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과 막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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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장과 막야는 중국 춘추 시대에 제작되었다고 전해지는 명검으로, 다양한 문헌과 대중문화 작품에 등장한다. 역사적으로는 순자, 묵자 등의 기록에 언급되며, 진서에는 서진 시대에 다시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검의 제작 과정과 관련하여 오월춘추, 수신기 등의 문헌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며, 특히 오월춘추에서는 간장과 막야 부부의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 검이 완성되는 과정이 묘사된다. 이 외에도, 후세의 작품, 예를 들어 Fate/stay night, 킹덤, 와룡: 폴른 다이너스티 등에서 간장과 막야는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며,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 한국 등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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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장과 막야 | |
|---|---|
| 개요 | |
| 중국어 간체 | 干将 |
| 중국어 정체 | 干將 |
| 병음 | Gān Jiàng |
| 웨이드-자일스 | Kan¹ Chiang¹ |
| 한국어 | 간장 |
| 일본어 | 간쇼 (Gan Shō) |
| 중국어 간체 | 莫邪 |
| 중국어 정체 | 莫邪 |
| 병음 | Mò Yé |
| 웨이드-자일스 | Mo⁴ Yeh² |
| 한국어 | 막야 |
| 일본어 | 바쿠야 (Bakuya) |
| 인물 정보 | |
| 직업 | 검 제작자 |
| 배우자 | 막야 |
| 시대 | 춘추 시대 |
| 출생지 | 초나라 |
| 활동 지역 | 오나라 |
| 전설 | 간장과 막야는 부부 검 제작자로, 그들의 이야기는 중국 역사에 전해짐. |
| 간장과 막야의 검 | |
| 종류 | 검 |
| 용도 | 전쟁, 의례 |
| 재료 | 철, 구리 |
| 제작 방법 | 전통적인 주조 및 단조 기법 |
| 전설 | 간장과 막야는 희생적인 헌신을 통해 명검을 만들었다고 전해짐. |
| 특징 | 뛰어난 날카로움과 내구성, 아름다운 문양 |
| 관련 기록 | |
| 서적 | 《열자》 《오월춘추》 《수신기》 《박물지》 |
| 내용 | 간장과 막야의 전설과 그들이 만든 검에 대한 기록 |
2. 역사적 기록과 유산
역사서인 순자와 묵자는 전국 시대 간장과 막야 검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다. 진서 장화 열전에는 두 검이 서진 초기에 다시 나타났으며, 이후 연평진(현재의 푸젠성 난핑 시 옌핑 구)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옌핑 구에는 간장과 막야의 검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저장성 더칭 현의 막간산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졌다.[6]
이 검에 얽힌 이야기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크게 명검 탄생 경위와 후일담인 복수담으로 나뉜다. 단, 『오월춘추』에는 복수담이 없고, 제작 명령자가 오나라 합려 왕으로 되어 있으나, 『수신기』에서는 초나라 왕으로 나온다. 제작 과정은 곤오산의 금속을 먹는 토끼 내장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습유기』). 후세 작품, 특히 일본 작품에서는 중국 원전과 상당한 차이가 나타난다. 간장과 막야는 《사기》 외 여러 서적에도 명검으로 소개되어 있다.
2. 1. 순자와 묵자
《묵자》에는 "좋은 칼은 날카로움을 기대할 뿐, 막야를 기대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있다.[1] 《순자》 〈성악〉편에는 "합려의 간장, 막야, 거궐, 벽려, 이들은 모두 옛날의 훌륭한 칼이다."라고 언급되어 있다.[2]2. 2. 진서와 기타 기록
묵자에는 "좋은 검은 날카로움을 따지지, 막야와 같은 명검을 따지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있다.[1] 순자 〈성악〉편에는 "합려의 간장, 막야, 거궐, 벽려, 이들은 모두 옛날의 훌륭한 칼이다"라는 기록이 있다.[2] 진서의 장화 열전에는 두 검이 서진 초기에 다시 나타났으며, 이후 연평진(현재의 푸젠성, 난핑 시, 옌핑 구)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옌핑 구에는 간장과 막야의 검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3] 저장성 더칭 현의 막간산은 간장과 막야를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졌다.[4]3. 문헌별 이야기
간장과 막야 이야기는 여러 문헌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해진다. 크게 검 제작 경위와 후일담(복수 이야기)으로 나눌 수 있다.
