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방울 레이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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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쌍방울 레이더스는 1989년 창단된 대한민국 프로야구팀으로, 1991년부터 1999년까지 KBO 리그에 참여했다. 김원형은 1993년 KBO 역사상 최연소 노히트노런을 기록했고, 김성근 감독 부임 후 1996년과 1997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1997년 IMF 외환 위기로 모기업의 재정난이 심화되어 핵심 선수들을 현금 트레이드하며 전력이 약화되었다. 결국 1999년 시즌 후 구단 운영이 어려워져 2000년 1월 해체되었으며, 이후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가 창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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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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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팀 명 | 쌍방울 레이더스 |
한국어 팀 명 | 쌍방울 레이더스 |
로마자 표기 | Ssangbangwool Raiders |
한자 표기 | 雙방울 레이더스 |
창단일 | 1990년 |
해체일 | 2000년 |
연고지 | 전라북도 전주시 |
홈구장 | 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 (1990년~1999년) |
제2구장 | 월명종합경기장 야구장 (1990년~1999년) |
수용 인원 (전주) | 10,000명 |
수용 인원 (군산) | 12,000명 |
리그 | KBO 리그 (1990–1999) |
모기업 | 쌍방울 그룹 |
마스코트 | 방울이 |
색상 | 노란색 및 검은색 |
팀 기록 | |
리그 우승 횟수 | 0 |
시리즈 우승 횟수 | 0 |
플레이오프 진출 횟수 | 1 |
플레이오프 | 1996년 |
준플레이오프 진출 횟수 | 1 |
준플레이오프 | 1997년 |
A클래스 진입 횟수 | 2 |
A클래스 진입 년도 | 1996년-1997년 |
B클래스 진입 횟수 | 7 |
B클래스 진입 년도 | 1991년-1995년, 1998년-1999년 |
영구 결번 | 없음 |
코칭 스태프 (해체 시점) | |
감독 | 김준환 |
유니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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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단 역사
1989년 시즌 오프에 속옷 제조업체를 중심으로 한 기업 그룹인 (サンバンウル)을 모기업으로 하여 한국 프로야구 8번째 팀으로 창단되었다. 초대 감독은 김인식(金寅植)이었다.
창단 후 1년간은 2군 리그에서만 준비 기간을 거친 후, 1991년부터 1군 리그에 참가했다. 1군 참가 첫 해에는 OB 베어스를 제치고 전년도 챔피언인 LG 트윈스와 함께 6위로 시즌을 마쳤다. 전력 부족으로 최하위가 당연시되는 신생팀이 오히려 흥행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주변의 우려를 뒤엎는 결과였다. 하지만 이후에는 첫 시즌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곧 최하위 후보로 자리매김했다.
1993년 4월 30일, 레이더스의 투수 김원형이 전주야구장에서 OB 베어스를 3-0으로 꺾고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당시 20세였던 김원형은 KBO 역사상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최연소 투수였다.[1]
1995년 시즌 오프, B클래스 팀에 만연한 패배 의식을 쇄신하여 A클래스 팀으로 이끌 능력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김성근(金星根)을 감독으로 영입하여 팀 전력 향상에 착수, 꾸준히 팀 전력을 향상시켰다.
그 결과, 1996년 정규 시즌 2위, 1997년에는 3위에 오르며 포스트시즌에도 진출했다.
1996년에는 한국시리즈 진출까지 단 1승만을 남겨두기도 했다. 당시 전주구장 주변에는 암표상들이 나타날 정도로 지역 내 인기도 확대되었다.
하지만 1998년 발생한 아시아 금융 위기로 모기업이 경영 위기에 처하면서 이후로는 주력 선수들을 현금 트레이드하여 구단 운영비에 충당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또한 2군 경기 참가도 중단하고 경비 절감에 힘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8년에는 6위를 유지했지만, 잇따른 주력 선수 방출로 전력이 크게 약화되어 A클래스 전문가로 영입된 김성근 감독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99년에는 오키나와에서 스프링캠프를 진행했지만, 숙박비 절감을 위해 대전, 광주 등 편도 200km 이내의 근거리 원정은 경기 당일 이동하고, 장거리 원정은 저렴한 여관을 전전하는 극심한 상황이었다.
