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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와타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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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지 와타루 사건은 1951년 11월, 가지 와타루가 미군에 의해 납치, 감금되어 심문을 받고, 미국을 위한 활동을 강요받은 사건이다. 감금 중 자살 시도와 석방 후 스파이 혐의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며, 일본 정부와 미국의 개입, 미하시 사건 등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가치는 스파이 혐의를 부인하며 16년간 재판을 벌였고, 1969년 무죄를 확정받았다. 이 사건은 일본의 주권 회복 이후에도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일본 정부의 미온적인 대응과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가 비판받았다.

2. 사건의 경위

1951년 11월 25일 저녁, 카지 와타루는 후지사와시 구게누마의 자택 근처에서 미군에게 납치되어 도쿄 유시마의 구 이와사키 저택 등 여러 시설에 감금되었다. 감금 장소는 후지사와나 오키나와의 미군 시설 등으로 옮겨졌다.

감금 중 카지는 자신의 경력과 사상에 대해 끈질긴 심문을 받았으며, 미국을 위한 스파이 활동과 같은 특수 활동을 강요받았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중화민국 충칭에서 일본 인민 반전 동맹 활동을 통해 일본군을 상대로 반전 선전 활동을 벌인 경험이 있었고, 국민당 및 중국 공산당 인사들과도 교류가 있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미군은 그를 미국 측 선전 활동에 이용하거나, 소련과의 연계 가능성을 의심하여 이중 스파이로 활용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카지는 감금 생활 중 두 차례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카지를 감시하던 일본인 직원 야마다 젠지로는 카지의 처지에 동정심을 느껴 몰래 외부 연락을 도왔다. 1952년 야마다가 일을 그만둔 후에도 카지의 안위를 걱정하여 가족에게 연락했고, 같은 해 11월 12일 가족은 카지의 수색원을 제출했다. 좌파 사회당 소속 이노마타 코조 대의원 등이 석방 운동에 나섰고, 언론 보도를 통해 사건이 알려지기 시작하자[2][3], 결국 카지는 12월 7일 메이지 신궁 외원에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4].

사건 발생 초기 미군 당국은 점령기 이후 일본인을 구속한 사실이 없다는 식으로 발표하며 책임을 회피하려 했으나[5][6], 미군 정보기관의 개입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이노마타 코조 의원에 따르면, 당시 미국 내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보도가 통제되었으며 주일 미국 대사조차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비밀 정보기관의 독단적인 활동이 통제를 벗어날 수 있는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7].

2. 1. 납치

납치 현장(에노시마 전철 구게누마역에서 후지사와 방면으로 약 떨어진 곳)


카지가 감금되었던 장소 중 하나인 도쿄 유시마의 구 이와사키 저택


1951년 11월 25일 오후 7시경, 카지는 후지사와시 구게누마의 자택 근처를 산책하던 중이었다. 이때 군용차에서 내린 몇 명의 미군에게 갑자기 구타당하고 차에 강제로 태워져 납치되었다. 그는 당시 미군 캐논 기관이 접수하여 사용하고 있던 도쿄 유시마의 구 이와사키 저택 등에 감금되었다. 감금 장소는 이후 후지사와나 오키나와의 미군 시설 등으로 여러 차례 옮겨졌다.

감금되어 있는 동안 카지는 자신의 경력과 사상에 대해 끈질긴 심문을 받았으며, 미국을 위해 스파이 활동과 같은 특수 활동을 할 것을 강요받았다. 카지는 제2차 세계 대전중화민국 충칭에서 장제스의 보호 아래 결성된 일본인민반전동맹에서 활동하며 일본군 병사나 포로를 대상으로 반전 선전 활동 등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소속). 또한 국민당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당 관계자들과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이러한 경력 때문에 카지가 당시부터 소련이나 미국의 첩보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사건 발생 당시 일본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 나오기도 했다. 미군은 카지에게 미국 측을 위한 선전 활동을 시키려 했거나, 혹은 카지가 소련과 접촉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이중 스파이로 이용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카지는 감금 생활 중 두 차례 자살을 시도했으나 모두 미수에 그쳤다.

2. 2. 감금 및 심문



1951년 11월 25일 오후 7시경, 카지 와타루는 후지사와시 구게누마의 자택 근처를 산책하던 중 군용차에서 내린 몇 명의 미군에게 갑자기 폭행당하고 차에 실려 납치되었다. 이후 도쿄 유시마에 있는 구 이와사키 저택 등 당시 미군 캐논 기관이 사용하던 시설에 감금되었다. 감금 장소는 후지사와나 오키나와의 미군 시설 등으로 여러 차례 옮겨졌다.

