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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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우휘는 일제강점기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소설가, 언론인, 군인, 철학자이다. 경성사범학교 졸업 후 조선일보 기자로 언론 활동을 시작하여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후 서울신문, 한국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논설위원, 편집국장, 주필 등을 역임했다. 1955년 소설 '귀신'으로 등단하여 '불꽃'으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김대중 납치 사건 보도와 박정희 정권의 감사원장직 제의를 거절하는 등 언론인으로서 소신을 지켰다. 1986년 6.25 특집극 녹화 중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행위적 휴머니즘을 특징으로 하며,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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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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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본명 | 선우휘 |
출생일 | 1922년 1월 3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
사망일 | 1986년 6월 12일 |
사망 장소 | 대한민국 부산직할시 |
직업 | 소설가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경성사범학교 |
활동 기간 | 1955년 또는 1957년 - 1986년 |
장르 | 소설 |
자녀 | 선우정 |
친척 | 선우련, 선우기성 |
데뷔 작품 | 『귀신』 |
호 | 목산(牧山) |
아명 | 선우휘(鮮于 煇) |
한국어 이름 | |
한글 | 선우휘 |
한자 | 鮮于輝 |
로마자 표기 | Seonu Hwi |
군 복무 정보 | |
군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48년 ~ 1959년 |
계급 | 대한민국 육군 대령 |
근무 | 육군본부 |
지휘 | 육군본부 정훈차감, 육군본부 정훈참모부 정훈과 과장 |
참전 | 한국 전쟁 |
주요 경력 | |
직책 | 대한민국 국토통일원 고문 |
임기 | 1975년 2월 8일 ~ 1978년 4월 30일 |
정당 | 무소속 |
기타 경력 | 소설가 작가 군인 시인 언론인 문학평론가 시사평론가 한독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1962년) 신민당 특임촉탁위원(1969년) 국민당 최고위원 겸 고문(1981년) 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 |
수상 | |
수상 내역 | 동인문학상 |
가족 관계 | |
자녀 | 슬하 1남 3녀 (첫째딸 선우숙희, 둘째딸 선우숙영, 셋째딸 선우숙임, 외아들 선우정, 손자 선우윤) |
부모 | 선우억(부) |
형제 | 누나 4명, 남동생 2명, 누이동생 2명, 선우연(둘째 남동생) |
친인척 | 이세화(첫째사위), 이민환(둘째사위), 선우영(친조카딸), 선우재덕(당질) |
2. 생애
선우휘는 1922년 1월 3일 평안북도 정주시에서 태어나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1946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언론 활동을 시작했으며, 1949년 여순사건 이후 대한민국 육군에 정훈장교로 입대하여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1959년 대령으로 예편한 후 서울신문, 한국일보를 거쳐 1961년 조선일보에 다시 입사하여 논설위원, 편집국장, 주필, 논설고문 등을 역임했다.
1955년 단편소설 '귀신'으로 문단에 등단했으며, 1957년 '불꽃'으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1975년 국토통일원 고문, 1983년 한국 예술원 회원, 1985년 한국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을 중앙정보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대서특필로 보도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주필이었던 선우휘는 "주필로서의 판단에 따라 책임지고 행동하겠다. 어떤 위협에도 누구의 간섭에도 굽히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사설을 작성, 게재했다.[9]
1986년 6월 12일 한국방송공사(KBS) 6·25 특집극 〈살아있는 전장수첩〉 녹화촬영 중 과로와 고혈압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12]
연도 | 사건 |
---|---|
1922년 | 평안북도 정주시 출생 |
1943년 | 경성사범학교 본과 졸업 |
1946년 |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
1947년 | 인천중학교 교사 |
1948년 | 육군 정훈장교로 입대 |
1950년 | 6.25 전쟁 참전 |
1955년 | 단편소설 귀신으로 문단 등단 |
1957년 | 불꽃으로 동인문학상 수상 |
1958년 | 육군 대령 예편, 서울신문 논설위원 |
1959년 | 한국일보 논설위원 |
1961년 | 조선일보 입사 |
1966년 | 일본 도쿄 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정책과정 수료 |
1970년 | 조선일보 기획심의실장 |
1971년 | 국제신문편집자협회(IPI) 회원, 조선일보 이사, 주필 |
1975년 | 국토통일원 고문 |
1980년 | 조선일보 논설고문 |
1983년 | 한국 예술원 소설부문 회원 |
1985년 | 한국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 |
1986년 | 뇌출혈로 사망,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
2. 1. 초기 생애와 월남
