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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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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더글러스 맥아더는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에서 미군과 연합군 지휘관으로 활약한 미국의 군인이자 기업인이다. 그는 필리핀 식민지 통치자, 극동군 지휘관,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관리자 등을 역임했다. 1941년 미국 육군 대장으로 현역 복귀하여 1944년 육군 원수로 진급했다. 한국 전쟁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했으나, 트루먼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기업인으로 활동했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긍정적, 부정적 평가를 모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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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5년의 더글러스 맥아더.
1945년의 맥아더
별칭더그아웃 더그
빅 치프
직책
류큐 열도 통치자1950년 12월 15일 ~ 1951년 4월 11일
유엔군 사령관1950년 7월 7일 ~ 1951년 4월 11일
극동 사령부 사령관1947년 1월 1일 ~ 1951년 4월 11일
연합군 최고 사령관1945년 8월 14일 ~ 1951년 4월 11일
필리핀 연방 정부 군사 고문1935년 ~ 1941년
미국 육군 참모총장1930년 11월 21일 ~ 1935년 10월 1일
필리핀 군관구 사령관1928년 10월 1일 ~ 1930년 10월 2일
미국 육군사관학교 교장1919년 ~ 1922년
개인 정보
출생일1880년 1월 26일
출생지미국 아칸소주 리틀록
사망일1964년 4월 5일
사망지미국 워싱턴 D.C.
안장 장소맥아더 기념관
정당공화당
배우자루이스 크롬웰 브룩스 (1922년 결혼, 1929년 이혼)
진 페어클로스 (1937년 4월 30일 결혼)
자녀아서
아버지아서 맥아더 주니어
친척맥아더 가문
잉크로 쓴 필기체 서명
맥아더 서명
군사 정보
충성미국
필리핀
군 종류미국 육군
필리핀 육군
복무 기간1903년 ~ 1964년
최종 계급육군 원수 (미국 육군)
육군 원수 (필리핀 육군)
지휘유엔군 사령부
극동 사령부
연합군 최고사령부
미국 태평양 육군
남서 태평양 지역
미국 극동 육군 부대
필리핀 군관구
미국 육군 참모총장
필리핀 사단
미국 육군사관학교 교장
42 사단
84 보병 여단
참전 전투필리핀-미국 전쟁
전후 반란
바나나 전쟁
베라크루스 점령
제1차 세계 대전
뤼네빌-바카라 방어 작전
샹파뉴-마른 공세
생미엘 전투
뫼즈-아르곤 공세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 전역 (1941–1942)
바탄 전투
티모르 전투
산호해 해전
뉴기니 전역
후온 반도 전역
시오 전투
코코다 트랙 전역
카트휠 작전
살라마우아-라에 전역
나자브 상륙
솔로몬 제도 전역
부건빌 전역
뉴브리튼 전역
애드미럴티 제도 전역
뉴조지아 전역
필리핀 전역 (1944–1945)
레이테 해전
오르모크 만 해전
루손 전투
마닐라 전투
보르네오 전역
일본 점령
한국 전쟁
부산 방어선 전투
대구 전투
포항동 전투
인천 상륙 작전
부산 방어선 공세
제2차 서울 전투
1950년 유엔 공세
유엔군의 북한 진격
제2차 공세
1951년 유엔 공세
청천강 전투
장진호 전투
유엔군의 북한 철수
흥남 철수
제3차 서울 전투
썬더볼트 작전 (1951)
라운드업 작전 (1951)
횡성 전투
제3차 원주 전투
킬러 작전
리퍼 작전
커리지어스 작전
러기드 작전
서훈명예 훈장
수훈 십자 훈장 (3회)
육군 수훈 훈장 (5회)
해군 수훈 훈장
은성 훈장 (7회)
수훈 비행 십자 훈장
동성 훈장
항공 훈장
퍼플 하트 (2회)
태극 무공 훈장
기타 정보
일본어 이름ダグラス・マッカーサー (다구라스 맛카사)

2. 주요 이력

더글러스 맥아더는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에서 미군과 연합군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필리핀 식민지 통치자였으며,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는 극동군 지휘관을 지냈다. 또한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역시 그의 관리 대상이었다.

1937년 잠시 퇴역하여 필리핀 명예 육군 대장으로 추대되었다가, 4년 후인 1941년 미국 육군 대장으로 현역 복귀, 1944년 미국 육군 원수 계급으로 진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과 일본 항복 후 일본에 주둔하며 한국 전쟁을 지휘했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군 사령관으로 참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민군대구까지 밀고 내려왔으나, 신의 한 수 였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세를 역전시키고 인민군을 남북으로 양분시키는 데 성공했다(자세한 내용은 인천상륙작전 참고). 1945년부터 1951년까지 외국인 신분으로 일본 군 점령사령부(도쿄 소재) 수장(원수) 직위를 지냈다. 이후 미합중국 육군 원수예편했다.

맥아더는 캘리포니아주, 포트 메이슨에서 부모와 졸업 휴가를 보냈으며, 당시 그의 아버지(육군 소장)는 태평양 사령부를 지휘하고 있었다. 1903년 10월 필리핀으로 출발하는 제3공병대대에 합류, 일로일로로 보내져 캠프 조스만에서 부두 건설을 감독했다. 그는 타클로반, 칼바요그, 세부에서 측량을 실시했다. 1903년 11월, 기마라스에서 작업하던 중 필리핀 강도 또는 게릴라 2명에게 매복 공격을 받았고, 그 자리에서 모두 사살했다. 1904년 4월 마닐라에서 중위로 진급했다. 1904년 10월, 바탄에서 측량 중 말라리아와 완선에 걸려 복무 기간이 단축되었다.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캘리포니아 토사 위원회에 배속되었고, 1905년 7월 태평양 사단의 수석 엔지니어가 되었다.

1905년 10월, 맥아더는 아버지의 부관으로 임명되기 위해 도쿄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맥아더 가문을 알았던 한 사람은 "아서 맥아더는 내가 본 가장 과장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지만, 그의 아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고 썼다.[65] 그들은 나가사키, 고베, 교토에서 일본 군사 기지를 시찰한 후, 상하이, 홍콩, 자바, 싱가포르를 거쳐 인도로 향하여 1906년 1월 콜카타에 도착했다. 인도에서 그들은 마드라스, 투티코린, 퀘타, 카라치, 북서 변경 및 카이베르 고개를 방문했다. 그 후 방콕과 사이공을 거쳐 중국으로 건너가 광저우, 칭다오, 베이징, 톈진, 한커우, 상하이를 둘러본 후 6월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다음 달에 그들은 미국으로 돌아왔다. 아서 맥아더는 포트 메이슨에서 다시 임무를 수행했으며, 여전히 더글러스가 그의 부관으로 있었다. 9월, 더글러스는 워싱턴 배럭스의 제2공병대대에 보고하고 엔지니어 학교에 입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요청으로 "백악관 행사 지원 부관"으로 일했다.

1907년 8월, 맥아더는 부모가 살고 있는 밀워키의 엔지니어 지구 사무실로 보내졌다. 1908년 4월, 그는 포트 리븐워스에 배치되어 제3공병대대 K중대에서 첫 지휘를 맡았다. 그는 1909년에 대대 부관이 되었고, 1910년에는 포트 리븐워스에서 엔지니어 장교가 되었다. 맥아더는 1911년 2월에 대위로 진급했으며, 군사 공학부 및 야전 공병 학교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1911년 기동 사단과 함께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서 훈련에 참가했고, 1912년 1월과 2월에는 파나마에서 파견 근무를 했다. 1912년 9월 5일,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더글러스와 그의 형제 아서는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되어 밀워키로 돌아왔다. 맥아더는 어머니가 존스 홉킨스 병원 근처에 있을 수 있도록 워싱턴 D.C.로 전근을 요청했다. 육군 참모총장 레너드 우드 소장은 미국 육군 장관 헨리 L. 스팀슨과 이 문제를 논의했고, 스팀슨은 1912년에 맥아더를 참모총장실에 배치하도록 조치했다.

3. 성명 표기

더글러스 맥아더의 성(last name)은 영어로 로 발음된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매카서'''로 표기해야 하지만, 국립국어원표준국어대사전에 수록된 관습적 통용 표기를 존중하여 '''맥아더'''로 표기 용례를 정했다.[310]

더글러스 맥아더는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아칸소주 리틀록의 병영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아서 맥아더 주니어는 미국 남북 전쟁에 참전하여 명예 훈장을 받았고, 중장까지 진급했다.[1] 어머니 메리 핑크니 하디 맥아더는 저명한 노퍽, 버지니아 가문 출신이었다.[1] 맥아더는 어머니와 매우 가까웠으며, 8살 무렵까지 어머니는 그에게 치마를 입히고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려 컬을 유지했다.[2]

1889년 가족이 워싱턴 D.C.로 이사하면서 맥아더는 포스 공립 학교에 다녔고, 이후 웨스트 텍사스 군사 학교에서 수석 졸업생으로 선정되었다.[1]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추천을 받지 못해 미국 육군 사관학교 입학에 실패했지만, 시험에 합격하여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했다.[1]

1899년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한 후, 어머니는 학교 근처 호텔로 이사하여 뒷바라지했다.[1] 웨스트포인트에서 가혹 행위가 만연했고, 맥아더는 가혹 행위에 연루된 생도들에 대해 증언했지만, 자신의 가혹 행위를 축소했다.[1] 맥아더는 1903년 6월 11일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공병대에서 소위로 임관했다.[1]

맥아더 가문은 원래 스코틀랜드 귀족의 혈통으로,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로버트 1세를 지지하여 영토를 얻었지만, 세력 다툼에서 패하여 몰락했다.[1] 할아버지 아서 맥아더 시니어는 1828년 가족과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 왔다.[1] 아버지 아서 맥아더 주니어는 남북 전쟁에 종군했으며, 1875년 뉴올리언스에서 메리 핑크니 하디와 결혼하여 1880년 더글러스 맥아더가 태어났다.[1] 어린 시절 맥아더는 군 요새 안에서 생활했다.[1]

1898년 미서 전쟁이 시작되자 아버지 아서는 필리핀으로 출정했고, 맥아더 가문과 필리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1] 형 아서는 애너폴리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동생 더글러스는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목표로 공부했다.[1]

4. 생애

더글러스 맥아더의 생애는 그의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보여준다.

맥아더는 1880년 1월 26일 아칸소주 리틀록 병영에서 군인 자녀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서 맥아더 주니어는 당시 대위였으며, 어머니 메리 핑크니 하디 맥아더("핑키")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였다. 아서 주니어는 미국 남북 전쟁 중 미션 고지 전투에서 북군으로 활약하며 명예 훈장을 받았고, 후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핑키는 노퍽, 버지니아의 저명한 가문 출신으로, 남북 전쟁에서 남부를 지지한 가족들 때문에 결혼식 참석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맥아더는 또한 미 해군의 준장인 매튜 C. 페리와도 친척 관계이다.[1] 맥아더는 유년 시절을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육군 주둔지에서 보냈으며, "글을 읽거나 쓸 수 있기 전, 사실 걷고 말하기도 전에 말을 타고 총을 쏘는 법을 배웠다"고 회고록에 기록했다. 그는 어머니와 매우 가까웠으며, 8살 무렵까지 어머니는 그에게 치마를 입히고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려 컬을 유지했다.[2]

1889년 7월, 맥아더 가족은 워싱턴 D.C.로 이사했고, 그는 포스 공립 학교에 다녔다. 1893년 9월에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로 이주하여 웨스트 텍사스 군사 학교에 다녔다. 그는 학업과 품행으로 금메달을 받았고, 학교의 테니스, 미식축구, 야구 팀에서 활약했다. 그는 100점 만점에 97.33점으로 수석 졸업생으로 졸업했다. 맥아더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에게 웨스트포인트 임명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테오발트 오트젠 하원 의원의 임명을 위한 시험에 합격하여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게 된다.

맥아더는 1899년 6월 13일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했고, 그의 어머니는 학교가 내려다보이는 호텔로 이사했다. 웨스트포인트 재학 시절, 가혹 행위가 만연했고, 맥아더는 동급생 율리시스 S. 그랜트 3세와 함께 남부 출신 생도들로부터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생도 오스카 부즈가 가혹 행위를 당한 후 사망하자 의회 조사가 시작되었고, 맥아더는 가혹 행위에 연루된 생도들에 대해 증언했다. 맥아더는 2학년 때 B 중대에서 하사관, 3학년 때 A 중대에서 수석 상사, 마지막 해에는 제1대장을 맡았다. 그는 야구 팀에서 좌익수로 뛰었고, 학업적으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1903년 6월 11일, 그는 93명의 졸업생 중 수석으로 졸업하여 미국 공병대에 소위로 임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령으로 진급한 맥아더는 전쟁 장관 뉴턴 D. 베이커의 사무실에서 정보국 수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미 육군 최초의 언론 담당관으로 활동했다.[293] 1917년 독일 선전포고 이후, 맥아더는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방위군을 서부 전선에 투입하는 데 대한 합의를 얻었다. 그는 여러 주의 부대로 구성된 제42사단("레인보우 사단")을 창설하고 참모장이 되었으며, 대령으로 진급했다.[294] 맥아더는 사단의 핵심 동력으로 훈련, 사기 진작, 세부 사항 관리 등 모든 면에서 활약했다.[297]

제42사단은 1917년 10월 18일 서부 전선으로 출항했고, 맥아더는 1918년 준장으로 진급하여 84보병 여단장, 42사단 임시 사단장을 맡았다.

1962년에 미국 상하원은 맥아더에게 "의회 및 미국 국민의 감사"를 표하는 특별 결의안을 채택했다. 83세 생일을 앞두고, 그는 도쿄 올림픽 미국 선수단 내 분쟁을 중재하는 마지막 공무를 수행했다. 자신이 지휘했던 일본 부흥의 상징적인 이벤트였던 도쿄 올림픽을 맥아더는 보지 못했다.

1962년 5월,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 육군 사관학교로부터 을 받았고, 생도들 앞에서 마지막 열병과 연설을 했다.

1964년 3월 6일, 맥아더는 노쇠로 인한 간과 신장 기능 부전으로 워싱턴 D.C.의 월터 리드 육군 병원에 입원하여 4월 5일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연방 의사당에 안치되었고, 버지니아 주노퍽에서 국장이 거행되었다. 존슨 대통령은 전 세계 미국 군 기지에서 조포를 발사하도록 명령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맥아더는 참전을 자원했고, 1941년 7월 현역으로 복귀하여 필리핀 주재 미국 극동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1942년 3월에는 서남 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 1944년에는 원수가 되었다. 맥아더는 태평양 전선에서 '섬 건너뛰기 전술'로 전세를 역전시켰고, 1945년 일본군을 격파하고 필리핀에 상륙했다. 이후 대일(對日) 점령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8월 30일 일본 땅에 첫 발을 디뎠다.[312]

1945년 8월 14일, 일본은 연합국에 포츠담 선언 수락을 통보했고, 맥아더는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일본의 항복에 입회하게 되었다.

맥아더는 일본의 탈군국주의화 정책을 추진하며 사회주의노동운동을 통해 자본가를 견제하려 했지만, 한국 전쟁 발발과 트루먼과의 갈등으로 인해 이러한 시도들은 퇴색되었다.

1945년부터 1946년까지 맥아더는 히로히토 천황을 대신하여 일본의 권력을 장악하며 일본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집정관 역할을 했다. 맥아더는 일본을 통치하기 위해 천황의 "인간 선언"을 이끌어내고 성서를 대량으로 유포하는 등 종교를 통해 일본을 순응시키려 했다.[167]

맥아더는 쇼와 천황의 격을 낮추기 위해 그와 나란히 기념사진을 찍었고, 이는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맥아더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소에서 선고된 전쟁 범죄에 대한 형을 확인하고 집행할 책임이 있었으며, 이시이 시로와 731 부대의 다른 구성원들이 인체 실험 데이터를 제공하는 대가로 기소 면제를 받도록 권고했다.[162]

맥아더는 탈군국주의 정책을 통해 일본 사회의 민주화를 추진했지만, 한편으로는 천황을 보호하고 그의 권위를 이용하여 일본을 통치하려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주종환 동국대학교 경제학 명예교수에 따르면, 맥아더는 노동 운동 묵인, 재벌 해체, 농지 개혁 등을 통해 소득 재분배를 추진하여 농민과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향상시키고 일본 경제를 활성화했다.

맥아더는 일본 재건, 군국주의 및 초국가주의 근절, 정치적 시민 자유 증진, 민주 정부 수립을 지원하며 일본을 세계 주요 산업 강국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맥아더는 로저 내시 볼드윈을 초청하여 일본 정부와 국민에게 시민의 권리와 자유에 대해 가르치도록 했다. 볼드윈은 맥아더에 대해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관찰은 내가 어떤 민간인에게서도 들은 최고의 수준이며, 장군으로서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라고 말했다.[33]

1947년 5월 3일에 발효된 새로운 헌법은 천황이 각료들의 조언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의원내각제 정부를 수립하고, 국가 정책의 수단으로서 호전 행위와 상비군의 유지를 금지하는 제9조를 포함했다. 이 헌법은 또한 여성 참정권 부여, 기본적 인권 보장, 인종 차별 금지, 의회와 내각의 권한 강화, 경찰과 지방 정부 분권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38]

맥아더는 1949년 일본 정부에 권력을 이양했지만, 1951년 4월 11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될 때까지 일본에 머물렀다.

4. 1. 생애 초기

군인 자녀인 더글러스 맥아더는 1880년 1월 26일 아칸소주 리틀록 병영에서 아서 맥아더 주니어(미 육군 대위)와 그의 아내 메리 핑크니 하디 맥아더(별칭 "핑키") 사이에서 태어났다.[1] 아서 주니어는 스코틀랜드 태생의 법학자이자 정치인인 아서 맥아더 시니어의 아들이었다.[1] 아서 주니어는 나중에 미국 남북 전쟁 중 미션 고지 전투에서 북군으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 훈장을 받았고, 중장으로 진급했다.[1] 핑키는 저명한 노퍽, 버지니아 가문 출신이었다.[1] 그녀의 형제 두 명은 남북 전쟁에서 남부를 위해 싸웠으며,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했다.[2] 맥아더는 또한 미 해군의 준장인 매튜 C. 페리와도 먼 친척 관계이다.[1] 아서와 핑키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더글러스는 막내였고, 아서 3세(1876년생)와 맬컴(1878년생)의 뒤를 이었다.[1] 가족은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육군 주둔지를 전전하며 살았다. 환경은 열악했고, 맬컴은 1883년 홍역으로 사망했다.[1] 맥아더는 회고록인 ''추억''에서 "나는 글을 읽거나 쓸 수 있기 전, 사실 걷고 말하기도 전에 말을 타고 총을 쏘는 법을 배웠다."라고 썼다.[1] 더글러스는 어머니와 매우 가까웠고 종종 "엄마 아들"로 여겨졌다. 8살 무렵까지 어머니는 그에게 치마를 입히고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려 컬을 유지했다.[2]

맥아더의 변방에서의 삶은 1889년 7월 가족이 워싱턴 D.C.로 이사하면서 끝났고, 그곳에서 그는 포스 공립 학교에 다녔다.[1] 그의 아버지는 1893년 9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맥아더는 웨스트 텍사스 군사 학교에 다녔으며, "학문과 품행"으로 금메달을 받았다.[1] 그는 학교 테니스 팀에서, 학교 미식축구 팀의 쿼터백, 학교 야구 팀의 유격수로 활약했다. 그는 100점 만점에 97.33점으로 수석 졸업생으로 선정되었다.[1] 맥아더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윌리엄 매킨리로부터 더글러스에게 웨스트포인트의 미국 육군 사관학교에 대통령 임명을 받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둘 다 거절당했다.[1] 그는 나중에 테오발트 오트젠 하원 의원의 임명을 위한 시험에 합격하여 93.3점을 받았다.[1] 그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것은 내가 결코 잊지 못할 교훈이었다. 준비는 성공과 승리의 열쇠이다."[1]

|thumb|left|upright|1890년대 후반 웨스트 텍사스 군사 학교의 학생으로서의 맥아더|alt=화려한 의자와 그 위에 책이 놓인 테이블. 남자는 미국 남북 전쟁 스타일의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의자에 앉아있다. 소매에는 일등 상사의 롬버스를 향한 세 개의 줄무늬가 있다.]]

맥아더는 1899년 6월 13일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했고, 그의 어머니는 학교 부지가 내려다보이는 크레이니 호텔의 스위트룸으로 이사했다.[1] 이 당시 웨스트포인트에서는 가혹 행위가 만연했고, 맥아더와 그의 동급생 율리시스 S. 그랜트 3세는 남부 출신 생도들로부터 특별한 주목을 받았는데, 이는 그들이 크레이니에 사는 어머니를 둔 장군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생도 오스카 부즈가 가혹 행위를 당한 후 웨스트포인트를 떠나 결핵으로 사망하자, 의회 조사가 시작되었다. 맥아더는 1901년 특별 의회 위원회에 출두하여 가혹 행위에 연루된 생도들에 대해 증언했지만, 다른 생도들이 위원회에 모든 것을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혹 행위를 축소했다. 의회는 이후 "괴롭히고, 압제적이며, 학대하고, 부끄럽고, 모욕적이거나 굴욕적인 성격"의 행위를 금지했지만 가혹 행위는 계속되었다.[1] 맥아더는 2학년 때 B 중대에서 하사관이었고, 3학년 때 A 중대에서 수석 상사였으며, 마지막 해에는 제1대장이었다.[1] 그는 야구 팀에서 좌익수로 뛰었고, 학업적으로는 2470.00점 만점에 2424.12점 또는 98.14%를 받아 역대 세 번째로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그는 1903년 6월 11일 93명의 졸업생 중 수석으로 졸업했다.[1] 당시 최고 득점 생도들이 미국 공병대에 임관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맥아더는 그 부대에서 소위로 임관했다.[2]

맥아더 가문은 원래 스코틀랜드 귀족의 혈통으로 명문 가문이었다. 캠벨 씨족의 흐름을 이어받아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로버트 1세를 지지하여 광대한 영토를 얻었지만, 그 후 영주들 간의 세력 다툼에서 패하여 몰락했다고 전해진다.[1] 1828년, 당시 소년이었던 할아버지 아서 맥아더 시니어는 가족과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하여 맥아더 가문은 미국 국민이 되었다[1]

아버지 아서 맥아더 주니어는 16세 때 남북 전쟁에 종군한 전형적인 군인이었으며, 남북 전쟁이 끝나고 일단 제대하여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법학을 공부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1866년에는 군에 재입대했다. 1875년에 뉴올리언스의 잭슨 병영에 근무할 때, 버지니아주 노퍽 출신으로 볼티모어의 부유한 면화 상인의 딸이었던 메리 핑크니 하디와 결혼하여, 1880년에 군인인 아버지의 임지였던 아칸소주 리틀록의 병기창 병영에서 맥아더 가문의 셋째 아들로 더글러스 맥아더가 태어났다. 이 무렵은 서부 개척 시대의 말기로, 인디언과의 전쟁 때문에 서부 지역 곳곳에 군의 요새가 건설되었으며, 맥아더가 태어난 지 5개월 후, 가족은 뉴멕시코주의 윈게이트 요새로 향하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1883년에 둘째 아들 말콤이 병사했다. 말콤의 병사는 어머니 메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남은 두 아들 중 특히 셋째 아들 더글러스를 몹시 사랑하게 되었다. 이어서 포트 셀든 요새로 아버지 아서가 전속되었고, 가족도 따라갔다. 그 때문에 더글러스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군 요새 안에서 생활하게 되었다[1]

그 후에도 가족은 전국을 전전했지만, 1898년 4월에 미서 전쟁이 시작되자 아버지 아서는 준장이 되어,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으로 출정했고, 맥아더 가문과 필리핀의 깊은 인연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필리핀이 스페인으로부터 미국에 할양되자, 소장으로 승진하여 사단장이 되어 있던 아버지 아서는 그 후에 시작된 미국-필리핀 전쟁에서도 활약하여, 필리핀 주둔 미국군 사령관으로 승진했다[1] 그러나 1892년에 형 아서는 애너폴리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1896년에는 해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동생 더글러스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목표로 공부 중이었기 때문에 가족은 필리핀으로 따라가지 않았다[1]

4. 1. 1. 출생과 소년기

더글러스 맥아더는 1880년 아칸소주 리틀록의 병영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 이민자 가문인 군인 집안에서 자랐으며, 어린 시절 뉴욕 주 올버니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후 뉴욕주 뉴욕 시티에서 성장했다. 위로는 두 형 아서 맥아더 3세(1876~1923)와 맬컴 맥아더(1878~1883)가 있었으나, 맬컴은 5세 때인 1883년에 사망했다.

맥아더의 아버지 아서 맥아더 2세(중장 예편)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맥아더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아서는 미국-스페인 전쟁미국-필리핀 전쟁에 참전했으며, 1900년 미국필리핀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필리핀 군정 총독으로 재직했다. 아서는 행군 때마다 사병들과 똑같이 걸으며 지휘관이 먼저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맥아더는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했다.

어머니 메리 하디 맥아더(Mary Pinkney Hardy MacArthur)는 아들의 교육에 헌신적이었다. 그녀는 아들이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했을 때 웨스트포인트 근처에 방을 얻어 숙식하며 뒷바라지했다.

맥아더 가문은 원래 스코틀랜드 귀족 혈통의 명문 가문이었다. 캠벨 씨족의 흐름을 이어받아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로버트 1세를 지지하여 광대한 영토를 얻었지만, 영주들 간의 세력 다툼에서 패하여 몰락했다고 한다. 1828년, 할아버지 아서 맥아더 시니어가 가족과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하여 맥아더 가문은 미국 국민이 되었다[232].

아버지 아서 맥아더 주니어는 16세 때 남북 전쟁에 종군한 군인이었으며, 남북 전쟁이 끝난 후 법학을 공부했지만 곧 군에 재입대했다. 1875년 뉴올리언스의 잭슨 병영에서 근무할 때 버지니아주 노퍽 출신의 메리 핑크니 하디와 결혼하여 1880년 아버지의 임지였던 아칸소주 리틀록의 병기창 병영에서 더글러스 맥아더가 태어났다. 당시 맥아더 가족은 서부 개척 시대 말기에 인디언과의 전쟁으로 서부 지역 곳곳에 건설된 군 요새에서 생활했다. 맥아더가 태어난 지 5개월 후, 가족은 뉴멕시코주의 윈게이트 요새로 이주했지만, 그곳에서 1883년 둘째 아들 말콤이 병사했다. 말콤의 죽음은 어머니 메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녀는 남은 두 아들, 특히 더글러스를 몹시 사랑하게 되었다. 이후 아버지 아서가 포트 셀든 요새로 전속되면서 가족은 그곳에서 함께 지냈다. 그 결과 더글러스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군 요새 안에서 보냈다[232].

1898년 4월 미서 전쟁이 시작되자 아버지 아서는 준장이 되어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으로 출정했고, 맥아더 가문과 필리핀의 깊은 인연이 시작되었다. 전쟁 후 필리핀이 미국에 할양되자 아서는 소장으로 승진하여 사단장이 되었고, 미국-필리핀 전쟁에서도 활약하여 필리핀 주둔 미국군 사령관으로 승진했다[232]. 1892년 형 아서는 애너폴리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1896년 해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동생 더글러스는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목표로 공부 중이었기 때문에 가족은 필리핀으로 따라가지 않았다[232].

어머니 메리 핀크니 하디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맥아더는 성인이 된 후에도 어머니의 강한 지배를 받았으며, 평생 마더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232]. 맥아더는 어린 시절 군사 요새 안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6세가 될 때까지 어머니에게 교육을 받았다. 어머니는 맥아더가 자신에게 의존하는 기간을 늘리기 위해 머리를 길게 땋아 치마를 입혔다[232].

그 후 아버지 아서가 워싱턴으로 전근하면서 맥아더는 8세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웨스트 텍사스 군사 훈련 학교에 진학하여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어머니는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맥아더가 13세 때 용돈을 벌기 위해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판매 실적이 다른 학생들에게 뒤쳐지자 어머니는 그에게 신문을 전부 팔 때까지 돌아오지 말라고 엄하게 말했다. 맥아더는 다음 날 밤이 되어서야 신문을 전부 팔고 귀가했다[232]. 이러한 엄격한 교육 방침으로 어머니는 맥아더의 승리에 대한 강한 집념을 더욱 키웠다. 맥아더는 웨스트 텍사스 군사 훈련 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어머니에게 연마된 지기 싫어하는 마음으로 공부에 매달린 결과 우등생이 되었다[232].

어머니의 교육 방침은 맥아더를 훌륭한 인물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자기중심적이고 자폐적인 성격을 형성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맥아더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세상의 사람들이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다"는 피해 망상을 품게 되었다[232]. 이 때문에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에서 동급생들 사이에서 고립되었고, 졸업 후 결혼식에는 단 한 명의 동창만이 참석했다. 어머니의 교육은 맥아더에게 동지적 우정을 구축하는 능력을 결핍시켰지만, 맥아더 자신도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232].

4. 1. 2. 사관학교 생활

웨스트포인트(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재학 당시 만연한 학교 내 폭력 문제로 방황하기도 했다. 당시 웨스트포인트에서는 권투나 체벌을 빙자한 선배들의 가혹 행위 때문에 일부 사관 후보생들이 자살하거나 학교를 그만두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폭력이 심각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지시로 의회에서 청문회가 벌어졌고, 이는 청년 맥아더에게 심적인 방황의 원인이 되었다. 당시 맥아더는 학교 폭력 피해자의 편에서 가해자들을 고발할 것인가, 아니면 군인으로서 입을 무겁게 해야 할 것인가로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곧 양심에 따라 가해자들을 고발하기로 결정한다.

