 추천을 받아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선거구에 유사법제를 공약한 구리스 히로오미가 출마하자 위기감을 느껴 이를 막고자 출마했다.[12]당선 후 우쓰노미야는 우쓰노미야 군축연구실을 설립하고 월간지 『군축문제자료』를 창간했으며, 초당파적 국제군축촉진의원연맹을 결성해 국제적인 군축·평화 촉진 활동을 시작했다.[13] 1983년 참의원 통상선거 때 덴 히데오와 야시로 에이타 등이 중심이 되어 군소 정당인 MPD(평화와 민주 운동)를 창당하자 추천인이 되었다.
1986년 참의원 통상선거 때 야마모토 고타로, 구니히로 마사오, 가타오카 마사루 등이 평화 운동을 주체로 한 정당 '피스 스튜디오'를 창당해 우쓰노미야를 비례대표 1번으로 옹립하려 했으나, 우쓰노미야는 이를 거절했다. 이후 고스기 다카시의 요청으로 신자유클럽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8월, 신자유클럽이 자민당에 흡수될 때 이에 동참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남았으며, 다가와 세이이치가 진보당을 창당하는 것을 도왔다. 1987년 가을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14]
1992년 참의원 통상선거에 불출마하며 정계를 은퇴했다.
2. 4. 정계 은퇴 이후
1992년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정계를 은퇴했다. 1997년에는 합자회사였던 미노화겐제약을 주식회사로 개편했다.[28]2000년 7월 1일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향년 93세. 사후에 정3위에 추서됐다.[28] 생전에 평화 외교를 추진하고 오랫동안 리버럴한 정치 성향을 지켜왔으며 일중 우호 관계 촉진과 한국의 야당 정치인 김대중을 지원한 공로로 전 총리대신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중의원 의장 고노 요헤이, 전 사회당 위원장 도이 다카코는 물론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각국의 정치인과 정부 관계자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알제리 독립 운동을 지원한 인연으로 알제리에서도 우쓰노미야의 죽음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29]
3. 한국과의 관계
우쓰노미야 도쿠마는 대한민국의 야당 정치인 김대중(후에 제15대 대통령)을 지원하고 보호하는 등 한국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16]
자민당 내에서 미국 중심의 외교 노선에 반대하며 한국의 민주화와 비동맹 국가와의 협력을 추진했다. 1976년에는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미온적인 대응에 항의하며 자민당을 탈당하고 의원직을 사임하기도 했다.
3. 1. 김대중 지원 활동
김대중이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피해 일본에 망명 중일 때 그를 보호하고 지원했다.[16]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발생 시 사건의 진상 규명과 김대중의 일본 귀환을 주장하며 지지했다.[16]서울의 봄 당시, 12·12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의해 김대중이 사형 선고를 받자, 스즈키 젠코 총리에게 요청하여 김대중의 사형 집행 회피와 감형을 위해 노력했다.[16]
3. 2. 한일 관계 개선 노력
우쓰노미야 도쿠마는 자유민주당(자민당) 내에서도 일관되게 한일 관계 개선을 주장한 인물이다. 1974년 저서 "일본은 새로운 흉터를 만들지 말라,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제언, 정치의 왜곡을 바로잡다"를 통해 한일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특히, 한국의 야당 정치인 김대중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탄압으로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을 보호하고, 김대중 납치 사건 때는 사건의 진상 규명과 김대중의 일본 귀환을 강력히 주장했다.[16] 5·17 비상 계엄령 확대 조치로 김대중이 사형 판결을 받자, 스즈키 젠코 총리에게 김대중의 구명을 호소하여 사형 집행을 막고 감형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16]
이러한 우쓰노미야의 노력은 과거사 문제와 독도 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는 한일 관계에서 상호 이해와 협력을 증진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평가
우쓰노미야 도쿠마는 자유민주당 내에서 보기 드문 리버럴 성향의 정치인으로, 평화 공존 외교와 일소·일중·일한 국교 회복을 주장했다. 기시 노부스케 등 당내 보수파가 미국 중심 외교를 추진할 때, 아시아·아프리카 문제 연구회를 결성하여 중국과의 국교 회복, 대한민국 민주화, 비동맹 운동 국가와 협력을 추진했다.[21] 알제리 전쟁 당시 국민해방전선을 원조하고[21] 직접 시찰하기도 했다.
