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오카 도모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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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오카 도모히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히로시마현 출신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킨키 대학을 거쳐 199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2008년까지 활약하며, 2002년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2008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로 이적하여 2013년 은퇴했으며,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로 활동하다가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의 도야마 GRN 선더버즈 감독을 맡기도 했다. 선수 시절에는 2003년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으며, 2006년에는 2타석 연속 만루 홈런을 기록하는 등 다양한 기록을 세웠다. 또한, 부모를 교통사고로 잃은 경험을 바탕으로, 교통사고 피해를 입은 어린이들을 야구 경기에 초청하는 사회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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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오카 도모히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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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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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내야수/코치 |
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
등번호 | 76 |
타석 | 우타 |
투구 | 우투 |
데뷔일 | 1999년 4월 2일 |
데뷔 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
선수 경력 | |
감독 경력 | |
코치 경력 | |
개인 정보 | |
본명 | 니오카 도모히로 (二岡 智宏) |
출생지 | 히로시마현 미요시시 |
생년월일 | 1976년 4월 29일 (세) |
신장 | 180 |
체중 | 81 |
학교 | 히로시마고료 고등학교 긴키 대학 |
선수 기록 | |
첫 출장 | 1999년 4월 2일 |
마지막 출장 | 2013년 9월 1일 |
드래프트 정보 | |
드래프트 연도 | 1998년 |
드래프트 순위 | 2순위 (역지명) |
통계 (2008년 기준) | |
타율 | 0.285 |
홈런 | 157 |
타점 | 516 |
2. 선수 경력
요미우리 자이언츠 2차 지명을 받아 프로에 데뷔한 니오카 도모히로는 1999년 126경기에 출전, 타율 0.289를 기록하며 주전 유격수 자리를 꿰찼다. 신인으로서 한 시즌에 2개의 사요나라 홈런을 기록하는 등 활약했다.[5][9][10]
2000년에는 119경기에 출전, 10홈런 32타점을 기록했다. 시즌 초반 부상에도 불구, 9월 24일 주니치전에서 센트럴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사요나라 홈런을 쳤다.[12]
2001년에는 슬럼프와 왼쪽 손목 부상으로 86경기 출전에 그쳤다.[13] 2002년에는 112경기에 출전, 24홈런(자이언츠 유격수 역대 최다)과 타율 0.281을 기록하며 일본 시리즈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14] 세이부와의 일본 시리즈 MVP에도 선정되었다.[16][17][18][19]
2003년에는 커리어 첫 3할 타율(.300)을 기록하고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2004년에는 부상으로 91경기 출전에 그쳤으나,[21] 2005년에는 타율 .301, 16홈런 58타점으로 활약했다.
2006년에는 25홈런, 2007년에는 타율 .295, 20홈런 83타점을 기록했다. 2008년 요미우리 선수 회장에 취임했으나 부상으로 31경기 출전에 그쳤다.
2008년 11월, 마이클 나카무라, 쿠도 타카토와의 트레이드로 하야시 마사노리와 함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로 이적했다.
2009년 닛폰햄 이적 후 지명 타자로 올스타전에 팬 투표로 출전, 대타로도 활약했다. 2010년에는 12개 구단 상대 홈런을 기록하고 2년 연속 올스타전에 출전했다.[27] 2011년에는 부상과 선수 기용으로 출전 횟수가 줄었다.[28] 2012년 타율 .353으로 활약했으나, 2013년 부진으로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
2. 1. 프로 입단 전
히로시마현미요시시 출신으로, 같은 프로 야구 선수인 후쿠하라 시노부와 초등학교부터 고료 고등학교까지 동창이었다. 중학교까지는 니오카가 에이스였다. 1993년 가을, 고료 고등학교 2학년 때 히로시마현 추계 대회에 출전했는데, 10월 2일 준결승전을 응원하러 온 부모님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니오카는 준결승 종료 후 어머니는 무사하지만 아버지가 의식 불명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당일 밤 병원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다음 날인 10월 3일 결승전에 출전했다. 결승전에서는 히로시마 상업을 상대로 9회말 투 아웃까지 8-0으로 앞섰고, 후쿠하라가 완봉 직전이었지만 나카이 테츠유키 감독의 배려로 니오카가 등판해 3구 삼진으로 경기를 끝냈다. 하지만 아버지는 10월 7일에 사망했다. 이 경험으로 니오카는 프로 입단 후 부모님이 교통사고를 당한 초·중학생을 경기에 초대하는 활동을 했다.( 후술 )1994년,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후쿠하라와 함께 투 에이스 겸 3루수로 활약했다. 이 해 고료 고등학교는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히로시마 대회 우승 후보였지만, 3회전에서 아라이 타카히로가 있던 히로시마 공업 고등학교에게 패했다. 고등학교 졸업 당시 프로 구단의 제의가 있었지만, 원래 대학 진학을 희망했기에 킨키 대학에 진학했다. 친형도 고료 고등학교 야구부 소속으로, 1991년 제63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 우승 멤버였다.