1922년 1월 3일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남산동 325번지에서 아버지 선우억의 아들로 태어났다.[9] 위로 누나 넷이 있었으나 둘은 어려서 죽었고, 그가 태어난 뒤 남동생 둘과 여동생 둘이 더 태어났다. 아버지 선우억은 자작농으로 자수성가했는데, 인색할 정도로 검소했으며 자기중심적이고 보신주의적인 태도를 가졌으며, 가족에 대한 사랑과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하는 가치관을 가졌다. 선우휘는 아버지 선우억의 영향을 받았다.[9]1944년 9월 경성사범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고향 정주 조일소학교 교사로 잠시 있다가 구성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구성국민학교 교사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소련군 진주에 환멸을 느껴[9] 1946년 2월 교사직을 사퇴하고 월남했다. 1946년 고향 어른 계초 방응모를 찾아가 조선일보에 입사했다.[9] 그는 민족 지도자들을 가까이 취재하면서도 어떤 정당이나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았다.[9] 1946년 말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다가 입사 1년이 안 돼 미국 유학을 꿈꿨으나 실현하지 못하고 조병화 시인의 소개로 1947년 다시 인천중학교 교사가 되었다.[9]
2. 2. 군 복무와 6.25 전쟁
1946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언론 활동을 시작하였다. 인천중학교 교사를 거쳐 1949년 여순사건 이후 대한민국 육군에 정훈장교로 입대하여, 1959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특수부대원을 자원, 전진군단 유격대장으로 활동하였다.[9] 1948년 육군에 정훈장교로 입대했고 1949년 4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입대 2개월 만에 중위로 특진, 1950년 육군 대위가 되어 정훈국에 보직, 국방신문의 편집을 맡았다. 그해 6월 6·25 전쟁이 터지자 육군본부 정훈국 평양분실에 보직되었다. 1951년 특수부대원 선발에 자원, 전방군단 유격대장으로 참전했다.[9] 6.25 전쟁이 끝난 뒤 줄곧 정훈장교로 활동하다가 1953년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1955년에는 임기제 대령으로 진급, 육군본부 교육총감부 정훈참모를 거쳐 육군본부 정훈감실 정훈차감에 이르렀고, 1959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2. 3. 언론 활동
1946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하면서 언론 활동을 시작하였다.[9] 1958년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거쳐, 1959년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되었다. 1961년 조선일보에 다시 입사하여 1986년 정년 퇴임하기까지 논설위원, 편집국장, 주필, 논설고문 등으로 활동했다.1962년과 1965년 조선일보 논설위원, 1964년과 1967년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1970년 조선일보 기획심의실장을 거쳐 1971년부터 1980년까지 조선일보 주필로 활동했다. 현직 신문 논설위원, 주필로 재직하며 구속되거나 여러 번 중앙정보부, 검찰 등에 소환되기도 하였다. 1971년 국제신문편집자협회(IPI) 회원으로 위촉되었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을 중앙정보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대서특필로 보도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주필이었던 선우휘는 "주필로서의 판단에 따라 책임지고 행동하겠다. 어떤 위협에도 누구의 간섭에도 굽히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사설을 작성, 게재했다.[9]
1980년 조선일보 논설고문으로 옮겼으며, 1983년 한국예술원 소설부문 회원이 되었다. 1985년 3월 30일 한국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2. 3. 1. 언론 활동 초기와 5.16 군사 정변
1946년 고향 어른 계초 방응모를 찾아가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그는 민족 지도자들을 가까이 취재하면서도 어떤 정당·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았다.[9] 1946년 말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다가 입사 1년이 안 돼 미국 유학을 꿈꿨으나 실현하지 못하고 조병화 시인의 소개로 1947년 다시 인천중학교 교사가 되었다.[9]《한국일보》에 입사하여 다시 언론에 복귀하고, 1959년 다시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되었다. 1960년 6월 김팔봉, 김광주 등과 함께 한국소설가협회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였다. 1961년 4월에는 경향신문의 어린이 작품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또한 각종 안보 강연과 반공 대회의 강사, 연사로도 초빙되었다.
1961년 5월 15일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입사한다.[9] 이후 1986년 조선일보를 정년 퇴사하기까지 『조선일보』 논설위원, 편집국장, 주필, 논설고문, 주필 등으로 꾸준히 활동하였다. 그해 5월 16일 그는 출근길에 쿠데타 소식을 듣고 육본으로 가서 “어떤 정신 나간 놈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나”라고 일갈했고, 그 일로 체포령이 떨어져 보름쯤 숨어 지내다 신문사에 복귀해 1년간 무기명으로만 글을 쓸 수 있었다.[9] 이때 그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육군 본부로 뛰어들어갔지만 박정희의 배려로 체포는 모면하였다.