그렇게까지 팀을 유지하려는 노력도 헛수고로 돌아가 1999년 132경기에서 28승 97패 7무승부, 승률 0.224라는 성적을 거두었고, 구단은 운영비 부족으로 경영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지역 내 인기도 하락하여 홈 경기 관중 수가 100명을 밑도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2000년 1월, 쌍방울의 긴급 요청을 받은 KBO가 팀을 인수했고, 이로써 팀은 해체되었다. KBO 소속 팀이 해체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해체 후, SK그룹이 신생팀인 SK 와이번스를 창단하여 해체 당시 쌍방울 선수들을 영입했다.
2018년 10월, 1999년 쌍방울의 마지막 신인으로 입단하여 KT 위즈에 소속되어 있던 이진영(李晋暎)이 현역 은퇴를 발표했다. 그의 은퇴로 쌍방울에서 뛰었던 현역 선수는 모두 그라운드를 떠났다.[3]
2. 1. 창단과 프로 리그 참가 (1990년)
한국야구위원회는 1986년에 신생팀 '제8구단' 창단을 결의하고 전북특별자치도를 연고지로 하는 신생팀 창단을 추진하였다.[9][10] 창단 과정에서 대상그룹과 컨소시엄 형태로 창단을 추진했으나, 대상그룹이 창단 과정에서 빠지게 되었다.[11] 쌍방울 레이더스는 1990년 창단 후 1년간 2군 리그 (KBO 퓨처스리그)에서 경기를 치렀고, 1991년부터 정식으로 1군 리그(KBO 리그)에 참가하였다.2. 2. 1군 리그 참가와 초기 어려움 (1991년 ~ 1995년)
쌍방울 레이더스는 신생 창단 팀으로, 모기업의 규모가 작아 선수단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12] 선수층이 얇았고, 연고지인 전북특별자치도 지역의 유망주도 부족하여 타 팀에서 전성기가 지난 선수들을 영입하는 방식으로 팀을 운영해야 했다.[12] 특히 해태 타이거즈에서 많은 선수들이 쌍방울로 이적하여 '해태의 작은집'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성적은 매년 하위권에 머물렀다.1989년 11월 14일 3년 계약으로 부임했던[12] 김인식 초대 감독은 1991년 말 구단주 대행 겸 쌍방울 부회장으로 취임한[13] 이용일 전 KBO 총재특보와의 마찰과 3년 계약 종료로 물러났다. 이후 이용일 구단주 대행처럼[14] '일본통'이었던 신용균 감독이 3년 계약 형식으로 부임했지만,[15] 외국인 선수 영입 과정에서 '미국통'이었던 한동화 코치와 불화를 겪어 1년 만에 해임됐다.[16] 한동화 코치가 2년 계약 형식으로[17] 감독에 승격했으나, '일본통'인 이용일 구단주 대행과 사이가 좋지 않아 1995년 시즌 도중 하차했다.[18]
1993년 4월 30일, 김원형은 전주야구장에서 OB 베어스를 상대로 KBO 리그 최연소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1]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쌍방울 레이더스의 정규 시즌 성적은 다음과 같다.
