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키 다카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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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사키 다카유키는 사무라이 가문 출신으로,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이다. 그는 도사번에서 부교, 오메쓰케 등의 직책을 역임했으며, 다이세이 호칸 운동에서 사카모토 료마를 지원했다. 보신 전쟁에서는 가이엔타이를 지휘했고, 메이지 유신 후 메이지 정부에서 산기, 사법성 차관을 지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전 세계를 여행했으며, 이후 추밀 고문관, 메이지 천황의 시종 등을 역임했다. 만년에는 진기원 창설에 기여하고, 천황 숭배를 장려하는 등 보수적인 정치적 견해를 보였다. 1884년 백작, 1909년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0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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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다카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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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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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사사키 다카유키 (佐々木 高行) |
출생일 | 1830년 11월 26일 |
출생지 | 가가와군, 고치시, 일본 |
사망일 | 1910년 3월 3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
직업 | 정치가, 각료 |
국적 | 일본 |
가계 | |
아버지 | 사사키 다카요리 |
배우자 | 사사키 사다코 |
자녀 | 후지이 지세코 가가미 시게코 사사키 다카미 사사키 리쓰코 사사키 다카시 |
친족 | 후지이 모리마 (사위) 가가미 미쓰카타 (사위) 사사키 유키타다 (손자) |
작위 및 칭호 | |
위계 | 종1위 |
훈장 |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
작위 | 후작 |
경력 | |
이전 직업 | 무사 (도사 번사) |
관직 | 제5대 공부경 |
임명일 | 1881년 |
퇴임일 | 1885년 |
2. 생애
사사키 다카유키는 고치현 고치시 아가와군(도사번) 출신의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교''(현의 행정관)와 ''오메쓰케''(감찰관)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며 야마우치 씨족을 섬겼다.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도쿠가와 막부의 권력을 일본 천황에게 돌려주는 ''다이세이호칸'' 운동을 지원했으며, 보신 전쟁 때는 도사 번의 사무라이 청년들로 구성된 준군사 조직 ''가이엔타이''를 지휘하여 나가사키 나가사키 부교의 사무실을 점령했다.[1]
메이지 유신 이후, 사사키는 메이지 정부에서 산기 (의원)와 사법성 타이후 (차관)를 역임했다.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세계를 여행했다. 귀국 후 세이칸론 논쟁으로 많은 동료들이 정부를 떠났지만, 그는 겐로인에 남아 새 정부에서 활동했다.[1]
사쓰마 전쟁 당시, 사사키는 고향 고치에 파견되어 반란이 시코쿠의 불만 세력에게 확산되지 않도록 했다. 이 공로로 메이지 천황의 신임을 얻어 추밀 고문관과 천황의 시종 및 측근이 되었다.[1] 1884년 화족 제도에서 백작 작위를 받았다.[1]
말년에 사사키는 보수적인 정치 견해를 보였다. 국가 신도 담당 정부 기구인 진기원 창설에 기여했고, 니시무라 시게키와 함께 일본 제국 교육 과정에서 애국심 교육과 천황 숭배를 장려했다.[3][4] 고쿠가쿠인 대학의 전신인 고가쿠인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1909년 후작으로 승격되었고, 1910년 사망 후 아오야마 묘지에 묻혔다.
2. 1. 막부 말기 (1830년 ~ 1868년)
사사키 다카유키는 1830년 고치현 고치시의 아가와군 (도사번)에서 사무라이 계급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8] 그는 ''부교''(현의 행정관)와 ''오메쓰케''(감찰관) 등 여러 주요 직책에서 야마우치 씨족을 섬겼다.[9]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도쿠가와 막부의 권력을 일본 천황에게 돌려주는 ''다이세이호칸'' 운동을 지원했다. 보신 전쟁 때는 도사 사무라이 청년들로 구성된 준군사 조직 ''가이엔타이''를 지휘하여 나가사키 나가사키 부교의 사무실을 점령했다.2. 2. 메이지 정부 출사 (1868년 ~ 1885년)
메이지 유신 이후, 사사키 다카유키는 메이지 정부에서 산기 (의원)와 사법성의 타이후 (차관)로 활동했다. 1871년에는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전 세계를 여행했다.[1] 귀국 후, 많은 동료들이 세이칸론 논쟁으로 정부를 떠났지만, 사사키는 겐로인에 남아 새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사쓰마 전쟁 동안, 사사키는 고향인 고치로 파견되어 반란이 시코쿠의 불만을 품은 전직 사무라이들에게 확산되지 않도록 했다. 이러한 공로로 메이지 천황의 깊은 신임을 얻어 추밀 고문관과 메이지 천황의 시종 및 측근 중 한 명이 되었다.[1]
1868년(메이지 원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사사키는 해원대를 이끌고 나가사키 봉행소를 접수했다. 나가사키 재판소 총독 사와 노부요시와 참모 이노우에 가오루의 추천으로 참모 조역에 임명되어, 공백 상태였던 나가사키 통치를 맡았다. 나가사키에서 잠복 기독교도 재판(우라가미 4번 붕괴)과 사카이 사건에 관여한 후, 도미오카현 지사, 아마쿠사현 지사를 역임하고 형법관으로 출사했다. 1869년(메이지 2년)에는 요코이 쇼난 암살 사건 조사를 담당하고, 도쿄 천도 시 메이지 천황을 맞이했으며, 보신 전쟁 전범 처분도 맡았다. 같은 해 형법관 부지사가 되었고, 이듬해인 1870년(메이지 3년) 12월 20일에는 신율강령 제정에 기여했다. 그 공적으로 참의가 되었고, 1871년(메이지 4년) 사법대보로 승진했다.
