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슈·가시오 전투
1. 개요
고슈·가시오 전투는 1868년 보신 전쟁 중 혼슈 중부에서 벌어진 전투로, 신정부군과 구 막부군 사이에 벌어졌다. 도쿠가와 막부의 권력 유지를 위한 시도에 반발한 사쓰마, 조슈, 도사 번 등이 무력으로 막부 타도를 계획하면서,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신센구미를 주축으로 한 구 막부군과 신정부군이 고후를 두고 격돌했다. 전투 결과는 신정부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곤도 이사미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 전투는 에도 막부 지지자들의 사기를 저하시켜 에도성의 무혈 항복에 기여했고, 신정부군이 고후를 장악하면서 보신 전쟁의 전황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 전투 명칭 | 고슈 가쓰누마 전투 (甲州勝沼の戦い) |
|---|---|
| 일부 | 보신 전쟁 |
| 날짜 | 1868년 3월 29일 |
| 장소 | 가이국야마나시군 가쓰누마 (현재의 야마나시현고슈시) |
| 결과 | 신정부군의 승리 |
| 교전국 1 | |
|---|---|
| 전투 부대 1 | |
| 교전국 2 | |
| 전투 부대 2 |
| 신정부군 지휘관 | 이타가키 다이스케 |
|---|---|
| 신정부군 지휘관 | 다니 간조 |
| 신정부군 지휘관 | 가와타 가게요 |
| 구 막부군 지휘관 | 오쿠보 쓰요시 |
| 구 막부군 지휘관 | 나이토 하야토 |
| 신정부군 병력 | 도사번 (약 100명) |
|---|---|
| 신정부군 상세 병력 | 오가사와라 겐키치(신충대 3번대) 다니 시게요시(신충대 4번대) 기타무라 시게요리(신충대 포병대, 7문) |
| 신정부군 병력 | 돗토리번 (약 300명) |
| 신정부군 상세 병력 | 사부리 규인 총사대 아마노 유지대 후지타 쓰카사대 미야와키 누이도노대 다테베 반노조대 산국대(단바의 농민 유시로 구성된 의용병) 사부리 데쓰지로 포병대 (2문) 다카시마번 반소대 (고쵸 이와모토 준키치로 지휘) |
| 구 막부군 병력 | 신센구미 (약 70명) |
| 구 막부군 병력 | 아이즈, 히코네번사 (약간 명) |
| 구 막부군 병력 | 단 나이키 배하의 총대 (약 100명) |
| 구 막부군 병력 | 가스가대 (22명) |
| 결과 | 구 막부군 괴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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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3월 -
호쿠에쓰 전쟁
호쿠에쓰 전쟁은 1868년 보신 전쟁의 일부로, 메이지 신정부군과 에치고 지역의 구 에도 막부 세력 간 전투로, 나가오카번이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하여 저항했으나 신정부군의 승리로 끝나 메이지 유신 공고화에 기여했다. -
막말 도사번 -
도사 근왕당
도사 근왕당은 막부 말기 도사 번에서 무치 즈이잔 등이 결성하여 다케치 한페이타 주도로 거번근왕을 내세우며 존왕양이를 추구했으나 번청의 탄압으로 몰락한 존왕양이 운동 단체이다. -
막부육군 -
조슈 정벌
조슈 정벌은 에도 막부가 조슈 번의 세력 확장을 막고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감행한 군사 행동으로, 나마무기 사건과 금문의 변을 거치며 갈등이 심화되어 1864년과 1866년에 각각 1, 2차 정벌이 있었으며, 특히 2차 정벌에서 막부의 패배는 막부 쇠퇴를 가속화하고 메이지 유신의 발판을 마련했다.
2. 합전 이전의 배경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도쿠가와 막부 군이 패배한 후, 조슈 번, 사쓰마 번, 도사 번 군대로 구성된 신정부군은 도카이도, 나카센도, 호쿠리쿠도의 세 갈래 길을 따라 에도로 진격했다. 이 과정에서 고슈 가도의 요충지인 가쓰누마 지역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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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는 막부 군사령관 가쓰 가이슈에게서 고후 성 확보를 명받았다. 곤도 이사미는 신센구미 생존자들을 중심으로 '고요 진무대'를 편성하고, 오쿠보 쓰요시(大久保剛)로 개명하여 고후로 향했다. 나가쿠라 신파치는 곤도가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고후성 지배를 일임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고슈 성을 자신의 힘으로 손에 넣어 이곳에 요시노부를 옮기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언급했다.
