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이 도모아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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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다이 도모아쓰는 사쓰마 번에서 태어나 해군 과학 기술을 배우고, 사쓰에이 전쟁에서 포로가 된 후 쇄국 정책을 거부하고 영국 유학을 떠났다. 그는 1865년 사쓰마 번 파견 영국 사절단의 일원으로 유럽을 순회하며, 사쓰마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다. 메이지 유신 후에는 정계에 참여하여 오사카 경제 발전에 기여했으며, 오사카 상공회의소와 오사카 증권 거래소를 설립했다. 홋카이도 개척사 스캔들에 연루되기도 했으며, 만년에는 사업가로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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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다이 도모아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고다이 도모아쓰 |
| 본명 | 고다이 도모아쓰 |
| 로마자 표기 | Godai Tomoatsu |
| 출생 | 1836년 2월 12일 |
| 출생지 | 가고시마, 사쓰마 번, 일본 |
| 사망 | 1885년 9월 25일 |
| 사망 원인 | 알 수 없음 |
| 묘소 | 아베노 묘지 |
| 국적 | 일본 |
| 직업 | 알 수 없음 |
| 알려진 이유 | 알 수 없음 |
| 개인 정보 | |
| 시대 | 에도 시대 말기 - 메이지 시대 중기 |
| 어릴 적 이름 | 도쿠스케 |
| 통칭 | 사이스케 |
| 시호 | 쇼인 |
| 관위 | 증정오위 |
| 가문 | |
| 가문 | 알 수 없음 |
| 씨족 | 알 수 없음 |
| 부모 | 아버지: 고다이 히데타카 |
| 배우자 | 도요코 |
| 자녀 | 알 수 없음 |
| 소속 | |
| 막부 | 알 수 없음 |
| 주군 | 시마즈 나리아키라, 시마즈 히사미쓰 |
| 번 | 사쓰마 번 |
| 기타 정보 | |
| 교육 | 알 수 없음 |
| 특기 사항 | 알 수 없음 |
2. 유년 시절과 교육
고다이 도모아쓰는 나가사키의 ''해군전습소''에서 해군 과학 기술을 배우기 위해 사쓰마번에서 파견되었다. 1864년 사쓰에이 전쟁이 발발하자 ''텐유 마루''의 선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마쓰키 고안과 함께 영국 해군에 나포되어 포로가 되었다.[1] 석방 후 사쓰마의 일부 사람들이 그가 영국에 정보를 넘겼다고 의심하여 숨어 지내야 했다. 이때 공개적인 해외 무역을 기반으로 한 군사 확장을 위한 계획을 초안했으며, 여기에는 16명의 남성과 통역사를 런던으로 보내 공부시키는 것이 포함되었다.[2] 그는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 정책을 거부하고 영국 런던 대학교에 유학한 15명의 학생 중 한 명이었다.[1]
2. 1. 가계와 출생
삼국명승도회의 집필자이자 기록 봉행인 고다이 나오자에몬 히데타카의 차남으로 사쓰마국가고시마성 아래에서 태어났다. 검소하고 강건함을 숭상하는 사쓰마의 기풍 아래 자랐으며, 8세에 아동원의 학숙에 다니고, 12세에 성당에 진학하여 문무 양도를 배웠다.14세 때, 류큐 무역 담당을 겸임하고 있던 아버지가 기묘한 지도를 펼치며 도모아쓰를 불렀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전해져 왔다.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포르투갈인으로부터 입수한 세계 지도였으며, 도모아쓰는 아버지로부터 이 세계 지도의 복사를 명받아 2장 복사하여 그 중 1장을 자신의 방에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2016년 형인 도쿠오의 후손인 요시자키 게이조 집에서 이 "모사본 세계 지도"의 현물이 발견되었고, 그 덧붙여진 글에 의해 포르투갈인으로부터 입수한 지도도 아니고, 도모아쓰가 모사한 것도 아님이 밝혀졌다.
아버지 고다이 히데타카의 한문에 의하면, 히데타카 자신이 지구의 학문을 좋아하여 사쓰마번 이시즈카가에 소장되어 있는 막부 천문방의 다카하시 가게야스가 저술한 "만국 지도"를 빌렸고, 이것이 최량의 지도임을 알게 되어 아들 도모타케(도쿠오)에게 베끼게 했다. 네 귀퉁이의 소도(小圖)는 혼다 가문 출신의 아내 야스가 모사했으며, 당시 13세였던 도모타케의 모사 지도의 정교함에 보는 이들이 신동이라고 감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당시 사이스케는 5세).