한편 웨스트포인트 재학 중 동료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웨스트포인트 출신들의 결혼식은 대개 신랑과 교우들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교 행사였지만, 맥아더의 첫 번째 결혼식에는 친구와 동료 하객이 너무 적어 눈길을 끌 정도였다. 가식적인 성격을 지독하게 혐오하여 마음에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이가 눈에 띄면 대놓고 지적하고 비꼬기도 했는데, 이러한 태도 때문에 친구보다는 적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311]

1896년, 맥아더는 서부 텍사스 사관학교 졸업 후, 웨스트포인트의 미국 육군사관학교 수험에 필요한 대통령이나 유력 의원의 추천서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 메리와 함께 유력 정치인과의 연줄을 얻을 수 있는 맥아더 가문의 고향 밀워키로 돌아갔다. 어머니 메리가 인맥을 통해 편지를 보낸 결과, 하원 의원 시오볼드 오첸의 추천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웨스트사이드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년 반 동안 수험 공부를 했지만, 그 수험 공부 방법은 훗날 맥아더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시험이라는 난관에서 실패의 가능성을 추출하여, 그것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는 공부 방법을 사용하여 목표를 쉽게 달성했다. 이 수험 공부를 통해 맥아더는 "철저한 준비야말로 성공과 승리의 열쇠"라는 교훈을 배웠고, 이는 앞으로의 군인 생활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전략적인 수험 공부는 성공하여, 맥아더는 1899년 6월에 750점 만점에 700점의 고득점으로 수석 입학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수험 공부 기간 중에도 공부벌레처럼 공부만 한 것은 아니었고, 나이에 맞는 로맨스도 경험했다. 맥아더는 존 렌드럼 미첼 상원 의원의 딸을 짝사랑하여,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아름다운 서부의 아가씨여, 무엇보다 사랑하는 그대, 그대는 어찌하여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라는 자작 시를 품에 품고, 미첼 상원 의원의 집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러나 당시의 맥아더는 전혀 인기가 없었고, 미첼 상원 의원의 딸에게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이는 맥아더 개인의 문제보다, 당시 미국에서는 군복을 늠름하게 차려입은 군인이 젊은 여성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젊은 장교가 휴가로 밀워키에 돌아오면 젊은 여성들이 군인 주위에 모여들었으며, 그중에는 미첼 상원 의원의 딸도 있었다. 아직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지 않은 맥아더는, 다른 사복을 입은 민간인과 함께 그것을 곁눈질하며 몰래 숨어 있어야 했고, 맥아더는 "이번에 전쟁이 나면, 반드시 전선에서 싸우고 말겠다"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런 아들을 끔찍이 아끼고 걱정하는 어머니 메리는, 맥아더가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자 일부러 학교 근처의 클라니즈 호텔로 이사하여, 아들의 학원 생활에 감시의 눈을 쏟았다. 그 감시는 학업뿐만 아니라 사생활에까지 미쳐, 맥아더를 여성으로부터 멀리하는 데 빈틈이 없었다. 그 과잉 보호는 교관들도 다 아는 사실이 되었고, 어느 날 맥아더가 메리의 눈을 피해 댄스홀에서 여성과 키스를 하는 것을 교관에게 들킨 적이 있었지만, 멋쩍은 기분을 느낀 맥아더에게 교관은 웃으며 "맥아더 군, 축하하네"라고만 말하고 떠났다. 결국 메리는 맥아더가 졸업할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관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어머니와 함께 졸업했다"는 놀림을 받았다.

당시 웨스트포인트는 구태의연한 조직이었고, 상급생에 의한 하급생에 대한 가혹 행위라는 이름의 괴롭힘이 만연했다. 아버지가 유명하고, 어머니가 근처 호텔에 상주하며 곁에 있다는 눈에 띄는 존재였던 맥아더는, 특히 심하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 괴롭힘은, 긴 웨스트포인트의 역사 속에서 100가지 이상 고안되었으며, 주요한 것으로는 "권투 선수에 의한 철권 제재", "깨진 유리 위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게 하기", "화상 입을 듯한 뜨거운 증기 목욕", "가시 돋친 판자 위를 알몸으로 슬라이딩시키기" 등 끔찍한 것이었다. 그 괴롭힘이 행해지는 병영은 학생들로부터 "야수 병영"이라고 불렸다. 맥아더는 괴롭힘을 계속 당했고, 결국 경련을 일으켜 실신했다. 맥아더는 실신으로 끝났지만, 신입생 중에서 괴롭힘으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하여 문제가 되었다. 보도에 의해 사회 문제화된 것을 심각하게 여긴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이 웨스트포인트에 철저한 조사를 명령했고, 몇 달 후에 군법회의가 열렸다. 심한 괴롭힘을 당한 맥아더도 증인으로 불려졌지만, 맥아더는 명령대로 증언하면 전교생에게 멸시를 받는 한편, 명령을 거부하면 웨스트포인트에서 추방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맥아더는 숙고한 끝에, 이미 죄를 인정한 상급생의 이름만 증언하고, 다른 증언은 거부했다. 결국 이 사건은, 죄를 인정한 학생은 일단 퇴학 처분되었지만, 친족에 유력 인맥이 있는 학생은 곧 복학했고, 또한 맥아더도 아버지 아서가 현역 장군이었기 때문에 증언 거부가 문제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위기를 기지와 불굴의 정신으로 극복한 맥아더는, 많은 학생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재학 중에는 성적이 매우 우수하여, 4년간의 재학 기간 중 3년은 성적이 최고였지만, 공부뿐만 아니라 스포츠에도 열심이었다. 맥아더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는 미식축구였지만, 당시 체격은 키가 180cm인데 비해 몸무게가 63.5kg밖에 나가지 않아, 이 마른 체형으로는 미식축구부에 입부조차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으므로, 맥아더는 마른 체형인 자신도 활약할 수 있는 스포츠로 야구를 선택하고, 스스로 야구부를 창단했다. 하지만, 결코 야구를 잘하는 것은 아니었고, 타격이 서툴렀으며, 수비에서도 우익수로서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두뇌 플레이에 뛰어나고, 선구안도 좋았으며, 세이프티 번트로 상대 투수를 흔드는 등 높은 출루율을 자랑하여, 시합에서 활약했고, 팀 동료들로부터 "불퇴전의 더그"라고 불리게 되었다. 1901년 5월 18일에는, 웨스트포인트 대 아나폴리스의 미국 해군 육군 대항전에 맥아더는 스타팅 멤버로 출전하여, 2타석 범타 후 3타석째에 특기인 선구안으로 볼넷을 골라 출루하자, 후속 선수의 적시타로 결승 홈베이스를 밟았다. 맥아더는 이러한 활약으로, 레터 표창(웨스트포인트의 약칭인 Army의 머리글자 A를 재킷이나 저지 등에 자수할 수 있는 권리)을 받았지만, 이 표창으로 인해, 맥아더는 죽기 직전까지 A자가 자수된 웨스트포인트의 긴 회색 가운을 애용했다. 그러나 야구에 열중한 나머지 성적이 떨어져, 4학년에는 야구를 단호하게 그만두고, 1903년 6월에 재학 기간 중 2,470점 만점에 2,424.2점의 득점율 98.14%라는 성적을 거두어, 94명의 학생 중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 맥아더 이상의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은 지금까지 2명밖에 없다(로버트 리가 그중 한 명이다). 졸업 후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맥아더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한 명은 7년 동안 부관을 지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였다. 아이젠하워는 맥아더 참모총장 부관 시절을 회고하며 "맥아더 장군은 부하로 일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맥아더는 일단 임무를 부여하면 시간에 개의치 않고, 나중에 질문하지도 않으며, 일이 제대로 수행되기만을 원했다", "임무가 무엇이든 장군의 지식은 항상 놀라울 정도로 폭넓고, 대체로 정확했으며, 게다가 끊임없이 말로 표현되었다", "장군의 변론과 식견은 유례없는 경이적인 기억력의 결과였다. 연설이나 글의 초고는 한 번 읽으면 그대로 반복할 수 있었다"고 칭찬했다. 아이젠하워는 참모총장 부관으로서의 공무뿐만 아니라, 맥아더가 전 애인 이자벨에게 위자료로 15,000달러를 지불했을 때 같은 부관인 토마스 제퍼슨 데이비스 대위와 대리인이 되어 이자벨 측과 접촉하는 등 공사 양면으로 맥아더를 지원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의 측근으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바탄 갱(Bataan Gang)"의 서덜랜드나 휘트니처럼 맥아더의 매력에 사로잡히지 않은 몇 안 되는 예외였으며, 필리핀에서의 부관 시절에는 "바탄 갱"의 막료들과는 달리 맥아더와의 논쟁을 꺼리지 않았다.

아이젠하워가 맥아더에 대한 생각에 큰 전환점이 된 것은 맥아더가 The Literary Digest라는 잡지 기사를 맹신하고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루즈벨트가 낙선할 것이라는 추측을 퍼뜨리는 것을 아이젠하워가 막도록 조언했음에도, 맥아더가 오히려 아이젠하워를 호통친 것이었다. 이 날 이후 아이젠하워는 맥아더 밑에서 일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고, 건강상의 이유로 본국으로의 귀환을 신청했지만, 아이젠하워의 실무 능력을 높이 평가하던 맥아더는 당황하며 만류하려 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결정지은 것은 이 후에 일어난, 맥아더의 독단적인 필리핀군에 의한 마닐라 진격 계획이 케손의 분노를 사자 아이젠하워 등 부관들에게 책임을 전가한 사건이었고, 아이젠하워는 이 사건으로 "결코 다시, 우리는 이전과 같은 따뜻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친구 관계가 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259].

이후 연합군 원정군 최고사령관, 미국 육군 참모총장으로 순조롭게 경력을 쌓아가는 아이젠하워는, 한 부인에게 맥아더를 아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만난 정도가 아닙니다, 부인. 저는 워싱턴에서 5년, 필리핀에서 4년, 그 밑에서 연기를 배웠습니다"라고 총괄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당시 미국의 일부 언론이 보도했던 만큼 두 사람 사이에 강한 갈등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아이젠하워는 참모총장 재임 시 여러 번 맥아더에게 의견을 구하는 편지를 보냈고, 참모총장 퇴임 시에는 맥아더와 아이젠하워의 대립 보도를 부정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두 사람은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아이젠하워가 제34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그 관계는 표면적인 것이 되었고, 아이젠하워가 맥아더를 백악관으로 점심 식사에 초대했을 때, 열심히 조언하는 맥아더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자, 맥아더는 점심 식사 자리를 떠난 후 기자들에게 "책임은 권력과 함께 있다. 나는 더 이상 권력의 자리에 있지 않다"고 불쾌하게 말했다.

4. 2. 1, 2차 세계 대전 참전



맥아더는 전쟁부로 돌아와 1915년 12월 11일 소령으로 진급했다. 1916년 6월, 그는 전쟁 장관 뉴턴 D. 베이커의 사무실에서 정보국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맥아더는 이후 미 육군 최초의 언론 담당관으로 여겨졌다.[293]

1917년 4월 6일 독일 선전포고와 그에 따른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이후, 베이커와 맥아더는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방위군을 서부 전선에 투입하는 데 대한 합의를 얻었다. 맥아더는 특정 주에 대한 편애를 피하기 위해 여러 주의 부대들로 구성된 사단을 먼저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베이커는 이 부대의 창설을 승인했고, 이는 제42("레인보우") 사단이 되었으며, 미국 방위군 국의 수장인 윌리엄 에이브럼 맨 소장을 사단장으로 임명했다. 맥아더는 참모장이 되었고, 새로운 직책과 함께 중령 계급을 건너뛰고 대령 계급을 받았다.[294] 맥아더의 요청에 따라, 이 임명은 공병이 아닌 보병으로 이루어졌다.[295][296]

1917년 8월 롱아일랜드의 캠프 밀스에서 창설된 이래, 맥아더는 사단의 핵심 동력, 주요 동기 부여자였으며, 사단 창설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인물이었다. 유능하고, 효율적이며, 혁신적이고, 매우 지적이며,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로, 맥아더는 사단 참모장으로서 모든 시간대에 나타나 모든 세부 사항을 꼼꼼히 챙기며, 아첨하고, 설득하고, 영감을 주고, 개입하고, 모든 세부 사항에 관심을 기울였다.[297]

제42사단의 초기 훈련은 참호전보다는 야전 전투를 강조했다. 이 사단은 1917년 10월 18일 뉴저지주 호보켄에서 서부 전선으로 호송대를 타고 출항했다. 12월 19일, 42사단의 사령관인 63세의 맨은 "병들고 늙었고 병상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298] 신체 검사에 불합격한 후 55세의 찰스 T. 메노허 소장으로 교체되었다.[299][300] 새로운 사단장과 그의 참모장은 맥아더의 말에 따르면 "훌륭한 친구"가 되었으며, 메노허를 "유능한 장교, 효율적인 행정가, 쾌활한 성격과 흠 잡을 데 없는 인품"이라고 묘사했다.[301]

당시 미국 육군에서는 공병대가 엘리트 그룹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맥아더는 공병대를 지원하여 제3공병대대에 소속되었고,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 배속되었다[302]. 긴 필리핀 생활의 시작이었다. 1905년에 부친이 러일 전쟁의 관전 임무를 위해 주일본 미국 대사관 무관이 되었다. 맥아더도 부관으로서 일본의 도쿄에서 근무했다[303]. 맥아더는 러일 전쟁을 관전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 적고 있지만[304], 그가 일본에 도착한 것은 1905년 10월로, 포츠머스 조약 조인 후였으며, 이는 맥아더의 회고록에 자주 등장하는 과장된 기술로 보이며, 회고록의 판이 거듭되면서 어느새 그 기술은 삭제되었다[305]. 그 후 맥아더와 가족은 일본을 떠나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경유하여 인도까지 8개월에 걸쳐 각국의 군사 기지를 시찰 여행했고, 이때의 경험이 맥아더의 후일 군 경력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이 여행 중에 일본에서 도고 헤이하치로, 오야마 이와오, 노기 마레스케, 구로키 다메모토 등 러일 전쟁에서 활약한 사령관들과 면담하여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292].

그 후 미국으로 귀국한 맥아더는 1906년 9월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요청으로 대통령 군사 고문의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맥아더의 능숙한 업무 처리를 높이 평가한 루스벨트는 맥아더에게 "중위, 당신은 훌륭한 외교관입니다. 당신은 대사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칭찬했다[306]. 순조로운 군 경력을 걷던 맥아더였지만, 1907년 8월에 밀워키의 지구 공병대에 배속되자, 밀워키에 거주하던 부유한 가정의 딸 패니벨 밴 다이크 스튜어트에게 마음을 빼앗겨 군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상사 윌리엄 V. 저드슨 소령에게 간파당했다. 저드슨은 공병대 사령관에게 "학습 의욕이 부족"하고 "근무 시간을 무시하고 제가 허용 범위라고 생각하는 시간을 초과하여 자리에 돌아오지 않으며", "맥아더 중위의 근무 태도는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에 대해 맥아더는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맥아더가 밀워키에 있던 기간 동안 군무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스튜어트를 유혹하는 데만 관심이 집중되었던 것은 사실이었고, 이 인사 평가는 공병대 사령부에 의해 인정되었다. 지금까지 순조로웠던 맥아더의 군 경력에 처음으로 삐끗거린 부분이었으며, 결국 이토록 빠졌던 연애도 결실을 맺지 못하고,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겪어보지 못한 큰 실패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신의 경력에 대한 악영향을 우려한 맥아더는 분발하여 자신의 평가를 만회하기 위해 공병대 매뉴얼 "군사적 파괴"를 작성하여 공병 부대 지휘관에게 제출했는데, 이 매뉴얼은 육군 훈련 학교의 교재로 채택되었다. 이 매뉴얼을 통해 좌절로부터 불과 반년 만에 맥아더는 좌절을 극복하고, 제3공병대 부관 및 공병 훈련 학교의 교관으로 임명되는 등 다시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307]는 것이다.

다소의 좌절을 맛보면서도 순조롭게 군에서 승진을 거듭하는 맥아더였지만, 어머니 메리의 과잉 보호는 맥아더의 생활을 상시 감시했던 웨스트포인트 통학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1909년에 남편 아서가 군에서 퇴역했을 때에는 맥아더의 직업 군인으로서의 미래를 걱정하여, 철도왕 에드워드 헨리 해리먼에게 "육군보다 더 출세가 보장되는 직업을 갖게 하고 싶으니, 당신의 웅대한 기업의 어딘가에 고용해 주실 수 없을까요"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308].

그 후 맥아더는 1911년 2월에 대위로 승진했지만, 1912년 9월에 부친 아서가 심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존경했던 부친의 죽음은 맥아더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맥아더는 이후 평생 아버지의 사진을 소지했다. 남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맥아더의 어머니 메리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고향 볼티모어 병원에 통원하고 있었는데, 맥아더는 조금이라도 곁에 있어주고 싶다고 생각해 육군에 이사(異動)를 요청했다. 당시 미국 육군 참모총장은 였는데, 우드는 과거 부친 아서의 부하로 근무한 경험이 있어, 아서에게 큰 은혜를 느꼈기 때문에 굳이 육군성에 부처 간 조정이라는 새로운 부서를 만들어 맥아더를 이사시켰다. 워싱턴에 부임한 맥아더는 정기적으로 어머니를 문병할 수 있었다. 또한 우드는 맥아더의 근무 보고서에 직접 "특히 지적이고 유능한 장교"라고 기록하는 등 높게 평가했기 때문에, 이후 급속도로 출세 가도를 걷게 되었다[309].

4. 2. 1.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과 예편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이 참전했을 때, 제42사단 참모장이자 대령이었던 그는 프랑스로 파병되어 복무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42사단 근무 당시 1918년 육군 준장으로 승진, 프랑스 주둔군 84보병 여단장, 42사단 임시 사단장이 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에서 미군 최연소 사단장이기도 했다. 이후 1919년 웨스트포인트 교장이 되었고, 1차대전 종전 이후 1925년에 최연소 육군 소장이 되었으며, 1930년 후버 대통령 때 미국 13대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후버 대통령 재임 시절인 1932년 중엽, 정규군 부대를 워싱턴으로 보내 '노병 보너스 군대'(Bonus Army of veterans)를 무력으로 해산하자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1935년 10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초기에 육군 참모총장 임기를 마쳤으며, 1935년부터 1937년까지 필리핀 정부 최고 군사 고문을 지냈다. 1937년 퇴역했으며, 같은 해에 필리핀 육군 원수(General of the Army)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필리핀 총독을 지냈으며, 2대에 걸쳐 맥아더 가문은 필리핀에서 막대한 이권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935년~1941년에는 자금 부족에도 불구하고 대일 필리핀 방위군을 조직하는 데 전력했다.

1910년 11월에 시작된 멕시코 혁명에서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장군이 권력을 장악했지만, 우에르타 정권을 승인하지 않은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대립하게 되면서, 우에르타에 충성을 맹세하는 멕시코 병사가 미국 해병대 병사를 구금하는 탐피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은 멕시코에 병사 석방, 사건에 대한 사과, 성조기에 대한 21발의 예포를 요구했지만, 멕시코는 병사 석방과 현지 사령관의 사과에는 응했지만 예포는 거부했다. 분개한 윌슨은 대서양 함대 제1함대 사령관 프랭크 F. 플레처에게 베라크루스 점령을 명령했다.[82]

격렬한 시가전을 통해 점령한 베라크루스에 참모총장은 증원을 보냈는데, 보병 제2사단의 제5여단에 정찰 요원으로 당시 대위였던 맥아더를 동행시켰다. 맥아더의 임무는 "작전 행동에 유익한 모든 정보를 입수한다"는 정보 수집이 주 임무였지만, 맥아더는 베라크루스에 도착한 제5여단이 수송력 부족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멕시코군의 증기 기관차를 탈취할 생각을 했다. 맥아더는 멕시코인 철도 노동자 몇 명을 매수한 뒤, 단신으로 베라크루스에서 65 km 떨어진 알바라도까지 잠입하여, 내통자의 지원을 받아 3량의 증기 기관차 탈취에 성공했다. 그 후, 맥아더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추격해온 기마대와 격렬한 총격전 끝에, 맥아더는 3발의 총탄이 군복을 관통했지만 무사히 기마대를 격퇴하고, 훌륭하게 베라크루스까지 기관차를 가져왔다. 맥아더는 이 활약으로 당연히 명예 훈장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제5여단 여단장이 그러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증언한 점, 또한 총격전 건도 내통자인 멕시코인 외에는 증인이 없어 신뢰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명예 훈장 수여는 보류되었고, 맥아더는 실망했다.

훗날의 오만하고 불손한 인상과는 달리, 이 당시 맥아더는 상관에 대한 능숙한 아첨 기술을 구사했다. 위의 증기 기관차 탈취 사건에서, 상관 우드에게 보낸 보고서에 우드의 작전 지휘에 대해 공손한 미사여구로 칭찬을 거듭한 뒤, "반드시 당신을 백악관이라는 종착점으로 인도할 것입니다"라는 입에 발린 아첨으로 마무리했다. 우드도 맥아더를 특히 눈여겨보며, 명예 훈장 서훈을 신청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맥아더는 이 사건으로 명예 훈장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에 종군한 덕분에 임기응변, 지형을 읽는 안목, 개인적인 용기를 전군에 보여주었고, 더 나아가 상관에 대한 능숙한 아첨을 습득하게 되었다. 이는 훗날 맥아더의 군인 인생에서 큰 재산이 되었다.

탄피코 사건 종군 후, 맥아더는 육군성으로 돌아와 육군 장관 부관 및 홍보반장을 맡았다. 1917년 4월 미국이 영국, 프랑스, 일본 등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로 결정되었다. 미국은 전쟁 준비를 위해 급히 1917년 5월에 선택 징병법을 제정했지만, 징병 부대가 훈련을 마치고 전장에 파견되기까지는 1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맥아더는 뉴턴 디일 베이커 육군 장관과 함께 백악관으로 가서 윌슨에게 "전국 26개 주의 주 방위군을 강화하여 시민군으로 유럽에 파견해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윌슨은 베이커와 맥아더의 제안을 채택하여 그 실행을 지시했지만, 어느 주의 부대를 먼저 프랑스에 파견해야 할지가 난제였다. 베이커는 주 방위군 국장 준장과 맥아더에게 의견을 구했지만, 맥아더는 단일 주가 아닌 여러 주의 부대로 사단을 편성할 것을 제안했고, 그 제안에 찬성한 맨이 "전국 26개 주의 부대로 편성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덧붙이자, 맥아더는 "그것 참 좋네요. 그렇게 하면 사단이 전국에 무지개처럼 걸리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베이커는 그 안을 채택하여 을 편성했다. 사단장에는 맨, 그리고 소령이었던 맥아더를 두 계급 특진시켜 대령으로 임명하고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전쟁에 참여하고 싶어 안달이 났고, 아는 기자에게 "진정한 승진은 프랑스에 간 사람에게 주어질 것이다"라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던 맥아더에게는 희망대로의 인사였다. 제42사단은 "레인보우 사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제42사단은 1918년 2월 서부 전선에 참전했다. 맥아더가 정성 들여 육성한 병사들은 용맹하게 싸웠고,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활약했다.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에 파견한 부대 중에서는, 정규군과 해병대로 편성된 정예 부대 보병 제2사단 다음가는 공헌으로 평가받았다.[83] 맥아더도 참모장임에도 불구하고 전선에 나가고 싶어 했다. 정규 군복은 입지 않고, 헬멧을 쓰지 않고 항상 군모를 착용했으며, 두꺼운 터틀넥 스웨터에 어머니 메리가 짠 2 m나 되는 긴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광택이 나는 카프 부츠를 신고, 무기 대신에 승마 채찍이나 지팡이를 쥐고 다니는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이는 맥아더의 자기 연출이었으며, 의도적으로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헬멧이나 가스 마스크 등의 방어 장비를 착용하지 않고, 일부러 다른 장교들이 하지 않는 기이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끌려고 했다. 맥아더는 매우 자기 연출 능력에 뛰어났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터틀넥 스웨터와 승마 채찍을 콘 파이프와 선글라스로 시대에 맞춰 변화시켰다.

맥아더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실제로 전장에서도 그 용맹함을 주변에 강하게 각인시켰다. 1918년 2월 제42사단은 프랑스의 뤼네빌 지역에서 독일군과 교전했지만, 당시 제42사단은 의 지휘를 받았고, 맥아더는 군 사령관 소장에게 "적을 보지 않고 싸울 수는 없습니다"라고 프랑스군 야습 부대에 동행할 것을 제안했다. 바젤레르의 허가를 얻은 맥아더는 부관을 데리고, 프랑스군 병사에게 철조망을 절단하기 위한 도구를 빌려, 프랑스군 돌격 부대와 함께 독일군 참호로 돌격했다. 독일군도 격렬하게 반격했고, 맥아더 일행에게 가차 없이 기관총 사격과 포탄이 쏟아졌지만, 맥아더는 기죽지 않고 계속 싸웠고, 날이 밝을 무렵에는 맥아더와 돌격 부대는 독일군 참호를 점령하여 다수의 포로를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맥아더 자신도 독일군 전선 지휘관이었던 대령을 포로로 잡고, 가지고 있던 승마 채찍으로 몰아붙이며 끌고 왔다. 맥아더의 호탕함에 프랑스 병사들도 완전히 감탄했고, 돌아온 맥아더는 악수 세례를 받았으며, 코냑과 압생트가 제공되었다.

3월에도 맥아더의 용명은 계속해서 널리 퍼졌다. 궁지에 몰린 독일군은 격렬한 반격으로 전환했지만, 제42사단은 독일군의 숨통을 끊기 위해 적극적이고 과감한 공격을 감행했다. 당연히 그 선두에는 항상 맥아더가 있었고, 맥아더는 공격이 시작되면 누구보다 빨리 참호에 걸린 사다리를 올라, 주위에 적과 아군 양쪽의 포탄이 터지는 가운데, 최대 속도로 독일군 참호를 향해 돌격했다. 이윽고, 용맹한 지휘관을 본받아, 부하 병사들은 맥아더를 에워싸듯이 돌격했고, 그 기세에 독일군은 압도당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무작정 돌격하는 것이 아니라, 부대장에게 그 자리에서 임기응변으로 적절한 지시를 내리고, 전장 전체의 움직임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잇따라 승리를 거두는 맥아더에게, 초대 사단장 맨이 건강 악화로 인해, 제2대 사단장을 맡았던 소장은, 언론의 취재에 대해 "맥아더 대령은 미국 육군에서 가장 뛰어난 장교이며, 또한 가장 인기 있는 장교이기도 하다"라고 최고의 찬사를 보냈고, 그 "냉정함과 현저한 용기"에 대해, 수훈 십자장의 서훈을 신청하여, 인정받았다. 이미 맥아더의 용맹함과 멋쟁이 기질은 미국 전군에 널리 퍼지고 있었고 "미국 육군의 달타냥"이나 "미국군의 조지 브라이언 브럼멜" 등으로 불리고 있었다.

늦게 참전한 미국군은 잇따라 증원을 유럽 대륙에 보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전쟁에 전차가 투입되었지만, 미국 육군 최초의 전차 부대인 도 참전했고, 에서는 제42사단을 지원했지만, 이 전투에서 맥아더는 인플루엔자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총검이 달린 소총을 쥐고, 언제나처럼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최전선으로 달려 나갔다. 이윽고, 맥아더는 포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작은 언덕에 올라, 거기서 전투 지휘를 계속했다. 제304전차여단 지휘관은 조지 S. 패튼 대령이었고, 패튼도 억지로 참으며 맥아더 곁에 머물렀지만, 이윽고 근처에서 포탄이 터져, 그만 패튼은 겁을 먹었다. 그 모습을 본 맥아더는 패튼에게 "걱정 마시오 대령." "자네에게 포탄이 맞으면, 그 소리는 절대로 자네가 듣지 못할 것이오."라고 찡그린 얼굴로 말을 걸었다. 패튼은 맥아더의 용감함에 완전히 감탄하여,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맥아더야말로,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용감한 남자다"라고 썼다.

맥아더는 그 후, 제42사단의 제84여단 여단장(준장)으로 승진했고, 1918년 9월부터 시작된, 제1차 세계 대전 마지막 격전인 뫼즈-아르곤 공세에도 참전했다. 제42사단에는 독일군의 중요 거점 의 공략이 명령되었지만, 언제나처럼 최전선에서 계속 싸우는 맥아더는 두 번이나 독일군의 독가스 공격을 받았고, 특히 두 번째는 증세가 심하여, 누워서 구토를 계속했지만, 그래도 최전선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코드 드 샤티용에는 독일군이 구축한 콘크리트제 토치카가 230개나 있었고, 격렬하게 공격을 계속하는 제84여단은 큰 손해를 입었다. 맥아더는 두꺼운 독일군 철조망의 얇아진 지역부터 공격하려 생각하고, 언제나처럼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직접 정찰에 나섰지만, 도중에 맥아더의 정찰대는 독일군의 포격과 독가스를 맞았다. 맥아더는 간신히 포탄으로 생긴 탄흔에 굴러 들어가 무사했지만, 잠시 후 독일군의 공격이 약해지자, 주위에서 맥아더와 마찬가지로 엎드려 있던 부하 병사와 탈출하려 했지만, 맥아더 이외의 병사들은 전원 절명해 있었다. 맥아더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고, 이 행운을 신에게 감사하며 돌아갔다.

제42사단은 고투 끝에, 코드 드 샤티용을 공략했지만, 사단의 1/3에 해당하는 4,000명이나 되는 병사가 사상했다. 유럽 파견군(AEF)의 총사령관은 존 퍼싱이었지만, 부친 아서가 필리핀 주둔 미국군 사령관이었을 때, 당시 대위였던 퍼싱을 돌봐주었던 인연으로, 맥아더를 눈여겨보고 있었고, 제42사단장 메노허의 승진으로 비게 된 사단장 자리에 임명하는 것과, 소장으로의 승진을 군 중앙에 신청했다. 퍼싱과 맥아더는 때때로 작전 지도 방침에 대해 의견이 상이한 경우가 있었고, 맥아더가 웅변가임을 알고 있던 퍼싱은 논쟁을 피하여 "참견하지 마!"라고 호통을 친 적도 있어서, 양자의 불화설이 오랫동안 거론되어 왔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증거는 없다. 다만, 퍼싱은 서훈에 대해서는 왠지 신중했고, 흠잡을 데 없는 활약을 해 왔고, 지금까지 전장에서 2번 부상하고, 외국 훈장을 포함하여 15개의 훈장을 수여받아 온 맥아더에 대한 명예 훈장 수여 추천은 보류했다. 맥아더는 탄피코 사건에 이어 명예 훈장을 놓치게 되었다.

휴전이 성립되자, 맥아더는 독일 도시 진치히로 진주했다. 휴전으로 인해 군의 인사가 평시로 돌아왔기 때문에, 소장으로의 승진은 동결되었고, 사단장에서도 해임되어 제84여단장으로 돌아갔다. 독일 주요 도시에는 독일 혁명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었지만, 진치히는 평온했고, 맥아더는 격전으로 피로가 극에 달한 몸을 쉴 수 있었다. 독가스 후유증에 의한 목의 염증에도 시달렸지만, 어떻게든 완치했다. 점령 임무라고 해도 특별히 할 일이 없었고, 맥아더는 언론을 비롯한 인맥 만들기에 힘썼다. 그중에는 영국 황태자도 있었고, 황태자가 독일이 장래에 부활하여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우려하자, 맥아더는 "우리는 이번에 독일을 쳐부쉈습니다. 이번에도 또 쳐부술 수 있습니다"라고 떳떳하게 말했다.

4. 2. 2. 현역 복귀와 2차 대전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자 맥아더는 참전을 자원했다.

1941년 7월, 맥아더는 예비역에서 소집되어 현역으로 복귀, 필리핀 주재 미국 극동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1942년 3월에는 서남 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 1944년에는 원수가 되었다.

맥아더는 태평양 전선에서 '섬 건너뛰기 전술' (Island Hopping)로 전세를 역전시켰고, 1945년 일본군을 격파하고 필리핀에 상륙했다. 이후 대일(對日) 점령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8월 30일 일본 땅에 첫 발을 디뎠다.[312]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8월일본에 원자폭탄 투하를 지시했다. 8월 6일과 8월 9일 새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다수의 인명 사상자가 발생했고, 일본은 히로히토 일왕이 직접 항복 성명을 발표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은 종결되었다. 당초 미국 공군은 원자폭탄 투하 장소로 오사카시를 고려했으나, 맥아더는 이곳이 일본인의 정신적인 유산이 많이 소재한 곳이라며 폭격을 배제했다는 설이 있다. 맥아더는 원자 폭탄 공격보다는 일본 본토 진입을 염두에 두고 체스터 니미츠 원수와 지휘권을 조율 중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후, 예산 부족으로 필리핀군은 강화되지 못했다.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이 체결되고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를 감행하자,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석유 금수 조치와 일본의 대미 자산 동결을 단행했다. 미일 통상 항해 조약이 실효되면서 극동 정세는 긴장되었다. 지속적인 미일 협상을 통한 타개책 모색 노력도 있었지만, 워싱턴은 일본과의 전쟁 발발 시 필리핀의 전력으로는 오렌지 계획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 필리핀 전력 증강을 추진했다. 맥아더는 1941년 7월 루스벨트의 요청을 받아 중장으로 현역에 복귀, 필리핀 주둔 미국군과 필리핀군을 통합한 미국 극동 육군 사령관이 되었다.