1868년 2월 28일, 곤도에게 정식으로 "고후 진무" 명이 내려졌고, 3월 1일, 신센구미(약 70명)와 아이즈·히코네 번사, 다마 나오키 휘하 총대(약 100명) 등 총 200명 남짓의 고요 진무대가 에도 성을 출발했다.
3월 1일부터 3일까지 곤도와 히지카타 도시조는 가미이시하라 숙소, 후추 숙소, 히노 숙소, 하치오지 숙소, 사가미 국 요세 숙소, 우에노하라 숙소, 사루하시 숙소를 거쳐 가이 국에 들어갔다.
곤도는 고향에서 환영을 받았지만, 가마를 타지 않고 걸으며 예의를 갖췄다. 4일, 신정부군이 고후에 도착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고마카이 숙소로 향했으나, 신정부군은 이미 고후 성에 입성한 후였다. 곤도는 신정부군을 방심시키기 위해 고후 봉행에게 서신을 보내 시간을 벌고자 했다. 나가쿠라 신파치는 가쓰누에 도착했을 때 병력이 121명으로 줄었다고 기록했다.
2.1. 막부의 쇠퇴와 신정부군의 진군
신센구미는 아이즈번의 지휘 아래 교토 시내의 치안 유지 등을 담당했지만, 구 막부군의 일원으로서 도바 후시미 전투, 요도 센료마쓰 전투에서 신정부군에게 패배하여 에도로 이동하였다. 신정부군은 도카이도, 도산도(나카센도), 호쿠리쿠도를 따라 에도를 향해 진군하였다.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도쿠가와 막부 군을 격파한 후, 조슈, 사쓰마, 도사 번의 군대로 구성된 천황군은 3개의 열로 나뉘어 도쿠가와 막부의 수도인 에도를 향해 북동쪽으로 진격했다. 이때 도카이도, 나카센도, 호쿠리쿠도를 따라 진격했다.
한편, 신센구미의 수장 곤도 이사미는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에도로 퇴각했다. 에도로 돌아온 그는 막부 군사령관 가쓰 가이슈를 만났다. 곤도는 신센구미의 생존자들을 기반으로 새로운 부대인 甲陽鎮撫隊일본어를 창설했고, 1868년 3월 24일 에도를 떠났다.
1867년 5월 21일, 나카오카 신타로의 중재를 거쳐 고마츠 기요카도 저택에서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요시이 도모자네, 고마츠 기요카도 등과 도사 번의 이누이(이타가키) 다이스케, 타니 간조, 모리 쿄스케, 나카오카 신타로 등이 회담을 갖고, 사쓰마-도사 토바쿠 밀약(사쓰토 밀약)이 맺어졌다. 다음 날, 이누이 다이스케는 사쓰마 번과 토바쿠 밀약을 맺은 것을 야마우치 요도에게 보고했다. 요도는 놀랐지만, 이누이 다이스케가 에도 쓰키지의 토사 번 저택에 존왕파 미토 낭사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음을 깨닫고 이를 승낙했다. 오사카에서 알미니 총 300정을 구입하도록 명령하고, 이누이 다이스케에게 토사 번의 군제 근대화 개혁을 명령하여, 다가올 때를 대비하도록 지시했다.
이 사쓰마-도사 밀약에 따라 같은 해 12월 28일, 교토에 있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토사의 이누이 타이스케에게 "토벌 개전이 임박했다"는 전령을 보냈다. 그 예상대로, 이듬해 1868년 1월 3일, 도바-후시미 전투가 발발했다. 1월 4일, 토사번의 야마다 헤이자에몬, 요시마쓰 소노스케, 야마모토 하루지, 기타무라 쵸베, 후타가와 겐스케 등의 부대가 사쓰마-도사 밀약에 의거하여 참전했다. 그 후, 긴노 미하타가 나부꼈다. 게다가 1월 7일, 조정으로부터 "도쿠가와 요시노부 추토"의 칙령이 내려졌고, 이에 대항하는 세력은 "조적"이라는 공식적인 판단이 내려졌다.