감금된 동안 카지는 자신의 경력과 사상에 대해 끈질긴 심문을 받았으며, 미국을 위해 특수 활동을 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카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중화민국 충칭에서 장제스의 보호 아래 결성된 일본 인민 반전 동맹에 참여하여 일본군 병사나 포로를 대상으로 반전 선전 활동 등을 벌인 경력이 있었다. 또한 국민당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당 관계자들과도 교류가 있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당시 일본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카지가 소련이나 미국의 첩보원으로 활동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미군은 카지에게 미국 측 입장에서 비슷한 선전 활동을 시키려 했거나, 카지가 소련과 접촉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이중 스파이로 이용하려 했다는 추측이 있다. 카지는 감금 생활 중 두 차례 자살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2. 3. 석방

직원으로 고용된 일본인 청년 야마다 젠지로는 가지 와타루가 두 번째 자살 시도 후 보인 모습에 동정심을 느껴, 감시역이 된 것을 계기로 몰래 외부와의 연락을 도왔다. 1952년 야마다는 일을 그만두었지만, 이후 가지의 안위가 걱정되어 결국 모든 사실을 밝히기로 결심하고 가지의 가족에게 연락했다. 이에 따라 11월 12일 가족은 가지의 수색원을 제출했다. 같은 해 12월 6일, 가족의 요청을 받은 좌파 사회당의 이노마타 코조 대의원 등이 석방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고, 가지가 작년부터 실종되어 감금된 것 같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게 되었다[2][3]. 결국 가지는 12월 7일 메이지 신궁 외원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4].

사건 초기 미군 공식 대변인은 점령 기간 동안 군이 가지를 구금한 적은 있으나 단기간에 석방했으며, 강화 조약 발효 후에는 미군이 일본인을 구속한 사실이 없다고 발표했다[5][6]. 그러나 이 발표는 미군의 구금 사실만 언급하고 다른 기관에 의한 구금 가능성은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으며, 곧바로 정보기관에 의한 구금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노마타 코조 의원에 따르면, 당시 미국 내에서는 가지 사건 관련 기사가 보도 통제되어 미국인들은 이 사건을 전혀 알지 못했다. 심지어 당시 주일 미국 대사조차 이 사건에 대해 보고받지 못해 일본 국회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는 비밀 기관의 통제되지 않는 활동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된다[7].

3. 국회 증인 소환

야마다 젠지로[8][9]에 의해 공론화된 이 사건은 중의원 법무위원회에서 다루어졌다. 카지는 석방 직후인 1952년 12월 10일에 증인 소환되어 사건 경위에 대해 증언했다. 국회 증언 과정에서 카지 본인과 다른 증인들은 카지가 원래 반전주의자였으며, 국민당의 군사위원회 고문으로서 중일 전쟁 당시 반전 활동을 벌였다는 사실을 언급했다[10]. 카지는 증언에서 감금 중에 과거 중국에서 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협력[11]을 요구받았으나, 정치적으로 미국의 극동 정책에 일본 국민으로서 찬성할 수 없으며 협력할 의사가 없다고 답했다고 밝혔다[10].

이후 1963년, 카지는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기록한 저서 『모략의 고발』(신일본출판사)을 출간했다.

4. 스파이 혐의 논란

가지 와타루가 자신이 당한 납치 및 감금 사건을 고발하자[12], 미국 측과 일본 국가경찰은 그에게 스파이 혐의를 제기했다. 1952년 12월 10일과 11일, 가지는 국회 증언대에 섰으나, 이 과정에서 주일 미국 대사관은 가지가 소련 스파이이며 미군에 의해 구금되었다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13][14][15] 가지는 즉각 반발하며, 석방 시 스파이임을 인정하고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 작성을 강요받았으나 이는 협박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16]

사이토 노보루 국가경찰 장관(당시 정식 명칭은 국가 지방 경찰이었으나, 이하 당시 약칭인 '국가경찰'로 표기) 역시 가지가 석방된 직후, 평소 추적하던 스파이 용의자를 체포했으며 미국 측으로부터 그 인물이 가지와 관련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발표하며 스파이 혐의를 부각했다.[17][14] 가지는 이러한 스파이 혐의를 일관되게 부인했다.[18]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선 기기 회사 사원이었던 미하시 마사오가 신변의 위협을 느껴 국가경찰에 자수했다. 그는 자신이 미국 측의 의뢰로 소련에 대한 이중 스파이 활동을 했으며, 가지의 의뢰로 무선 통신을 했다고 진술했다.[19] (미하시 사건 참조) 미하시의 등장은 가지의 스파이 혐의 논란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으며, 그의 자수 경위와 진술의 신빙성을 둘러싼 의혹이 제기되었다.[20][21][22][23][24]

