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사와 에이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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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1840년에 태어나 1931년에 사망한 일본의 실업가이다. 그는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상업적 재능을 키웠고, 막부 말기에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섬기며 파리 만국박람회에 수행원으로 참여했다. 메이지 유신 후에는 재무성 관료로 활동하며 근대 경제 시스템 도입에 기여했고, 이후 500개 이상의 기업 설립에 관여하며 일본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도덕경제합일설'을 주창하며 사회 공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2024년 발행 예정인 일본 1만 엔 지폐에 그의 초상이 실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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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사와 에이이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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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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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시부사와 에이이치 |
원어 이름 | 渋沢 栄一 |
로마자 표기 | Shibusawa Eiichi |
출생일 | 1840년 3월 16일 |
출생지 | 무사시국 한자와군 치아라이지마 (현재 사이타마현 후카야시) |
사망일 | 1931년 11월 11일 |
사망지 | 도쿄 기타토시마군 다키노가와구 모토니시가하라 (현재 도쿄 기타구 니시가하라) |
작위 | 자작 |
사후 작위 | 정2위 |
개명 | 시사부로 에이지로, 에이지로 또는 에이지로 미오 에이이치로 진에이 아쓰다유 아쓰타로 |
기타 이름 | 에이이치 (히데카즈) |
계급 | 정7위 종6위 정6위 종5위 정5위 종4위 남작 정4위 종3위 정3위 자작 종2위 정2위 |
묘소 | 야나카 령원 |
계명 | 태덕원전인치의양청연대거사 |
직업 | |
직업 | 쇼군의 가신 관료 사업가 자선가 정치인 |
소속 | 에도 막부 막신 하타모토 어계정격 육군부조역 외국봉행 지배조역 개성소 봉행 지배조역 메이지 정부 민부성 조세정 개정계 계장 대장성 대장권대승 대장대승 3등 출사 지폐료 두 |
가족 | |
배우자 | 오다카 치요 (1858년 결혼, 1882년 사망) 카네코 (1883년 결혼) |
자녀 | 시부사와 도쿠지 시부사와 마사오 시부사와 다케노스케 시부사와 히데오 호즈미 우타코 사카타니 고토코 아카시 아이코 |
아버지 | 시부사와 시로에몬 |
어머니 | 시부사와 에이 |
형제자매 | 나카, 사다코 |
정치 경력 | |
주군 | 도쿠가와 요시노부 이에사토 메이지 천황 다이쇼 천황 쇼와 천황 |
번 | 무사시오카베 번 시즈오카 번 사족 |
수상 | |
훈장 | 서보대수장 4등 욱일동화대수장 |
기타 정보 | |
참고 | 정확한 자녀 수는 알려지지 않음. |
2. 생애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1840년 2월 13일, 무사시국 한자와군(榛沢郡) 지아라이지마무라(血洗島村) (현 사이타마현 후카야시)에서 부농인 아버지 시부사와 이치로우에몬 모토스케(渋沢市郎右衛門元助)와 어머니 에이(エ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12] 아명은 에이지로(栄二郎)와 이치사부로(市三郎)이며, 이후 에이이치로(栄一郎), 도쿠다유(篤太夫), 도쿠타로(篤太郎) 등의 이름을 사용했다.[112] 시부사와 세이이치로는 그의 사촌 형이다.
시부사와 가문은 쪽을 이용한 아이다마(藍玉) 물감 제조 및 판매와 양잠을 주력으로 하고, 쌀, 보리, 야채를 생산하는 부농이었다.[26] 원료 매입과 판매를 일상적으로 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농가와 달리 상업적인 재능이 필요했다. 에이이치도 아버지와 함께 신슈(信州)와 죠슈(上州)까지 쪽을 팔러 다녔으며, 14세 때에는 혼자서 쪽잎을 매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유럽의 경제 시스템을 흡수하고, 현실적인 합리주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26]
그는 5살부터 아버지와 함께 독서를 시작해 7살 때엔 사촌 형인 오다카 준츄(尾高惇忠)에게서 사서오경과 『일본외사』를 배웠다. 검술은 오카와 헤이베에(大川平兵衛)로부터 신도무념류를 배웠다.
1858년, 19살 때 오다카 준츄의 여동생인 오다카 지요(尾高千代)와 결혼하여 이름을 에이이치로(栄一郎)로 바꾸었다. 1861년에는 에도로 나와 가이호 교손(海保漁村)의 문하생이 되고, 지바 에이지로(千葉栄次郎) 도장에 입문하여 북진일도류 검술 수행을 하며 근황지사들과 관계를 맺었다. 1863년에는 존왕양이 사상에 영향을 받아 다카사키성을 탈취하고 요코하마를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오다카 조시치로(尾高長七郎)의 설득으로 중지했다.
가족의 피해를 막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의절당하는 형식을 취하고 교토로 나왔으나, 8월 18일의 정변 직후 근황파가 약해진 상황에서 히토쓰바시 가문 가신 히라오카 엔시로(平岡円四郎)의 천거로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섬기게 되었다. 요시노부를 섬기면서 히토쓰바시 가문의 영내를 돌아다니며 농병 모집에 종사했다.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자 에이이치도 막신이 되었고,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쇼군 대리인으로 출석하는 도쿠가와 아키타케의 수행원으로 프랑스로 건너갔다.[113] 파리 만국박람회를 시찰하고 유럽 각국을 방문하며 선진적인 산업, 군비, 사회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113][114]
대정봉환 이후 1868년 신정부의 귀국 명령을 받고 요코하마항으로 귀국하였다.
2. 1. 초년 시절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1840년 2월 13일, 무사시국 한자와군(榛沢郡) 지아라이지마무라(血洗島村) (현 사이타마현 후카야시)에서 부농인 아버지 시부사와 이치로우에몬 모토스케(渋沢市郎右衛門元助)와 어머니 에이(エ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12] 아명은 에이지로(栄二郎)와 이치사부로(市三郎)이며, 이후 에이이치로(栄一郎), 도쿠다유(篤太夫), 도쿠타로(篤太郎) 등의 이름을 사용했다.[112] 시부사와 세이이치로는 그의 사촌 형이다.
시부사와 가문은 쪽을 이용한 아이다마(藍玉) 물감 제조 및 판매와 양잠을 주력으로 하고, 쌀, 보리, 야채를 생산하는 부농이었다.[26] 원료 매입과 판매를 일상적으로 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농가와 달리 상업적인 재능이 필요했다. 에이이치도 아버지와 함께 신슈(信州)와 죠슈(上州)까지 쪽을 팔러 다녔으며, 14세 때에는 혼자서 쪽잎을 매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유럽의 경제 시스템을 흡수하고, 현실적인 합리주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26]
그는 5살부터 아버지와 함께 독서를 시작해 7살 때엔 사촌 형인 오다카 준츄(尾高惇忠)에게서 사서오경과 『일본외사』를 배웠다. 검술은 오카와 헤이베에(大川平兵衛)로부터 신도무념류를 배웠다.