오월춘추에 따르면, 오왕 합려는 간장과 막야에게 3개월 안에 검 한 쌍을 만들도록 명령했다.[1] 그러나 용광로가 금속을 녹이지 못하자, 막야는 인간의 기가 부족하다고 제안했다. 부부는 머리카락과 손톱을 용광로에 던지고, 300명의 아이들이 풀무질을 도왔다.[1]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막야는 직접 용광로에 몸을 던져 희생했다고도 한다. 3년 후, 검이 완성되자 간장은 남성 검(간장)은 숨기고 여성 검(막야)만 왕에게 바쳤다. 왕은 간장이 남성 검을 숨긴 것을 알고 분노하여 그를 죽였다.
간장은 죽기 전 막야와 아들 치(赤)에게 간장검의 위치를 알렸다. 치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간장검을 찾았고, 협객의 도움을 받아 왕을 죽이고 자신도 자결했다. 협객은 왕과 치, 자신의 머리를 함께 삶아 구분할 수 없게 만들었고, 세 머리는 이춘현, 여남현, 허난에 "삼왕묘"로 함께 묻혔다.[2]
수신기에서는 검 제작을 초왕이 명령했고, 제작 과정은 간략하게 3년이 걸렸다고만 언급된다. 주로 후일담이 중심 내용이다.
- 《묵자》: "良劍期乎利,不期乎莫邪。" (좋은 칼은 날카로움을 기대하는 것이지, 막야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 《순자》 〈성악〉편: "闔閭之干將、莫邪、鉅闕、辟閭,此皆古之良劍也。" (합려의 간장, 막야, 거궐, 피려는 모두 옛날의 좋은 칼이다.)
3. 1. 오월춘추
吳越春秋중국어에서는 주로 그 제작 경위와 과정이 이야기된다.오왕 합려가 월나라에서 보낸 세 자루 보검(담로, 반영, 어장)을 보고 간장에게 두 자루의 검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간장은 최고의 재료(오산의 철정, 육합의 금영. 오산은 태산과 같은 5산 중 하나이고 육합이란 천지사방을 말한다)를 모아 최고의 조건(후천사지候天伺地、음양동광陰陽同光、백신임관百神臨觀、천기하강天氣下降)을 갖춘 뒤 노(炉)를 열었다. 그러나 온도가 급격하게 낮아져 철이 녹지 않았다. 석 달이 지나도록 진전이 없자, 과거 그들의 스승 부부가 노 속에 몸을 던져 쇳물을 녹인 적이 있음을 생각하고 아내 막야가 자신의 손톱과 털을 넣고 동자 삼백 명에게 풀무를 밟도록 했더니 겨우 철이 녹았다.[1] 그리하여 완성된 두 자루의 검 중 간장검은 숨겨두고 막야검만 합려에게 헌상했다. 어느 날 노나라 사자 계손이 오나라를 방문하자 합려는 그에게 막야검을 선물로 주고자 했다. 계손이 막야검을 칼집에서 빼 보자 날이 빠져 있었다. 이를 본 계손은 오나라가 패자가 될 것이지만 결국 망할 것이라 예측하고 막야검을 받지 않았다.[1]
3. 2. 수신기
《수신기》에서는 간장과 막야에게 검 제작을 의뢰한 것이 오가 아닌 초나라 왕으로 나온다. 제작 과정도 자세한 설명 없이 단순히 3년이 걸렸다고만 언급되며, 주로 그 후일담이 중심 내용이다. 《수신기》에는 막야의 이름이 '莫耶'가 아닌 '莫邪'로 기록되어 있다.검이 완성되는 데 3년이나 걸리자 초왕은 분노했다. 간장이 초왕에게 막야검을 바쳤을 때 막야는 임신 중이었는데, 간장은 자신은 초왕에게 살해당할 것이니 아들이 태어나면 “문을 나와 남쪽으로 산을 바라보는 돌 위에 자란 소나무”, 즉 주춧돌 위 나무 기둥 속에 간장검을 숨겼으니 그것으로 복수하라고 당부했다. 초왕은 제작 기한을 넘긴 데다 바쳐진 검이 한 자루뿐인 것을 알고 더욱 분노하여 간장을 죽였다.