1871년 11월부터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이사장)으로서 구미 각국의 사법 제도를 조사하기 위해 각국을 순방했다. 사사키는 일본 고유의 제도와 정신을 유지하면서 서양 문명을 습득하는 점진적인 개혁을 중시했다. 1873년(메이지 6년)에 귀국하여 정부에 급진적인 개혁을 경계하는 점진론을 주장했다. 메이지 6년 정변으로 동향인 고토 쇼지로와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하야했음에도 정부에 남아, 1874년(메이지 7년) 7월부터 이듬해 1875년(메이지 8년) 4월까지 좌원 부의장을 역임했다. 오사카 회의에서 좌원이 폐지되면서 겐로인의관을 경험했다.
1884년, 화족 작위 제도의 백작 (''하쿠샤쿠'') 칭호를 받았다.[1]
2. 2. 1. 천황 친정 운동 (1878년 ~ 1881년)
1876년(메이지 9년) 10월과 이듬해 1877년(메이지 10년) 6월, 사사키 다카유키는 두 차례에 걸쳐 고향인 도사로 돌아갔다. 이는 불만을 품은 무사들과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 민권파의 선동을 막기 위한 정부의 명령이었다. 사사키는 나카지마 노부유키와 함께 무사들을 설득하는 데 힘썼고, 같은 해 10월 세이난 전쟁이 끝나고 도사의 상황이 안정된 것을 확인하고 도쿄로 돌아왔다.[10]1878년(메이지 11년), 사사키는 지방 의회 정비에 힘썼다. 또한 메이지 천황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종 모리타 나가후 및 이와쿠라 도모미와의 협의를 통해 3월 5일 1등 시종에 취임, 천황의 측근으로서 정신적 성장과 정치 의욕 향상을 촉진하며 "천황 친정 운동"에 크게 관여하게 된다.[10]
1877년 8월 설치된 시종 그룹에 합류한 사사키는, 정부 수반인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와 천황 보필에 대해 논의하고, 오쿠보를 궁내경으로 임명하는 구상을 추진했다. 그러나 1878년(메이지 11년) 5월 14일 오쿠보가 암살되면서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 정치적 위기를 느낀 사사키는 모토다, 요시이, 히지카타 히사모토, 요네다 등 다른 시종들과 함께 이틀 뒤인 5월 16일 천황에게 직접 친정을 건의했고, 천황도 이에 찬성했다. 5월 18일 오쿠보의 뒤를 이어 내무경이 된 이토 히로부미와 이와쿠라 도모미 등 정부에 대해, 천황의 각료 회의 참가와 시종의 방청 및 임석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천황의 각료 회의 참가는 인정했지만, 시종의 방청 및 임석은 궁중과 부중이 혼동되어 분리 원칙을 어지럽힐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사사키는 정부에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천황의 정치 관여도 억제되었다. 천황이 희망했던 사사키의 공부경 취임은 무산되었고, 5월 29일 시종들이 반대했던 이노우에 가오루가 이토의 뒤를 이어 공부경이 되었다. 또한 시종의 일원으로서 궁내경을 겸임하고 있던 도쿠다이지 사네쓰네가 정부에 의해 시종에서 해임되는 등, 시종의 운동은 억제되었다. 한편, 12월 24일 사사키가 해군성 용무 담당관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시종인 야마구치 마사사다도 해군 중좌가 된 것은, 참모본부를 창설하여 천황과의 직결을 꾀한 육군에 반발한 해군이, 천황의 신뢰가 두터운 두 사람을 통해 천황과의 직결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는 시종을 정치에 관여시켜 시종과의 타협을 꾀한 정부의 의도이기도 했다. 용무 담당관을 겸임한 사사키는 야마모토 곤노효에의 독일 유학 및 이지치 마사하루, 소에지마 다네오미의 궁내성 영입을 중개하는 등 다양한 인재를 등용했다.