킨키 대학에서는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었다. 7시즌 연속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고, 간사이 학생 리그 통산 91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324, 13홈런, 70타점, 114안타를 기록했다. 우타카 신지, 1년 선배인 시미즈 아키오, 포수 후지이 아키토 등과 함께 대학 일본 선수권 등 많은 타이틀을 획득했다. 1997년에는 춘·추계 리그전, 대학 선수권, 메이지 진구 야구 대회, 사회인 야구 일본 선수권 우승팀과의 아마 왕좌 결정전에서 모두 우승하며, 사상 첫 아마추어 5관왕 달성에 기여했다. 같은 해 8월에는 IBAF 인터컨티넨탈 컵에 일본 대표로 출전하여 우승 멤버가 되었다.
1998년 드래프트에서는 니오카 획득을 두고 히로시마 도요 카프, 한신 타이거스,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가 경쟁했다. 히로시마는 지역 출신인 니오카를 고교 시절부터 높이 평가하여, 같은 해 봄에 희망 입단 틀 제도를 통해 획득하겠다는 방침을 일찍이 발표했고, 이 제도에 의한 선수 획득은 니오카 외에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한신도 니오카가 지역 간사이의 긴키 대학에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같은 해 봄에 1위 지명을 표명했지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맹활약한 마쓰자카 다이스케 지명으로 기우는 등 망설임을 보였고, 가을이 되어서야 다시 니오카 지명을 표명했다.
히로시마 스카우트 미야모토 요지로는 긴키 대학 재학 4년 동안 니오카를 지켜봤고, 전일본 대표로 선발되었을 때는 네덜란드·이탈리아까지 원정하여 1998년 가을 시점에서 히로시마에 와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구단도 노무라 겐지로의 후계자로 기대했지만, 최종적으로 니오카는 드래프트 직전에 교섭을 진행하여 만회한 요미우리(우에하라 고지의 1위 지명을 예정하고 있었기에 2위 지명이 확실했다)를 역지명했다. 히로시마 구단은 니오카 본인에게 직접 입단 거절 의사를 듣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드래프트 3년 후인 2001년 9월 출판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 요미우리 자이언츠 니오카 도모히로』에서 니오카의 어머니는 당시 니오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없어 추첨으로 결정하고 싶을 정도"라고 말할 정도로 고민했다고 밝혔다. 또한, '히로시마 거부' 등 근거 없는 발언이나 계약금을 둘러싼 억측 보도에 대해 니오카 본인이 화를 냈고, 히로시마를 조용히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 복잡한 심경이었음을 밝혔다.
하지만 2012년 3월 15일, 아사히 신문 조간에서 1998년 드래프트 지명과 관련하여 요미우리 측에서 니오카 측에 5억엔 + 퇴단 시 공로금 7000만엔 + 성과급 3000만엔이 지급되었다는 의혹이 보도되었다. 계약에서는 구단에서 정해진 최고 표준액 1.5억엔을 초과하는 금액에 대해서는 복수 연도 분할 지급으로 하고, 각 연도의 성과급 조건의 일부를 충족했을 경우에 지급하기로 되어 있었다. 요미우리는 세무상 계약금 분할 지급으로 간주하여 회계 처리를 했고, 니오카도 세무 신고 시 계약금의 일부임을 명확히 했다.