형의 일이 도모아쓰의 일로 나중에 전해지게 된 것은 도모아쓰 사후 10년에 발간된 "증 정5위 훈4등 고다이 도모아쓰군 전"에 그렇게 쓰여 있었기 때문이며, 이후 수정되지 않았다. 이는 메이지 28년 12월 4일에 사망한 형 도쿠오가 같은 해 간행된 이 책을 볼 수 없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도쿠오에 의한 이 신정 만국 전도는 현재 가고시마현 역사·문화 센터 레이메이칸에 보관되어 있다.
도모아쓰가 모사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다이가에 "신정 만국 지도"가 소장되어 있었고, 아버지 히데타카는 "계략의 시작은 우선 이 지도를 보고 조사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소년기의 고다이 사이스케는 이 지도를 볼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 여러 외국에 대한 생각을 펼쳤을지도 모른다.
2. 2. 교육 과정
고다이 도모아쓰는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의 일부인 사쓰마번에서 태어났다. 검소하고 강건함을 숭상하는 사쓰마의 기풍 아래 성장했으며, 8세에 아동원의 학숙에, 12세에 성당에 진학하여 문무 양도를 배웠다.[2] 나가사키의 ''해군전습소''에서 해군 과학 기술을 배우기 위해 번에서 파견되었다.[1]소년 시절, 아버지 고다이 히데타카는 "계략의 시작은 우선 이 지도를 보고 조사하는 것에 있다"라고 생각했다. 고다이 도모아쓰는 "신정 만국 지도"를 볼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며 여러 외국에 대한 생각을 키웠을 것으로 보인다.[2]
14세 때 류큐 무역 담당을 겸임하던 아버지가 세계 지도를 보여주며 도모아쓰에게 복사를 명했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전해졌으나, 2016년 형 도쿠오의 후손 집에서 발견된 "모사본 세계 지도"와 그 덧붙여진 글을 통해 이 지도가 포르투갈인에게서 입수한 것도, 도모아쓰가 모사한 것도 아님이 밝혀졌다. 실제로는 아버지 히데타카가 사쓰마번 이시즈카가에 소장된 막부 천문방의 다카하시 가게야스가 저술한 "만국 지도"를 빌려 아들 도모타케(도쿠오)에게 베끼게 한 것이었다. 당시 13세였던 도모타케는 정교하게 지도를 모사했고, 이를 본 사람들은 신동이라며 감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신정 만국 전도는 현재 가고시마현 역사·문화 센터 레이메이칸에 보관되어 있다.[2]
이후 고다이 도모아쓰는 도쿠가와 막부의 공식적인 쇄국 정책을 거부하고 영국 런던 대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파견된 15명의 학생 중 한 명이었다.[1]
3. 막부 말기 활동
1865년, 고다이는 토마스 글로버와 접촉하여 영국 랭커셔주 올덤에 있는 방적 기계 회사 플랫과의 협상을 이끌었다. 이 방문은 1867년 사쓰마에 일본 최초의 현대식 공장인 가고시마 제분소 설립으로 이어졌다. 맨체스터 기술자들은 건설, 공장 생산, 현지 노동자 훈련을 감독하기 위해 가고시마에서 1년을 보냈고, '맨체스터 7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을 위해 특별히 '백색 저택'을 건설했으며, 오늘날 이곳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3] 고다이는 영국 방문 중 맨체스터 상공회의소를 방문했는데, 이는 훗날 오사카 상공회의소 설립에 영향을 주었다.[3]
이후 고다이는 유럽으로 돌아가 샤를 몽블랑과 협상하여 사쓰마의 천연 자원 개발을 위한 합작 상업 회사를 설립하고, 그 대가로 유럽 무기와 제조 상품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 프랑스-사쓰마 무역 회사는 사쓰마 번에 프랑스 투자를 유치하여 증기선 조선소와 방적 공장을 설립하고, 유망한 사쓰마 출신 학생들을 해외로 보냈다. 또한 이 회사의 존재로 사쓰마는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독립 국가처럼 참여할 수 있었는데, 이는 도쿠가와 막부 정부 대표들을 매우 당황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고다이는 자신의 인맥을 이용하여 최신 군함을 구매하여 도쿠가와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갈등에 대비해 사쓰마를 무장시켰다.