4. 1. 미군과 일본 정부의 주장

카치 와타루가 사건의 진상을 고발하고[12] 1952년 12월 10일과 11일 국회 증언에 나선 가운데, 미국 대사관은 카치가 소련 스파이이며 미군에 의해 구금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13][14][15] 카치는 이에 대해 처음에는 석방 조건이 없었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석방 시 소련 스파이임을 인정하고 미국 측에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 작성을 강요받았다고 폭로하며, 이는 협박에 의한 것이었다고 밝혔다.[16]

한편, 사이토 노보루 국가경찰 장관(당시 정식 명칭은 국가 지방 경찰이었으나, 이하 당시 약칭인 '국가경찰'로 표기)은 카치가 풀려난 직후, 평소 추적하던 스파이 용의자를 체포했으며, 12월 10일 미국 측으로부터 해당 용의자가 카치와 관련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발표했다.[17][14] 그러나 카치는 자신이 스파이라는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다.[18]

이 과정에서 무선 기기 회사 사원이었던 미하시 마사오가 신변의 위협을 느껴 국가경찰에 자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하시는 자신이 미국 측의 의뢰로 소련에 대한 이중 스파이 활동을 했으며, 카치의 의뢰를 받고 무선 통신을 했다고 진술했다.[19] (참조: 미하시 사건) 이후 국회 증언에서는 미군의 권유로 자수했다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20]

미하시의 자수를 둘러싸고 혼란이 일었다. 처음에는 미하시가 자택에서 체포되었다고 보도되었으나,[21] 1년 이상 방치된 무면허 무선 행위가 카치 사건 발각 직후 문제된 것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사이토 국가경찰 장관은 아사히 신문 취재에 독자적인 수사로 용의자를 체포해 조사 중이라고 답했지만,[22] 마이니치 신문은 미국 정보기관이 국가경찰의 양해 하에 카치를 구금했으며, 심문 과정에서 드러난 스파이 용의자를 곧 체포할 예정이라는 미국 측 소식통의 정보를 보도했다.[23] 결국 미하시는 자수한 것으로 처리되었으나,[24] 이는 국가경찰이 감금 사건의 본질을 스파이 사건으로 덮으려 하면서 발생한 혼란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국가경찰의 주장은 계속해서 혼란을 야기했다. 사이토 장관은 카치가 조르게 사건과의 관련성을 암시했다고 주장했으며,[25] 일부 언론에는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여 카치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미·중·소 삼중 스파이로 알려져 있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25] 이에 대해 조르게 사건 담당 검사였던 나카무라 도오네 변호사는 당시 카치의 소재지를 근거로 관련성을 부정했다.[25] 국가경찰은 관련 스파이로 소련인과 일본인들을 체포했다고 발표했으나, 이 역시 흐지부지되었다.[26]

카치가 미하시의 주장을 포함한 모든 스파이 혐의를 부인하자, 국가경찰은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입수했다는 카치의 자백서를 중의원 법무위원회에 제출했다. 이 자백서에는 카치가 스파이 활동을 인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카치는 자살 시도 후 심신이 미약한 상태에서 미군 측이 시키는 대로 작성한 것이며 진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27]

이 사건을 통해 미군 캐넌 소령의 이름이 거론되면서, 일본 내 미군 특무 기관인 '캐넌 기관'의 존재와 활동이 일부 드러났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상황에서, 미군 특무 기관의 활동이 일본의 주권과 국민의 인권을 침해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정부는 미국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내각 법제국은 주일미군에 대한 수사권 제한, 국회 증인 소환의 어려움 등을 언급하며 미온적인 입장을 나타냈다.[29] 사이토 국가경찰 장관은 국회에서 미군 측으로부터 카치 본인의 요청으로 보호하고 있었다는 설명을 들었으며,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고 답변하여 비판을 받았다.[30] 카치는 이러한 국가경찰의 태도를 강하게 비난했다.[27] 국가경찰은 카치의 스파이 혐의를 전제로 수사를 진행했으나, 미하시의 자수조차 미군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고,[31] 결정적 증거라던 엽서는 분실했다며 끝내 제시하지 못했다.[32] 감금 문제의 책임자로 지목된 캐넌 소령은 본국으로 귀국하여 사건은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국회에서는 캐넌 기관에 의한 또 다른 납치 및 고문, 스파이 강요 피해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33]

미국 대사관은 부당한 감금은 없었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로버트 머피 미국 대사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히면서도, 사안의 민감성을 언급하며 일본 국회가 자체적으로 결론을 내리기를 바란다는 태도를 보여 사실상 개입에 한계를 드러냈다.[34]