막야가 낳은 아들 적비(赤)는 이마가 넓어 미간척(眉間尺)이라고도 불렸는데, 성장하여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행방을 물었다. 막야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초왕에게 살해당했음을 알리고 간장의 유언을 전했다. 기둥 아래에서 간장검을 찾은 적비는 밤낮으로 복수를 다짐했는데, 초왕이 꿈을 통해 이를 알고 적비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그러자 적비는 산으로 도망가 울었다. 그곳을 지나가던 협객이 우는 이유를 묻자 적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협객은 “간장검과 너의 목이 있으면 내가 대신 복수해 주겠다”고 했다. 이에 적비는 자신의 목을 쳐 자결했는데, 그 시체는 협객이 “약속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자 비로소 쓰러졌다.
협객은 적비의 목을 가지고 초왕을 만났고, 초왕은 매우 기뻐했다. 협객은 “이것은 용자의 목이기 때문에 물에 끓여 삶아야 한다”고 했고, 왕은 그 말에 따랐다. 그러나 삼일 밤낮을 끓여도 적비의 목은 삶기기는커녕 물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노려보고 있었다. 협객은 “왕께서 들여다보시면 반드시 삶길 것”이라 했고, 초왕은 그 말을 따라 솥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협객이 간장검으로 초왕의 목을 베었고, 자신의 목도 베었다. 두 목은 솥 속에 빠져 적비의 목과 함께 삶겨져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한꺼번에 매장하기로 했고 그 무덤을 왕삼묘(三王墓)라 했다. 이 무덤은 여남의 의춘현(宜春県)에 있다고 한다.[6]
3. 3. 기타 문헌
《오월춘추》에서는 주로 간장과 막야의 제작 경위와 과정이 상세히 설명된다.오왕 합려는 월나라에서 보낸 세 자루 보검(담로, 반영, 어장)을 보고 간장에게 두 자루의 검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간장은 최고의 재료(오산의 철정과 육합의 금영)를 모으고 최고의 조건(오산은 태산과 같은 5산 중 하나이고 육합이란 천지사방을 말한다)을 갖춘 뒤 노(炉)를 열었다. 그러나 온도가 급격히 낮아져 철이 녹지 않았다. 석 달 동안 어려움을 겪다가, 과거 스승 부부가 쇳물을 녹이기 위해 노 속에 몸을 던진 것을 떠올린 막야는 자신의 손톱과 털을 넣고 동자 삼백 명에게 풀무질을 시켰다. 그 결과 철이 녹아 두 자루의 검을 완성할 수 있었다. 간장은 간장검을 숨기고 막야검만 합려에게 바쳤다. 노나라 사자 계손이 오나라를 방문했을 때 합려는 막야검을 선물하려 했으나, 계손은 칼날이 빠진 것을 보고 오나라가 패자가 되지만 결국 멸망할 것이라 예측하며 받지 않았다.
《수신기》에서는 오나라가 아닌 초나라 왕이 간장과 막야에게 검 제작을 의뢰했다. 제작 과정은 3년이 걸렸다는 간단한 설명만 있고, 주로 후일담이 중심이다. 《수신기》에는 막야의 이름이 耶(야)가 아닌 邪(야)로 기록되어 있다.