조지 마셜 미국 육군 참모총장은 "필리핀 방어는 미국의 국책"이라고 선언하고, 미국 본토에서 18,000명의 최신 장비를 갖춘 주 방위군 부대를 증원으로 보내겠다고 맥아더에게 전했다. 맥아더는 증원보다 필리핀군 보병의 장비 확충을 요청했고, 이는 승인되었다. 또한 미국 육군 항공대는 신무기인 대형 폭격기 B-17의 집중 배치를 계획했다. 헨리 아놀드 육군 항공대 사령관은 "입수하는 대로 B-17을 최대한 많이 필리핀으로 보내라"라고 명령했고, 계획대로라면 74대의 B-17이 배치되어 필리핀은 세계 어느 곳보다도 중폭격기 전력이 집중된 지역이 될 예정이었다. 이 외에도 급강하 폭격기 A-24, 전투기 P-40 등 당시 하와이보다 많은 207대의 항공기 증원이 약속되었고, 루이스 브레튼 소장이 마닐라를 방문하여 증원 일람표를 전달하자 맥아더는 기뻐하며 껴안았다고 한다.

마셜은 B-17을 과신하여 "전쟁이 시작되면 B-17은 즉시 일본 해군 기지를 공격하고, 일본의 종이 도시들을 불태울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B-17에는 필리핀과 일본을 왕복할 항속 거리가 없었지만, 폭격기대는 일본 폭격 후 소비에트 연방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날아가 필리핀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연속 왕복하며 일본을 폭격하면 된다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맥아더 또한 "12월 중순에는 육군성은 필리핀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고고도 비행 폭격대는 신속하게 일본에 큰 타격을 가할 수 있다. 만약 일본과의 전쟁이 시작된다면, 미국 해군은 별로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미국의 폭격대는 거의 단독으로 승리의 공세를 펼칠 수 있다"라는 예상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군에 대한 과신과 적에 대한 방심은 후에 맥아더에게 재앙으로 다가왔다.[90]

동시에 해군의 증강도 추진되어 잠수함 23척이 파견되었고, 이는 미국 해군 최대의 잠수함대가 되었다. 아시아 함대 사령관은 맥아더의 지인이기도 했던 토머스 C. 하트였지만, 맥아더는 자신이 중장인데 하트가 대장인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한다.[91] 맥아더는 "Small fleet, Big Admiral(=작은 함대 주제에 해군 대장)"이라고 하트와 아시아 함대를 조롱했다[92]

맥아더는 전력의 충실함을 통해 기존의 전술을 크게 전환하기로 했다. 현 추세로 전력 증강이 진행되면 1942년 4월에는 20만 명의 필리핀군 동원이 가능하며, 마셜의 약속대로 항공기와 전차가 배치되면 상륙해 오는 일본군을 해안에서 저지할 수 있다는 구상에 따른 계획이었다. 당초 오렌지 계획에서는 내륙에서의 방어전을 계획하고, 물자나 식량은 유사시 굳건히 진지화된 바탄 반도에 집결시킬 예정이었지만, 맥아더의 새로운 계획에서는 해안 격멸의 적극적인 방어전이 되면서 물자는 해안에 더 가까운 평지에 집결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전환은 후에 맥아더와 미국군, 필리핀군 병사들을 괴롭게 했지만, 맥아더의 작전 변경 제안에 마셜은 동의했다. 가장 중요한 수도 마닐라를 중심으로 하는 루손 섬 북부에는 조나단 웨인라이트 소장이 이끄는 필리핀군 4개 사단이 배치되었다. 일본군의 침공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지만, 웨인라이트가 지켜야 할 해안선의 길이는 480km에 달했고, 맡겨진 병력으로는 도저히 전력 부족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웨인라이트에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해안선을 사수하고, 절대로 후퇴하지 말라"라고 명령했다.

맥아더가 전력의 충실함을 통해 방어에 대한 자신감을 키우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필리핀군의 상황은 불충분했다. 맥아더 등이 3년 반이나 훈련을 해왔지만, 그 훈련은 개별 병사의 훈련에 그쳤고 부대 단위의 훈련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단 단위의 훈련이나 포병 등 다른 병과와의 합동 훈련 경험은 거의 없었다. 병사들의 대부분이 생애 처음으로 가죽 구두를 신었기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발에 부상을 입었고, 테니스화나 맨발로 행군하는 병사도 많았다. 또한 각 필리핀군 사단에는 부대를 훈련시키기 위해 수십 명의 미국군 장교와 100명의 하사관이 배속되었지만, 필리핀 병사들은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해 의사소통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필리핀 병사들끼리도 부족이 다르면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맥아더는 필리핀군의 실력에 환상을 품고 있지는 않았지만, 육군이 약속한 대량의 증원 물자가 도착하고 부대를 훈련시킬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필리핀 방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1941년 11월 시점에서 10만 톤의 증원 물자가 필리핀으로 향하고 있었고, 100만 톤이 필리핀으로 수송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미국 서해안 부두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1942년4월 18일, 맥아더는 남서 태평양 지역의 미국군, 오스트레일리아군, 영국군, 네덜란드군을 지휘하는 연합군 남서 태평양 지역 최고 사령관에 임명되어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일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1943년 3월의 비스마르크 해 해전 (소위 단피르 해협의 비극) 승리 소식을 듣고, 제5항공군 사령관 조지 케니에 따르면, "그가 그렇게 기뻐하는 것을 다른 데서는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기뻐했다. 그러나 같은 지역의 해군 부대 (후의 제7함대)의 수장 교체 시, "후임으로 토머스 C. 킨케이드가 취임한다"는 발표를 듣고, 자신과 아무런 상의 없이 멋대로 결정된 인사라며 분노했다.

맥아더는 연합군의 공·해군력을 활용하여 일본군의 수비가 굳건한 곳을 회피하고, 포위하여 보급로를 끊어 일본군이 약화되기를 기다렸다. 맥아더는 육해공의 통합 작전을 '삼차원의 전략 구상', 정면 공격을 피하고 일본군의 취약한 곳을 공격하는 전법을 '리프프로깅(개구리 뛰기) 작전'이라고 불렀다。 일본군은 공·해상에서의 잦은 패배로 전력을 소모하고 제해권과 제공권을 상실했기 때문에, 맥아더의 전술에 대항할 수 없었고, 뉴기니 전역에서는 많은 아사자·병사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승리는 필리핀 패전으로 손상되었던 맥아더의 지휘 능력에 대한 평가와 명성을 크게 높였다.

전황이 연합군 측에 유리해지자, 맥아더는 군의 지휘권을 맥아더가 이끄는 미국 육군 주력의 (SWPA)과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해군, 미국 해병대 주력의 (POA)의 두 곳으로 분권화된 태평양 전역의 지휘권을, 한때 부하였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연합군 원정군 최고 사령부 총사령관으로서 전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는 유럽 전선처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아더는 자신이 그 지휘권을 통괄하여, 일원화된 전력으로 뉴브리튼 섬 공략을 기점으로 한 반격 계획 "엘크트론 계획"을 제안했지만[107], 영예를 독점하려는 맥아더를 경계한 어니스트 킹 해군 작전 부장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결국 태평양 연합군의 지휘권 일원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1943년 5월 워싱턴에서 개최된 루스벨트와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에 의한 "트라이던트 회의"에 의해, 태평양은 종전대로 연합군 남서 태평양군과 연합군 태평양군이 2개 방면으로 대일 반격 작전을 전개해 나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108]

반격 루트에 관해서는, 맥아더는 의 굴욕을 씻고 싶다며 필리핀 탈환을 서둘렀다. 뉴기니에서 필리핀이라는 비교적 큰 육지를 진격함으로써 육상 비행 기지가 전 작전선을 지원 가능하게 되는 점과, 맥아더가 리프프로깅(개구리 뛰기) 작전에 의해 손해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니미츠는 종래의 미국 해군의 대일전 교리인 오렌지 계획에 기초하여 태평양 중앙 해로를 통한 진격을 주장했다[109]。 니미츠는 맥아더의 육로 진격이 해로 진격보다 길고 보급이 어려우며, 일본 본토 침공에 우회하게 되고, 진격로가 쉽게 예측되어 일본군이 병력을 집중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110]

미국 통합 참모 본부는 쌍방의 주장을 받아들여, 맥아더는 비스마르크 제도와 뉴기니를 전진하여 민다나오 섬을 공략하고, 니미츠는 길버트 제도를 공략하고 서쪽으로 전환하여 콰잘린 환초, 에니웨토크 환초, 괌, 사이판, 펠렐리우로 전진, 양군은 루손 섬 또는 타이완에서 합류하기로 결정했고, 8월의 퀘벡 회담에서 작전안을 처칠도 승낙했다. 연합군의 기본 방침은 나치 독일을 격파하는 것을 우선하고, 그 전까지는 태평양 전선에서의 적극적인 공세를 자제한다는 것으로, 투입되는 전력이나 물자는 유럽 70%에 대하여 태평양 30%로 결정되었지만, 맥아더와 킹이 일본군의 강력함과 태평양 전선의 중요성을 루스벨트에게 설득하여, 유럽과 태평양의 전력 및 물자의 불균형은 개선되었고, 대규모 2개 방면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111]。 맥아더는 중부 태평양에 일본군이 요새화하고 있는 섬이 여러 개 있어 미국군에 막대한 출혈을 강요하므로, 자신에게 전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니미츠는 뉴기니를 주 전선으로 하면 항공모함 부대가 일본군의 육상 기지로부터 공격받을 수 있다고 반론했다. 니미츠의 반론에는 항공모함을 맥아더의 지휘하에 절대로 두지 않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킹은 마리아나 제도가 일본 본토와 남쪽 일본군 기지를 잇는 후방 연락선의 중간에 위치하며, 필리핀과 남방 자원 지대에 이르는 경제적인 생명선의 동쪽 날개를 담당하는 일본에게 태평양의 열쇠가 된다고 평가했다。 킹은 마리아나를 공략한다면 일본 본토를 봉쇄하여 경제적으로 숨통을 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공략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112]。 미국 육군 항공군 사령관 헨리 '해프' 아놀드 장군은 신예 전략 폭격기 B-29에 의한 일본 본토 공습 기지로서 마리아나 확보를 원했다. 이미 중국 본토에서 일본 본토를 공습하는 마터호른 작전이 검토되고 있었지만, 중국에서라면 B-29의 항속 거리로 규슈를 폭격하는 것이 고작이며, 일본 본토 전체를 출격권 내에 넣을 수 있는 마리아나는 아놀드에게 절호의 위치였다. 또한, 중국 내 B-29 전진 기지로의 보급은 공로에 의존해야 했지만, 마리아나에는 해로로 대량의 물자를 안정적으로 보급할 수 있었다。 아놀드는 연합군 수뇌가 모인 퀘벡 회의에서 마리아나로부터 일본 본토를 공습하는 계획인 "일본을 격파하기 위한 항공 공격 계획"을 제안했지만, 채택되지 못했다。

아놀드 등의 움직임을 경계한 맥아더는 진주만에서 4,800km, 가장 가까운 미국군 기지 에니웨토크에서도 1,600km 떨어진[113] 마리아나 침공 작전에 불안을 품고 있던 니미츠를 끌어들여, 마리아나 공략 단념을 주장했다. 조지 케니(George Kenney) 소장도 맥아더 편을 들며 "마리아나에서는 전투기의 호위가 불가능하며, 호위가 없으면 B-29는 고고도에서의 폭격을 강요받아 정확도는 형편없을 것이다. 이러한 공습은 '곡예'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반론했다[114]

킹과 아놀드는 마리아나 공략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접근하여, 맥아더에게 이해를 보였던 육군 참모 총장 마셜에게 마리아나의 전략적 가치를 설득했다[109]。 킹 자신의 계획에서는 마리아나를 B-29의 거점으로 활용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었지만, 킹과 아놀드라는 육해군의 유력자가 손을 잡은 것은 태평양 전선 전략 계획 입안의 정체 상황을 타개하게 되었고, 1943년 12월의 카이로 회담에서 1944년 10월의 마리아나 공략과 아놀드의 "일본을 격파하기 위한 항공 공격 계획"도 승인되었다. 회의 문서에는 "일본 본토 전략 폭격을 위해 전략 폭격 부대를 괌과 테니안, 사이판에 설치한다"는 문구가 삽입되어 마리아나로부터 일본 본토 공습이 결정되었다。

맥아더는 마리아나 공략보다 자신이 담당하는 서태평양 전역에 전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1944년 3월 미국 통합 참모 본부는 워싱턴에서 태평양에서의 전략 논쟁에 결착을 짓기 위한 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에서 맥아더의 대리로 참석했던 서덜랜드에게 통합 참모 본부의 방침에 따라 서태평양 방면에서의 한정적인 공세를 진행할 것이라는 권고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마리아나 침공의 포레이저 작전을 1944년 6월에 앞당기는 것이 결정되었다。

미국 통합 참모 본부의 결정에 분노한 맥아더는 뉴기니 작전의 집대성과 니미츠에 의한 포레이저 작전 지원의 항공 기지 확보를 위해, 뉴기니 서부 비악 섬 공략을 결정했다。 비악 섬에는 일본군이 설영한 비행장이 있었고, 마리아나 공략의 항공 지원 기지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1944년 5월 27일 월터 크루거 중장이 이끄는 대부대가 비악 섬에 상륙하여 비악 섬 전투가 시작되었다. 해안을 내려다보는 대지에 구축된 일본군의 동굴 진지는, 연합군 지원 함대의 함포 사격에도 견디고 상륙 부대에 집중 포화를 쏟아 대손해를 입혔다。 가즈메 나오유키 대좌는 상륙 부대를 내륙으로 끌어들여 구축한 진지에서 맞이하기로 했다。 호레이스 풀러 소장은 일본군의 작전을 간파하고 신중하게 진격하기로 했지만, 맥아더는 마리아나 작전이 다가오는데 비악 섬 공략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면 니미츠에게 망신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크루거를 통해 풀러를 재촉했다。 비악 섬 수비대는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분투했고, 맥아더는 조기 공략을 위해 일본군 진지를 정면 공격하던 미국군에게 통격을 가하여 오랜 기간 발을 묶어두었다. 6월 14일, 맥아더는 풀러를 상륙 부대 사령관과 제41보병사단 사단장에서 해임했다。 그러나 사단장을 교체해도 전황이 크게 호전되지는 않았고, 비악 섬의 비행장이 가동하기 시작한 것은 6월 22일이 되어 사이판 전투와 마리아나 해전에도 늦었다. 비악 섬 공략 후에 맥아더는 풀러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을 수여했지만, 비악 섬 전투는 맥아더와 풀러 모두에게 씁쓸한 전투가 되었다。

맥아더에게 필리핀 탈환을 인정했던 미국 통합 참모 본부였지만, 니미츠가 마리아나를 확보하면서 미국 육해군의 의견이 다시 갈라지기 시작했다. 킹은 마리아나 확보로 필리핀의 군사적 우선순위가 낮아졌고, 필리핀은 우회하여 봉쇄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아놀드 또한 해군의 킹 편에 섰기 때문에, 마셜은 맥아더에게 "개인적인 감정과 필리핀의 정세에 대한 고려"가 전략적인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주의를 주는 정도였다.

맥아더는 언론을 이용하여 미국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당시 미국의 많은 신문들은 민주당의 루스벨트를 비판하고 공화당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신문 등을 통해 "1942년에 격파된 우리 고립 무원의 부대의 원수를 갚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완수해야 할 숭고한 국민적 의무가 있다" 등과 같이 주장하며, 자신이 필리핀을 해방하지 않을 경우 미국 본토에서 루스벨트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셜은 "개인적인 감정과 필리핀에 대한 정치적 고려가 대일전 조기 종결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짓누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라고 맥아더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이판 전투, 괌 전투, 테니안 전투를 거쳐 미국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미국군이 입은 손해도 컸기 때문에, 맥아더와 공화당 지지 신문들은 필리핀 공격이 최소한의 희생으로 동일한 전략적 이점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맥아더에게 심취한 '바탄 갱' 막료들도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국무성, 통합 참모 본부, 루스벨트 대통령까지 비난했다.

맥아더의 의도대로 필리핀 공략에 찬성하는 이들이 늘어나, 태평양 방면 전선 지휘관들은 맥아더에게 찬동했다. 한편 킹, 마셜, 아놀드는 필리핀 우회를 양보하지 않았고, 미국군 내의 의견도 완전히 갈라졌다. 루스벨트는 맥아더와 니미츠에게 직접 의견을 듣고 방침을 결정하기로 하고, 1944년 7월 26일 두 사람을 하와이로 소환했다. 니미츠는 자신의 상관인 킹의 의견을 대변했지만, 니미츠 자신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작전 설명은 박력이 부족했고, 맥아더의 독무대가 되었다. 맥아더는 필리핀 탈환을 군사적 문제라기보다는 도덕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맥아더는 킹이 주장하는 필리핀을 우회하여 대만을 공략하는 작전보다, 필리핀 공략이 기간이 짧고 손해도 적다고 주장했다. 루스벨트는 "더글러스, 루손 공격은 우리에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큰 희생을 요구할 것이오"라고 지적했지만, 맥아더는 강력하게 부인했다. 맥아더는 1944년 대선을 언급하며, "미국 국민의 격렬한 분노는 당신에 대한 반대표로 되돌아올 것입니다"라고 협박했다. 루스벨트는 맥아더가 쏟아낸 3시간에 걸친 변론에 피로해하며 "나에게 저런 말을 하는 남자는 지금까지 없었지. 맥아더 외에는"라고 말했다. 맥아더 또한 루스벨트의 육체적인 쇠약에 놀라며, "다음 임기까지는 못 버틸 것이다"라고 예상했는데, 사실 그대로 되었다. 회담 종료 후, 해군이 준비한 악단, 가수, 훌라 댄스 쇼에 루스벨트가 맥아더를 초대했지만, 맥아더는 "더글러스, 자네가 이겼네. 나는 킹과 싸워야겠군"이라며 필리핀 공략을 승인했다.

루스벨트의 방침 결정으로 통합 참모 본부는 맥아더에게 필리핀 공략 작전을 승인했다. 해군은 필리핀에서 맥아더를 원호한 후 대만을 우회하고 오키나와를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맥아더는 우선 일본군의 병력이 적은 레이테 섬을 공략하여 필리핀 전토 해방의 발판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맥아더는 레이테에 20,000명의 일본군이 배치되어 있다고 보고 있었지만, 증원을 보낼 것으로 생각하고 174,000명의 병력과 700척의 함정, 다수의 항공기를 준비하기로 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유럽의 전황은 최종 단계에 들어간 것으로 간주되어, 루스벨트나 처칠과 같은 연합국 지도자들은 태평양의 전황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맥아더에게는 순풍이 되었다. 사전에 레이테의 항공 기지는 윌리엄 할제이 주니어 중장이 이끄는 제38기동부대의 함재기에 의해 맹렬하게 공격받고 있었고, 1944년 10월 20일 미국군은 레이테 섬에 상륙했다. 맥아더도 같은 날 세르히오 오스메냐와 함께 레이테에 상륙했지만, 해안에 접근한 맥아더는 접안하기 전에 바다에 뛰어들어 발을 적시면서 필리핀으로의 귀환을 완수했다.

이때 촬영된 레이테 섬에 상륙하는 맥아더의 사진은 필리핀에서도 선전에 활용되었지만, 실제로 처음 상륙했을 때의 것이 아니라 다음 날 재현한 상황을 촬영한 것이다. 맥아더는 바다에서 걸어 상륙한다는 극적인 시각적 효과에 주목하여 다시 상륙 장면을 촬영했다. 미국 국립 문서 보관소에는 맥아더가 한 번 상륙하지만 스스로 NG를 내고, 선글라스를 다시 쓴 후 다시 촬영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115].

맥아더는 일본군의 저격병이 숨어 있는 전장을 돌아다녔지만, 탄환을 피하기 위해 엎드리거나 하지 않았다고 한다. 10월 23일에는 기함으로 삼았던 경순양함 내슈빌의 통신 설비를 사용하여 연설을 필리핀 국민에게 방송했다. 그 연설의 첫머리는 "필리핀 국민 여러분, 나는 돌아왔다"였다.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고 있던 많은 필리핀 국민들은 맥아더의 귀환을 환영했다. 맥아더는 사령부를 레이테 섬에서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경영하고 있던 미국인 사업가의 호화 저택으로 옮겼지만, 이 호화 저택은 일본군이 사령관용 클럽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참호가 만들어져 있었다. 맥아더는 지난번 필리핀에서 싸웠을 때 부하 장병으로부터 붙여진 "Dugout Doug(참호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더글러스)"라는 별명을 알고 있었고, 또한 조롱당하는 것을 싫어하여 "묻어서 평평하게 해 버린다"라고 명령했다.

맥아더와 니미츠 간의 지휘권 다툼과 병행하여 일본 본토 진공 작전에 대한 상세한 작전 계획이 수립되었고, 작전명은 다운폴 작전이라는 암호명이 붙여졌다. 다운폴 작전은 남부 큐슈 공략 작전인 "올림픽 작전"과 간토 지방 공략 작전인 "코로넷 작전"으로 구성되었지만, 루스벨트를 대신하여 대통령이 된 해리 S. 트루먼은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미국군의 인적 손실에 위기감을 느껴 "오키나와 전투의 재판이 될 본토 공략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맥아더 등은 트루먼의 우려를 완화하기 위해 미국군의 손실 예측을 과소하게 보고하기로 했다[142]。 맥아더는 연합군 투입 예정 병력이 14개 사단 68만 명이라는 점에서 연합군 병력이 압도하고 있다며 90일 동안 1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30일 동안 31,000명의 사상자에 그칠 것이라고 하향 수정하여 보고

4. 3. 일본에서의 군정 활동

일본 쇼와 천황과 함께


1945년 8월 14일, 일본은 연합국에 포츠담 선언 수락을 통보했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싫어했지만, 미국 국민들의 압도적인 인기와 연방 의회 때문에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150] 맥아더는 이를 태평양 전쟁 중 경쟁했던 니미츠에게 승리한 것으로 여겼다.

8월 19일, 가와베 도라시로 참모차장을 전권 위원으로 하는 사절단이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마닐라에서 협의를 가졌다. 일본 측은 연합군의 진주 준비에 10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맥아더의 부관 서덜랜드는 5일의 유예만 인정하며 8월 26일 선견대, 8월 28일 맥아더 본대의 가나가와현 아쓰기 해군 비행장 진주를 통보했다.[151] 맥아더는 자신이 천황의 권위를 계승하는 인물로 비춰지길 바랐다.

진주 수락 위원회 대표는 아리마스 세이조 중장이었지만, 아쓰기에는 고조노 야스나 대좌가 철저 항전을 선언하며 대치했다(아쓰기 항공대 사건). 8월 19일 고조노가 병으로 쓰러진 틈을 타[151],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이 아쓰기를 방문하여 항공대 장병들을 설득, 아쓰기 비행장을 해방시켰다. 하지만 시설은 파괴되어 있었고, 활주로에는 불에 탄 항공기가 흩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맥아더 사령부에서 선견대와 본대의 진주를 연기한다는 소식이 도착하여, 일본 측은 아쓰기 비행장 정비에 박차를 가했다. 8월 28일, 찰스 텐치 대령을 지휘관으로 하는 선견대가 아쓰기 비행장에 착륙하여 맥아더 수용 준비를 했다. 숙소로 사용할 요코하마 "호텔 뉴 그랜드"까지 이동할 차량이 부족했는데, 일본 측은 50대를 모았지만 목탄차와 구식 트럭이 섞여 있었고, 선도 차량은 소방차였다.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의 관용차였던 링컨 컨티넨탈을 포함한 고급 관용차들은 미군 장병들에게 도난당했지만, 텐치의 지시로 되찾았다.

8월 29일 오키나와에 도착한 맥아더는 8월 30일 전용기 "바탄호"로 아쓰기를 향했다. 제11공정사단 4,000명이 아쓰기에 투입되어 호위했지만, 맥아더는 천황의 명령으로 항복한 일본군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맥아더는 러일 전쟁 후 아버지의 부관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경험을 토대로 판단했다.[152] 이는 해병대를 이끌고 일본 본토 상륙을 목표로 하는 해군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비행 중 맥아더는 코트니 휘트니 소장에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받아 적게 하고, 콘파이프를 휘둘렀다. 후지산 상공에 도달하자 휘트니가 맥아더를 깨웠고, 맥아더는 후지산을 감탄하며 바라봤다.

14시 05분, 바탄호가 아쓰기에 도착했다. 맥아더는 일본 정부 요인들의 영접을 거절하고 신문 기자 10명만 참석하도록 했다. 맥아더는 사다리에서 내려오기 전 180도 주변을 둘러보며 사진 촬영을 의식하는 모습을 보였다. 동맹통신사 기자는 맥아더의 모습이 가부키 배우 오노에 키쿠고로 같다고 느꼈다고 한다. 맥아더는 다음과 같이 첫마디를 했다.

맥아더 일행은 호텔 뉴 그랜드로 향했다. 뉴 그랜드는 맥아더가 결혼 후 필리핀으로 돌아가는 길에 묵었던 추억의 호텔이었다. 맥아더와 로버트 아이켈버거 중장은 링컨에 탑승했지만, 다른 막료들은 목탄 자동차를 포함한 낡은 차에 나눠 탔다. 이 기묘한 차량 행렬의 선두에는 사이렌이 고장난 소방차가 있었다. 32km의 여정은 잦은 고장으로 인해 오래 걸렸다.

도로 양쪽에는 총검을 장착한 3만 명이 넘는 일본군 병사들이 경호를 서고 있었다. 일본군 병사들은 맥아더 일행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는데, 이는 천황의 행차 때에만 허용되는 것으로 굴종의 의미를 나타냈다. 맥아더는 일본군 병사들이 천황의 명령을 거스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이 광경을 즐겼다.

요코하마는 잿더미와 잔해로 가득했고, 맥아더 일행은 음울한 기분을 느꼈다. 맥아더는 노숙하는 일본인 모자들을 보며 가슴 아파하고, 총력전의 참혹함과 경제 부흥의 어려움을 깨달았다. 호텔 뉴 그랜드는 기적적으로 화를 면했고, 호텔 회장 노무라 요조가 연미복 차림으로 일행을 맞이했다. 맥아더는 호텔에서 제공된 식사를 통해 일본의 식량 사정을 인식하고, 앞으로의 어려움을 예상했다.

루이스 마운트배튼은 쇼와 천황이 마닐라에 와서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맥아더는 위엄 있는 종전 의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항복 조인식은 9월 2일 도쿄 만 전함 미주리 함상에서 열리게 되었다. 미주리 함에는 매슈 페리 제독이 일본에 개항을 요구했을 때 게양했던 성조기와 두 개의 5성 장성기가 게양되었다.

맥아더와 막료들은 구축함 으로 미주리에 접근했고, 니미츠와 할제이가 맞이했다. 맥아더는 긴장했는지 화장실에 틀어박혀 구토하기도 했다.[153]

일본 측 대표단은 시게미쓰 마모루와 우메즈 요시지로 등 11명으로, 구축함 을 타고 함상에 섰다. 미주리에는 웨인라이트 중장과 아서 퍼시벌 중장도 참석했다.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과 마크 미처 중장은 특공기 공격을 우려하여 다른 장소에 대기했다.[154] 쿠즈마 데레비얀코를 비롯한 각국 언론도 참석했다.[155]

오전 9시, 맥아더는 갑판 위에 올라 연설을 시작했다.[156]

{{인용문|우리 주요 참전국 대표는 여기에 모여 평화 회복의 존엄한 조약을 맺으려 합니다.

다양한 이상과 이데올로기를 주제로 한 전쟁은 세계의 전장에서 해결되었으며,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지구상의 다수의 국민을 대표하여 모인 우리는, 더 이상 불신과 악의와 증오의 정신을 품고 회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에 정식으로 거행하려는 모든 사업에 온 인민을 남김없이 동원하여,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신성한 목적에 부합하는 더욱 높은 위엄을 위해 일어서게 하는 것은, 승자와 패자 쌍방에게 주어진 책무입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그가 품고 있는 희망을 위해 바쳐진 더 나은 세계가, 자유와 관용과 정의를 위해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제가 바라는 바이며, 또한 전 인류의 소망입니다.

영문;

We are gathered here, representatives of the major warring powers, to conclude a solemn agreement whereby peace may be restored.

The issues involving divergent ideals and ideologies have been determined on the battlefields of the world, and hence are not for our discussion or debate.

Nor is it for us here to meet, representing as we do a majority of the peoples of the earth, in a spirit of distrust, malice, or hatred.

But rather it is for us, both victors and vanquished, to rise to that higher dignity which alone befits the sacred purposes we are about to serve, committing all of our peoples unreservedly to faithful compliance with the undertakings they are here formally to assume.

It is my earnest hope, and indeed the hope of all mankind, that from this solemn occasion a better world shall emerge out of the blood and carnage of the past -- a world founded upon faith and understanding, a world dedicated to the dignity of man and the fulfillment of his most cherished wish for freedom, tolerance, and justice.}}

9시 8분, 맥아더는 항복 문서에 서명하기 위해 5개의 만년필을 준비하여 사용했다. 그 중 하나는 아내 진에게 선물했고,[157] 나머지는 웨인라이트, 퍼시벌,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에 증정될 예정이었다.[158] 시게미쓰 마모루가 서명하는 것을 돕기 위해 맥아더는 서덜랜드에게 서명 지점을 가리키게 했다. 모든 서명이 끝나자 맥아더는 "이제 세계에 평화가 회복되었으니, 신께서 항상 그것을 지켜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식은 종료되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동시에 1,000대가 넘는 비행기가 하늘을 가르며 식전의 막을 내렸다.[159]

쇼와 천황은 항복 조인 보고를 기다렸고, 가세 슌이치가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 "만약 우리가 승리자였다면, 이 정도의 관대함으로 패자를 포용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세는 쇼와 천황이 "맥아더 원수의 고결한 스테이츠맨십, 깊은 인간애, 그리고 원대한 시야를 칭찬한 가세의 보고서에 쇼와 천황은 동의했다"라고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했다.

4. 3. 1. 히로히토 천황과의 사진

1945년부터 1946년까지 맥아더는 히로히토 천황을 대신하여 일본의 권력을 장악하며 일본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집정관 역할을 했다. 맥아더는 일본을 통치하기 위해 천황의 "인간 선언"을 이끌어내고 성서를 대량으로 유포하는 등 종교를 통해 일본을 순응시키려 했다.[167]

맥아더와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첫 만남, 1945년 9월


맥아더는 쇼와 천황의 격을 낮추기 위해 그와 나란히 기념사진을 찍었다. 183cm의 맥아더와 165cm의 쇼와 천황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쇼와 천황을 초라하게 보이게 했다. 사진 속 두 사람의 자세도 대조적이었는데, 쇼와 천황은 차렷 자세로 긴장한 반면 맥아더는 짝다리를 짚고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서 있었다.