4. 2. 미하시 사건

무선 기기 회사 사원이었던 미하시 마사오는 가지 와타루 사건을 알게 된 후 신변의 위험을 느껴, 자신이 미국 측의 의뢰로 소련에 대한 이중 스파이로 활동했으며, 가지의 의뢰를 받고 무선 통신을 했다고 국가 경찰에 자수했다.[19] (미하시는 이후 국회 증언에서 미군의 권유로 자수했다고 밝혔다.[20])

처음에는 미하시가 자택에서 체포되었다고 보도되었으나[21], 1년 이상 방치되었던 무면허 무선 문제가 가지 사건 발각 직후 불거진 점에 대해 언론 등에서 의문이 제기되었다. 12일 밤, 사이토 국가 경찰 장관은 아사히 신문 취재에 응해 독자적인 수사로 스파이 용의자를 체포했으며, 한 명을 취조 중이라고 답변했다.[22] 그러나 마이니치 신문은 13일 조간에서 미국 정보 기관이 일본 국가 경찰의 양해 하에 가지를 구금했으며, 심문 과정에서 드러난 스파이 용의자를 곧 체포할 예정이라는 미국 측 소식통의 정보를 보도했다.[23] 결국 미하시는 자수한 것으로 처리되었는데[24], 이는 국가 경찰이 감금 사건에서 스파이 사건으로 문제의 본질을 전환하고 상황을 수습하려던 혼란스러운 과정의 결과로 보인다.

국가 경찰 장관은 가지가 조르게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시사했으며[25], 일부 언론에는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여 가지가 삼중 스파이였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기도 했다.[25] 그러나 조르게 사건 담당 검사였던 나카무라 도오네는 가치가 당시 중국 충칭에 있었기 때문에 조르게 단과의 관련성은 없다고 반박했다.[25] 국가 경찰은 연락 스파이로 여러 명을 체포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들의 존재는 결국 흐지부지되었다.[26]

가지는 미하시의 주장과 자신이 스파이라는 혐의를 일관되게 부인했다. 이에 국가 경찰은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받았다는, 가지가 감금 중 스파이 활동을 인정하며 쓴 자백서를 중의원 법무위원회에 공개했다. 가지는 이것이 자살 시도 후 심신이 약해진 상태에서 미국 측의 강요로 작성한 것이며 진실과 다르다고 항변했다.[27]

이 사건 수사는 스파이 혐의는 국가 경찰이, 감금 혐의는 당시 자치체 경찰이었던 경시청이 담당하는 이원적 구조로 진행되었다.[28] 가지의 증언과 언론 보도를 통해 미군 캐넌 소령과 미국 특무 기관인 캐넌 기관의 존재 및 활동이 드러나면서, 강화 조약 발효로 주권을 회복한 일본에서 미군 특무 기관의 활동이 일본 주권과 일본인 인권을 침해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일본 정부에 대한 영향력은 막강했다. 일본 내각 법제국은 주둔군 장병에 대한 수사권 제한, 국회 증인 소환 시 본인 승낙 필요성 등을 언급하며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다.[29] 사이토 국가 경찰 장관 역시 미군 측으로부터 가지의 보호 요청을 받았으며, 석방 시 경찰의 보호를 약속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사실상 미군의 행위를 묵인했음을 시인했다.[30] 가지는 이러한 국가 경찰의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27] 심지어 일부 국가 경찰 관계자로부터 미하시의 자수 역시 미군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냐는 정보가 흘러나오기도 했다.[31] 국가 경찰 측은 미하시와 가지 사이에 오간 엽서를 결정적 증거로 주장했지만, 이후 분실했다며 제시하지 못했다.[32] 감금 문제의 책임자로 지목된 캐넌 소령은 결국 본국으로 귀국하여 사건은 흐지부지되었다. 1953년 국회 증언에서는 다른 인물로부터도 캐넌 기관에 납치되어 고문을 받고 스파이 활동을 강요당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33]

미하시의 무면허 무선 혐의에 대해서는, 당시 일본 아마추어 무선 연맹 이사장이었던 오코치 마사하루가 신문 보도 사진 속 안테나가 단순 텔레비전 수신용으로 보이며, 과거 불법 전파 사건과 비교했을 때 1년 이상 방치된 점이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36] 그럼에도 미하시는 가지를 공범으로 지목하고 자신도 스파이 활동을 했다고 자백하며, 무면허 무선국 개설 및 운용에 따른 전파법 위반으로 징역 4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보석 후 미국캐나다로 무선 기술을 배우러 갈 예정이라고 보도되었다.[37]

