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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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은 일본 제국의 황족으로, 다이쇼 천황의 아들이자 쇼와 천황의 동생이다. 1905년 도쿄에서 태어나 해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1930년 도쿠가와 기쿠코와 결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평화를 옹호하며 도조 히데키 내각 퇴진을 시도했다. 전후에는 다양한 사회, 문화 단체의 명예 회장을 역임하며, 1987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일기는 일본의 전쟁 관련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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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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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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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친왕 |
존칭 | 전하 |
휘 | 노부히토 (宣仁) |
궁호 | 다카마쓰노미야 (高松宮) |
아명 | 데루노미야 (光宮) |
출생 | 1905년 1월 3일 |
출생지 | 일본 제국 도쿄 부 도쿄 시 아카사카구, 아오야마 동궁 어소 (현재의 도쿄도 미나토구 아카사카) |
사망 | 1987년 2월 3일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시부야구 히로오, 일본 적십자사 의료 센터 |
매장일 | 1987년 2월 10일 |
묘소 | 일본 도쿄도 분쿄구 오쓰카, 도시마가오카 황실 묘지 |
가족 | 일본 황실 |
아버지 | 다이쇼 천황 |
어머니 | 사다코 구죠 |
배우자 | 다카마쓰노미야 비 기쿠코 (1930년 2월 4일 결혼) |
혼인 상대 | 도쿠가와 요시히사(徳川慶久)의 딸이자,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손녀 |
지표 | 어린 매화 (若梅, 와카우메) |
군사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
군종 | 해군 |
복무 기간 | 1924년 – 1945년 |
계급 | 해군 대령 |
소속 부대 | 후소, 일본 제국 해군 군령부 |
참전 |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
훈장 | 금치훈장 4등, 지나 사변 종군기장 |
주요 직책 | |
직책 | 일본 적십자사 총재, 일본 잠사회 총재, 일불회관 총재 등 |
이름 정보 | |
일본어 표기 |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高松宮宣仁親王) |
로마자 표기 | Takamatsu-no-miya Nobuhito Shinnō |
2. 생애
1905년 (메이지 38년) 1월 3일, 당시 황태자였던 요시히토 친왕과 황태자비 사다코 사이에서 도쿄의 아오야마 궁에서 태어났다.[1][2] 어릴 적 칭호(어칭호)는 '''미츠노미야''' (光宮)였다. 형인 히로히토 친왕과 야스히토 친왕처럼, 학습원 소학교 및 중등과에 다녔다.
1913년 (다이쇼 2년) 7월 10일, 아리스가와노미야 제10대 당주 타케히토 친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다이쇼 천황은 노부히토 친왕에게 '''다카마쓰노미야''' (아리스가와노미야가의 옛 칭호)의 칭호를 수여하여[8], 아리스가와노미야의 제사를 계승하게 했다.[2] 1923년 (다이쇼 12년), 타케히토 친왕의 비 야스코의 훙거 1주기를 맞이하여 동궁이 절가하게 되자, 그 제사, 그리고 저택 등의 재산은 정식으로 다카마쓰노미야에게 계승되었다.
1920년 (다이쇼 9년) 4월, 가쿠슈인 중등과 3학년을 퇴학하고 해군병학교 예과에 입학했다. 1921년 (다이쇼 10년) 8월 24일, 해군병학교 본과에 편입(52기)했다. 1924년 (다이쇼 13년) 7월 24일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소위 후보생이 되었지만, 9월에 적리 때문에 후보생 원양 항해는 단념했다.
1925년 (다이쇼 14년) 1월 3일 성년이 되어, 같은 날짜로 귀족원 황족 의원에 취임했다.[10] 1월 13일에는 성년식이 거행되었고[11], 8월에는 형인 섭정궁 황태자 히로히토 친왕의 가라후토 행차에 동행했다. 같은 해 12월 1일, 해군 소위로 임관했고, 1927년 (쇼와 2년) 12월 1일에는 해군 중위로 승진했다.[12]
1930년 (쇼와 5년) 2월 4일, 아리스가와노미야 타케히토 친왕과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손녀인 도쿠가와 키쿠코와 결혼했다.[13] 같은 해, 형인 쇼와 천황의 명대행으로 키쿠코 비와 함께 14개월에 걸쳐 구미를 순방 방문하여 5월 27일에는 미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들러 일본계 이민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14]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은 1922년부터 1924년까지 일본 해군병학교에 다녔다.[1][2] 1925년 12월 1일 소위로 임관하여 전함 ''후소''에 배치되었다. 어뢰 학교 과정을 수료한 후 이듬해 중위로 진급했다.[1][2] 1927년 가스미가우라 해군 항공 학교에서, 1930년에서 1931년까지 요코스카 해군 포술 학교에서 공부했다. 1930년, 대위로 진급하여 도쿄의 일본 해군 군령부에 배속되었다. 2년 후 순양함 ''다카오''의 함대 지휘관이 되었고, 이후 다시 ''후소''에 배치되었다.[1][2] 1935년 11월 15일 소령으로 진급한 후, 1936년에 해군대학을 졸업했다.[1][2] 1940년 11월 15일에 중령으로, 1942년 11월 1일에 대령으로 진급했다. 1936년부터 1945년까지 해군 군령부에서 다양한 참모 직책을 맡았다.