1858년, 19살 때 오다카 준츄의 여동생인 오다카 지요(尾高千代)와 결혼하여 이름을 에이이치로(栄一郎)로 바꾸었다. 1861년에는 에도로 나와 가이호 교손(海保漁村)의 문하생이 되고, 지바 에이지로(千葉栄次郎) 도장에 입문하여 북진일도류 검술 수행을 하며 근황지사들과 관계를 맺었다. 1863년에는 존왕양이 사상에 영향을 받아 다카사키성을 탈취하고 요코하마를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오다카 조시치로(尾高長七郎)의 설득으로 중지했다.
가족의 피해를 막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의절당하는 형식을 취하고 교토로 나왔으나, 8월 18일의 정변 직후 근황파가 약해진 상황에서 히토쓰바시 가문 가신 히라오카 엔시로(平岡円四郎)의 천거로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섬기게 되었다. 요시노부를 섬기면서 히토쓰바시 가문의 영내를 돌아다니며 농병 모집에 종사했다.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자 에이이치도 막신이 되었고,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쇼군 대리인으로 출석하는 도쿠가와 아키타케의 수행원으로 프랑스로 건너갔다.[113] 파리 만국박람회를 시찰하고 유럽 각국을 방문하며 선진적인 산업, 군비, 사회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113][114]
대정봉환 이후 1868년 신정부의 귀국 명령을 받고 요코하마항으로 귀국하였다.
2. 2. 히토쓰바시 가문 가신 시절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1840년 3월 16일, 사이타마현후카야시 치라이지마(地頭方)의 농가에서 태어났다.[112] 어릴 적 아버지에게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고, 가업인 밭농사, 쪽(인디고) 생산 및 판매, 양잠 등을 도우며 성장했다. 후에 사촌 오다카 준추(小田垣準珠)에게서 유교 경전과 일본의 역사를 공부했다.손노조이(숭왕양이) 사상에 영향을 받은 그는 1863년 사촌들과 다카사키성을 점령하고 요코하마 외국인 거류지에 불을 지르는 계획을 세웠으나, 사촌 오다카 조시치로(尾高長七郎)의 설득으로 중지하고 교토로 갔다.[112]
1863년, 가족의 피해를 막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의절당하는 형식을 취하고 교토로 나왔으나, 8월 18일의 정변 직후 근황파가 약해진 교토에서 지사 활동에 한계를 느꼈다. 에도 유학 시절 교제했던 히토쓰바시 가문(一橋家) 가신 히라오카 엔시로(平岡円四郎)의 천거로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섬기게 되었다.[112] 주군을 모시는 동안 히토쓰바시 가문(一橋家) 영내(領内)를 돌아다니며 농병(農兵) 모집에 종사하며 능력을 인정 받았다.
1866년 12월, 주군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자 에이이치도 막신이 되었다. 파리 만국박람회에 쇼군 대리인으로 출석하는 도쿠가와 아키타케의 수행원으로 프랑스로 건너갔다.[113] '파리 만국박람회'를 시찰한 뒤, 유럽 각국을 방문하며 선진적인 산업, 군비, 사회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113][27] 또한, 이때 알렉산더 폰 훔볼트로부터 어학과 여러 외국 사정을 배웠다.

대정봉환으로 1868년 5월 신정부로부터 귀국 명령을 받고, 같은 해 12월 16일 요코하마항으로 귀국하였다.[114]
2. 3. 메이지 정부 관료 시절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1840년 3월 16일, 현재 사이타마현후카야시 치라이지마의 농가에서 태어났다.[8][9] 어릴 적 아버지에게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으며, 유교 경전과 일본의 역사를 공부했다. 손노조이 사상의 영향으로 다카사키성 점령 및 요코하마 외국인 거류지 방화 계획을 세웠으나 취소하고 교토로 갔다. 스물세 살에 고향을 떠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의 휘하에 들어가 재정 강화에 기여했다.스물일곱 살 때 도쿠가와 아키타케의 파리 만국박람회 사절단 일원으로 유럽을 방문하여 근대 사회와 문화를 접하고 산업 및 경제 발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메이지 유신 소식을 듣고 귀국한 후, 시즈오카현에서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 중 하나인 ‘쇼호가이쇼(商法会所)’를 설립했다.[28]
1869년 메이지 신정부의 초청으로 재무성에 들어가, 개혁을 담당하는 ‘카이세이카카리(改制掛)’의 책임자로서 도량형 제정과 국립은행조례 제정에 참여했다.[8][9] 1871년 민부성이 대장성으로 통합됨에 따라 대장권대승, 대장대승이 되었고, 1872년에는 지폐료의 두(頭)에 취임했다.[8][9] 독일에서 인쇄된 메이지쓰호(게르만 지폐)를 취급했으나, 위조지폐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도쿄 대화재 이후 재건을 위해 벽돌조 거리 계획을 세웠으나, 예산 편성을 둘러싸고 오쿠보 도시미치 등과 대립하여 1873년 퇴관했다.
보신전쟁에서 막부 측으로 참전했던 사촌 시부사와 키사쿠의 출옥 및 대장성 출사를 주선하고 유럽 시찰을 보냈으며, 사촌 오다카 준츄에게는 후지오카 제사장 초대 장장으로 사업 시작을 맡겼다.
2. 4. 재계 활동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귀국 후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명에 따라 시즈오카번에서 일했으나, 이후 요시노부가 "이제부터는 너의 길을 가거라"라고 하자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배운 주식회사 제도를 일본에 도입, 1869년 1월 시즈오카 상법회소(商法会所)를 설립하여 신정부에서 빌린 돈을 갚았다.[8][9] 오쿠마 시게노부의 설득으로 1869년 10월 대장성에 들어가 관료로서 개혁안 기획 입안, 도량형 제정, 국립은행조례제도(国立銀行条例制定)에 관여했다.[115] 1872년에는 지폐료의 장에 취임하여 독일에서 인쇄된 '메이지통보'(통칭 게르만 지폐) 업무를 담당했으나, 위조 지폐 사건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1873년 예산 편성을 둘러싸고 오쿠보 도시미치, 오쿠마 시게노부와 대립하여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퇴직했다.[115]1873년 대장성 재직 시절부터 계획했던 제지회사(현: 오지홀딩스, 일본제지)의 설립 허가를 얻어 경영을 시작했다.[17] 같은 해, 도쿄부의 瓦斯掛(가스걸이)(현: 도쿄가스) 위원이 되어 가스 사업을 계획했다. 1875년에는 쌀, 생사 무역의 澁澤喜作商店(시부사와 키사쿠 상점)의 개업을 지원했다.
1875년 상법강습소(商法講習所)를 설립하고, 얼마 뒤 관료 시절 설립을 주도했던 제일국립은행(현 미즈호 은행)의 장이 되었다. 이후 실업계에 몸담으며 제일국립은행뿐만 아니라 77국립은행(七十七国立銀行) 등 많은 지방은행 설립을 지도했다.[115]
1876년(메이지 9년), 히라노 토미지의 이시카와지마 히라노 조선소(현: IHI, 이스즈자동차, 타치히 홀딩스)에 대해 개인 출자와 제일국립은행의 융자로 창업을 지원했다. 같은 해, 수영사(현: 대일본인쇄)의 인쇄업 창업과, 『중외물가신보』(현재의 『일본경제신문』)의 창간을 지원했다.