반면, 가지는 끝까지 스파이 혐의를 부인했으며, 16년에 걸친 재판 끝에 1969년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는 1심 유죄 판결을 뒤집은 결과였다. 재판이 길어진 이유 중 하나는 가지가 미하시에게 건넸다는 암호문의 필적 감정에 7년 반이나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국가 경찰이 "가치의 필적이 틀림없다는, 거의 볼 수 없을 정도의 확실한 감정 결과가 나왔다"고 발표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재판 과정에서 나온 두 번의 필적 감정 결과는 서로 상반되게 나왔다. 판결에서는 필적 감정 결과를 신뢰할 수 없으며, 미하시의 증언 또한 그가 미국 정보 기관원의 자수 권유 이후에야 가지를 확신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38]

4. 3. 조르게 사건과의 연관성

사이토 국가 경찰 장관은 가지 와타루가 조르게 사건의 조르게단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했다.[25] 또한 일부 언론에서는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여, 가지가 중국에서 국민당을 위해 일본에 대한 반전 선전을 했지만 미국 첩보 기관에도 협력했으며, 실제로는 소련 첩보 기관의 지령을 받는 삼중 스파이였다는 이야기가 보도되었다.[25]

그러나 조르게 사건 담당 검사였던 나카무라 도오네 변호사는 이에 대해 반박했다. 그는 조르게단 활동 당시 가지는 중국 충칭에 있었기 때문에 관련이 없을 것이며, 미·중·소 삼중 스파이설과 조르게 사건은 규모 면에서 비교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25]

한편, 국가 경찰은 연락 스파이로 소련인 몇 명과 일본인 2명을 체포했다고 발표했으나, 결국 일본인 스파이의 존재조차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흐지부지되었다.[26]

4. 4. 카치의 스파이 혐의 부인과 진실 공방

가치는 자신에게 제기된 스파이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다.[12] 12월 10일과 11일 국회 증언대에 섰지만, 그 과정에서 미국 대사관은 가치가 소련 스파이이며 미군에 구금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13][14][15] 가치는 이에 반발하며 처음에는 석방에 조건이 없었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석방 조건으로 자신이 소련 스파이였음을 인정하고 미국 측에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강요받았다고 폭로했다. 이는 협박에 의한 것이므로 구속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16]

한편, 사이토 국가경찰 장관은 가치 해방 직후, 평소 추적하던 스파이 용의자를 체포했으며, 미국으로부터 10일에 그 인물이 가치와 관련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밝혔다.[17][14] 그러나 가치는 자신이 스파이라는 주장을 부인했다.[18]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선 기기 회사 사원이었던 미하시 마사오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국가경찰에 자수했다. 그는 자신이 미국 측의 의뢰로 소련에 대한 이중 스파이 활동을 했으며, 가치의 의뢰를 받아 무선 통신을 했다고 진술했다[19] (미하시 사건 참조). 이후 국회 증언에서는 미군의 권유로 자수했다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20]

초기 보도와 달리[21], 12일 밤 사이토 국가경찰 장관은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독자적인 수사로 용의자를 체포해 조사 중이라고 밝혔지만[22], 다음 날 마이니치 신문은 미국 정보 기관이 국가경찰의 양해 하에 가치를 구금했으며, 심문 과정에서 드러난 스파이 용의자를 곧 체포할 예정이라는 미국 측 정보를 보도했다.[23] 결국 미하시는 자수한 것으로 처리되었으나[24], 이 과정에서 국가경찰이 감금 사건의 본질을 스파이 사건으로 덮으려 하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국가경찰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사이토 장관은 가치가 조르게 사건의 조르게 단과 관련이 있다고 시사했으며[25], 일부 언론에는 정부 관계자를 인용하여 가치가 중국에서 활동하며 미국과 소련의 첩보 활동에 모두 관여한 삼중 스파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25] 그러나 조르게 사건 담당 검사였던 나카무라 도오네는 가치의 활동 시기와 조르게 사건 시기가 맞지 않다며 관련성을 부인했다.[25] 국가경찰은 소련인과 일본인 스파이를 체포했다고 발표했지만, 이 역시 흐지부지되었다.[26]

가치는 미하시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스파이 혐의를 계속 부인했다. 이에 국가경찰은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입수했다는 가치의 자백서를 중의원 법무위원회에 공개했다. 가치는 이 자백서가 자살 시도 후 심신이 미약한 상태에서 미국 측의 강요로 작성된 것이며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27]