1932년 11월 29일, 해군 포술 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순양함 "다카오", 전함 "후소"의 분대장으로 보임되었다. 1934년 11월 10일, 해군 대학교에 입교 (갑종 학생 34기), 1935년 11월 15일자로 해군 소좌로 승진했다.[18] 1936년 11월 26일, 해군 대학교 졸업, 같은 해 12월 1일에 군령부 출사 겸 부원으로 보임되어 제2부 (군비), 제3부 (정보), 제4부 (통신) 등을 역임했다.
1940년 4월 29일, 지나 사변종군 기장과 공 4급 금계훈장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3일, 전함 "히에이" 포술장, 11월 15일에 해군 중좌로 진급했다. "히에이" 포술장 시대, 부하 해군 장교에게 마음가짐을 훈시할 때, "청년 장교는 현재 임무가 중요하며, 함의 중견이 되는 것이 현재의 최대 임무이다. 이것을 깨닫고 있다면 5·15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19]
1941년 4월 5일, 요코스카 해군 항공대 교관으로 보임되었다. 같은 해 11월 15일자로 해군 중좌로 승진했다.[20] 태평양 전쟁 (대동아 전쟁) 개전 직전인 11월 20일, 군령부 부원과 대본영 해군 참모를 맡았다. 이 무렵, 호시나 젠시로 (해군성 병비국장)에게 일본군의 실정을 듣고, 연료 부족을 이유로 쇼와 천황에게 개전 신중론을 진언했다.[21]
1942년 11월 1일, 해군 대좌로 승급했다. 개전 후에도 평화를 주장하며,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등의 평화파 황족이나 요나이 미쓰마사 전 수상 등을 비롯한 해군 좌파, 고노에 후미마로 전 수상 및 수상으로 전후에 재임하는 요시다 시게루 등의 정계의 평화파와 결탁했다.
1944년 여름 무렵에는 정부의 방침에 이의를 제기하는 언동을 반복하고 있었으며, "절대 국방권이 깨진 이상 대동아 공영권 건설의 이상을 버리고 어떻게 하면 더 좋게 질 수 있을지를 모색해야 한다", "1억 옥쇄 등 사실상 불가능하다. 신문 등은 옥쇄 정신만을 논하고 있어 잘못되었다"라고 주장했다.
1945년 4월 9일, 전국의 악화를 받아, 민심 일신을 위해, 형 쇼와 천황의 명대로 이세 신궁을 참배했다.
연합군 최고 사령관 총사령부 (GHQ/SCAP)이 진주할 무렵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수상의 명령을 받아 아쓰기 해군 비행장에서 철저 항전을 주장하는 제302해군 항공대를 상대로 무장 해제를 설득하러 갔다.
해군 병학교 재학 중에는 특별 대우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도 하였으나, 전함 "히에이"에 근무할때는 주변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한 장교로서 충실하게 근무하였다. 1977년에는 마쓰나가 이치로가 해군 시대 회상기를 출판하자, "해군의 결점, 단점을 써두면 그것이 후세를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며 해군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69]
전후, 1971년에는 이오 섬의 전적지를 방문하여, 이오 섬 전투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1930년 2월 4일,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은 도쿠가와 요시히사의 둘째 딸인 도쿠가와 기쿠코(1911–2004)와 결혼했다.[1] 신부 도쿠가와 기쿠코는 마지막 도쿠가와 막부의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손녀이자, 아리스가와 다케히토 친왕의 손녀였다.[2] 결혼 직후, 다카마쓰 친왕 부부는 일본과 이들 국가 간의 친선과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유럽과 미국을 거치는 세계 일주 여행을 시작했다.[2] 도쿠가와 이에사토 친왕은 다카마쓰 친왕 부부의 삼촌으로, 많은 국제 친선 사업에서 다카마쓰 친왕 부부와 협력했다.