이시바시 단잔 사망 후 자민당 내에서 고립되었으나, 록히드 사건과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 및 당내 미키 끌어내리기에 항의하며 탈당과 의원직 사임을 감행했다.[10] 이후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고, 신자유클럽과 사회민주연합 추천으로 참의원에도 당선되었다. 정계 은퇴 후에도 우쓰노미야 군축연구실을 설립하고 월간지 『군축문제자료』를 창간하는 등 군축·평화 운동을 이어갔다.[26]
그는 군축과 대공산권 평화 외교를 주장해 좌파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기업가로서 경제적 자유주의를 옹호하고 계획 경제에 반대하는 등 경제 우파적 면모도 보였다.[17] 농지 개혁은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정부의 농업 통제 강화에는 우려를 나타냈다.[17]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전 외상 등과 함께 중일 국교 회복에 힘썼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등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에도 기여했다. 5·17 비상 계엄령 확대 조치로 체포된 김대중의 구명을 위해 스즈키 젠코 총리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주석과 회담에서 "정치가는 일대에 한정해야 합니다"라고 간언한 일화도 있다.[30]
4. 1. 긍정적 평가
우쓰노미야 도쿠마는 평화주의와 군축을 일관되게 주장한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국제적인 긴장 완화와 핵무기 감축을 위해 노력했으며, 특히 냉전 시대에도 불구하고 중국, 북한 등 공산권 국가와의 대화와 협력을 강조했다. 이러한 노력은 경직된 외교 정책에서 벗어나 유연한 외교를 추구하려는 그의 신념을 보여준다.[30]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등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민주주의 가치 실현을 위해 노력한 점도 높이 평가받는다.[30]
활동 내용 | 상세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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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주의와 군축 | 국제 긴장 완화, 핵무기 감축 노력, 초당파적 국제군축촉진의원연맹 결성, 월간지 『군축문제자료』 창간[26] |
유연한 외교 | 냉전 시기 중국, 북한 등 공산권 국가와 대화 및 협력, 비동맹 운동 국가와 협력 추진[21] |
민주주의 지원 |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 지원, 김대중 전 대통령 보호[30] |
4. 2. 부정적 평가
-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어 일본공산당에 입당,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되었던 젊은 시절의 경력은 일부 보수 세력으로부터 비판받기도 한다.[18][19]
- 사업가 출신으로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한 경제 우파였으며, "관료 사회주의"라며 계획 경제에 반대했고, 혼합 경제나 공영 기업에도 비판적이었다. 노동운동을 경계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는 상호관용관계를 구축하고자 했다.[30] 이러한 경제적 자유주의 성향은 진보 진영 일각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 원수 김일성과 회담했을 때 김정일을 후계자로 결정했던 김일성에게 "정치인은 세습하면 안 된다"라고 언급했다. 김일성은 "진정한 친구의 직언은 기쁜 일이다"라며 미소로 답했다고 한다. 이 발언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북한과의 관계 자체에 대한 비판도 있을 수 있다.
5. 기타
- 우쓰노미야는 군축과 공산권 국가와의 평화 외교를 주장하여 좌파로 분류되기도 했지만, 사업가 출신으로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한 경제적 우파였다. 그는 관료사회주의라며 계획 경제에 반대했고, 혼합 경제나 공기업에도 비판적이었으며, 교육 민영화를 주장했다. 토지개혁에 대해서는 봉건적 요소를 없앴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정부가 농업을 통제하여 자유로운 농업 경영을 방해한다고 비판했다. 노동운동은 경계하면서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는 상호 관용 관계를 구축하고자 했다.[30]
- 대한민국의 야당 정치인이었던 김대중(후에 제15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의 탄압으로 일본에 망명했을 때 그를 보호하고 지원했다.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일본에서 한국으로 납치한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나자, 사건의 진상 규명과 김대중의 일본 귀환을 주장하며 그를 지지했다.
-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 서울의 봄이라 불리던 민주화 시기에 12·12 군사 반란으로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육군보안사령관(후에 제11·12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일으킨 5·17 쿠데타로 김대중이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자, 스즈키 젠코 총리에게 김대중의 구명을 요청하여 사형 집행을 막고 감형을 이끌어내도록 노력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 원수 김일성과 회담했을 때, 김정일을 후계자로 결정한 김일성에게 "정치인은 세습하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김일성은 "진정한 친구의 직언은 기쁜 일이다"라며 미소로 답했다고 한다.