당시 경찰은 스파이 혐의를 담당하는 국가경찰과 감금 혐의를 담당하는 자치체경찰(당시 경시청)로 나뉘어 있었다.[28] 가치의 증언과 언론 보도를 통해 미군 캐넌 소령과 그가 이끄는 캐넌 기관의 존재가 드러났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주권을 회복한 일본에서 미국 특무 기관의 활동이 일본의 주권을 침해하고 일본인의 인권을 유린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가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정부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일본 내각 법제국은 주둔 미군에 대한 수사권 제한, 국회 증인 소환 시 본인 동의 필요성 등을 언급하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29] 사이토 국가경찰 장관은 미군 측으로부터 가치 본인의 요청으로 보호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국회에서 답변하며 사실상 감금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시인했다.[30] 가치는 이러한 국가경찰의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27]

국가경찰은 가치의 스파이 혐의를 기정사실화하고 수사를 진행했지만, 미하시의 자수조차 미군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될 정도였다.[31] 국가경찰 측은 결정적 증거로 미하시와 가치 사이에 오고 간 엽서를 확보했다고 주장했으나, 이후 이를 분실했다며 끝내 제시하지 못했다.[32] 감금 문제의 책임자로 지목된 캐넌 소령은 본국으로 귀국하여 사건은 흐지부지되었다. 1953년 국회 증언에서는 다른 인물로부터도 캐넌 기관에 납치되어 고문과 스파이 강요를 당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33]

미국 대사관은 부당 감금을 부인하면서도, 머피 대사는 개입의 한계를 인정하며 일본 국회가 자체적으로 결론 내리기를 바란다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34]

결핵으로 늑골을 절제하는 등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던[10] 가치는 사건 이후 병약한 몸으로 본인뿐 아니라 아내까지 반복적으로 국회 증인 소환을 당하는 등 심한 압박을 받았다. 미하시 체포 이후에는 스파이 혐의로 또다시 증인 소환이 이어졌고, 미하시 재판 증인 출석, 국회 대질 심문 등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국가경찰은 가치의 병세를 강제로 감정하려 시도했으나, 지원자들의 저항으로 무산되기도 했다.[35]

한편, 미하시는 무면허 무선국 개설 및 운용 혐의(전파법 위반)로 징역 4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전문가들은 미하시의 안테나 성능과 장기간 불법 행위 방치에 의문을 제기했지만[36], 미하시는 가치의 공범임을 주장하며 스파이 활동을 자백하는 형태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복역 후 회사에 복귀했으며, 미국의 배려로 원하던 미국과 캐나다 유학길에 오를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왔다.[37]

가치는 끝까지 스파이 혐의를 부인하며 16년간의 긴 재판을 이어갔고, 마침내 1969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 1심의 유죄 판결을 뒤집은 결과였다. 재판이 길어진 이유 중 하나는 가치가 미하시에게 건넸다는 암호문의 필적 감정에만 7년 반이 걸렸기 때문이다. 과거 국가경찰이 결정적 증거라며 "확실한 감정 결과가 나왔다"고 발표했던 엽서는 끝내 분실 처리되었다. 재판부는 필적 감정 결과를 신뢰할 수 없고, 미하시의 증언 역시 미국 정보 기관의 개입 정황 등으로 미루어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38]

4. 5. 일본 정부의 대응과 미국의 영향력

당시 내각 법제국은 주둔 미군 장병에 대해 ① 일본에 수사권은 있지만 이 또한 행정 협정으로 일정한 제한이 있으며, ② 국회 증인으로 소환할 때는 행정 협정에도 규정이 없고 국제법에 따르지만, 미국 정부 직원이면 국제법상 근거는 없지만 국제적 예양으로 본인의 승낙이 필요하다는 것이 타당하며, ③ 가치가 고소하면 일단 수리하여 수사하고, 주둔 군인이면 사건을 주둔군으로 이송한다는 국회 답변이었다.[29]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주권을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국의 강한 영향력 하에 일본의 사법 주권이 완전히 행사되기 어려웠던 현실을 보여준다.

국가경찰(당시 국가 지방 경찰)의 사이토 노보루 장관은 국회 답변에서, 미군 측으로부터 가치가 스스로 보호를 요청했으며 감금 상태에 만족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말하며, 미군의 불법 감금 행위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사실상 시인했다.[30] 이러한 발언은 가치가 미군에게 납치되어 강제로 감금되었다고 주장하는 상황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가치는 국가경찰의 이러한 소극적이고 미군을 비호하는 듯한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27]

수사 과정에서도 여러 문제점이 드러났다. 사이토 장관은 처음에는 독자적인 수사로 스파이 용의자를 추적하고 있다고 밝혔으나,[22] 이후 관련자로 지목된 미하시 마사오가 자수한 것으로 처리되는 등[19][24] 사건 처리 과정에서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특히 미하시의 자수가 미군의 권유나 압력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이 언론 등에서 제기되기도 했다.[20][31] 또한 국가경찰 측은 가치의 스파이 혐의를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로 미하시와 가치 간에 주고받은 엽서를 확보했다고 주장했지만, 이후 이 엽서를 분실했다며 끝내 실물을 제시하지 못해[32] 수사의 신뢰성에 큰 의문을 남겼다.

