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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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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사는 시조와 유사하게 4음보를 기본으로 하며, 장(章)의 제한이 없는 것이 특징인 문학 형식이다. 고려 말에 발생하여 조선 시대에 정립되었으며, 정극인의 <상춘곡>을 효시로 본다. 이후 정철에 의해 가사 문학이 발전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내방가사, 기행문, 종교적 내용 등 다양한 주제로 확장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 여성들에 의해 창작된 내방가사는 여성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했으며, 개화기에는 개화가사가 등장하여 근대적 시가의 시초가 되었다. 가사는 자연과의 조화, 현세의 인연 등 당대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하며, 특정 자연물로의 환생 모티프를 통해 고난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2. 형식

가사는 시조와 마찬가지로 한 장(章)은 4음보로 이루어져 있으며, 1음보는 3음절 내지 4음절로 구성된다. 마지막 장이 3-5-4-3으로 끝나는 점도 시조와 같지만, 시조가 3장으로 제한되어 있는 데 비해, 가사에서는 장(章)의 수에 제한이 없다.

3. 역사

가사는 고려 말기부터 나타나 조선 초기에 걸쳐 발생했다.[6] 16세기 정철에 의해 크게 발전했으며, 그의 가사는 『송강가사』에 수록되어 널리 애창되었다.[7]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이 대표적이다. 朴仁老중국어 역시 뛰어난 가사 작가로 알려져 있다.[8]

임진왜란 이후 중앙에서는 가사가 쇠퇴했으나, 경상도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여 내방가사라 불렸다.[7] 조선 연행사의 기행문이나 조선 통신사 김인겸의 『일동장유가』와 같이 기행문도 가사 형식으로 쓰였다.[7]

유교, 불교, 도교, 가톨릭, 동학 등 종교 보급을 위한 가사도 많이 창작되었다.[6] 그러나 왕조가 멸망하면서 가사는 사라졌고, 현대에는 거의 창작되지 않는다.

3. 1. 발생과 초기 발전

가사는 고려 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 초기에 그 형태가 정립되었다.[6]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가사는 고려 말기 낭옹화상(혜근)의 "서왕가"로 알려져 있으나,[7] 문자로 기록된 시기가 18세기이므로 확실하지 않다.[9] 일반적으로 조선 성종 때 정극인상춘곡을 가사의 효시로 본다.[8]

초기 가사는 경기체가의 잔영을 보여주며, 한림별곡체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안축의 <관동별곡>, <죽계별곡>, 권근의 상대별곡 등이 그 예이다. 정극인상춘곡은 가사의 전형적인 형식을 확립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정극인경기체가도 지었으나, 상춘곡정철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과 함께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상춘곡에서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가사 문학은 차천로의 <강촌별곡>, 오세문의 <역대가>, 송순의 면앙정가 등을 거쳐 정철과 후기의 박인로에 이르러 황금 시대를 이루었다. 정철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은 가사 문학 중에서도 최고로 평가받으며, 박인로의 <사제곡>, 누항사, 독락당, 노계가 등도 가사 문학의 전통을 이어갔다.

3. 2. 조선 전기 가사

조선 전기에는 가사 문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정극인의 <상춘곡>은 이러한 흐름의 선두에 있는 작품으로, 가사 문학의 효시로 여겨진다.[8] 이후 송순의 <면앙정가>, 차천로의 <강촌별곡> 등 양반 사대부들의 가사가 창작되며 가사 문학은 점차 확고한 문학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6][8]

특히 정철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뛰어난 가사 작품들을 남겨 가사 문학의 황금기를 이끌었다.[7] 그의 가사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려냈으며, 호탕하면서도 섬세한 표현으로 높은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7] 박인로 역시 <사제곡>, <누항사>, <독락당>, <노계가> 등을 통해 가사 문학의 전통을 이어나갔다.[8]

3. 2. 1. 주요 작가 및 작품

정극인은 조선 초기의 문인으로, 단종 폐위에 즈음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성종이 그의 정성을 알고 삼품 교관(三品敎官)을 내리자, 이에 감동하여 <불우헌가>를 지었다. 또한 가사 <상춘곡>을 지었는데, 이는 조선 가사의 시초로 여겨진다.[8] 그의 문집인 <<불우헌집>>에는 <불우헌가>와 <상춘곡>이 수록되어 있다.

