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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고등상업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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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성고등상업학교는 일제강점기인 1915년 일본의 동양협회식민전문학교 경성분교로 시작하여, 1922년 관립 경성고등상업학교로 개편된 학교이다. 일본인 중심의 교육 환경 속에서 조선인 차별이 심했으며, 1944년 경성법학전문학교와 통합되어 경성경제전문학교로 변경되었다. 해방 후에는 경성경제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이 학교는 많은 경제, 산업, 정치 분야의 고위 인사를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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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고등상업학교 - [대학]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교명경성고등상업학교 (경성경제전문학교)
위치경기도 경성부 성북구 종암정
설립1915년, 1922년
폐교1946년
종류관립 전문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

2. 설립 배경

경성고등상업학교의 시작은 1915년 8월 설립 인가를 받은 동양협회 식민전문학교 경성분교였다. 이 학교는 현재의 숭인동에 위치했으며, 초기에는 일본의 전문학교령 관할 아래[10] 조선일본인의 고등상업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되어 일본인 학생만 입학할 수 있었다. 일본 제국 통치 하 조선에 있던 전문학교 중 유일하게 "내지인" 교육을 표방하기도 했다.

1916년 조선총독부에 등록하면서 조선 내 학생 모집이 가능해졌고, 총독부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18년에는 일본 본교에서 독립하여 '재단법인 사립 동양협회 경성전문학교'가 되었고, 1920년에는 동양협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사립 경성상업학교'로 개편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 학교는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지 못한 독립 학교였기에 학생 등록금만으로 운영되어 심각한 재정난을 겪었다. 결국 1922년 경영난에 빠진 학교를 조선총독부가 인수하여 전문학교급으로 승격시키면서 '관립 경성고등상업학교'로 개편하였다.

2. 1. 동양협회식민전문학교 경성분교

경성고등상업학교의 기원은 1907년 10월 경성부 대화정 1정목 24번지에 설립된 동양협회전문학교 경성분교이다.[5] 이는 1907년 5월 동양협회가 한국 지부를 개설하고[2], 같은 해 8월 한국 거주 일본인 거류민단이 동양협회에 학교 설립을 요청한 데[3][4] 따른 것이었다. 설립 당시에는 대만협회학교의 후신인 동양협회전문학교(타쿠쇼쿠 대학의 전신)의 분교 형태였으며, 가와이 히로미(문학박사)가 간사로 취임했다.[5]

1915년 8월, 본교 명칭 변경에 따라 동양협회 식민전문학교 경성분교로 개칭되었고, 같은 달 27일 전문학교급으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 학교는 오늘날의 숭인동에 자리 잡았다. 초기에는 일본의 전문학교령 관할 하에 있었으며[10], 조선 내 일본인의 고등상업교육을 위한 학교였기 때문에 일본인만 입학할 수 있었다. 일본 제국 통치 하 조선에 존재했던 전문학교 중 유일하게 "내지인" 교육을 표방하는 학교이기도 했다. 1916년 6월 28일에는 조선총독부에 등록하여 조선 내 학생 모집이 가능해졌으며, 이로써 조선총독부의 관리하에 놓이게 되었다.[6]

1918년 4월, 본교가 타쿠쇼쿠 대학으로 개칭하면서 경성분교는 동양협회 경성전문학교로 독립하였다.[6] 같은 해 6월에는 독립 개교식을 거행했다. 1919년 3월에는 구 동양협회 식민전문학교 3년 수료자의 졸업식이 있었으며, 도쿄 본교에서 파견된 학생의 졸업식은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같은 해 5월에는 경성 숭인동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고, 기숙사도 신축되었다.