한편, 로버트 머피 주일 미국 대사는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표명하면서도, 사안에 깊이 관여하기는 어렵다는 태도를 보이며 사실상 일본 측이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비쳤다.[34] 이는 당시 일본 정부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과 복잡한 관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감금 사건의 책임자로 지목된 미군 캐넌 기관의 캐넌 소령이 본국으로 귀국하면서[33] 사건의 핵심 인물에 대한 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 이는 주권 회복 직후에도 여전히 일본 내 미군의 활동과 그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 능력에 명백한 한계가 있었음을 드러내는 사례로 남았다.

4. 6. 카치의 건강 문제와 증인 소환

야마다 젠지로[8][9]에 의해 공론화된 이 사건은 중의원 법무위원회에서 다루어졌다. 카지는 석방 직후인 1952년 12월 10일, 증인 소환되어 사건 경위에 대해 증언했다. 국회 증언 과정에서 카지 본인과 다른 증인들은 카지가 원래 반전주의자였으며, 국민당의 군사위원회 고문으로서 중일 전쟁 당시 반전 활동을 벌였다는 사실을 밝혔다[10]. 카지는 증언에서 감금 중 중국에서 했던 것과 유사한 활동[11]을 해달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정치적으로 미국의 극동 정책에 일본 국민으로서 찬성할 수 없으며 협력할 의사가 없다고 답변했다고 진술했다[10].

4. 7. 미하시의 재판과 가치의 무죄 판결

미하시 마사오의 무면허 무선 혐의에 대해서는, 당시 일본 아마추어 무선 연맹 이사장 오코치 마사하루 도쿄공대 강사로부터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는 신문 보도 사진에 실린 안테나가 텔레비전 수신 정도의 것이라는 점, 그리고 과거 소년이 우발적으로 불법 전파를 발사했을 때 수십 명의 무장 경찰이 즉시 출동했던 사례와 비교하며, 미하시의 무면허 무선 행위가 사실이라면 1년 이상 방치된 점이 이상하다고 지적했다.[36]

그러나 미하시는 가치 와타루 역시 공범이라고 진술하고 자신도 스파이 활동을 했다고 자백하는 형태로, 무면허 무선국 개설 및 운용에 의한 전파법 위반 혐의로 징역 4개월의 실형 판결(미결 구류 80일 포함, 잔여 형기는 40일)을 받았다. 미하시가 다니던 회사는 일찍부터 그를 해고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으며, 보석 후에는 미국의 지원으로 평소 희망했던 미국과 캐나다로 무선 기술을 공부하러 갈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37] 이는 미하시가 미국의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반면, 가치 와타루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파이 혐의를 부인했다. 16년이라는 긴 재판 끝에, 1969년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되었다. 이는 1심의 유죄 판결을 뒤집은 결과였다. 재판이 이토록 길어진 주요 원인 중 하나는, 가치가 미하시에게 전달했다는 암호문의 필적 감정에만 7년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는 사건 초기 국가 경찰이 결정적인 증거 중 하나라며 "가치의 필적이 틀림없다는, 거의 볼 수 없을 정도의 확실한 감정 결과가 나왔다"고 발표했던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심지어 국가 경찰이 증거로 주장했던 엽서는 이후 분실되었다며 재판에 현물로 제출되지도 못했다.[32] 재판 과정에서 진행된 암호문 필적 감정 결과는 총 2건이었는데, 하나는 가치의 필적이라는 결과였고 다른 하나는 가치의 필적이 아니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최종 무죄 판결에서는 필적 감정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공범이라는 미하시의 증언 역시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보았다. 미하시는 처음 신문 보도에서 가치의 사진을 봤을 때는 자신에게 암호문을 건넨 인물이라고 확신하지 못했으나, 미국 정보 기관 관계자로부터 자수를 권유받은 이후에야 확신하게 되었다고 진술했는데, 재판부는 이러한 진술 변화 과정이 의심스럽다고 판단한 것이다.[38] 결국 가치는 오랜 법정 다툼 끝에 스파이라는 누명을 벗게 되었다.