1878년(메이지 11년)에는 시부사와 키사쿠(渋沢喜作),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郎), 미노무라 리스케(三野村利助), 마스다 고(益田孝) 등 재계 인사들을 불러 모아 도쿄상법회의소(東京商法会議所)(후에 도쿄상공회의소(東京商工会議所), 일본상공회의소(日本商工会議所)로 발전)를 설립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폭넓게 자본을 모아 사업을 일으키는 합본주의(合本主義)적 사고방식을 실천하기 위해 1878년(메이지 11년)에 도쿄증권거래소(東京株式取引所)를 설립했다.
은행 외에도 도쿄가스(東京瓦斯), 도쿄해상화재보험(東京海上火災保険) (현 도쿄해상일동화재보험[東京海上日動火災保険]), 오지제지(王子製紙), 전원도시(田園都市) (현 도쿄 급행 전철), 지치부시멘트(秩父セメント) (현 태평양시멘트[太平洋セメント]), 제국호텔, 지치부철도, 게이한 전기 철도, 도쿄증권거래소, 기린 맥주, 삿포로 맥주, 동양방적(東洋紡績) (현 토요보[東洋紡]), 대일본제당(大日本製糖), 메이지제당(明治製糖), 시부사와창고(澁澤倉庫) 등 500개 이상의 다양한 기업 설립에 관여했다.[115] 1887년 무렵에는 시부사와를 추앙하는 경영자와 관리직이 모이는 류몬샤(龍門社)가 조직되었고, 쇼와시대 초기에는 회원 수가 수천 명에 달했다.[115]
1897년(메이지 30년), 澁澤倉庫部(시부사와 소코부)(현: 시부사와소코)를 자택 창고를 사용한 가업으로 창업했다. 1906년(메이지 39년), 게이한전기철도(현: 게이한홀딩스) 창립 위원장, 제국극장회사(현: 도호, 도쿄카이칸) 창립 위원장을 역임했다.
미쓰이 다카요시, 이와사키 야타로 등과 같은 메이지시대 재벌 창시자들과 달리 시부사와는 '사익을 좇지 않고 공익을 꾀한다'라는 생각을 실천하며 「시부사와 재벌(渋沢財閥)」을 만들지 않았다. 재계 은퇴 이후 시부사와동족주식회사(渋沢同族株式会社)를 창설했지만, 이는 재산 분쟁 방지를 위한 지주회사 격이었고, 다른 재벌 설립자들과 달리 시부사와만이 자작 작위를 수여받은 것은 공공에 대한 봉사를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115]
2. 5. 정계 활동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실업계 인물 중에서도 사회활동에 가장 열심이었다. 도쿄시 양육원 원장을 지냈고, 일본 적십자사 등 여러 단체의 설립에 관여했다.[116] 간토 대지진 때는 대진재선후회 부회장으로 기부금 모금 활동을 했다. 러일전쟁 1년 전인 1903년에는 오쿠마 시게노부 등과 함께 일인협회(日印協会)를 설립하고 제3대 회장을 역임했다.[116]
모리 아리노리와 함께 상법강습소(현 히토쓰바시대학)를, 오쿠라 기하치로와 오쿠라상업학교(현 도쿄경제대학) 설립에 협력하는 등 교육에도 힘썼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부탁으로 도시샤 대학 기부금 총괄 업무를 맡았고, 일본여자대학 설립에도 관여했다.

일본국제아동친선회를 설립, 미국의 인형과 일본 인형을 교환하는 등 국제 교류에 힘썼다. 1931년에는 중화민국 수해동정회 회장으로 의연금을 모으는 등 민간 외교 선구자로 활동했다. 1926년과 1927년에는 노벨평화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1889년부터 1904년까지 후카가와구회 의원을 역임했고, 구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후카가와 발전에 노력했다. 제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지 않았지만 도쿄 5구에서 94표를 얻어 2위를 기록했다.[118] 1890년 귀족원 의원으로 칙선되어 제1회 제국의회에 출석했으나, 다음 해 사임했다.[119] 1901년 이노우에 가오루 내각의 대장대신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사퇴했다.[119]
1916년 《논어와 주판》을 저술, '도덕경제합일설'을 주장했다. 윤리와 이익의 양립을 강조하며, 부는 사회 전체에 환원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간토 대지진 이후 유행한 천견론(天譴論)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시부사와였다.[122]

일본은행권 지폐 초상 후보로 여러 번 선정되었고, 1963년 발행된 천엔 지폐 최종 후보까지 올랐으나 채택되지 못했다. 2024년 발행 예정인 일만엔 지폐에 시부사와의 초상이 실릴 예정이다.[123][124] 1902년부터 1904년까지 대한제국에서 발행된 제일은행권 1엔, 5엔, 10엔권에 시부사와의 초상이 사용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를 조선은행 은행권으로 교체했다.[125]
2. 6. 사회 공헌 활동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제일은행 총재직에서 물러난 후, 사회 공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29] 그는 평생 동안 좋은 윤리와 사업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교육, 사회복지 등 약 600개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8][9]1874년부터 생활고에 처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양육원 운영에 참여하여 사무장, 원장을 역임하며 헌신적으로 운영에 힘썼다.[29] 1877년에는 일본적십자사의 전신인 박애사(博愛社) 설립에 참여하여 상임이사가 되었고, 1884년에는 생활고에 처한 사람들에게 무료 진료를 제공하는 동애사(同愛社)의 간사가 되어 사업에 협력했다.
1907년에는 도쿄 자혜병원의 고문 및 위원장이 되어 재단 설립에 기여했고, 1908년에는 암 연구회 설립에 기여하여 부총재가 되었다. 같은 해, 사회복지협의회의 전신인 중앙자선협회(中央慈善協会)가 창립되어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1911년에는 재생회의 기부금 모금 책임자, 고문, 평의원이 되어 황실 재단 설립에 힘썼고, 1913년에는 기타사토 시바사부로의 결핵예방협회 평의원으로 협력했다. 1914년에는 성루가국제병원 평의회 부회장, 회계 감독에 취임했으며, 1920년에는 지적장애아동의 보호 교육 사업을 하는 타키노가와 학원의 이사장에 취임했다. 다이쇼 말기부터 쇼와 초기까지 성루가국제병원 평의회 회장을 역임하며 병원 발전을 위해 지원했다.[35][36]
1909년에는 가노 지고로가 운영하는 유도의 총본산인 고도칸의 재단법인화에 추대되어 감사를 종신 역임했다. 1917년에는 자연과학 연구기관인 이화학연구소 설립에 관해 설립자 총대표가 되었다.
