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이 마사히로
1. 개요
가와이 마사히로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코치,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이다. 오카야마현립 오카야마미나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내야수로 활약하며 뛰어난 수비와 희생 번트를 주무기로 533개의 통산 희생타를 기록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2006년 은퇴 후 주니치, 요미우리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2019년부터는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하며, 2022년부터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팜 총감독을 맡고 있다.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출생일 | 1964년 9월 27일 |
|---|---|
| 출생지 |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미나미구 |
| 신장 | 176 |
| 체중 | 75 |
| 포지션 | 내야수, 외야수 |
| 투구 | 우 |
| 타석 | 우 |
| 고등학교 | 오카야마현립 오카야마 미나미 고등학교 |
|---|---|
| 프로 입단 | 1982년 (드래프트 4순위) |
| 선수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3년 ~ 2003년) 주니치 드래건스 (2004년 ~ 2006년) |
| 첫 출장 | 1984년 4월 24일 |
| 마지막 경기 | 2006년 10월 26일 (일본 시리즈 제5차전) |
| 코치 | 주니치 드래건스 (2007년 ~ 201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2011년 ~ 2018년, 2022년 ~ ) |
|---|
| 타율 | .266 |
|---|---|
| 안타 | 1199 |
| 타점 | 322 |
| 도루 | 47 |
| 홈런 | 43 |
| 도루왕 | 3회 (1990년, 1991년, 1994년 센트럴 리그) |
|---|---|
| 베스트 나인 | 1회 (1994년 센트럴 리그) |
| 골든 글러브 | 6회 (1989년 ~ 1991년, 1993년, 1994년, 1996년 센트럴 리그) |
| 올스타 | 2회 (1990년, 1993년) |
| 센트럴 리그 회장 특별상 | 1회 (2003년) |
-
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 -
광주고등법원
광주고등법원은 1952년에 설치되어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전북특별자치도, 제주특별자치도를 관할하며, 제주와 전주에 원외재판부를 두고 있다. -
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 -
1502년
1502년은 율리우스력으로 수요일에 시작하는 평년으로, 이사벨 1세의 이슬람교 금지 칙령 발표, 콜럼버스의 중앙아메리카 해안 탐험,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상관 설립, 크리미아 칸국의 킵차크 칸국 멸망, 비텐베르크 대학교 설립, 최초의 아프리카 노예들의 신대륙 도착 등의 주요 사건이 있었다. -
연도별 타격 성적을 포함한 문서 -
도마시노 겐지
도마시노 겐지는 1988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1989년 신인왕을 수상하고 빠른 발과 수비력을 갖춘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활약한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현재 야구 해설가이다. -
연도별 타격 성적을 포함한 문서 -
나가오카 히데키
나가오카 히데키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유격수 및 2루수로 활동하며 2022년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하고 2024년 최다 안타 타이틀을 획득했다. -
일본의 야구 선수 -
도마시노 겐지
도마시노 겐지는 1988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1989년 신인왕을 수상하고 빠른 발과 수비력을 갖춘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활약한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현재 야구 해설가이다. -
일본의 야구 선수 -
다도코로 젠지로
다도코로 젠지로는 시즈오카 상업고등학교 시절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 전 경기 완봉승으로 우승을 이끌었으며, 고쿠테쓰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투수로 활동, 은퇴 후에는 코치, 야구 연맹 임원, 유소년 야구팀 대표를 역임했다.
2. 선수 경력
오카야마현립 오카야마미나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NPB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거인)로부터 4순위 지명을 받고 투수로 입단했다. 입단 직후 내야수로 전향하여 뛰어난 수비력과 희생 번트를 주무기로 활약했다.
===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83년 ~ 2003년) ===
1984년에 수비력이 오 사다하루 감독의 눈에 띄어 1군에 처음 승격했고, 1985년부터 수비 요원으로 1군에 정착했다. 1989년에는 등번호를 0으로 변경하고, 후지타 모토시 감독 복귀와 함께 주전 유격수로 자리 잡았다.
1990년 9월 4일, 한신의 와다 유타카의 연간 희생타 기록(56개)을 넘어 프로 야구 신기록을 수립했다. 1991년에는 자신의 연간 희생타 신기록(66개)을 갱신했다. 1990년부터 1997년까지 8시즌 연속 센트럴 리그 최다 희생 번트를 기록했다.