3. 1.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 수학
안세이 2년(1855년), 고다이 도모아쓰는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에 번 전습생으로 파견되어 네덜란드 장교에게서 항해술을 배웠다.[1] 그는 해군 과학 기술을 배우기 위해 파견되었으며, 이때 "남아가 뜻을 세우는 것은 바로 이때에 있다"라고 분발했다고 한다. 고다이는 형이 쇄국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개국론자의 입장을 취했다.3. 2. 센자이마루 승선과 상하이 도항
1862년, 고다이 도모아쓰는 막부 함선 센자이마루에 뱃사람으로 승선하여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때 다카스기 신사쿠를 만났으며, 번을 위해 기선 구입 계약을 맺었다.[12]3. 3. 사쓰에이 전쟁과 포로 경험
고다이는 현재의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일부인 사쓰마번에서 태어나 나가사키에 있는 ''해군전습소''에서 해군 과학 기술을 배우기 위해 번에서 파견되었다. 1864년 사쓰에이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텐유 마루''의 선장으로 임명되었다. 마쓰키 고안과 함께 그의 배가 영국 해군에 나포되면서 포로가 되었다.[1] 석방된 그는 사쓰마의 일부 사람들이 그가 영국에 정보를 넘겼다고 의심했기 때문에 숨어 지내야 했다. 숨어 지내는 동안 그는 공개적인 해외 무역을 기반으로 한 군사 확장을 위한 계획을 초안했다. 그의 계획에는 16명의 남성과 통역사를 런던으로 보내 공부시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2]안세이 원년(1854년), 페리가 우라가 해안에 내항하자, 고다이는 "남아가 뜻을 세우는 것은 바로 이때에 있다"라고 분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세이 2년(1855년), 번의 군방서역조(당시 농정을 맡은 관청의 서기관 보조)가 된다. 형이 쇄국론자임에도 불구하고, 개국론자의 입장을 취한다. 그 다음 해,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에 번 전습생으로 파견되어, 네덜란드 장교에게서 항해술을 배운다.
분큐 2년(1862년), 간청했으나 도항을 거부당한 도모아쓰는 뱃사람으로 막부 함선 센토세마루에 승선하여 상하이로 도항(이때 다카스기 신사쿠와 만난다)하여, 번을 위해 기선 구입 계약을 맺는다. 분큐 3년(1863년) 7월, 생맥 사건으로 발생한 사쓰에이 전쟁에서는, 3척의 번선과 함께 마쓰키 고안(데라시마 무네노리)과 함께 영국 해군의 포로가 되지만, 통역 시미즈 우자부로의 배려로 요코하마에서 작은 배로 영국 함선을 탈출, 에도로 들어간다.
고국에서는 영국의 포로가 된 것이 악평이 되었기 때문에 사쓰마로 귀국하지 못하고, 잠복 생활을 하다가 나가사키에서 만난 같은 사쓰마 번사인 노무라 모리히데의 중재로 귀국을 허락받았다.
3. 4. 고다이 사이스케 상신서와 사쓰마 번 파견 영국 사절단
고다이는 현재의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일부인 사쓰마번에서 태어나 나가사키에 있는 해군전습소에서 해군 과학 기술을 배우기 위해 번에서 파견되었다.[1] 1864년 사쓰에이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텐유 마루''의 선장으로 임명되었다. 마쓰키 고안과 함께 그의 배가 영국 해군에 나포되면서 포로가 되었다.[1] 석방된 그는 사쓰마의 일부 사람들이 그가 영국에 정보를 넘겼다고 의심했기 때문에 숨어 지내야 했다. 숨어 지내는 동안 그는 공개적인 해외 무역을 기반으로 한 군사 확장을 위한 계획을 초안했다. 그의 계획에는 16명의 남성과 통역사를 런던으로 보내 공부시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2] 그는 자연스럽게 도쿠가와 막부의 공식적인 쇄국 정책을 거부하고 영국의 런던 대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파견된 15명의 학생 중 한 명이었다.1863년 생맥 사건으로 발생한 사쓰에이 전쟁에서, 3척의 번선과 함께 데라시마 무네노리(마쓰키 고안)과 함께 영국 해군의 포로가 되었지만, 통역 시미즈 우자부로의 배려로 요코하마에서 작은 배로 영국 함선을 탈출, 에도로 들어갔다.