2.2. 고슈-가쓰누마 지역의 중요성
가이국 야마나시군 가쓰누마(현 고슈시 가쓰누마정)는 고후 분지의 동쪽 끝에 위치한다. 이 지역은 농촌이지만, 시나노국에서 고후(현 고후시)를 거쳐 에도로 향하는 고슈 가도의 가쓰누마 숙소가 있던 숙소 마을로, 교통의 요충지였다.
고슈 가도는 에도에서 군내 지방의 산간부를 거쳐 고후 분지(구니나카 지방)에 이르며, 가쓰누마는 분지로 들어가는 첫 번째 지점에 위치한다. 가쓰누마에서 군내 지방을 넘으면 무사시국이며, 신선조의 간부와 대사를 많이 배출한 다마 지방과도 가깝다.
가이국은 교호 9년(1724년)에 막부 직할령이 되었고, 고후성(고후시)에는 고후 근무소가 배치되었으며, 현지에는 대관의 지배를 받았다. 가이에 배치된 병력은 부족하여, 덴포 7년(1836년)에 발생한 가이 일국 규모의 덴포 소동 당시 근무사 300여 명과 각 대관 수기・수하 50여 명이었다.
2.3. 신센구미의 고요 진무대 편성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패배한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는 막부 군사령관 가쓰 가이슈에게 고후 성 확보를 명받았다. 곤도 이사미는 신센구미 생존자들을 중심으로 '고요 진무대'를 편성하고, 오쿠보 쓰요시(大久保剛)로 개명하여 고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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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쿠라 신파치는 "에도 도착 직후" 곤도 이사미가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고후성 지배를 일임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언급했다. 곤도는 "고슈 성을 자신의 힘으로 손에 넣어 이곳에 요시노부를 옮기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육군총재였던 가쓰 가이슈는 곤도 등이 "재전"을 꾀하고 있었으며, 고후 출병은 신정부군과의 "일전"을 위한 것이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시이 다카시는 가쓰가 곤도 등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발언에 의문을 제기하며, 가쓰가 곤도 등의 의도를 알고도 고후 출병을 인정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2월 28일, 곤도에게 정식으로 "고후 진무" 명이 내려졌고, 3월 1일, 신센구미(약 70명)와 아이즈·히코네 번사, 다마 나오키 휘하 총대(약 100명) 등 총 200명 남짓의 고요 진무대가 에도 성을 출발했다. '고요 진무대'라는 명칭은 메이지 시대에 처음 등장했으며, 그 이전에는 '진무대'로 불렸다.
3월 1일, 곤도(오쿠보 쓰요시로 개명)는 가미이시하라 숙소를 통과하여 후추 숙소에서 숙박했다. 다음 날, 히지카타 도시조(나이토 하야토로 개명)는 히노 숙소를 지나 하치오지 숙소에서 점심을 먹고, 사가미 국 요세 숙소에 도착했다. 3일에는 가이 국에 들어가 우에노하라 숙소에서 점심을 먹고 사루하시 숙소에서 숙박했다.
곤도는 고향에서 환영을 받았지만, 가마를 타지 않고 걸으며 예의를 갖췄다. 4일, 신정부군이 고후에 도착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고마카이 숙소로 향했으나, 신정부군은 이미 고후 성에 입성한 후였다. 곤도는 신정부군을 방심시키기 위해 고후 봉행에게 서신을 보내 시간을 벌고자 했다. 나가쿠라 신파치는 가쓰누에 도착했을 때 병력이 121명으로 줄었다고 기록했다.
3. 전투의 경과
신정부군은 먼저 고후의 도쿠가와 거점을 점령했다. 이후 1868년 3월 29일, 야마나시현 고슈시 가쓰누마에서 쇼군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수적 열세에 놓인 쇼군 군대는 179명의 사상자를 내며 패배했고, 곤도 이사미를 포함한 생존자들은 사가미국을 경유하여 아이즈로 도주를 시도했다.
