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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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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장(劉璋)은 삼국 시대 유비에게 익주를 빼앗긴 인물이다. 유언의 아들로, 헌제를 섬기다가 익주 자사로 추대되었다. 유장의 온화한 성격과 결단력 부족은 익주 백성들의 불만을 초래했고, 장로의 공격과 조위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유비의 침공을 받아 214년에 항복했으며, 이후 손권에게 익주목으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유장은 무능한 군주로 평가받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어리석게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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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청나라 시대의 유장 그림
청나라 시대에 그려진 유장의 초상화
이름유장
로마자 표기Yu Jang
계옥
생년미상
출생지후베이성 첸장
사망년도220년경
아버지유언
자녀유순
유찬
비관의 아내
친척오부인 (처제)
방희 (인척)
관직 및 직함
관직봉거도위
익주자사
익주목
진위장군
봉작양성후
군사 직함감군사자
겸임행진서대장군
통치 기간
익주목 재임 기간194년경 - 214년
주요 사건
주요 활동익주에서 독립 세력 유지
장로, 조위, 유비와 대립
이후 유비에게 항복, 손권에게 의탁
소속 세력
소속독립 세력
유비
손권

2. 생애

유장은 후한 말의 군벌 유언의 막내아들로 태어나[21] 젊은 시절 봉차도위로서 장안에서 헌제를 섬겼다. 아버지의 부름으로 익주에 갔으나, 유언은 아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그를 다시 수도로 돌려보내지 않았다[21]. 194년 아버지 유언이 병사하자, 익주의 관리였던 조위 등은 유장의 온화한 성품을 보고 그를 추대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익주자사가 되었고[23], 이후 조정으로부터 익주목으로 임명받았다[24].

익주를 다스리면서 한중의 장로와 대립하였고, 200년에는 자신에게 반역한 장로의 어머니와 동생을 처형하며 관계가 악화되었다[12]. 또한 내부적으로는 아버지 대부터 들어와 있던 동주병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민심을 잃었으며[9], 이 무렵 조위와도 갈등을 빚어 반란이 일어났으나 201년 이를 진압하였다[10].

208년 조조형주를 제압하고 익주를 위협하자, 유장은 조조에게 사신을 보내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25]. 그러나 이후 장송, 법정 등이 조조 대신 유비와 손잡을 것을 건의했고, 장로와 조조의 위협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211년 유비를 익주로 불러들였다[14]. 이는 유장의 우유부단함과 맞물려 결국 유비에게 익주를 넘겨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장송의 내통 사실이 발각되면서 유비와 전쟁 상태에 들어갔고, 유비의 공격을 받아 여러 차례 패배했다. 정도가 청야 전술을 제안했으나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았다[35]. 214년 수도 성도가 포위되자, 더 이상 백성을 괴롭힐 수 없다며 항복을 결정했다[15].

항복 후 유비에 의해 차남 유천과 함께 형주 공안으로 보내졌다가[42], 219년여몽이 형주를 점령하면서 손권에게 귀순했다. 손권은 유장을 명목상의 익주목으로 삼았으나[43],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유장에 대해 "영웅으로서의 재능이 부족했으며, 땅과 지위를 빼앗긴 것은 불행하다고 할 수 없다"고 평가하며 그의 리더십 부재를 지적했다.

2. 1. 아버지 생전

유장은 전한 초기의 노왕 유우의 후손이다.[3] 아버지 유언의 막내아들로, 젊은 시절 봉거도위(奉車都尉) 관직을 지냈다.[21] 그는 형인 좌중랑장(左中郞將) 유범과 치서어사(治書御史) 유탄과 함께 장안의 헌제 조정에서 일했다.[21][4] 당시 조정은 이각과 곽사 등 군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4]

형주유표익주목 유언의 수레, 집기, 복식 등이 분수에 넘친다며 그의 행동을 비판하는 표문을 조정에 올렸다. 이에 조정(헌제)은 유장을 익주로 보내 종실인 아버지 유언의 지나친 행동("폭주")[21] 또는 "잔혹한 행위"[4]를 타이르도록 했다. 그러나 유언은 아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그를 장안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4][21]