1993년부터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체제에서도 2번 유격수로 활약하며, 4년 연속 리그 최다 희생타를 기록했다. 1994년에는 타율 3할을 넘기며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1998년에는 통산 452 희생 번트로 히라노 겐의 기록을 넘어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을 수립했다.
1999년에는 니오카 도모히로의 가입으로 출장 기회가 줄었지만, 수비 및 번트 요원으로 팀에 공헌했다. 2003년 8월 20일, 도쿄 돔에서 통산 512 희생타를 달성하며 에디 콜린스의 메이저 리그 기록을 넘어섰고, 기네스 세계 기록에도 인증되었다.
2003년 시즌 막바지에 하라 다쓰노리 감독으로부터 1군 수비·주루 코치 취임을 제안받고 현역 은퇴를 표명했으나, 하라 감독의 사임으로 코치 취임이 보류되었다. 이후 구단으로부터 2군 코치 취임을 통보받았지만, 가와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은퇴를 철회, 타 구단에서의 선수 생활을 희망하며 2003년 10월 6일 요미우리를 퇴단했다.
===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2004년 ~ 2006년) ===
2003년 시즌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방출되었으나,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하여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자신과 같은 유격수이자 구단 역사상 최다 통산 홈런 기록을 보유한 우노 카츠가 달았던 등번호 7을 받았다.
2004년, 오치아이 히로미쓰 감독의 지휘 아래 대타 번트, 수비 요원으로 존재감을 발휘하며 사요나라 안타를 2개나 치는 등 주니치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이적 후 처음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 대타로 출전하여 번트를 성공시키고, 삿포로 돔에서 사토 히로시를 상대로 홈런을 쳐 친정팀인 요미우리 응원석을 포함하여 경기장 전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같은 해 일본 시리즈 2차전에서는 9회초부터 타츠나미 카즈요시를 대신해 3루 수비를 맡아 아카타 쇼고의 땅볼을 1루로 송구했다.
2005년에는 출전 기회가 줄었지만, 수비에 쇠퇴가 보인 타츠나미를 대신해 3루 수비 강화와 대타로 활약했다.
2006년에는 일본 프로야구계 최초의 "멘탈 어드바이저"로 취임했다. 팀이 이기고 있는 경기에서 8~9회쯤부터 주로 타츠나미의 수비 강화로 출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아라키 마사히로의 부상 등으로 5월에는 "2번 타자, 2루수"로 선발 출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리노 마사히코가 부상에서 복귀하고, 타츠나미가 대타 요원이 되었으며, 나라하라 히로시가 금전 트레이드로 영입되고, 7월경에 아라키가 복귀하면서 출전 기회가 없어졌고, 올스타전 직전에 등록이 말소되었다. 이후 1군에 동행하며 멘탈 어드바이저로서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주니치 스포츠에서 매주 월요일마다 "내일을 향한 보내기 번트"라는 제목으로 기고도 했다.
10월 13일, 선수 계약을 맺지 않겠다는 방침과 1군 코치 취임 요청을 구단으로부터 전달받아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 10월 15일, 나고야 돔에서 열린 시즌 최종전 요코하마전은 가와이의 은퇴 경기로, 2번 타자, 3루수로 선발 출장했다. 첫 타석에서 안타, 두 번째 타석에서는 번트를 성공시켜 큰 박수를 받았다. 7회에는 1이닝 동안 유격수 수비를 맡았다. 이날의 희생 번트로 통산 533희생타를 기록하며 자신이 가진 기록을 경신했다. 경기 종료 후 인사에서는 "24년간의 선수 생활 중 주니치에서 보낸 3년이 최고였다. 일본 시리즈를 은퇴 무대로 삼고 싶다"라고 말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5차전에 대타로 등장하여 마지막 보내기 번트를 성공시키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2.1. 프로 입단 전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출신으로, 오카야마 시립 제2 후지타 초등학교, 후지타 중학교를 거쳐 오카야마현립 오카야마미나미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경식 야구부의 투수로서 2학년(1981년) 여름에 제63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였고, 3학년(1982년) 봄에는 제54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하여 주장의 입장에서 팀을 이끌었다. 2회전에서 와세다 실업과 대전에서 아라키 다이스케와 호각의 투수전을 펼쳤으나, 팀은 패했다. 그러나 여름의 선수권 오카야마 대회 준결승에서 2학년 야기 유타카를 4번 타자로 기용한 오카야마 토상에게 패했다.