검이 완성되기까지 3년이나 걸려 초왕은 분노했다. 간장이 막야검을 바칠 때 막야는 임신 중이었는데, 간장은 자신이 초왕에게 살해당할 것을 예감했다. 그는 막야에게 아들을 낳으면 “문을 나와 남쪽으로 산을 바라보는 돌 위에 자란 소나무”, 즉 주춧돌 위 나무기둥 속에 간장검을 숨겼으니 복수를 명하라고 당부했다. 초왕은 제작 기한을 넘기고 검이 한 자루뿐인 것에 분노하여 간장을 죽였다. 막야가 낳은 아들 적비(赤)는 이마가 넓어 미간척(眉間尺)이라고도 불렸는데, 성장하여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행방을 물었다. 막야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죽음과 간장의 유언을 전했다. 적비는 간장검을 찾아 복수를 결심했으나, 초왕이 꿈을 통해 이를 알고 현상금을 걸었다. 적비는 산으로 도망가 울었고, 지나가던 협객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협객은 간장검과 적비의 목으로 대신 복수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적비는 자결했고, 협객은 약속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자 시체가 쓰러졌다. 협객은 적비의 목을 초왕에게 바쳤고, 초왕은 기뻐했다. 협객은 용자의 목은 끓여 삶아야 한다고 말했고, 초왕은 따랐다. 그러나 삼일 밤낮을 끓여도 적비의 목은 삶기지 않고 물속에서 얼굴을 내밀어 노려보았다. 협객은 왕이 들여다보면 삶길 것이라 했고, 초왕이 솥 속을 들여다보는 순간 간장검으로 초왕과 자신의 목을 베었다. 두 목은 솥 속에 빠져 적비의 목과 함께 삶겨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을 함께 매장한 무덤을 왕삼묘(三王墓)라 했으며, 여남 의춘현(宜春県)에 있다고 한다.
4. 후세 작품에서의 등장
간장·막야는 중국 검에 관한 일화로 유명하여 후세에도 다양한 작품에 등장했다.
- '''Fate/stay night''' : 아처의 대표적인 무기로 등장하며, 부부의 검으로 묘사된다. 이름은 일본어(간쇼 -간장- 및 바쿠야 -막야-)로 번역되었다.[3]
- '''킹덤''' : 바쿠유(막야) 검을 만든 것으로 언급된다. 이 검은 초나라의 장수인 항익(Kou Yoku)이 사용했다.[4]
- '''와룡: 폴른 다이너스티''' : 주인공이 사용 가능한 춘군, 참로, 어장, 성혈과 함께 춘추 시대의 유명한 역사적 무기 중 하나로 등장한다.
- '''고금이야기집''', '''태평기''' : 간장과 막야의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참조)
- '''봉신연의''' : 막야보검이라는 이름의 보패가 등장하여 황천화가 사용한다.
- '''루쉰'''의 '''주검''' : 간장과 막야 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 '''요괴소년 호야''', '''채운국 이야기''', '''삼국지 레이브''' 등 : 간장과 막야 설화가 사용되거나 이름이 차용되었다.
- 가부키 연극 '''"겐페이 누노비키 폭포"'''의 "사네모리 이야기" : 간장과 막야 설화가 언급된다.
4. 1. 고금이야기집
今昔物語集일본어 권 제9, 44에 「진단(震旦, 시나스탄=중국)의 막야, 칼을 만들어 왕에게 바치고 아들 미간척을 살해당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수신기와 마찬가지로 후일담에 따른 것이지만, 몇 가지 큰 차이점이 존재한다. 우선, 막야가 '''남성'''이라는 설정이 언급된다(덧붙여, 막야의 아내는 단지 '아내'로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제작한 칼에 이름은 없다). 왕에 대해서는 단지 국왕으로만 칭하며, 국가에 대한 언급은 없다.제작 경위에 대해, 국왕 부인이 쇠 구슬을 낳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왕이 분노한 이유에 대해, 수신기가 첫 번째 이유로 언급하는, 제작 기간이 3년이나 걸렸다는 것이 아니라(제작 기간 3년에 대한 언급은 今昔物語集일본어에는 없다), 헌상한 칼이 한 자루뿐이었고, 암검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암검임이 드러난 이유에 대해, 칼이 소리를 내고 있었고, 그 원인을 국왕이 대신에게 묻자, 이것은 부부검이며, 수검이 존재하고 이 보검이 암검이라고 대신이 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막야는 왕에게 처형된 것이 아니라, 큰 나무 속에 숨어서 죽었다고 한다. 또한, 수신기에서는 산에서 미간척을 만난 사람은 여행자이지만, 여기서는 국왕의 자객이다. 그리고, 미간척의 목을 삶은 기간은 7일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왕은 목이 잘린 것이 아니라, 뜨거운 물 속을 보니 저절로 목이 떨어졌다고 하며, 탕 안에서 다퉜다고 한다. 그것을 본 자객은 왕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 칼을 뜨거운 물에 던져 넣는다. 칼의 힘으로 두 사람의 목은 녹았지만, 탕 안을 보던 자객의 목도 탕 안으로 자연스럽게 떨어졌다고 한다. 묘에 대해서는 수신기와 동일하다.