2. 3. 2. 조선일보 재직 시절
1946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하면서 언론 활동을 시작하였다.[9] 1946년말 조선일보에 입사,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며 민족지도자들을 가까이 취재하면서도 어떤 정당·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았다.[9] 입사 1년이 안 돼 미국 유학을 꿈꿨으나 실현하지 못했다.[9]1961년 5월 15일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입사한다.[9] 이후 1986년 조선일보를 정년 퇴사하기까지 논설위원, 편집국장, 주필, 논설고문, 주필 등으로 꾸준히 활동하였다. 1961년 5월 16일 출근길에 쿠데타 소식을 듣고 육본으로 가서 “어떤 정신 나간 놈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나”라고 일갈했고, 그 일로 체포령이 떨어져 보름쯤 숨어 지내다 신문사에 복귀해 1년간 무기명으로만 글을 쓸 수 있었다.[9] 이때 그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육군 본부로 뛰어들어갔지만 박정희의 배려로 체포는 모면하였다.
1962년 《조선일보》 논설위원, 편집부장을 거쳐 1964년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되었다. 1963년 발행인이 된 방우영 상무가 편집국장 직을 제의했을 때 “방 상무가 정도를 벗어나면 언제든지 그만두겠다”고 조건을 달았다.[9] 1964년 8월 공화당이 언론 통제를 노린 언론윤리위원회법을 국회 통과시킨 후 각 언론사에 윤리위 소집에 대한 입장표명을 요구했을 때 “신문사는 문을 열고 죽는 수가 있고, 문을 닫고 사는 수가 있다”며 방일영 당시 대표에게 호소해 반대 의사를 밝히도록 했다.[9]
1964년 11월 언론위원회법을 둘러싸고 빚어진 언론파동이 일어나자, 정부의 언론법 제정에 반발했다가 반공법 및 임시특례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한달 만에 풀려났다. 그는 당시 현직 언론사 편집국장으로는 처음으로 구속되었다 한다. 12월 중순 불기소로 풀려났다. 1965년 다시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
1967년 다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하였다. 1970년 조선일보 기획심의실장을 거쳐 1971년 조선일보사의 이사가 되어 1986년까지 조선일보사의 이사로 경영에 참여했다. 같은 해 동신문 주필이 되었고, IPI 회원으로도 위촉되었다.
1973년 9월 7일자 조선일보는 중앙정보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납치 사건을 대서특필로 보도했다. 9월 7일 새벽, 편집국에 선우휘 주필이 나타나 "주필로서의 판단에 따라 책임지고 행동하겠다. 어떤 위협에도 누구의 간섭에도 굽히지 않겠다.[9]"라고 비장한 어조로 야근자들에 거사(擧事) 계획을 알린 뒤 윤전기를 세우고 자신이 써내려간 사설을 끼워 놓을 것을 지시했다.[9] 사설의 제목은 '당국에 바라는 우리의 충정― 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였다.
“요즘 우리의 심정은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알 수가 없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가 없는 상태에서 몹시 우울하고 답답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김대중 사건이라고 하겠는데… 그러나 무엇보다 더 유의해야 할 것은 설혹 우방과 얽힌 문제가 결정적인 불행을 초래하지 않는다손 치더라고 이번 사건이 불투명하게 처리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이다….[9]”
9월 7일 당일 중앙정보부가 총동원돼 회수작업을 벌였지만, 대부분 시내판이 독자들 손에 쥐어진 뒤였다. 주필은 사직서와 사과의 글을 방우영 당시 조선일보 사장 책상 위에 올려 놓은 채 안양 지국장 집으로 피신했다.[9]
1971년부터 1980년까지 주필을 겸하였고, 1971년 IPI(국제신문편집인협회) 회원이 되었다.