다카마쓰 친왕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었다.[1]
1930년대부터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은 만주에서의 일본의 침략 행위와 미국과의 전쟁을 결정한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1][2]
1944년 7월 사이판 전투 이후,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은 그의 어머니 데이메이 황후, 그의 삼촌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왕자, 아사카 야스히코 왕자, 전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 및 다른 귀족들과 함께 일본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의 축출을 모색했다.[2]
일본의 항복 이후,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은 자신의 저택에서 미국 점령군 장교들을 자주 접대했다.[2] 전후에는 주로 의례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일본 미술 협회, 덴마크-일본 협회, 프랑스-일본 협회,[1] 나병 환자 복지를 위한 두부 협회, 양잠 협회, 일본 농구 협회, 사이세 복지 협회 등 다양한 자선, 문화 및 체육 단체의 명예 회장을 역임했다. 일본 적십자사[1](현재 명예 회장은 황후 마사코)의 후원자이자 NBTHK(일본 미술 도검 보존 협회)의 주요 기부자였으며, 미타카 (도쿄)에 위치한 국제기독교대학교 (ICU) 설립 준비 위원회의 명예 회장을 역임했다.
1950년 (쇼와 25년)경의 다카마쓰노미야와 동비.
종전 당시 군령부 제1부장 토미오카 사다토시 소장의 구상으로, 유사시 황통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황통호지작전에 협력했다. 노부히토 친왕에 따르면 "여러 가지 플랜이 있었고, 필요한 때에 어느 것을 골라 실행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29]。 또한 저택의 본관을 광륜각으로 개칭하고, 윌러비, 휘트니 등 점령군 (GHQ) 관계자를 초대하여 쇼와 천황의 칙지를 전하는 등, 종전 직후의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천황제의 유지에도 힘썼다. 1946년 (쇼와 21년) 5월 23일, 귀족원 의원을 사직했다.[30]
종전 직전인 1945년 (쇼와 20년) 7월 21일부터 일본 적십자사의 총재를 맡고 있었지만, GHQ에 의한 공직 추방의 영향으로 1948년 (쇼와 23년) 7월 31일에 물러났다.[31]
1951년 (쇼와 26년) 10월경, 다카마쓰노미야는 노무라 요시사부로 전 대장을 통해 구 해군 관계자에게 '강화 조약 발효 후 황실 유지와 "재군비 정신을 환기"시키기 위해 쇼와 천황은 양위하고, 새로운 천황이 재군비 후의 신 "국군"을 지휘한다'는 명령을 전달했다고 한다.[32]
1975년 (쇼와 50년) 2월호의 분게이슌주에 정치 평론가 카세 히데아키와의 인터뷰 기사 '다카마쓰노미야, 이렇게 말했다'가 게재되었다. 이 안에서 다카마쓰노미야는 개전 시에 쇼와 천황에게 전쟁 반대를 진언한 것과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패배 이후에는 전쟁 종결을 위해 노력했던 것을 말했다. 또한, 그 후의 수기 발표 등 전시 중에 평화파로서 활동했다고 하는 내용에 쇼와 천황이 불쾌감을 나타냈다고도 한다.[33] 그러나 쇼와 천황은 다카마쓰노미야에 관해 "정부 당국의 의견보다 주위의 동년배나 출입하는 자들의 의견에 휩쓸리기 쉽고, 일독 동맹 체결 이후 전쟁을 칭송했지만, 도조 내각 성립 후에는 개전에 반대했고, 그 후 해군의 의견에 따랐으며, 개전 후에는 비관적이고 육군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파악하고 있었고,[34] 다카마쓰노미야에 대해서는 복잡한 심경이 있었다. 그 후 쇼와 천황은 이리에 스케마사 시종에게 명하여 당시의 기억을 적어두게 했다.[35]
노부히토 친왕은 스포츠, 국제 친선 교류, 후생, 미술, 공예 등 다방면에 걸친 활동을 했다. 특히 경마의 다카마쓰노미야배(현 다카마쓰노미야 기념)에 관해서는 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매년 관전했으며, 스스로 우승컵을 수여하기도 했다.
자생회 등의 총재를 맡아 사회 활동에도 공헌했다. 빨간 깃털 공동 모금은 미국의 자선 복지 관습을 일본에 도입한 것으로, 노부히토 친왕이 사회 사업 공동 모금 중앙 위원회(중앙 공동 모금회)의 총재로서 닭을 도살할 때 나오는 깃털을 "적심"(≒진심)에 비유하여 붉게 물들여 모금의 심볼로 할 것을 제안한 데서 유래한다.[59]
1947년에는 황족으로서는 처음으로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고 있던 국립 요양소 구리이케센엔을 방문했다.[60]
전후에는 미일 친선 활동의 일환으로, 국제기독교대학(ICU)의 설립 준비 위원회 명예 총재를 맡았다.