1879년(메이지 12년) 3월, 시종들은 정부에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는 전년 8월부터 11월에 걸쳐 호쿠리쿠·도카이 지방을 순행하며 지방 민정에 적극적으로 접한 천황이 "근검"을 표방하며 피상적인 개화주의를 부정하고 재정 긴축을 이와쿠라 등에게 표명한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건의서 내용은 친정과 근검 실현, 정부의 원로원 간섭 배제를 담고 있었지만, 이 의견도 정책에 반영되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는 시종들을 분열시키기 위한 인사 이동을 단행, 요시이가 공부 소보로 공부성에 전출되었다. 이 이동은 단순한 분열뿐만 아니라, 근검을 중시하는 시종을 현장에 보내 실제 주장을 어떻게 활용할지 실지 교육과 생각의 보정을 겸한 정부 측의 책략이었다. 이노우에 공부경과 가와무라 스미요시 해군경이 그 감독을 맡았다. 결국 요시이는 업무에 쫓겨 시종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고, 근검의 이념은 억제되어 정부에 포섭되었다.
그러던 중 모토다가 "시종을 그만두고 대신 참의가 책임을 다한다"라는 경솔한 발언을 하자, 10월 13일 시종은 폐지되었다. 모토다는 궁중에 남았지만, 사사키는 1880년(메이지 13년) 초 정부로부터 북일본 출장을 명받았고, 같은 해 3월 도쿄로 돌아와 원로원 부의장에 취임하여 궁중에서 멀어졌다. 정부는 시종 폐지 대신 천황 보필을 약속했지만, 1879년 9월 이노우에가 참의에 임명되고, 1880년 2월 다나카 후지마로가 사법경에 취임한 것은 천황이 정부에 밀린 결과였다. 천황의 정치 관여 억제는 계속되었고, 친정 운동은 시종 폐지로 인해 좌절되었다.[11]
1880년 5월, 대장경 오쿠마 시게노부 주도의 오쿠마 재정을 둘러싼 분쟁으로 사사키 등은 다시 정쟁에 가담했다. 오쿠마는 외채 모집으로 재정을 보충하려 했지만, 정부는 찬반으로 분열되었다. 사사키는 모토다, 히지카타 히사모토 등 전 시종들과 함께 반대 진영에 가담하여 천황에게 건의했고, 정부의 반대 의견도 종합한 후 천황은 외채 모집을 중지시켰다. 이를 계기로 전 시종들은 재결집하여 정부의 인사와 재정에 관여하게 되었고, 비록 제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천황의 신임을 얻어 종종 자문에 응했다.
1881년(메이지 14년), 오쿠마가 제출한 급진적인 헌법 제정 및 국회 개설론이 이토 등의 반발을 사고, 7월에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이 일어나 여론이 악화되자, 정부가 동요하는 것을 기회로 삼았다. 사사키는 다니, 모토다 등과 함께 궁중과 원로원을 무대로 천황 친정 운동을 주도, 불하 반대와 오쿠마의 추방 및 원로원의 권한 강화와 참의 폐지를 주장하고, 천황을 옹립하여 다시 친정을 내세워 이토 등 정부 요인 배제에 나섰다. 이들은 "'''중정당'''"이라 불렸다. 9월에 결성된 중정당은 전 시종들과 다니, 도리오 고야타, 미우라 고로, 소가 등 비주류 군인, 가와다, 나카무라 등 원로원 의관, 미요시 다이조, 가네코 겐타로 등 소장 관료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10월, 정부 주도의 메이지 14년 정변으로 오쿠마가 추방되고, 불하 중지 및 정부가 내세운 국회 개설의 조칙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중정당은 분열되었다. 정부의 방침은 참의 존속과 각 성 경의 겸임이었고, 10월 21일 정변에 의한 인사 이동으로 사사키는 참의 겸 공부경에 취임했다. 참의 폐지를 비롯한 정치 개혁은 채택되지 않았고 천황 친정 운동도 소멸되었으며, 사사키는 공부성에서 새로운 정책을 추진해야 했다.[12]
2. 2. 2. 공부경 시대 (1881년 ~ 1885년)
사사키는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정부에서 산기 (의원)와 사법성의 타이후 (차관)로 활동했다.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전 세계를 여행했다.[1] 귀국 후 그는 많은 동료들이 세이칸론 논쟁으로 정부를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사사키는 새로운 정부의 적극적인 일원으로서 겐로인에 남기로 결정했다.사쓰마 전쟁 동안 사사키는 자신의 고향인 고치로 파견되어 반란이 시코쿠의 불만을 품은 전직 사무라이에게 확산되지 않도록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는 메이지 천황의 깊은 신임을 얻어 추밀 고문관과 메이지 천황의 시종 및 측근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1] 1884년, 그는 화족 작위 제도의 백작 (''하쿠샤쿠'') 칭호로 승진했다.