1919년에는 노동쟁의가 활발해질 것을 예상하여 노사 협조를 위한 협조회를 설립하고 부회장이 되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유애회의 스즈키 붕지에게 미국 방문을 요청하여 미국 노동조합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또한 협조회 설립을 통해 일본 정부와 노동 운동의 과격화를 막고자 노력했다. 스즈키 분지는 협조회를 "노동조합 배제의 협조주의"라고 비판했지만, 에이이치는 협조회 개혁을 통해 노동조합에 이해가 있는 인물을 초빙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협조회는 노다 간장 노동쟁의와 같은 노사 분쟁 해결에도 관여했다.[37]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에는 정부와 도쿄시에 임시 대응책을 제안하고, 직접 구호물자 배급 및 구호 사업 자금 조달을 위한 기부금 모금 활동을 펼쳤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문화, 생활 수준 향상에도 힘썼다. 1890년 도쿄 아사쿠사(浅草)에서 「일본 파노라마관(日本パノラマ館)」 개업을 주도했고,[30] 1922년에는 도쿄회관(東京会館) 개업을 지원했다. 또한 중류층이 자연을 접하며 생활할 수 있도록 다엔조부(田園調布) 개발을 추진했다.[18]
2. 7. 교육 활동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교육 분야에 많은 기여를 했다. 특히 실학 교육과 여성 교육에 대한 지원이 두드러진다. 1875년(메이지 8년)에는 모리 아리토모가 설립한 상업 강습 사숙을 도쿄 상업회의소가 관할하는 상법강습소(현 히토쓰바시대학)로 변경하고, 경영 위원으로서 운영을 지원했다.[8][9] 1881년(메이지 14년)부터 1883년(메이지 16년)까지 도쿄 대학에서 일본 재정론을 강의하기도 했다.1888년(메이지 21년)에는 고테가쿠교(현 고가쿠인 대학) 설립에 찬조원으로 참여했고, 1900년(메이지 33년)에는 오쿠라 기하치로의 오쿠라 고등상업학교(현 도쿄 경제대학) 설립에도 창립 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실업 교육 발전에 힘썼다.[8][9]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던 시대임에도 여성 고등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1887년(메이지 20년) 이토 히로부미, 가쓰 가이슈 등과 함께 여자교육장려회를 설립하고, 이를 모체로 도쿄여학관을 설립했다. 1901년(메이지 34년) 일본여자대학 설립을 지원했으며, 실업계 은퇴 후에는 도쿄여학관 관장, 일본여자대학 학장직을 역임했다.
그 외에도 니지마 조의 도시샤 대학 설립 기금 모금 및 관리에 힘썼고, 1908년(메이지 31년) 와세다 대학의 이공계 사업 확장 계획에 기금 관리 위원장으로 협력했다. 1900년(메이지 33년) 타쿠쇼쿠 대학 설립 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고, 1901년(메이지 34년)에는 조선에 개교한 일본어학교 관성학당 설립을 위해 대일본해외교육회의 유력 후원자로 활동했다.
1909년(메이지 42년) 신유사건 중재를 통해 도쿄상과대학을 도쿄 대학 통합으로부터 지켜내고, 후원 조직인 여수회 명예회원이 되었다. 1914년(다이쇼 3년) 다카치호대학 설립에 평의원으로 협력했다.
1919년(다이쇼 8년) 미시마 추슈 사후 니쇼가쿠샤대학 학장 겸 이사에 취임했고, 1921년(다이쇼 10년) 국시관대학 유지 위원에 취임했다.
1909년(메이지 42년) 5월 30일, 가노 지고로가 운영하는 유도 총본산 고도칸의 재단법인화에 따라 감사로 추대되어 사망 시까지 종신 고도칸 감사를 역임했다. 1917년(다이쇼 6년) 자연과학 연구기관 이화학연구소 설립에 설립자 총대표가 되었다.
2. 8. 국제 교류 및 민간 외교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민간 외교를 통해 국제 교류 증진에 힘썼다. 1902년 독일, 프랑스, 영국을 방문하였고,[8][9] 같은 해 미국과 유럽을 실지 시찰하며 각국 상공회의소 회원들과 교류하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회담했다.[31] 1908년에는 미쓰이 상사 회원 등과 함께 일본을 방문한 최초의 공식 미국 사업 사절단을 맞이했는데, 이들은 프랭크 밴더립이 이끌고 태평양 연안 상공회의소 연합회 회원 60명이 동행한 사절단이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양국 간 외교 관계 증진과 사업 및 상거래 확대를 위해 이들을 일본에 초청했다.[10]1909년(메이지 42년)에는 미국 실업가 연합을 조직하여 단장으로서 전국의 상업회의소 회장들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과 회견하는 등 3개월간 미국 각지를 방문하여 무역 마찰 해소와 상호 이해 증진에 힘썼다. 1912년(메이지 45년) 뉴욕 일본협회 협찬회를 설립하여 명예 위원장을 맡았고, 같은 해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발생한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법에 따른 반일(일본 이민 배척) 운동에 대응하여 미국 언론 기관에 일본 뉴스를 전달하는 통신사 설립을 제안했다. 로이터의 장벽은 높았지만, 그가 설립한 국제통신사는 현재의 시사통신사와 교도통신사의 기원이 되었다.
1915년(다이쇼 4년) 파나마 태평양 박람회를 계기로 미국을 방문하여 각지를 방문하고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회견했다. 1916년(다이쇼 5년) 일미 관계 위원회를 발족시켜 상무 위원에 취임했고, 1917년(다이쇼 6년) 일미 협회를 설립하여 명예 부회장에 취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20년(다이쇼 9년) 국제연맹 협회를 설립하여 회장에 취임했으며, 1921년(다이쇼 10년) 워싱턴 군축 회의 참석차 미국을 방문하여 워렌 G. 하딩 대통령과 회견했다.
1924년(다이쇼 13년) 폴 클로델 주일 프랑스 대사와 협력하여 일불 교류 거점인 일불회관을 발족시켜 이사장이 되었다. 1926년(다이쇼 15년) 일본 태평양 문제 조사회를 설립하여 평의원회 회장이 되었다.