1978년 10월 22일자 조선일보에는 ‘잘못된 국사 원상대로 찾아야 한다’는 제목으로 조선일보 주필인 선우휘와 이유립이 대담하는 기사가 실렸다.[11]
2. 3. 3. 김대중 납치 사건 보도
1973년 8월 8일 일본에 체류 중이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실종됐고, 닷새 뒤 서울 동교동 자택에 모습을 나타낸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9]9월 7일자 조선일보는 중앙정보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납치사건을 대서특필로 보도했다. 이날 새벽, 편집국에 나타난 선우휘 주필은 "주필로서의 판단에 따라 책임지고 행동하겠다. 어떤 위협에도 누구의 간섭에도 굽히지 않겠다"며 비장한 어조로 야근자들에게 거사(擧事) 계획을 알렸다.[9] 그는 윤전기를 세우고 자신이 쓴 사설을 끼워 넣을 것을 지시했다.[9] 사설의 제목은 '당국에 바라는 우리의 충정― 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였다.[9]
사설은 “요즘 우리의 심정은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알 수가 없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가 없는 상태에서 몹시 우울하고 답답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김대중 사건이라고 하겠는데… 그러나 무엇보다 더 유의해야 할 것은 설혹 우방과 얽힌 문제가 결정적인 불행을 초래하지 않는다손 치더라고 이번 사건이 불투명하게 처리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이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9]
9월 7일 당일 중앙정보부가 총동원돼 회수작업을 벌였지만, 대부분 시내판이 독자들 손에 쥐어진 뒤였다. 선우휘는 사직서와 사과의 글을 방우영 당시 조선일보 사장 책상 위에 올려 놓은 채 안양 지국장 집으로 피신했다.[9]
2. 3. 4. 감사원장직 거절
1968년 11월 문학인 대회에서 사회를 맡았던 선우휘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지만, 꼿꼿한 자세로 그를 대했다. 1973년 9월 17일 중앙정보부와 신문사 간 열흘 간의 실랑이 끝에 사태가 마무리된 후, 박 대통령은 선우휘를 높이 평가하여 중용 의사를 밝혔다.[9] 박정희는 감사원장 직을 제의하며 "정치가 안정되면 (대통령 직을) 물러날 겁니다. 들어와서 좀 도와 주십시오."라고 했다.그러나 선우휘는 "들에 핀 꽃이 아름답다 해서 집안에 옮겨 심으면 아름다울 리 있겠습니까?"라며 일본의 시를 인용하며 사양했다.[9] 이후에도 박정희는 국회의원과 내각 장관직을 제의했으나, 선우휘는 신병과 능력 부족을 이유로 모두 사양하였다.
2. 3. 5. 제5공화국 시절
1979년 10월 박정희 암살 사건|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자]] 그는 혼란을 틈타 북한의 도발을 우려하였다. 신민당에서 지지를 요청했지만 그는 이 요청을 거절했다. 그 뒤 최규하 정부와 제5공화국에서도 계속 국토통일원 고문직을 유지했다.[11]1980년 1월 30일 일본 산케이신문과의 회견에서 12.12 사태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를 지지하면서 언론통제를 정당화하는데 참여하는 등, 신군부의 집권을 위해 자발적으로 애쓴 언론인이라는 의혹이 있다. 그 뒤 전두환 정권에서 특별히 국정자문회의 위원직을 그에게 제의하였으나 그는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1980년부터 6년간 조선일보 논설고문으로 있었고, 1983년 2월 한국예술원 소설부문 회원을 거쳐 1985년 3월 30일 한국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학생운동계 중에서는 한국을 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규정하고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부류가 나타나자 그는 윤치영, 박용만 등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정당성과 해방 당시 남로당 빨치산 등의 학살을 언급하며 학생 운동권들과 논쟁을 벌였다.
2. 4. 사망
1986년 6월 12일 한국방송공사(KBS) 6·25 특집극 〈살아있는 전장수첩〉 녹화촬영 중[12] 그날 오전 9시경 과로와 고혈압에 의한 뇌일혈로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의 한 숙소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64세였다. 평소 지병인 고혈압을 앓았으나 만년에도 칼럼, 기고, 논설, 강연 활동을 하였다. 1986년 2월 28일 조선일보사를 정년퇴임하고, 그해 6월 자신의 소설을 드라마로 만드는 제작 과정에 참여하여 부산직할시 초량동으로 내려갔다.사망 후 서울대학교 대학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었으며, 1986년 6월 전두환 대통령은 영결식장에 이원홍 문교부장관과 각료들을 보내고, 허문도 정무제1수석비서관과 청와대 비서관들을 특별히 파견하여 조문하였다. 경기도 용인군의 용인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가 천안의 평안 공원묘지로 이장되었다.
1986년 6월 13일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1987년 조선일보사에서 『선우휘 문학전집』 5권을 펴냈다.