공부성은 메이지 유신 3년 발족 이후 원래 조슈 번 출신이 중심이 되었고, 공부경도 조슈 출신 정치인들이 교체되는 가운데, 사사키의 등용은 예외였다. 이는 근검절약 사상을 교정하려는 정부의 의향이 있었고, 사사키의 해군성 담당도 그 전 단계에 해당했다. 공부 소보였던 요시이는 전년 6월에 대보로 승진했지만, 메이지 14년(1881년)에 일본 철도 사장으로 전출이 내정되어 있었고 (다음 해 메이지 15년 (1882년) 1월에 실행되어 7월의 이노우에 마사루까지 공석), 사사키가 취임한 후에는 조슈파의 요시카와 아키마사가 공부 소보가 되어, 요시카와가 사사키를 보좌·억제하는 역할을 맡는 가운데 사사키는 근검절약과 서구화 개발 사업을 어떻게 조화시킬지 시행착오를 겪었다.
우선 오쿠마가 메이지 13년 시점에서 계획했던 공장·광산 등의 관영 사업 불하를 추진하여, 메이지 15년 12월과 메이지 16년 (1883년) 여름에 공부성의 방침을 정한 의견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내용은 "관영에서는 규칙에 얽매여 상업에 통달하지 못한 관료가 담당하기 때문에 이익이 적다", "사업을 정리·통합하고 불필요한 국은 각 성으로 이관, 공부성은 도로·항만 등 토목 사업에 집중한다"라고 적었다. 근검절약을 현실에 적용하는 경우를 모색하며, 공업 정책의 의의는 인정하면서 관영의 비효율성과 상인 유착을 비판하고, 대규모 토목 사업을 국가가 운영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제안은 정부에 채택되지 않았지만, 사사키는 개의치 않고 공부성의 개혁에 매진하며, 조직 개편과 공장·광산 불하에 열심이었다. 각의는 사업 포기에 난색을 표했지만, 사사키의 열의에 밀려 재정난도 있어 인가하여, 후카가와 시멘트 제조소, 시나가와 유리 제조소, 주쇼자카 광산, 나가사키 조선소, 아니 광산 등 많은 관영 모범 공장이 민간에 불하되었다. 또한, 한 번 인정받지 못했던 공부성의 개혁안을 메이지 17년 (1884년) 3월과 10월에 다시 제출했지만, 이번에는 결론을 얻지 못하고 정체되었다.
한편, 메이지 15년 7월에 요시카와가 전출한 것을 계기로 공부성의 실권을 장악하여, 이노우에 마사루가 공부 대보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8월에 서기관장 하야시 타다스가 러시아로 출장하게 되어 유수역의 야스카와 시게나리가 실무를 담당한 것은 유리하게 작용했다. 사사키는 야스카와와 조율하여 개혁안 작성에 착수하고, 철도 부설에 전력을 기울이던 이노우에를 지원하여, 메이지 15년 2월에 나카센도를 통과하는 구간 (나가하마역 - 오가키역 간, 도쿄역 - 다카사키역 간)의 건설을 상신한 이노우에의 제안을 채택하거나, 메이지 16년에 철도 공사 지속과 나카센도 노선 부설을 이노우에와 논의하는 한편, 사설 철도 설립을 최대한 저지하고, 이노우에의 요청에 따라 일본 철도의 도호쿠 본선 부설을 인가했다.
메이지 18년 (1885년) 5월에 각의에서 공부성 폐지가 결정되었고, 12월에 이토가 창시한 내각 제도로 업무 내용은 분산, 전신은 우편과 일체화되어 체신성이 설립, 철도는 내각 직속이 되어 공부성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는 대장성과 내무성의 세력 다툼에 휘말려 소규모여서 패배했기 때문으로 여겨지지만, 공부성이 토목 사업 전문 조직으로 거듭나려는 의도가 대장성·내무성의 반대에 부딪힌 것이 원인으로도 여겨진다. 어쨌든, 사사키는 공부성 폐지와 내각 제도 시작과 함께 각외로 물러나 같은 해에 궁중 고문관이 되어, 정계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궁중에 발을 옮겨갔다.
