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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마르티노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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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마르티노 5세는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선출된 교황으로, 서방 교회의 대분열을 종식시키고 교황청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 힘썼다. 그는 로마의 재건 사업을 추진하고, 후스 전쟁과 오스만 제국의 팽창에 대응했으며, 유대인 박해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1431년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교황 선출 전의 온화한 성격과는 달리 교황으로서는 강력한 교황권을 행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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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마르티노 5세
기본 정보
이름마르티노 5세
원래 이름오도네 콜론나
직함로마 주교
피사넬로의 마르티노 5세 초상화
통치 기간
선출1417년 11월 11일
임기 시작1417년 11월 14일
임기 종료1431년 2월 20일
이전 교황그레고리오 12세
다음 교황에우제니오 4세
서임 및 서품
사제 서품1417년 11월 13일
주교 서품1417년 11월 14일
주교 서품자장 프랑존 알라르메 드 브로니
추기경
임명일1405년 6월 12일
임명자인노첸시오 7세
개인 정보
출생일1369년 1월/2월
출생지교황령 제나차노
사망일1431년 2월 20일
사망지교황령 로마
문장
마르티노 5세 문장
기타 정보
존칭성하
경칭당신의 성하
종교적 호칭거룩하신 아버지

2. 약력

파비아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43] 오도네는 교황 우르바노 6세에 의해 교황청 서기장으로 등용되었으며, 1405년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7세에 의해 산 조르조 알 벨라브로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42]

1409년 피사 공의회에 참여하여 대립교황 알렉산데르 5세를 지지하였다. 이후 알렉산데르 5세의 후임자인 대립교황 요한 2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는데, 그 덕분에 그의 가문은 여러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 오도네 자신도 토디, 오르비에토, 페루자, 움브리아의 교황 대리라는 자리를 받았다. 1411년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에 의해 파문되었다. 오도네는 대립교황 요한 23세의 수행원들과 함께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했으며, 1415년 3월 21일 샤프하우젠에서 그를 따라 탈출하였다. 그렇지만 나중에 그는 콘스탄츠로 돌아와서 대립교황 요한 23세의 폐위 선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 참여했다.[44]

2. 1. 출생과 가문

교황 마르티노 5세는 1369년 1월 26일에서 2월 20일 사이에 제나차노에서 아가피토 콜론나와 카테리나 콘티의 아들로 태어났다.[42] 그는 로마의 유서 깊은 명문가인 콜론나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형제 조르다노는 살레르노 공작과 베노사 공작이 되었으며, 누이 파올라는 1441년에서 1445년 사이에 피옴비노 영주였다.[2]

2. 2. 초기 경력

제나차노에서 1369년 1월 26일에서 2월 20일 사이에 아가피토 콜론나와 카테리나 콘티의 아들로 태어났다.[42] 그는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명문 집안 중 하나인 콜론나 가문 출신이다. 그의 형제 조르다노는 살레르노와 베노사의 공작이 되었으며, 누이 파올라는 1441년에서 1445년 사이에 피옴비노 공작 부인이 되었다.

파비아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43] 오도네는 교황 우르바노 6세에 의해 교황청 서기장으로 등용되었으며, 1405년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7세에 의해 산 조르조 알 벨라브로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1409년 피사 공의회에 참여하여 대립교황 알렉산데르 5세를 지지하였다. 이후 그는 알렉산데르 5세의 후임자인 대립교황 요한 2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는데, 그 덕분에 그의 가문은 여러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 오도네 자신도 토디, 오르비에토, 페루자, 움브리아의 교황 대리라는 자리를 받았다. 1411년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에 의해 파문되었다. 오도네는 대립교황 요한 23세의 수행원들과 함께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했으며, 1415년 3월 21일 샤프하우젠에서 그를 따라 탈출하였다. 그렇지만 나중에 그는 콘스탄츠로 돌아와서 대립교황 요한 23세의 폐위 선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 참여했다.[44]