시즌 | 순위 | 승 | 패 | 무 | 승률 | 감독 |
---|---|---|---|---|---|---|
1991 | 6위 | 52 | 71 | 3 | .425 | 김인식 |
1992 | 8위 | 41 | 84 | 1 | .329 | 김인식 |
1993 | 7위 | 43 | 78 | 5 | .361 | 신용균 |
1994 | 8위 | 47 | 74 | 5 | .393 | 한동화 |
1995 | 8위 | 45 | 78 | 3 | .369 | 한동화 (24경기), 김우열 (102경기)[2] |
2. 3. 김성근 감독 부임과 전성기 (1996년 ~ 1997년)
1996년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면서 쌍방울 레이더스는 팀 분위기가 쇄신되고 전력이 향상되었다.[19] 김성근 감독의 지도 하에 쌍방울 레이더스는 1996년 정규 시즌 2위를 기록하여 돌풍을 일으키며 창단 첫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현대 유니콘스와의 5차전 접전 끝에 2승 3패로 패배하였다.[19] 1997년에는 정규 시즌 3위를 기록하며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에 1승 2패로 패배하며 4위로 시즌을 마감했다.[19] 이 시기 쌍방울 레이더스는 기존의 약팀 이미지에서 벗어나 강팀으로 변모해 가는 모습을 보였다.[19]2. 4. IMF 외환 위기와 구단 해체 (1998년 ~ 1999년)
1997년 12월, IMF 외환 위기가 터지면서 모기업 쌍방울이 심각한 재정난에 빠지게 되자,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 역시 구단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19] 재정난을 심각하게 겪으면서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은 구단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핵심 선수들을 상대로 '선수 팔기'를 시작하게 된다.1998년 박경완과 조규제는 현대 유니콘스로, 1999년 시즌 전에는 김기태와 김현욱은 삼성 라이온즈에 현금 트레이드로 이적하는 등 쌍방울 레이더스 핵심 선수들 대부분이 팀을 떠나면서 구단의 전력은 크게 약화되었다.[19] 1998년 시즌 중에는 재일동포 외야수 김실을 OB 베어스로 트레이드했다.[19] 같은 해 좌완 에이스였던 박성기를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했는데 다음 해 한화 이글스로 이적한 뒤 그 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하고 은퇴했다.
1998년부터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쌍방울 레이더스는 비싼 돈을 주고 선수를 쓸 수 없었고 중도 퇴출되어도 대체 선수를 데려올 수 없었다. 1998년에는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지 않았고, 김기태, 최태원, 조원우, 김원형 등이 활약하여 정규 시즌 6위를 기록했다.
1999년에는 제이크 비아노, 전해 LG 트윈스에서 마무리로 뛰었던 마이클 앤더슨 등 투수 용병 선수를 영입하였지만, 이들은 열악한 시설 환경과 김성근 감독의 훈련량에 적응하지 못하고 6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며 중도 하차했다. 1999년 드래프트에서는 일부 대학 진학자를 제외한 고졸 선수들의 지명을 포기하고, 2차 1순위로 지명한 한양대학교 투수 라형진은 삼성 라이온즈에 지명권을 양도했으며, 1차 지명자인 군산상고의 이진영만 계약했다. 200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이승호와 엄정욱 등을 지명했지만, 2차 1순위로 지명한 투수 마일영의 지명권을 현대 유니콘스에게 매각했다.
구단 대주주였던 모기업 쌍방울이 팀 운영을 할 수 없게 되면서 KBO에 의한 위탁 관리가 이루어졌다. 투타의 핵심 선수들이 매년 현금 트레이드 등으로 팀을 떠났고, 1999년 시즌 중 성적 부진에 따른 분위기 쇄신을 이유로 김성근 감독이 해임되고[20] 김준환 수석코치가 감독으로 승격되었지만, 팀은 1999년 시즌 단일 시즌 최다 패 기록인 97패(28승 7무, 승률 0.224)를 기록하였다. 결국 쌍방울 레이더스는 2000년 1월 해체되었다.
2. 5. SK 와이번스와의 관계
IMF 여파로 쌍방울 레이더스는 극심한 재정난을 겪었고, 1998년부터 주축 선수들을 현금 트레이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1999년에는 신인 지명자 중 이진영만 계약하고, 2차 1순위 지명자인 라형진은 삼성 라이온즈에 지명권을 양도하는 등 운영난이 심각했다. 1999년 7월 16일, 쌍방울 구단주 이의철은 KBO 총재와 비밀 회담에서 매각 의사를 밝혔으나, 협상은 지지부진했다.SK그룹은 쌍방울 레이더스 인수 대신 신생 구단 창단을 추진했다. SK그룹은 쌍방울이 자동 퇴출되는 2000년 2월 12일까지 기다렸다가 새로운 팀 창단 수순을 밟는다는 계획이었다. 결국 쌍방울은 2000년 1월 7일 해체되었고, SK는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를 창단했다.