1920년 4월(또는 5월), 동양협회에서 분리되어 조선총독부, 조선은행, 만철 3자 출자의 재단법인이 운영하는 사립 경성상업학교로 개편되었다. 이 학교는 조선총독부의 실업학교급 인가를 받지 않은 독립학교였으며, 학생들의 수업료와 공납금(등록금)만으로 운영되었다. 이로 인해 곧 재정난에 빠져 학교 운영이 어려워졌다. 결국 1922년 3월, 경영난에 빠진 학교를 조선총독부가 인수하여 전문학교급으로 승격시키면서 관립 경성고등상업학교로 개편하였다.[7]

2. 2. 조선총독부 관할로의 전환

동양협회 식민전문학교 경성분교는 1916년 6월 28일 조선총독부에 등록되면서 조선 내에서 학생을 모집할 수 있게 되었고, 이때부터 조선총독부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10] 이후 1918년 3월 12일에는 재단법인 사립 동양협회 경성전문학교로 일본 본교와 분리되어 독립적인 학교 운영을 시작했으며, 총독부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사립 학교 형태로 운영되었다.

1920년 5월에는 동양협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사립 경성상업학교'로 개편되었다. 이 시기 학교는 조선총독부의 직접적인 관할 밖에 있는 독립 학교였기 때문에, 학생들의 수업료와 공납금(등록금)만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영 방식은 곧 재정난으로 이어졌고, 학교 운영이 어려워지는 상황에 처했다.

결국 1922년 3월, 경영난에 빠진 사립 경성상업학교를 조선총독부가 완전히 인수하여 전문학교급으로 승격시키면서 '관립 경성고등상업학교'로 개편하였다. 이를 통해 학교는 조선총독부의 직접적인 관리하에 놓이게 되었다.[7]

2. 3. 독립 및 사립학교로의 전환

1918년 3월 12일, 동양협회 식민전문학교 경성분교는 일본 본교에서 분리되어 재단법인 사립 동양협회 경성전문학교로 독립하였다.[6] 이는 조선총독부의 보조금을 받는 사립학교 형태였으며, 같은 해 4월 9일 정식 인가를 받았다.[6] 6월에는 독립에 따른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1919년 3월에는 분리되기 전 동양협회 식민전문학교의 3년 과정을 마친 학생들의 졸업식이 열렸으며, 이것이 도쿄 본교에서 파견된 학생들의 마지막 졸업식이 되었다. 같은 해 5월, 학교는 경성부 숭인동에 새 교사를 짓고 이전하였으며, 기숙사도 함께 신축되었다.

1920년 5월[7], 동양협회 경성전문학교는 동양협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사립 경성상업학교로 개편되었다. 이 학교는 조선총독부의 정식 인가를 받은 실업학교가 아닌, 인가 밖의 독립적인 사립학교였다. 따라서 총독부의 지원 없이 학생들의 수업료와 공납금(등록금)만으로 운영되었고, 이는 곧 심각한 재정난으로 이어져 학교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3. 경성고등상업학교 (관립)

1922년 3월, 사립 경성고등상업학교는 조선총독부 소관의 관립 학교인 '''경성고등상업학교'''로 개편되었다.[7] 이는 일제 강점기 조선 내 유일한 관립 고등상업교육기관으로, 본과 과정은 3년제였으며 주로 상학(상업학)을 가르쳤다.

당시 유일한 관립 상업 전문학교였기에, 졸업생들은 비교적 용이하게 관공서나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과 같은 공공은행, 일본계 대기업 등에 취업할 수 있었다. 조선인 졸업생 중 상당수는 민간 은행이나 공공은행으로 진출했으며, 1930년대 만주국 수립 이후에는 만주 지역의 경제 관료나 만주국중앙은행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성고등상업학교는 입학 정원 및 교직원 구성에서 조선인을 차별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비판을 받았다. 1925년에 처음으로 조선인 학생이 입학했지만[8], 졸업생 중 조선인 비율은 매우 낮았고 교직원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재정 지원 부족으로 학교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는 타 전문학교에 비해 훨씬 높은 수업료와 공납금으로 이어져 학생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특히 조선인 학생들의 중퇴율이 높게 나타났다.