골프나 스키를 즐겼으며, 따뜻한 계절에는 부부가 여러 차례 각지의 골프장을 방문하여 플레이를 즐겼고, 눈이 오는 계절에는 자주 설산에서 스키를 즐겼다. 여름에는 다카나와의 저택 수영장을 근처 아이들을 위해 개방했다.
외향적인 성격으로 알려진 노부히토는 전쟁 전에는 "경호원 몰래 자유롭게 돌아다녔다"고 하며, 전쟁 후에는 "경호원 없이 긴자의 술집에 자주 나타났다"고 한다.[2] 1970년, 다카마쓰노미야 친왕은 일제강점기가 1945년에 끝난 후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한 황족이 되었다.[2] 1973년에는 해상자위대 함선을 사적으로 방문할 것이라고 발표되면서 비판을 받았고, 그 계획은 반발로 인해 취소되었다.[2]
1953년에 형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이 폐결핵으로 위독해졌을 때, 쇼와 천황은 동생 궁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36] 1986년 노부히토 친왕이 말기 폐암에 걸렸을 때, 쇼와 천황은 세 번에 걸쳐 문병을 갔다.[36] 노부히토 친왕에게는 병명이 "노인성 결핵"으로 알려졌다.[36]
1987년 2월 3일, 노부히토 친왕 훙거 당일, 쇼와 천황은 스자키 어용저에서의 요양을 중단하고 마지막 문병을 갔다.[37] 쇼와 천황이 병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친왕의 의식이 없었지만, 노부히토 친왕비 기쿠코의 부탁으로 손을 잡았다.[37] 약 1시간 후인 13시 10분, 노부히토 친왕은 폐암으로 도쿄 히로오의 일본 적십자사 의료센터에서 훙거했다.[37]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이후 34년 만에 황족의 장례가 치러져, 궁내청은 렴장의 운영 방법을 모색했다. 2월 10일, 렴장의가 거행되었고, 오치아이 재장에서 화장된 후, 같은 날 도요시마 오카 묘지에 매장되었다.
사후, 전시 중을 포함해 27년간 20권에 걸쳐 쓰여진 『다카마쓰노미야 일기』가 오이 아쓰시에 의해 "국보급 자료"로 평가받았으며, 기쿠코 비의 노력으로 궁내청의 반대를 무릅쓰고 간행되었다.[38]
2. 1. 탄생과 성장
1905년 (메이지 38년) 1월 3일, 당시 황태자였던 요시히토 친왕과 황태자비 사다코 사이에서 도쿄의 아오야마 궁에서 태어났다.[1][2] 어릴 적 칭호(어칭호)는 '''미츠노미야''' (光宮)였다. 형인 히로히토 친왕과 야스히토 친왕처럼, 학습원 소학교 및 중등과에 다녔다.
1913년 (다이쇼 2년) 7월 10일, 아리스가와노미야 제10대 당주 타케히토 친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다이쇼 천황은 노부히토 친왕에게 '''다카마쓰노미야''' (아리스가와노미야가의 옛 칭호)의 칭호를 수여하여[8], 아리스가와노미야의 제사를 계승하게 했다.[2] 1923년 (다이쇼 12년), 타케히토 친왕의 비 야스코의 훙거 1주기를 맞이하여 동궁이 절가하게 되자, 그 제사, 그리고 저택 등의 재산은 정식으로 다카마쓰노미야에게 계승되었다.
1920년 (다이쇼 9년) 4월, 가쿠슈인 중등과 3학년을 퇴학하고 해군병학교 예과에 입학했다. 1921년 (다이쇼 10년) 8월 24일, 해군병학교 본과에 편입(52기)했다. 1924년 (다이쇼 13년) 7월 24일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소위 후보생이 되었지만, 9월에 적리 때문에 후보생 원양 항해는 단념했다.
1925년 (다이쇼 14년) 1월 3일 성년이 되어, 같은 날짜로 귀족원 황족 의원에 취임했다.[10] 1월 13일에는 성년식이 거행되었고[11], 8월에는 형인 섭정궁 황태자 히로히토 친왕의 가라후토 행차에 동행했다. 같은 해 12월 1일, 해군 소위로 임관했고, 1927년 (쇼와 2년) 12월 1일에는 해군 중위로 승진했다.[12]
1930년 (쇼와 5년) 2월 4일, 아리스가와노미야 타케히토 친왕과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손녀인 도쿠가와 키쿠코와 결혼했다.[13] 같은 해, 형인 쇼와 천황의 명대행으로 키쿠코 비와 함께 14개월에 걸쳐 구미를 순방 방문하여 5월 27일에는 미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들러 일본계 이민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14]
|thumb|1930년(쇼와 5년) 7월 14일, 파리의 알렉상드르 3세 거리에서 프랑스군의 사열식을 사열(오른쪽부터 3번째). 모나코 공 루이 2세, 두메르그 프랑스 대통령 등과 함께.]]