1927년(쇼와 2년) 일본 국제 아동 친선회를 설립하고 미국의 인형(푸른 눈의 인형)과 일본 인형(이치마츠 인형)을 교환하여 친선 교류를 심화하는 데 힘썼다. 1931년(쇼와 6년) 중국에서 발생한 수해에 대응하여 중화민국 수재 동정회 회장을 맡아 의연금 모금에 힘썼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1879년(明治 12년) 전 미국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 부부의 일본 방문 시 도쿄 상업회의소, 도쿄부회와 협력하여 접대위원회를 조직, 복지 원일랑과 함께 접대위원 총대를 역임하며 환영 행사를 준비했고, 아스카야마 자택(영빈 접대용 별장)에서 환영회를 개최했다. 1881년(明治 14년) 하와이 왕국 칼라카우아 국왕 초청회를 아스카야마 저택에서 개최했다. 1898년(明治 31년) 대한제국(한국)을 실지 시찰하고, 한국 황제 고종을 알현, 한국의 인프라 정비를 지원하여 근대화를 추진하고 양국 간 무역을 통한 우호 관계를 맺고자 경부선 철도, 경인선 철도 부설에 힘썼다.[31] 1913년(다이쇼 2년) 일본을 방문한 중화민국 중국국민당 당수 쑨원을 민간 대표로 맞이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젊은 시절 아편전쟁을 통해 영국이 중국을 침략하고 홍콩을 할양받은 사실을 기록한 「청영근세담」을 읽고, 다음은 일본을 공격할 것이라 생각하여 외국을 싫어하고 배우지 않는 攘夷派(양이파)였다. 그러나 28세 때 주군인 徳川慶喜(도쿠가와 케이키)의 명으로 프랑스로 가게 되었고, 그 배에서 동료로부터 타운젠드 해리스(미국 초대 총영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해리스가 무사도 정신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미국이 훌륭한 나라임을 깨달아 친미파가 되었다. 그는 말년에 성루가국제병원 원장 루돌프 토이스러 박사와 같은 병원 미국 이사회 멤버 존 우드 박사가 자신의 아스카야마 저택인 아이이손을 방문했을 때, 이와 같은 사실과 함께 친미파가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48]
해리스에 대해 알게 된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이후 친미파가 되어 성루가국제병원 이사장이 되는 등 미국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미국과 일본의 우호를 위해 헌신하게 되었다.[48]
1926년(다이쇼 15년)과 1927년(쇼와 2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11]
2. 9. 만년과 사망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는 1909년(메이지 42년) 6월 6일, 만 69세(일본식 세는 나이로 70세)에 실업계 은퇴를 선언했다.[33] 제일은행과 도쿄저축은행(제일은행 계열 저축은행)을 제외한 61개 회사의 임원직을 사임했다.[33] 은행 경영은 후계자인 사사키 유스케(佐々木勇之助)에게 맡기고, 민간 외교, 교육, 복지, 의료 등에 힘을 쏟았다. 1916년(다이쇼 5년), 만 76세(일본식 세는 나이로 77세)가 되어 제일은행 은행장직도 사임했다.[34] 이후로는 사회 사업, 도덕 보급 운동, 민간 외교 등에 전념했다.[34]1908년, 시부사와 남작과 미쓰이 상사 회원들과 다른 일본 기업 지도자들은 일본을 방문한 최초의 공식 미국 사업 사절단을 맞이했다. 이 미국 사절단은 프랭크 밴더립이 이끌었고 태평양 연안 상공회의소 연합회의 60명의 회원들이 동행했는데, 이 단체는 미국 상공회의소 이전에 설립된 사업 단체였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양국의 외교적 관계를 증진하고 사업 및 상거래를 확대하기 위해 이 미국 대표들을 일본에 초청했다.[10]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교육, 사회복지 등과 관련된 약 600개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또한 시부사와는 민간 외교를 통해 국가 간의 상품 및 친선 교류를 증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02년에는 독일, 프랑스, 영국을 방문했다.[8][9]
1931년(쇼와 6년) 11월 11일,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노쇠로 사망하였다. 향년 92세(만 91세). 몇 달 전부터 대장협착증을 앓고 있던 에이이치는 10월 자택에서 개복 수술을 받았다. 에이이치의 서거 소식에 조문객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당일 오후에는 쇼와 천황의 칙사와 향순황후와 정명황태후의 사자가 파견되었다.
14일, 통야에도 칙사와 사자가 파견되어 에이이치의 업적을 칭찬하는 어사가 하사되었다. 에이이치의 장례식은 15일 아오야마 장례식장에서 거행되었고, 아스카야마 저택에서 아오야마까지의 장례 행렬을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서 배웅했다.
법명은 태덕원전인지의양청연대거사이다. 묘소는 야나카 묘원 시부사와가 묘지이다.
3. 사상
메이지 19년(1886년), 후카가와 후쿠스미정의 시부사와 에이치 저택에 기숙하며 에이치를 사사(師事)한 젊은이들이 학문에 정진하고, 그 성과를 발표하는 장소로서 龍門社가 결성되었다. 이후 에이치의 사상에 공감하고 그를 존경하는 경영자와 기업 간부들이 가입하여, 쇼와 초기에는 수천 명의 회원 조직이 되었다.[44]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사업 활동에서도 광범위한 국민 전체의 풍요를 바랐고, 특정 소수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재벌을 형성하는 것을 싫어했다. 「시부사와 재벌」이라는 말이 쓰이기도 하지만, 이는 에이이치 사후의 일족 간 재산 다툼을 피하기 위해 실업계 은퇴 후인 다이쇼 4년(1915년)에 설립한 시부사와 동족 주식회사를, 태평양 전쟁 후 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의 재벌 해체 정책에서 재벌의 지주회사로 잘못 지정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 지주 비율의 실상은 가업으로 경영하던 시부사와 창고 주식의 26%를 제외하면, 제일은행 주식도 3%, 그 외도 수 퍼센트의 소유에 불과했으며, 재벌이라 불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영국이 아편전쟁을 통해 중국을 침략하고 홍콩을 할양한 것을 기록한 「청영근세담」을 젊은 시절 읽고, 다음은 일본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외국을 싫어하고 외국을 배우지 않는 양이파(攘夷派)였다. 그러나 28세 때, 주군인 徳川慶喜(도쿠가와 케이키)의 명령으로 프랑스로 가게 되었고, 그 배에서 동료로부터 타운젠드 해리스(미국 초대 총영사)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듣게 된다. 해리스가 매우 무사도 정신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미국이 훌륭한 나라라는 것을 깨닫고 친미파가 되었다. 말년에 성루가국제병원 원장 루돌프 토이스러 박사와 같은 병원 미국 이사회 멤버 존 우드 박사가 에이이치의 아스카야마 저택인 아이이손을 방문했을 때, 에이이치는 이 일과 함께 친미파가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48]
>(전략), 그 중에서도 해리스의 통역관 휴즈켄이 살해되었을 때, 다른 공사들이 막부를 신뢰할 만하지 않다고 하여 에도를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타운젠드 해리스는 그럴 수 없다는 점을 주장하고 감히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것은 한 나라의 정부를 모욕하는 것이라는 것이 해리스의 반대 이유였습니다. 다른 공사들이 만약 낭인이 와서 당신을 습격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자, 어쩔 수 없다, 도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죽는다면 기꺼이 죽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일을 듣고 깊이 느껴, 아, 미국인은 훌륭한 사람들이다. 일본의 무사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행동이다, 미국 정의에 깊이 감복했습니다. 영국은 다른 나라를 빼앗는 나라이고, 미국은 통역관이 살해당해도 남아있는 나라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룡문잡지 제501호, 쇼와 5년 6월
이렇게 해리스에 대해 알게 된 에이이치는 친미파가 되어, 성루가국제병원 이사장이 되는 등 미국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미국과 일본의 우호를 위해 헌신하게 되었다.[48]
'''도덕경제합일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1916년에 《논어》를 바탕으로 윤리와 이익(주판)의 양립을 내건 《논어와 주판》을 저술하여, "도덕경제합일설"이라는 이념을 제시하였다.[45] 경제를 발전시켜 이익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부유하게 하기 위해 부는 전체가 공유해야 하는 것으로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설파함과 동시에 스스로도 명심했다.
