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일청
1. 개요
고일청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호세이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신민회 활동과 105인 사건 연루로 유배를 겪었다.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지냈으며, 독일과 미국에서 유학 후 귀국하여 지주, 광산 브로커, 조선일보사 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며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광복 후 반민특위 수사 대상이었으나 처벌받지 않았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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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군 출신 -
장준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정치인인 장준하는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 후 탈출하여 광복군에서 활동, 해방 후 김구의 비서를 지냈고, 《사상계》를 창간하여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나 의문사했고 그의 삶과 죽음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
의주군 출신 -
정비석
정비석은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활동한 소설가로, 《자유부인》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으며 친일 논란과 필화 사건을 겪었고, 4·19 혁명 이후 역사 소설을 주로 집필했다. -
몰년 미상 -
미와 와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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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미상 -
이태준
이태준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로, 섬세한 문체와 서정적인 분위기로 현실을 그린 단편소설들을 발표하여 주목받았으며, 특히 1930년대 〈달밤〉, 〈까마귀〉, 〈복덕방〉 등의 작품으로 한국 단편소설의 미학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월북 후 숙청되어 정확한 사망 시기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
일제강점기의 관료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일제강점기의 관료 -
김창영 (1890년)
김창영은 일제강점기 경찰 및 관료, 만주국 관리로서 항일 무장 세력 탄압과 귀순 공작에 참여하고 금산군수와 전라남도 참여관을 지냈으며, 광복 후 경성부부윤을 역임했으나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처벌받고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다.
2. 생애
평안북도 의주군 출신이다. 경성중학을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의 호세이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907년 안창호를 중심으로 결성된 신민회의 평안북도 용천 지부에서 감익룡, 김용규 등과 더불어 활동했다. 1912년 105인 사건에 관련되어 의주헌병대에 체포되어 거문도에 유배되었다. 1913년에 조선총독부 관리로 임용되어 평안북도에서 약 5년 동안 근무했다.
1919년 3.1운동 후 이유필, 조봉길 등 한인관리들과 동맹퇴직을 결의하고 상해로 탈출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외무위원, 법제위원, 청원위원장, 비서국장 등을 지냈다. 1919년 상해대한교민단의 전신인 상해고려교민친목회의 회장을 역임했고, 1920년에는 신채호, 박용만, 김창식 등과 함께 보합단에 참여, 군자금 모집에 힘썼다.
1923년에는 독일 베를린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3년 동안 공부하였고, 1926년부터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오랜 해외 생활을 마치고 1929년에 귀국했다.
고일청은 귀국하여 고향인 평안북도 의주군으로 돌아왔다. 의주의 지주이자 평북 삭천의 금광주로 많은 자본을 축적하는 한편 농업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방응모의 교동금광 매매를 주선하는 등 광산 브로커로도 활동한 바 있다. 1933년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할 당시 총 8,725 주 중 2,100주를 인수한 후 조선일보사 이사에 취임하여 언론인으로 재직했고, 동시에 평안북도 도회의원과 의주금융조합 조합장, 송현수리조합 조합장 등을 지내며 이 지역 유지로 활동했다. 당시 고일청에게는 "학식과 포부가 특출할 뿐 아니라, 인격과 수완 또한 평안북도 지방의 제일류"라는 평이 있었다. 1935년에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중추원 참의에 발탁된 뒤 전쟁 지원에 앞장선 행적이 있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시작으로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에서 핵심 역할을 맡아 가담했다.
고일청은 광복 후 1949년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수사 대상이 되었으나, 반민특위 활동이 방해를 받으면서 기소유예 처분으로 풀려나 처벌은 받지 않았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1. 독립운동 참여 (1907년 ~ 1929년)
평안북도 의주군 출신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의 호세이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907년 안창호를 중심으로 결성된 신민회의 평안북도 용천 지부에서 감익룡, 김용규 등과 더불어 활동했다. 1912년 105인 사건에 관련되어 의주헌병대에 체포되어 거문도에 유배되었다. 1913년에 조선총독부 관리로 임용되어 평안북도에서 약 5년 동안 근무했다.
1919년 3.1운동 후 이유필, 조봉길 등 한인관리들과 동맹퇴직을 결의하고 상해로 탈출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외무위원, 법제위원, 청원위원장, 비서국장 등을 지냈다. 1919년 상해대한교민단의 전신인 상해고려교민친목회의 회장을 역임했고, 1920년에는 신채호, 박용만, 김창식 등과 함께 보합단에 참여, 군자금 모집에 힘썼다.
1923년에는 독일 베를린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3년 동안 공부하였고, 1926년부터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오랜 해외 생활을 마치고 1929년에 귀국했다.
2.2. 귀국 후 활동과 친일 행적 (1929년 ~ 1945년)
고일청은 귀국하여 고향인 평안북도 의주군으로 돌아왔다. 의주의 지주이자 평북 삭천의 금광주로 많은 자본을 축적하는 한편 농업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방응모의 교동금광 매매를 주선하는 등 광산 브로커로도 활동한 바 있다. 1933년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할 당시 총 8,725 주 중 2,100주를 인수한 후 조선일보사 이사에 취임하여 언론인으로 재직했고, 동시에 평안북도 도회의원과 의주금융조합 조합장, 송현수리조합 조합장 등을 지내며 이 지역 유지로 활동했다. 당시 고일청에게는 "학식과 포부가 특출할 뿐 아니라, 인격과 수완 또한 평안북도 지방의 제일류"라는 평이 있었다. 1935년에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중추원 참의에 발탁된 뒤 전쟁 지원에 앞장선 행적이 있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시작으로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에서 핵심 역할을 맡아 가담했다.
2.3. 해방 이후 (1945년 ~ )
고일청은 광복 후 1949년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수사 대상이 되었으나, 반민특위 활동이 방해를 받으면서 기소유예 처분으로 풀려나 처벌은 받지 않았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3. 친일 행적 논란 및 평가
고일청은 평안북도 의주군 출신으로, 경성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호세이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907년 신민회 평안북도 용천 지부에서 활동했고, 105인 사건으로 거문도에 유배되기도 했다. 1913년 조선총독부 관리로 임용되었으나, 1919년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외무위원, 법제위원 등 다양한 직책을 맡았다. 1923년부터 독일 베를린 대학교와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유학했고, 1929년 귀국했다.
귀국 후 고일청은 의주에서 지주, 금광주, 광산 브로커, 조선일보사 이사, 평안북도 도회의원, 의주금융조합 조합장, 송현수리조합 조합장 등을 역임하며 지역 유지로 활동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될 정도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 단체에서 핵심 역할을 맡으며 전쟁 지원에 앞장섰다. 이러한 행적 때문에 광복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수사 대상이 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으로 풀려났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