오카야마 미나미 고등학교 경식 야구부 동기로는 혼마 타츠히코, 1학년 후배로는 요코야 소이치가 있었다. 1982년 NPB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거인)로부터 4순위 지명을 받고 투수로 입단했다.
2.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83년 ~ 2003년)
가와이 마사히로는 입단 직후 내야수로 전향하여 뛰어난 수비력과 희생 번트를 주무기로 활약했다. 1984년에 수비력이 오 사다하루 감독의 눈에 띄어 1군에 처음 승격했고, 1985년부터 수비 요원으로 1군에 정착했다. 1989년에는 등번호를 0으로 변경하고, 후지타 모토시 감독 복귀와 함께 주전 유격수로 자리 잡았다.
1990년 9월 4일, 한신의 와다 유타카의 연간 희생타 기록(56개)을 넘어 프로 야구 신기록을 수립했다. 1991년에는 자신의 연간 희생타 신기록(66개)을 갱신했다. 1990년부터 1997년까지 8시즌 연속 센트럴 리그 최다 희생 번트를 기록했다.
1993년부터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체제에서도 2번 유격수로 활약하며, 4년 연속 리그 최다 희생타를 기록했다. 1994년에는 타율 3할을 넘기며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1998년에는 통산 452 희생 번트로 히라노 겐의 기록을 넘어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을 수립했다.
1999년에는 니오카 도모히로의 가입으로 출장 기회가 줄었지만, 수비 및 번트 요원으로 팀에 공헌했다. 2003년 8월 20일, 도쿄 돔에서 통산 512 희생타를 달성하며 에디 콜린스의 메이저 리그 기록을 넘어섰고, 기네스 세계 기록에도 인증되었다.
2003년 시즌 막바지에 하라 다쓰노리 감독으로부터 1군 수비·주루 코치 취임을 제안받고 현역 은퇴를 표명했으나, 하라 감독의 사임으로 코치 취임이 보류되었다. 이후 구단으로부터 2군 코치 취임을 통보받았지만, 가와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은퇴를 철회, 타 구단에서의 선수 생활을 희망하며 2003년 10월 6일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퇴단했다.
2.3.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2004년 ~ 2006년)
2003년 시즌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방출되었으나,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하여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자신과 같은 유격수이자 구단 역사상 최다 통산 홈런 기록을 보유한 우노 카츠가 달았던 등번호 7을 받았다.
2004년, 오치아이 히로미쓰 감독의 지휘 아래 대타 번트, 수비 요원으로 존재감을 발휘하며 사요나라 안타를 2개나 치는 등 주니치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이적 후 처음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 대타로 출전하여 번트를 성공시키고, 삿포로 돔에서 사토 히로시를 상대로 홈런을 쳐 친정팀인 요미우리 응원석을 포함하여 경기장 전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같은 해 일본 시리즈 2차전에서는 9회초부터 타츠나미 카즈요시를 대신해 3루 수비를 맡아 아카타 쇼고의 땅볼을 1루로 송구했다.
2005년에는 출전 기회가 줄었지만, 수비에 쇠퇴가 보인 타츠나미를 대신해 3루 수비 강화와 대타로 활약했다.
2006년에는 일본 프로야구계 최초의 "멘탈 어드바이저"로 취임했다. 팀이 이기고 있는 경기에서 8~9회쯤부터 주로 타츠나미의 수비 강화로 출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아라키 마사히로의 부상 등으로 5월에는 "2번 타자, 2루수"로 선발 출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리노 마사히코가 부상에서 복귀하고, 타츠나미가 대타 요원이 되었으며, 나라하라 히로시가 금전 트레이드로 영입되고, 7월경에 아라키가 복귀하면서 출전 기회가 없어졌고, 올스타전 직전에 등록이 말소되었다. 이후 1군에 동행하며 멘탈 어드바이저로서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주니치 스포츠에서 매주 월요일마다 "내일을 향한 보내기 번트"라는 제목으로 기고도 했다.