194년(흥평 원년), 아버지 유언은 정서장군(征西將軍) 마등과 협력하여 이각과 곽사 정권을 몰아내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장안에 있던 유장의 두 형 유범과 유탄이 목숨을 잃었다.[22] 또한 익주의 주도(州都)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광한군 면죽현(綿竹縣)에서 촉군 성도현(成都縣)으로 도읍을 옮겨야 했다. 이러한 사건들의 충격으로 유언은 병을 얻어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2. 2. 익주목 승계와 분열

194년, 아버지 유언이 사망하자, 익주의 고관 조위와 왕상(王商) 등은 유장의 온화하고 어진 성품을 이유로 그를 익주 자사로 추대했다.[26][6][23] 당시 유장의 형 유모도 있었으나[5], 여러 신하들은 유장을 지지했다. 한나라 중앙 정부(이각 정권)는 영천군 출신 호모(扈瑁)를 익주자사로 임명하여 한중으로 보냈으나[26], 유장은 곧 조정의 인정을 받아 아버지처럼 감군사자(監軍使者)와 익주목을 겸하게 되었다.[24] 조위는 정동중랑장(征東中郞將)에 임명되어 유표를 견제하기 위해 파군 구인현(朐䏰縣)에 주둔했다.[26]

190년대 한나라의 주요 군벌을 보여주는 지도, 유장 포함


유장이 익주목이 된 직후, 형주별가(―別駕) 유합(劉闔)과 손잡은 유장의 부하 심미(沈彌), 누발(婁發), 감녕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형주로 달아났다.[26][7]

유장은 익주를 다스리면서 부드럽지만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8] 특히 아버지 유언 시절부터 익주에 들어와 있던 동주병(東州兵, 남양과 삼보 지역 유민 출신 병사)들이 현지 주민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것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 민심을 잃었다.[9]영웅기』에 따르면, 유장은 법과 권위를 제대로 세우지 못했고, 이로 인해 익주 백성들의 불만이 커져갔다.[8][9]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중군장로는 유장을 얕보고 복종하지 않았으며, 파(巴) 지역의 이민족 지도자 두호(杜濩), 박호(朴胡), 원약(袁約) 등도 장로에게 가담했다. 이에 유장은 건안 5년(200년)에 장로의 어머니와 동생 장징(張徵)을 처형하고[12] 화덕중랑장(和德―) 방희에게 장로 토벌을 명했으나 여러 차례 패배했다.[27] 결국 방희를 파군태수로 임명하여 낭중현(閬中縣)에서 장로를 막게 했지만, 방희가 한창현(漢昌縣)의 종민(賨民)들을 모아 군세를 키우자 누군가의 참언으로 인해 유장과의 사이가 벌어지기도 했다.[28]

건안 5년(200년), 중랑장 조위 역시 유장에게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28]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위는 동주병 문제 등으로 쌓인 민중의 불만을 이용하여[9] 촉군·광한·건위의 호응을 얻어 성도를 공격했다. 유장은 위기에 몰렸으나, 동주병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유장을 도와 싸웠다.[10] 결국 조위는 격퇴되어 강주(江州)로 물러났고, 이듬해(201년) 부하들에게 배신당해 살해되었다.[10] 같은 해(200년), 장로 역시 유장에게 반기를 들었다.[11]

건안 13년(208년) 말, 조조가 형주를 공격하고 한중까지 넘본다는 소식이 들리자, 유장은 사신 음보(陰溥)를 보내 조조에게 경의를 표했다. 조조는 유장을 진위장군(振威將軍)으로, 형 유모를 평구장군(平寇將軍)으로 삼도록 조정에 추천했다. 그러나 유모는 이후 정신 질환을 앓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13][25]

건안 16년(211년), 익주 내부의 위협이 커지는 가운데, 유장의 신하 장송, 법정, 맹달 등은 유장에게서는 큰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유비를 새로운 군주로 맞이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장로와 조조의 위협을 막기 위해 유비의 군사력을 빌려야 한다고 유장에게 건의했다. 王累|왕루zho, 황권, 이회, 유파 등 충신들이 유비의 야심을 경계하며 반대했지만[14], 유장은 결국 장송 등의 말을 듣고 유비를 익주로 불러들였다.