2. 2. 해군 복무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은 1922년부터 1924년까지 일본 해군병학교에 다녔다.[1][2] 1925년 12월 1일 소위로 임관하여 전함 ''후소''에 배치되었다. 어뢰 학교 과정을 수료한 후 이듬해 중위로 진급했다.[1][2] 1927년 가스미가우라 해군 항공 학교에서, 1930년에서 1931년까지 요코스카 해군 포술 학교에서 공부했다. 1930년, 대위로 진급하여 도쿄의 일본 해군 군령부에 배속되었다. 2년 후 순양함 ''다카오''의 함대 지휘관이 되었고, 이후 다시 ''후소''에 배치되었다.[1][2] 1935년 11월 15일 소령으로 진급한 후, 1936년에 해군대학을 졸업했다.[1][2] 1940년 11월 15일에 중령으로, 1942년 11월 1일에 대령으로 진급했다. 1936년부터 1945년까지 해군 군령부에서 다양한 참모 직책을 맡았다.|thumb|200px|1943년 6월. 흰색 테이블 뒤에 서 있는 장교가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1932년 11월 29일, 해군 포술 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순양함 "다카오", 전함 "후소"의 분대장으로 보임되었다. 1934년 11월 10일, 해군 대학교에 입교 (갑종 학생 34기), 1935년 11월 15일자로 해군 소좌로 승진했다.[18] 1936년 11월 26일, 해군 대학교 졸업, 같은 해 12월 1일에 군령부 출사 겸 부원으로 보임되어 제2부 (군비), 제3부 (정보), 제4부 (통신) 등을 역임했다.
1940년 4월 29일, 지나 사변종군 기장과 공 4급 금계훈장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3일, 전함 "히에이" 포술장, 11월 15일에 해군 중좌로 진급했다. "히에이" 포술장 시대, 부하 해군 장교에게 마음가짐을 훈시할 때, "청년 장교는 현재 임무가 중요하며, 함의 중견이 되는 것이 현재의 최대 임무이다. 이것을 깨닫고 있다면 5·15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19]
1941년 4월 5일, 요코스카 해군 항공대 교관으로 보임되었다. 같은 해 11월 15일자로 해군 중좌로 승진했다.[20] 태평양 전쟁 (대동아 전쟁) 개전 직전인 11월 20일, 군령부 부원과 대본영 해군 참모를 맡았다. 이 무렵, 호시나 젠시로 (해군성 병비국장)에게 일본군의 실정을 듣고, 연료 부족을 이유로 쇼와 천황에게 개전 신중론을 진언했다.[21]
1942년 11월 1일, 해군 대좌로 승급했다. 개전 후에도 평화를 주장하며,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등의 평화파 황족이나 요나이 미쓰마사 전 수상 등을 비롯한 해군 좌파, 고노에 후미마로 전 수상 및 수상으로 전후에 재임하는 요시다 시게루 등의 정계의 평화파와 결탁했다.
1944년 여름 무렵에는 정부의 방침에 이의를 제기하는 언동을 반복하고 있었으며, "절대 국방권이 깨진 이상 대동아 공영권 건설의 이상을 버리고 어떻게 하면 더 좋게 질 수 있을지를 모색해야 한다", "1억 옥쇄 등 사실상 불가능하다. 신문 등은 옥쇄 정신만을 논하고 있어 잘못되었다"라고 주장했다.
1945년 4월 9일, 전국의 악화를 받아, 민심 일신을 위해, 형 쇼와 천황의 명대로 이세 신궁을 참배했다.
연합군 최고 사령관 총사령부 (GHQ/SCAP)이 진주할 무렵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수상의 명령을 받아 아쓰기 해군 비행장에서 철저 항전을 주장하는 제302해군 항공대를 상대로 무장 해제를 설득하러 갔다.