KBO는 SK 와이번스를 쌍방울 레이더스와는 별개의 구단으로 간주하며, SK 와이번스는 인천광역시를 연고로 하여 독자적인 역사를 이어갔다. 현대 유니콘스 해체 후 재창단된 히어로즈(현 키움 히어로즈) 역시 KBO는 현대 유니콘스와 다른 팀으로 간주한다.
3. 역대 감독
쌍방울 레이더스의 역대 감독은 다음과 같다.
1대 감독은 김인식 감독(1990년 ~ 1992년)이었다. 2대 감독은 신용균 감독(1993년)이었다. 3대 감독은 한동화 감독(1994년 ~ 1995년)이었다. 4대 감독은 김우열 감독(1995년)이었다. 5대 감독은 김성근 감독(1996년 ~ 1999년)이었다. 6대 감독은 김준환 감독(1999년)이었는데, 1999년 시즌은 감독 대행으로, 1999년 시즌 종료 후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었으나, 팀 해산으로 정식 감독으로서 지휘를 맡지는 못했다.
4. 주요 기록
쌍방울 레이더스는 1996년 정규 시즌 2위를 기록하여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1997년에는 정규 시즌 3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993년에는 김원형이 KBO 리그 최연소 노히트노런을 달성하기도 했다 (만 20세). 하지만 1999년에는 단일 시즌 최다 패인 97패를 기록하기도 했다.
연도 | 순위 | 게임수 | 승 | 무 | 패 | 승률 | 비고 |
---|---|---|---|---|---|---|---|
1990 | 1위 | 62 | 35 | 8 | 19 | 0.648 | 2군리그 우승 |
1991 | 6위 | 126 | 52 | 3 | 71 | 0.425 | 1군리그 첫해 |
1992 | 8위 | 126 | 41 | 1 | 84 | 0.329 | |
1993 | 7위 | 126 | 43 | 5 | 78 | 0.361 | |
1994 | 8위 | 126 | 47 | 5 | 74 | 0.393 | |
1995 | 8위 | 126 | 45 | 3 | 78 | 0.369 | |
1996 | 2위 | 126 | 70 | 2 | 54 | 0.563 | 정규시즌 2위 |
1997 | 3위 | 126 | 71 | 2 | 53 | 0.571 | 정규시즌 3위 |
1998 | 6위 | 126 | 58 | 2 | 66 | 0.468 | |
1999 | 8위 | 132 | 28 | 7 | 97 | 0.224 | |
계 | 10시즌 | 1202 | 490 | 38 | 674 | 0.420 |
5. 역대 수상
5. 1. 한국 프로 야구상 수상자
쌍방울 레이더스는 한국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고, 1991년 투수 조규제가 최우수 신인상을 받았다.5. 2. 골든글러브 수상자
5. 3. 개인 기록 수상자
쌍방울 레이더스의 개인 기록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6. 역대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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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국적 | 포지션 | 년도 |
---|---|---|---|
가내영 | 투수 | 1998-1999 | |
강길룡 | 투수 | 1991-1993 | |
강상진 | 투수 | 1991 | |
김기덕 | 투수 | 1991-1999 | |
김봉근 | 투수 | 1991-1992 | |
김승남 | 투수 | 1997 | |
김유진 | 투수 | 1998-1999 | |
김원형 | 투수 | 1991-1999 | |
김진욱 | 투수 | 1993 | |
김현욱 | 투수 | 1996-1998 | |
박주언 | 투수 | 1996-1999 | |
박정현 | 투수 | 1998-1999 | |
박창현 | 투수 | 1998-1999 | |
성영재 | 투수 | 1993-1999 | |
신영균 | 투수 | 1996 | |
오봉옥 | 투수 | 1996-1999 | |
오상민 | 투수 | 1997-1999 | |
윤형배 | 투수 | 1997-1999 | |
조규제 | 투수 | 1991-1997 | |