3. 사상과 신념
선우휘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인간의 개성을 억압하는 비인간적인 사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사유재산 소유에서부터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과 사고를 억압한다는 점을 비판했다. 소련 군정 치하의 북한에서 월남한 그는 이러한 신념을 더욱 확신하였다.[9]
방응모를 찾아가 조선일보에 입사한 그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환상을 가져선 안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신문기자가 됐다”고 밝힌 바 있다.[9] 북한의 실정을 체험하고 월남한 그는 좌익이 세를 넓혀가는 남한 사회에 실망하면서도, ‘북한 실정을 체험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좌익이 되었겠구나’ 생각하며 평생 반공주의를 견지했다고 한다.[9] 그는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학생운동권과 여러 차례 논쟁을 벌였다.
3. 1.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선우휘는 1946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언론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9년 여순사건 이후 대한민국 육군에 정훈장교로 입대하여 1959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특수부대원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1958년 서울신문 논설위원으로 언론에 복귀, 이후 조선일보에서 논설위원, 편집국장, 주필, 논설고문 등으로 활동했다. 1955년 단편소설 '귀신'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하였고, 1957년에 발표한 '불꽃'으로 제2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85년 한국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86년 6월 12일 사망하였다.광복 이후 소련군 진주에 환멸을 느껴[9] 1946년 2월 교사직을 사퇴하고 월남했다.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민족지도자들을 취재하면서도 어떤 정당·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았다.[9] 1947년 인천중학교 교사가 되었으나,[9] 여순사건을 계기로 1948년 육군에 정훈장교로 입대했다.
첫 소설인 「불꽃」에서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광복과 6·25를 거쳐 50년대 후반까지의 30년간을 고현이라는 한 청년 지식인의 삶을 통하여 조망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과 좌익 사회주의 사상을 모두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이념이며, 이런 이념들이 광기(狂氣)의 역사를 만들어낸 가장 큰 원인이라고 파악하였다.
선우휘는 이승만 정권이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한 점을 높이 평가했지만 이범석, 이기붕 등 자유당원들의 부정과 전횡에는 상당히 부정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1961년 5월 16일 그는 출근길에 쿠데타 소식을 듣고 육본으로 가서 “어떤 정신 나간 놈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나”라고 일갈했고, 그 일로 체포령이 떨어져 보름쯤 숨어 지내다 신문사에 복귀해 1년간 무기명으로만 글을 쓸 수 있었다.[9] 이때 그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육군 본부로 뛰어들어갔지만 박정희의 배려로 체포는 모면하였다.
현직 신문 논설위원, 주필로 구속되거나 여러 번 중앙정보부, 검찰 등에 소환되기도 하였다. 그는 이미 학생운동계열이 민족해방, 민중해방 계열로 나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두 진영 모두에 비관적이었다. 민족해방 계열은 6.25 전쟁의 원흉이며 김일성 독재정권인 북한을 대안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그르다고 생각했고, 민중민주 계열은 지나친 계급투쟁론에 몰입되어 있어서 사회적 융화가 어려운 대상으로 봤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자 그는 혼란을 틈타 북한의 도발을 우려하였다. 신민당에서 지지를 요청했지만 그는 이 요청을 거절한다. 그 뒤 최규하 정부와 5공에서도 계속 국토통일원 고문직을 유지했다.
1980년 1월 30일 일본 산케이신문과의 회견에서 12.12 사태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를 지지하면서 언론통제를 정당화하는데 참여하는 등, 신군부의 집권을 위해 자발적으로 애쓴 언론인이라는 의혹이 있다. 학생운동계 중에서는 한국을 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규정하고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부류가 나타나자 그는 윤치영, 박용만 등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정당성과 해방 당시 남로당 빨치산 등의 학살을 언급하며 학생 운동권들과 논쟁을 벌였다.
1980년 이후 반미주의적인 가치관이 확산되면서 학생운동권 사이에서 민족해방론이 대두되었다. 그에 의하면 대한민국 정부는 남북협상을 통해 태어날 정부를 좌절시키고 미국이 수립한 꼭두각시라는 주장이었다. 또한 6.25 전쟁을 미국이 고의로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선우휘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었고, 6.25 전쟁은 북한의 침략임이라며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강력한 반공주의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유지하였고 이로 인하여 늘 찬반의 격렬한 논쟁과 극단적인 찬사와 극단적인 비판이 공존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인간의 개성을 억압하는 비인간적인 사상이라고 생각했다.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사유재산 소유에서부터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과 사고를 억압한다는 것이다. 소련 군정 치하의 북한에서 월남한 그는 이러한 신념을 더욱 확신하였다.