2. 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99년 ~ 200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2차 지명을 받아 프로에 데뷔하여 126경기에 출전, 타율 0.289를 기록했다. 그 해 장기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유격수 레귤러였던 가와아이 마사히로로부터 포지션을 빼앗았다. 4월 24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의 경기에서 9회 2사 1루 타석에서 아와노 히데유키를 상대로 사요나라 2점 홈런[5], 5월 16일 요코하마전에서 1회 초, 야노 에이지를 상대로 개인 첫 선두 타자 홈런[6], 8월 12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 7회 2사 만루 타석에서 야마모토 슈를 상대로 개인 첫 만루 홈런[7], 8월 31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6회, 가와카미 겐신을 상대로 구단 통산 7000호 홈런[8], 9월 19일 히로시마전에서 9회 1사 주자 없는 타석에서 요코야마 류지를 상대로 사요나라 홈런[9]을 기록했다. 신인 선수가 한 시즌에 사요나라 홈런을 2번 기록한 것은 사토 타카오 (국철 스왈로스, 현·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이후 47년 만이며, 역대 2번째였다.[10]에는 119경기에 출전해 10개의 홈런과 32 타점을 기록했다. 시즌 초반부터 오른손 엄지 부상에 시달렸으나 시즌 후반에는 우승 경쟁을 하던 팀에 복귀하여 7월 16일 야쿠르트전에서 9회 무사 무주자 타석에서 이가라시 료타를 상대로 사요나라 홈런[11]을 기록한 외에도, 9월 24일 주니치전에서는 9회 1사 무주자 타석에서 에디 갤러드를 상대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센트럴 리그 (세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사요나라 홈런[12]을 기록했다.
에는 86경기에 출전했다. 개막 직후부터 슬럼프에 빠졌고 7월 19일 한신전에서 입은 왼쪽 손목 유구골 골절로 고생했다.[13]
에는 112경기에 출전하여 24개의 홈런(자이언츠 소속 포지션 선수 역대 기록)과 타율 0.281을 기록했다. 신임 감독 하라 다쓰노리의 구상으로 당초 2번 타자를 예정했던 니시 히사시가 개막부터 부진에 빠지면서 시즌 도중부터 2번 타자로 정착했다.[14] 5월 말에 종아리 통증 등으로 1군 등록이 말소되는 등 이 해에도 부상에 시달렸지만, 7월 2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는 2-2 동점의 연장 12회 2사 1, 2루 타석에서 엔도 마사타카를 상대로 사요나라 3점 홈런을 터뜨렸다.[15] 자이언츠는 2002년에 우승을 차지했고, 니오카는 일본 시리즈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그 해 가을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시리즈 사상 첫 3경기 연속 맹타상[16], 제1차전 제2타석부터 제2차전 제2타석까지 5타석 연속 안타 (1977년의 도이 쇼조와 동률, 일본 시리즈 역대 3위, 구단 타이 기록)[17], 제3차전에서는 미이 히로지를 상대로 만루 홈런을 기록하는 등[18] 4경기 통산 19타수 9안타 (타율 .474), 타점 5의 성적을 남겨,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19]
에는 140경기에 출전하여 .300의 타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그의 커리어 첫 .300 시즌이었다. 또한 안타(172개), 홈런(29개), 도루(14개), 득점(88점)에서 개인 통산 최고 기록을 세웠다. 5월 15일 요코하마전에서 개인 첫 1경기 3홈런을 기록했다.[20]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
에는 91경기 출전에 그쳤지만 88개의 안타를 기록했다. 봄철 캠프 중 왼쪽 종아리를 다쳤다.[21] 부상자 속출의 팀 사정으로 조정 부족 상태에서 출전을 강요받아 홈런은 한 자릿수인 9개, 도루는 프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제로로 끝나는 등 성적이 크게 하락했다. 또한, 이 해부터 교통사고로 부모가 사망하거나 심각한 장애를 입은 초, 중학생을 경기에 초대하는 "니오카 박스"를 실시하기 시작했다.[22]
에는 16개의 홈런과 58타점을 올리며 .301의 타율을 기록하며 개인 최고 기록을 세웠다. 개막부터 40경기 동안 홈런이 없었고, 시즌 첫 홈런은 5월 19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 (후쿠오카 야후 돔)에서 5회 1사 1루 타석에서 호시노 준지를 상대로 기록한 런닝 홈런이었다.[23] 8월 12일 한신전에서 연장 10회 1사 무주자 타석에서 구보타 토모유키를 상대로 기록한 사요나라 홈런[24]으로 인해, 동일 리그의 대전 구단 전부를 상대로 사요나라 홈런을 기록. 8월 30일부터 9월 29일까지 22경기 연속 경기 안타를 기록했다. 오프 12월 18일, 프리 아나운서 요네다 치하루와 결혼했다.[25]
에는 25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통산 세 번째로 20홈런을 돌파했다. 4월 30일 주니치 6차전 (도쿄 돔)에서, NPB 사상 첫 2타석 연속 만루 홈런을 포함한 3홈런 10타점을 기록했다. 6월 8일 소프트뱅크전에서 구단 71번째 4번 타자로 선발 출장.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자체 육성 선수 중 4번 타자는 다카하시 요시노부 이후 7년 만이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4번·유격수"는 1961년 나가시마 시게오 이후 45년 만이었다.