하지만 맥아더의 의도와는 달리, 일본인들은 천황의 격을 깎는 대신 맥아더를 신으로 숭배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당시 일본인들이 맥아더에게 보낸 팬레터가 엄청났는데, 1946년 9월부터 1951년 5월까지 연합국 번역통역반(ATIS)에서 44만 1,161통의 편지를 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맥아더는 본의 아니게 일본인들에게 신으로 숭배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일본인들은 그에게 "GHQ 막부의 더글러스 맥아더 쇼군"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심지어 맥아더가 신토 토속신에 포함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45년 8월 29일, 맥아더는 천황 히로히토를 포함한 일본 정부 기구를 통해 권한을 행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30][31] 맥아더는 천황을 통해 통치하는 것이 일본을 운영하는 데 훨씬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32]

맥아더는 천황을 군국주의자들과 분리하고, 천황을 입헌 군주로 유지하되 허수아비로 만들고, 천황을 이용하여 일본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동시에, 맥아더는 천황과의 첫 만남 사진을 공개하여 제국적 신화를 훼손했다. 일본 국민들은 처음으로 천황을 키가 훨씬 큰 맥아더에게 가려진 인간으로 보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사진을 금지하려 했으나 맥아더는 금지령을 철회하고 모든 일본 신문에 사진을 인쇄하도록 명령했다.[150]

맥아더는 천황을 보호하고 그에 대한 어떠한 조사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1945년 10월에 그의 참모들에게 "일본의 평화로운 점령과 재건, 혁명과 공산주의의 예방을 위해, 전쟁 선포 실행과 천황의 이후 지위에 관한 사기, 위협 또는 강압을 보여주는 모든 사실을 정리하라"고 명령했다.[151] 1946년 1월, 맥아더는 워싱턴에 천황을 전범으로 기소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맥아더는 보너 펠러스 준장을 통해 요나이 미쓰마사 제독에게 도조 히데키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천황 기소 회피 시도와 도조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려는 시도는 성공했다.[152]

1945년 8월 14일, 일본은 연합국에 포츠담 선언 수락을 통보했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일본의 항복에 입회하도록 했다. 맥아더는 이 임명을 매우 기뻐했다.

맥아더의 일본 진주에 대해, 가와베 도라시로 참모차장을 전권 위원으로 하는 사절단이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마닐라까지 면밀한 협의를 위해 파견되었다. 맥아더는 자신이 천황의 권위를 계승하는 인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사절단과 직접 만나지 않았다.

8월 30일, 맥아더는 가나가와현의 아쓰기 해군 비행장에 도착했다. 맥아더는 천황의 명령으로 항복한 일본군 병사가 반란을 일으킬 리 없다고 확신했다.[168]

맥아더는 사다리에 발을 디디자마자 바로 내려가지 않고, 180도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 후에 아쓰기 땅에 발을 디뎠다. 이는 신문 기자의 촬영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GHQ는 지배자 맥아더를 전 일본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쇼와 천황과의 회담을 추진했다. 1945년 9월 27일, 대사관 공저를 방문한 쇼와 천황을 맥아더는 마중하지 않았지만, 천황이 퇴장할 때는 현관까지 배웅하는 행동을 취했다. 이후 맥아더는 쇼와 천황이 일본의 점령 통치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을 깊이 했다.[169]

그때 촬영된 맥아더와 쇼와 천황의 사진은 다음 날 신문에 게재되어 일본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진을 통해 일본의 진정한 지배자가 누구인지 깨닫게 되었다.

점령 하의 일본에서 맥아더의 지령은 절대적이었기에 샐러리맨들 사이에서는 "맥아더 장군의 명령에 따라"라는 말이 유행했다. 또한 도조 히데키가 요코하마의 야전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맥아더가 문병을 왔고, 나중에 도조는 "미국에도 훌륭한 무사도가 있다"고 감격했다.[170]

쇼와 천황과 맥아더의 회담에 대해서는 다양한 증언이 존재한다. 맥아더는 쇼와 천황이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을 때 감동받았다고 회고했다.

맥아더로부터 회담의 내용을 들은 관계자들의 증언은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인 부분은 맥아더의 회고록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어쨌든, 쇼와 천황과의 첫 회담 후에 맥아더의 천황에 대한 경애심은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맥아더는 1946년 1월 25일에 미 육군성 앞으로 천황을 전범으로 고발할 경우 발생할 혼란을 경고하는 극비 전문을 보냈다. 이 전문으로 인해 미국 정부 내에서 천황의 전범 문제는 불문에 부쳐지게 되었다.[196]

맥아더가 천황의 권위를 일본 통치에 이용했듯이, 일본 측도 쇼와 천황의 신변 안전 보장과 천황제 존속을 위해 맥아더와 진주군을 이용하고자 했다. 일본 정부와 황실은 맥아더와 진주군에게 궁중의 우아한 행사에 대한 초대장을 정기적으로 보냈다. 맥아더 본인은 참가하지 않았지만 아내와 아들이 기뻐하며 참가했다.

점령 당시, 맥아더는 많은 일본 국민들로부터 "맥 원수"라고 칭송받으며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다.[197][198] 패전에 의해 이전의 가치관을 모두 부정당한 일본인에게 맥아더는 새로운 강력한 지도자로 보였다.

맥아더와 GHQ는 일본인의 대처를 이해하고 있었으며, CIE와 CCD를 이용하여 일본인의 사상 개조와 행동 조작을 행했다. 특히 맥아더에 관한 정보 조작에 힘썼다. CIE는 맥아더의 이미지 전략에 주력하여 맥아더의 존재를 빛나는 존재로 일본인에게 심어주려고 노력했다.[199]

맥아더는 모자를 쓰지 않은 사진이나 안경을 쓴 모습의 촬영을 금지했다. 사진 촬영의 각도에 대해서도 세세한 주문이 있었다. 맥아더에 대한 비난 기사는 금지되었고, 칭찬 기사는 장려되었다.[200]

GHQ는 맥아더의 의향에 따라 맥아더의 신화 구축에 다양한 책략을 사용했고, 그 결과 많은 일본 국민에게 맥아더는 천황 이상의 카리스마성을 가진 "푸른 눈의 대군"으로 인식되었다. 쇼와 천황과 맥아더의 첫 회담 사진은 이러한 인상 구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201]

4. 3. 2. 탈군국주의 정책

맥아더는 일본의 탈군국주의화 정책을 추진하며 사회주의노동운동, 즉 노동조합 합법화를 통해 자본가를 견제하려 했다. 이는 자본가가 군대와 협조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교과서 내 천황 신격화 금지, 군국주의 체제의 버팀목이었던 재벌 해체, 전쟁 책임이 있던 공직자 2만 명 공직 추방, 농지개혁 등을 시행했다.[157]

그러나 한국 전쟁 발발과 트루먼과의 갈등으로 인해 일본 사회가 다시 보수화되면서 이러한 시도들은 퇴색되었다. 공직 추방령이 해제되면서 전전의 우익 성향 정치인, 공직자들이 복귀했고, 해체되었던 재벌은 다시 재결합했다. 이로 인해 메이지 유신 지지자들로부터 맥아더는 GHQ 막부의 장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158]

세 줄의 벤치에 각각 10여 명의 남자가 서 있습니다. 그 뒤에는 제복을 입은 5명의 남자가 서 있습니다.
도쿄 전범 재판의 피고인들


맥아더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소에서 선고된 전쟁 범죄에 대한 형을 확인하고 집행할 책임이 있었다.[33] 1945년 말, 아시아 여러 도시에서 연합군 군사 위원회가 전쟁 범죄로 5,700명의 일본인, 대만인, 한국인을 재판에 회부했다. 약 4,300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1,000명 가까이가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수백 명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기소된 혐의는 난징 대학살, 바탄 죽음의 행진, 마닐라 학살 등을 포함했다.[159] 특히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마닐라 재판은 그가 명령하지 않았고 알지도 못했을 마닐라 학살로 인해 처형되었기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160] 이와부치 해군은 마닐라 전투가 끝날 무렵 자살했다.[161]

맥아더는 이시이 시로와 731 부대의 다른 구성원들이 인체 실험을 기반으로 한 세균전 데이터를 제공하는 대가로 기소 면제를 받도록 권고했다.[162] 또한 지치부노미야,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다케다 쓰네요시,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후시미 히로야스와 같은 왕자를 포함하여 전쟁 범죄에 연루된 천황과 황족 전체를 형사 기소에서 면제했다. 맥아더는 천황의 퇴위는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는 천황의 퇴위와 섭정 시행을 공개적으로 요구한 많은 황족 및 일본 지식인들의 조언을 무시한 처사였다.[163] 맥아더는 천황이 처형되거나 종신형을 선고받을 경우 일본 사회 전반에서 폭력적인 반발과 혁명이 일어날 것이고, 이는 일본을 친서방적 현대 민주주의 국가로 바꾸려는 자신의 목표를 방해할 것이라고 보았다. 1946년 2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보낸 전보에서 맥아더는 천황을 처형하거나 투옥하려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100만 명의 점령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64]

일본 주둔 연합군 최고사령관(SCAP)으로서 맥아더와 그의 참모진은 일본의 재건, 군국주의와 초국가주의 근절, 정치적 시민 자유 증진, 민주 정부 수립을 지원했으며, 일본을 세계 주요 산업 강국으로 만든 새로운 노선을 설정하는 데 기여했다. 미국은 일본 재건을 감독하기 위해 일본을 확고하게 통제했으며, 맥아더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사실상 일본의 임시 지도자였다.[165] 1946년, 맥아더의 참모진은 전쟁을 포기하고 천황의 군사적 권한을 박탈하는 새로운 헌법을 초안했다. 1947년 5월 3일에 발효된 이 헌법은 천황이 각료들의 조언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의원내각제 정부를 수립했다. 이 헌법에는 국가 정책의 수단으로서 호전 행위와 상비군의 유지를 금지하는 제9조가 포함되었다. 또한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며, 인종 차별을 금지하고, 의회와 내각의 권한을 강화하고, 경찰과 지방 정부를 분권화했다.[166]

맥아더 사령부의 울프 라데진스키가 주도하는 대규모 토지 개혁도 시행되었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약 1,900,000 헥타르, 즉 일본 경작지의 38%가 정부의 개혁 프로그램을 통해 지주로부터 매입되었으며, 1,900,000 헥타르가 이를 경작하는 농민에게 재판매되었다. 1950년까지 전체 농지의 89%가 자작농이었고 11%만이 소작농이었다.[167] 맥아더의 노동조합 가입 장려 노력은 큰 성공을 거두어 1947년까지 비농업 노동력의 48%가 노조에 가입했다. 1948년, 국무부의 개입이 증가하면서 일본에 대한 그의 단독 통제가 종료되면서 맥아더의 개혁 중 일부가 철회되었다.[168] 점령 기간 동안 SCAP은 산업을 독점했던 재벌로 알려진 많은 금융 연합을 완전히는 아니지만 성공적으로 폐지했다.[169] 결국, ''게이레츠''로 알려진 더 느슨한 산업 그룹이 발전했다. 이러한 개혁은 일본과 그 산업 능력이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망과 상충한다고 믿었던 미국 국방부와 국무부의 많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다.[170]

1947년, 맥아더는 미국 시민 자유 연합(ACLU)의 설립자이자 초대 전무 이사인 로저 내시 볼드윈을 초청하여 일본 정부와 국민에게 시민의 권리와 자유에 대해 가르치도록 했다. 맥아더는 또한 볼드윈에게 미국 육군이 점령하고 있던 남한에서도 같은 일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맥아더는 볼드윈을 소련을 사랑하는 공산주의자라고 믿었던 반미 활동 위원회와 FBI의 구성원들을 무시했다. 그는 서구식 시민의 권리를 일본인에게 신속하게 도입할 시민 자유 전문가를 원했고, 보수주의자들은 너무 오래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볼드윈은 일본 시민 자유 연합을 창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ACLU 지도자들에게 보낸 기밀 서한에서 반군국주의적이고 매우 진보적인 볼드윈은 맥아더에 대해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관찰은 내가 어떤 민간인에게서도 들은 최고의 수준이며, 장군으로서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라고 말했다.[33]

다양하지만 본질적으로 유사한 형태로 천 년 이상 지속된 일본의 세습 귀족인 화족은 맥아더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새로운 일본 헌법에 의해 폐지되었다. 이것은 왕족과 무관한 왕자, 남작, 백작을 포함하는 유럽의 귀족 제도와 유사했다. 또한 오케와 신노케로 불리는 황실의 방계 혈족은 폐지되어 모든 권리와 특권을 박탈당하고 즉시 평민으로 전환되었다. 미국 점령 이후 자신을 왕족이나 귀족의 일원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유일한 일본인은 천황과 그의 직계 가족 약 20명이었다. 맥아더와 헌법 제정자들의 이러한 조치는 모든 구 황실 계급과 귀족 계급을 폐지함으로써 일본을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34]

맥아더는 부드러운 방식으로 일본을 통치했다. 그는 일본이 진정으로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를 원했고, 1946년 일본 총선거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여, 미국 정부의 유보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일본 공산당을 합법화했으며, 이 선거는 여성의 투표를 허용한 최초의 선거였다. 그는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일제 시대의 모든 정치범 석방을 명령했다. 1946년 11년 만에 처음으로 열린 메이데이 퍼레이드도 맥아더의 승인을 받았다. 메이데이 축제 전날, 30만 명의 일본 공산주의자들이 도쿄 황궁과 다이이치 빌딩 앞에서 붉은 깃발을 들고 친마르크스주의 구호를 외치는 시위를 벌일 예정이었는데, 히데오 도카야마가 이끄는 암살단이 메이데이에 맥아더를 수류탄과 권총으로 암살할 계획을 세웠지만 저지당했고, 그 구성원 중 일부가 체포되었다. 이 음모에도 불구하고 메이데이 시위는 계속되었다. 맥아더는 공산주의자들을 감옥에서 석방하고, 시대를 초월한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농촌 일본의 농민들에게 공산주의보다 더 인기를 얻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선거에 자유롭게 참여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일본 공산당이 일본에서 인기를 얻는 것을 막았다. 1946년 선거에서 그들은 6석만 얻었다.[35][36]

맥아더는 또한 워싱턴 D.C.로부터 명확한 지시나 주도권이 없었기 때문에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남한을 담당했다.[171] 맥아더는 합동 참모본부나 국무부로부터 한국을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지에 대한 계획이나 지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결과는 매우 격동적인 3년의 군정으로 이어졌고, 이는 1948년 친미적인 대한민국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그는 1945년 9월 남한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은 존 R. 하지 중장에게 SCAP을 대신하여 이 지역을 통치하고 도쿄에 보고하도록 명령했다.[172][173] 1951년 4월 19일 의회 연설에서 맥아더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일본 국민은 전쟁 이후 현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혁을 겪었다. 칭찬할 만한 의지, 배우려는 열망, 이해할 수 있는 뚜렷한 능력을 가지고 그들은 전쟁의 잿더미에서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의 우위를 헌신하는 건물을 일본에 세웠으며, 그 과정에서 정치적 도덕, 경제적 기업의 자유, 사회 정의의 진전을 위해 헌신하는 진정으로 대표적인 정부가 창출되었다.[174]

맥아더는 1949년 일본 정부에 권력을 이양했지만, 1951년 4월 11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될 때까지 일본에 머물렀다. 1951년 9월 8일에 서명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은 연합군의 점령 종식을 의미했으며, 1952년 4월 28일에 발효되면서 일본은 다시 독립 국가가 되었다.[175]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일본에 대해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윌리엄 조셉 시볼드는 "미국 역사상 한 사람의 손에 이처럼 거대하고 절대적인 권력이 쥐어진 예는 없었다"고 평가했다. 9월 3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는 트루먼 대통령의 포고를 받아 "점령 하에서도 일본의 주권을 인정한다"고 한 포츠담 선언을 뒤집고 "행정·사법·입법의 삼권을 빼앗아 군정을 실시한다"는 포고를 내렸으며, 더욱이 "공용어도 영어로 한다"고 했다 (세 개의 포고도 참조).

이에 대해 시게미쓰 마모루 외상은 맥아더에게 "점령군에 의한 군정은 일본의 주권을 인정한 포츠담 선언을 벗어난다", "독일과 일본은 다르다. 독일은 정부가 붕괴했지만 일본에는 정부가 존재한다"고 맹렬히 항의하며 포고의 즉시 철회를 강력히 요구했다. 그 결과, 연합군 측은 트루먼 대통령의 포고를 즉시 철회했고, 점령 정책은 일본 정부를 통한 간접 통치가 되었다(연합군 점령하의 일본도 참조).[176][177]

항복 조인식으로부터 6일이 지난 9월 8일, 맥아더는 막료들을 데리고 호텔 뉴그랜드을 출발하여 도쿄로 진주했다. 도쿄 진주식은 개전 이후 4년 가까이 폐쇄되었던 주일본 미국 대사관에서 열렸다. 군악대가 국가를 연주하는 가운데, 진주만 공격 당시 워싱턴의 미국 국회의사당에 게양되었던 성조기를 일부러 미국 본토에서 가져와 대사관의 폴에 게양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178]

그 후 맥아더와 막료들은 제국 호텔에서 오찬에 참석했지만, 맥아더는 오찬 전에 제국 호텔의 이누마루 데쓰조 사장이 운전하는 차로 시내를 안내받았다. 차가 황거 앞 제일생명관 앞에 이르자 맥아더는 이누마루에게 "저건 뭐지?"라고 물었다. 이누마루가 "제일생명관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맥아더는 "그렇군"이라고만 대답했다.[179] 오찬이 끝난 13시에 맥아더는 막료들을 데리고 제일생명관을 다시 방문하여 입구에서 한 걸음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이거 좋군"이라고 말하며, 제일생명관을 자신의 사령부로 하기로 결정했다.[180] 이누마루는 자신과 맥아더의 대화가 제일생명관이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맥아더는 진주 직후부터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로 할 건물을 찾고 있었으며, 전재(전쟁 피해)로 인한 파괴를 면한 제일생명관과 메이지생명관이 그 후보로 선택되어, 9월 5일부터 전날까지 양관에는 맥아더의 막료들이 여러 번 방문하여 자료를 받거나, 제일생명보험야노 이치로 상무 등 사원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등의 준비를 했다. 부관인 서덜랜드가 실견하여 최종 결정할 예정이었지만, 이누마루의 안내를 받고 흥미를 느낀 맥아더가 직접 찾아와 야노의 안내로 내부도 확인하고 즉결했다. 다른 하나의 후보가 된 메이지생명관에는 "이제 됐어"라며 보러 가지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메이지생명관도 접수되어 미국 극동 공군 사령부로 사용되었다.[181]

제일생명관은 1938년에 준공된 황거를 마주보는 지상 8층 건물로, 천황 위에 군림하여 일본을 지배하는 맥아더 사령관의 지위를 잘 나타내고 있었다.[182] 그러나 맥아더 자신이 집무실로 선택한 방은 그리 넓지도 않았고, 위치상 황거를 바라볼 수도 없었으며, 아래층은 식당이라 시끄러운 소리가 울렸다. 맥아더의 막료들이 더 넓고 전망도 좋은 쾌적한 방을 사용했지만, 맥아더가 일부러 부하보다 소박한 집무실로 하려고 생각한 것은, 강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벗어 던지면 꾸밈없는 무골(투박한 군인)이라는 것을 보이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183] 그러나 실제로는 맥아더의 막료들에 의해 제일생명에 "가장 좋은 방을"이라는 요구가 있었고, 맥아더의 집무실로 준비된 것은 제일생명의 사장실(당시 사장은 이시자카 야스타카)로, 벽은 모두 미국산 호두 재, 바닥은 너도밤나무·참나무·벚나무·흑단 등의 상감 세공으로 만들어진 튜더 왕조풍의 매우 정교한 구조로 되어 있어, 제일생명관 최고의 방이었다.

점령 행정에 관하여 기존 체제의 유지가 되면 피할 수 없는 것이 천황제의 존치 (상징 천황제로의 이행)와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 문제인데, 벌써 종전 1년 6개월 전인 1944년 2월 18일 국무성의 외교 문서 '천황제'에서 "천황제에 대한 최종 결정에는 연합국의 의견 일치가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일본 여론은 압도적으로 천황제 폐지에 반대한다……강권으로 천황제를 폐지하고 천황을 퇴위시켜도 점령 정책에 대한 효과는 의심스럽다"며 천황제 유지를 방향으로 의견을 내놓고 있다. 또한 1945년에 들어서자, 일본의 점령 정책을 협의하는 국무·육·해군 3성 조정위원회(SWNCC)에서 "점령 목적에 도움이 되는 한 천황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천황이 퇴위해도 명백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전범 재판에 회부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 인식 하에 협의가 거듭되어, 전쟁의 완전 종결과 평온한 일본 통치를 위해 쇼와 천황 자신의 위신과 천황에 대한 국민의 친애의 정이 불가결하다는 지일파 국무 장관 대리 조셉 그루 등의 진언도 있어, 당분간 천황제는 유지하고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은 묻지 않는 방침이 되었다.[184] 이는 맥아더도 같은 의견이었지만, 다른 연합국과 대일 강경파 및 미국의 많은 국민들이 천황의 전쟁 책임 추궁을 요구했기 때문에, 연합국 전체의 방침으로 결정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185] 9월 12일에는 기자 회견에서 "일본은 4등국으로 전락했다. 두 번 다시 강국으로 복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호소야 유이치 (국제 정치학자, 게이오기주쿠 대학 교수)는 전권을 가진 맥아더와 그 측근들에 의해 일본인에게 "대미 종속"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 아니냐고 지적하고 있다.[186]

맥아더가 먼저 착수한 것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였지만, 군사력의 대부분이 붕괴된 독일 국방군과 달리, 일본군은 국내외에 154개 사단, 700만 명의 병력이 남아 있었다. 난항이 예상되었지만, 육해군성 등의 기존 조직을 이용하여 평온하게 무장 해제가 진행되어 불과 2개월 만에 내지의 257만 명의 무장 해제와 복원이 완료되었다.

다음으로 우선시된 것은 전쟁 범죄인의 체포였으며, 종전 전부터 미국 육군 방첩 부대 (약칭 CIC)가 리스트를 작성했고, 국무성의 요구 인물도 추가하여 9월 11일에는 제1차 A급 전범 38명의 체포를 단행했다. 그러나 도조 히데키는 자살 미수, 고이즈미 치카히코와 하시다 구니히코 2명이 자살했다. 최종적으로 체포된 A급 전범은 126명이 되었지만, 전범 체포를 지휘한 CIC 부장 소프는 소급 법으로 A급 전범을 재판하는 것에 의문을 느껴 맥아더에게 "전범을 망명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안한 적이 있었지만, 맥아더는 "그러기에는 내 힘이 부족하다, 연합군의 녀석들은 피에 굶주려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187]

A급 전범에게 동정적이었던 맥아더도, 필리핀 관련 전쟁 범죄 소추에 대해서는 필리핀 국민에게 "전쟁 범죄인은 반드시 처벌한다"고 약속했기에 열심이었다. 맥아더 군을 루손 산중에 종전까지 발이 묶이게 하고 "군사상 최대의 지연 작전"을 지휘한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과 태평양 전쟁 초반에 맥아더에게 굴욕을 안겨준 혼마 마사하루 중장에 대해서는 전쟁 종결 전부터 소추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188]

야마시타는 1945년 9월 3일 필리핀 바기오에서 항복 조인식이 끝나자마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야마시타는 "일단 산을 내려가면, 적은 두 번 다시 석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각오했지만, 체포의 죄목인 마닐라 학살 등 일본군의 잔학 행위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맥아더가 명하고, 서태평양 미국 육군 사령관 윌리엄 D. 스테이어 중장이 개정한 마닐라 군사 법정은, 그전까지 판례도 없었던, 부하가 행한 행위는 모두 지휘관의 책임으로 귀결된다는 "지휘관 책임론"으로 사형 판결을 내렸다. 사형 판결을 내린 5명의 군사 법정 재판관은, 맥아더나 스테이어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법조 경험이 전혀 없는 직업 군인이었으며, 전형적인 캥거루 법정 (유사 재판: 법률을 무시하고 행해지는 사적 재판)이었다.[189] 참모장인 무토 아키라 중장이, 독방이라고는 해도 범죄자처럼 군 사령관 야마시타를 대하는 것에 격분하여 "일국의 군 사령관을 감옥에 넣다니 무슨 짓이냐"고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90]

또한, 마닐라에 대해서는 그 희생자의 대부분이, 일본군의 잔학 행위가 아니라 미국군의 포격으로 인한 희생자였다는 지적도 있으며, 야마시타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고, 미국군이 행한 마닐라 파괴를 일본군에게 전가하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191] 야마시타는 구속되었을 때부터 이미 자신의 운명을 달관하고 있었으며, 독방 안에서 부채에 먹 그림을 그리거나, 사인을 요구하는 많은 미국군 장병이나 장교의 요구에 응하여 지폐에 사인을 하면서 지냈다. 1945년 12월 8일 개전일에 맞춰 마닐라 군사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192] 맥아더는 야마시타의 교수형에 즈음하여, 더 굴욕을 맛보도록 "군복, 훈장 등 군무에 관련된 것을 모두 벗겨라"라고 명령했고, 야마시타는 죄수복 차림으로 망고 나무 옆의 형대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혼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본인이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던, 이른바 바탄 죽음의 행진의 책임자로 지목되었다. 맥아더가 죽음의 행진의 책임자를 벌하는 것을 "성스러운 의무"로 기세등등해 있었고, 맥아더를 유일하게 꺾은 군인이었으며, 무엇보다 그 목을 원했기에, 맥아더에게는 일석이조의 재판이 되었다.[193] 혼마의 아내 후지코는 혼마의 변호사 중 한 명인 프랭크 코다 대위의 요청에 따라, 혼마의 인간성을 증언하기 위해 법정에 서게 되었다. 군사 법정이 열리고 있는 마닐라로 출발하기 전에, 아사히 신문의 취재에 대해 후지코는 "저는 결코 남편의 목숨을 구걸하러 가는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혼마가 어떤 인간인지, 꾸밈없는 진실의 혼마를 제 힘으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많이 알리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결국 야마시타 재판과 마찬가지로 캥거루 법정에 의해 판결은 사형이었다. 판결 후 후지코는 변호사 중 한 명인 퍼니스 대위와 함께 맥아더를 만났다. 맥아더의 회고에서는, 후지코가 혼마의 목숨을 구걸하러 왔다고 되어 있지만, 후지코에 따르면 "남편은 적장의 앞에서 아내가 목숨을 구걸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목숨 구걸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후세를 위해 재판 기록의 사본을 원했지만, 맥아더로부터 여자 주제에 참견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거절당했다"라고 했다.[194]

그러나, 후지코의 기억에 의한 양자 간의 대화 중에서, "혼마는 매우 훌륭한 군인입니다. 만약 죽게 된다면 이것은 세계의 손실이라고 생각합니다"와 "(맥아더) 각하께 그의 재판 기록을 다시 한번 전부 읽어주실 수 없겠습니까?"라는 후지코의 제안을, 맥아더가 혼마의 목숨 구걸로 느끼고, 또한 후지코가 "사형 판결은 모두 여기에 확인을 구하러 온다고 합니다만, 각하도 대단하시군요"라고 비꼬아 말한 것에 대해, 맥아더가 "내 일에 참견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한 것을 후지코가 오만하게 느끼고 "여자 주제에 참견하지 마"라고 말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195] 혼마의 사형 판결은 야마시타의 교수형과 달리,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고려하여 총살형이 되었고, 군복 착용도 허용되었다.[196]

과거의 "호적수"에게 사형당한 혼마였지만, 1946년 4월 3일 사형 집행 직전에는, 감옥 안에 통역과 교계사와 경비병을 불러들여 "저는 바탄 반도 사건으로 죽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수만 명의 무고한 시민의 죽음은 도대체 누구의 책임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맥아더인가, 트루먼인가"라고 완벽한 영어로 말하자, 머뭇거리는 일동에게 마지막으로 지급된 맥주와 샌드위치를 권하며 "나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건배했다. 그 후 화장실에 가서 "아, 미국의 배급은 모두 밖에 내왔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긴 후 총살형에 처해졌다.[197] 사형 집행 후에 후지코는 "재판은 정말 복수적인 것이었습니다. 명목은 포로 학살이라는 것이었지만, 맥아더 원수의 빛나는 전적에 패전이라는 단 하나의 오점을 찍은 혼마에 대한 복수 재판이었습니다"라고 소감을 말했다.[194]

후에 이 재판은, 미국 내에서도 이견이 제기되어 "법과 헌법의 전통에 비추어, 재판이라고 할 수 없다", "법적 절차를 거친 린치" 등이라고도 불렸다.[198] 1949년에 야마시타의 변호인 중 한 명이었던 A. 프랭크 릴 대위가 야마시타 재판의 진실을 미국 국민에게 묻기 위해 『야마시타 재판』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일본에서도 번역 출판 움직임이 있었지만 GHQ가 허가하지 않아, 일본에서 출판된 것은 GHQ의 점령이 끝난 1952년이었다.[199]

연합군 점령하의 일본

맥아더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 5대 개혁 등 일본의 민주화가 추진되었고, 일본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4. 3. 3. 탈군국주의의 긍정적인 효과

탈군국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노동 운동 묵인은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 개선에 기여하여 임금 상승과 소비 증진을 통해 일본 경제의 선순환을 이끌었다. 동국대학교 경제학 명예교수 주종환에 따르면, 과거 일본 농민들은 높은 소작료 부담과 도시 노동자들의 저임금으로 인해 빈곤에 시달렸고, 이는 낮은 구매력으로 이어져 경제 침체를 심화시켰다. 일본은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으나 패전했다. 일본 미군정은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해 정치, 경제민주화, 전쟁 포기, 군비 확장 금지 등을 명시한 일본국 헌법 제9조(평화헌법)를 제정하고, 노동조합 활동 합법화, 재벌 해체, 농지 개혁 등을 통해 소득 재분배를 추진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농민과 노동자들의 구매력이 향상되어 일본 경제가 활성화되었다. 당시 언론은 이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호경기"라고 보도했다.[37]

연합군 최고사령관(SCAP) 맥아더는 참모진과 함께 일본 재건, 군국주의 및 초국가주의 근절, 정치적 시민 자유 증진, 민주 정부 수립을 지원하며 일본을 세계 주요 산업 강국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맥아더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사실상 일본의 임시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며 일본 재건을 감독했다. 1946년, 맥아더의 참모진은 전쟁을 포기하고 천황의 군사적 권한을 박탈하는 새로운 헌법을 초안했으며, 1947년 5월 3일에 발효된 이 헌법은 천황이 각료들의 조언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의원내각제 정부를 수립했다. 이 헌법에는 국가 정책의 수단으로서 호전 행위와 상비군의 유지를 금지하는 제9조가 포함되었으며, 여성 참정권 부여, 기본적 인권 보장, 인종 차별 금지, 의회와 내각의 권한 강화, 경찰과 지방 정부 분권화 등의 내용도 담겼다.[38]