해군 병학교 재학 중에는 특별 대우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도 하였으나, 전함 "히에이"에 근무할때는 주변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한 장교로서 충실하게 근무하였다. 1977년에는 마쓰나가 이치로가 해군 시대 회상기를 출판하자, "해군의 결점, 단점을 써두면 그것이 후세를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며 해군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69]
전후, 1971년에는 이오 섬의 전적지를 방문하여, 이오 섬 전투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2. 3. 결혼
1930년 2월 4일,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은 도쿠가와 요시히사의 둘째 딸인 도쿠가와 기쿠코(1911–2004)와 결혼했다.[1] 신부 도쿠가와 기쿠코는 마지막 도쿠가와 막부의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손녀이자, 아리스가와 다케히토 친왕의 손녀였다.[2] 결혼 직후, 다카마쓰 친왕 부부는 일본과 이들 국가 간의 친선과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유럽과 미국을 거치는 세계 일주 여행을 시작했다.[2] 도쿠가와 이에사토 친왕은 다카마쓰 친왕 부부의 삼촌으로, 많은 국제 친선 사업에서 다카마쓰 친왕 부부와 협력했다.
다카마쓰 친왕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었다.[1]
2. 4. 제2차 세계 대전
1930년대부터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은 만주에서의 일본의 침략 행위와 미국과의 전쟁을 결정한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1][2]1944년 7월 사이판 전투 이후,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은 그의 어머니 데이메이 황후, 그의 삼촌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왕자, 아사카 야스히코 왕자, 전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 및 다른 귀족들과 함께 일본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의 축출을 모색했다.[2]
2. 5. 전후 활동
일본의 항복 이후,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은 자신의 저택에서 미국 점령군 장교들을 자주 접대했다.[2] 전후에는 주로 의례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일본 미술 협회, 덴마크-일본 협회, 프랑스-일본 협회,[1] 나병 환자 복지를 위한 두부 협회, 양잠 협회, 일본 농구 협회, 사이세 복지 협회 등 다양한 자선, 문화 및 체육 단체의 명예 회장을 역임했다. 일본 적십자사[1](현재 명예 회장은 황후 마사코)의 후원자이자 NBTHK(일본 미술 도검 보존 협회)의 주요 기부자였으며, 미타카 (도쿄)에 위치한 국제기독교대학교 (ICU) 설립 준비 위원회의 명예 회장을 역임했다.1950년 (쇼와 25년)경의 다카마쓰노미야와 동비.
종전 당시 군령부 제1부장 토미오카 사다토시 소장의 구상으로, 유사시 황통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황통호지작전에 협력했다. 노부히토 친왕에 따르면 "여러 가지 플랜이 있었고, 필요한 때에 어느 것을 골라 실행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29]。 또한 저택의 본관을 광륜각으로 개칭하고, 윌러비, 휘트니 등 점령군 (GHQ) 관계자를 초대하여 쇼와 천황의 칙지를 전하는 등, 종전 직후의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천황제의 유지에도 힘썼다. 1946년 (쇼와 21년) 5월 23일, 귀족원 의원을 사직했다.[30]
종전 직전인 1945년 (쇼와 20년) 7월 21일부터 일본 적십자사의 총재를 맡고 있었지만, GHQ에 의한 공직 추방의 영향으로 1948년 (쇼와 23년) 7월 31일에 물러났다.[31]
1951년 (쇼와 26년) 10월경, 다카마쓰노미야는 노무라 요시사부로 전 대장을 통해 구 해군 관계자에게 '강화 조약 발효 후 황실 유지와 "재군비 정신을 환기"시키기 위해 쇼와 천황은 양위하고, 새로운 천황이 재군비 후의 신 "국군"을 지휘한다'는 명령을 전달했다고 한다.[32]
1975년 (쇼와 50년) 2월호의 분게이슌주에 정치 평론가 카세 히데아키와의 인터뷰 기사 '다카마쓰노미야, 이렇게 말했다'가 게재되었다. 이 안에서 다카마쓰노미야는 개전 시에 쇼와 천황에게 전쟁 반대를 진언한 것과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패배 이후에는 전쟁 종결을 위해 노력했던 것을 말했다. 또한, 그 후의 수기 발표 등 전시 중에 평화파로서 활동했다고 하는 내용에 쇼와 천황이 불쾌감을 나타냈다고도 한다.[33] 그러나 쇼와 천황은 다카마쓰노미야에 관해 "정부 당국의 의견보다 주위의 동년배나 출입하는 자들의 의견에 휩쓸리기 쉽고, 일독 동맹 체결 이후 전쟁을 칭송했지만, 도조 내각 성립 후에는 개전에 반대했고, 그 후 해군의 의견에 따랐으며, 개전 후에는 비관적이고 육군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파악하고 있었고,[34] 다카마쓰노미야에 대해서는 복잡한 심경이 있었다. 그 후 쇼와 천황은 이리에 스케마사 시종에게 명하여 당시의 기억을 적어두게 했다.[35]
노부히토 친왕은 스포츠, 국제 친선 교류, 후생, 미술, 공예 등 다방면에 걸친 활동을 했다. 특히 경마의 다카마쓰노미야배(현 다카마쓰노미야 기념)에 관해서는 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매년 관전했으며, 스스로 우승컵을 수여하기도 했다.