에는 .295의 타율과 20개의 홈런을 기록했으며, 83타점으로 개인 최고 기록을 세웠다. 그는 유격수와 3루수로 모두 출전했다.
에는 다카하시 요시노부를 대신하여 제15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 회장에 취임했다. 개막전에 출전했지만 경기 중 오른 종아리에 근육 파열을 입어, 다음 날부터 2군 훈련을 받았다. 7월 20일 요코하마전에서 1군 복귀했지만, 정규 유격수에는 당시 19세의 사카모토 하야토가 정착했기 때문에, 3루수로 출전하게 되었다. 그 후 9월 14일에 오른쪽 발목을 삐어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개인 최저인 31경기에 출전하는 데 그쳤고, 팀은 리그 2연패를 달성했지만 포스트 시즌에 출전하지 못한 채 시즌을 마쳤다.
2. 3.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시절 (2009년 ~ 2013년)
2008년 11월 14일, 마이클 나카무라, 쿠도 타카토와의 교환 트레이드로 하야시 마사노리와 함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로 이적했다. 선수 회장이 트레이드된 것은 이례적인 일로, 구단 역사상 처음이었다. 11월 25일 삿포로시에서 입단 기자 회견을 가졌고, 등번호는 '''23'''번으로 결정되었다.
2009년 스프링 캠프에서는 발 부상으로 중반부터 별도 훈련을 했고, 2군에서 조정을 거쳐 오픈전 기간 중 1군에 복귀했다. 3월 14일 주니치전(삿포로 돔)에서 이적 후 첫 출전했고, 3월 17일 요미우리전(도쿄 돔)에서 이적 후 첫 안타를 기록했다. 시즌 개막 후 4월 4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전(삿포로 돔)에서 이적 후 첫 안타, 4월 7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도쿄 돔)에서 이적 후 첫 홈런을 쳤다. 처음으로 지명 타자로 올스타전에 팬 투표로 출전했고, 대타로도 21번 기용되어 .400(20타수 8안타)의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
2010년 4월 15일부터 4월 18일, 5월 16일부터 5월 22일, 5월 29일부터 6월 2일까지 4번 타자로 유격수, 3루수, 지명 타자로 출전했다. 5월 19일 요미우리전(삿포로 돔)에서 디키 곤잘레스를 상대로 홈런을 쳐서, 세・퍼 12개 구단 모두에게 홈런을 기록했다. 2년 연속 지명 타자로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10월 19일에는 오른쪽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27]
2011년 5월 7일 경기에서 역전 홈런을 치고 히어로 인터뷰를 받았을 때, 같은 홈런을 친 나카타 쇼를 향해 "나카타의 품위 없는 홈런보다는, 제 쪽이 품위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농담을 해 닛폰햄 팬들을 웃게 했다. 시즌 동안 여러 부상과 이나바 아츠노리, 마이카 호프파워가 1루수로 기용되면서 수비 기회 없이 지명 타자나 대타로 주로 출전하며 출전 횟수가 줄었다. 7월 9일 라쿠텐전에서는 가와기시 츠요시를 상대로 대타 만루 홈런을 쳤다.[28]
2012년에는 타율 .353을 기록했고, 특히 선발 출전 시 타율 .444, 득점권 타율 .343으로 좋은 활약을 펼쳤다. 3년 연속 연봉 삭감 제시를 받았지만, 현상 유지 제시에 보류 없이 사인했다.
2013년에도 시즌 초반부터 대타 요원으로 1군에 있었으나, 양쪽 종아리 부진으로 5월 30일 2군으로 내려갔다. 10일간의 조정을 거쳐 1군에 복귀했지만,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하고 42타수 3안타, 타율 .071로 부진한 시즌을 보냈다. 10월 3일 구단으로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
3. 은퇴 이후
2013년, 12개 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에 참가하지 않고, 각 구단의 업무 종료일(12월 27일)을 기한으로 현역 속행을 모색했으나, 어느 구단도 관심을 보이지 않아 현역 은퇴를 결의했다[29].