울프 라데진스키가 주도한 대규모 토지 개혁도 시행되었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약 1,900,000 헥타르(470만 에이커), 즉 일본 경작지의 38%가 정부의 개혁 프로그램을 통해 지주로부터 매입되어 이를 경작하는 농민에게 재판매되었다. 1950년까지 전체 농지의 89%가 자작농 소유가 되었고 소작농은 11%에 불과했다.[39] 맥아더의 노동조합 가입 장려 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어 1947년까지 비농업 노동력의 48%가 노조에 가입했다. 1948년, 국무부의 개입이 증가하면서 맥아더의 개혁 중 일부가 철회되었다.[40] 점령 기간 동안 SCAP은 산업을 독점했던 재벌로 알려진 금융 연합을 완전히는 아니지만 성공적으로 해체했으며, 이후 ''게이레츠''로 알려진 더 느슨한 산업 그룹이 발전했다.[41] 이러한 개혁은 일본과 그 산업 능력이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망과 상충한다고 믿었던 미국 국방부와 국무부의 우려를 낳았다.[42]

1947년, 맥아더는 미국 시민 자유 연합(ACLU)의 설립자이자 초대 전무 이사인 로저 내시 볼드윈을 초청하여 일본 정부와 국민에게 시민의 권리와 자유에 대해 가르치도록 했다. 맥아더는 또한 볼드윈에게 미국 육군이 점령하고 있던 남한에서도 같은 일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맥아더는 볼드윈을 소련을 사랑하는 공산주의자라고 믿었던 반미 활동 위원회와 FBI의 구성원들을 무시했다. 그는 서구식 시민의 권리를 일본인에게 신속하게 도입할 시민 자유 전문가를 원했고, 보수주의자들은 너무 오래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볼드윈은 일본 시민 자유 연합을 창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ACLU 지도자들에게 보낸 기밀 서한에서 반군국주의적이고 매우 진보적인 볼드윈은 맥아더에 대해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관찰은 내가 어떤 민간인에게서도 들은 최고의 수준이며, 장군으로서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라고 말했다.[33]

천 년 이상 지속된 일본의 세습 귀족인 화족은 맥아더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새로운 일본 헌법에 의해 폐지되었다. 또한 오케와 신노케로 불리는 황실의 방계 혈족은 폐지되어 모든 권리와 특권을 박탈당하고 즉시 평민으로 전환되었다. 미국 점령 이후 자신을 왕족이나 귀족의 일원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유일한 일본인은 천황과 그의 직계 가족 약 20명이었다. 맥아더와 헌법 제정자들의 이러한 조치는 모든 구 황실 계급과 귀족 계급을 폐지함으로써 일본을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34]

맥아더는 유화적인 방식으로 일본을 통치하며 일본이 진정으로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는 1946년 일본 총선거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여 미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공산당을 합법화했으며, 이 선거는 여성의 투표를 허용한 최초의 선거였다. 그는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일제 시대의 모든 정치범 석방을 명령하고, 1946년 11년 만에 처음으로 열린 메이데이 퍼레이드도 승인했다. 메이데이 축제 전날, 30만 명의 일본 공산주의자들이 도쿄 황궁과 다이이치 빌딩 앞에서 붉은 깃발을 들고 친마르크스주의 구호를 외치는 시위를 벌일 예정이었는데, 히데오 도카야마가 이끄는 암살단이 메이데이에 맥아더를 수류탄과 권총으로 암살할 계획을 세웠지만 저지당했고, 그 구성원 중 일부가 체포되었다. 이 음모에도 불구하고 메이데이 시위는 계속되었다. 맥아더는 공산주의자들을 감옥에서 석방하고, 시대를 초월한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농촌 일본의 농민들에게 공산주의보다 더 인기를 얻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선거에 자유롭게 참여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일본 공산당이 일본에서 인기를 얻는 것을 막았다. 1946년 선거에서 그들은 6석만 얻었다.[35][36]

맥아더는 또한 워싱턴 D.C.로부터 명확한 지시나 주도권이 없었기 때문에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남한을 담당했다.[43] 맥아더는 합동 참모본부나 국무부로부터 한국을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지에 대한 계획이나 지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결과는 매우 격동적인 3년의 군정으로 이어졌고, 이는 1948년 친미적인 대한민국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그는 1945년 9월 남한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은 존 R. 하지 중장에게 SCAP을 대신하여 이 지역을 통치하고 도쿄에 보고하도록 명령했다.[44][45] 1951년 4월 19일 의회 연설에서 맥아더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맥아더는 1949년 일본 정부에 권력을 이양했지만, 1951년 4월 11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될 때까지 일본에 머물렀다. 1951년 9월 8일에 서명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은 연합군의 점령 종식을 의미했으며, 1952년 4월 28일에 발효되면서 일본은 다시 독립 국가가 되었다.[47]

맥아더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 5대 개혁 등 일본의 민주화가 추진되었고, 일본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5. 한국에서의 미군정

## 한국에서의 미군정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9월 2일 더글러스 맥아더는 존 리드 하지 중장을 대리인으로 임명하여 '조선 민중에 대한 포고문 제1호'를 발표하며 한반도에 미군정을 시작했다.

### 미 군정기

1948년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승만은 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맥아더와 회담을 가졌다.[316] 이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주권 회복 후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은 의미 있는 방문이었다.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한국 방위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고, 맥아더는 10월 12일 도쿄에 도착한 이승만에게 전용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내 미군정을 지휘하던 존 하지와는 자주 갈등을 겪었고, 하지는 맥아더에게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보고를 올렸다.

1949년 2월, 이승만은 변영태를 맥아더 사령부에 보내 대한군원과 미군 주둔을 요청했으나, 맥아더는 "내 임무는 명확히 규정되어 카르빈 한 자루도 넘겨줄 수 없다"라며 거절했다.[314][315][316] 프란체스카 여사는 맥아더에게 "부디 우리 국민을 도와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317] 맥아더는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이승만을 다시 초청했고, 1950년 1월 21일 이승만은 임병직 외무부장관, 장기영 체신부장관, 고재봉, 김광섭, 정일권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맥아더를 만났다.[316]

### 한국 전쟁

6·25 전쟁 발발 직후, 맥아더는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의 요청에 따라 합참의 지시 없이 한국군 지원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318] 6월 26일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고,[319]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해군과 공군 지원을 명령했다.[320] 6월 29일 맥아더는 수원으로 와서 한강방어선을 시찰하고 지상군 투입을 요청했으며,[321][322][323] 주일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에게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324]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맥아더는 유엔군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그는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허세가 높은 반면 실속이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이승만에게 채병덕 해임을 건의하여 정일권으로 교체했다.[324]

1950년 11월, 맥아더는 외신 인터뷰에서 북한 외 공산국가의 군인이 한국 전쟁에 참여하는 것 같다고 발표하여 UN의 공산권 국가들로부터 허위 사실 주장으로 제소당했다.[325]

맥아더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참전 가능성을 낮게 보고, 보급선이 길어지는 것을 감수하며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김일성은 소련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중국에 부대 파견을 요청하고, 마오쩌둥에게 부대 파견 요청 편지를 보냈다.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소집하여 부대 파견을 결정하고 중국 인민지원군(항미원조의용군)을 파견했다.

10월 10일, 약 18만 명의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어 북한에 진입했고, 그 수는 30만 명까지 증가했다. 맥아더는 이러한 징후를 감지했지만 적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더욱 공격적으로 행동했다. 그는 트루먼의 지시를 어기고 국경 깊숙이 전진하도록 명령했다. 11월 1일, 중국군이 한국군 제2군단을 습격하여 한국군 3개 사단이 패주했다. 맥아더는 중국군의 대공세 개시 보고를 받고 혼란스러워하며 국방부에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고 있다"라는 전문을 보냈다.[176]

### 인천 상륙 작전

인천 상륙 작전 수행 직전


부산까지 후퇴했던 국군은 백선엽 등의 활약으로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여 부산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맥아더는 인민군 점령 지역의 중심부를 타격하여 보급로를 끊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미국 해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8월 28일 미합참본부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9월 15일, 206척의 함정과 7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영종도 근처에 집결, 작전이 시작되었다. 첫 단계로 월미도를 점령하고, 이후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이 인천반도를 공격하여 인민군의 주력 규합을 막고 인천을 장악했다.

상륙하는 미군


인천 상륙 작전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어 전세를 역전시켰다.

맥아더는 워싱턴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전쟁의 흐름을 바꾸었다. 군산으로 상륙 지점을 변경하라는 제안도 있었지만, 맥아더는 인천 상륙을 강행했다. 북한군은 미군의 상륙 정보를 알고 있었지만 병력 부족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김일성은 이 정보를 크게 믿지 않았다.[326]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인천 상륙을 경고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무시했다.

미군은 월미도를 점령하여 인천항을 확보했고, 첫날 전투에서 미군 사망자는 20명에 불과했다. 서울 진입은 쉽지 않았지만, 결국 작전은 성공했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의 실패 원인으로 '인천상륙 대비 실패', '서울 조기 포위 실패', '춘천 조기 점령 실패'를 꼽았다.[329] 인천 자유공원에는 맥아더 동상이 건립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자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결의안 82, 83, 84, 85를 통과시켜 유엔군 사령부(UNC) 창설을 승인했다. 유엔은 미국 정부에 사령관을 지명할 권한을 부여했고, 합동 참모 본부는 맥아더를 추천했다. 맥아더는 극동군 사령관으로 남아 있으면서 유엔군 사령관이 되었다. 모든 남한군은 그의 지휘를 받게 되었고, 맥아더는 미 지상군 투입을 허가받았다.

1950년 7월, 맥아더는 인천 상륙을 계획했다. 9월, 맥아더의 군인들과 해병대는 북한군 후방 깊숙한 곳에서 성공적인 인천 상륙을 감행하여 서울을 탈환했다.

9월 11일,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38도선 너머 북한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인 NSC 81/1을 하달했다. 트루먼, 딘 애치슨 국무장관, 조지 마셜 국방장관, 유엔 주재 미국 대사 워렌 R. 오스틴, 영국 및 프랑스 정부는 모두 북한 전역을 침공하고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부산 교두보 방어와 곧 있을 인천 상륙 작전에 바빴던 맥아더는 이 결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39][40]

10월, 맥아더는 웨이크 섬 회담에서 트루먼과 만났고,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다섯 번째 수훈 훈장을 수여했다. 중국의 위협에 대해 잠시 질문을 받은 맥아더는 이를 일축하며 크리스마스까지 제8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고 1월에는 유럽에서 복무할 사단을 투입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더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10월 20일 맥아더는 제187 공수 연대 전투단의 공수 작전을 감독하고 관찰하기 위해 평양 북쪽의 숙천 - 순천 지역으로 날아갔다. 이것은 한국 전쟁 중 유엔군이 수행한 두 번의 공수 작전 중 첫 번째였다. 맥아더는 직접 작전을 감독한 공로로 수훈 비행 십자장을 받았다.[43]

한 달 후, 운산 전투에서 유엔군이 적과 교전하여 한국에 중국군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최대 7만 1천 명의 중국 군인이 이 나라에 있다고 추정했지만, 실제 숫자는 30만 명에 가까웠다.

8월에 들어 북한군의 전격적인 침공에 맞서, 한국군과 주한 미국군, 영국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밀려 부산 교두보로 밀려났다(부산 교두보 전투).

맥아더는 1942년 일본군의 맹공으로 코레히도르 섬에 갇혔을 때 바탄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는 일본군의 배후에 미군 부대를 역상륙시켜 배후를 치면 승리할 수 있다고 꿈꾸며 참모총장 마셜에게 그 작전을 제안했지만, 그 때는 실현 불가능했다. 7월 10일 라뮤엘 C. 셰퍼드 주니어 해병대 사령관이 도쿄를 방문했을 때 맥아더는 한반도 지도로 인천을 파이프로 두드리며 "나는 제1해병사단을 내 지휘하에 두고 싶다", "이곳(인천)에 그들(제1해병사단)을 상륙시키겠다"라고 셰퍼드에게 말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해병대였지만, 종전 후 군사비 삭감의 영향으로 존속조차 위태로워 출격 기회를 간절히 원했기에 셰퍼드는 맥아더의 제안에 달려들어 9월 1일까지 해병대 1개 사단을 준비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 합참의장오마 브래들리는 대규모 수륙 양용 작전에 소극적이었고 맥아더의 거듭된 작전 요청에 쉽게 허가를 내주지 않았지만, 맥아더는 "북한군에게 2면 작전을 강요할 수 있다", "적의 보급 및 통신망을 절단할 수 있다", "큰 항구를 빼앗아 서울을 탈환할 수 있다" 등 적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열성적으로 설득했고, 합참은 굴복하여 일단 동의했다. 그러나 맥아더로부터 상륙 예정 지점을 통보받자 합참 관계자들은 아연실색하며 말을 잃었다.. 인천은 서울과 가깝고 북한군의 대병력이 배치되어 있을 우려가 있는데다 자연 환경적으로 조류가 빠르고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상륙 작전에 적합하지 않고, 상륙 중에 적의 대병력에게 공격받으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8월 23일 워싱턴에서 육군 참모총장조셉 로턴 콜린스와 해군 작전부장포리스트 셔먼, 하와이에서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아서 W. 래드퍼드와 해병대 셰퍼드가 방일하여 인천 상륙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콜린스와 셔먼은 상륙 지점을 인천보다 남쪽인 군산으로 할 것을 제안했지만, 맥아더는 군산에서는 적군의 배후를 칠 수 없고 포위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태평양 전쟁 중 해군과 끊임없이 의견 대립을 해 왔던 것을 잊은 듯 "나의 해군에 대한 신뢰는 해군 자신을 넘어설지도 모른다", "해군은 과거에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고, 이번에도 없을 것이다"라며 해군을 칭찬하며 인천 상륙에 대한 찬성을 구했다.. 그 후 맥아더는 "이것이 배율 5,000배의 도박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도박을 자주 해 왔습니다", "저는 인천에 상륙하여 놈들을 분쇄해 보이겠습니다"라고 발언하자, 참석자들은 반론 없이 두려움에 의한 침묵이 회의실을 덮었다.. 회의는 맥아더 주도로 진행되었고, 한 장교는 "맥아더의 최면술에 걸렸다"라고 나중에 깨달았다..

이 회의 4일 후 합참으로부터 "조선 서안에 대한 육해군의 전개 행동 준비와 실시에 동의한다. 상륙 지점은 적의 방어가 약한 경우 인천, 또는 인천 남쪽의 상륙에 적합한 해변으로 한다"라는, 회의에서 유일하게 신중했던 육군의 콜린스에 의한 신중론이 담긴 명령 전문이 도착했다. 그러나 합참은 자신들의 신변 안전을 생각해 상륙 예정일 8일 전인 9월 7일에야 맥아더의 "배율 5,000배"라는 예상을 문제 삼았는지 "예정된 작전의 실현 가능성과 성공 확률에 대한 귀하의 예상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전문을 맥아더에게 보냈다. 맥아더는 즉시 "작전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저는 전혀 의문을 갖지 않습니다"라고 답변했고, 브래들리는 그 답변을 트루먼에게 보고하며 "귀하의 계획을 승인합니다. 대통령에게도 그렇게 전했습니다"라는 간결한 전문을 맥아더에게 보냈다. 맥아더는 이 트루먼과 브래들리의 행동을 보고 "이 작전이 실패했을 경우의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다"라고 생각하며 뼛속까지 소름이 돋았다고 후년에 말했다..

합참은 작전이 시작될 때까지 기밀 유지를 엄중히 했지만, GHQ의 기밀 유지는 허술했고, 당시 일본의 항만 경비는 빈약해 스파이 천국이 되어 있어 미군이 대규모 수륙 양용 작전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국에 훤히 알려져 있었다. 이에 마오쩌둥은 참모 레이잉푸에게 미군의 의도와 다음 공격 지점을 찾게 했다. 레이는 모든 정보를 검토한 결과 상륙 예상 지점을 6곳으로 좁혔지만 그 중 인천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마오에게 보고했다. 마오는 저우언라이를 통해 김일성에게 경고했다. 또한 북한에 있던 소련군의 군사 고문 몇 명도 김에게 인천에 미군이 상륙할 가능성을 지적했지만 김은 이러한 조언을 무시했다..

맥아더는 사세보로 향해 사령선이 될 AGC(상륙 지휘함)인 마운트 매킨리에 승선하여 인천을 향해 출항했다. 그 뒤에는 7개국 261척의 대함대가 뒤따랐다.. 함대는 도중에 태풍을 만났지만 9월 14일 마운트 매킨리는 인천 앞바다에 도착했다. 맥아더가 도착하기 전까지 인천항 주변은 먼저 도착한 순양함과 구축함의 함포 사격과 항공 모함 함재기의 공습으로 철저하게 두들겨 맞았다. 가장 철저하게 두들겨 맞은 곳은 인천항 입구에 위치한 월미도였지만,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인천 주변에 경비대 정도의 소병력밖에 배치하지 않았고, 월미도에도 350명의 수비대밖에 배치하지 않았다.. 9월 15일 새벽 5시 40분 해병 제1사단 부대가 중요 거점 월미도에 상륙했지만 단 10명의 부상자만 내고 점령되었다. 예상과 달리 피해가 경미하다는 것을 알게 된 맥아더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참모들에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며 해군과 해병대를 향해 "오늘 아침처럼 빛나는 해군과 해병대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라고 전문을 보냈고, 자신은 막료들과 커피를 마셨다..

월미도 공략 후에도 브래들리나 콜린스의 우려와 달리 인천 상륙 작전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작전은 맥아더의 계획보다 훨씬 순조롭게 진행되어 첫날 해병대의 전사자는 20명에 불과했다..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어 맥아더의 명성과 인기를 크게 높였다. 멋지게 상륙에 성공한 유엔군은 김포 비행장과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전진했다. 북한군은 인천을 쉽게 포기하는 대신 서울을 방어할 각오로 수도를 요새화했다. 맥아더는 인천에 상륙하여 유엔군이 5일 만에 서울을 탈환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북한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2주가 걸렸다. 유엔군이 서울 전역을 점령하자 북한군은 13만 명의 포로를 남기고 패주했다. 맥아더는 9월 29일 의기양양하게 김포 비행장에 내려 정오에 서울의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식전에 참석하여 "서울이 대한민국 정부의 소재지로 회복되었다"라고 극적인 선언을 했다. 맥아더로부터 "행정 책임의 수행"을 요구받은 이승만은 눈물을 흘리며 대한민국 전국민을 대표하여 "우리는 당신을 숭배합니다. 당신을 민족의 구세주로 존경합니다"라고 말했다. 맥아더는 이날도 서울에서 숙박하지 않고 오후에는 도쿄로 돌아갔지만 긴 군 경력에서의 최대 승리로 지금까지 최고의 영광을 얻었다고 느꼈다..

### 인천 상륙 작전 배경

인천 상륙 작전 당시 맥아더 (가운데)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더글러스 맥아더는 유엔군 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한국 전선에 투입되었다. 북한군의 맹공에 밀려 유엔군은 부산 교두보 전투까지 후퇴하며 위기를 맞았다.

맥아더는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인천 상륙 작전을 계획했다. 그는 1942년 일본군의 공격으로 코레히도르 섬에 갇혔을 때 일본군의 배후에 미군을 상륙시켜 승리하는 구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7월 10일, 맥아더는 라뮤엘 C. 셰퍼드 주니어 해병대 사령관에게 인천을 지목하며 제1해병사단을 그곳에 상륙시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326]

그러나 인천 상륙 작전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미국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는 대규모 상륙 작전에 소극적이었고, 합참 관계자들은 인천의 험난한 자연 환경(빠른 조류, 큰 조수 간만의 차)과 북한군의 강력한 방어 때문에 우려를 표했다[327][328]. 8월 23일, 조셉 로턴 콜린스 육군 참모총장과 포리스트 셔먼 해군 작전부장은 맥아더에게 상륙 지점을 군산으로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군산으로는 적의 배후를 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나의 해군에 대한 신뢰는 해군 자신을 넘어설지도 모른다"라며 해군의 지지를 호소했다[329]. 결국 맥아더는 "인천에 상륙하여 놈들을 분쇄해 보이겠다"라고 강하게 밀어붙여 합참의 동의를 얻어냈다.

합참은 기밀 유지를 강조했지만, 미군의 대규모 상륙 작전 계획은 중국에 알려졌다. 마오쩌둥은 참모 레이잉푸에게 미군의 공격 지점을 찾도록 지시했고, 레이는 인천이 가장 유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오는 저우언라이를 통해 김일성에게 경고했고, 북한 주재 소련군 고문들도 인천 상륙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무시했다.

맥아더는 사세보에서 마운트 매킨리(USS Mount McKinley)에 승선하여 인천으로 향했다. 7개국 261척으로 구성된 대함대가 뒤따랐다. 9월 14일, 함대는 인천 앞바다에 도착했고, 인천항 주변은 함포 사격과 공습으로 초토화되었다. 9월 15일 새벽, 해병 제1사단이 월미도에 상륙하여 단 10명의 부상자만 내고 점령했다. 맥아더는 예상보다 피해가 적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오늘 아침처럼 빛나는 해군과 해병대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라는 전문을 보냈다.

인천 상륙 작전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첫날 해병대의 전사자는 20명에 불과했다. 유엔군은 김포 비행장과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진격했고, 9월 29일 맥아더는 서울 국회의사당에서 "서울이 대한민국 정부의 소재지로 회복되었다"라고 선언했다.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우리는 당신을 숭배합니다. 당신을 민족의 구세주로 존경합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중국의 개입 가능성을 간과했다. 10월 말 운산 전투에서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전황은 다시 바뀌었고, 유엔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맥아더는 1950년 7월 월턴 워커 중장(오른쪽) 및 제8군 소속 다른 병사들과 회담을 가졌다.


### 작전 개시 및 결과

인천 상륙 작전은 맥아더의 주도하에 감행되었으며, 워싱턴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수행되어 전쟁의 양상을 바꾸었다. 측근들은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인천 대신 군산으로 상륙 지점을 변경할 것을 건의했지만, 맥아더의 의지는 확고했다. 서해에 미군이 상륙한다는 정보는 북한군에게도 알려졌으나, 보급선이 늘어진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할 병력이 부족했고 김일성은 이 정보를 신뢰하지 않았다.[326]

작전 돌입 직전, 주요 간부들은 작전 실행 여부를 논의하는 회의를 열었다. 주한미해군 사령관은 반대했고, 미국 군부는 군산 상륙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자신의 고집대로 인천을 선택했다. 한편, 중국의 마오쩌둥은 인천 상륙 작전을 예측하고 김일성에게 경고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무시했다.

미군은 월미도를 점령하여 인천항을 확보했고, 첫날 전투에서 미군 사망자는 20명에 불과했다. 서울 진입은 북한군의 저항으로 쉽지 않았지만, 결국 작전은 성공했다. 맥아더의 전략을 간파하지 못한 북한군은 인천을 빼앗긴 후 1.4 후퇴까지 계속 패배했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의 실패 원인으로 '인천상륙 대비 실패', '서울 조기 포위 실패', '춘천 조기 점령 실패'를 꼽았다.[329] 이를 기념하여 인천 자유공원에 맥아더 동상이 세워졌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결의안 82, 83, 84, 85를 통과시켜 유엔군 사령부(UNC) 창설을 승인하고 남한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329] 미국 정부는 사령관 지명 권한을 위임받아 맥아더를 추천했고, 그는 극동군 사령관과 일본의 SCAP 직위를 유지하며 유엔군 사령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모든 한국군은 그의 지휘를 받게 되었고,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부산 교두보까지 후퇴했다. 8월 말, 북한군의 공세가 약화되면서 전세는 안정화되었다.

[[File:IncheonLandingMcArthur.jpg|thumb|left|맥아더는 1950년 9월 15일 마운트 맥킨리에서 코트니 휘트니 준장(왼쪽) 및 에드워드 M. 아몬드 소장(오

5. 1. 한반도에서의 영향 및 활동

맥아더는 한반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그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조선총독부를 접수하고 미군정을 실시했다. 맥아더는 더글러스 맥아더 포고령을 발표하여 미군정을 공식화하고, 존 하지 중장을 통해 한반도 남쪽 지역을 통치하게 했다. 하지는 군정청 최고 지도자로서 맥아더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했다.

맥아더는 또한 이승만과의 관계를 통해 한국 정치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는 이승만을 미국의 지원을 받는 지도자로 키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는 대한민국 건국과 초기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5. 1. 1. 미 군정기

1948년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초가을,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정한경, 김양천 비서, 김동성 공보처장, 이정순 공보국장 4명의 수행원과 함께 일본을 처음 방문했다. 이 방문은 맥아더의 초청으로 이루어졌으며, 1박 2일의 비공식적 사교 방문이었다. 대한민국이 주권을 회복한 후, 초대 대통령이 일본 땅을 처음 밟는 의미 있는 방문이었다. 주일 미국대사관저에서 맥아더와 1차 회담을 가진 이승만은 그날 밤 맥아더의 저택으로 초대되어 함께 축배를 들었다. 이 방문은 맥아더의 방한에 대한 답방 형식을 취했지만,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한국 방위에 대한 확실한 지원을 얻어내려는 목적이 컸다.[316]

이후 맥아더는 이승만의 귀국 편의를 봐주었고, 10월 12일 도쿄에 도착한 이승만에게 자신의 전용기를 내주어 귀국시켰다. 이승만은 수시로 그에게 사람을 보냈으나, 국내 미군정을 지휘하던 존 하지와는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 하지는 이승만의 독단적인 행동과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맥아더에게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보고를 자주 올렸다.

한국 정부의 대한군원(對韓軍援)과 미군의 계속 주둔 요구에 대해 미국 국무성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승만은 그의 오랜 친구인 맥아더를 다시 찾아갈 결심으로 1949년 2월 초, 주 필리핀 특사로 부임을 위해 도쿄에서 잠시 체류 중이던 변영태를 맥아더 사령부에 보냈다. 하지만 맥아더는 "내 임무는 명확히 규정되어 카르빈 한 자루도 넘겨줄 수 없다"라며 딘 애치슨 국무장관만을 비난했다.[314][315][316]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를 시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맥아더에게 보내기도 했다. "존경하는 장군...부디 우리 국민을 도와주십시오... 지금 우리 내외는 장군의 협력만을 기대하고 있습니다."[317] 프란체스카의 편지를 받은 맥아더는 대일 청구권 관계로 대일 강경책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던 이승만에게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해주기 위해 다시 이승만을 초청했다. 존 무초 주한 미국 대사로부터 맥아더 장군의 초청을 통보받은 이승만은 1950년 1월 21일 임병직 외무부장관, 장기영 체신부장관, 고재봉, 김광섭 두 비서, 무관으로 정일권 대위를 대동하고 두 번째로 맥아더의 애기(愛機) 바탄호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맥아더는 이때도 이승만의 한국 방위에 대한 주장을 고무해 주었으나 무기 지원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회피했다.[316]

5. 1. 2. 한국 전쟁



6·25 발발에 관한 맥아더의 최초 보고는 워싱턴 시간으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5시, 침공이 개시된 지 14시간 뒤에 육군성 본부에 도착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의 요청에 따라 개전 당일부터 합참의 지시도 받지 않고 한국군 지원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318]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319] 6월 27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군 및 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320] 맥아더는 6월 29일 하네다에서 비행기를 타고 수원으로 와서 한강방어선을 시찰하고 워싱턴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했다.[321][322][323] 맥아더는 주일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에게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라는 명령을 하달(6월 30일)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맥아더는 유엔군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맥아더는 한국군의 군세를 파악하고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허세가 높은 반면 실속이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간파하여 채병덕의 면전에서는 그를 극찬한 반면 이승만 대통령과 단 둘이 있을 때 채병덕의 해임을 건의했다.[324] 이승만은 맥아더의 건의를 받아들여 채병덕을 육군참모총장에서 해임시키고 그 후임으로 정일권을 임명했다. 채병덕에게는 1개 연대의 병력만 부여하여 부산 방어의 임무를 맡겼으나, 그는 지휘 경험 부족으로 전사했다.

1950년 11월, 맥아더는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외의 공산국가의 군인이 한국 전쟁에 참여하는 것 같다고 발표했다. 이에 UN의 공산권 국가들은 맥아더가 허위 사실을 주장했다며 UN에 제소했다.[325]

맥아더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참전은 없을 것"이라고 믿고, 보급선이 길어지는 것을 개의치 않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경인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김일성은 소련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1950년 9월 30일 중국 대사관에서 열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주년 리셉션에 참석하여 중국 부대의 파견을 요청하고, 마오쩌둥에게 부대 파견 요청 편지를 보냈다.

마오쩌둥은 즉시 10월 2일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소집하여 정치위원들을 설득했다. 정치위원들 역시 미국군이 압록강에 도달하면 강을 건너 중국을 침공해 올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여 부대 파견을 결정하고 10월 8일 김일성에게 통지했다. 다만 미국과의 전면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군인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조직하지만 형식상 의용병으로 한 "중국 인민지원군"('''항미원조의용군''')을 파견했다.

10월 10일, 약 18만 명의 중국 야전 제4군이 압록강을 넘어 북한에 진입했고, 그 수는 나중에 30만 명까지 불어났다. 맥아더는 이러한 징후를 감지했지만 적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더욱 공격적으로 되었다. 처음에는 트루먼의 지시대로 국경 부근에서의 부대 사용을 한국군만으로 하기 위해, 중조 국경에서 64km에서 97km 떨어진 곳을 한국군 이외의 유엔군의 최심 도달점으로 정했지만, 10월 17일에는 트루먼의 지시를 어기고 그 최심 도달점을 중간 지점으로 변경하고, 더 나아가 국경 깊숙이 전진하도록 각 부대 사령관에게 명령했다.

11월 1일, 중국 인민지원군이 한국군 제2군단을 습격했고, 한국군 3개 사단은 장비를 버리고 전면적으로 패주했다. 맥아더는 중국군의 대공세 개시 보고를 받았지만, 중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했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없어 혼란스러워했다. 전황의 심각성을 겨우 인식한 맥아더는 국방부에 "지금까지 당 사령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지만, 이제 사태는 그 권한과 힘을 초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고 있다"'''라고 다소 히스테리적인 전문을 보냈다.[176]

5. 2. 인천 상륙 작전



당시 국군은 부산까지 후퇴해 있었고 백선엽 등이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부산 지역에 겨우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때 맥아더는 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의 중심부를 타격하여 보급로를 끊는 계획을 세웠다.

맥아더는 1950년 6월 29일 전쟁발발 4일 뒤 미국 정부에,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며 인민군의 후방에 상륙,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을 통해 반격에 들어간다는 기본 전략을 세웠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미 해군은 인천항의 간만의 차가 평균 7미터로, 항에 상륙하기 전에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하는데다 선단의 접안지역이 좁아 상륙 후 시가전이 불가피한 점 등의 이유로 상륙작전의 최악의 지형이라며 완강히 반대하였다. 해군 일부 인사들이 작전성공률이 5천대 1이라며 격심하게 반대하는 와중에, 맥아더는 이런 난점이 오히려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끝까지 인천상륙을 주장, 결국 8월 28일 미합참본부로부터 승인을 얻어냈다.

9월 15일, 작전개시일에 함정 206척, 7만여 명을 동원하여 영종도 근처에 집결, 작전이 시작되었다.

작전의 제 1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5시에 시작된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의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포로로 잡혔다.

제2단계는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군 제1해병사단의 주도로 인천반도 공격으로 이어졌다.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의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성공적으로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적 여유를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인민군이 38선에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하는데 81일이 걸렸지만, 인천상륙 이후 아군이 38선까지 돌아오는데 15일이 걸렸으니 적의 배후를 불의에 공격한 인천상륙작전의 크나큰 성과다.