- 우쓰노미야가 1980년에 창간한 『군축문제자료』는 평화와 군축을 위한 월간 정보 잡지로, 우쓰노미야 군축 연구실에서 2010년까지 30년간 발행했다. 우쓰노미야는 이 잡지를 무료로 국회의원들에게 배포하는 등 사재를 털어 평화와 군축 활동에 힘썼다. 적자에도 불구하고 발행을 계속한 이유에 대해 그는 선거 공약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5. 1. 요미우리 신문과의 갈등
1957년 10월 『요미우리 신문』이 우쓰노미야의 매춘 및 뇌물 수수 의혹을 보도했으나, 이는 엉터리 정보였다.[30] 우쓰노미야는 『요미우리 신문』과 검찰 관계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30] 체포된 신문기자는 불기소 처분을 받았지만, 『요미우리 신문』은 이례적으로 사회면 1면에 5줄에 걸쳐 정정 기사를 게재했고 해당 기자에게 징계휴직·좌천 처분을 내렸다.[30]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해당 기자에게 정보를 흘리는 검찰 관계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흘린 거짓 정보였다고 한다.[30]5. 2. 우쓰노미야 기념공원
우쓰노미야는 사망할 때까지 가나가와현 야마토시에 거주했다. 사망 후 유족은 소유 부지를 야마토시에 기부했고, 이 부지는 우쓰노미야 기념공원으로 정비되었다. 2002년 2월 1일 야마토시 최초의 명예 시민으로 추대되었다.[28]6. 저서
- 《官僚社会主義批判 自由主義政治の基礎》 (山雅房, 1950년)
- 《宇都宮徳馬最近の政論集》 (自由党中央機関誌再建編集局, 1952년)
- 《平和共存と日本外交》 (弘文堂, 1960년)
- 《日中関係の現実》 (普通社, 1963년)
- 《七億の隣人》 (東潮社, 1964년)
- 《アジア問題と私の立場 学生への講演》 (弘文堂, 1966년)
- 《転換する米アジア政策と日本》 (林書店, 1972년)
- 《日本は新しい痣をつくるな 日韓正常化への提言 政治の歪みを正す》 (日新報道, 1974년)
- 金日成・宇都宮徳馬会談の記録|김일성·우쓰노미야 도쿠마 회담 기록일본어 (自民党アジア・アフリカ問題研究会事務局, 1974년 10월 30일)
- 《金日成主席と語る》 (アジア太平洋研究会, 1975년)
- われら無党派|우리 무당파일본어 (하토야마 구니오, 아소 요시카타, 우쓰노미야 도쿠마 공저, 荒地出版社, 1977년 6월 24일)
- 《アジアに立つ》 (講談社, 1978년 10월)
- 《暴兵損民 なぜ軍拡に狂奔するのか》 (徳間書店, 1984년 12월)
- 《軍拡無用 21世紀を若者に遺そう》 (すずさわ書店, 1988년 4월)
- 《宇都宮徳馬追悼集》 (宇都宮徳馬追悼集刊行委員会, 2001년 10월)
7. 역대 선거 기록
선거명 | 회차 | 의원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순위 | 당락 | 비고 |
---|---|---|---|---|---|---|---|---|---|
1949년 총선거 | 24회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2구 | 민주자유당 | 27,955 | 12.7 | 4위 | 낙선 | 중선거구제 |
1952년 총선거 | 25회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2구 | 자유당 | 56,459 | 20.2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53년 총선거 | 26회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2구 | 자유당 | 48,752 | 16.5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55년 총선거 | 27회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2구 | 일본민주당 | 71,796 | 19.5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58년 총선거 | 28회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2구 | 자유민주당 | 71,014 | 16.5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0년 총선거 | 29회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2구 | 자유민주당 | 75,985 | 19.4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3년 총선거 | 30회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2구 | 자유민주당 | 72,836 | 17.4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7년 총선거 | 31회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2구 | 자유민주당 | 94,453 | 17.5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9년 총선거 | 32회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2구 | 자유민주당 | 81,827 | 17.3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2년 총선거 | 33회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2구 | 자유민주당 | 65,330 | 12.3 | 5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6년 총선거 | 34회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2구 | 무소속 | 75,869 | 15.0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9년 총선거 | 35회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2구 | 무소속 | 49,904 | 12.1 | 6위 | 낙선 | 중선거구제 |
1980년 통상선거 | 12회 | 참의원 의원 | 교토부 선거구 | 무소속 | 813,583 | 15.32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86년 통상선거 | 14회 | 참의원 의원 | 비례구 | 신자유클럽 | 37위 | 당선 | 비례대표제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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宇都宮徳馬
202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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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般社団法人 板垣退助先生顕彰会
201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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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東京陸軍幼年学校史 わが武寮』
東幼会
[4]
간행물
父とジンギスカン鍋
196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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衆議院事務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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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地理9 아프리카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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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ルジェリアを知るための62章
明石書店
2009-04
[8]
뉴스
宇都宮市に要請へ 三木首相 都知事選の自民候補
朝日新聞
1975-01-23
[9]
뉴스
宇都宮氏が固辞 自民選考出直し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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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第78回国会 衆議院 本会議 第10号 昭和51年10月28日
https://kokkai.ndl.g[...]
国会会議録検索システム
2024-09-2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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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80回国会 衆議院 議院運営委員会 第1号 昭和51年12月3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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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会会議録検索システム
202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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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1980-05-0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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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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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の叙勲に4575人 女性が史上最高の379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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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縮問題資料 宇都宮軍縮研究室 軍縮市民の会
http://www.heiw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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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宇都宮徳馬の思想史的研究 : 戦後から1949年の政界進出ま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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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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