소련군 진주에 환멸을 느껴 월남했고, 고향 어른 계초 방응모를 찾아가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그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환상을 가져선 안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신문기자가 됐다”고 밝힌 바 있다.[9] 좌익이 세를 넓혀가는 남한 사회에 실망하면서도, ‘북한 실정을 체험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좌익이 되었겠구나’ 생각하며 평생 반공을 견지했다고 한다.[9] 그는 이를 근거로 학생운동권과 논쟁을 여러 차례 벌였다.
3. 2. 학생운동 비판
그는 이미 학생운동계열이 민족해방 (NL), 민중민주 (PD) 계열로 나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두 진영 모두에 비관적이었다.[9] 민족해방 계열은 6.25 전쟁의 원흉이며 김일성 독재정권인 북한을 대안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그르다고 생각했고, 민중민주 계열은 지나친 계급투쟁론에 몰입되어 있어서 사회적 융화가 어려운 대상으로 봤다.[9]1980년 이후 반미주의적인 가치관이 확산되면서 학생운동권 사이에서 민족해방론이 대두되었다. 그에 의하면 대한민국 정부는 남북협상을 통해 태어날 정부를 좌절시키고 미국이 수립한 꼭두각시라는 주장이었다. 또한 6.25 전쟁을 미국이 고의로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선우휘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었고, 6.25 전쟁은 북한의 침략이라며 반론을 제기했다.
학생운동계 중에서는 한국을 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규정하고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부류가 나타나자 그는 윤치영, 박용만 등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정당성과 해방 당시 남로당 빨치산 등의 학살을 언급하며 학생 운동권들과 논쟁을 벌였다.
3. 3. 언론관
1961년 5월 15일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입사했다.[9] 1962년 《조선일보》 논설위원, 편집부장을 거쳐 1964년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되었다. 1963년 발행인이 된 방우영 상무가 편집국장 직을 제의했을 때 “방 상무가 정도를 벗어나면 언제든지 그만두겠다”고 조건을 달았다.[9] 1964년 8월 공화당이 언론 통제를 노린 언론윤리위원회법을 국회 통과시킨 후 각 언론사에 윤리위 소집에 대한 입장표명을 요구했을 때 “신문사는 문을 열고 죽는 수가 있고, 문을 닫고 사는 수가 있다”며 방일영 당시 대표에게 호소해 반대 의사를 밝히도록 했다.[9]1964년 11월 언론위원회법을 둘러싸고 빚어진 언론파동이 일어나자, 정부의 언론법 제정에 반발했다가 반공법 및 임시특례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한달 만에 풀려났다. 당시 현직 언론사 편집국장으로는 처음으로 구속된 것이다. 12월 중순 불기소로 풀려났다.
1965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그해 8월에는 김수영, 이어령 등과 함께 동인계간지 한국문학지 발간에 참여했다. 1966년 일본 도쿄 대학 행정대학원 행정정책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하였고, 1967년 다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하였다.
박정희 정권을 군사 독재라고 비난했다가 소환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운동계열의 선우휘에 대한 평가는 박했는데, 학생운동에 상당히 부정적이었으며 그는 학생운동이 공산주의와 북한을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적이었다. 또한 학생운동가들의 운동이 야당 정치인들의 집권 수단, 도구로 이용된다는 점과 운동권 내의 폭력성과 조직성, 전체주의적 성향에도 심한 반감과 불쾌감을 드러냈다. 1970년 조선일보 기획심의실장을 거쳐 71년 조선일보사의 이사가 되어 1986년까지 조선일보사의 이사로 경영에 참여했다. 같은 해 동신문 주필이 되었다.
선우 주필은 쉬운 글이 좋은 글이며, 기자의 생명은 문장에 있다는 신념을 지녔다. ‘문장은 쓰는 사람 고유의 것’이라고 믿어 남의 글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9] 일부러 어려운 문체를 쓰면서 자신의 유식함을 자랑하는 지식인들을 경멸하였다.
진보적인 논설위원들은, 투철한 반공론자이면서도 “내가 뭘 아나? 그건 당신이 전문가 아니야”라며 자율권을 보장해 준 선우 주필이 있었기에 자기 목소리를 내고 지면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었다.[9] 사회주의 사상에 호감을 느끼는 언론인들을 못마땅해 하면서도, 언론은 가치중립성을 유지해야 된다고 판단하여 그들에게도 발언권을 주었다. 그러나 친북(親北) 사상은 반역으로 간주하여 허용하지 않았다.