자생회 등의 총재를 맡아 사회 활동에도 공헌했다. 빨간 깃털 공동 모금은 미국의 자선 복지 관습을 일본에 도입한 것으로, 노부히토 친왕이 사회 사업 공동 모금 중앙 위원회(중앙 공동 모금회)의 총재로서 닭을 도살할 때 나오는 깃털을 "적심"(≒진심)에 비유하여 붉게 물들여 모금의 심볼로 할 것을 제안한 데서 유래한다.[59]
1947년에는 황족으로서는 처음으로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고 있던 국립 요양소 구리이케센엔을 방문했다.[60]
전후에는 미일 친선 활동의 일환으로, 국제기독교대학(ICU)의 설립 준비 위원회 명예 총재를 맡았다.
골프나 스키를 즐겼으며, 따뜻한 계절에는 부부가 여러 차례 각지의 골프장을 방문하여 플레이를 즐겼고, 눈이 오는 계절에는 자주 설산에서 스키를 즐겼다. 여름에는 다카나와의 저택 수영장을 근처 아이들을 위해 개방했다.
외향적인 성격으로 알려진 노부히토는 전쟁 전에는 "경호원 몰래 자유롭게 돌아다녔다"고 하며, 전쟁 후에는 "경호원 없이 긴자의 술집에 자주 나타났다"고 한다.[2] 1970년, 다카마쓰노미야 친왕은 일제강점기가 1945년에 끝난 후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한 황족이 되었다.[2] 1973년에는 해상자위대 함선을 사적으로 방문할 것이라고 발표되면서 비판을 받았고, 그 계획은 반발로 인해 취소되었다.[2]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은 1987년 2월 3일 폐암으로 시부야 (도쿄)에 위치한 일본 적십자사 의료 센터(ja)에서 사망했다.[1] 1986년 7월에 이 질병을 진단받았다.[2] 그의 유해는 분쿄구에 위치한 토시마가오카 묘지에 안장되었다.
2. 6. 사망
1953년에 형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이 폐결핵으로 위독해졌을 때, 쇼와 천황은 동생 궁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36] 1986년 노부히토 친왕이 말기 폐암에 걸렸을 때, 쇼와 천황은 세 번에 걸쳐 문병을 갔다.[36] 노부히토 친왕에게는 병명이 "노인성 결핵"으로 알려졌다.[36]1987년 2월 3일, 노부히토 친왕 훙거 당일, 쇼와 천황은 스자키 어용저에서의 요양을 중단하고 마지막 문병을 갔다.[37] 쇼와 천황이 병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친왕의 의식이 없었지만, 노부히토 친왕비 기쿠코의 부탁으로 손을 잡았다.[37] 약 1시간 후인 13시 10분, 노부히토 친왕은 폐암으로 도쿄 히로오의 일본 적십자사 의료센터에서 훙거했다.[37]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이후 34년 만에 황족의 장례가 치러져, 궁내청은 렴장의 운영 방법을 모색했다. 2월 10일, 렴장의가 거행되었고, 오치아이 재장에서 화장된 후, 같은 날 도요시마 오카 묘지에 매장되었다.
사후, 전시 중을 포함해 27년간 20권에 걸쳐 쓰여진 『다카마쓰노미야 일기』가 오이 아쓰시에 의해 "국보급 자료"로 평가받았으며, 기쿠코 비의 노력으로 궁내청의 반대를 무릅쓰고 간행되었다.[38]
3. 다카마쓰노미야 일기
1991년, 다카마쓰노미야 기쿠코 비와 측근은 1921년부터 1947년까지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이 직접 작성한 20권의 일기를 발견했다. 궁내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 일기를 잡지 ''주오코론''에 넘겨주었고, 잡지는 1995년에 발췌본을 게재했다. 일기 전체는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주오코론샤에서 8권으로 출판되었다.