1920년대 이후 자본주의 발달로 상업 교육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경성고등상업학교 역시 높은 경쟁률을 보였으나, 앞서 언급된 차별 문제와 비싼 학비로 인해 조선인 지원자가 상대적으로 적어, 연희전문학교나 '''보성전문학교''' 상과 등에 비해서는 경쟁률이 다소 낮은 편이었다.[11]

1939년 10월, 학교는 경성부 성북구 종암동 19번지의 새 교사로 이전하였다.[1]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시체제가 강화되던 1944년 4월, 경성법학전문학교와 통합되어 '''경성경제전문학교'''로 개칭되었고, 수업 연한도 단축되었다.

일제는 조선 내 유일한 관립 상업학교 운영을 통해 고등 상업 교육 기회를 제한하고, 기능적 상학 교육에 치중함으로써 식민지 통치에 유리한 인력을 양성하고자 했다는 비판이 있다.

1945년 8월 광복과 함께 일본의 패전으로 폐교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한국인들에 의해 '''서울경제전문학교'''로 재출발하였다. 이듬해인 1946년 8월, 국립 서울대학교가 설립되면서 상과대학(현 경영대학)으로 편입되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경성고등상업학교 졸업생들은 해방 후 남북한 양쪽에서 정관계, 경제계, 산업계의 주요 인사로 활동했으며, 졸업생 동창회로는 '숭릉회'가 조직되어 있다.

3. 1. 관립 전환과 차별

경성고등상업학교는 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중 조선인일본인 간의 차별이 가장 심했던 곳으로 평가받는다. 학교 내규에는 입학 정원 중 조선인을 20%만 선발하도록 명시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차별에 대한 언론의 비판이 계속되었음에도 광복까지 시정되지 않았다. 실제로 1922년부터 1936년까지 배출된 졸업생 968명 중 조선인은 177명으로, 전체의 10%를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했다. 교직원 구성에서도 차별은 명확했는데, 일본인 교사와 직원이 87명이었던 반면 조선인은 조선어 강사 단 1명뿐이었다. 두산그룹박두병 전 회장(경성고상 졸업생)의 회고나 당시 언론 보도를 통해서도 입시뿐 아니라 학교생활 전반에 걸쳐 조선인에 대한 극심한 차별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경성고등상업학교가 조선총독부 관립으로 이관되었을 때 재정적자가 심각했지만, 조선총독부는 재정적자를 해결하지 않고 교직원의 급여와 필수적인 운영 비용만을 지원했다. 이 때문에 다른 관립전문학교와 달리 학교 운영 비용의 절대적 비용을 수업료와 공납금으로 충당해야 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 내내 학교 운영이 어려웠고, 학생들이 부담하는 수업료와 공납금이 타 전문학교보다 훨씬 비쌌다. 비싼 수업료ㆍ공납금으로 인해 중퇴자가 많았으며, 조선인은 50%내외의 중퇴율을 보여줬다.

1920년대 이후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진행되면서 당시 취업시장에서 여러 전문학교들 중에서 상업학교의 인기가 가장 많았기 때문에 경성고등상업학교도 높은 경쟁률을 보여줬다. 다만, 타 전문학교보다 비싼 수업료와 공납금과 입시와 학교생활에서의 조선인ㆍ일본인 간의 차별 때문에 조선인들의 지원이 상대적으로 적어 3:1에서 6:1의 다소 낮은 경쟁률을 보여줬다. 참고로, 조선인 본위의 학사 운영이 이루어졌던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상과의 경우에는 매년 해가 갈 수록 지원자가 격증하여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20:1의 극심한 경쟁률을 보여줬다.[11]