《논어와 주판》에는 이러한 이념이 간결하게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부를 이루는 근원은 무엇인가 하면, 인의도덕이다. 올바른 도리에 맞는 부가 아니라면 그 부는 완전히 영속할 수 없다.[45]
그리고 도덕과 동떨어진 기만, 부도덕, 권모술수적인 상술은 진정한 상술이 아니라고 말한다.
>금전, 자산은 일의 찌꺼기다. 찌꺼기를 가능한 한 많이 모으려는 자는 쓸데없이 현세에 흙담을 쌓고 있을 뿐이다.
>어떤 일에 대해 어떻게 하는 것이 도리에 맞는가를 먼저 생각하고, 그 도리에 맞는 방법을 쓰면 국가 사회의 이익이 되는가를 생각하고, 나아가 이렇게 하면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는가를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만약 그것이 자신에게는 이익이 되지 않지만 도리에도 맞고 국가 사회에도 이익이 된다면, 나는 단연코 자신을 버리고 도리가 있는 곳을 따를 것이다.[46]
막부 말기에 에이이치와 같은 관점에서 비츄마쓰야마 번의 번정개혁에 임했던 양명학자 야마다 호코쿠의 문인으로, "의리합일론"(의=윤리, 리=이익)을 논한 미시마 추슈와 알게 되자,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에이이치는 미시마와 깊이 교류하게 된다. 에이이치는 미시마 사후 그가 창립한 니쇼가쿠샤 경영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또한, 실업가 히다 리키치(히다 다쿠지의 동생) 등과 일본 경제의 올바른 방향을 논했다.[47]
'''천견론'''
관동 대지진 이후 일본 언론계에는 세상 풍조가 이기적이고 오만해졌기 때문에 하늘이 벌로 자연재해를 일으켜 경종을 울린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천견론”(天譴論)이 유행했는데, 그 서막을 연 것은 시부사와 에이이치였다.[54] “천견론”은 부패한 부르주아와 근대 산업 문명에 대한 비판과 평등주의 및 자연 회귀에 대한 찬미의 사조와도 연결되어 일종의 유행어가 되었다. 모두가 입에 올리게 되자, 오히려 부자연스러움이나 위선성을 지적하는 사람도 나타났고, 최초로 주장한 시부사와조차도 “천벌이라고 하는 사람은, 정말로 이것을 천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비판할 정도가 되었다.
3. 1. 도덕경제합일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1916년에 《논어》를 바탕으로 윤리와 이익(주판)의 양립을 내건 《논어와 주판》을 저술하여, "도덕경제합일설"이라는 이념을 제시하였다.[45] 경제를 발전시켜 이익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부유하게 하기 위해 부는 전체가 공유해야 하는 것으로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설파함과 동시에 스스로도 명심했다.《논어와 주판》에는 이러한 이념이 간결하게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도덕과 동떨어진 기만, 부도덕, 권모술수적인 상술은 진정한 상술이 아니라고 말한다.
막부 말기에 에이이치와 같은 관점에서 비츄마쓰야마 번의 번정개혁에 임했던 양명학자 야마다 호코쿠의 문인으로, "의리합일론"(의=윤리, 리=이익)을 논한 미시마 추슈와 알게 되자,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에이이치는 미시마와 깊이 교류하게 된다. 에이이치는 미시마 사후 그가 창립한 니쇼가쿠샤 경영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또한, 실업가 히다 리키치(히다 다쿠지의 동생) 등과 일본 경제의 올바른 방향을 논했다.[47]
3. 2. 천견론
관동 대지진 이후 일본 언론계에는 세상 풍조가 이기적이고 오만해졌기 때문에 하늘이 벌로 자연재해를 일으켜 경종을 울린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천견론”(天譴論)이 유행했는데, 그 서막을 연 것은 시부사와 에이이치였다.[54] “천견론”은 부패한 부르주아와 근대 산업 문명에 대한 비판과 평등주의 및 자연 회귀에 대한 찬미의 사조와도 연결되어 일종의 유행어가 되었다. 모두가 입에 올리게 되자, 오히려 부자연스러움이나 위선성을 지적하는 사람도 나타났고, 최초로 주장한 시부사와조차도 “천벌이라고 하는 사람은, 정말로 이것을 천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비판할 정도가 되었다.4. 평가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1926년 일본 총리의 추천으로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었다.[11]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에이이치에 대해 "누구보다 빨리 18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기업과 국가의 목표, 기업의 니즈와 개인의 윤리와의 관계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제기했다"고 높이 평가했다.[60] 또한 "20세기에 일본이 경제 대국으로 번영한 것은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사상과 업적에 크게 기인한다"고 언급했다.[60] 드러커는 이와사키 야타로와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이름은 해외에서 소수의 일본 연구자만이 알고 있지만, 그들의 업적은 로스차일드, 모건, 크룹, 록펠러를 능가한다고 평가했다.[60]
5. 가족 관계
시부사와 에이이치(일본어: 渋沢 栄一, 1840년 3월 16일 ~ 1931년 11월 11일)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88]
- 아내
:** 지요(千代, 1841~1882년) - 오다카 아쓰타다(尾高惇忠)의 여동생으로, 에이이치와는 사촌 남매 지간이다.[89][90] 콜레라로 사망하였다.[89][90] 우타코(歌子) · 고토코(琴子) · 도쿠지(篤二)의 어머니이다.[89][90]
:** 가네코(兼子) - 이토 하치베에(伊藤八兵衛)의 딸이다. 이혼 후 게이샤가 되기 위해 료고쿠(両国)의 알선인에게 부탁했는데, 시부사와의 첩 이야기가 나와 그의 후처가 되었다.[94] 기이하게도 당시 시부사와의 집은 가네코의 본가가 몰락할 때 처분한 집이었다고 한다.[97] 다케노스케(武之助) · 마사오(正雄) · 아이코(愛子) · 히데오(秀雄)의 어머니이다.[89][93]
- 자녀
시부사와동족회(渋沢同族会)는 적출(嫡出)인 7명의 자녀와 그 배우자 및 그 자녀에 의해 결성되었다.[101] 서자를 포함하면 20명 혹은 50명[100]에 달하는 자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 장녀: 우타코(歌子, 1863~1932년) - 법학자인 호즈미 노부시게(穂積陳重) 남작과 결혼하였다.[89] 《호즈미 우타코 일기(穂積歌子日記)》라는 저서가 있다.
:** 2녀: 고토코(琴子, 1870~1925년) - 사카타니 요시로(阪谷芳郎) 자작과 결혼하였다.[89]
:** 장남: 도쿠지(篤二, 1872~1942년) - 시부사와창고(澁澤倉庫)의 회장을 지냈다.[89] 아내는 하시모토 사네야나(橋本実梁) 백작의 딸인 아쓰코(敦子)이다. 상속권이 박탈되었고, 장남인 시부사와 게이조(渋沢敬三)가 적손(嫡孫)이 되었다.[102]
:** 2남: 다케노스케(武之助, 1886~1946년) - '이시카와지마 비행기제작소(石川島飛行機製作所)'의 제2대 사장이다.[89][103]
:** 3남: 마사오(正雄, 1888~1942년) - 일본제철(日本製鐵) 부사장을 지냈다.[89] '이시카와지마 비행기제작소(石川島飛行機製作所)'의 초대 사장이다.[103]
:** 3녀: 아이코(愛子, 1890년~?) - 아카시 테루오(明石照男)와 결혼하였다.[89]
:** 4남: 히데오(秀雄, 1893년~1984년) -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의 회장, 도호의 이사 / 회장을 역임하였다.[89]
:** 서자: 후미(ふみ) - 오다카 지로(尾高次郎)와 결혼하였다. 지로(次郎)는 에이이치(栄一)의 아내인 지요(千代)의 오빠 오다카 아쓰타다(尾高惇忠)의 아들이다.