2. 3. 만년 (1885년 ~ 1910년)
만년의 사사키 다카유키는 보수적인 정치적 견해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국가 신도 종교를 담당하는 정부 기구인 진기원의 창설에 기여했다.[3] 또한 니시무라 시게키와 함께 애국심 교육과 천황 숭배를 일본 제국 교육의 공립학교 교육 과정에서 장려하는 데 기여했다.[4] 그는 고쿠가쿠인 대학의 전신인 고가쿠인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1909년, 그의 작위는 후작(''코샤쿠'')으로 승격되었다. 1910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묘는 도쿄 아오야마 묘지에 있다.
1888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추밀 고문관을 역임했으며, 이 기간 동안 명궁·상궁·주궁의 양육 담당 주임을 맡았다. 1890년에는 요시이와 센게 다카토미 등과 신기원 재흥 운동을 추진했지만 채택되지 않았고, 니시무라 시게키 등과 함께 경신·존왕·애국 사상의 보급에 힘썼다. 1896년에는 관계자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당시 경영 상태가 악화되었던 황전강구소의 제2대 소장에 취임하여 재건에 힘썼다. 메이지 천황의 신임은 변함없이 대화 상대로서 궁중에서 지냈지만, 더 이상 정치 관여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1909년 4월 29일에 후작으로 승서하여 귀족원 후작 의원에 취임했다.[14] 이듬해 1910년 3월 2일 훙거했다. 향년 79세. 적남인 다카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작위는 손자인 유키타다가 계승했고, 유키타다도 조부와 마찬가지로 황전강구소의 소장을 역임했다. 묘는 도쿄도미나토구아오야마 묘지에 있다.[15]
3. 가족
국구 시헤이의 장녀 사다코와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다.[24]
4. 평가
메이지 유신 이후 사사키는 메이지 정부에서 산기 (의원)와 사법성의 타이후 (차관)를 지냈다.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전 세계를 여행했다.[1] 귀국 후 많은 동료들이 세이칸론 논쟁으로 정부를 떠났지만, 사사키는 겐로인에 남아 새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사쓰마 전쟁 동안 사사키는 고향 고치로 파견되어 반란이 시코쿠의 불만을 품은 전직 사무라이에게 확산되지 않도록 했다. 이러한 공로로 메이지 천황의 깊은 신임을 얻어 추밀 고문관과 메이지 천황의 시종 및 측근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1] 1884년, 화족 작위 제도에서 백작 (''하쿠샤쿠'') 칭호를 받았다.
나중에 사사키는 황태자 하루(훗날의 다이쇼 천황)와 메이지 천황의 딸인 마사코 공주와 후사코 공주를 교육하는 가정교사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2]
만년의 사사키는 보수적인 정치 견해로 알려졌다. 국가 신도 종교를 담당하는 정부 기구인 진기원 창설에 기여했다.[3] 또한 니시무라 시게키와 함께 일본 제국 교육의 공립학교 교육 과정에서 애국심 교육과 천황 숭배를 장려하는 데 기여했다.[4] 고가쿠인(후에 고쿠가쿠인 대학)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1909년, 후작 (''코샤쿠'')으로 작위가 승격되었다.
5. 관련 작품
- あ! 陵馬|아! 료마일본어 (원작 타케다 테츠야, 작화 코야마 유) - 사사키 다카유키는 역사에서는 하사(下士)에게 관대했지만, 만화에서는 하사를 얕보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1]
참조
[1]
서적
Emperor Of Japan: Meiji And His World, 1852-1912
2002
[2]
서적
[3]
서적
[4]
서적
Japan’s Modern Myths: Ideology in the late Meiji Period
1985
[5]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佐々木高行」
https://kotobank.jp/[...]
[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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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
https://kotobank.jp/[...]
小学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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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殉難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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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日新聞社、霞会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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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日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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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貴族院要覧(丙)
貴族院事務局
19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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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日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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叙任及辞令
1887-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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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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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野文庫 - 旧・勲一等旭日大綬章受章者一覧(戦前の部)
https://web.archive.[...]
[19]
아시아역사자료센터
参議大山巌福岡孝弟佐々木高行元老院議長佐野常民特旨ヲ以テ勲一等ニ叙ス・附岩倉右大臣大山福岡佐々木三参議親授式執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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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보
叙任及辞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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叙任及辞令
1889-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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叙任及辞令
1907-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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叙任及辞令
1909-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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霞会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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