4. 작품 세계
1955년 단편소설 '귀신'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고, 1957년에 발표한 '불꽃'은 '문학예술' 신인특선에 당선되어 제2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5] 낭만주의, 감성주의적 작품이 유행하던 사조와는 달리 현실적인 문체와 소재를 주로 활용했다. 감성, 낭만주의적인 작가,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점차 초현실주의적인 사상가로 변모해갔다.
한국문학번역원은 선우휘의 작품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절망적인 상황에서 적극적인 의지를 표현하는 행위적 휴머니즘이 선우휘 문학 세계의 특징이다. 그가 처음으로 인정을 받은 작품인 「불꽃」은 도피적인 사고방식을 극복하고 저항 정신을 받아들이는 한 남자를 묘사한다. 「불꽃」뿐만 아니라 소설 『깃발 없는 기수』와 『추적의 피날레』에서도 드러나듯이, 행동하려는 의지는 인류에 대한 존중과 비인간화에 대한 반대 욕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선우휘에게 지식인의 책임은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이념 갈등과 사회적 폐해로 인한 비인간화에 저항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러한 휴머니즘적 접근 방식은 『싸릿골의 신화』와 같은 작품에서 지나치게 강조되어 작품에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의 세계와 같은 느낌을 준다. 1965년 이후 선우휘는 기성 체제에 대해 더욱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십자가 없는 골고다」, 「열 세 살의 소년」 그리고 「웃기는 사람들의 웃기는 이야기」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집에 대한 향수를,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조선 주간지에 연재된 『노다지』는 가족 연대기를 다루고 있다.[5]
5. 평가
선우휘는 1946년 조선일보 기자로 언론 활동을 시작하여, 한국 전쟁 참전 후 1958년 언론에 복귀, 1986년 정년 퇴임까지 조선일보 논설위원, 편집국장, 주필 등을 역임했다. 현직 신문 논설위원, 주필로 있으면서 구속되거나 여러 번 중앙정보부, 검찰 등에 소환되기도 하였다.
1955년 단편소설 '귀신'으로 등단, 1957년 '불꽃'으로 제2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낭만주의적 사조와 달리 현실적인 문체와 소재를 주로 활용했으며, 감성적 작가에서 점차 초현실주의적 사상가로 변모해갔다.[5]
5. 1. 긍정적 평가
선우휘의 문학 세계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의지를 표현하는 행위적 휴머니즘을 특징으로 한다. 처음으로 인정을 받은 작품인 불꽃은 도피적인 사고방식을 극복하고 저항 정신을 받아들이는 한 남자를 묘사한다. 깃발 없는 기수, 추적의 피날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행동하려는 의지는 인류에 대한 존중과 비인간화에 대한 반대 욕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선우휘에게 지식인의 책임은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이념 갈등과 사회적 폐해로 인한 비인간화에 저항하는 것을 포함한다.[5]그러나 싸릿골의 신화와 같은 작품에서는 이러한 휴머니즘적 접근 방식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작품에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의 세계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1965년 이후 선우휘는 기성 체제에 대해 더욱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십자가 없는 골고다, 열 세 살의 소년, 웃기는 사람들의 웃기는 이야기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집에 대한 향수를,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조선 주간지에 연재된 노다지는 가족 연대기를 다루고 있다.[5]
5. 2. 부정적 평가
선우휘의 문학 세계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의지를 표현하는 행위적 휴머니즘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휴머니즘적 접근 방식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의 세계와 같은 느낌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1965년 이후 선우휘는 기성 체제에 대해 더욱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5]5. 3. 종합적 평가
선우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의지를 표현하는 행위적 휴머니즘을 자신의 문학 세계의 특징으로 삼았다. 초기작 불꽃은 도피적인 사고방식을 극복하고 저항 정신을 받아들이는 한 남자를 묘사하여 주목받았다. 깃발 없는 기수, 추적의 피날레 등에서도 행동하려는 의지가 나타나는데, 이는 인류에 대한 존중과 비인간화에 대한 반대 욕구에 기반한다. 그는 지식인의 책임을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이념 갈등과 사회적 폐해로 인한 비인간화에 저항하는 것으로 보았다.[5]그러나 싸릿골의 신화와 같은 작품에서는 이러한 휴머니즘적 접근 방식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의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1965년 이후에는 기성 체제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십자가 없는 골고다, 열 세 살의 소년, 웃기는 사람들의 웃기는 이야기 등에서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조선 주간지에 연재된 노다지는 가족 연대기를 다루고 있다.[5]
언론인으로서는 조선일보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논설위원, 편집국장, 주필 등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특수부대원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낭만주의, 감성주의적 작품 경향과는 달리 현실적인 문체와 소재를 주로 활용했으며, 점차 초현실주의적인 사상가로 변모해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6. 작품 목록
선우휘는 소설 외에도 평론, 전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을 남겼다.