3. 재위 기간

1415년 대립교황 요한 23세가 폐위된 후, 콘스탄츠 공의회교황 그레고리오 12세(1406–1415)와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1394–1423)의 상충된 주장으로 오랫동안 분열되었다. 결국 그레고리오 12세는 사임했고 베네딕토 13세는 폐위되어 분열이 끝났다. 마르티노 5세는 1417년 11월 11일 성 마르티노 축일에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45] 콘클라베에는 23명의 추기경과 공의회 대표 30명이 참여했다. 그는 1417년 11월 13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고, 다음 날 주교로 축성되었다.[43]

마르티노 5세는 1418년 5월 공의회가 폐막된 날 콘스탄츠를 떠났으나 서둘러 로마에 입성하지 않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이탈리아 각 지역을 순방하다가 피렌체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로마에서는 무치오 아텐돌로 휘하에서 브라초 다 몬토네와 싸운 그의 형제 조르다노가 대신 통치하고 있었다. 그 당시 교황은 로마와 그 인근 지역만 통치하고 있었다. 로마냐와 마르케 지방의 대부분에서는 지역 영주들이 명목만 교황 대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을 뿐, 사실상 세습 군주로 자리 잡고 있었고 움브리아와 볼로냐는 독립된 행정구역이었다.[44] 특히 마르티노 5세는 포를리조르조 오르델라피, 이몰라의 루도비코 알리돌시, 리미니의 말라테스타 4세 말라테스타, 스폴레토의 귀난토니오 다 몬테펠트로를 파문했는데, 나중에 귀난토니오 다 몬테펠트로는 교황의 조카 카테리나 콜론나와 혼인하게 된다.

마르티노 5세는 조반나 2세를 나폴리 왕국의 여왕으로 인정[46]하는 대가로 베네벤토를 반환받아 자신의 가문 사람들에게 영지를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또한 당시 로마에 상주하던 나폴리 군대의 철수에 대해 동의를 얻어 무치오 아텐돌로 군대를 로마에서 철수시켰다.[45]

피렌체에 장기간 체류한 마르티노 5세는 1420년 9월 28일이 되어서야 로마에 입성하였다.[46] 교황의 로마 귀환은 교황직과 교황령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즉시 교황직의 위세를 회복시키는데 진력하여, 질서를 확립하고 황폐해진 성당들과 궁전들, 다리들, 기타 공공 건축물들의 복구를 지시했다. 로마의 재건 사업을 위해 그는 토스카나 지역의 몇몇 유명한 예술가들을 고용했는데, 이는 로마 르네상스의 토대를 마련하였다.[45]

신성 로마 제국, 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 등 공의회에 참석한 나라들이 자신들의 개혁안을 밀어붙이자 마르티노 5세는 그들의 개혁안이 교회와 각 나라들의 개별 협약에 대한 부분이 대부분 애매모호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이 많다는 이유로 자신의 개혁안을 내놓아 맞불을 놓고 최종적으로 협상 절차에 들어갔다.

1415년까지 보헤미아의 정세는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콘스탄츠 공의회에서도 이를 주제로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얀 후스의 지지자들은 평신도의 양형 영성체를 도입하였다. 공의회는 보헤미아 정부와 교회 당국자들에 그들이 이단성을 띄고 있다고 경고하는 내용의 서찰을 보냈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귀족들은 후스에 대한 판결이 부당하며, 이는 자신들의 나라에 모욕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주교들의 이단죄 고발로부터 보호하겠다고 천명했다. 프라하는 후스의 변호사 얀 예세니체의 피신처가 되어주었다는 이유로 도시 전체에 성무정지령이 내려졌다. 베긴회는 종교의 자유에 대한 보헤미아의 명성을 듣고 매료되어 방문했다.[47]