2014년 1월 9일에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 은퇴 이유로 "주·공·수 전부 할 수 없으면 의미가 없다"며 하반신 부상으로 수비와 주루를 만족스럽게 할 수 없다는 점을 들었다[30]. 15년간의 현역 생활에 대해 "부상이 많았던 것에 후회는 없다. 완전 연소했다"고 회고했다[31]. 은퇴 회견은 일본 햄 2군 기숙사 식당에서 간소하게 진행되었다[31].
은퇴 후에는 국제 스카우트에 대한 조언을 목적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업무 위탁 계약을 체결했다. 일본의 다른 구단에 소속된 외국인 선수나 아시아 각국의 프로 야구 선수를, "일본 프로 야구에 적합한가"라는 시점에서 구단의 필요에 따라 폭넓게 조사했다[32]. 홋카이도 방송, 홋카이도 TV 방송, 닛테레 지타스의 해설자로 2년간 활동했다.
2015년 10월 27일, 2016년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2군 타격 코치로 취임하는 것이 발표되었다[33]. 등번호는 '''75'''였다[34]. 3년 만의 현장 복귀였다. 2017년부터는 1군 타격 코치로 취임하며 등번호는 '''81'''로 변경되었다. 오카모토 카즈마에게 조언을 보내 급성장에 기여했지만, 2018년 10월 22일에 퇴임했다.
2018년 11월 8일,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의 토야마 GRN 선더버즈 감독 취임에 합의했다[35]. 등번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과 같은 '''7'''번 이었다. 2019년 시즌은 전기에는 우승 매직을 점등하면서 2위[36][37], 후기에는 3위로 마쳤다[38]. 시즌 종료 후인 9월 17일에 퇴임이 발표되었다[39].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40].
2020년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3군 종합 코치로 복귀했다[41]. 등번호는 '''76'''이었다. 2020년 8월 1일부터는 3군 감독으로 취임했다[42].
2021년 7월 21일에 열린 전군 혼합 홍백전 "리얼 자이언츠 컵"에서는 니오카 군을 이끌고 우승을 차지했다.
2021년 10월, 2군 감독 대행으로 취임[43], 2022년부터 정식으로 2군 감독으로 취임했다[44].
2024년부터 헤드 겸 치프 타격 코치로 배치 전환되었다.
4. 논란
2008년, 니오카 도모히로는 2군에 머물던 중 아나운서 야마모토 모나와의 불륜 스캔들로 구단으로부터 엄중 주의 조치를 받았다.[59]
4. 1. 불륜 스캔들
2008년 7월 6일, 니오카 도모히로는 아나운서 야마모토 모나와 모텔에 들어가는 모습이 목격되어 소속 구단으로부터 엄중 주의 조치를 받았다.[59] 같은 달 20일, 니오카는 삭발한 채 사과 기자회견을 가졌다.일본의 타블로이드 주간지 여성 세븐은 2008년 7월, 기혼 상태였던 니오카가 TV 아나운서 야마모토 모나와 러브 호텔에 함께 투숙했다는 내용을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두 사람은 신주쿠 니초메의 게이 바에서 우연히 만나 몇 시간 동안 술을 마시고 대화를 나눈 뒤 호텔로 이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일본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5. 주요 기록
니오카 도모히로는 199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데뷔 시즌부터 126경기에 출전하며 뛰어난 활약을 보였고, 이후 꾸준히 성장하여 팀의 주축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2002년에는 24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자이언츠 소속 유격수 역대 최다 홈런 기록을 세웠고, 일본 시리즈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하며 팀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49] 2003년에는 개인 통산 첫 3할 타율을 기록하고, 안타, 홈런, 도루, 득점 등 여러 부문에서 개인 최고 기록을 경신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2008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로 이적 후, 2010년에는 전 구단 상대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니오카 도모히로의 통산 홈런 기록은 다음과 같다.