출판 연도 | 종류 | 작품 제목 |
---|---|---|
1983 | 기타 | 『일본 이해의 길』 |
1986 | 기타 | 『한국인의 진실』 |
기타 | 전기 | 『강재구 소령 전기』 |
1986 | 평론집 | 『아버지의 눈물』 |
기타 | 평론집 | 《현실과 지식인》 |
6. 1. 소설
선우휘의 소설 작품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는 휴머니즘을 특징으로 한다. 대표작인 불꽃은 도피적인 삶의 태도를 극복하고 저항 정신을 갖게 되는 한 남자를 그리고 있다.[5] 행동하려는 의지는 인류에 대한 존중과 비인간화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다.[5]선우휘는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이념 갈등과 사회악으로 인한 비인간화에 저항하는 것을 지식인의 책임으로 보았다.[5] 그러나 이러한 휴머니즘적 접근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싸릿골 신화」와 같은 작품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를 묘사했다는 평가도 있다.[5]
1965년 이후 선우휘는 기성 체제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5] 「십자가 없는 골고다」, 「열세 살 소년」 등에서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조선 주간지에 연재된 『노다지』는 가족사를 다루고 있다.[5]
출판 연도 | 작품 제목 |
---|---|
1955 | 귀신 |
1957 | 불꽃 |
1958 | 오리와 계급장 |
1959 | 깃발 없는 기수 |
1961 | 추적의 피날레 |
1964 | 열세 살 소년 |
1965 | 십자가 없는 골고다 |
1966 | 사도행전 |
1979 | 노다지 |
1986 | 아버지의 눈물, 노다지 |
1987 | 선우휘 문학전집 (전5권) |
기타 | 「화재」, 「망향」, 「싸릿골 신화」, 「단독강화」, 「거울」, 「아아 산하여」, 「성채(城砦)」 |
6. 2. 평론집
- 《아버지의 눈물》(1986)
- 《현실과 지식인》
7. 수상 내역
8. 가족 관계
9. 기타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육자로 있다가 1946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하면서 언론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특수부대원을 자원, 전진군단 유격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58년 서울신문 논설위원으로 언론에 복귀, 1959년 한국일보 논설위원, 1961년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1986년에 정년 퇴임하기까지 조선일보 논설위원, 편집국장, 주필, 논설고문, 주필 등으로 활동했다. 현직 신문 논설위원, 주필로 구속되거나 여러 번 중앙정보부, 검찰 등에 소환되기도 하였다.
1955년 단편소설 '귀신'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고, 1957년에 발표한 '불꽃'은 '문학예술' 신인특선에 당선되어 제2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75년 국토통일원 고문, 1983년 2월 한국 예술원 소설부문 회원, 1985년 3월 30일 한국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86년 6월 12일 한국방송공사(KBS) 6·25 특집극 〈살아있는 전장수첩〉 녹화촬영 중 과로와 고혈압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낭만주의, 감성주의적 작품이 유행하던 사조와는 달리 현실적인 문체와 소재를 주로 활용했다. 감성, 낭만주의적인 작가,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점차 초현실주의적인 사상가로 변모해갔다.
술과 노래를 좋아하였다. 주력(酒力)도 대단했다고 한다. “한달에 한번쯤은 통음해야 머릿속 찌꺼기를 씻어내고 새출발을 할 수 있다”는 데 언행이 일치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술에 취하고도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서북청년단의 단주였던 선우기성과는 동향 출신의 먼 일족이었다. 계훈제, 문봉제 등과 가깝게 지냈다.
연기자 선우재덕의 아버지와는 사촌으로 알려져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Sunwoo Hwi
http://klti.or.kr/ke[...]
2013-09-21
[2]
서적
Who's Who in Korean Literature
Hollym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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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woo Hwe:Korean historical person information
http://people.aks.ac[...]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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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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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휘 (ソヌ・フィ)
http://srchuci.cho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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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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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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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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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人物情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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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2
[9]
웹인용
윤전기 세우고 'DJ 납치사설' 쓰다 - 조선일보
https://web.archive.[...]
2012-08-18
[10]
웹인용
선우휘씨 20주기 추모모임
https://web.archive.[...]
2012-09-07
[11]
웹사이트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http://shindonga.don[...]
[12]
웹사이트
선우휘:Daum
http://en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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