고국에서는 영국의 포로가 된 것이 악평이 되었기 때문에 사쓰마로 귀국하지 못하고, 잠복 생활을 하다가 나가사키에서 만난 같은 사쓰마 번사인 노무라 모리히데의 중재로 귀국을 허락받았다.
1857년, 사쓰마 번에 의해 총 16명의 전습생이 나가사키에 파견되는데, 그중에서도 고다이 도모아쓰는 가쓰 가이슈 등과 함께 엘리트 중 한 명으로 보내진다. 3년 후 사쓰마로 귀환한 후, 다시 나가사키에 유학하여, 함선이나 무기 구매 등 상무 업무도 수행한다.

4. 메이지 유신 이후의 활동
메이지 유신 이후 고다이 도모아쓰는 '산요'(참의, 参與)라는 직책을 맡아,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쇄국적인 사무라이들이 외국인에게 저지른 여러 사건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9] 1869년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사업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875년 오사카 회의에 참여하여 초기 메이지 정부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1881년 홋카이도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에 연루되어 구로다 기요타카 내각의 붕괴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4. 1. 메이지 신정부 참여
메이지 유신 이후, 고다이는 산요(참의, 参與)가 되었고,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쇄국적인 전직 사무라이들이 외국인에게 가한 여러 사건들을 무마했다.[9] 1869년 관직에서 물러나 사업에 전념했다. 오사카에 근거지를 두고 국제 무역, 상업 및 해운에 관련된 여러 주요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동시에 운영했다. 이후 오사카 상공 회의소와 오사카 증권 거래소를 설립했다.1875년 오사카 회의에 참여하여 초기 메이지 정부를 지배했던 봉건 영주들의 불안정한 연합을 유지하려 했다.
1881년 홋카이도 개척사 스캔들에 연루되어 내각총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의 행정부를 무너뜨렸다.[9]
메이지 원년(1868년), 메이지 신정부의 참여직 외국 사무 담당이 되었다. 외국관 권판사, 오사카부 권판사를 겸임하며 오사카에 부임하여, 사카이 사건, 영국 공사 파크스 습격 사건 등의 외교 처리에 임했다. 또한, 오사카에 조폐료(현 조폐국)를 유치하고, 초대 오사카 세관장이 되었다.[9]
메이지 2년 퇴관 후, 모키 쇼조의 협력으로 영화 사전을 간행하고, 경화의 신용을 높이기 위해 금은 분석소를 설립했다. 방적업, 광산업(나라현 덴와 동광 및 후쿠시마현 한타 은광 등), 제염업, 제람업(조양관) 등의 발전에 진력했다. 1875년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이 요정에 모여 의견을 교환한 오사카 회의와, 구로다 기요타카가 비판을 받은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 (메이지 14년의 정변 참조)에 관여하는등 사쓰초 번벌 정부와의 결합이 강했다.[9]
4. 2. 실업가로의 전환
메이지 유신 이후, 고다이는 '산요'(참의, 参與)가 되었고,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쇄국적인 '사무라이'들이 외국인에게 가한 여러 사건들을 무마했다.[9] 1869년 관직에서 물러난 고다이는 오사카를 거점으로 사업에 전념했다. 그는 국제 무역, 상업, 해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운영했다.[9] 이후, 오사카 상공 회의소와 오사카 증권 거래소를 설립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9]고다이는 1875년 오사카 회의에 참여하여 초기 메이지 정부를 구성했던 봉건 영주들 간의 불안정한 연합을 유지하는 데 힘썼다.[9] 1881년, 고다이는 홋카이도 개척사 스캔들에 연루되어 구로다 기요타카 내각총리대신의 행정부를 위기로 몰아넣었다.[9]
게이오 원년(1865년), 고다이는 번의 명을 받아 테라시마 무네노리, 모리 아리노리 등과 함께 사쓰마 번 파견 영국 사절단으로 영국에 건너갔다. 이들은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9]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는 당시 이들의 방문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고다이 도모아쓰"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10] 벨기에 브뤼셀에서 몽블랑과 무역 상사 설립 계약을 맺었으나, 여러 요인으로 실패했다. 하지만 이 경험은 훗날 고다이가 사업가로서 성공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9]