맥아더 장군의 인솔하에 감행된 인천 상륙 작전워싱턴 등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성공적으로 지휘, 전쟁의 양상을 뒤바꿔 놓았다. 최측근들은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위험하다며 군산으로 상륙 지점을 변경할 것을 제안했지만 맥아더의 신념은 확고했다. 서해 어느 항구에 미군이 상륙한다는 정보는 북한군에게도 알려졌지만, 북한군은 이미 보급선이 너무 길게 늘어져서 낙동강방어선에서 돌릴 군사력이 부족했고 김일성은 이 정보 자체를 크게 믿지 않았다.[326]

그러나 막상 작전 돌입 단계에 이르러서 주요 간부끼리 'Go/No go(작전 실행/중지) 회의'를 했다. 당시 주한미해군 사령관이 반대했다. 미국 군부는 군산 상륙 작전이 효율적이라고 여겼다. 맥아더는 "이건 내 고집대로 해야겠으니 따라와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게 맥아더는 인천을 선택했다. 그러나 인천 상륙 작전에 대해 중국의 마오쩌둥은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차례 김일성에게 경고했지만, 김일성은 듣지 않았다.

결국 미군은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월미도를 차지하여 인천항을 점령할 수 있었고, 이후 이어진 첫날 전투에서도 미군의 사망자는 20명에 불과했다.

막상 서울로의 진입은 여의치 않았다. 북한군은 미군을 막을 만한 정규사단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더라도 막을 병력이 없었지만 공산주의 운동가, 인민경찰, 해안포병 등이 중심이 되어 방어 작전을 펼쳤기 때문이다.[327][328]

그러나 결국 작전은 성공하였고 맥아더의 작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북한군은 이 작전에 의해 인천을 빼앗긴 이후 1.4 후퇴가 도래할 때까지 연전연패했다. 실제로 김일성은 한국전쟁의 실패 원인으로 '인천상륙 대비실패', '서울 조기포위 실패', '춘천 조기점령 실패' 3개를 꼽은 바 있다.[329] 이를 기념하여 후일 대한민국 정부는 인천 자유공원에 맥아더의 동상을 건립하기도 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여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연이어 결의안 82, 결의안 83, 결의안 84 및 결의안 85를 통과시켜 남한을 지원하기 위한 유엔군 사령부(UNC)의 창설을 승인했다. 유엔은 미국 정부에 사령관을 지명할 권한을 부여했고, 합동 참모 본부는 만장일치로 맥아더를 추천했다. 따라서 그는 일본의 SCAP이자 극동군 사령관으로 남아 있으면서 유엔군 사령관이 되었다. 모든 남한군은 그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북한군의 맹공 앞에서 후퇴하면서 맥아더는 미 지상군 투입을 허가받았다. 처음 도착한 부대는 시간 벌이를 위해 병력과 땅을 교환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부산 교두보까지 후퇴했다. 8월 말까지 위기는 진정되었다. 북한군의 교두보 공격은 잦아들었다. 북한군은 8만 8천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월턴 워커 중장의 제8군은 이제 18만 명으로 늘어났고, 더 많은 전차와 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1949년, 합동 참모 본부 의장 오마 브래들리 대장은 "대규모의 연합 상륙 작전...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1950년 7월까지 맥아더는 바로 그러한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자신의 계획을 아브라함 평원 전투에서 제임스 울프 장군의 계획과 비교하며 조수, 수문학 및 지형과 관련된 문제들을 무시했다. 9월, 상부의 우려가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맥아더의 군인들과 해병대는 북한군 후방 깊숙한 곳에서 성공적인 인천 상륙을 감행했다. 해군 및 근접 항공 지원과 함께 시작된 이 상륙 작전은 북한군의 측면을 무너뜨리고 서울을 탈환하여 북한군을 혼란 속에 북쪽으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9월 17일, 맥아더는 전장을 방문하여 해병대에 의해 격파된 6대의 T-34 전차를 살펴보고, 주변의 저격수들의 사격은 무시했으며, 북한 저격수들의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만 언급했다.

9월 11일, 트루먼은 맥아더와 유엔군에게 38도선 너머 북한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인 NSC 81/1을 하달했다. 트루먼, 딘 애치슨 국무장관, 조지 마셜 국방장관, 유엔 주재 미국 대사 워렌 R. 오스틴, 영국 및 프랑스 정부는 모두 북한 전역을 침공하고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부산 교두보 방어와 곧 있을 인천 상륙 작전에 바빴던 맥아더는 이 결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39][40] 미국 정부의 승인만으로 (NSC 81/1은 순전히 미국 명령이었다) 미군이 38도선을 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왜냐하면 원래 유엔 결의안은 38도선 이남의 남한 복원만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하는 것을 매우 꺼렸고, 추가 지시를 기다렸다. 마셜은 9월 30일 맥아더에게 "38도선 이북으로 전술적, 전략적으로 자유롭게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모호함은 마침내 10월 4일 유엔 총회가 결의안 376(V)를 통해 맥아더에게 38도선을 넘어 대한민국의 모든 한국을 통일하라는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해결되었다. 10월 7일, 합동 참모 본부는 유엔군의 공식적인 임무가 민주적인 한국의 통일이라고 맥아더에게 다시 한 번 명확히 했다.[41][42] 맥아더는 이제 동해안의 원산에 또 다른 상륙 공격을 계획했지만, 제1 해병 사단이 해로 도착하기 전에 남한군이 점령했다. 10월, 맥아더는 웨이크 섬 회담에서 트루먼과 만났고, 트루먼은 루즈벨트가 하와이에서 맥아더와 가졌던 전시 회담을 모방했다.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다섯 번째 수훈 훈장을 수여했다. 중국의 위협에 대해 잠시 질문을 받은 맥아더는 이를 일축하며 크리스마스까지 제8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고 1월에는 유럽에서 복무할 사단을 투입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더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10월 20일 맥아더는 제187 공수 연대 전투단의 공수 작전을 감독하고 관찰하기 위해 평양 북쪽의 숙천 - 순천 지역으로 날아갔다. 이것은 한국 전쟁 중 유엔군이 수행한 두 번의 공수 작전 중 첫 번째였다. 맥아더의 비무장 항공기는 신의주에 기지를 둔 것으로 알려진 적 항공기의 공격을 받았다. 맥아더는 직접 작전을 감독한 공로로 수훈 비행 십자장을 받았다.[43]

한 달 후, 상황은 바뀌었다. 10월 말 운산 전투에서 유엔군이 적과 교전하여 한국에 중국군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미국 및 다른 유엔군에 상당한 손실을 입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러비는 전쟁에 대한 중국의 개입에 대한 증거를 축소했다. 그는 최대 7만 1천 명의 중국 군인이 이 나라에 있다고 추정했지만, 실제 숫자는 30만 명에 가까웠다. 그는 이러한 오산에 혼자가 아니었다. 11월 24일, 중앙 정보국은 트루먼에게 한국에 최대 20만 명의 중국군이 있을 수 있지만 "중국 공산군이 주요 공격 작전을 계획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고 보고했다.

그날 맥아더는 워커의 사령부로 날아가 나중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맥아더는 자신의 더글러스 C-54 스카이마스터를 타고 직접 전선을 비행했지만, 중국군의 증강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고, 따라서 진격이나 철수를 명령하기 전에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중국 활동의 증거는 맥아더에게 숨겨져 있었다: 중국군은 밤에 이동하고 낮에 참호로 들어갔다. 그의 정찰 노력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명예 전투 조종사 휘장을 받았다.

8월에 들어 북한군의 전격적인 침공에 맞서, 한국군과 주한 미국군, 영국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밀려 부산 교두보로 밀려났다(부산 교두보 전투). 그러나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하며 방어선이 대폭 축소된 덕분에 통신선과 보급선이 안정되고 병력 집중이 가능해져 북한군의 진격은 멈추었다.. 미국 본토에서 제2보병사단이나 제1해병 임시 여단과 같은 정예 부대가 부산 교두보로 보내져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다.. 미국군은 날마다 전력을 증강해 나가는 데 반해 북한군은 격전으로 큰 피해를 입어 전력 차가 없어지고 있었다. 특히 북한군은 미국군의 우세한 공군력과 화포에 대한 대처가 미흡하여 도로에서의 이동에 집착하여 공습의 좋은 먹잇감이 되어 도로 전체에 엄청난 검댕 시체와 차량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맥아더는 1942년 일본군의 맹공으로 코레히도르 섬에 갇혔을 때 바탄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는 일본군의 배후에 미군 부대를 역상륙시켜 배후를 치면 승리할 수 있다고 꿈꾸며 참모총장 마셜에게 그 작전을 제안했지만, 그 때는 실현 불가능했다. 맥아더는 바탄에서는 꿈에 불과했던 신의 솜씨가 이제는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 준비를 시작했다. 7월 10일 라뮤엘 C. 셰퍼드 주니어 해병대 사령관이 도쿄를 방문했을 때 맥아더는 한반도 지도로 인천을 파이프로 두드리며 "나는 제1해병사단을 내 지휘하에 두고 싶다", "이곳(인천)에 그들(제1해병사단)을 상륙시키겠다"라고 셰퍼드에게 말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해병대였지만, 종전 후 군사비 삭감의 영향으로 존속조차 위태로워 출격 기회를 간절히 원했기에 셰퍼드는 맥아더의 제안에 달려들어 9월 1일까지 해병대 1개 사단을 준비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 합참의장오마 브래들리는 대규모 수륙 양용 작전에 소극적이었고 맥아더의 거듭된 작전 요청에 쉽게 허가를 내주지 않았지만, 맥아더는 "북한군에게 2면 작전을 강요할 수 있다", "적의 보급 및 통신망을 절단할 수 있다", "큰 항구를 빼앗아 서울을 탈환할 수 있다" 등 적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열성적으로 설득했고, 합참은 굴복하여 일단 동의했다. 그러나 맥아더로부터 상륙 예정 지점을 통보받자 합참 관계자들은 아연실색하며 말을 잃었다.. 인천은 서울과 가깝고 북한군의 대병력이 배치되어 있을 우려가 있는데다 자연 환경적으로 조류가 빠르고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상륙 작전에 적합하지 않고, 상륙 중에 적의 대병력에게 공격받으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8월 23일 워싱턴에서 육군 참모총장조셉 로턴 콜린스와 해군 작전부장포리스트 셔먼, 하와이에서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아서 W. 래드퍼드와 해병대 셰퍼드가 방일하여 인천 상륙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콜린스와 셔먼은 상륙 지점을 인천보다 남쪽인 군산으로 할 것을 제안했지만, 맥아더는 군산에서는 적군의 배후를 칠 수 없고 포위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태평양 전쟁 중 해군과 끊임없이 의견 대립을 해 왔던 것을 잊은 듯 "나의 해군에 대한 신뢰는 해군 자신을 넘어설지도 모른다", "해군은 과거에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고, 이번에도 없을 것이다"라며 해군을 칭찬하며 인천 상륙에 대한 찬성을 구했다.. 그 후 맥아더는 "이것이 배율 5,000배의 도박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도박을 자주 해 왔습니다", "저는 인천에 상륙하여 놈들을 분쇄해 보이겠습니다"라고 발언하자, 참석자들은 반론 없이 두려움에 의한 침묵이 회의실을 덮었다.. 회의는 맥아더 주도로 진행되었고, 한 장교는 "맥아더의 최면술에 걸렸다"라고 나중에 깨달았다..

이 회의 4일 후 합참으로부터 "조선 서안에 대한 육해군의 전개 행동 준비와 실시에 동의한다. 상륙 지점은 적의 방어가 약한 경우 인천, 또는 인천 남쪽의 상륙에 적합한 해변으로 한다"라는, 회의에서 유일하게 신중했던 육군의 콜린스에 의한 신중론이 담긴 명령 전문이 도착했다. 그러나 합참은 자신들의 신변 안전을 생각해 상륙 예정일 8일 전인 9월 7일에야 맥아더의 "배율 5,000배"라는 예상을 문제 삼았는지 "예정된 작전의 실현 가능성과 성공 확률에 대한 귀하의 예상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전문을 맥아더에게 보냈다. 맥아더는 즉시 "작전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저는 전혀 의문을 갖지 않습니다"라고 답변했고, 브래들리는 그 답변을 트루먼에게 보고하며 "귀하의 계획을 승인합니다. 대통령에게도 그렇게 전했습니다"라는 간결한 전문을 맥아더에게 보냈다. 맥아더는 이 트루먼과 브래들리의 행동을 보고 "이 작전이 실패했을 경우의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다"라고 생각하며 뼛속까지 소름이 돋았다고 후년에 말했다..

합참은 작전이 시작될 때까지 기밀 유지를 엄중히 했지만, GHQ의 기밀 유지는 허술했고, 당시 일본의 항만 경비는 빈약해 스파이 천국이 되어 있어 미군이 대규모 수륙 양용 작전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국에 훤히 알려져 있었다. 이에 마오쩌둥은 참모 레이잉푸에게 미군의 의도와 다음 공격 지점을 찾게 했다. 레이는 모든 정보를 검토한 결과 상륙 예상 지점을 6곳으로 좁혔지만 그 중 인천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마오에게 보고했다. 마오는 저우언라이를 통해 김일성에게 경고했다. 또한 북한에 있던 소련군의 군사 고문 몇 명도 김에게 인천에 미군이 상륙할 가능성을 지적했지만 김은 이러한 조언을 무시했다..

맥아더는 사세보로 향해 사령선이 될 AGC(상륙 지휘함)인 마운트 매킨리에 승선하여 인천을 향해 출항했다. 그 뒤에는 7개국 261척의 대함대가 뒤따랐다.. 함대는 도중에 태풍을 만났지만 9월 14일 마운트 매킨리는 인천 앞바다에 도착했다. 맥아더가 도착하기 전까지 인천항 주변은 먼저 도착한 순양함과 구축함의 함포 사격과 항공 모함 함재기의 공습으로 철저하게 두들겨 맞았다. 가장 철저하게 두들겨 맞은 곳은 인천항 입구에 위치한 월미도였지만,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인천 주변에 경비대 정도의 소병력밖에 배치하지 않았고, 월미도에도 350명의 수비대밖에 배치하지 않았다.. 9월 15일 새벽 5시 40분 해병 제1사단 부대가 중요 거점 월미도에 상륙했지만 단 10명의 부상자만 내고 점령되었다. 예상과 달리 피해가 경미하다는 것을 알게 된 맥아더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참모들에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며 해군과 해병대를 향해 "오늘 아침처럼 빛나는 해군과 해병대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라고 전문을 보냈고, 자신은 막료들과 커피를 마셨다..

월미도 공략 후에도 브래들리나 콜린스의 우려와 달리 인천 상륙 작전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작전은 맥아더의 계획보다 훨씬 순조롭게 진행되어 첫날 해병대의 전사자는 20명에 불과했다..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어 맥아더의 명성과 인기를 크게 높였다. 멋지게 상륙에 성공한 유엔군은 김포 비행장과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전진했다. 북한군은 인천을 쉽게 포기하는 대신 서울을 방어할 각오로 수도를 요새화했다. 맥아더는 인천에 상륙하여 유엔군이 5일 만에 서울을 탈환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북한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2주가 걸렸다. 유엔군이 서울 전역을 점령하자 북한군은 13만 명의 포로를 남기고 패주했다. 맥아더는 9월 29일 의기양양하게 김포 비행장에 내려 정오에 서울의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식전에 참석하여 "서울이 대한민국 정부의 소재지로 회복되었다"라고 극적인 선언을 했다. 맥아더로부터 "행정 책임의 수행"을 요구받은 이승만은 눈물을 흘리며 대한민국 전국민을 대표하여 "우리는 당신을 숭배합니다. 당신을 민족의 구세주로 존경합니다"라고 말했다. 맥아더는 이날도 서울에서 숙박하지 않고 오후에는 도쿄로 돌아갔지만 긴 군 경력에서의 최대 승리로 지금까지 최고의 영광을 얻었다고 느꼈다..

5. 2. 1. 인천 상륙 작전 배경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더글러스 맥아더는 유엔군 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한국 전선에 투입되었다. 북한군의 맹공에 밀려 유엔군은 부산 교두보 전투까지 후퇴하며 위기를 맞았다.

맥아더는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인천 상륙 작전을 계획했다. 그는 1942년 일본군의 공격으로 코레히도르 섬에 갇혔을 때 일본군의 배후에 미군을 상륙시켜 승리하는 구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7월 10일, 맥아더는 라뮤엘 C. 셰퍼드 주니어 해병대 사령관에게 인천을 지목하며 제1해병사단을 그곳에 상륙시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326]

그러나 인천 상륙 작전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미국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는 대규모 상륙 작전에 소극적이었고, 합참 관계자들은 인천의 험난한 자연 환경(빠른 조류, 큰 조수 간만의 차)과 북한군의 강력한 방어 때문에 우려를 표했다[327][328]. 8월 23일, 조셉 로턴 콜린스 육군 참모총장과 포리스트 셔먼 해군 작전부장은 맥아더에게 상륙 지점을 군산으로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군산으로는 적의 배후를 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나의 해군에 대한 신뢰는 해군 자신을 넘어설지도 모른다"라며 해군의 지지를 호소했다[329]. 결국 맥아더는 "인천에 상륙하여 놈들을 분쇄해 보이겠다"라고 강하게 밀어붙여 합참의 동의를 얻어냈다.

합참은 기밀 유지를 강조했지만, 미군의 대규모 상륙 작전 계획은 중국에 알려졌다. 마오쩌둥은 참모 레이잉푸에게 미군의 공격 지점을 찾도록 지시했고, 레이는 인천이 가장 유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오는 저우언라이를 통해 김일성에게 경고했고, 북한 주재 소련군 고문들도 인천 상륙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무시했다.

맥아더는 사세보에서 마운트 매킨리(USS Mount McKinley)에 승선하여 인천으로 향했다. 7개국 261척으로 구성된 대함대가 뒤따랐다. 9월 14일, 함대는 인천 앞바다에 도착했고, 인천항 주변은 함포 사격과 공습으로 초토화되었다. 9월 15일 새벽, 해병 제1사단이 월미도에 상륙하여 단 10명의 부상자만 내고 점령했다. 맥아더는 예상보다 피해가 적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오늘 아침처럼 빛나는 해군과 해병대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라는 전문을 보냈다.

인천 상륙 작전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첫날 해병대의 전사자는 20명에 불과했다. 유엔군은 김포 비행장과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진격했고, 9월 29일 맥아더는 서울 국회의사당에서 "서울이 대한민국 정부의 소재지로 회복되었다"라고 선언했다.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우리는 당신을 숭배합니다. 당신을 민족의 구세주로 존경합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중국의 개입 가능성을 간과했다. 10월 말 운산 전투에서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전황은 다시 바뀌었고, 유엔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5. 2. 2. 작전 개시 및 결과



인천 상륙 작전은 맥아더의 주도하에 감행되었으며, 워싱턴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수행되어 전쟁의 양상을 바꾸었다. 측근들은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인천 대신 군산으로 상륙 지점을 변경할 것을 건의했지만, 맥아더의 의지는 확고했다. 서해에 미군이 상륙한다는 정보는 북한군에게도 알려졌으나, 보급선이 늘어진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할 병력이 부족했고 김일성은 이 정보를 신뢰하지 않았다.[326]

작전 돌입 직전, 주요 간부들은 작전 실행 여부를 논의하는 회의를 열었다. 주한미해군 사령관은 반대했고, 미국 군부는 군산 상륙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자신의 고집대로 인천을 선택했다. 한편, 중국의 마오쩌둥은 인천 상륙 작전을 예측하고 김일성에게 경고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무시했다.

미군은 월미도를 점령하여 인천항을 확보했고, 첫날 전투에서 미군 사망자는 20명에 불과했다. 서울 진입은 북한군의 저항으로 쉽지 않았지만, 결국 작전은 성공했다. 맥아더의 전략을 간파하지 못한 북한군은 인천을 빼앗긴 후 1.4 후퇴까지 계속 패배했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의 실패 원인으로 '인천상륙 대비 실패', '서울 조기 포위 실패', '춘천 조기 점령 실패'를 꼽았다.[329] 이를 기념하여 인천 자유공원에 맥아더 동상이 세워졌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결의안 82, 83, 84, 85를 통과시켜 유엔군 사령부(UNC) 창설을 승인하고 남한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329] 미국 정부는 사령관 지명 권한을 위임받아 맥아더를 추천했고, 그는 극동군 사령관과 일본의 SCAP 직위를 유지하며 유엔군 사령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모든 한국군은 그의 지휘를 받게 되었고,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부산 교두보까지 후퇴했다. 8월 말, 북한군의 공세가 약화되면서 전세는 안정화되었다.

1949년, 오마 브래들리는 대규모 상륙 작전은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1950년 7월 맥아더는 이러한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자신의 계획을 에이브러햄 평원 전투의 제임스 울프 장군에 비유하며 조수, 수문학, 지형 관련 문제들을 간과했다.[329] 9월, 맥아더는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북한군의 측면을 공격하고 서울을 탈환, 북한군을 후퇴시켰다.[329] 9월 17일, 맥아더는 격파된 T-34 전차를 시찰하며 주변 저격수들의 사격을 무시하고 북한군의 훈련 부족을 지적했다.[329]

9월 11일,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라는 NSC 81/1을 하달했다. 트루먼, 딘 애치슨, 조지 마셜, 워렌 오스틴, 영국 및 프랑스 정부는 북한 전역을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맥아더는 부산 교두보 방어와 인천 상륙 작전에 집중하느라 이 결정에 관여하지 못했다. 38선 이북 진격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맥아더는 추가 지시를 기다렸다. 9월 30일, 마셜은 맥아더에게 38선 이북으로 자유롭게 진격하라고 지시했고, 10월 4일 유엔 총회는 결의안 376(V)를 통해 맥아더에게 38선을 넘어 한국을 통일할 권한을 부여했다.[329] 10월 7일, 합동 참모 본부는 맥아더에게 유엔군의 공식 임무가 민주적인 한국의 통일임을 명확히 했다.[329] 맥아더는 원산에 상륙 공격을 계획했지만, 한국군이 먼저 점령했다.[329] 10월, 맥아더는 웨이크 섬 회담에서 트루먼과 만나 중국의 위협을 일축하고 크리스마스까지 제8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는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더 큰 위협으로 간주했다.[329]

10월 20일, 맥아더는 숙천 - 순천 지역에서 제187 공수 연대의 공수 작전을 감독했다. 맥아더의 비무장 항공기는 신의주 기지에서 공격을 받았다. 맥아더는 작전을 직접 감독한 공로로 수훈 비행 십자장을 받았다.[329]

그러나 10월 말 운산 전투에서 유엔군이 중국군과 교전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윌러비는 중국군의 개입 증거를 축소했지만, 실제로는 30만 명에 가까운 중국군이 한국에 있었다.[329] 11월 24일, CIA는 트루먼에게 한국에 최대 20만 명의 중국군이 있을 수 있지만, 대규모 공격 작전 징후는 없다고 보고했다.[329]

맥아더는 11월 24일 워커의 사령부로 날아가 전선을 시찰하고 중국군의 증강 징후를 발견하지 못해 진격 또는 철수를 결정하지 못했다. 중국군은 밤에 이동하고 낮에 참호에 숨어 있었다.[329] 맥아더는 이러한 공로로 전투 조종사 휘장을 받았다.[329]

8월, 북한군의 기습 침공으로 한국군과 주한 미군, 영국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부산 교두보까지 밀려났지만, 통신선과 보급선이 안정되고 병력 집중이 가능해져 북한군의 진격은 멈추었다. 미국 제2보병사단과 같은 정예 부대가 부산 교두보로 보내져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다. 미국군은 전력을 증강해 나갔지만, 북한군은 피해가 누적되어 전력 차이가 줄어들었다. 특히 북한군은 미국 공군의 공습에 취약하여 도로 이동에 집중, 공습의 표적이 되었다.

맥아더는 1942년 일본군의 공격으로 코레히도르 섬에 갇혔을 때, 일본군 배후에 미군을 상륙시켜 승리하는 구상을 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맥아더는 인천에 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배후를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7월 10일, 맥아더는 라뮤엘 C. 셰퍼드 주니어 해병대 사령관에게 제1해병사단을 인천에 상륙시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미국 해병대는 군사비 삭감으로 존속이 위태로웠기에, 셰퍼드는 맥아더의 제안에 따라 9월 1일까지 해병대 1개 사단을 준비하기로 약속했다.

오마 브래들리는 대규모 수륙 양용 작전에 소극적이었지만, 맥아더는 북한군에게 2면 작전을 강요하고, 보급 및 통신망을 절단하며 서울을 탈환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합참은 맥아더의 주장을 받아들였지만, 상륙 예정 지점을 통보받고 우려했다. 인천은 서울과 가깝고 북한군의 대병력이 배치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조류가 빠르고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상륙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였다.[329] 8월 23일, 조셉 로턴 콜린스와 포리스트 셔먼, 아서 W. 래드퍼드와 셰퍼드가 방일하여 인천 상륙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콜린스와 셔먼은 군산으로 상륙 지점을 변경할 것을 제안했지만, 맥아더는 군산에서는 적군의 배후를 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해군을 칭찬하며 인천 상륙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맥아더는 "이것이 배율 5,000배의 도박"이라며 인천 상륙을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회의 4일 후, 합참은 맥아더에게 "조선 서안에 대한 육해군의 전개 행동 준비와 실시에 동의한다. 상륙 지점은 적의 방어가 약한 경우 인천, 또는 인천 남쪽의 상륙에 적합한 해변으로 한다"라는 명령 전문을 보냈다. 합참은 상륙 예정일 8일 전에 맥아더의 "배율 5,000배"라는 예상을 문제 삼았는지 작전의 성공 확률에 대한 예상을 물었고, 맥아더는 작전의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고 답했다. 브래들리는 트루먼에게 보고하며 맥아더의 계획을 승인했다. 맥아더는 이 상황을 작전 실패 시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로 해석했다.

합참은 작전 시작까지 기밀 유지를 강조했지만, GHQ의 기밀 유지는 허술하여 미군의 상륙 작전 계획이 중국에 알려졌다. 마오쩌둥은 레이잉푸에게 미군의 의도와 공격 지점을 찾게 했고, 레이는 인천이 가장 유력하다고 보고했다. 마오는 저우언라이를 통해 김일성에게 경고했고, 북한 주둔 소련군 고문들도 인천 상륙 가능성을 지적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무시했다.[329]

맥아더는 사세보에서 AGC(상륙 지휘함)인 에 승선하여 인천으로 향했다. 7개국 261척의 함대가 뒤따랐고, 태풍을 뚫고 9월 14일 인천 앞바다에 도착했다.[329] 인천항 주변은 함포 사격과 공습으로 초토화되었고, 특히 월미도가 집중 공격을 받았다.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인천 주변에 소규모 병력만 배치했고, 월미도에는 350명의 수비대만 있었다.[329] 9월 15일 새벽, 해병 제1사단이 월미도에 상륙하여 10명의 부상자만 내고 점령했다. 맥아더는 예상보다 피해가 적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해군과 해병대를 칭찬하고 커피를 마셨다.[329]

월미도 점령 후, 인천 상륙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첫날 해병대 전사자는 20명에 불과했고, 전세는 역전되었다. 맥아더는 김포 비행장과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진격했고, 북한군은 서울을 요새화하여 저항했다. 맥아더는 5일 만에 서울을 탈환하겠다고 선언했지만, 2주가 걸렸다. 유엔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북한군은 13만 명의 포로를 남기고 패주했다. 맥아더는 9월 29일 김포 비행장에 내려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식전에 참석하여 서울이 대한민국 정부의 소재지로 회복되었음을 선언했다.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행정 책임의 수행"을 요구받고 눈물을 흘리며 맥아더를 민족의 구세주로 칭송했다. 맥아더는 이날 도쿄로 돌아갔지만, 군 경력에서의 최대 승리를 거두었다고 느꼈다.[329]

5. 2. 3. 트루먼과의 불화와 해임

더글러스 맥아더는 한국 전쟁 중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해리 S.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겪으며 불신을 샀고, 이는 그의 해임으로 이어졌다. 당시 그는 극단적인 반공주의인 매카시즘 추종자로 낙인찍히기도 했다.[333]

맥아더는 중화인민공화국 정규군(중국인민해방군)의 개입을 무시했고, 이후 중공군이 수십 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자 만주원자폭탄 투하와 장제스 총통 휘하의 중화민국 국군 지원을 주장했다. 맥아더는 공산주의의 뿌리를 뽑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트루먼은 전쟁을 제한적으로 관리하고 조속히 종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의견 차이가 결국 맥아더의 해임으로 이어진 것이다. 중공군 참전 후 맥아더는 보급과 충원의 근거지인 만주에 대한 항공 폭격을 요청했으나, 미국 정부는 소련의 참전 빌미를 우려하여 불허했다. 중공군 참전 이전에 중화민국을 연합군에 편입시키지 않은 것 또한 중국에 대한 자극을 피하려는 이유였다.

미국 정부는 소련의 힘과 의지를 과대평가했고, 2차 대전 종전 직후 대다수 부대를 해체하여 동원 가능한 병력이 극히 줄어들었기에 확전을 피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소련은 비공식적으로 공군 조종사를 중국에 보내 한-만 국경에서 미군 폭격기를 공격해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한국 전쟁은 미국 내에서 인기가 없었고, 기간이 길어지면서 종전 압력이 커져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다.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에서의 은퇴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말했다.[333]

맥아더의 해임 사유에 대해서는 명령 불복이 원인이라는 견해도 있다. 백선엽이 중공군 포로를 심문하여 중국인민해방군 참전 보고를 했지만, 맥아더가 이를 은폐했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이 겨울 대비 보급품을 한국으로 보냈으나, 맥아더가 전쟁이 빨리 끝날 것이라고 판단하여 보급품을 하와이로 돌려보내 미군이 필요한 지원을 받지 못해 동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는 주장도 있다.[328]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얄타 회담 이후 발발한 한국 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양극 체제를 굳히기 위한 전쟁이며, 미군은 이미 전선의 크기를 정해놓고 전쟁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맥아더의 만주 폭격을 막았다는 주장이다. 또한 중공군이 홍콩, 마카오를 통해 다수의 미국 무기를 수입하여 사용한 것은 미국이 자국 군수업자들을 위해 전쟁을 방관한 증거라는 주장도 있다. 스탈린은 중앙 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박헌영김일성에게 전쟁을 승낙했고, 미국은 영향력 확대와 군수업자들의 이익을 위해 한국 전쟁을 방관했다는 것이다. 장제스마오쩌둥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자 타이완 해협을 건너 중국 대륙을 침공하려 했으나 미군이 이를 막았다. 한국 전쟁으로 마오쩌둥중화인민공화국은 내몽골과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고 위구르와 티베트를 직접 지배하는 발판을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중국군의 공격으로 맥아더는 북한에서 철수해야 했다.[47] 1951년 1월 서울이 함락되자 트루먼과 맥아더는 한국을 완전히 포기하는 상황을 고려해야 했다. 유럽 국가들은 맥아더의 세계관을 공유하지 않았고, 그의 판단을 불신했으며, 그가 미국 대중과의 지위와 영향력을 이용하여 미국의 정책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다시 집중시킬 수 있다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이것이 중국과의 대규모 전쟁, 어쩌면 핵무기까지 포함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1950년 2월 소련과 중국이 상호 공격 시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방어 동맹을 체결했기 때문에, 미국이 중국을 공격하면 제3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가능성은 당시 매우 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 총리는 1950년 12월 미국을 방문하여 "맥아더 장군이 모든 것을 지휘하고 있다"는 영국과 다른 유럽 정부들의 우려를 제기했다.