참조

[1] 뉴스 鹿地氏、ゾルゲ事件に関連か 1952-12-20
[2] 뉴스 鹿地亘氏を米軍が監禁 1952-12-06
[3] 뉴스 鹿地氏、米軍に軟禁? 1952-12-06
[4] 뉴스 鹿地亘氏、昨夜突如帰る 1952-12-08
[5] 뉴스 留置はしたが短期 1952-12-09
[6] 뉴스 鹿地事件 疑問を呼ぶ 1952-12-09
[7] 서적 鹿地事件のことなど 猪俣浩三 野村二郎『法曹あの頃(下)』(日評選書、1981年)
[8] 서적 キャノン機関でハウスボーイとして働いていた 春名幹男『秘密のファイル : CIAの対日工作』 上巻 共同通信社 2000年
[9] 간행물 後に日本国民救援会に就職し、1992-2008年中央本部会長。2019年12月28日東京新聞
[10] 웹사이트 第15回国会 衆議院 法務委員会 第10号 昭和27年12月10日 https://kokkai.ndl.g[...] 국회도서관 2023-06-03
[11] 간행물 ジャーナリスト春名幹男が[[アメリカ国立公文書記録管理局|米国立公文書館]]で発見したという、GHQ[[対敵諜報部隊]][[:en:Counterintelligence Corps (United States Army)|(en)CIC]]の1947年6月16日付鹿地ファイルによれば、「[[1944年]]初めから、鹿地とその妻(池田幸子)は重慶でアメリカ当局と緊密に協力した。重慶、[[昆明]]の中国戦域で日本人捕虜を再教育する集中的な計画を実施するために、彼は米戦時情報局の顧問となり、後に[[Office of Strategic Services]](OSS、戦略諜報局)に雇われた」と記されていたという。(訳文は前掲書『秘密のファイル』 p.329から。)
[12] 뉴스 鹿地氏昨夜突然帰る ”米軍に監禁”と声明書発表 嘘の自白、自殺も図る 1952-12-08
[13] 뉴스 鹿地氏 スパイで逮捕 1952-12-11
[14] 뉴스 鹿地事件新たな波紋 1952-12-12
[15] 뉴스 鹿地事件 米大使館から声明 1952-12-12
[16] 뉴스 とんでもない話だ 要求された2か条に署名 鹿地氏談 1952-12-12
[17] 뉴스 逮捕取調中の人物"鹿地自供書"と関連か 1952-12-12
[18] 뉴스 スパイ容疑は虚構 1952-12-12
[19] 뉴스 無電男は三橋正雄 電波法違反で送検 鹿地氏とのレポ関係自供 1952-12-13
[20] 뉴스 鹿地被告、逆転無罪 1969-06-26
[21] 뉴스 逮捕された三橋正雄 送検、取調べ続行 1952-12-13
[22] 뉴스 三橋・鹿地氏 関連あり 1952-12-13
[23] 뉴스 最大のスパイ事件に発展? 1952-12-13
[24] 뉴스 三橋は自首 1952-12-13
[25] 뉴스 鹿地氏、ゾルゲ事件に関連か 1952-12-20
[26] 뉴스 重要証人握る 1952-12-20
[27] 뉴스 強制された”自供書”鹿地氏 米大使館の覚書に反論 1953-01-28
[28] 뉴스 スパイ問題は切離す 1952-12-16
[29] 뉴스 米軍人には強制できぬ 証人喚問 1952-12-24
[30] 뉴스 鹿地監禁は知っていた 斉藤長官答弁 1953-01-27
[31] 뉴스 行きづまった鹿地事件 1953-01-18
[32] 뉴스 証拠のはがき紛失 1953-02-03
[33] 웹사이트 第16回国会 衆議院 法務委員会 第31号 昭和28年8月5日 https://kokkai.ndl.g[...] 국회도서관 2023-06-08
[34] 뉴스 不当に監禁せず 1953-02-26
[35] 뉴스 鹿地氏 強制診断も拒否 1953-02-10
[36] 뉴스 三橋事件とアマチュア無線 1952-12-24
[37] 뉴스 無電勉強に近く渡米? 1953-03-21
[38] 뉴스 鹿地被告、逆転無罪 1969-06-26
[39] 서적 일본의 검은 안개 下
[40] 서적 일본의 검은 안개 下
[41] 서적 일본의 검은 안개 下
[42] 서적 일본의 검은 안개 下
[43] 서적 일본의 검은 안개 下
[44] 서적 일본의 검은 안개 下
[45] 서적 일본의 검은 안개 下
[46] 서적 일본의 검은 안개 下
[47] 서적 일본의 검은 안개 下
[48] 서적 일본의 검은 안개 下
[49] 서적 일본의 검은 안개 下
[50] 서적 일본의 검은 안개 下
[51] 서적 일본의 검은 안개 下
[52] 서적 일본의 검은 안개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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