:** 서자: 데루코(照子, ?~1927년) - 오카와 헤이자부로(大川平三郎)와 결혼하였다. 헤이자부로(平三郎)는 에이이치(栄一)의 아내인 지요(千代)의 언니의 아들이다.
:** 서자: 호시노 다쓰오(星野辰雄, 1893년~?) - 릿쿄 대학 교수가 되었다.
:** 서자: 하세가와 주자부로(長谷川重三郎, 1908~1985년) - 제일은행장(第一銀行頭取)을 지냈다.
:** 양자: 시부사와 헤이쿠로(平九郎, ?~1868년) - 에이이치(栄一)의 아내인 지요(千代)의 남동생이다.[89] 한노 전쟁(飯能戦争)에서 신정부군에게 패하여 자결하였다.
- 손주
:** 호즈미 시게토(穂積重遠) - 우타코(歌子)의 장남이다. 법학자이자 최고재판소 판사였다.
:** 호즈미 신로쿠로(穂積真六郎) - 우타코(歌子)의 4남이다. 조선총독부 식산국장부터 조선상공회의소 회장까지 역임하였다.
:** 사카타니 기이치(阪谷希一) - 고토코(琴子)의 장남이다. 만주국 총무청 차장과 '중국연합준비은행 고문(中国聯合準備銀行顧問)'을 역임하였다.
:** 시부사와 게이조(渋沢敬三) - 도쿠지(篤二)의 장남이다.
:** 시부사와 노부오(渋沢信雄) - 도쿠지(篤二)의 차남이다.
:** 시부사와 도모오(渋沢智雄) - 도쿠지(篤二)의 3남이다.
:** 사메지마 준코(鮫島純子) - 마사오(正雄)의 차녀이다.
:** 아카시 쇼조(明石正三) - 아이코(愛子)의 3남이다.
:** 아카시 다케카즈(明石武和) - 아이코(愛子)의 7남이다.
:** 시부사와 가즈오(渋沢一雄) - 히데오(秀雄)의 장남이다.
:** 시부사와 하나코(渋沢華子) - 히데오(秀雄)의 3녀이다. 소설가이다.
:** 오다카 호사쿠(尾高豊作) - 후미(ふみ)의 장남이다.
:** 오타카 도모오(尾高朝雄) - 후미(ふみ)의 차남이다.
:** 오다카 구니오(尾高邦雄) - 후미(ふみ)의 3남이다.
:** 오타카 히사타다(尾高尚忠) - 후미(ふみ)의 4남이다.
- 증손
:** 시부사와 주이치(渋沢寿一)
:** 시부사와 마사히데(渋沢雅英) - 게이조(敬三)의 장남이다.
:** 사카타니 요시나오(阪谷芳直)
:** 호즈미 시게유키(穂積重行)
:** 이와사 미요코(岩佐美代子)
:** 이시구로 고지로(石黒孝次郎)
:** 구루 도모코(久留都茂子)
:** 오다카 고노스케(尾高煌之助)
:** 오타카 아쓰타다(尾高惇忠) - 작곡가이다.
:** 오타카 다다아키(尾高忠明)
:** 고노 노리코(河野典子) - 고노 마사하루의 아내이다.
:** 오카와 게이지로(大川慶次郎)
:** 모로이 가쓰노스케(諸井勝之助)
시부사와 가(渋沢家)는 가이겐지(甲斐源氏)의 헨미 씨(逸見氏)(혹은 시모쓰케겐지(下野源氏)의 아시카가 씨(足利氏))의 후손으로, 덴쇼 시대(天正時代)에 시조인 시부사와 하야토(渋沢隼人)가 겟세이지마 촌(血洗島村)에서 귀농(帰農)했다는 전승이 있다.[88] 에도 말기에는 겟세이지마 촌에 시부사와(渋沢) 성을 사용하는 집이 17채 있었으며, 집의 위치에 따라 "나카노야(中ノ家)", "마에노야(前ノ家)", "히가시노야(東ノ家)", "후루신타쿠(古新宅)", "신야시키(新屋敷)" 등으로 구별하여 불렀다.
- 나카노야(中ノ家): 에이이치가 태어날 무렵에는 마을에서 히가시노야(東ノ家)에 이어 부농이었다. 에이이치가 고향을 떠난 후에는 여동생 사다코(貞子)가 시부사와 이치로(渋沢市郎)를 양자로 맞아 가업을 이었다.
- 히가시노야(東ノ家): 에이이치가 태어날 무렵에는 일족 중 가장 번영했기 때문에 본가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 문학자(フランス文学者)인 시부사와 다쓰히코(澁澤龍彦)는 히가시노야(東ノ家) 출신이다.
- 신야시키(新屋敷): 시부사와 세이이치로(渋沢成一郎)는 사촌인 에이이치와 함께 고향을 떠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후에는 실업가로 활약했다.

6. 저서
1930년 平凡社에서 『시부사와 에이이치 전집』(전6권)을 간행하였다. 1931년에는 『청연백화』(동문관)를 간행하였다. 1984년에는 나가 유키오가 교주한 『우야담 시부사와 에이이치 자전』이 이와나미 문고에서 출판되었다. 1985년에는 가지야마 아키라가 편집한 『논어와 셈판』이 국서간행회에서 간행되었고, 2008년 가도카와 소피아 문고에서 재간되었다. 1977년에는 『논어강의』가 고단샤 학술문고(전7권)로 간행되었다. 2010년에는 『시부사와 백훈 논어·인생·경영』이 가도카와 소피아 문고로 간행되었다.
1994년에는 테루코 크레이그가 번역한 『시부사와 에이이치 자서전: 농민에서 기업가로』가 도쿄대학출판회에서 출판되었다. 메이지 4년(1871년) 9월에는 회사 설립에 관한 설명을 담은 『관판 입회략칙』을 저술하였다. 1918년에는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전(전8권)을 간행하였는데, 1967년부터 1968년까지 후지이 사다후미가 교정한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전』 전4권이 平凡社 (동양문고)에서 간행되었다.