매슈 리지웨이의 지휘하에 제8군은 1월에 다시 북쪽으로 진격했다. 그는 중국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1951년 3월 서울을 탈환하여 38선까지 밀고 올라갔다. 군사 상황이 개선되자 트루먼은 이제 협상된 평화를 제안할 기회를 보았지만, 3월 24일 맥아더는 중국에게 패배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중국과 자신의 상사들에게 도전했다. 트루먼이 제안한 발표는 보류되었다.

4월 5일, 조지프 윌리엄 마틴 주니어 하원 공화당 대표는 트루먼의 유럽 우선 정책과 제한적 전쟁 전략을 비판하는 맥아더의 편지를 하원 본회의에서 낭독했다. 편지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다.

>일부 사람들은 공산주의 음모자들이 세계 정복을 위해 이곳 아시아에서 승부를 걸기로 결정했고, 우리가 전장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이상하게 어려워 보인다. 이곳에서 우리는 무기를 가지고 유럽의 전쟁을 치르는 반면, 그곳의 외교관들은 여전히 말로 싸우고 있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면 유럽의 몰락은 불가피하고, 승리하면 유럽은 전쟁을 피하면서 자유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승리해야 한다. 승리 외에 다른 것은 없다.

1951년 3월, 미국의 비밀 외교 통신 감청을 통해 도쿄 주재 스페인 및 포르투갈 외교관들이 자국에 보낸 비밀 대화가 공개되었는데, 이들은 맥아더가 중국 공산당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데 성공할 것이라고 자신감을 표명했다고 주장했다. 이 대화 기록에는 맥아더가 그렇게 말했다는 내용은 없었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 외교관들이 맥아더가 그렇게 말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외교관들의 주장이 트루먼 대통령의 주목을 받게 되자, 그는 맥아더가 전쟁 수행에 대한 자신의 입장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높이려 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정책에 반하는 행동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외국 정부에 비밀리에 알렸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했다. 대통령은 감청의 존재를 공개할 수 없었고, 맥아더의 대중적 인기와 의회 내 정치적 지지 때문에 즉시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틴 의원이 4월 5일 맥아더의 서한을 공개한 후, 트루먼은 용납할 수 없는 정치적 피해를 입지 않고 맥아더의 지휘권을 해임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트루먼은 조지 마셜 국방장관, 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 딘 애치슨 국무장관, 애버렐 해리먼을 소환하여 맥아더를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했다. 그들은 맥아더를 해임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지만, 그렇게 하라는 권고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순전히 군사적인 관점에서" 그것이 옳다고 느꼈지만, 중요한 정치적 고려 사항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트루먼과 애치슨은 맥아더가 불복종했다고 동의했지만, 합참은 이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불복종은 군사 범죄였고, 맥아더는 빌리 미첼과 유사한 공개 군사 재판을 요청할 수 있었다. 그러한 재판의 결과는 불확실했고, 그를 무죄로 판결하고 복직을 명령했을 수도 있다. 합참은 "맥아더 장군이 합참의 직접적인 명령을 이행하지 못했거나 명령에 반하여 행동한 증거는 거의 없다"는 데 동의했다. 브래들리는 "사실상" 맥아더는 "합참 지시를 법적으로 위반하지 않고, 확장했을 뿐이다. 그는 합참을 통해 전달된 대통령의 12월 6일 지시[정책 문제에 대한 공개 발언 금지]를 위반했지만, 이것은 합참 명령 위반에 해당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트루먼은 리지웨이에게 맥아더의 해임을 명령했고, 그 명령은 4월 10일 브래들리의 서명과 함께 발송되었다.

트루먼은 1960년대 초에 "나는 그가 대통령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해고했다. 나는 그가 멍청한 개자식이어서 해고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랬지만, 그것은 장군에게 불법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의 절반에서 4분의 3이 감옥에 갔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유명한 장군을 인기가 없는 정치인이 해임한 것은 대중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대다수의 대중이 맥아더의 해임 결정에 반대했다. 1952년 2월, 거의 9개월 후 트루먼의 지지율은 22%로 떨어졌다. 이는 현직 대통령이 기록한 가장 낮은 갤럽 여론조사 지지율로 남아있다. 한국에서 점점 더 인기가 없는 전쟁이 이어지면서 트루먼 행정부는 일련의 부패 스캔들로 시달렸고, 그는 결국 재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951년 5월 3일부터 리처드 러셀 주니어 민주당 의원이 의장을 맡은 상원 합동 위원회가 맥아더의 해임을 조사했다. 이 위원회는 "맥아더 장군의 해임은 대통령의 헌법적 권한 내에 있었지만, 그 상황은 국가적 자부심에 충격을 주었다"고 결론 내렸다.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맥아더의 자신감은 과대해졌고, 그 과장된 전황 보고에 워싱턴도 휩쓸려 통합 참모 본부는 유엔 결의를 기다리지 않고 9월 28일자로 북한에서의 군사 행동을 허가했다. 전쟁 목적이 "북한군의 침략 저지"에서 "북한군의 괴멸"로 확대된 것이다. 국방 장관 조지 마셜은 맥아더에게 "38도선 이북으로 전진하는 것에 관해, 귀하는 전략적·전술적으로 아무런 방해도 없다고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극비 전보를 보냈고, 맥아더는 "적이 항복할 때까지, 조선 전토가 아군 군사 작전에 열려 있다고 이해한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중소의 전면 개입을 우려한 트루먼은 "육해군은 어느 경우에도 국경을 넘어서는 안 된다", "국경 부근에서는 한국군 이외의 부대는 사용하지 않는다", "중국 동북부 및 소련 영역에 대한 공해로부터의 공격을 금지한다"라는 제한을 두었다. 중소의 전면 개입 방지 외에도, 호이트 반덴버그 미국 공군 참모 총장은 공군의 작전 구역을 확대함으로써 자연·전투 손실로 공군력을 소모하고, 그 보충을 위해 2년 동안은 유럽 방면의 방공력이 텅 비게 된다고 생각해, 국방부도 그 생각을 지지하여, 맥아더에게도 전달되었다. 그러나 이 작전 제한은, 전면전에서 승리하는 것을 신조로 하는 맥아더에게는 속박으로 느껴졌다.

10월 15일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과 맥아더는 한국 전쟁에 대해 협의를 가졌다. 트루먼은 대통령에 취임한 지 5년 반이 지났지만, 아직 맥아더와 만난 적이 없었고, 두 차례나 맥아더에게 귀국을 재촉했지만, 맥아더는 트루먼의 명령을 거절했다. 그러나, 인천 상륙 작전으로 높아진 맥아더의 국민적 인기를 11월의 중간 선거에 이용하고자 생각한 트루먼은, 스스로 맥아더와의 회담을 제안했고, 귀국을 꺼리는 맥아더를 위해 회담 장소는 본토 밖이라도 좋다고 제안했다. 트루먼 측은 하와이를 희망했지만, 맥아더는 밤 비행기를 싫어했고 멀리 가고 싶어하지 않아, 결국 트루먼 측이 양보하여, 워싱턴에서 7,500km, 도쿄에서 3,000km 떨어진 웨이크 섬이 회담 장소가 되었다.

트루먼이 크게 타협했음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이 회담을 불쾌하게 생각했고, 웨이크 섬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노골적으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동행했던 한국 주재 대사 존 조셉 무치오에게, "(트루먼의)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이렇게 멀리까지 불려와 시간을 낭비한다"고 불만을 토로하며, 트루먼이 자신의 곳(도쿄)까지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맥아더는 주위의 배려로, 회담 전에 수면을 취하도록 하기 위해 트루먼기가 도착하기 12시간 전에도 웨이크 섬에 도착했지만, 초조해하며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두 사람의 불화를 강조하려는 의도로, 트루먼의 기를 먼저 착륙시키기 위해 섬 상공에서 맥아더기가 선회했고, 일부러 회담에 1시간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트루먼이 격노하여 "최고 사령관을 기다리게 하는 일은 두 번 다시 하지 말라. 알겠나"라고 호통쳤다는 등의 에피소드가 유포되어 있지만,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이다. 그러나, 맥아더가 트루먼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며, 통상적인 관례라면 군의 최고 사령관인 대통령을 맞이할 때는, 대통령이 탈 것(이 때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 마중하는 고급 군인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어야 했지만, 맥아더는 일부러 조금 떨어진 곳에 정차해 있는 지프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고, 트루먼기가 착륙해서, 트루먼이 설치된 사다리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프에서 내려 트루먼을 향해 걸어갔다. 그 때문에, 맥아더가 트루먼에게 도착한 것은, 사다리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것과 거의 동시에 되었다. 맥아더는 더 나아가, 통상이라면 경례로 맞이해야 하는 데 반해, 트루먼에게 악수를 청했다. 트루먼은 맥아더의 무례함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여기서는 웃는 얼굴로 응하며 "계속 만나고 싶었습니다"라고 말을 걸었다.

두 사람은 웨이크 섬에 있는 유일한 고급차였던 시보레를 타고, 회담 장소인 항공 회사 사무소로 향했다. 트루먼은 지극히 평범한 상식인으로, 상대가 누구든 차분히 대화를 나누면 반드시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자신의 협상술에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어서 면대하면 상대의 생각을 대개 읽을 수 있었고, 성실하게 대응하면 반드시 상대도 응해줄 것이라고 생각해, 실제로 아이젠하워나 브래들리 같은 장군들과는 의사 소통이 되었지만, 맥아더는 트루먼의 예상 밖의 존재였다. 맥아더는 자리에 앉자 주위에 상관하지 않고 파이프에 담배 잎을 채우기 시작했지만, 불을 붙이기 전에 눈앞의 트루먼을 눈치채고, 미안한 듯이 "담배는 싫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트루먼은 농담을 섞어 "문제없습니다. 아마 저는 미국에서 가장 얼굴에 담배 연기를 많이 들이마셨을 겁니다"라고 답하자, 맥아더는 거리낌 없이 많은 담배를 피웠고, 좁고 답답한 회의실에는 파이프 담배의 강한 냄새가 가득 찼다.

그 후의 회담에서 맥아더는 "어떤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중공군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은 추수감사절까지 끝나고, 병사는 크리스마스까지는 귀국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게다가 "처음 1, 2개월 동안 그들이 참전했다면, 그것은 결정적이었겠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참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공군력이 없지만, 우리 측은 한반도에 여러 개의 공군 기지를 가지고 있다. 중공군이 평양에 접근해도 대규모 학살이 될 뿐일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이 맥아더의 낙관적인 예상은, 트루먼 측 고위 관료가 데려온 여성 비서에게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후에 맥아더를 궁지에 몰아넣게 된다. 트루먼은 "극히 만족스러운 유쾌한 회담이었다"고 형식적인 말을 남기고 비행기에 올랐지만, 속으로는 맥아더의 불손한 태도에 불신감을 더했고, 또한 맥아더 쪽도 더욱 트루먼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고, 파국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 후에도 맥아더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참전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보급선이 길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경인 압록강까지 육박했다. 먼저 소련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김일성은 1950년 9월 30일 중국 대사관에서 열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주년 리셉션에 참석하여, 그 자리에서 중국 부대의 파견을 요청하고, 더 나아가 직접 마오쩌둥에게 부대 파견 요청 편지를 쓴 뒤, 그 편지를 박헌영에게 맡겨 베이징으로 보냈다. 마오쩌둥은 즉시 행동에 나서 10월 2일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소집하여 "하루의 늦음이 장래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부대를 보낼지 여부가 아니라 언제 보낼지, 누가 사령관이 될지가 문제다"라고 정치위원들에게 설득했다. 정치위원들 역시, 미국군이 압록강에 도달하면 강을 건너 중국을 침공해 올 것이며,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부대 파견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기울었고, 마오쩌둥의 결단대로 부대 파견을 결정하여 10월 8일 김일성에게 통지했다. 다만 미국과의 전면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군인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조직하지만, 형식상 의용병으로 한 "중국 인민지원군"('''항미원조의용군''')을 파견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항공 지원을 요청했지만, 스탈린은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원치 않아, 마오쩌둥에게 중국 국내에서의 공중 지원과 무기·물자 지원만 하도록 답했다. 중국군 지휘관이 된 펑더화이는 소련의 항공 지원 없이는 작전에 불안을 느꼈지만, 부대 파견은 마오쩌둥의 강한 의지로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더 나아가 마오쩌둥은 북한군의 지휘권도 펑더화이에게 일임하기로 결정하여, 전쟁은 중국의 지휘 하에 놓이게 되었다.

10월 10일에 약 18만 명의 중국 야전 제4군이 압록강을 넘어 북한에 진입했고, 그 수는 나중에 30만 명까지 불어났다. 맥아더는 이러한 위험한 징후를 감지했지만, 적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더욱 공격적으로 되었다. 처음에는 트루먼의 지시대로, 국경 부근에서의 부대 사용을 한국군만으로 하기 위해, 중조 국경에서 64km에서 97km 떨어진 곳을 한국군 이외의 유엔군의 최심 도달점으로 정했지만, 10월 17일에는 트루먼의 지시를 어기고, 그 최심 도달점을 중간 지점으로 변경하고, 더 나아가 국경 깊숙이 전진하도록 각 부대 사령관에게 명령했다. 중조 국경에 가까워질수록 지형은 험준해지고, 보급이 어려워졌지만, 맥아더는 그 사실을 경시했다. 맥아더의 이러한 작전 지휘는 마오쩌둥의 의도대로였다. 과거 마오쩌둥이 참모 레이잉푸에게 맥아더의 인물에 대해 질문했고, 레이잉푸가 "오만과 완고함으로 유명합니다"라고 대답하자, 마오쩌둥은 "그렇다면 다행이다. 오만한 적을 이기는 것은 쉽다"라고 만족스럽게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었지만, 이제 중국이 원하는 것은 더욱 맥아더가 북상을 명령하고, 보급 라인이 위험할 정도로 길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함정에 빠지는 듯한 맥아더의 명령 위반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맥아더의 압도적인 명성에 미국군 내에서도 외경심이 강했고, 또한 완고한 맥아더에게 의견을 말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체념의 마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중에서도 부참모장 매튜 리지웨이는 이견을 제기했지만, 의견이 채택되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던 중국 인민지원군의 대군은, 내리는 눈과 그 자연 환경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미국군에게 눈치 채이지 않고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은 그 훌륭한 조직력을 '그림자 없는 유령'이라고 묘사하며 "그 병력, 위치, 어디에 첫 공격을 가해올지의 비밀은 완전히 유지되어, 이중으로 무장한 것과 같았다"라고 칭찬했다. 10월 26일에는 한국군과 중국군의 소규모 교전이 있었고, 중국 병사 18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지원을 위해 달려온 미국군 제1해병사단은 중국군의 전차를 격파했다. 또한 미국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은 매우 우수한 중국군 부대가 국경 부근에 존재한다는 것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있었고, 신중하게 진격했지만, 이러한 정보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연합군 최고사령부 총사령부 참모 제2부(G2) 부장 찰스 윌러비 등 맥아더의 막료들은, 맥아더의 선입견에 의문을 제기하는 보고를 최소한으로 줄였고, 맥아더에게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지 않은 것도 한 원인이었다. 통상적인 지휘관이라면 가능한 한 많은 정확한 정보를 원하지만, 맥아더는 정보 보고가 자신이 하려는 것과 완전히 융합되기를 원했다. 윌러비 등은 맥아더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고, 맥아더가 하려고 하는 압록강으로의 마지막 진격을 방해하는 듯한 정보를 그대로 올리지 않고, 신중하게 조작된 정보를 맥아더에게 보고했기 때문에, 맥아더에게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신문 각 지가 먼저 중국군의 불안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기사화했지만, GHQ는 워싱턴에 "확인되지 않았다"라고 낙관적인 보고를 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11월 1일에 중국 인민지원군이 한국군 제2군단을 습격했고, 한국군 3개 사단은 장비를 버리고 전면적으로 패주했다. 한반도는 국경에 가까워질수록 북쪽으로 넓어지기 때문에, 국경을 향해 진격하고 있던 미국 제8군과 제10군 사이는 상당히 벌어져 있었다. 그 제8군의 우익에 전개되어 있던 한국군이 붕괴되자, 중국 인민지원군은 피리와 나팔을 울리며 제8군의 측면에 돌격해왔다. 제8군은 인해전술 앞에, 순식간에 큰 피해를 입었다. 맥아더는 중국군의 대공세 개시 보고를 받았지만, 중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했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없어, 자기 스스로 혼란스러워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 때문에, 전선 부대에 대한 적절한 지시가 늦어졌고, 그 사이에 각 부대는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전황의 심각성을 겨우 인식한 맥아더는 국방부에 "지금까지 당 사령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지만, 이제 사태는 그 권한과 힘을 초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고 있다"'''라고 다소 히스테리적인 전문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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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8일이 되어서야 맥아더는 군 사령관에게 철수 허가를 내리고, 제8군은 평양을 포기하고, 그 후 38도선 후방으로 철수했다. 교묘하게 철수전을 지휘하고 있던 제8군 사령관인 월턴 워커 중장이었지만, 12월 23일, 부대 순찰 중 군용 지프차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맥아더는 그 소식을 듣고, 이전부터 정해 놓았던 대로 즉시 후임으로 참모본부 부참모장 매튜 리지웨이 중장을 추천했다. 급히 미국에서 도쿄로 날아간 리지웨이는 12월 26일에 맥아더와 면담했다. 맥아더는 "맷, 자네가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게"라고 맥아더가 가지고 있던 전술상의 모든 지휘권과 권한을 리지웨이에게 넘겨주었다. 리지웨이는 맥아더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즉시 전선으로 날아가 부대의 상황을 확인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으로, 패배주의가 만연하고, 사기는 저하되고, 지휘관들은 유의미한 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리지웨이는 군의 재건을 정력적으로 추진했지만, 중국 인민지원군의 기세가 멈추지 않고, 1951년 1월 2일에는 서울에 육박해 왔다. 리지웨이는 서울 방어를 포기하고 철수를 명령하고, 1월 4일에 서울은 중국 인민지원군에게 점령당했다.

의용군 측의 인해 전술에 밀려, 맥아더와 워싱턴은 모두 공황 상태에 빠졌다. 맥아더는 대규모 증원과, 원폭 사용을 포함한 중국 동북부 공습을 주장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상비군의 대폭 축소를 실시하고, 유럽에서 냉전이 진행되고 소련과 대치하는 미국에게, 대규모 증원을 보낼 여유는 없었다. 중국 동북부에 대한 폭격은 전쟁 확대를 초래하고, 또한 원폭에 대해서는, 조선의 지세와 집약 목표가 없기 때문에 현실적이지 않다고 부결되었다. 맥아더는 잡지 인터뷰에 응하는 형태로 "중국 동북부에 대한 공습 금지는, 사상 유례없는 핸디캡이다"라고 작전에 제한을 둔 트루만을 깎아내리고, 또한 중국군에게 쫓겨 패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술적인 철수이며, 패주라고 널리 선전되는 것은 전혀 넌센스다"라고 호언장담했다. 트루먼은 격노하고, 워싱턴 중추의 맥아더에 대한 환멸감은 더욱 커져갔다. 맥아더로부터의 비판에 격노한 트루먼은, 통합 참모본부에 명령하여 맥아더에게, 공식적인 의견 표명을 할 경우에는 상급 기관의 승인을 받도록 지시했지만, 맥아더는 이 지시를 무시하고, 그 후에도 정치적인 발언을 반복했다.

서울에서 철수한 리지웨이였지만, 철수는 거기까지였고, 유엔군을 재건하여, 1월 26일에는 전쟁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반격 작전 썬더볼트 작전을 시작하여, 중국 의용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맥아더는 이 시점에서 중국이 전면적으로 개입해 왔다고 생각하고, 워싱턴에 다시 이전의 이야기를 되풀이하며, "유엔군이 유린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중국 연안을 봉쇄하고, 함포 사격과 공습으로 전쟁 수행에 필요한 공업력을 파괴"할 것과 국민당군을 참전시키는 등, 중국과의 전면전 돌입을 주장했다. 그러나 트루먼의 방침은, 일본이나 대만이 위협받으면 대 중국 본격적인 작전에 돌입하지만, 그 외에는 분쟁은 한반도 안에 한정한다는 의향이었고, 맥아더를 타이르는 듯한 장문의 답변을 했다. 참모총장 오마 브래들리는 맥아더의 전쟁 확대 요구는, 전쟁의 상황보다는 오히려 "자신과 같은 군사적 천재를 바보 취급한 중국 홍군의 장군들에게 대한 보복"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리지웨이는 현존하는 통상 전력으로도 한국을 확보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중국군의 제3기 공세를 격파하고 2개월 만에 잃었던 땅을 되찾아, 1951년 3월에는 중국군을 38도선까지 밀어냈다. 전황의 회복은 리지웨이의 작전 지휘에 의한 것으로, 맥아더의 출번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불만으로 여긴 맥아더는 각광을 받기 위해, 도쿄에서 막료와 보도진을 데리고 전선을 방문했다. 그러나 어느 날, 리지웨이가 계획한 작전 개시 전에 맥아더가 전선에 방문하여 보도진에게 작전의 개시 시기를 누설해 버렸고, 리지웨이로부터 자중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맥아더의 군 경력 중에서, 정면으로 부하에게 반항을 받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리지웨이는 자서전에서 맥아더를 "자신이 한 것이 아닌 행위에 대해서도, 명예를 주장하고 그것을 받으려 한다"고 평하고 있다.

워싱턴은, 이 시점에서는 한반도의 무력 통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미국 군부대를 철수시킬 수 있는 합의를 열망하고 있었다. 한편 맥아더는, 리지웨이의 성공이 분명해지자,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하기 위해 "중국을 1년 안에 굴복시키는 새로운 구상"을 책정했다고 시볼드에게 말했다. 후에 이것은 "최장 10일 안에 전승할 수 있다"로 단축되었다. 그 구상이란, 전후 맥아더가 말한 바에 따르면, 만주에 50개의 원폭을 투하하여 중소의 공군력을 괴멸시킨 후, 해병대와 중국 국민당군 총 50만 명으로 중국군의 배후에 상륙하여 보급로를 끊고, 38도선에서 진격해 온 제8군과 중조군을 포위 섬멸, 그 후에 일본해에서 황해까지 한반도를 횡단하여 방사성 코발트를 살포하여, 중소군의 침입을 막는다는 것으로, 이 전략에 의해 60년 동안은 한반도의 안정이 유지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후일 리지웨이는 "맥아더는, 중국 동북부의 공군 기지와 공업 지대를 원폭과 공습으로 파괴한 후에는 나머지 공업 지대도 파괴하고, 공산주의 지배의 타도를 목표로 했다", "소련은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만약 참전해 온다면 소련 공격을 위한 조치도 취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 생각에 근거하여 맥아더는, 몇 번째가 될지 모르는 원폭의 전선으로의 이송과 사용 허가를 트루먼에게 요청했지만, 트루먼은 답변을 보류했다.

맥아더에게의 답변 전에, 트루먼은 조선 문제 해결의 길을 열기 위해 정전을 호소하기로 하고, 3월 20일에 통합 참모본부를 통해 맥아더에게도 그 내용이 전달되었다. 트루먼과의 대결 자세를 분명히 하고 있던 맥아더는, 이 정전 공작을 방해하여 트

6. 기업인 활동



1951년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4월 사령관 직위에서 해임된 이후, 1948년과 1952년 미국 공화당의 강경 반공주의 보수주의 세력은 맥아더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려 했으나 온건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맥아더는 1952년 레밍턴랜드 회사의 이사회 회장직을 수락했다.[334] 같은 해 레밍턴랜드 회장으로 재직하며 공개 석상에 가끔 모습을 드러냈지만, 대부분 뉴욕 시내의 저택에서 생활했다.

이후 스페리랜드 회사의 취체역 회장으로 선임되었다.[335]

1960년 2월 2일 요도 질환으로 레녹스 힐 병원에 입원,[335] 3월 19일 전립선 제거 수술을 받았으며,[335] 4월 5일 63일 만에 퇴원했다.[335]

7. 조용한 행보와 말년

1962년 10월 31일 김종필의 방문을 받은 맥아더


1962년 10월부터 11월까지 미국을 방문 중이던 김종필을 만났다. 미국 방문 길에 그는 맥아더 미국 육군 원수를 방문하기도 했다.[336]

김종필과의 면담에서 맥아더는 김종필에게 "한국이 하루빨리 통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죽을 수 없습니다.[336]"는 의사를 피력했다. 또한 맥아더는 김종필에게 "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만주 폭격을 주장"했으며 "한국 전쟁의 휴전에 있어서 미국은 잘못을 저질렀으며, 한국에서의 북진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인도 사태가 발전된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336] 이는 맥아더가 한반도 통일에 대한 강한 열망과 함께, 공산 세력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당시 미국 정부의 정책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만년에 그는 기업인과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52년에는 레밍턴 랜드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스페리사의 사장으로 영입되어 국제 정세에 대한 조언을 했다. 1955년에는 시게미쓰 마모루 일본 외무대신을 만나 일본 점령 시대를 회상하며 쇼와 천황과의 첫 회담,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 대한 후회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1960년에는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최근까지 전쟁 상태에 있던 위대한 국가가, 과거의 적 사령관에게 이러한 영예를 준 예는, 내가 아는 한 역사상 유례가 없다"라며 기뻐했다. 이는 과거 적국이었던 일본과의 관계가 개선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1961년에는 필리핀 정부가 독립 15주년 기념식의 국빈으로 맥아더를 초청했다. 맥아더는 스스로를 "센티멘털 저니"라고 칭하며 감상적인 여행을 떠났다. 필리핀 정부는 맥아더를 기려 국민 축제를 선포하고, 축하 행사가 일주일 동안 이어졌다. 맥아더는 루네타 공원에서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나는 더 이상 그 맹세를 지킬 수 없을 것 같습니다. '''『I shall return』''' 그 맹세를"이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이는 그의 마지막 필리핀 방문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맥아더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고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케네디는 과거 맥아더의 부하였던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61년 회담을 통해 맥아더에 대한 시각을 크게 바꾸었다. 케네디는 맥아더에게 에어 포스 원을 보내 백악관 오찬에 초청하여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맥아더는 도미노 이론을 비웃으며 아시아 대륙에 미국의 지상군을 투입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그의 조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62년 웨스트포인트는 국가에 대한 탁월한 봉사에 대해 실바누스 세이어 상을 수상한 맥아더를 기렸다. 이 상을 수여받으면서 맥아더가 생도들에게 한 연설은 "의무, 명예, 국가"를 주제로 했다.

1964년 3월 2일, 맥아더는 복통으로 검진을 받기 위해 월터 리드 육군 병원에 입원했으며, 중등도 황달 진단을 받았다.

1964년 4월 5일, 맥아더는 원발성 담즙성 담관염으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존 F. 케네디 암살 전에 케네디 대통령이 승인한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4월 7일, 그의 시신은 뉴욕으로 옮겨져 파크 애비뉴 아모리에 안치되었다. 그날 밤 그의 시신은 기차로 워싱턴 유니언 역으로 옮겨져 장례 행렬을 통해 미국 국회의사당으로 옮겨져 미국 국회의사당 원형 홀에서 영결식을 거행했다.[57] 약 15만 명의 사람들이 영구차를 지나갔다.

맥아더는 그의 어머니가 태어났고 그의 부모가 결혼했던 노퍽, 버지니아에 묻히기를 요청했다. 4월 11일, 그의 장례식은 노퍽의 세인트 폴 성공회 교회에서 거행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노퍽 시청 원형 홀에 안치되었다.[58][59]

맥아더는 호텔 월도프-아스토리아에서 여생을 보냈다.

8. 상훈 내역

맥아더는 국내외에서 수많은 훈장을 받았다.



조지 마셜은 맥아더에게 명예 훈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는데, 맥아더는 이전에 두 번이나 이 훈장의 후보로 지명되었으며, "지휘권을 떠나는 그에 대한 적의 선전을 상쇄하기 위해" 결정되었다. 아이젠하워는 맥아더가 실제로 법이 요구하는 용감한 행위를 수행하지 않았다고 지적했지만, 마셜은 1927년 찰스 린드버그에게 수여된 훈장을 선례로 언급했다. 린드버그의 훈장을 승인하기 위한 특별 법안이 통과되었지만, J. 파넬 토마스와 제임스 E. 반 잔트 의원이 맥아더 훈장을 승인하는 유사한 법안을 제출했을 때, 마셜은 현역 장군이 대통령과 전쟁부로부터 훈장을 받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생각했으며, 구제 법안에 의해 용감성 기준이 면제되지 않으면 그 인정을 "더 의미있게" 만들 것이라고 표현했다.

마셜은 서덜랜드에게 훈장 수여를 권고하도록 명령하고 직접 인용문을 작성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또한 관련 법규를 위반하는 것을 의미했는데, 훈장이 합법적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의회가 물질적 요건을 면제하는 경우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의무 이상으로" 눈에 띄는 용감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충족되지 않은 요건과 같은 것이다. 마셜은 전쟁 장관에게 이 결함을 인정하며, "맥아더 장군의 훈장 수여를 정당화할 구체적인 행위는 법규의 문자적 해석에 따라 없다"고 인정했다. 마찬가지로, 육군 참모총장이 1945년에 이 사건을 검토했을 때, 그는 "규정의 엄격한 해석에 따라 [맥아더의] 훈장 수여에 대한 권한은 의심스럽다"고 결정했다.

맥아더는 이전에 두 번이나 훈장 후보로 지명되었으며, 그것이 용감성이 아니라 지도력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는 "이 훈장은 나 개인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지휘하는 용감한 군대의 굴복하지 않는 용기를 인정하는 것이다"라는 감정을 표현했다. 62세의 맥아더는 역사상 가장 나이가 많은 생존한 현역 명예 훈장 수훈자였으며, 4성 장군으로서 그는 명예 훈장을 받은 군인 중 최고위 계급이었다. 따라서 아서와 더글러스 맥아더는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최초의 부자(父子)가 되었다. 그들은 2001년까지 유일한 부자 관계였는데, 스페인-미국 전쟁 동안의 공로로 테오도어 루스벨트가 사후에 훈장을 받았고, 테오도어 루스벨트 주니어는 제2차 세계 대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중 용감성으로 사후에 훈장을 받았다. 마셜이 작성한 맥아더의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필리핀 제도를 정복에 저항하도록 준비하는 데 있어서 뛰어난 지도력, 침략하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의무 이상의 용감성과 용맹함, 바탄 반도에서의 방어 및 공격 작전의 영웅적인 수행. 그는 군대를 동원, 훈련, 지휘하여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군 병력과 무기에 맞서 용감하게 방어한 것으로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 그는 맹렬한 화력과 공중 폭격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위험을 전혀 개의치 않았고, 매 순간 침착한 판단력으로 그의 부대에 영감을 주었으며, 필리핀 국민의 저항 정신을 고취시켰고, 미국의 군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확고히 했다.