1419년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 4세는 왕국의 혼란을 막기 위해 쫓겨난 모든 가톨릭 성직자가 자신들의 지위와 수입을 되찾아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프라하는 무력 저항을 준비했다. 보헤미아 남부의 귀족인 트로즈노프의 얀 지슈카의 지휘 아래 얀 예세니체가 한 무리를 이끌고 시청을 급습했다. 이 때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창 밖으로 내던져져 밖에 있던 사람들의 창칼 위로 떨어져 몸이 꿰뚫려 죽고 말았다. 반면에 쿠텐베르크에서는 수백 명의 후스파 사람들이 붙잡혀 광부들에 의해 폐광한 은광으로 내던져졌다. 바츨라프 4세 왕은 생전에 모든 반역자를 처단하기로 맹세했으나 1419년 8월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 다음 달에는 보헤미아 곳곳에 폭력 사태가 일어나 많은 시민들, 특히 독일인들이 피난길에 올랐다.[47]

바츨라프 4세에 이어 그의 형인 독일의 왕 겸 헝가리 왕인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해 질서 회복에 나섰다. 1420년 3월 1일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위클리프파와 후스파 그리고 그 밖의 이단자들을 진압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에 나서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호소하는 칙서를 반포했다.[47] 마르티노 5세는 1420년에 십자군 원정을 두 차례 선포했다. 첫 번째는 보헤미아의 이단자들을 진압하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1419년-1420년에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받고 있던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와 외교적 접촉을 하였다. 1420년 7월 12일 교황은 오스만 제국에 맞서 로마왕 지기스문트가 이끌 십자군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에게는 대사를 수여하기로 결정하였다.[44]

1423년부터 마르티노 5세의 주요 관심사는 브라치오 다 몬토네에 맞서 재개된 전쟁이었다. 이듬해인 1424년 6월 2일 라퀼라 전투에서 자코모 칼도라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이끈 교황령-나폴리 연합군이 브라치오 다 몬토네의 군대를 무찔렀다. 브라치는 며칠 후에 사망했다.[44]

같은 해, 마르티노 5세는 볼로냐를 획득했는데, 이 때부터 볼로냐의 재정은 교황청 회계 담당자의 소관이 되었다.[44] 또한 그는 브라치오 다 몬토네를 교황 대리로 인정하는 전제로 그와의 전쟁을 끝냈으며,[44] 폐위당한 대립교황 요한 23세와도 화해하여 그에게 투스쿨룸의 추기경 칭호를 내렸다.

차기 공의회는 5년 후에 열어야 한다는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마르티노 5세는 1423년 4월 23일 파비아에서 공의회를 개최키로 하고, 자신을 대리해 회의를 주재할 사절을 현지에 파견했다. 하지만 개회식 참석자는 대수도원장 2명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몇 사람이 더 도착했지만 그 수가 25명을 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전염병이 파비아를 덮쳤다. 그러자 마르티노 5세는 공의회 장소를 이탈리아 중부 시에나로 옮겼다. 이번에는 공의회 우위설을 내세우는 다수파와 교황권을 옹호하는 소수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의가 흐지부지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결국 파비아-시에나 공의회는 프레쿠엔스 규정에 따라 다음 공의회를 7년 후인 1431년 바젤에서 열기로 하고 11개월 만에 해산했다. 마르티노 5세는 공의회 우위설을 지지하는 쪽이 아니어서 바젤 공의회 개최에 대해서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공의회 소집일이 다가오면서 규정대로 공의회를 개최하라는 압박이 점점 심해졌다. 마르티노 5세는 하는 수 없이 줄리아노 체사리니 추기경을 공의회 의장으로 임명하는 등 조치를 취했으나 공의회가 열리기 직전에 선종했다.[48]

3. 1. 교황 선출

141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의 지원으로 시작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는 피사 공의회의 결과로 나타난 세 명의 교황(교황 그레고리오 12세,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 대립교황 요한 23세)이 퇴위 또는 폐위되었다.[21][22][23] 1417년 11월에 열린 콘클라베에서 23명의 추기경과 30명의 대표들이 투표한 결과, 49세의 오토네가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그날의 성인 이름을 따서 마르티노 5세로 명명되었다.[45][21][22][23] 그는 1417년 11월 13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다음 날에는 주교 서품을 받았다.[43] 1418년 4월에 콘스탄츠 공의회를 폐회했다.[21][22][23]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에는 온화한 성격으로 공의회주의에 유연하게 대응할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다. 그러나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는 기대와는 정반대의 행동을 보였다. 그는 공의회가 교황권을 제한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재정 재건을 위해 교황청의 세제 개혁과 규율 개혁을 추진하였다. 추기경들은 그의 강경한 자세를 두려워했으며, "교황 앞에 서면 추기경들은 움츠러들어 얼굴이 붉어지거나 파랗게 질렸다"고 할 정도로 절대 군주에 비유되기도 했다.[35][36]