10월 13일, 선수 계약을 맺지 않겠다는 방침과 1군 코치 취임 요청을 구단으로부터 전달받아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 10월 15일, 나고야 돔에서 열린 시즌 최종전 요코하마전은 가와이의 은퇴 경기로, 2번 타자, 3루수로 선발 출장했다. 첫 타석에서 안타, 두 번째 타석에서는 번트를 성공시켜 큰 박수를 받았다. 7회에는 1이닝 동안 유격수 수비를 맡았다. 이날의 희생 번트로 통산 533희생타를 기록하며 자신이 가진 기록을 경신했다. 경기 종료 후 인사에서는 "24년간의 선수 생활 중 주니치에서 보낸 3년이 최고였다. 일본 시리즈를 은퇴 무대로 삼고 싶다"라고 말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5차전에 대타로 등장하여 마지막 보내기 번트를 성공시키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3. 지도자 경력
가와이 마사히로는 2007년 주니치 드래건스 1군 내야 수비·주루 코치로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등번호는 71번을 달았고, 주로 1루 코치 박스에 섰으며, 오픈전에서는 3루 코치로 경험을 쌓기도 했다. 2010년에는 주니치 드래건스 2군 감독을 맡았으나, 같은 해 9월 28일 갑작스럽게 퇴단 통보를 받았다.
이후 2011년, 친정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감독으로 복귀하며 등번호 78번을 달았다. 8년 만에 복귀한 가와이는 초중량 타선이라 불리던 팀에 적극적으로 번트를 시도하게 하여, 팀의 희생타 수를 4배, 도루 수를 2배 이상 증가시키는 등 세밀한 야구를 통해 팀을 이끌었다. 2012년에도 2군 감독을 맡았고, 2012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코치로 등록되어 벤치에 들어갔다.
2013년부터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수석 코치로 승격되었고,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기간이나 감독의 결장 시에는 감독 대행을 맡기도 했다. 2015년 시즌 중에는 3루 베이스 코치를 맡기도 했다.
2016년부터 2017년까지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3군 감독을 역임했고, 2017년 아시아 윈터 베이스볼 리그에서는 NPB 이스턴 선발팀 감독을 맡았다. 2018년에는 다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감독으로 복귀하여 이스턴 리그 우승을 이끌었지만, 시즌 후 해임되었다.
2019년부터 2021년까지는 니혼 TV, 닛폰 방송, J 스포츠 등에서 야구 해설가 및 스포츠 호치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다. 또한 학생 야구 자격 회복 연수 제도를 통해 모교인 오카야마 미나미 고등학교의 임시 코치를 맡기도 했다. 2021년에는 한신 타이거스 1군 스프링 캠프에 임시 코치로 참가하여 내야 수비와 번트 기술을 지도하기도 했다.
202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팜 총감독으로 복귀하며 다시 등번호 78번을 달았다. 2023년에는 1군 종합 코치, 2024년에는 내야 수비 코치를 맡았으며, 2025년부터는 2군 야수 종합 코치를 맡을 예정이다.
4. 해설가 및 기타 경력
니혼 TV, 닛폰 방송 야구 해설가(2019년 ~ ), 스포츠호치 야구 평론가(2019년 ~ )를 역임했다. 요미우리 신문 스포츠 어드바이저(2018년 ~ 2022년) 직책도 맡았다. 2019년에는 학생 야구 자격 회복 연수 제도를 이용하여 모교인 오카야마 미나미 고등학교의 임시 코치로 취임했다. 2021년에는 한신의 1군 스프링 캠프에 임시 코치로 참가하여 내야 수비와 번트 기술을 지도했다. 자이언츠 OB가 라이벌 구단인 한신의 스프링 캠프 임시 코치를 맡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오카야마 미나미 고등학교 시절 팀 동료였던 한신 구단 프런트 요코야의 요청이 지도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선 TV, 아사히 방송 TV 등 한신 주최 경기 중계에 게스트 해설자로 초청받기도 했다.
5. 수상 및 타이틀 경력
가와이 마사히로는 베스트 나인 1회(1994년), 골든 글러브상 6회(1989년 ~ 1991년, 1993년, 1994년, 1996년), 센트럴 리그 회장 특별상 1회(2003년)를 수상했다. JA 전농 Go·Go상(매직 글러브상 : 1993년 6월), 도쿄 돔 MVP 2회(1991년, 1993년)를 수상했다. 센트럴 리그 연맹 특별 표창(회장 특별상 : 2003년)은 MLB 기록을 넘는 통산 희생타 기록 달성으로 인해 수여되었다. 그 외 야나세·자이언츠 MVP상(1990년), 베스트 파더 옐로우 리본상 in 「프로 야구 부문」(2009년)을 수상했다.