1866년 귀국한 고다이는[9] 어소납도 봉공 격으로 승진하여 사쓰마 번의 상업 활동을 총괄하는 회계 담당이 되었다. 나가사키에서 글러버와 협력하여 나가사키 코스게에 도크(통칭 주판 도크)를 개설하는 등 사업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고다이는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과 함께 막부 타도에 앞장섰다.[9]
메이지 원년(1868년), 고다이는 메이지 신정부의 참여직 외국 사무 담당이 되었다. 외국관 권판사, 오사카부 권판사를 겸임하며 오사카에 부임하여 사카이 사건, 영국 공사 파크스 습격 사건 등 외교 문제를 처리했다. 또한 오사카에 조폐국을 유치하고 초대 오사카 세관장이 되었다.[9]
1869년 퇴관 후, 모키 쇼조의 협력으로 영화 사전을 간행하고, 경화의 신용을 높이기 위해 금은 분석소를 설립했다. 방적업, 광산업(나라현 덴와 동광, 후쿠시마현 한타 은광 등), 제염업, 제람업(조양관) 등 다양한 산업 발전에 힘썼다. 1875년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이 모인 오사카 회의와 구로다 기요타카가 비판받은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메이지 14년의 정변 참조)에 관여하여 정객으로 불렸다.[9]
그 외에도 오사카 재계 인사 다나카 시헤에 (제42국립은행) 등과 함께 오사카 주식 거래소 (현 오사카 증권 거래소), 오사카 상법 회의소 (현 오사카 상공 회의소), 오사카 상업 강습소 (현 오사카 시립 대학), 오사카 제동, 간사이 무역사, 공동 운수 회사, 고베 잔교, 오사카 상선, 한카이 철도 (현 난카이 전기 철도) 등을 설립했다.[9]
가고시마시 이즈미초 (이즈미 공원 내), 오사카시 주오구의 오사카 증권 거래소 앞, 오사카 상공 회의소 앞에는 고다이 도모아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9]
고다이는 막말부터 광산업을 부국강병책의 하나로 여겨, 메이지 정부보다 먼저 오랫동안 방치된 광산에서 은, 구리 등을 채취하는 기술을 해외에서 도입했다. 나라현 요시노군 아마가와무라 서부 지구 와다무라·토치오무라의 텐와 광산과 후쿠시마현의 한다 은산 등 많은 광산을 재개발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이는 훗날 그의 자금원이 되었다.[9] 2015년 9월, 효고현 아사고시의 미코하타 광산의 광맥 탐사를 지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1] 당시 향토사학자 야마우치 준지(1881-1969)의 수기에 따르면, 고다이는 막말부터 메이지 초기까지 미코하타에 채광 흔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부하 가토 마사노리에게 탐광을 명했다. 미코하타의 주요 광맥을 보유한 가세이산의 이름은 가토 마사노리에서 유래한다. 1878년(메이지 11년), 메이지 정부가 아사고시 이쿠노 광산 주변을 조사하면서 광맥이 재발견되어 광산이 부흥했다.[11]
4. 3. 오사카 경제 발전에 기여
메이지 유신 이후, 고다이는 오사카를 거점으로 국제 무역, 상업, 해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운영하며 오사카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9] 그는 오사카 상공회의소와 오사카 증권거래소를 설립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9]고다이는 1875년 오사카 회의에 참여하여 초기 메이지 정부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해결하고자 노력했다.[9] 그러나 1881년 홋카이도 개척사 스캔들에 연루되면서 구로다 기요타카 내각의 붕괴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9]
- '''오사카 경제 발전에 기여'''
1866년 귀국한 고다이는 사쓰마 번의 상업 회계를 담당하며 토마스 블레이크 글러버와 협력하여 나가사키에 주판 도크를 개설하는 등 실업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9] 1868년 메이지 신정부에서 외교 업무를 담당하면서 오사카부 권판사를 겸임, 조폐국을 유치하고 초대 오사카 세관장이 되었다.[9]
1869년 퇴관 후, 고다이는 모키 쇼조의 협력으로 영일 사전을 간행하고, 금은 분석소를 설립하여 경화의 신용을 높였다.[9] 또한 방적업, 광산업 (나라현 덴와 동광, 후쿠시마현 한타 은광 등), 제염업, 제람업(조양관) 등 다양한 산업 발전에 힘썼다.[9]
고다이는 오사카 재계 인사들과 함께 오사카 증권거래소, 오사카 상공회의소, 오사카 상업 강습소, 오사카 제동, 간사이 무역 회사, 공동 운수 회사, 고베 잔교, 오사카 상선, 한카이 철도 등을 설립하며 오사카 경제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9]