1986년에는 국서간행회에서 『청연백화』를 재간하였고, 같은 해 시부사와 세이엔 기념재단 룡문사가 편집한 『시부사와 에이이치 훈언집』을 간행하였다. 2019년에는 『우야담 시부사와 에이이치 자전』이 이와나미 문고에서 신판으로 출판되었다. 2020년에는 가시마 시게가 편역한 『시부사와 에이이치 「청연론총」 도덕경제합일설』이 고단샤 학술문고에서, 이노우에 준(시부사와 자료관 관장) 해설의 『시부사와 에이이치 자전 우야담·세이엔 회고록(초)』이 가도카와 소피아 문고에서 간행되었다. 2024년에는 스기우라 유즈루와 오에 시노부가 번역한 『항서일기 파리 만국박람회견문록 현대어역』이 고단샤 학술문고에서 신판으로 재간되었다.
7. 관련 시설
- 구 시부사와 저택(도쿄도 고토구) - 구 시부사와 저택(구 시부사와가 주택)이 시부사와 공원 안에 이축 보존되어 있다. 처음에는 후카가와 후쿠스미에 세워졌고, 미타쓰나마치를 거쳐 현재 위치로 이축 보존되었다. 시미즈 건설에 의해 도쿄도 고토구로 이축되었다.
- 구 시부사와가 아스카야마 저택(도쿄도 기타구) - 현재 남아있는 만향로와 청연문고를 공개하고 있다.
- 룡문사 -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사모하고 그의 이상에 공감한 경제인들의 회원제 조직이다. 현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 기념재단이다.
- 시부사와 자료관 -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생애와 업적에 관한 박물관이다. 시부사와 기념재단이 운영한다.
- 시부사와 재벌 - 본래 의미의 재벌은 아니었지만, 전후 재벌 해체 때 지정을 받게 되었다.
- 시부사와 창고 -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시부사와가의 직영 사업으로 자택 시설을 이용하여 창업한 기업이다.
- 시부사와 에이이치 기념관 - 생가가 있는 후카야시 북부에 위치한다.
- 정의당 -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기수를 기념하여 제일은행 직원들이 직원 운동 시설인 청화원 안에 건설했다. 후카야시로 이축 보존되어 있다.
- 남호신사 - 에이이치가 존숭했던 에도 시대의 로쥬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를 신으로 모시고 있다. 에이이치도 설립에 지원을 했다.
8.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연기한 배우
- 텔레비전 드라마
- * 구름을 넘어서 (1978년, TBS(도쿄방송), 배우: 니시다 토시유키)
- * 웅기당당 (시로야마 사부로 원작, 1982년, NHK(일본방송협회), 배우: 타키다 에이)
- * 청천을 꿰뚫다 (2021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요시자와 료)[107]
- 가요곡
- * 우야탄〜시부사와 전〜(우야탄〜시부사와 에이이치 전〜) (2015년, 작사: 만조 타카시, 작곡: 시호 아키토, 노래: 나가이 유우코)
- 소설
- * 제국 이야기 (아라마타 히로시). 1988년 영화화, 배우: 카츠 신타로
- 영화
- * 붓코 -그의 사랑- 천사의 피아노- (2007년, 배우: 히라이즈미 나루 )
- * 사쿠라, 사쿠라 〜사무라이 화학자 고봉 양길의 일생〜 (2010년, 배우: 마츠카타 히로키)
- * 붉은 띠 -후쿠오카 제사장 이야기- (2017년, 배우: 토요하라 코스케)
- 텔레비전 드라마
- * 풍설 제13화 「부의 발소리」(1964년, NHK, 배우: 마스다 준지)
- * 천황의 세기 (다이부츠지로 원작, 1971년, 아사히 방송, 배우: 야마모토 와타루)
- * 사자의 시대 (1980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카쿠노 타쿠조)
- * 아사가 왔다 (2015년, NHK 연속 텔레비전 소설, 배우: 미야케 유지)
- 뮤지컬
- * 맹렬한 황금의 나라 -사혼상재! 이와사키 야타로의 청춘- (寶塚歌劇團. 혼구 히로시의 만화 『맹렬한 황금의 나라』가 원작, 배우: 아스카 유)
- 우표
- * 「지방자치법 시행 60주년 기념 시리즈 사이타마현」 (2014년 10월 8일 발행, 82엔 우표 5종 중 1종)[108]
- * 「일본은행권 3종의 전면 갱신」 (2024년 6월 19일 발행, 84엔 우표 10종 중 1종)[109]
- 다이부츠지로(大佛次郎) 『격류(激流)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젊은 시절』 (미치야(未知谷), 2009년, 아사히 문고(朝日文庫), 2021년)
- 시로야마 사부로(城山三郎) 『웅기당당(雄気堂々)』 (신초 문고(新潮文庫)(상하), 개정판 2003년)
- 난죠 노리오(南條範夫) 『막부(幕府) 파리에서 싸우다』 (코분샤 문고(光文社文庫), 1994년, 신판 2021년)
- 도몬 토오지(童門冬二) 『시부사와 에이이치 인간의 기초(人間の礎)』 (신판·슈에이샤 문고(集英社文庫), 2019년)
- 츠모토 아키라(津本陽) 『소설 시부사와 에이이치(小説 渋沢栄一)』 (신판·겐토샤 문고(幻冬舎文庫)(전2권), 2007년)
- 야마다 카츠로(山田克郎) 『시부사와 에이이치 재계의 프런티어(渋沢栄一 財界のフロンティア)』 (신장복간·춘양당서점(春陽堂書店), 2019년)
- 코마에 료(小前亮) 『시부사와 에이이치 전(渋沢栄一伝) 일본의 미래를 바꾼 남자』 (코미네 쇼텐(小峰書店), 2020년)
- 호시 료이치(星亮一) 『천재 시부사와 에이이치(天才渋沢栄一) 메이지 일본을 창조한 역경에 강한 남자와 요시히토』 (사쿠라샤(さくら舎), 2020년)
- 나카무라 아키히코(中村彰彦) 『탐하지 않았던 남자(むさぼらなかった男) 시부사와 에이이치 「사혼상재(士魂商才)」의 인생 비록』 (분게이슌주(文藝春秋), 2021년)
- 키타 야스토시(北康利) 『노공출데즈바(乃公出でずんば) 시부사와 에이이치 전』 (각와쇼텐(角川書店), 2021년)
- 星野泰視 「일본을 만든 남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청춘의 날들~」 전 7권 (아키타 쇼텐 『영챔피언』 연재, 2020년 14호 - 2023년 14호)
- 町田翠 「에이이치 ~시부사와 에이이치 전~」 전 4권 (쇼가쿠칸 「월간! 스피리츠」 연재, 2020년 8월호 - 2022년 1월호, 빅 코믹스)
2021년 NHK에서 방영된 60번째 대하드라마 《청천을 꿰뚫다》의 주인공으로 요시자와 료가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연기했다.[107] 아라마타 히로시의 역사 판타지 소설 《제국 이야기》에서는 카츠 신타로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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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論語と算盤
角川学芸出版
2008-10-25
[122]
서적
帝都復興の時代:関東大震災以後
中央公論新社
2011
[123]
보도자료
新しい日本銀行券及び五百円貨幣を発行します
https://www.mof.go.j[...]
財務省
2019-04-09
[124]
뉴스
新紙幣を正式に発表 一万円札の裏は東京駅
https://www.sankei.c[...]
2019-04-09
[125]
서적
朝鮮銀行
PHP研究所 #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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