일본에 저항하는 세력의 상징으로서, 맥아더는 다른 많은 찬사를 받았다. 남서부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은 그를 "추장의 추장"으로 선택했는데, 그는 "서부 변경에서 나의 어린 시절의 동반자, 가장 오래된 친구"라고 인정했다. 그는 1942년 올해의 아버지로 선정되었을 때 감동을 받았고, 전국 아버지의 날 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직업적으로 나는 군인이며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아버지라는 사실에 무한히 자부심을 느낍니다. 군인은 건설하기 위해 파괴합니다. 아버지는 파괴하지 않고 건설만 합니다. 하나는 죽음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창조와 생명을 구현합니다. 그리고 죽음의 무리는 강하지만, 생명의 대대는 더 강합니다. 내가 죽은 후 아들이 나를 기억하기를 바라는데, 전투에서가 아니라, 집에서, 우리 가족의 간단한 매일의 기도를 그와 함께 반복하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맥아더는 생전에 미국과 다른 국가들로부터 100개 이상의 군사 훈장을 받았으며, 여기에는 명예 훈장,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과 ''전쟁 십자 훈장'', 이탈리아 왕관 훈장, 네덜란드 오라녜나사우 훈장, 호주 바스 훈장 명예 기사단 십자 훈장, 일본의 욱일대수장이 포함된다.

맥아더는 미국 대중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거리, 공공 사업, 아이들, 심지어 춤 동작까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961년 ''타임'' 기사는 "필리핀인들에게 맥아더는 흠 잡을 데 없는 영웅"이라고 말했다.[50] 1955년, 그의 육군 원수 진급이 의회에 제안되었으나, 그 제안은 보류되었다.[68]

1987년부터 더글러스 맥아더 재단을 대표하여 미국 육군은 매년 일반 회사급 장교(소위 및 대위)와 하사관(준위 1, 준위 2)에게 "의무, 명예, 국가"를 전문적인 삶과 지역 사회 봉사에서 보여준 공로를 인정하여 더글러스 맥아더 리더십 상을 수여한다. 각 수상자에게는 맥아더의 청동 흉상이 수여된다.[69]

더글러스 맥아더 재단은 미국 군사 대학 및 학교 협회 내에서 뛰어난 생도들에게 맥아더 생도 상을 수여한다. 맥아더 상은 매년 약 40개의 군사 학교 졸업반 학생들에게 수여된다. 이 상은 생도들이 맥아더가 학생으로서 보여준 리더십 자질을 본받도록 장려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1989년부터 더글러스 맥아더 재단을 대표하여 미국 육군 생도 사령부는 매년 274개의 육군 ROTC 부대 중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8개의 미 육군 ROTC 프로그램에 맥아더 상을 수여한다. 이 상은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한 학교 및 ROTC 지휘관의 성과, 생도들의 성과 및 사령부의 전국 명예 훈장 목록에서의 순위, 생도 유지율을 종합하여 선정된다.[70]

캐나다 왕립 육군사관학교의 맥아더 리더십 상은 "의무-명예-국가"라는 신조와 미래 군 복무에 대한 잠재력을 바탕으로 뛰어난 리더십을 보여준 졸업 생도에게 수여된다.

현대 심리학자들과 역사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맥아더는 자기애성 성격 장애를 겪었을 가능성이 있다.[71][72][73][74]

align="center" |공병 소위, 연방 정규 육군, 1903년 6월 11일
13px공병 중위, 연방 정규 육군, 1904년 4월 23일
33px공병 대위, 연방 정규 육군, 1911년 2월 27일
40px공병 소령, 연방 정규 육군, 1915년 12월 11일
60px보병 대령, 미국 육군, 1917년 8월 5일
33px준장, 미국 육군, 1918년 6월 26일
33px준장, 연방 정규 육군, 1920년 1월 20일
66px소장, 연방 정규 육군, 1925년 1월 17일
133px대장, 임시 계급, 1930년 11월 21일
66px소장, 연방 정규 육군, 1935년 10월 1일
133px대장, 퇴역자 명단, 1938년 1월 1일
66px소장, 연방 정규 육군 (현역 복귀), 1941년 7월 26일
100px중장, 미국 육군 1941년 7월 27일
133px대장, 미국 육군, 1941년 12월 22일
95px원수, 미국 육군, 1944년 12월 18일
95px원수, 연방 정규 육군, 1946년 3월 23일


  • 필리핀 원수 - 1936년 8월 24일 - 1937년 12월 31일[304]


맥아더는 국내외에서 많은 훈장을 받았지만, 주요 훈장을 기재한다. 맥아더는 미국 국내에서만 100개 이상의 훈장을 받았지만, 5성 장군 계급장 외에는 약장조차 일절 착용하지 않았다. 명예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맥아더의 방식이었다。

80px명예 훈장[305]
80px수훈 십자 훈장 5회
80px실버 스타 7회
80px수훈 비행 십자 훈장
80px청동 성훈장
80px퍼플 하트
80px항공 훈장



외 다수


  • 일본
  • * 욱일장(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외)

  • 대한민국
  • * 빛나는 업적을 기리는 태극무공훈장(1950년) 수훈[337]
  • * 건국훈장(1964년) 수훈[337]


그 외 다수

9. 평가

맥아더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그는 자신의 사람에게는 한없이 관대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냉정하게 대했다는 평가가 있다.[334] 군대 내에서도 다정한 면모와 용기, 겸손함을 보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고압적이고 이기적인 인물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했다.[334]

1960년, 노퍽 시장은 맥아더를 기리기 위해 맥아더 기념관을 설립했다. 기념관은 맥아더 광장에 위치하며, 9개의 박물관 갤러리를 통해 그의 50년 군 복무를 기리고 있다. 기념관 중앙에는 맥아더와 그의 아내 진의 석관이 안치된 묘소가 있다. 또한 호주 브리즈번의 맥아더 챔버스에는 맥아더 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60]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맥아더를 1945년과 1950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구한 영웅으로 여긴다. 인천광역시 자유공원에는 1957년 맥아더 동상이 세워졌으며, 이는 애국심의 상징으로 여겨진다.[61] 하지만 1998년 이후, 맥아더 동상의 존치 여부를 놓고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옹호론자들은 맥아더의 공헌을 강조하며 그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공산화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비판론자들은 그를 숭배의 대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민간인 학살이나 일본의 전후 배상 문제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 등 맥아더의 부정적인 면모를 지적한다. 2005년에는 맥아더 동상 주변에서 보수와 진보 단체 간의 집회가 열리며 갈등이 격화되기도 했다.[339]

한편, 제일생명 빌딩(도쿄)은 맥아더가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재임하던 시절(1945년~1951년) 그의 사무실을 보존하고 있다.[62]

맥아더는 논쟁적인 유산을 남겼다. 개빈 롱은 1942년 필리핀에서의 패배를 "미국 대외 전쟁 역사상 가장 큰 패배"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 대중은 영웅을 필요로 했고, 맥아더는 좋은 언론 보도를 통해 영웅으로 받아들여졌다.[63] 그는 필리핀과 일본에서 존경받고 기억되고 있다. 1961년 맥아더가 마닐라를 방문했을 때, 200만 명의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다.[64][50]

맥아더는 또한 한국 전쟁 중 만주 폭격 계획을 추진했으나, 이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시민 문제와 폭동 진압에 대한 맥아더의 관점은 유럽에서 싸운 장교들과는 달랐다. 1944년 뉴기니, 1945년 필리핀, 1950년 한국에서의 승리에서 그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기동과 기습에 의존했다. 존 킹 페어뱅크는 맥아더를 "우리의 가장 위대한 군인"이라고 칭했다.[65] 앨런브루크 자작은 맥아더가 동시대 미국 및 영국 장군들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했으며, 장제스는 그를 자유와 정의를 옹호하는 모든 사람들의 영웅이라고 칭찬했다.[66]

반면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한 것이 미국의 민간-군사 관계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언급했다. 린든 존슨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에게 "맥아더처럼 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맥아더의 해임은 "맥아더주의"라는 철학을 낳았다.

맥아더는 논란이 많고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남아 있다. 그는 일본 재건에 진보적인 접근 방식을 옹호했으며, 극동에 미래가 있다고 주장하며 동시대 사람들과 의견을 달리하기도 했다. 블레이미는 "그에 대해 듣는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말했다.

맥아더는 1987년 뉴욕주 대법원 판결에서 "심판에게 야유할 자유와 같은 미국 자유를 보호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인용문으로 언급되기도 했다.[67]



맥아더 휘하에서 태평양 전쟁을 치른 제5공군 사령관 중장은 맥아더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극소수이며, 그를 칭찬하거나 싫어하는 양 극단으로 나뉜다고 평했다.

맥아더는 부하로부터의 일방적인 충성심을 요구했다는 인식이 강했으며, 대통령이나 군 수뇌부에 대한 충성심은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루스벨트는 맥아더를 신뢰하지 않았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 두 명은 휴이 롱과 더글러스 맥아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255] 또한 맥아더가 정치적 야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당신은 우리나라 최고의 장군이지만, 우리나라 최악의 정치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루먼은 맥아더에 대해 더욱 신랄한 평가를 내렸다. 그는 맥아더를 "자만심 덩어리"라고 칭하며 웨인라이트와 비교하기도 했다.[256] 트루먼은 맥아더를 퇴역시키고 를 후임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클레이가 거절했다.[257]

맥아더 또한 트루먼을 몹시 싫어했다. 트루먼이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 초기의 실책을 맥아더의 책임으로 돌리자 격분하여, "천한 꼬마 광대, 뿌리 깊은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

리지웨이는 맥아더의 성격에 대해 "칭찬에 대한 갈망", "눈에 띄는 입장에 대한 집착", "완고한 성질", "자신에 대한 자신감" 등을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맥아더의 문제 핵심을 밝히는 능력과 과감한 행동력을 칭찬하며 위대한 장수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상사들의 평가는 엄격했지만, 부하들의 신뢰는 높았다. 중장은 맥아더를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이자, 가장 위대한 지휘관이며, 가장 위대한 영웅"이라고 칭했으며, 에드워드 아먼드 중장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군사적 천재"라고 평가했다.

특히 '바탄 갱'이라고 불린 GHQ 막료들은 맥아더에 대한 신뢰가 매우 높았다. 윌로비는 맥아더에게 "당신에 필적하는 인물은 아무도 없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258]

하지만 맥아더는 부하와 공적을 나누려 하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로버트 아이클버거 대장이 잡지에 실린 것을 질책하며 "나는 내일이라도 당신을 대령으로 강등시켜 귀국시킬 수 있다"라고 말한 일화도 있다.

소장은 맥아더가 측근들과 친밀한 동료 의식을 갖는 일이 없었으며, 존경은 받았지만 부하의 공감과 이해,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평했다.

또한, 맥아더 포고령을 두고 미군의 한반도 점령 논란이 일기도 했다. 맥아더 포고령 제1조를 통해 미군이 직접 한반도 통치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342] 이에 대해 미군이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임을 드러낸다는 의견과, 포고령의 점령(occupy)은 주둔이라는 의미를 오역한 것이라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342]

10. 논란과 의혹

더글러스 맥아더는 논쟁적인 유산을 가지고 있다. 1942년 필리핀에서 그는 개빈 롱이 "미국 대외 전쟁 역사상 가장 큰" 패배라고 묘사한 패배를 겪었다.[63]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 대중은 그를 영웅으로 받아들였다.[63] 그는 필리핀과 일본에서 오늘날까지 존경받고 기억되고 있으며, 1961년 마지막 마닐라 방문 당시 200만 명의 환호하는 군중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64][50]

시민 문제, 폭동 진압 등에 대한 그의 개념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유럽에서 싸운 장교들에 의해 거부되었지만, 그는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동과 기습에 의존하여 성공을 거두었다.[65] 존 킹 페어뱅크는 맥아더를 "우리의 가장 위대한 군인"이라고 불렀으며, 앨런브루크 자작은 그를 동시대 미국 및 영국 장군들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장제스 또한 그를 칭찬했다.[66]

반면,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한 것이 미국의 민간-군사 관계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언급했으며, 맥아더의 해임은 "맥아더주의"로 알려진 철학이 되었다. 린든 존슨 또한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에게 맥아더처럼 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맥아더는 여러 면에서 시대를 앞섰지만, 동시에 반동적인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는 일본 재건에 진보적인 접근 방식을 옹호하고, 북한과 중국이 단순한 소련의 꼭두각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등 동시대 사람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필리핀과 일본 지도자들을 동등하게 존중했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감수성으로 인해 마닐라를 공습으로 파괴하는 것을 싫어했다. 블레이미는 "그에 대해 듣는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들이 모두 사실입니다."라고 말했다.

1987년, 맥아더는 "심판에게 야유할 자유와 같은 미국 자유를 보호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인용문으로 언급되었다.[67]
동상 존치 논란1998년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자유공원에 세워진 맥아더 동상을 비롯한 대한민국 내 맥아더 동상의 존치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338] 맥아더를 한국 전쟁의 영웅으로 보는 관점과, 숭배의 대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관점이 충돌하고 있다. 2005년에는 동상 사수 집회와 철거 집회가 잇따라 열리며 갈등이 격화되기도 했다.[339][340] 보수 단체는 동상 사수 집회를 열어 동상을 지켰고,[341] 해병대전우회는 맥아더 동상 앞에서 '국가안보 및 맥아더장군 수호결의'를 개최했다.[341]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인천시는 1957년 자유공원에 맥아더 동상을 세웠으며, 이는 애국심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61]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은 맥아더를 1945년과 1950년 두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다.
맥아더 포고령의 미군의 한반도 점령 논란한반도 이남에 입성한 미군은 맥아더 포고령 제1호를 발표하며 직접 한반도 통치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342] 이를 두고 미군이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임을 드러낸다는 의견과, 포고령의 점령(occupy)은 주둔이라는 의미를 오역한 것이라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342]

10. 1. 만주 폭격 계획

한국 전쟁 중 맥아더는 만주 폭격을 계획했으나,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해임되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10. 2. 동상 존치 논란

1998년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인천광역시 중구 자유공원에 세워진 맥아더 동상을 비롯하여 대한민국 내 맥아더 동상의 존치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338] 맥아더를 한국 전쟁의 영웅으로 보는 관점과, 숭배의 대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관점이 충돌하고 있다.

맥아더를 숭배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은 그를 뛰어난 군인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민간인 학살, 일본의 전후 배상 문제에 대한 소극적 태도 등 부정적인 면모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동상 존치론자들은 맥아더의 공헌으로 대한민국이 존재하며, 그가 없었다면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2005년 7월에는 맥아더 동상 주변에서 보수 단체와 진보 단체가 각각 동상 사수 집회와 철거 집회를 개최하며 갈등이 격화되었다.[339]

2005년 9월 11일, 인천상륙작전 55주년을 앞두고 자유공원에서 맥아더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와 동상 사수를 주장하는 단체의 대규모 집회가 동시에 열렸다.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측은 폭력 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하여 부상자가 속출하고 공원 일대가 혼란에 빠졌다.[340]

전국민중연대, 통일연대, 한총련 등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 회원 4,000여 명은 경찰 저지선을 뚫고 '인간띠 잇기' 행사를 시도하며 쇠파이프, 대나무, 달걀 등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경찰은 방패와 곤봉을 사용하고 소화기를 분사하며 맞섰고, 양측 간 투석전이 벌어지면서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340] 이 과정에서 박범수(경희대) 씨 등 20여 명이 경찰이 던진 돌에 맞아 부상을 입었고, 전경 십여 명도 시위대가 휘두른 둔기에 맞아 쓰러졌다.[340]

9월 15일, 보수 단체는 1만 5천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맥아더 동상 사수 집회를 열고 동상을 지켰다.[341] 해병대전우회는 맥아더 동상 앞에서 '국가안보 및 맥아더장군 수호결의'를 개최했다.[341]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인천시는 1957년 자유공원에 맥아더 동상을 세웠으며, 이는 애국심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61]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은 맥아더를 1945년과 1950년 두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다.

10. 2. 1. 맥아더 포고령의 미군의 한반도 점령 논란

한반도 이남에 입성한 미군은 포고령 제1호를 발표했는데, 극동아시아의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의 이름을 본따서 발표하게 된다. 이 맥아더 포고령 제1조 내용을 통해 미군이 직접 한반도 통치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342]

맥아더 포고령을 두고 미군이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임을 명백히 드러낸다는 의견과, 포고령의 점령(occupy)은 주둔이라는 의미를 오역한 것이라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342]

11. 여담

그는 베트남필리핀한자와 원주민어 식 표기문자 대신 표음문자로 전부 바꾸라고 강요하였고, 이들은 한자와 원주민 언어를 포기하고 영어식 표음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이후 그는 일본에게도 한자를 없애고 표음문자로 전부 바꾸라고 일본 정부에 압력을 넣었으나 국어심의위에서 오랜 연구 끝에 당분간은 1,850자의 한자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당용한자(當用漢字)를 제정 시행하다가 불편하여 그 후 95자를 늘려 1,945자에 지명(地名)과 인명(人名)에 쓸 벽자(僻字) 166자를 추가하여 현재 2.111자를 사용하고 있다.[343] 미군정 중인 한국에는 부하 사령관인 존 하지를 통해 전달하였으나, 이승만 등은 거절, 한국의 고유 언어라서 없앨 수 없다고 하여 상용한자를 일부, 한글과 병행해서 쓰게 했다. 이승만은 맥아더의 지시를 거부하고 대한민국의 문화를 지켜낸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과는 자신이 소령일 때부터 알고 있었다고 하였는데, 말년에 그에 대해 '평생을 조국을 위해서 싸웠으며 정치를 할 때 다소 잘못이 있었더라도 고국에 들어가서 명예로운 최후를 마쳤으면 좋겠다'고 언급하였다.[344]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맥아더 역시 그의 공을 인정한 것이다.

맥아더는 연설 마지막에 자주 주기도문으로 끝마치는 버릇이 있어 '주기도문맨'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시 연설에서, 그리고 9.28 서울 수복 후 중앙청 연설에서도 그는 주기도문으로 연설을 마무리 하였다.

서양인으로는 드물게도 무속 신앙에서 신으로 숭배하는 인물이다. 일명 '''제네랄 신령'''이라 불리는 무속신이 바로 무속신앙에서의 맥아더이다.[345] 맥아더를 신령으로 모시는 사당은 인천광역시에 있다.

12. 대중 매체

더글러스 맥아더는 여러 대중 매체에서 다양한 배우에 의해 묘사되었다.


  • 데이턴 루미스 - ''빌리 미첼의 군법회의''(1955)
  • 헨리 폰다 - 텔레비전 영화 ''충돌 코스: 트루먼 대 맥아더''(1976)
  • 그레고리 펙 - ''맥아더''(1977)
  • 로렌스 올리비에 - ''인천''(1981)
  • 존 베넷 페리 - ''왕과의 작별''(1989)
  • 제임스 B. 시킹 - ''명예를 위한 추격''(1995)
  • 다니엘 폰 바르겐 - ''트루먼''(1995)
  • 로버트 도슨 - ''태양''(2005)
  • 토미 리 존스 - ''엠페러''(2012)
  • 리암 니슨 - ''인천 상륙 작전''[75] (2016)
  • 마이클 아이언사이드 - ''도쿄 재판''(2016)
  • 미겔 파우스트만 - ''퀘존의 게임''(2018)
  • 제임스 필버드 - ''장진호 전투''[76] (2021) 및 ''장진호 전투 2''[77] (2022)


; 영화

  • 맥아더』 ''MacArthur'' (1977년 감독: 조셉 서전트, 맥아더 역: 그레고리 펙)
  • 『인천!』 ''Inchon!'' (1982년 감독: 테렌스 영, 맥아더 역: 로렌스 올리비에)
  • 『소설 요시다 학교』 (1983년 감독: 모리야 시로, 맥아더 역: 릭 제이슨)
  • 『태양』 ''Солнце'' (2005년 감독: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맥아더 역: 로버트 도슨)
  • 『일륜의 유산』 (2010년 감독: 사사베 키요시, 맥아더 역: 존 세비지)
  • 『종전의 엠페러』 ''Emperor'' (2012년 감독: 피터 웨버, 맥아더 역: 토미 리 존스)
  • 인천 상륙 작전』 ''인천상륙작전'' (2016년 감독: 이재한, 맥아더 역: 리암 니슨)
  • 『일본 독립』 (2020년 감독: 이토 슌야, 맥아더 역: 아담 템플러)
  • 『1950 강철의 제7중대』 长津湖 (2021년 감독: 천카이거, 맥아더 역: 제임스 필버드)


; 텔레비전 드라마 (일부)

  • 『일본의 전후 제9집 노병은 죽지 않는다 - 맥아더 해임』 (1978년 NHK 특집 시리즈, 맥아더 역: 도널드 노드)
  • 『시라스 지로』 (2009년 NHK, 맥아더 역: TIMOTHY HARRIS)
  • 『져서, 이기다 ~전후를 만든 남자·요시다 시게루~』 (2012년 NHK 토요 드라마 스페셜, 맥아더 역: 데이비드 모스)
  • 『미국에 지지 않았던 남자 ~바카야로 총리 요시다 시게루~』 (2020년 TV 도쿄 개국 55주년 특별 기획 스페셜 드라마, 맥아더 역: 찰스 글러버)


; 다카라즈카 가극단

  • 『여명의 바람』 맥아더 역: 야마토 유가[303]


; 연극

  • 『은퇴가 리리』 (츠카 코헤이) 히로인이 맥아더와 미소라 히바리의 가짜 사이에서 태어난 숨겨진 아이라는 설정


; 만화

  • 『맞아 죽어라』 (데즈카 오사무)
  • 『천하무쌍 에다지마 헤이하치전』 (미야시타 아키라)
  • 맨발의 겐』 (나카자와 케이지)
  • 『M의 수급 (표시) 맥아더 암살 계획』 (리처드 우·이케가미 료이치)
  • 골든 카무이』 (노다 사토루)
  • 『질풍의 하야토』 (오와다 히데키)
  • 『쇼와 천황 이야기』 (노조 준이치)
  • 『주간 만화 일본사 50호 맥아더-전후 일본을 이끈 남자-』 (모토 소이치)
  • 『먹어봐!! ~메이지 육군 식량 이야기』 (키요스미 쿄이치)
  • 『학습 만화 일본의 역사 18 점령된 일본』 (표지가 아라키 히로히코에 의한 맥아더)

참조

[1] 웹사이트 From Perry To MacArthur: Flag Links Historic U.S. Visits to Japan, in Peace and War https://turnstiletou[...] 2015-09-02
[2] 뉴스 The Years of MacArthur https://www.nytimes.[...] 1970-10-04
[3] 웹사이트 Historical Vignette 089 - The History of the Chief of Engineers' Gold Castles https://www.usace.ar[...] U.S. Army Corps of Engineers
[4] 서적 The First World War, Second Edition: A Complete History https://books.google[...] Macmillan 2004-03-01
[5] 간행물 MacArthur http://www.shoppbs.p[...] WGBH Educational Foundation
[6] 논문 Douglas MacArthur: Strategic Influences and Military Theories https://apps.dtic.mi[...] Naval Postgraduate School 2018-09-01
[7] 웹사이트 The Return of Douglas MacArthur https://kirkcenter.o[...] Russell Kirk Center for Cultural Renewal 201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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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문서 マッカーサ、マックアーサーなどとカナ表記される場合もある。とりわけ、終戦後における日本においては、新聞を中心としたマスコミにおいて「マックアーサー」という表記が使用されていた。
[80] 서적 終戦直後の日本 -教科書には載っていない占領下の日本 彩図社
[81] 서적 1996
[82] 웹사이트 The Tampico Incident": Wilson's Message to Congress [April 20, 1914] http://www.historyce[...] 2016-05-26
[83] 서적 The Test of Battle
[84] 서적 マッカーサーの謎 日本・朝鮮・極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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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서적 1985
[87] 서적 1996
[88] 문서 フィリピン防衛計画作成の作業料という名目で、7年間にわたり多額の金をコミッションとして渡す契約。マッカーサーはアメリカ軍人の任務として防衛計画を作成するのであり、その見返りを受け取ることはアメリカ国内法で違反だった。
[89] 서적 歴史読本臨時増刊 世界 謎の秘密結社
[90] 서적 1967
[91] 문서 アジア艦隊のトップが大将なのは、上海などで砲艦外交をする上で仕事をやりやすくするためという理由があった。
[92] 문서 マッカーサーがウェストポイント校長時代、アナポリス校長はハートであった。
[93] 웹사이트 NPO法人零戦の会公式サイト 第三節 太平洋戦争緒戦における栄光 http://www.npo-zeros[...] 2016-05-01
[94] 뉴스 マッカーサー司令官、マニラ退去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 1941-12-25
[95] 뉴스 比政府、米軍司令部がマニラ撤退 1941-12-27
[96] 웹사이트 Dug-out Doug https://bataanprojec[...] 2024-08-03
[97] 서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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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문서 マッカーサーが日本陸軍の兵営を訪れたとき、日本陸軍はコレラの流行に悩まされていた。軍医が処方する薬を兵士が服用せず、困った軍医が薬箱に「薬を服用するのは天皇陛下の御命令である」と書いたところ、全兵士が薬を服用した様子を見たマッカーサーは天皇命令の絶対性を思い知ら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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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서적 占領戦後史
[162] 문서 1945年にアメリカで行われた世論調査では、天皇が有罪であるという意見が合計70%、うち死刑まで求めていたのが33%、それを受けて9月10日にアメリカ上院で「天皇を戦犯裁判にかけることをアメリカの方針とする」という決議がな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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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문서 児島襄の『東京裁判』によれば民間情報教育局局長ケネス・リード・ダイク|カーミット・R・ダイク准将がマッカーサーの意思を汲んで日本側にはたらきかけたという証言が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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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서적 マッカーサーの見た焼跡 株式会社文藝春秋 1983-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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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문서 트루먼에게 제시된 공식적인 이유는 "맥아더가 장기간 도쿄를 떠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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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뉴스 마츠이는 출판할 생각이었지만 출판되지 않았고, 유족의 의향에 따라 전면적인 공개는 되지 않았으며, 일부가 아사히 신문에서 기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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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문서 国家神道、神社神道ニ対スル政府ノ保証、支援、保全、監督並ニ弘布ノ廃止ニ関スル件
[292] 서적
[293] 서적 共同研究 日本占領軍その光と影 [下巻]
[294] 웹사이트 https://jp.ptl.org/c[...]
[295] 웹사이트 Our History - JAPAN ICU FOUNDATION http://jicuf.org/abo[...] 2011-11-09
[296] 서적
[297] 웹사이트 「ルーズベルトは狂気の男」 フーバー元大統領が批判 http://sankei.jp.msn[...] 産経新聞 2012-03-08
[298] 뉴스 「ルーズベルトは狂気の男」フーバー元大統領が回顧録で批判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18-03-31
[299] 서적 10,000 Famous Freemasons from K to Z
[300] 웹사이트 Famous Freemasons M-Z http://www.lodgestpa[...]
[301] 웹사이트 マッカーサー銅像「死守-撤去」保守と進歩が衝突 https://web.archive.[...] 中央日報 2018-11-22
[302] 웹사이트 「新植民地はうんざり」 マッカーサー銅像に火を付けた反米団体牧師=韓国 https://web.archive.[...] 中央日報 2018-11-22
[303] 웹사이트 cosmos troupe 宙組公演 ミュージカル・プレイ 黎明の風 https://archive.kage[...] 宝塚歌劇団 2023-01-31
[304] 서적 The Years of MacArthur, Volume 1, 1880–1941 Houghton Mifflin
[305] 문서 父アーサーも南北戦争で叙勲されており、2016年時点で親子揃って名誉勲章を受けたのはマッカーサー親子だけとなる
[306] 문서 側近2名の回想だが、研究が進んだ今日では、双方とも(回想録と同様に人物研究以外では)史料としての価値は低いとされる。
[307] 문서 ラッセル・ブラインズは、当時AP通信東京支局長で、マッカーサーに最も近いジャーナリストと言われた。
[308] 문서 그를 비롯한 친척이나 가족들 모두 다 장로교도였고, 존 F. 맥아더 목사는 현재 초교파 교회인 그레이스 커뮤니티 처치의 담임 목사이며 더글러스 맥아더의 촌수 및 항렬상 먼 친척이지만 존 F. 맥아더 목사 역시 장로교 신학인 칼뱅주의를 95% 이상 따르고 있다.
[309] 문서 미 육군 원수
[310] 웹사이트 용례 찾기 : 국립국어원 http://korean.go.kr/[...] 2016-10-03
[311] 문서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적이 많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끼거나 걱정하지는 않은 것 같다. 불필요하게 많은 친구보다는 마음을 터놓는 소수의 친구를 두는 편이 낫다고 말하고 다녔다.
[312] 서적 미군정 하의 한국정치현장 나남
[313] 문서 1949년 1월, 주일대표부 대사로 임명된다.
[314] 뉴스 卞駐比特使 卄七日出發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49-02-03
[315] 문서 외교여록
[316] 뉴스 秘錄 韓國外交<28> : 政府樹立 직후 ⑩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75-03-17
[317] 문서 올리버 저, 이승만에서
[318] 뉴스 〈맥아더傳記3部「勝利와 不幸」(1945~64)(下)〉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5-05-10
[319]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320] 서적 한국외교 어제와 오늘 다락원
[321] 간행물 6.25전쟁시 미 제24사단의 초기지연작전 재조명 http://www.army.mil.[...] 대한민국 육군 육군본부 2006
[322] 서적 The Korean decision, June 24-30, 1950 Free Press
[323] 서적 The Korean decision, June 24-30, 1950 Free Press
[324] 서적 한국전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일월서각
[325] 뉴스 중공 침범을 맥아더 장군 제소 동아일보 1950-11-17
[326] 서적 콜디스트 윈터
[327] 서적 콜디스트 윈터
[328] 인터뷰 김성전 국방정책 연구소장의 말 2011-04-01
[329] 문서 학사장교 전술교육교재 '전쟁사'중 일부
[330] 웹사이트 누리망 한겨레 신문 2011.3.1 인천상륙작전 피해 월미도 주민들 손해배상청구소송 http://www.hani.co.k[...] 2011-04-01
[331] 뉴스 사설 동아일보 1951-03-10
[332] 뉴스 사설 동아일보 1951-04-21
[333] 문서 한국 전쟁 당시 트루먼 대통령과의 불화로 인해 해임당했을 때, 의회 연설에서 한 말. 지금까지도 널리 알려져있는 명언으로 알려져있다.
[334] 웹사이트 맥아더 - Daum 백과사전 http://enc.daum.net/[...]
[335] 뉴스 외신 동아일보 1960-04-05
[336] 뉴스 통한 전까지 죽을 수 없다, 인사태는 한국전 실패로 동아일보 1962-11-01
[337] 문서 수여식은 1964년 9월 17일
[338] 서적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339] 웹사이트 보관된 사본 http://www.chosun.co[...] 2011-03-28
[340] 웹사이트 보관된 사본 http://www.chosun.co[...] 2011-03-28
[341] 웹사이트 보관된 사본 http://www.chosun.co[...] 2011-03-28
[342] 웹사이트 http://www.futurekor[...]
[343] 웹사이트 보관된 사본 http://www.jndn.com/[...] 2011-01-25
[344] 서적 臨政에서 印度까지 : 林炳稷外交回顧錄 女苑社
[345] 웹사이트 (그림 읽어주는 남자) 김상돈 ‘장미의 섬’ http://www.kyeong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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