가고시마시 이즈미 공원, 오사카시 주오구의 오사카 증권 거래소 앞, 오사카 상공회의소 앞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9]
- '''오사카 회의 관여'''
1875년 고다이는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이 참여한 오사카 회의에 관여하여 입헌 정치 수립과 정부 개혁을 논의했다.[9] 메이지 6년 정변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이노우에 가오루가 오쿠보, 기도, 이타가키의 연대를 제안했고, 고다이는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9]
고다이의 저택은 오사카 회의 준비 회담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오쿠보는 준비를 위해 약 한 달 동안 고다이 저택(현재의 일본은행)에 머물렀다.[9] 고다이는 오쿠보의 상담역이자 이타가키 다이스케와의 중개역으로서 회의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9]
- '''조양관 설립과 오사카 상공회의소'''

고다이는 1876년 국산 쪽빛(藍, 남)이 인도산 인디고에 밀리는 것을 우려하여 증기 기관을 이용한 최신 설비를 갖춘 조양관을 설립했다.[9] 조양관은 한때 해외 수출까지 했으나, 수입품에 밀려 1883년 폐쇄되었다.[9]
1878년 고다이가 초대 회장을 맡아 설립된 오사카 상공회의소는 초기 조양관 부지에 설립되었다.[9] 또한, 1892년 시립 오사카 상업학교가 이전한 곳도 과거 조양관 부지였다.[9]
- '''오사카 증권거래소 설립'''
오사카 증권거래소의 전신인 오사카 주식 거래소는 1878년 고다이의 노력으로 설립되었다. 당시 경제 상황에 맞지 않았던 주식 거래소 조례의 개정을 요구하고, 고노이케, 미쓰이, 스미토모 등과 함께 발기인이 되어 창립을 주도했다.
1878년 5월, 고다이는 창립 원서를 오쿠마 시게노부에게 제출하고, 같은 달 17일 허가를 받았다. 오사카 주식 거래소의 창립 주주는 130명에 달했고, 고다이는 150주(지분율 7.5%)로 필두 주주가 되었지만, 스스로는 임원에 참여하지 않고, 시부사와 에이이치 계열의 나카야마 노부아키를 두취로 추대했다.
- '''오사카 상업 강습소 설립'''

고다이는 1880년 사립 오사카 상업 강습소를 설립하여 장부 기입, 상법(상학) 등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다.[9] 고노이케 젠에몬, 히로세 사이헤이 등이 참여했으며, 고다이는 많은 기부금과 창립 비용을 냈다.[9]
오사카 상업 강습소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을 받은 가토 마사노스케가 1879년 고다이가 소유주로 있던 오사카 신보에 "오사카에 상업 학교를 설치하는 사설"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설립되었다.[9] 고다이는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 상업 학교가 필수라고 생각했다.[9]
사립 오사카 상업 강습소는 장부 기입, 경제학, 산술, 서예, 영어, 중국어를 중심으로 교육 과정을 운영했으며, 이후 오사카 부립 상업 강습소, 오사카 부립 상업 학교, 오사카 시립 상업 학교로 개칭되었다.[9] 이 학교는 오사카 고등 상업 학교, 오사카 상과 대학으로 발전하여 현재의 오사카 시립 대학교 및 (시립 덴노지 상업 고등학교 →) 시립 오사카 비즈니스 프론티어 고등학교의 기반이 되었다.[9]
4. 4. 홋카이도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
고다이는 1881년 홋카이도 개척사 스캔들에 연루되어 내각총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의 행정부를 무너뜨렸다.[9]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메이지 14년의 정변)에도 관여하여 정객이라고 불렸다.5. 만년과 사망
게이오 4년(1867년) 5월 1일, 고다이 도모아쓰 (초대 오사카 세관장, 후의 초대 오사카 상공회의소 회두)가 외국관 판사에 취임하여 운상소의 사무를 맡게 되었다.[4] 메이지 5년(1872년) 11월 28일(세관 기념일) 전국의 "운상소" 명칭은 "세관"으로 통일되었고, 가와구치 운상소는 오사카 세관이 되었다.[4]
6. 사후 평가 및 기념 사업
고다이 도모아쓰는 오사카 상업강습소(현재의 오사카 시립 대학의 기원)를 설립하여 일본 교육 제도 발전에 기여했다.[21]
하타케야마 요시나리는 사쓰마 번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영국과 미국에서 유학 후, 개성학교(도쿄 대학 전신), 외국어학교(도쿄 외국어 대학 전신) 교장, 서적관(국립국회도서관 전신), 박물관(국립과학박물관 및 고이시카와 식물원 전신) 관장을 역임하며 메이지 초기 교육 행정에 관여했다.