유비가 익주에 들어온 후, 장송의 형 장숙이 동생의 내통 사실을 유장에게 밀고했다. 격노한 유장은 장송을 처형하고 유비와 전쟁을 시작했다. 유비는 즉시 익주 공략에 나섰고, 유순, 장임 등 유장의 부하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건안 19년(214년) 여름, 유비군은 마침내 수도 성도를 포위했다.[15] 성 안에서는 항전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유장은 "나는 더 이상 백성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항복을 결정했다.[15]

2. 3. 강성 호족들과의 대결

흥평 원년(194년) 유언 사후, 익주의 호족 조위 등은 유장의 온화한 성품을 보고 그를 익주 자사로 추대했다.[6][23] 후한 조정(이각 정권) 역시 유장을 감군사자 겸 익주목으로 임명했다.[24]

유장이 집권한 초기, 아버지 유언의 옛 부하였던 심미(沈彌)와 누발(婁發)이 감녕형주 관리 유합(劉闔)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어 이들은 형주로 달아났다.[7]

그러나 유장은 아버지 유언이 남양군삼보 일대에서 데려온 유민들로 구성된 군대, 이른바 동주병(東州兵)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유순하고 위엄이 부족했던 유장은 동주병이 익주 토착민들을 억압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로 인해 익주 사람들의 불만은 날로 커져갔다.[26][8]

이러한 상황 속에서 평소 민심을 얻고 있던 조위는 기회를 엿보았다. 그는 형주유표와 연계하고 익주의 유력 가문들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유장에 대항할 준비를 했다.[9][26]

200년(건안 5년), 조위는 마침내 유장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촉군, 광한군, 건위군이 조위에게 호응하자 유장은 성도성으로 들어가 방어에 나섰다.[26] 자신들이 조위에게 몰살당할 것을 두려워한 동주병 세력은 유장을 도와 필사적으로 항전했고, 반란군을 격퇴하여 강주(江州)까지 몰아붙였다.[10][26] 201년, 조위의 부하였던 방락(龐樂)과 이이(李異)가 배신하여 조위를 살해함으로써 반란은 최종적으로 진압되었다.[26] 이 혼란을 전해 들은 후한 조정은 익주자사를 오관중랑장 우단(牛亶)으로 교체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29] 반란이 끝난 후, 한창현령 정기와의 논쟁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방희가 유장에게 사죄하는 일도 있었다.[28]

같은 해(200년),[11] 과거 유언을 섬겼던 장로 역시 한중에서 독자 세력을 구축하며 유장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에 격분한 유장은 성도에 있던 장로의 어머니와 동생 장징(張徴)을 처형했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철천지원수가 되었다.[12]

208년 말, 조조형주를 정벌하고 한중 지역까지 위협해오자, 유장은 음보(陰溥)를 사신으로 보내 조조에게 경의를 표했다. 조조는 유장을 진위장군으로, 그의 형 유모를 평구장군으로 삼도록 조정에 추천했다. 하지만 유모는 이후 병으로 사망했다.[13][25]

2. 4. 유비 초청과 익주 상실

208년 말, 조조형주를 공격하고 한중까지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유장은 사신 음부(陰溥)를 보내 조조에게 경의를 표했다.[13] 조조는 유장에게 진위장군(振威將軍) 벼슬을 주었다.[30] 유장은 별가 장송을 조조에게 사신으로 보냈으나, 이미 형주를 평정한 조조는 장송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고 이에 불만을 품은 장송은 돌아왔다. 마침 적벽 대전에서 조조가 패하자, 장송은 유장에게 조조와의 관계를 끊고 유비와 손을 잡을 것을 권유했다. 유장은 이를 받아들여 법정을 유비에게 보내 교류를 시작했고, 이후 법정과 맹달을 통해 병사 수천 명과 많은 선물을 보냈다.

211년,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정벌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유장은 대책을 논의했다. 장송은 "조조군이 장로의 세력을 이용해 익주를 공격하면 막기 어렵습니다. 유비는 유장의 종실이며 조조의 오랜 원수이고 용병에 능하니, 유비를 불러 장로를 치게 하면 익주를 지킬 수 있습니다. 지금 내부의 일부 세력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니, 유비를 부르지 않으면 안팎으로 공격받아 패할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주부(主簿) 황권은 "유비는 야심이 있어 부하로 두기 어렵고, 손님으로 대하자니 한 나라에 두 주인이 있을 수 없다"며 반대했고, 종사 왕루( 王累중국어 )는 성문에 거꾸로 매달려 간언했지만, 유장은 듣지 않고 법정을 보내 유비를 익주로 초청했다. 사실 장송과 법정은 유장의 지도력에 한계를 느끼고, 보다 유능하다고 판단한 유비를 익주의 새 주인으로 삼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유비 역시 익주를 차지할 목적으로 이에 응했다.[31][14]