# | 날짜 | 상대 팀 | 구장 | 상대 투수 | 통산 홈런 |
---|---|---|---|---|---|
1 | 1999년 4월 14일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도쿄 돔 | 구로다 히로키 | 1 |
2 | 4월 24일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 도쿄 돔 | 아와노 히데유키 | 2 |
3 | 5월 7일 | 야쿠르트 스왈로스 | 도쿄 돔 | 가와사키 겐지로 | 3 |
4 | 5월 30일 | 한신 타이거스 | 도쿄 돔 | 야부 게이이치 | 5 |
5 | 6월 2일 | 주니치 드래건스 | 나고야 돔 | 가도쿠라 겐 | 6 |
6 | 2005년 5월 19일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후쿠오카 Yahoo! JAPAN 돔 | 호시노 준지 | 96 |
7 | 5월 21일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 도쿄 돔 | 야노 사토시 | 97 |
8 | 5월 26일 | 지바 롯데 마린스 | 도쿄 돔 | 고바야시 마사히데 | 98 |
9 | 2006년 5월 21일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 풀캐스트 스타디움 미야기 | 아오야마 고지 | 120 |
10 | 6월 14일 | 오릭스 버펄로스 | 도쿄 돔 | 요시이 마사토 | 123 |
11 | 2007년 6월 2일 | 세이부 라이온스 | 굿윌 돔 | 야마자키 사토시 | 144 |
12 | 2010년 5월 19일 | 요미우리 자이언츠 | 삿포로 돔 | 디키 곤잘레스 | 165 |
니오카 도모히로의 연도별 타격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소속 팀 | 경기 수 | 타석 수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타 | 희생 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26 | 462 | 418 | 49 | 121 | 14 | 0 | 18 | 189 | 51 | 8 | 2 | 6 | 3 | 33 | 0 | 2 | 92 | 7 | .289 | .342 | .452 | .794 | |
119 | 335 | 298 | 35 | 79 | 10 | 0 | 10 | 119 | 32 | 9 | 5 | 9 | 1 | 23 | 2 | 4 | 57 | 5 | .265 | .325 | .399 | .724 | ||
86 | 265 | 240 | 35 | 56 | 9 | 1 | 5 | 82 | 23 | 10 | 4 | 10 | 0 | 13 | 0 | 2 | 44 | 1 | .233 | .278 | .342 | .620 | ||
112 | 444 | 398 | 64 | 112 | 21 | 1 | 24 | 207 | 67 | 3 | 2 | 16 | 1 | 27 | 0 | 2 | 79 | 7 | .281 | .329 | .520 | .850 | ||
140 | 624 | 573 | 88 | 172 | 18 | 1 | 29 | 279 | 67 | 14 | 8 | 14 | 3 | 31 | 2 | 3 | 92 | 12 | .300 | .338 | .487 | .825 | ||
91 | 360 | 327 | 27 | 88 | 10 | 0 | 9 | 125 | 49 | 0 | 0 | 1 | 1 | 25 | 2 | 6 | 72 | 7 | .269 | .331 | .382 | .714 | ||
139 | 593 | 539 | 64 | 162 | 25 | 0 | 16 | 235 | 58 | 3 | 0 | 5 | 3 | 37 | 1 | 9 | 79 | 13 | .301 | .354 | .436 | .790 | ||
146 | 598 | 551 | 67 | 159 | 26 | 0 | 25 | 260 | 79 | 0 | 1 | 6 | 5 | 30 | 1 | 6 | 113 | 15 | .289 | .329 | .472 | .801 | ||
139 | 562 | 508 | 68 | 150 | 22 | 0 | 20 | 232 | 83 | 1 | 2 | 10 | 3 | 34 | 2 | 7 | 91 | 15 | .295 | .346 | .457 | .803 | ||
31 | 98 | 86 | 7 | 24 | 3 | 0 | 1 | 30 | 7 | 0 | 2 | 1 | 1 | 9 | 0 | 1 | 24 | 0 | .279 | .351 | .349 | .699 | ||
닛폰햄 | 69 | 187 | 170 | 25 | 43 | 5 | 0 | 4 | 60 | 25 | 0 | 1 | 2 | 2 | 10 | 0 | 3 | 36 | 5 | .253 | .303 | .353 | .656 | |
103 | 355 | 328 | 26 | 86 | 15 | 0 | 7 | 122 | 47 | 0 | 0 | 5 | 3 | 18 | 0 | 1 | 59 | 8 | .262 | .300 | .372 | .672 | ||
55 | 117 | 103 | 12 | 29 | 2 | 0 | 3 | 40 | 14 | 0 | 0 | 1 | 0 | 13 | 1 | 0 | 22 | 2 | .282 | .362 | .388 | .750 | ||
65 | 94 | 85 | 4 | 30 | 1 | 0 | 2 | 37 | 14 | 0 | 0 | 0 | 1 | 7 | 1 | 1 | 13 | 3 | .353 | .404 | .435 | .840 | ||
36 | 45 | 42 | 0 | 3 | 1 | 0 | 0 | 4 | 6 | 0 | 0 | 0 | 1 | 2 | 0 | 0 | 16 | 1 | .071 | .111 | .095 | .206 | ||
통산: 15년 | 1457 | 5139 | 4666 | 571 | 1314 | 182 | 3 | 173 | 2021 | 622 | 48 | 27 | 86 | 28 | 312 | 12 | 47 | 889 | 101 | .282 | .331 | .433 | .764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그는 사회 공헌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2004년부터 '니오카 박스'를 설치해 교통사고 피해 아동 및 청소년들을 도쿄 돔 경기에 초대했다.[52]
5. 1. 첫 기록
- 첫 출장: 1999년 4월 2일, 대 한신 타이거스 1차전(도쿄 돔), 8회 초 가와아이 마사히로를 대신하여 유격수로 출장[49]
- 첫 타석: 상동, 8회 말 후쿠하라 시노부를 상대로 중견수 플라이[49]
- 첫 선발 출장: 1999년 4월 3일, 대 한신 타이거스 2차전(도쿄 돔), 7번·유격수로 선발 출장[49]
- 첫 안타: 상동, 7회 말 가와지리 데쓰로를 상대로 중전 안타[49]
- 첫 홈런·첫 타점: 1999년 4월 14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차전(도쿄 돔), 5회 말 구로다 히로키를 상대로 좌월 솔로[49]
- 첫 도루: 1999년 4월 21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5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3회 초 2루 도루(투수: 기쿠치하라 다케시, 포수: 니시야마 슈지)[49]
5. 2. 기록 달성 경력
5. 3. 기타 기록
- 올스타전 출장 7회: (1999년, 2000년, 2003년, 2004년, 2006년, 2009년, 2010년)
- 2타석 연속 만루 홈런: 2006년 4월 30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6차전(도쿄 돔) 4회말 이시이 유야, 5회말 클라우디오 갈바를 상대로 기록.[58] 이는 2010년 시즌 종료 시점 일본 프로 야구 유일한 기록이며, 1경기 2만루 홈런은 1951년 10월 5일 이이지마 시게야(다이에이 스타스) 이후 역대 두 번째이자 센트럴 리그 최초 기록.[58]
- 1경기 10타점: 센트럴 리그 최다 타이 기록.[58] 1985년 8월 10일 레온 리(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999년 7월 22일 로버트 로즈(요코하마 베이스타스), 같은 해 8월 12일 에토 아키라(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동일. 요미우리 구단 신기록(종전 기록은 1949년 4월 26일 가와사키 도쿠지, 2001년 6월 9일 기요하라 가즈히로의 9타점).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은 이이지마 시게야의 1경기 11타점(1951년 10월 5일).
- 전 구단 상대 홈런: 2010년 5월 19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차전(삿포로 돔)에서 디키 곤잘레스로부터 홈런을 기록하며 달성.