모리 아리노리 역시 사쓰마 번 유학생 출신으로, 메이지 정부 초대 문부대신을 맡았으며, 히토쓰바시 대학을 창설하고 메이로쿠샤 회장, 도쿄 학사회원 초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메이지 6대 교육가로 꼽힌다.
6. 1. 동상 및 기념비
오쿠보 도시미치는 1873년(메이지 6년) 고다이 도모아쓰에게 하마데라 공원으로 안내받았다. 사카이현령 사이쇼 아츠시가 공원 내 소나무를 벌채, 주택지로 개발하려 하자, 오쿠보는 이를 반대하는 노래를 지었고[21], 사이쇼는 계획을 철회했다. 하마데라 공원 입구 부근에는 이 노래를 새긴 "석송비"가 있다.1885년(메이지 18년) 10월 2일, 아베노 묘지에 종5위 훈4등 고다이 도모아쓰의 묘가 조성되었다. 묘는 오사카시립 남령원(아베노 묘지) 중앙에 있으며, 돌등롱으로 둘러싸여 있다.


1900년(메이지 33년) 9월, 지인과 상공 회의소 의원들이 오사카 상공회의소 앞뜰에 고다이 도모아쓰 동상을 건립했다.
1960년(쇼와 35년) 3월, 오사카시 시제 시행 70주년 기념으로 고다이 도모아쓰가 창립한 제람소・니시조요칸 자리에 오사카시가 동상을 건립했다.
1961년(쇼와 36년), 고다이 도모아쓰 추도 75주년 기념으로 고향 가고시마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1982년(쇼와 57년), 가고시마 중앙역 앞 동쪽 출구 광장에 조각가 나카무라 신야가 제작한 젊은 사쓰마의 군상[48] 중 한 명으로 고다이 도모아쓰 동상이 건립되었다.
2004년(헤이세이 16년) 12월 1일, 오사카 증권거래소 새 건물 완공과 함께 고다이 도모아쓰 동상이 건립되었다.
2016년(헤이세이 28년), 고다이 도모아쓰 탄생 180주년 기념으로 오사카 시립 대학 스기모토 캠퍼스에 동창회를 중심으로 동상이 건립되었다.
6. 2. 영화 및 드라마
다나카 미츠토시 감독의 2020년작 전기 영화 ''천외자''에서 미우라 하루마가 고다이 도모아쓰 역을 연기했다.[4][5]1989년 니혼 TV 드라마 ''기병대''에서는 가쓰노 히로시가 고다이를 연기했다. 2015년 NHK 연속 TV 소설 ''아침이 왔다''와 2021년 NHK 대하드라마 ''푸른 하늘을 찔러라''에서는 딘 후지오카가 고다이 역을 맡았다.
7. 가족 관계
- 아버지: 고다이 나오스자에몬 히데타카(?-1853). 시마즈 가문의 푸다이 가신으로,[23] 시마즈 번의 유관(유학 교사) 및 마치 부교를 역임했다.[22] 슬하에 장남 도쿠오, 장녀 히로코(기토인 가문으로 시집감), 차남 사스케(도모아쓰), 차녀 노부코를 두었다.[23]
- 어머니: 혼다 야스코(?-1868)[22] (키요코?)[23]
- 아내: 사카모토 히로코. 1867년(게이오 3년)에 결혼하여 딸 하루코(후에 마츠코)를 낳았으나 이혼했다.[23][22]
- 후처: [https://www.nara-np.co.jp/news/20160113091028.html 도요코] (본명 도요, 1851-1892). 1870년에 결혼. 나라현 다와라모토초 출신으로, 친정은 다와라모토초 야오무라 도키와마치에 있었다. 안요지에서 가가미사쿠 신사까지 이어지는 나카카이도 거리에 위치했으며, 도요는 그곳에서 서당을 열었던 유학자 가야노 쓰네쓰구(통칭 요시)의 셋째 딸로 1851년(가에이 4년)에 태어났다. 도요코의 친오빠 모리야마 시게루는 유신 정부의 고베 외교관으로, 도모아쓰와 깊은 교류를 가졌다.[22]
- 장녀: 고다이 다케코(1871-1915).[24] 1886년에 구리 류사쿠(1858-1938)와 결혼했다. 류사쿠는 기이국(현 와카야마현) 혼구의 무사 집안인 다카스 효다유의 차남이지만,[24] 오사카에서 환전상을 하던 숙부 기이노쿠니야 구리 쇼자부로의 양자가 되어 오사카부 평민이 되었다.[25] 1875년에 도쿄 외국어학교, 1881년에 제국대학 공학부를 졸업했다.[26] 오사카 제강 기술자가 필요했던 도모아쓰의 배려로[27] 제4회 문부성 유학생으로[28] 런던 대학교에서 3년간 기계공학을 배우고 1885년에 귀국, 도쿄 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나,[29] 고다이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고다이 류사쿠가 되어 도모아쓰의 사업을 계승했다.[30] 다케코・류사쿠 부부 사이에는 법학사 노부아쓰[31], 딸 아쓰코(치쏘 사장 시라이시 무네키에게 시집감)가 있었다.[32] 다케코 일가가 살았던 도모아쓰 저택은 1960년대 초 철거되어 오사카 과학기술센터 빌딩이 되었다. 도모아쓰 저택에는 도모아쓰의 영국행을 지원했던 고마쓰 다테와키의 첩 미키 코토와 그 딸 즈미도 고마쓰 사후에 함께 살고 있었다.