송순은 조선 중종, 명종 때의 학자로, 호는 면앙정(俛仰亭)이다.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면앙정을 짓고 독서와 시 창작으로 만년을 보냈다. 그의 작품으로는 한역된 <면앙정가>와 시조 <황국화가>, <치사가> 등이 전해진다. <면앙정가>는 그가 고향 담양(潭陽) 제월봉(霽月峯) 아래에 면앙정을 짓고 그곳의 경치를 읊은 것으로, 조선 가사 중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6]

차천로는 조선 선조 때의 문인으로, 호는 오산(五山)이다. 그의 가사 <강촌별곡>은 전형적인 4·4조의 양반 가사로, 시끄러운 정치계를 떠나 자연 속에서 한가롭게 생활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정철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자 시인으로, 호는 송강(松江)이다. 당쟁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천재적인 시적 재능으로 많은 가사 작품을 남겼다. 그의 가사는 한문투에서 벗어나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호탕하고 원숙한 시풍으로 가사 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7] 대표작으로는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이 있으며, 이들은 그의 시가집인 <<송강가사>>에 실려 있다.[7] 특히 <관동별곡>은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하며 관동팔경의 아름다운 풍경을 읊은 것으로, 가사 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벼슬에서 물러나 창평에 은거할 때 지은 것으로,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별한 여인의 심정에 비유하여 표현한 연군가(戀君歌)이다.

박인로는 조선 후기의 가사 작가로, <사제곡(莎堤曲)>, <누항사(陋巷詞)>, <독락당(獨樂堂)>, <노계가(蘆溪歌)> 등을 통해 가사 문학의 전통을 이어갔다.[8]

이 외에도, 김구는 경기체가 <화전별곡>을 지었고, 주세붕은 경기체가 <도동곡>, <엄연곡>, <태평곡>, <육현가> 등을 지었다.

3. 3. 조선 후기 가사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의 영향으로 사회적, 개인적 고통을 노래한 가사가 많이 창작되었다. 박인로는 太平詞중국어(태평사), 船上歎중국어(선상탄), 陋巷詞중국어(누항사) 등 전쟁의 참상과 개인적 고뇌를 진솔하게 담아낸 작품을 남겼다. 이원익의 雇工答主人歌중국어(고공답주인가)는 국가의 현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풍자한 작품이다. 실학 사상의 영향으로 현실적인 문제와 생활상을 다룬 가사가 등장했는데, 정학유의 農家月令歌중국어(농가월령가)가 그 예이다.

김인겸의 日東壯遊歌중국어(일동장유가), 홍순학의 燕行歌중국어(연행가) 등은 여행의 경험과 견문을 기록한 기행 가사이다. 한산거사의 漢陽歌중국어(한양가)는 한양의 모습을 묘사한 장편 가사의 대표적인 예이다.

3. 3. 1. 주요 작가 및 작품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를 정점으로 하던 가사는 한동안 주춤하였다가 소설 문학의 자극을 받아 새로운 장편가사로 널리 창작되었다. 원래 가사는 4·4조의 운문으로 그 표현이 자유롭고 또 낭랑(朗朗)하여 음송(吟誦)할 만하므로 부녀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애송되었다. 가사는 잡가와는 달리 양반 문학의 성격을 그대로 간직하며 숙종 이후에는 장편으로 변모, 창작되었다.[11]