# | 날짜 | 상대 팀 | 구장 | 상대 투수 | 통산 홈런 개수 |
---|---|---|---|---|---|
1 | 1999년 4월 14일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도쿄 돔 | 구로다 히로키 | 1 |
2 | 4월 24일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 도쿄 돔 | 아와노 히데유키 | 2 |
3 | 5월 7일 | 야쿠르트 스왈로스 | 도쿄 돔 | 가와사키 겐지로 | 3 |
4 | 5월 30일 | 한신 타이거스 | 도쿄 돔 | 야부 게이이치 | 5 |
5 | 6월 2일 | 주니치 드래건스 | 나고야 돔 | 가도쿠라 겐 | 6 |
6 | 2005년 5월 19일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후쿠오카 Yahoo! JAPAN 돔 | 호시노 준지 | 96 |
7 | 5월 21일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 도쿄 돔 | 야노 사토시 | 97 |
8 | 5월 26일 | 지바 롯데 마린스 | 도쿄 돔 | 고바야시 마사히데 | 98 |
9 | 2006년 5월 21일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 풀캐스트 스타디움 미야기 | 아오야마 고지 | 120 |
10 | 6월 14일 | 오릭스 버펄로스 | 도쿄 돔 | 요시이 마사토 | 123 |
11 | 2007년 6월 2일 | 세이부 라이온스 | 굿윌 돔 | 야마자키 사토시 | 144 |
12 | 2010년 5월 19일 | 요미우리 자이언츠 | 삿포로 돔 | 디키 곤잘레스 | 165 |
- 대타 만루 홈런: 1회 (2011년 7월 9일, 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6차전 (아사히카와 하나사키 스포츠 공원 경식 야구장), 투수: 가와기시 쓰요시)
- 취미는 골프로, 도야마 감독 취임 당시 도야마에서의 생활에 대한 질문에 "골프 클럽을 가져가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52]
- 닛폰햄 시절 팀 동료였던 다케다 가츠는 니오카가 요리를 싫어해서 자취를 안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니오카는 요리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뒷정리가 귀찮다고 말하며, 도야마에서는 단신 부임 생활을 하겠지만 "슈퍼에서 반찬을 사 먹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6. 수상 경력
7. 선수로서의 특징
니오카 도모히로는 그라운드나 타석에서 포커 페이스를 유지한다. 이는 중학교·고등학교 시절 "야구 선수는 그라운드에서 이를 드러내지 마라"는 가르침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45]。
타구를 우측으로 보내는 기술이 최고 수준이며, 2007년 홈런의 절반을 우측으로 날려 "미스터 우중간"이라고 칭송받았다[46][47]。 수비에서는 어깨가 매우 강했다[48]。
8. 사회 활동
2003년 오프 시즌, 가와이 마사히로가 주니치 드래곤스로 이적하면서 니오카는 타율 3할과 29홈런을 기록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고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으며, 연봉 1억 엔을 돌파하는 등 주전 선수로 인정받았다. 이를 계기로 2004년 시즌부터 니오카는 자신의 사비로 관객을 초청하는 '니오카 박스' 설치를 구단으로부터 허가받았다.[1]
'니오카 박스'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플레이를 보여주고 싶다"는 니오카의 바람에 따라, 교통사고로 부모가 사망하거나 심각한 후유증을 겪는 초등학생·중학생을 대상으로 도쿄 돔에서 열리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주최의 프로 야구 공식전 전 경기에 각 경기당 4명씩을 초대하는 좌석으로 마련되었다. 여기에는 티켓 및 교통비 등 관람 비용 보조도 포함되었다.[1]
이러한 '니오카 박스' 실시로 2004년 11월에는 독립행정법인 자동차사고대책기구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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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this fuss over just a little drink at a . . . love ho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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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日への送りバン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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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岡先頭打者アー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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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岡 逆転満塁弾 初体験 クールな男も「最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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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岡、気持ちで打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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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人のサヨナラ本塁打2度は47年ぶ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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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岡 歓喜のアー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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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藤同点満塁 二岡サヨナラ 会心2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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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岡 左手を骨折 19日の阪神戦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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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岡12回サヨナラ弾 気合や!