일제와 조선총독부 당국이 식민지 조선에서 단 하나의 관립 상업기관만을 운영하면서 고등상업교육의 기회를 제한하고, 경성제국대학에도 경제학과를 설치하지 않은 것은 정책적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일제는 조선인에 대한 상업교육 자체를 제한하여 민족기업의 설립과 성장을 억제하고, 상업교육을 받은 조선인들을 일본계 민간은행, 대기업이나 관공서로 취업하도록 유도하여 이들이 민족주의 진영에 들어서거나 민족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였다. 또, 학술적 성격과 사회과학적 성격을 띤 경제학교육의 기회를 극도로 제한하고, 기능적 성격이 강한 상학을 중점적으로 교육함으로써, 고등학력자가 식민지 경제의 모순성을 지각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3. 2. 교육과정과 운영

경성고등상업학교는 일제 강점기 전문학교 중 조선인과 일본인 간 차별이 가장 심했던 곳이었다. 입학 정원에서 조선인을 20%만 선발하도록 하는 내부 규정이 있었으며, 이에 대한 언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해방될 때까지 이러한 차별은 개선되지 않았다. 1922년부터 1936년까지 졸업생 968명 중 조선인은 177명으로 전체의 10%를 조금 넘는 수치였다. 교직원 구성에서도 차별은 심각하여, 일본인 교사와 직원이 87명인 반면 조선인은 조선어 강사 1명뿐이었다. 박두병 전 두산그룹 회장의 회고나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입시뿐 아니라 학교 생활 전반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음을 알 수 있다.

학교의 정원은 85명이었고, 수학 연한은 3년으로 주로 상학(상업학)을 가르쳤다. 조선 내 유일한 관립 고등상업교육기관이었기 때문에 졸업생들은 심각한 취업난 속에서도 비교적 쉽게 관공서, 공공은행이나 일본계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었다. 조선인 졸업생 다수는 한성은행, 조선상업은행, 동일은행 등 민간 은행에 들어갔으며, 조선은행이나 조선식산은행 같은 공공은행에 취업하는 경우도 있었다. 1930년대 만주국이 세워지고 개발이 진행되면서, 경성고상 출신 조선인들이 만주의 경제 관료나 만주국중앙은행 간부로 진출하기도 했다.

경성고등상업학교가 조선총독부 관립으로 이관되었을 때 재정 적자가 심각했지만, 조선총독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교직원 급여와 필수적인 운영 비용만을 지원했다. 이 때문에 다른 관립 전문학교와 달리 운영비의 절대적인 부분을 학생들의 수업료와 공납금으로 충당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일제 강점기 내내 학교 운영이 어려웠고, 학생들이 부담해야 하는 학비는 다른 전문학교보다 훨씬 비쌌다. 비싼 학비 때문에 중퇴하는 학생이 많았는데, 특히 조선인 학생의 중퇴율은 50% 내외에 달했다.

1920년대 이후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취업 시장에서 상업학교의 인기가 높아졌고, 경성고등상업학교 역시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그러나 다른 전문학교보다 비싼 학비와 입시 및 학교생활에서의 조선인·일본인 간 차별 때문에 조선인 지원자는 상대적으로 적어, 경쟁률은 3:1에서 6:1 정도로 다소 낮은 편이었다. 참고로, 조선인 본위의 학사 운영이 이루어졌던 연희전문학교나 '''보성전문학교''' 상과의 경우에는 매년 해가 갈수록 지원자가 급증하여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20:1의 극심한 경쟁률을 보여주었다.[11]

1939년, 학교는 종암동의 우석학원(友石學園) 건물로 이전했다. 이후 1944년, 전시 총동원 체제가 강화되면서 교육 예산이 크게 줄어들자 경성고등상업학교는 경성법학전문학교와 통폐합되어 '''경성경제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