4. 2. 태평기
태평기 권 제13에 "병부경궁의 훙어사건과 간장 막야의 일(兵部卿宮薨御事付干将莫耶事)"이 기록되어 있다[7]. 『태평기』에서도 주로 후일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내용으로는 고금이야기집과의 공통점이 많은 반면, 수신기와 유사한 기술로 돌아간 부분도 많다. 구체적으로는, 『고금이야기집』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던 왕이 초왕(楚王)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간장, 막야의 설정이 중국에서의 형태(부부)로 돌아와 있고, 제작 기간이 3년이었다는 점이 기록되어 있다. 초왕 부인이 쇠 구슬을 낳고, 간장과 막야가 그것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은 『고금이야기집』과 같으며, 목을 삶은 날수에 대해서도 7일 7밤으로, 『고금이야기집』과 같다. 간장이 처형된 이유는 『고금이야기집』과 유사하게 헌상한 검이 막야 한 자루뿐, 암검이었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막야가 낸 소리는 "비통한 울음 소리"로 되어 있다.새롭게 추가된 기술로는, 미간척(眉間尺)에 대해 얼굴이 3척이고 미간이 1척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는 것(이에 대해 『고금이야기집』에서는 얼굴이 3척이었다는 것은 언급되지 않는다), 복수가 끝났을 때 목이 된 미간척과 손님이 소리를 질렀다는 것 등이 이야기로 추가되어 있으며, 나그네는 간장과 구면이었다는 것, 미간척이 목을 벨 때, 압승의 창날 3촌을 잘라내고, 그것으로 목을 베었다는 것 등이 수신기와는 다르다.
또한, 『태평기』에서는 그 후의 이야기가 더해져, 간장의 창날 3촌은 나중에 연의 황태자인 단에게 전해지고, 그의 자객인 형가가 진 시황 암살 미수에 사용한 비수가 바로 이것이며, 후에 장화와 뇌환이라는 인물이 간장과 막야를 발견하지만, 황제에게 헌상하기 위한 수송 중에, 연평진(延平津)에서 스스로 칼집에서 빠져나와, 암수 용이 되어 강에 잠겼다는 등의 이야기를 한다[8].
4. 3. 기타 작품
이 검에 얽힌 이야기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크게 명검 탄생 경위와 후일담인 복수담으로 나뉜다. 오월춘추에는 복수담에 해당하는 후일담이 없다. 또한, 『오월춘추』에서는 제작을 명령한 이가 오나라 합려 왕이지만, 수신기에서는 초나라 왕으로 되어 있다[6]。곤오산에 사는 금속을 먹는 토끼의 내장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습유기』). 후세의 작품, 특히 일본 작품에서는 중국의 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명나라 시대에 성립된 『봉신연의』에서도 막야보검이라는 이름의 보패가 등장하여 황천화가 사용한다. 20세기에 루쉰이 이를 바탕으로 『주검』을 저술했다. 최근 일본에서도 『요괴소년 호야』에 이 설화(및 그것을 바탕으로 한 설정)가 사용되거나, 작품에 이름이 차용되기도 한다(『Fate/stay night』, 『채운국 이야기』, 『삼국지 레이브』 등).