이 시대의 작품은 서사시적인 것이 대부분이며 그 내용은 역사·설교·교훈·기행 등을 표현했다. 묘사가 사실적이며 날카롭고 능란한 것은 실학·소설 등의 영향과 이 시대의 추세였던 것 같다. 그러나 기록에 이름이 보이는 가사는 허다하지만 실제로 작자를 알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선조 무렵에 이루어진 것은 송강·노계 가사 외에도 이원익(李元翼)의 <고공답주인가(雇工答主人歌)>, 이수광의 <조천록(朝天錄)>, 조위한(趙緯韓)의 <유민탄(流民嘆)>, 임유후(任有後)의 <목동가(牧童歌)> 등의 이름 또는 가사가 전해진다. 영·정조 시대에 내려와서는 이진유(李眞儒)의 <속사미인곡>, 강응환(姜膺煥)의 <무호가(武豪歌)>, 김인겸(金仁謙)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등이 나왔다. 정조 때의 안조환(安肇煥)의 <만언사(萬言詞)>, 순조 때 조성신(趙星臣)의 <개암가(皆岩歌)> <도산별곡(陶山別曲)>, 그리고 정학유(丁學游)의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가 발표되었다. 현종 때의 한산거사(漢山居士)의 <한양가(漢陽歌)>, 철종 때에는 동학(東學) 교주 최수운(崔水雲)의 작이라는 <용담유사(龍潭遺詞)> <교훈가> 등이, 고종 때에는 홍순학(洪淳學)의 <연행가(燕行歌)>가 창작되었다.[11]

이 시대의 가사 문학은 형식 면에서 변화가 이루어져 현실의 율조와 산문적인 내용이 분화됨을 볼 수 있다. 즉 완전히 산문에 가까워지고, 다른 일부는 전통적인 민요 등의 영향으로 창(唱)의 부수적인 창사(唱詞)로 변질된 것이다. 이 시대를 대표하고 있는 가사는 <일동장유가>, <연행가>, <한양가>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대부분은 가사의 산문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11]

  • '''이원익'''


조선 명종-인조 때의 학자·문인. 호는 오리(梧里). 선조·광해군·인조의 3대에 걸친 명신으로 벼슬이 영의정에 올랐다. 가사에 <고공답주인가>가 있고, 저서에 <오리문집(梧里文集)>이 있다. <가곡원류>에 다음 시조 1수가 전한다.

菉楊이 쳔만ᄉᆞ인들 가ᄂᆞᆫ 춘풍 매여 두며
탐화 봉뎝인들 디ᄂᆞᆫ 곳츨 어이ᄒᆞ리.
아모리 근원이 듕한들 가ᄂᆞᆫ 님을 어이리.중국어

  • '''고공답주인가(雇工答主人歌)'''


이원익이 지은 가사. 내용은 <고공가>에 답하는 형식을 빌어 작가가 영의정을 어른 종에 빗대어서 왕인 상전의 말을 듣지 않는 종·머슴들을 꾸짖는 한편, 어른 종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상전을 간한 것이다.

조선 명종-인조 때의 무신(武臣)·시인.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무하옹(無何翁).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휘하에서 별시위(別侍衛)가 되어 왜군을 무찔렀고, 수군 절도사 성윤문(成允文)에게 발탁되어 그 막하로 종군, 왜군이 퇴각하자 사졸들을 위로하기 위해 <태평사>를 지었으며, 뒤에 노인직(老人職)으로 벼슬이 용양위 부호군이 되었고, 뒤에 고향인 노계에 숨어서 독서와 시작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작품은 조국애와 자연애를 바탕으로 시정(詩情)과 우국애가 넘쳐 흐르며, 무인다운 기백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시풍을 이룩했다. 정철(鄭澈)을 계승하여 서사적인 가사 문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작품에 가사로 <태평사>, <선상탄>, <사제곡>, <누항사>, <독락당>, <영남가>, <노계가> 등이 있고 시조에는 <조홍시가> 1수, <오륜가> 25수, <입암(立巖)> 29수 그 밖의 13수 등 모두 68수가 있는데 대부분이 그의 문집 <노계집>에 수록되어 전해진다.

  • '''노계집'''


노계 박인로의 시문집. 원명은 <노계선생문집>. 권3에 <태평사>, <독랑당>, <영남가>, <노계가>, <사제곡>, <누항사>, <선상탄>의 가사 7편과 <오륜가>를 포함한 시조 60수가 실려 있다(책 끝에 붙은 <도산가(陶山歌)>는 그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밝혀짐).