3.1. 신정부군의 고후 성 선점
도사번의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이끄는 신정부군은 1868년 3월 28일(음력 3월 5일) 고후 성에 입성하여 요새화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이타가키 노부카타의 320주기였기 때문에, 이와쿠라 도모사다 등의 조언을 받아 가이 겐지의 흐름을 잇는 옛 다케다씨 가신의 이타가키 씨의 후예임을 보여 가이국 민중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3.2. 고요 진무대의 진군과 전투
1868년 3월 29일, 고요 진무대와 신정부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고요 진무대는 가쓰누(현재 고슈시)까지 진군하여 고슈 가도와 오메카 가도의 분기점 근처에 포진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계속 탈주하여 121명까지 감소하였다. 곤도 이사미는 아이즈 번의 원군이 오고 있다고 설득하여 탈주를 막으려 했고, 히지카타 도시조는 가나가와 방면의 하타모토에게 원조를 요청했지만 묵살당했다.
전황은 고요 진무대 측에 불리했다. 신정부군의 포격으로 대포는 파괴되었고, 아이즈 번의 원군이 거짓으로 밝혀지자 병사들은 도망쳤다. 나가쿠라 신파치, 하라다 사노스케 등이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고요 진무대는 하치오지로 퇴각한 후 해산했고, 곤도 등은 에도로 패주하던 중 히지카타와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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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정오쯤 고요 진무대가 신정부군을 향해 발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고요 진무대는 지휘관의 부재, 초보적인 실수, 그리고 화력의 열세로 인해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백병전에서는 분전하기도 했지만, 결국 신정부군의 삼면 공격에 포위되어 패배했다. 오후 2시경 전투는 종료되었고, 고요 진무대는 산속에 숨어 에도로 패주했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고슈·가쓰누마 전투는 보신 전쟁 동안 혼슈 중부에서 벌어진 마지막 주요 군사 행동이었으며, 곤도 이사미의 죽음은 도쿠가와 지지자들의 사기를 더욱 저하시켜 에도성의 무혈 항복에 기여했다.
4.1. 곤도 이사미의 체포와 처형
곤도 이사미는 이 전투에서 간신히 탈출했지만, 곧 지바현 나가레야마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얼마 후 이타바시에서 신정부에 의해 참수되었다. 고슈-가쓰누마 전투는 보신 전쟁 동안 혼슈 중부에서 벌어진 마지막 주요 군사 행동이었으며, 곤도 이사미의 죽음은 도쿠가와 지지자들의 사기를 더욱 저하시켜 그해 말 에도성의 무혈 항복에 기여했다.
4.2. 에도 무혈 개성과 보신 전쟁의 전환점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는 에도 성에서 가쓰 가이슈와 만나 막부 직할지인 고후를 신정부군보다 먼저 확보하라는 명을 받았다. 신센구미는 고요 진무대로 이름을 바꾸고 고후 성으로 향했지만, 신정부군이 먼저 고후 성에 입성하였다. 고요 진무대는 가쓰누에 포진했지만, 병사들이 계속 탈주하여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1868년 3월 29일, 고요 진무대와 신정부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으나, 고요 진무대는 패배하고 하치오지를 거쳐 에도로 퇴각했다. 이 전투에서 간신히 탈출한 곤도 이사미는 지바현 나가레야마에서 체포되어 이타바시에서 참수되었다.
고슈·가쓰누마 전투는 혼슈 중부에서 벌어진 마지막 주요 전투였으며, 곤도 이사미의 죽음은 도쿠가와 지지자들의 사기를 저하시켜 에도 성의 무혈 개성에 기여했다. 이후 보신 전쟁은 간토 북부, 아이즈, 호쿠에쓰 등지로 옮겨갔다.
4.3. 역사적 평가 및 유적
막부 직할령으로서 에도 막부의 압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고슈·가시오 전투에서 구 막부군에게 승리한 순충대에 경의를 표했다. 더욱이 그 총독인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이타가키 노부카타의 자손임을 알게 되자 "과연 명장 이타가키 스루가노카미의 명성에 부끄럽지 않은 솜씨다"라며 감탄하며 "무다 가의 옛 신하인 다케다 가문 유신들이 고후로 돌아왔다"라며 크게 환영했다. 가이 국내의 다케다 가문 유신의 자손으로 귀농한 장백성, 낭인, 신주 등이 이타가키 등이 이끄는 관군에 협력을 자원하기도 했다. 탈주자가 잇따랐던 구 막부군과 비교하여, 신정부군의 전략은 총기의 신구와 훈련 정도 이전의 심리전으로서도 훌륭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현재의 고슈 가이도를 따라 고전장터와 묘소 등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