일제와 조선총독부 당국이 식민지 조선에서 단 하나의 관립 상업기관만을 운영하며 고등 상업 교육의 기회를 제한하고, 경성제국대학에도 경제학과를 설치하지 않은 것은 정책적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일제는 조선인에 대한 상업 교육 자체를 제한하여 민족 기업의 설립과 성장을 억제하고, 상업 교육을 받은 조선인들을 일본계 민간은행, 대기업이나 관공서로 취업하도록 유도하여 이들이 민족주의 진영에 들어서거나 민족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였다. 또한, 학술적 성격과 사회과학적 성격을 띤 경제학 교육의 기회를 극도로 제한하고, 기능적 성격이 강한 상학을 중점적으로 교육함으로써, 고등 교육을 받은 이들이 식민지 경제의 모순성을 지각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경성고등상업학교 출신 인사들은 해방 이후 남북한의 관계와 경제계, 산업계에서 고위직에 진출하게 되었다. 특히, 경성고상 출신으로서 조선은행이나 조선식산은행과 같은 공공은행 근무자들이 경제 관료와 국책은행 경영진으로 진출하였다. 만주국 국무원이나 만주국 중앙은행에서 경제 관료로 활동했던 졸업생들은 북한의 경제 발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나갔다.

해방 직후 경성경제전문학교는 대학 기관인 경성경제대학(비인가)으로 격상되었으며, 이는 이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의 모태가 되었다.

3. 3. 식민지 정책과의 연관성

경성고등상업학교는 일제 강점기 전문학교 중 조선인일본인 간 차별이 가장 심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학교 내규로 입학 정원의 20%만 조선인을 선발하도록 제한했으며, 이러한 차별은 언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해방될 때까지 개선되지 않았다.[11] 실제로 1922년부터 1936년까지 졸업생 968명 중 조선인은 177명으로, 전체의 10%를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했다. 교직원 구성에서도 차별은 명확했는데, 일본인 교사와 직원이 87명이었던 반면 조선인은 조선어 강사 단 1명뿐이었다. 두산그룹 회장을 지낸 졸업생 박두병의 회고나 당시 언론 보도를 통해서도 입시뿐 아니라 학교생활 전반에 걸쳐 조선인에 대한 극심한 차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11]

조선총독부는 경성고등상업학교를 관립으로 이관할 당시 심각했던 재정 적자를 해결하지 않고, 교직원 급여와 필수 운영비만 지원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학교는 운영비의 상당 부분을 비싼 수업료와 공납금으로 충당해야 했고, 이는 다른 관립 전문학교에 비해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비싼 학비는 높은 중퇴율로 이어졌는데, 특히 조선인 학생들의 중퇴율은 50%에 달했다.[11]

당시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상업학교의 인기가 높아 경성고등상업학교 역시 경쟁률이 높았지만, 비싼 학비와 차별 문제로 조선인 지원자는 상대적으로 적어 3:1에서 6:1 정도의 경쟁률을 보였다. 이는 조선인 위주로 운영되었던 연희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 상과가 일제 말기 20:1까지 경쟁률이 치솟았던 것과 대조적이다.[11]

일제와 조선총독부 당국이 식민지 조선에서 단 하나의 관립 상업기관만을 운영하면서 고등상업교육의 기회를 제한하고, 경성제국대학에도 경제학과를 설치하지 않은 것은 정책적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11] 일제는 조선인에 대한 상업교육 자체를 제한하여 민족기업의 설립과 성장을 억제하고, 상업교육을 받은 조선인들을 일본계 민간은행, 대기업이나 관공서로 취업하도록 유도하여 이들이 민족주의 진영에 들어서거나 민족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였다. 또, 학술적 성격과 사회과학적 성격을 띤 경제학교육의 기회를 극도로 제한하고, 기능적 성격이 강한 상학을 중점적으로 교육함으로써, 고등학력자가 식민지 경제의 모순성을 지각하지 못하도록 하였다.[11]

4. 경성경제전문학교로의 개칭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4년 4월, 경성고등상업학교는 경성법학전문학교를 통합하면서 '''경성경제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와 함께 수업 연한도 2년 6개월로 단축되었다.

5. 해방 이후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일제 강점기가 끝나면서 경성경제전문학교는 폐교되었다. 이후의 과정은 하위 문단에서 상세히 설명한다.