  • '''태평사'''


조선 선조 31년(1598) 박인로(朴仁老)가 지은 가사.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왜군이 퇴각하자 사졸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 한다. 내용은 임진란 싸움의 처참한 광경과 우리 군사들의 출전, 적군의 격퇴 및 종전 후 군사들의 즐거워함을 그린 것이다.

  • '''선상탄'''


선조 때 박인로가 지은 가사. 그가 임진란 때 통주사(統舟師)로 종군해서 부산에 있을 때 병중인데도 불구하고 배 위에서 지은 것이다. 내용은 배의 유래와 나라에 대한 근심을 적은 것이다.

  • '''사제곡'''


조선 광해군 때(1613) 박인로가 지은 가사. 친구 이덕형(李德馨)이 벼슬을 그만두고 용진(龍津)의 사제에 있을 때 그의 불우함을 동정하여 친히 찾아가 보고 이 가사를 지었는데 사제의 아름다운 경치와 그 가운데 소요하는 이덕형의 생활을 읊은 것이다. <노계선생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 '''누항사'''


조선 광해군 때 박인로가 지은 가사. 언젠가 친구인 이덕형이 노계의 빈한한 생활을 물었을 때 그것에 답하여 지은 노래로 안빈 낙도(安貧樂道)한다는 뜻을 일러준 것으로 그의 문집인 <노계집>에 수록되어 있다.

  • '''독락당'''


광해군 때 박인로(朴仁老)가 지은 가사. 노계가 이언적(李彦迪)이 살고 있던 경주 옥산(玉山) 서원의 독락당을 찾았을 때 이언적을 그리어 그 곳의 정경을 노래한 것으로 <노계문집>에 실려 전한다.

  • '''영남가'''


선조 때 박인로가 지은 가사. 인조 13년(1635) 그의 75세 때의 작품. 영남 안절사(按節使) 이근원(李謹元)이 이곳 사람들을 잘 다스림을 찬미하여 부른 것이라 하며, <노계집>에 전한다.

  • '''노계가'''


인조 때 박인로가 지은 가사. 내용은 그가 만년에 살던 노계의 경치를 읊은 것으로 문집 <노계집>에 실려 전한다.

  • '''고공가'''


조선 선조 때 작가 미상의 가사. 허전(許▩) 또는 선조가 지었다고 하는데 내용은 만조 백관을 머슴에 비유하여 기울어지는 나라살림을 상전인 임금의 입장에서 탄식한 것이다.

  • '''조천록'''


선조-인조 때의 학자 이수광이 지은 가사. 전후 2곡으로 되었다 하는데, 가사는 전하지 않고 있다.

  • '''유민탄'''


조선 선조-인조 때 사람 조위탄이 지은 가사. 가사는 전하지 않았다. <순오지(旬五志)>에 의하면 광해군 때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참상을 보고 지었다 함.

  • '''목동가'''


조선 광해군-현종 때의 학자 임유후가 지은 가사. 아우 지후(之後)가 역모의 죄로 일문이 화를 입게 되자, 숨어 살며 초사(楚辭)를 본받아 지었다 하나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 '''무호가'''


조선 영조 때 무관 강응환(1735-1795)이 지은 가사. 모두 128구로 무인의 호기와 병자란의 원한을 갚겠다는 무인의 결심을 읊은 것이다

  • '''농가월령가'''


조선 철종 때 정학유(鄭學游)가 지은 가사(고상안이 지었다고 하나 잘못임). 내용은 1년 동안의 농가의 할 일을 가사 형식으로 해서 권농(勸農)의 내용을 읊은 것이다.

  • '''한양가'''


조선 헌종 10년 본명은 알 수 없는 한산거사가 지은 장편가사. 작품은 조선조의 문물을 찬양한 노래로 모두 1622구의 장편이다. 한양의 지세의 뛰어남과 서울의 웅대한 궁전, 찬란한 관아, 번화한 거리의 높이, 임금의 거동, 과거의 광경 등을 노래하고 끝으로 역대 도읍 중에서 한양이 으뜸이라는 것을 찬양하였다.