검 제작 경위에 있어서 막야가 머리카락과 손톱이 아닌, 자신을 쇠에 던졌다는 이야기도 널리 퍼져 있다[9]. 이것은 『오월춘추』의 해당 구절인 "於是干將妻乃斷髮剪爪,投於爐中"을 "간장의 아내(막야)가 머리를 자르고 손톱을 깎아 (그것을) 쇠에 던졌다"로 해석할지, "(막야가) 머리를 자르고 손톱을 깎아 (몸을 깨끗이 하고) 쇠에 (자신을) 던졌다"로 해석하는 차이에서 비롯된다.
가부키 연극 "겐페이 누노비키 폭포"의 "사네모리 이야기"에서는, 아오이 고젠이 낳은 것이라고 쿠로스케 코요시 부부가 팔을 내밀자 세오 주로 카네시게는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어디 있느냐"라며 분노한다. 그러나 사네토모는 "초나라의 도용 부인은 더위를 타서 쇠기둥을 안고 잤다. 이윽고 부인은 쇠구슬을 낳았고, 이것을 검으로 만든 것이 명검 막야이다. 쇠구슬을 낳은 전례가 있으니 팔이 태어나는 일도 있을 것이다"라며 부부의 주장을 옹호한다.
5. 대중문화 속 간장·막야
- Fate/stay night에서 아처의 대표적인 무기로 등장하며, 부부의 검으로 묘사된다. 이름은 일본어(간쇼 -간장- 및 바쿠야 -막야-)로 번역되었다.[3]
- 킹덤에서 막야 검은 초나라 장수 항익(Kou Yoku)이 사용한 것으로 언급된다.[4]
- 와룡: 폴른 다이너스티에서 간장과 막야는 주인공이 사용 가능한 춘군, 참로, 어장, 성혈과 함께 춘추 시대의 유명한 역사적 무기 중 하나로 등장한다.
참조
[1]
서적
Wuyue Chunqiu
c. 50
[2]
서적
In Search of the Supernatural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6
[3]
게임
Fate/stay night
2004
[4]
서적
Kingdom
Shueisha
[5]
문서
具体的には『呉越春秋』闔閭内伝、『捜神記』巻十一、『[[拾遺記]]』、『[[列異伝]]』、『{{仮リンク|博物志|zh|博物志 (張華)}}』といったもの。『[[史記]]』や『[[荀子]]』にも名前程度の記述がある。
[6]
문서
呉 (春秋)|呉・楚 (春秋)|楚とも春秋時代の中国南部に存在した国であり、当時のこの地域、特に東南部は優れた金属の精製技術を持っていた。20世紀半ばに出土した越王勾践の剣などが、それを証明している。ただしこの剣は青銅製である。
[7]
문서
写本によってはこの部分が「兵部卿宮薨御事」となっており、干将莫耶に言及されている部分が無いものもある(たとえば流布本がそれにあたる)。
[8]
문서
これは『[[晋書]]』巻三十六列伝第六にある張華伝における話が基としてある。ただし『晋書』では発掘した雷煥が、その一振りを張華に渡した、となっており、皇帝献上云々は一切ない。また、剣には龍泉 太阿と刻まれていたとされる(どちらも『[[越絶書]]』において、干将と欧冶子の作とされる剣で、もう1本「工布」を加えて3振りとする)。その後、張華が剣文を詳しく見るとこれは干将である、とした。また、延平津における話は張華が誅殺された後の話であり、人を潜らせて探させたが剣は見えず、龍が二匹見えるだけだったとする。
[9]
문서
[[海音寺潮五郎]]『孫子』「干将・莫耶」の節など。なお海音寺は『呉越春秋』の記事を「莫耶が身を清め炉中に自身を投じた」としながらも、記事前段「昔吾師作冶,金鐵之類不銷,夫妻倶入冶爐中,然後成物。」から、妻が鍛冶場に入った理由は、陰陽のまじないのため夫婦の交わりをおこなうためであり、莫耶が自身を犠牲にしたという解釈は『呉越春秋』著者 趙曄のフィクションではないか、という解釈を採っ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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