- 차녀: 고다이 아이코(1876-1965). 어머니는 미야치 가쓰코(교토 미야즈카의 딸, 구성은 오타니 가쓰). 도모아쓰가 설립한 정람소에서 이름을 따왔다. 의붓오빠 고다이 류사쿠가 경영하는 한다 은광산에 20대부터 의탁하여 양서를 통해 광산학을 배웠다. 메이지 시대에 도모아쓰가 채굴권을 가졌던 미에현 지다 촌(현 이나베시)의 지다 광산을 1919년에 사들여 고다이 아이의 이름으로 경영을 시작, 스스로 지하 덧신에 몽페 차림으로 산을 다니며 채굴에 힘썼으나 뜻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현지에서 사망했다.[33][34] 현재도 아이코가 파게 한 수작업 터널이 남아있다.[35]
- 삼녀: 도이 요시코(1881-?). 도이 미치오(사법관, 고노이케 가문 고문을 거쳐 게이한 전철 등 다수 기업 사장을 역임, 중의원 의원, 오사카 상공회의소 제7대 회장 역임)의 양녀가 되어, 1896년에 우와지마 번주 다테 무네노리의 다섯째 아들 고키치로(1870-1949)를 데릴사위로 맞아 도이 가문을 이었다.[36] 유고 시집으로 『마쓰노 하나』가 있다.[37] 고키치로는 반토 토지 사장, 오사카 덴노지 토지 상담역[38], 한신 해안 전기 철도 발기인[39] 등을 역임했다. 아들 도이 야스타로(1898-?)는 자작 오기유 지카타카의 딸 사치코와 결혼하여 내각부 문서계원이 되었고,[40] 유식고실(有識故実)을 조사하는 궁내관으로 유럽에도 체류했으며[41], 다카마쓰노미야 부 사무관을 역임했다.[42]
- 사녀: 스기무라 히사코(1882-1945). 센바의 상가인 스기무라 상점의 스기무라 쇼타로에게 시집갔다.[43] 스기무라는 고노이케나 스미토모와 같은 호상과 어깨를 나란히 한 소봉가로, 환전상인 "석정(石井)"의 아들이었다. 가업의 재력을 바탕으로 스기무라 창고를 창업하여 오사카 상선, 한신 전철, 하리마 수력 전기, 조선 전기 등에서 중역을 역임했다. 또한 제42은행이나 기타하마 은행 정리에도 수완을 발휘했으며, 개성적인 성격으로 오사카 재계의 괴인으로도 불렸다.[44][45] 그의 아들인 노무라 쇼지로(노무라 유지 남작 가문으로 양자), 스기무라 쇼사부로 형제는 극동 선수권 경기 대회의 축구 일본 대표로 선출되었고, 후에 쇼지로는 죠치 대학 교수, 쇼사부로는 한큐 전철 상무를 역임했다.[46]
- 장남: 히데오(1883-1907)
- 차남: 노무라 유타로(1885-1926) - 노무라 유지의 양자가 되어 후에 남작이 됨.
- 증손: 고다이 토미후미[47] (우주 공학자, NASDA 부이사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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