6. 개인 기록
; 세계 기록
* 통산 희생타: 533
; 첫 기록
* 첫 출장: 1984년 4월 24일,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8회말에 이시와타 시게루를 대신해 유격수로 출장
* 첫 선발 출장: 1984년 5월 24일, 한신 타이거스 11차전 (고라쿠엔 구장), 8번·유격수로 선발 출장
* 첫 안타: 1984년 6월 2일, 야쿠르트 스왈로스 7차전 (고라쿠엔 구장), 8회말에 가토리 요시타카의 대타로 출장, 미야모토 겐지로부터 단타
* 첫 타점: 1985년 5월 6일, 야쿠르트 스왈로스 6차전 (고라쿠엔 구장), 2회말에 오카와 아키라로부터 적시 2루타
* 첫 희생타: 1985년 6월 13일, 야쿠르트 스왈로스 12차전 (후쿠이 현영 구장), 7회말에 아이 에이지로로부터 투수 앞 희생타
* 첫 홈런: 1988년 7월 7일, 주니치 드래건스 16차전 (삿포로 시 마루야마 구장), 4회말에 곤도 신이치로부터 좌월 솔로
; 이정표 기록
* 200 희생타: 1992년 7월 1일, 한신 타이거스 17차전 (도쿄 돔), 8회말에 유나가 나가히로로부터 ※역대 11번째
* 250 희생타: 1993년 8월 25일, 한신 타이거스 22차전 (도쿄 돔), 1회말에 나카타 코지로부터 ※역대 4번째
* 300 희생타: 1995년 5월 4일, 한신 타이거스 3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1회초에 야마자키 카즈히로로부터 1루 앞 희생타 ※역대 3번째
* 1000경기 출장: 1996년 4월 7일, 한신 타이거스 3차전 (도쿄 돔), 2번·유격수로 선발 출장 ※역대 329번째
* 350 희생타: 1996년 5월 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4차전 (도쿄 돔), 1회말에 곤도 요시히사로부터 ※역대 2번째
* 400 희생타: 1997년 4월 9일, 주니치 드래건스 2차전 (도쿄 돔), 1회말에 우도 카츠야로부터 투수 앞 희생타 ※역대 2번째
* 1000안타: 1997년 10월 8일, 야쿠르트 스왈로스 27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1회초에 이시이 카즈히사로부터 좌전 안타 ※역대 187번째
* 450 희생타: 1998년 7월 19일, 야쿠르트 스왈로스 19차전 (도쿄 돔), 8회말에 마크 에이커로부터 투수 앞 희생타 ※역대 2번째
* 452 희생타: 1998년 8월 15일, 한신 타이거스 19차전 (도쿄 돔), 7회말에 요시다 토요히코로부터 투수 앞 희생타 ※기존 NPB 기록(히라노 켄의 451 희생타) 갱신
* 1500경기 출장: 2001년 5월 23일, 야쿠르트 스왈로스 8차전 (도쿄 돔), 7회말에 카시와다 타카시의 대타로 출장 ※역대 132번째
* 500 희생타: 2002년 7월 25일, 한신 타이거스 18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9회초에 구로다 테츠시의 대타로 출장, 마크 발데스로부터 투수 앞 희생타 ※역대 최초
* 512 희생타: 2003년 8월 20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25차전 (도쿄 돔), 6회말에 카와나카 모토츠구의 대타로 출장, 도밍고 구즈만으로부터 투수 앞 희생타 ※MLB 기록(에디 콜린스의 511 희생타) 갱신
; 기타 기록
* 올스타전 출장: 2회()
6.1. 첫 기록
가와이 마사히로의 첫 출장은 1984년 4월 24일,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와의 1차전에서 8회말 이시와타 시게루를 대신해 유격수로 출장한 것이다. 첫 선발 출장은 1984년 5월 24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스와의 11차전에서 8번·유격수로 선발 출장한 것이다.
첫 안타는 1984년 6월 2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7차전에서 8회말 가토리 요시타카의 대타로 출장하여 미야모토 겐지로부터 단타를 기록한 것이다. 첫 타점은 1985년 5월 6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6차전에서 2회말 오카와 아키라로부터 적시 2루타를 기록한 것이다. 첫 희생타는 1985년 6월 13일, 후쿠이 현영 구장에서 열린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12차전에서 7회말 아이 에이지로로부터 투수 앞 희생타를 기록한 것이다. 첫 홈런은 1988년 7월 7일, 삿포로 시 마루야마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16차전에서 4회말 곤도 신이치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을 기록한 것이다.