일기는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이 1931년 9월 관동군의 만주 침략,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의 제2차 중일 전쟁으로의 확대를 격렬히 반대했으며, 1941년 11월 형인 쇼와 천황에게 일본 제국 해군이 미국과의 적대 행위를 2년 이상 지속할 수 없다고 경고했음을 밝혀냈다. 그는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패배한 후 형인 쇼와 천황에게 평화를 모색할 것을 촉구했는데, 이 개입은 두 형제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일기는 다이쇼 10년(1921년)부터 쇼와 22년(1947년)까지의 매일의 공무가 기록되어 있으며, 1991년 다카마쓰노미야 부속 궁무관이 궁저 창고에서 발견했다. 기쿠코 비의 강한 희망으로 일부 편집을 거쳐 출판되었으며, 편집위원은 호소카와 모리사다, 오이 아쓰시, 아카와 히로유키, 도요다 구마오이다.
『다카마쓰노미야 일기』의 출판 정보는 다음과 같다.
권 | 발행년도 | ISBN | 전국서지번호 |
---|---|---|---|
제1권 | 1996년(헤이세이 8년) 3월 | ISBN 4-12-403391-5 | |
제2권 | 1995년(헤이세이 7년) 6월 | ISBN 4-12-403392-3 | |
제3권 | 1995년(헤이세이 7년) 11월 | ISBN 4-12-403393-1 | |
제4권 | 1996년(헤이세이 8년) 7월 | ISBN 4-12-403394-X | |
제5권 | 1996년(헤이세이 8년) 11월 | ISBN 4-12-403395-8 | |
제6권 | 1997년(헤이세이 9년) 3월 | ISBN 4-12-403396-6 | |
제7권 | 1997년(헤이세이 9년) 7월 | ISBN 4-12-403397-4 | |
제8권 | 1997년(헤이세이 9년) 12월 | ISBN 4-12-403398-2 |
4. 평가 및 유산
5. 훈장
국화대수장 대수장 (1925년 2월 1일)
욱일대수장 대수장
보관대수장 대수장
금계훈장 4급 (1940년 4월 29일)
지나사변종군기장 (1940년 4월 29일)
벨기에: 레오폴드 훈장 대십자장 (1930년)
스웨덴: 세라핌 훈장 기사 (1930년)
이탈리아: 최고 성모 수태 고지 훈장 기사
스페인: 카를로스 3세 훈장 칼라 (1930년)[3]
영국: 로열 빅토리아 체인 (1930년 수여, 1942년 철회)[4]
포르투갈: 탑과 칼 훈장 대십자장 (1930년)
체코슬로바키아: 백사자 훈장 대십자장 (1931년)
5. 1. 일본 훈장
국화대수장 대수장 (1925년 2월 1일)욱일대수장 대수장
보관대수장 대수장
금계훈장 4급 (1940년 4월 29일)
지나사변종군기장 (1940년 4월 29일)
제도 부흥 기념장 (1931년 12월 5일)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 (1940년 8월 15일)
5. 2. 외국 훈장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이 외국으로부터 받은 주요 훈장은 다음과 같다.[3][4]- 벨기에: 레오폴드 훈장 대십자장 (1930년)[42][43]
- 스웨덴: 세라핌 훈장 기사 (1930년)[45]
- 이탈리아: 최고 성모 수태 고지 훈장 기사
- 스페인: 카를로스 3세 훈장 칼라 (1930년)[47]
- 영국: 로열 빅토리아 체인 (1930년 수여, 1942년 철회)
- 포르투갈: 탑과 칼 훈장 대십자장 (1930년)[48]
- 체코슬로바키아: 백사자 훈장 대십자장 (1931년)[53]
- 네덜란드: 오라녜나사우 훈장 대십자장 (1930년)[44]
- 노르웨이: 성 올라브 훈장 대십자장 (1930년)[46]
- 유고슬라비아 왕국: 카라조르제의 별 훈장/Order of Karađorđe's Star영어 대십자장 (1931년)[49]
- 루마니아 왕국: 카롤 1세 훈장/Order of Carol I영어 대십자장 (1931년)[50]
- 헝가리 왕국: 헝가리 왕국 메리트 훈장/Order of Merit of the Kingdom of Hungary영어 대십자장 (1931년)[51]
-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Ehrenzeichen für Verdienste um die Republik Österreich (1922)de 금장 (1931년)[52]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 (1931년)[54]
국명 등은 수훈 당시 기준이다. 날짜는 일본 관보에서 수훈한 (헌정된) 날짜 또는 해당 국가 관보 등에서 수여된 날짜 중 빠른 날짜를 따른다.
6. 가계
메이지 천황
고메이 천황
나카야마 요시코
야나기와라 나루코
야나기하라 미쓰요시
하세가와 우타노
테이메이 황후
구조 미치타카
구조 히사타다
스게야마
노마 이쿠코
노마 요리
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