유비가 보병 수만 명을 이끌고 오자, 유장은 모든 편의를 제공하며 직접 보병과 기병 3만여 명을 이끌고 나가 100여 일간 성대하게 환영했다. 유장은 유비를 행대사마사례교위로, 유비는 유장을 행진서대장군(行鎭西大將軍) 영익주목으로 서로 추천했다. 유장은 장로 정벌을 위해 유비에게 많은 병력과 20만 곡(斛), 말 1천 필, 수레 1천 승, 각종 비단 등을 지원해주었다.[32] 그러나 유비는 가맹현(葭萌縣)에 머무르며 장로를 공격하지 않고 민심을 얻는 데만 힘쓰며 익주를 차지할 기회를 엿보았다.[31]

212년, 조조가 동오를 공격하자 유비는 손권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군사 1만 명과 물자를 요구했다. 유장이 군사 4천 명과 요구한 물자의 절반만 보내주자, 유비는 이를 빌미로 '유장이 재물을 아껴 고생하는 군사들을 홀대한다'고 선전하며 불만을 부추겼다.[33] 이때 장송의 형 장숙이 동생의 음모를 유장에게 고발했다. 유장은 즉시 장송을 처형하고 유비와의 통로를 차단했다. 유비는 백수군(白水軍)을 감독하던 양회고패를 죽여 그 군대를 흡수한 뒤,[34] 황충탁응을 앞세워 남하하며 유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유비의 입촉 참조).[31]

정도는 "유비군은 깊숙이 들어와 고립되었고 병력도 적으며 보급도 부족합니다. 파서(巴西)와 자동(梓潼)의 주민들을 서쪽으로 이주시키고 들판과 창고의 곡식을 모두 불태워 청야 전술을 펼치고 수비에만 집중하면, 유비군은 보급이 끊겨 100일 안에 스스로 물러갈 것입니다. 그때 공격하면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유장은 "백성을 옮겨 적을 피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며 거절했다.[35] 이는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비칠 수도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유장의 우유부단함이 드러난 대목이며 유비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한 실책이었다.

유장은 유괴, 냉포, 장임, 등현, 오의 등을 보내 맞서 싸우게 했으나 연이어 패배했고, 면죽(緜竹)마저 함락되었다. 면죽을 지키던 이엄비관 등은 유비에게 항복했다.[28] 유장의 아들 유순과 장임 등은 낙현(雒縣, 낙성)에서 저항했으나,[39] 형주에 있던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이 이끄는 유비의 지원군이 장강을 거슬러 올라와 합류하면서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31]

214년 여름, 유비군이 성도를 포위하자 유파, 동화 등은 결사 항전을 주장했지만, 유장은 "나는 더 이상 백성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항복을 결정했다.[15] 이는 그의 온화한 성품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난세의 지도자로서 필요한 결단력이 부족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항복 후 유장은 유비에 의해 차남 유천과 함께 형주의 공안으로 보내졌다. 장남 유순은 성도에 남아 유비의 신하가 되었다.

220년 초, 관우여몽에게 패하여 사망하고 형주가 손권에게 넘어가자, 유장은 손권에게 귀순하여 익주목(益州牧)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유장에 대해 "영웅의 자질이 부족했으며, 땅과 지위를 빼앗긴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평가하며 그의 지도력 부재를 지적했다.

2. 5. 항복, 그리고 말년

214년, 낙성이 함락된 후 유비성도를 포위했다. 장로에게 의탁하고 있던 마초까지 유비에게 합류하여 성도를 압박했다.[40] 당시 성 안에는 정예병 3만 명과 1년 치의 물자가 있었고, 관리와 백성들도 결사항전을 원했다. 그러나 유장은 "우리 부자가 익주에 20여 년간 있었지만 백성들은 은덕을 입기는커녕 3년의 전쟁으로 고통만 겪었다. 이는 모두 나의 부족함 때문인데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라며 항복을 결심했다.