  • '''일동장유가'''


조선 영조 39년에 김인겸이 지은 장편가사. 일종의 기행 문학으로 내용은 그가 통신사로서 1763년 8월 일본에 가는 조엄의 서기이자 총 500명에 달하는 조선 통신사의 일원으로 따라가 그 이듬해 1764년 7월 8일 돌아올 때까지 그 곳의 문물·제도·인정·풍속 등을 듣고 본대로 적은 것으로 모두 8천 수백 구이다.

  • '''연행가'''


조선 고종 때 홍순학(洪淳學, 1842- ? )이 지은 장편가사. 고종 3년 중국 연경(燕京)을 다녀와서 그 이듬해에 지은 것으로 일종의 기행 문학이라 할 수 있다.

  • '''만언사'''


조선 철종 때 홍문관 교리 김진형(金鎭衡, 1801- ? )이 지은 장편가사. 모두 1040구의 장편. 그가 이조 판서 홍기순의 당파싸움을 논박하다가 몰리어 명천으로 귀양갔는데, 이 가사는 그때 유배지의 생활과 견문을 노래한 유배 문학 작품으로 이 역시 장편 기행문이라 할 수 있다.

3. 4. 내방가사

조선 후기에는 규중 여성들에 의해 여성 문학으로서의 가사가 창작되었다. 내방가사는 조선 말 가정에 숨은 부녀의 손으로 지어지고 전해진 노래들의 총칭으로, 그 수가 몇십에 이른다. 현재 알려진 것의 대부분은 작가가 알려지지 않았으며, 선조 때 무옥(巫玉)이 지었다고 하는 규원가(閨怨歌)는 대표적인 내방가사 중 하나이다.[12] 내방가사는 봉건시대의 사슬에 얽매여 규방에 숨어 살던 여성들의 하소연, 슬픔, 남녀간의 애정, 시집살이의 괴로움, 예의범절, 현모양처의 도리 등 부녀자의 생활을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다. 양반 계급 부녀자들이 주로 지었으며, 대개 궁체 국문으로 두루마리에 적혀 전해진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내방가사는 여성 문학으로, 잡가는 서민 문학으로 각기 분화되어 차츰 민요로 흡수되었다.

허난설헌은 조선 선조 때의 시인으로, 본명은 경번(景樊), 난설헌은 그의 호이다. 허균의 누이로 특히 한시에 뛰어났으며, 올케인 무옥과 함께 가사 규원가를 지었고, 시집 난설헌시집이 전해진다.

내방가사의 예시는 다음과 같다.

제목내용가사 일부
미상남녀간의 연정"…주야 상사 내 마음을 헤아리고 못 보기는 뉘 탓이며, 못 잊기는 무삼 일고 불쌍하고 가련하다. 이내 청춘 어여쁘다…"
미상여자가 시집가서 행할 도리와 범절 훈계"…남의 흥망 성쇠는 부녀 얻기 달렷니라. 시부모를 호양하여 이웃 사람 칭찬하니, 음식 시비 문안하고 음식 등절 맞기 하소. 의복을 정하기 하고 낯빛을 화하기 하며 한 걸음도 조심하소 … "
미상노처녀의 신세타령" … 어디서 손님오면 행여나 중매신가, 아희 불러 힐문한 즉, 풍턴 약정 환자 재촉. 어디서 편지 왔네, 행여나 청혼인가 아희다려 물어보니, 외삼촌의 부음이라, 애닮고 설은지고 이내 간장을 어이 할고 … "
미상시집가는 외딸에게 어머니가 시집살이를 훈계"인문이 생긴 후에 오륜이 쫓아나니, 규중의 여자로서 다알수야 있나마는 칠거지악 옛 법이라 삼종지도 모를소냐. 그중에 사친지도 백행 중에 으뜸이라."
미상시집간 딸이 친정 어버이를 그리워하여 읊은 노래" … 못 할레라 못 할레라 부모 생각 못할레라. 전생에 무삼 죄로 여자몸 되어 나서 부모 형제 멀리 두고 이십 전에 출가하야 부모 동기 그리는고 … "
미상부녀들의 봄놀이 (춘흥)(내용 없음)
미상봄철 여자들이 잠시 시집살이의 굴레를 벗어나 즐겁게 화전놀이하던 일을 노래 (화전: 진달래 꽃잎을 쌀가루에 섞거나 무쳐 부친 부꾸미)(내용 없음)