5. 1. 서울경제전문학교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제2차 세계 대전 중 '''경성경제전문학교'''(약칭 '''경성경전''')로 개칭되었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폐교되었으나, 한국인들에 의해 '''서울경제전문학교'''로 재발족하였다. 이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에서 상과대학으로 서울대학교에 편입되어 현재의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졸업생들에 의해 동창회인 "'''숭릉회'''"가 조직되어 있다.

6. 역대 교장

경성고등상업학교의 전신인 동양협회 경성전문학교, 사립 경성고등상업학교 시기 및 경성경제전문학교로 개칭된 이후 시기의 교장 명단이다.

; 간사


  • 초대: 가와이 히로미 (1907년 10월 ~ 1915년 4월) - 동양협회 전문학교(본교)에서 부임
  • 제2대: 고다마 히데오 (1915년 4월 ~ 1916년 11월) - 전 조선총독부 총무국장


; 교장

6. 1. 통합된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장

히라이 미츠오 - 재임 기간 등은 알려지지 않음.

7. 교원


  • 이타바시 기쿠마츠 - 저널리스트, 대학 교수
  • 요모 히로시 - 경제학자

7. 1. 통합된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원


  • 마츠오카 슈타로 - 법학자
  • 하가 준이치 - 검도인

8. 출신 인물

경성고등상업학교와 통합된 경성법학전문학교대한민국의 정계, 재계, 학계 등 사회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들을 다수 배출하였다. 주요 출신 인물은 아래와 같다.

8. 1. 경성고등상업학교 출신

이름졸업 연도주요 경력
와다 세이지1921년전 파일럿 만년필 사장
야마구치 요시오1925년전 오사카 산소 공업 회장
전례용1930년한국은행 총재, 규슈 제국대학 졸업
박두병1932년두산그룹 회장, 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야스나가 도요토1934년전 가와카미 도료 사장
송인상1935년재무부 장관
신태환1936년경제학자, 전 서울대학교 총장, 초대 국토통일원 장관, 도쿄상과대학 졸업
이동환1940년전 주일 대한민국 대표부 수석대표, 전 주오스트레일리아 대사, 도쿄상과대학 졸업
김동조1940년외교부 장관, 초대 주일본 대한민국 대사, 규슈 제국대학 졸업
홍승희1941년재무부 장관
정수창1941년두산그룹 회장, 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김유택1941년경제기획원 장관, 규슈 제국대학 졸업
최인규1941년내무부 장관
김준성1942년한국은행 총재



'''통합된 경성법학전문학교 출신'''

이름졸업 연도주요 경력
김홍식1931년대한민국 정치인, 관료
김용배1944년대한민국 군인, 실업가
김형일1945년대한민국 군인, 정치인
스기모토 하루오불상시인, 문예평론가
함준호불상대한민국 군인


8. 2. 경성법학전문학교 출신

이름졸업 연도주요 경력
스기모토 하루오불상시인, 문예평론가
함준호불상대한민국 군인
김용배1944년대한민국 군인, 실업가
김형일1945년대한민국 군인, 정치인
김홍식1931년대한민국 정치인, 관료


9. 동창회

졸업생에 의해 동창회 '''숭릉회'''가 조직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拓殖大学百年史
[2] 서적 拓殖大学百年史
[3] 서적 拓殖大学百年史
[4] 서적 拓殖大学百年史
[5] 서적 拓殖大学百年史
[6] 서적 拓殖大学百年史
[7] 서적 拓殖大学百年史
[8] 서적 拓殖大学百年史
[9] 웹사이트 全国上級学校大観 https://dl.ndl.go.jp[...]
[10] 문서 조선총독부가 관할치 않았으며 5년제 중학교 졸업자만 입학이 허용되었다.
[11] 뉴스 보성전문학교 상과에는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생이 다시 입학하기 위해 응시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조선일보 1936-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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