6.2. 기록 달성 경력
가와이 마사히로는 선수 생활 동안 여러 기록을 달성했다. 1992년 7월 1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통산 200희생타(역대 11번째)를 기록했고, 1993년 8월 25일 한신전에서 통산 250희생타(역대 4번째)를 달성했다. 1995년 5월 4일에는 한신을 상대로 통산 300희생타(역대 3번째)를 기록했다.
1996년 4월 7일 한신과의 경기에서 통산 1000경기 출장(역대 329번째)을 달성했고, 같은 해 5월 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통산 350희생타(역대 2번째)를 기록했다. 1997년 4월 9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통산 400희생타(역대 2번째)를 달성했으며, 같은 해 10월 8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통산 1000안타(역대 187번째)를 기록했다.
1998년 7월 19일 야쿠르트전에서 통산 450희생타(역대 2번째)를 달성했고, 같은 해 8월 15일 한신전에서 통산 452희생타를 기록하며 히라노 겐이 가지고 있던 일본 프로 야구 기록(451희생타)을 경신했다. 2001년 5월 23일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통산 1500경기 출장(역대 132번째)을 달성했다.
2002년 7월 25일 한신전에서 통산 500희생타(사상 최초)를 기록했고, 2003년 8월 20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의 경기에서 통산 512희생타를 달성하며 에디 콜린스의 메이저 리그 기록(511희생타)을 넘어섰다. 은퇴 경기인 2006년 10월 15일에는 통산 533희생타를 기록했다.
그 외에도 1984년 4월 24일에 첫 출장, 5월 24일에 첫 선발 출장, 6월 2일에 첫 안타를 기록했고, 1985년 5월6일에 첫 타점과 6월13일에 첫 희생타를 기록했다. 1988년 7월 7일에는 첫 홈런을 기록했다. 또한, 올스타전에 2회(1990년, 1993년) 출장했다.
6.3. 기타
가와이 마사히로는 통산 2회에 걸쳐 올스타전에 출장했다.(1990년, 1993년)
7. 상세 정보
7.1. 등번호
가와이 마사히로는 1983년부터 1988년까지 60번, 1989년부터 1999년까지 0번, 2000년부터 2003년까지 6번, 2004년부터 2006년까지 7번, 2007년부터 2010년까지 71번, 2011년부터 2018년, 그리고 2023년부터 현재까지 78번을 등번호로 사용했다.
8. 평가
가와이는 뛰어난 번트 능력으로 '번트의 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통산 희생 번트 성공률은 9할을 넘으며, 특히 47개의 희생 번트를 기록한 1995년에는 실패가 없었다. 번트의 요령으로는 "과감한 결단이 중요"하며, "여기에 굴린다고 결정했다면, 어떤 공이 와도 거기에 굴린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한다. 기술적으로는 눈과 배트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가와이가 기록한 희생 번트의 대부분은 벤치의 사인에 의한 것이며, 스스로 판단하여 번트한 경우는 통산 10번 정도라고 한다.
유격수로서 골든 글러브상을 6번 수상했다. 가와이 본인은 이케야마나 노무라가 더 낫다고 말하며, "질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해왔다고 말했다. 유격수 외에도 2루수, 3루수, 외야수로도 출전했으며, 주니치 시절에는 한 경기에서 1루수도 맡았다.
주루에 관해서는 두 자릿수의 도루를 기록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주자로서 루에 나갔을 때에는 상대 투수의 버릇을 연구하여 조금이라도 빨리 스타트를 끊을 수 있도록 유의했다.
9. 기타
현역 시절부터 말장난을 잘했고, 야구 해설가로 전향한 후에도 해설을 담당하는 경기 중계에서 종종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가와구치 가즈히사에 따르면 "말장난 센스는 썰렁하다(매우 좋지 않다)"라며, "열대야에는 이나가와 준지의 괴담이나 가와이의 아재 개그네(웃음)"라고 비꼬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인격자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무투파의 일면도 있어서, 현역 시절에 경기 중 속상한 일이 있으면 벤치 뒤 벽이나 로커에다 화풀이를 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거인의 팀 동료들로부터는, 등번호 0에 빗대어 음으로 "태풍 0호"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2000년대에 들어 세이버메트릭스가 침투하기 시작하면서 프로 야구에서는 희생 번트가 감소하고 있는데, 그 데이터를 텔레비전 프로그램 "싸워라! 스포츠 내각"의 게스트로 초대되었을 때 보여준 적이 있다. 가와이는 긴 침묵 끝에 "수치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