진동한 | 투수 | 1991-1992 | |
최승민 | 투수 | 1999 | |
최한림 | 투수 | 1991-1995 | |
김성현 | 포수 | 1997-1998 | |
박경완 | 포수 | 1991-1997 | |
양용모 | 포수 | 1999 | |
장재중 | 포수 | 1994-1999 | |
장채근 | 포수 | 1994-1995 | |
전종화 | 포수 | 1991-1994 | |
최해식 | 포수 | 1991-1994 | |
김기태 | 내야수 | 1991-1998 | |
김성래 | 내야수 | 1997-1999 | |
김호 | 내야수 | 1991-1999 | |
박계원 | 내야수 | 1998-1999 | |
박철우 | 내야수 | 1994-1998 | |
백인호 | 내야수 | 1993-1996 | |
송구홍 | 내야수 | 1999 | |
신경식 | 내야수 | 1993-1995 | |
윤재호 | 내야수 | 1994-1996 | |
이근엽 | 내야수 | 1998-1999 | |
이동수 | 내야수 | 1998-1999 | |
최태원 | 내야수 | 1993-1999 | |
한대화 | 내야수 | 1997 | |
한혁수 | 내야수 | 1993-1995 | |
강광회 | 외야수 | 1993-1994 | |
강남규 | 외야수 | 1991-1992 | |
강영수 | 외야수 | 1997-1998 | |
김광림 | 외야수 | 1994-1997,1999 | |
김실 | 외야수 | 1996-1998 | |
김평호 | 외야수 | 1991-1992 | |
동봉철 | 외야수 | 1999 | |
박노준 | 외야수 | 1993-1997 | |
박재용 | 외야수 | 1999 | |
심성보 | 외야수 | 1995-1999 | |
윤재국 | 외야수 | 1998-1999 | |
이연수 | 외야수 | 1991-1999 | |
이종두 | 외야수 | 1997 | |
이진영 | 외야수 | 1999 | |
조용호 | 외야수 | 1991-1993 | |
조원우 | 외야수 | 1994-1999 |
- 황태호(桧山泰浩, 등록명: 황태호, ファン・テホ) 1992년 - 전 近鉄バファローズ
- 김성길(金本誠吉, 등록명: 김성길, キム・ソンギル) 1993년 - 전 阪急ブレーブス
- 김실(田中実, 등록명: 김실, キム・シル) 1996년 - 1998년 - 전 日本ハムファイターズ
- 후쿠토미 쿠니오 재직 1996년 - 전 태평양 클럽 라이온즈, 야쿠르트 스왈로즈
6. 1. 투수
김원형은 1992년, 1993년, 1995년, 1997년, 1998년에 쌍방울 레이더스 투수로 활약했다. 현 SSG 랜더스 감독이다. 조규제는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6년, 1997년에 쌍방울 레이더스 투수로 활약했다. 김현욱은 1996년, 1997년, 1998년에 쌍방울에서 투수로 활동했다. 박성기는 1994년에, 성영재는 1996년, 1998년에, 김기덕은 1991년, 1994년, 1995년, 1999년에 쌍방울 투수로 뛰었다. 오상민은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쌍방울에서 투수로 활동했다. 그 외에도 강길용(1991년), 김석기(1992년), 김성길(1993년), 김진철(1995년), 박정현(1999년), 가내영(1999년)이 쌍방울 레이더스의 투수로 활약했다.6. 2. 포수
박경완은 1991년부터 1997년까지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활동한 포수로, 현 LG 트윈스 코치이다. 장재준은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활동한 포수로, 현재 KT 위즈 코치이다.6. 3. 내야수
김기태는 1991년부터 1998년까지 재직했으며, 현재 KT 위즈 2군 감독이다. 최태원은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재직했고, 전 삼성 라이온즈 코치였다. 한대화는 1997년에 재직했다. 김성래는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재직했다.6. 4. 외야수
김광림, 김실, 박노준, 심성보, 이진영, 조원우 등이 쌍방울 레이더스의 외야수였다.7. 통산 기록
김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