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민추도회
1. 개요
관민추도회는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 사망 이후 한국인의 저항 의지를 꺾고 식민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조직한 친일 단체이다. 1909년 11월 2일 관민추도회 실행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총리대신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 관료와 한성부민회 등 친일 단체 대표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관민추도회는 관제 행사였으며, 장충단에서 추도 행사를 열고 이완용 등이 추도 제문을 낭독했다. 이 행사는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한국 사회에 친일 세력을 확산시키려는 의도로 진행되었다.
| 명칭 | 관민추도회 |
|---|---|
| 한글 | 관민추도회 |
| 한자 | 官民追悼會 |
| 히라가나 | かんみんついとうかい |
| 가타카나 | クヮンミンチュドホェ |
| 로마자 표기 | Gwanmin Chudoho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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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한국 -
정미의병
정미의병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일어난 항일 무장 투쟁으로, 해산 군인들의 합류로 전력이 강화되었고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여 유격전을 전개, 13도 창의군을 결성해 서울 진공 작전을 시도했으나 일제의 토벌 작전으로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
1909년 한국 -
기유각서
기유각서는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를 일본 제국에 넘겨 대한제국의 사법부 등을 폐지하고 한국통감부의 사법청이 그 사무를 맡게 한 조약이다. -
대한제국 -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으로 설립되어 1987년까지 사용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으로,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광복 후에는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바뀌어 사용되다가 서대문독립공원으로 조성되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여 현재는 역사 교육의 장이자 과거사 반성의 공간이다. -
대한제국 -
의민태자
의민태자는 고종과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서 태어난 대한제국 최후의 황태자로, 영친왕 책봉 후 황태자가 되었으나 일본 유학 및 군 복무, 일본 황족과의 정략결혼, 광복 후 국적 미인정으로 일본에서 생활하다 귀국 후 영원에 안장되었으며 사후 의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한국사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한국사 -
토기
토기는 점토를 구워 만든 그릇으로, 일본에서는 구움 정도에 따라 도자기, 자기와 구분되며 인류 최초의 화학적 변화 응용 사례로 식생활과 문화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다원설이 유력한 발상지와 일본 열도 1만 6500년 전 토기 발견이 특징이며, 일본어 관점에서 정의, 역사, 제작 과정, 용도, 세계 각지 토기 문화를 설명한다.
2. 관민추도회의 조직
2.1. 발기인
총리대신 이완용을 비롯하여, 각 부 대신들과 한성부민회장 등 사회 각계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들이 발기인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일제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대가로 부와 권력을 누린 인물들이었다.
정부 측 인사로는 총리대신 이완용, 궁내부대신 민병석, 중추원 의장 김윤식, 내부대신 박제순, 탁지부대신 고영희,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학부대신 이용직, 친위부장관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 시종원경 윤덕영 이 있었다.
사회단체 측 인사로는 한성부민회 회장 유길준 등이 있었다.
2.1.1. 정부 측 인사
총리대신 이완용을 비롯한 각 부 대신들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앞장선 대표적인 친일 관료들이었다. 궁내부 대신 민병석, 중추원 의장 김윤식 등은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고 식민 통치에 협력한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친위부 장관 이병무는 군부를 대표하여 일제에 협력한 인물이었다.
2.1.2. 사회단체 측 인사
유길준은 친일 단체인 한성부민회 회장으로서 일제의 식민 정책을 지지하고 선전하는 역할을 했다. 이 외에도, 대한협회, 일진회 등 친일 단체의 대표들이 관민추도회에 참여하여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앞장섰다.
3. 관민추도회의 활동
3.1. 추도회 진행
4. 관민추도회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
관민추도회는 일제가 한국인의 저항 의지를 꺾고 식민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조직한 대표적인 친일 단체였다. 이 단체는 '관민합동'이라는 명목으로 전체 한국인의 총체적인 애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대외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제의 강압과 친일파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관제 행사였으며, 대다수 한국인들은 이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한 뒤 11월 2일 관민추도회 실행위원이 구성되었다. 관민추도회는 일본에서 열리는 11월 4일 이토 국장에 맞춰 같은 날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발기인은 총리대신 이완용이었고, 행사 준비는 내각의 각 부 관료가 담당했다.
이 행사의 중심 인물은 한성부민회, 대한협회, 일진회 등 사회단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정부뿐 아니라 사회 각계를 대표하는 상징성이 있었다. 관민추도회가 열리는 날에는 모든 관청이 휴무하고 관아 앞에는 반기가 걸렸다. 학부대신 이용직의 훈령으로 모든 학교는 휴교하고 음악도 정지되었다. 장충단에서는 관리, 군인 및 학생, 일반인 등이 모여 추도 행사가 열렸고, 내각 대표인 총리대신 이완용, 궁내부 대표인 시종원경 윤덕영, 한성부민회 대표 윤효정이 추도 제문을 읽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과거를 잊지 않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확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