유장은 장예를 사자로 보내 유비로부터 자신과 남은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받았다.[41] 유비 측에서는 평소 유장과 가깝게 지내던 간옹을 보내왔고, 유장은 간옹과 같은 수레를 타고 성을 나와 항복했다.[42] 이를 지켜보던 유장의 부하들 중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성도가 포위된 지 수십 일 만의 일이었다. 항복 후 유장의 거처는 형주 남군의 공안(公安)으로 지정되었으며, 유비는 그의 재산과 진위장군 인수(印綬)를 돌려주었다. 유장의 장남 유순은 봉거중랑장으로 임명되어 성도에 남아 촉한에서 복무했다.

219년 말(건안 24년),[43] 손권의 부하 여몽이 이끄는 군대가 형주를 침공하여 관우를 사로잡아 처형하고 형주를 점령했다(여몽의 형주 침공). 이때 공안에 있던 유장과 그의 차남 유선은 오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혔다. 손권은 유비에게 빼앗긴 익주에 대한 명목상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유장을 다시 익주목으로 임명하고, 의도군 자귀현(秭歸縣)에 머물게 했다. 그러나 유장은 손권의 신하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유선은 계속해서 동오에서 복무했다.

3. 평가

14세기 역사 소설인 《삼국지연의》와 같은 대중적인 기록에서는 유장을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로 묘사한다.

진수가 저술한 《삼국지》에 기록된 동시대의 평가는 유장을 인자하고 야심이 없는 인물로 보면서도, 의지가 약하고 무능력한 군주로 평가했다. 국가를 충분히 통제하고 관리할 권위와 결단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의 겸손함은 익주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일부 기여했지만, 지나친 관대함은 오히려 국가 내부에 많은 문제와 불충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다.

4. 가계

유언


관계이름설명
할머니황씨(黃氏)황완의 고모[44]
아버지유언익주목·양성후·감군사자, 194년 사망
어머니비씨(費氏)비관의 일족[28]
유범중랑장, 194년 사망
유탄치서어사, 194년 사망
유모평구장군
아들유순봉거중랑장 (촉한)
아들유천교익이주자사·어사중승 (동오)
사위비관양위장군·강주도독·도정후[28]
증손유창은사, 301년 사망 (화양국지 권8 대동지에 기록)



유장은 적어도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유순(劉循)은 촉한에서 봉거중랑장을 지냈다. 차남 유천(劉闡)은 유비에게 패배한 후 아버지 유장과 함께 형주로 갔으며, 이후 동오에서 어사중승을 지냈다.

5. 섬긴 사람들

뇌동·오란·장익·진밀·초주·탁응이 유장을 섬겼다는 것은 소설삼국지연의》의 각색이다.

인물인물인물인물
감녕법정왕상장임
고이(高頤, 高頥)부금(扶禁)유괴정기
고패비관유파정탁(정도)
공심(龔諶)비시음부(陰溥)조위
냉포사견(射堅)이막(李邈)조작(趙莋, 趙筰)
누발(婁發)사원이엄주군(周群)
동화상존(向存)이이(李異)찬습(爨習)
두경성존(成存)이회팽양
두미(杜微)심미(沈彌)장송하종(何宗)
등현양홍장숙허정
마훈(馬勳)양회장예황권
맹달엄안장유(張裕)
방희오반왕련(王連)
오의(오일)왕루
왕모
왕보


참조

[1] 문서
[2] 문서
[3] 논문 An Outline of the Local Administrations of the Later Han Empire http://sunzi.lib.hku[...]
[4] 문서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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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문서
[21] 문서
[22] 문서
[23] 문서
[24] 문서
[25] 문서
[26] 문서
[27] 문서
[28] 문서
[29] 문서
[30] 문서
[31] 문서
[32] 문서
[33] 문서
[34] 문서
[35] 문서
[36] 서적 삼국지 45권 촉서 제15 양희 (촉한)
[37] 서적 삼국지 41권 촉서 제11 비시
[38] 서적 삼국지 41권 촉서 제11 곽준
[39] 서적 익부기구잡기
[40] 서적 삼국지 36권 촉서 제6 마초
[41] 서적 삼국지 41권 촉서 제11 장예
[42] 서적 삼국지 38권 촉서 제8 간옹
[43] 서적 삼국지 47권 오서 제2 오주전
[44] 서적 삼국지 42권 촉서 제12 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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