3. 5. 개화 가사

개화가사는 개화기에 제작, 발표된 가사를 말한다. 가사의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항 이후의 문명개화, 부국강병의 의지를 내용에 반영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개화기 시가의 한 유형으로, 창가신체시보다 앞서 제작되어 조선에서 볼 수 있는 사상 최초의 근대적 양식의 시가라고 할 수 있으나 과도기적인 면도 강하게 지닌다.[11]

4. 주제

가사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가사에는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룬다는 생각, 현세의 인연이 후세로 이어진다는 순환적 인식 등 당대인들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13] 시조나 가사에 나타나는 "특정 자연물로 환생" 모티프는 화자의 소망을 강조하고,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13]

5. 의의

가사는 원래 4·4조의 운문으로 표현이 자유롭고 낭랑하게 읊을 수 있어 부녀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애송되었다.[11] 가사는 잡가와는 달리 양반문학의 성격을 그대로 간직하며 숙종 이후에는 장편으로 변모하여 창작되었다.[11] 이 시대의 작품은 서사시적인 것이 대부분이며 그 내용은 역사·설교·교훈·기행 등을 표현했다.[11] 묘사가 사실적이며 날카롭고 능란한 것은 실학·소설 등의 영향과 이 시대의 추세였던 것 같다.[11]

형식 면에서 변화가 이루어져 현실의 율조와 산문적인 내용이 분화됨을 볼 수 있다.[11] 즉 완전히 산문에 가까워지고, 다른 일부는 전통적인 민요 등의 영향으로 창(唱)의 부수적인 창사(唱詞)로 변질된 것이다.[11] 이 시대를 대표하고 있는 가사는 日東壯遊歌|일동장유가한국어, 燕行歌|연행가한국어, 漢陽歌|한양가한국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대부분은 가사의 산문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11]

선조 무렵에는 송강·노계 가사 외에도 이원익의 雇工答主人歌|고공답주인가한국어, 이수광의 朝天錄|조천록한국어, 조위한의 流民嘆|유민탄한국어, 임유후의 牧童歌|목동가한국어 등의 가사가 전해진다.[11] 영조·정조시대에는 이진유의 續思美人曲|속사미인곡한국어, 강응환의 武豪歌|무호가한국어, 김인겸의 日東壯遊歌|일동장유가한국어 등이 나왔다.[11] 정조 때에는 안조환의 萬言詞|만언사한국어, 순조 때에는 조성신의 皆岩歌|개암가한국어, 陶山別曲|도산별곡한국어, 정학유의 農家月令歌|농가월령가한국어가 발표되었다.[11] 현종 때에는 한산거사의 漢陽歌|한양가한국어, 철종 때에는 동학 교주 최수운의 龍潭遺詞|용담유사한국어, 敎訓歌|교훈가한국어 등이, 고종 때에는 홍순학의 燕行歌|연행가한국어가 창작되었다.[11]

참조

[1] 웹사이트 Gasa, Korean traditional popular songs http://world.kbs.co.[...] 2023-03-03
[2] 웹사이트 Gasa (Narrative Song) http://english.cha.g[...]
[3] 웹사이트 Korean literature {{!}} History, Authors, Books, Characteristics, & Facts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3-03-06
[4] 웹사이트 Korean literature {{!}} History, Authors, Books, Characteristics, & Facts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3-03-06
[5] 웹사이트 Korean Literature Now - KLN > Strings > Inkstone > Gagaek: The Idols of Premodern Korea https://www.kln.or.k[...] 2023-03-06
[6] 서적 한국전통문화사전 교육출판
[7] 서적 신판 한국 조선을 아는 사전 평범사
[8] 서적 일본대백과전서 소학관
[9] 웹사이트 서왕가(西往歌) http://encykorea.aks[...]
[10] 웹인용 가사 (歌辭) https://encykorea.ak[...] 2024-02-13
[11] 백과사전 가사의 성행 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
[12] 서적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 한국교육방송공사 2009-01-05
[13] 시험문제 200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 홀수형 3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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