清原9回同点打 8回には反攻口火ソロ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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読売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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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岡3連発 初体験ニヤリ 気持ちは2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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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5-1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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堀内監督「75点」 巨人も打ち上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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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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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岡ボックス 子供たち招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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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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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岡ランニング本塁打
北海道新聞
200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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サヨナラ二岡弾 久保田ひと飲み トラ打ち 久々に酔った
読売新聞
2005-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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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岡選手が結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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村上 2戦連続満塁弾 ツバメ首位に導く感謝の放物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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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海道日本ハムファイターズ ニュー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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苦労人日本ハム高浜プロ2号は二岡以来の代打満塁弾「素晴らしかった」監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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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岡が引退会見「完全燃焼でき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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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ハム】二岡引退会見 周囲に感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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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ハム・二岡 泣くに泣けない2軍寮食堂 引退会見場はあまりに暗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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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岡氏が国際スカウト「日本に適合するか」を調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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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人・井端コーチは82 首脳陣の背番号発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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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岡智宏氏 監督就任合意のお知ら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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サンダーバーズ4連勝 栃木に7-0 雷鳥軍団M3点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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サンダーバーズ前期Vならず 滋賀に3-5
http://webun.jp/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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富山GRNサンダーバーズ 西地区3位で今季終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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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岡智宏監督退任のお知ら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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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リーグ富山、二岡監督の退任発表 就任わずか1年、理由は明かさ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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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人が来季スタッフ発表! 2020年は元木ヘッド、阿部二軍監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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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人】3軍の体制を変更 二岡智宏総合コーチが3軍監督就任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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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人、2022年のコーチングスタッフを発表 川相昌弘氏がファーム総監督、宮本和知氏は球団社長付きアドバイザー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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消えた「ハーフ美女アナ」は今(1)あの山本モナは子育て優先の生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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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人二岡が1軍合流、モナ不倫騒動を謝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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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人 니오카, 미모의 아나운서와 불륜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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