3. 2. 교황령 재건과 로마 부흥

마르티노 5세는 1418년 5월 콘스탄츠 공의회가 폐막된 후 바로 로마로 가지 않고 이탈리아 각지를 천천히 순방하다가 피렌체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당시 로마는 나폴리 왕국의 라디슬라오 1세가 점령하고 있었으나, 1414년 그가 사망하고 조반나 2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마르티노 5세는 1419년 10월 조반나 2세를 나폴리 여왕으로 인정[46]하는 대가로 베네벤토를 돌려받고, 자신의 가문 사람들에게 영지를 분배했다. 또한 나폴리 군대의 로마 철수에 동의를 얻어 무치오 아텐돌로 군대를 로마에서 철수시켰다.[45]

당시 교황은 로마와 그 인근 지역만 통치하고 있었다. 로마냐와 마르케 지방 대부분은 지역 영주들이 명목상 교황 대리였지만 사실상 세습 군주였고, 움브리아와 볼로냐는 독립된 행정구역이었다.[44] 마르티노 5세는 포를리조르조 오르델라피, 이몰라의 루도비코 알리돌시, 리미니의 말라테스타 4세 말라테스타, 스폴레토의 귀난토니오 다 몬테펠트로를 파문했는데, 나중에 귀난토니오 다 몬테펠트로는 교황의 조카 카테리나 콜론나와 혼인하게 된다.

피렌체에 장기간 체류한 마르티노 5세는 1420년 9월 28일이 되어서야 로마에 입성하였다.[46] 그는 즉시 교황령의 질서를 확립하고 황폐해진 성당, 궁전, 다리, 기타 공공 건축물을 복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로마 재건을 위해 토스카나 지역의 유명 예술가들을 고용했는데, 이는 로마 르네상스의 토대를 마련하였다.[45]

메디치 가문은 대립교황 요한 23세를 지원하여 로마 교황청의 총재무 관리자가 되었는데, 마르티노 5세 역시 메디치 가문을 신임하여 그 지위를 유지시켰다. 1424년, 마르티노 5세는 메디치 가문의 당주 조반니 디 비치에게 몬테 베르데 백작위를 수여하려 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1420년, 교황은 로마의 유대인이 지불하던 세금을 이탈리아 전체 유대인의 공동 책임으로 변경했다. 또한 유대인 박해에 반대하여 1422년과 1429년에 반유대적인 설교를 비난하고, 유대인 어린이에게 세례를 강요한 자를 파문하기도 했다.[39][40]

3. 3. 후스 전쟁과 십자군

1419년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 4세는 왕국의 혼란을 막기 위해 쫓겨난 모든 가톨릭 성직자가 자신들의 지위와 수입을 되찾아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프라하는 무력 저항을 준비했다. 보헤미아 남부 귀족 얀 지슈카의 지휘 아래 얀 예세니체가 이끄는 무리가 시청을 급습하여,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을 창밖으로 던져 죽였다. 쿠텐베르크에서는 수백 명의 후스파 사람들이 붙잡혀 광부들에 의해 폐광에 던져졌다. 바츨라프 4세는 모든 반역자를 처단하겠다고 맹세했으나, 1419년 8월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이후 보헤미아 곳곳에서 폭력 사태가 일어나 많은 시민들, 특히 독일인들이 피난길에 올랐다.[47]

바츨라프 4세의 뒤를 이어 그의 형인 독일 왕 겸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하여 질서 회복에 나섰다. 1420년 3월 1일,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위클리프파와 후스파, 그리고 그 밖의 이단자들을 진압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을 촉구하는 칙서를 반포했다.[47] 마르티노 5세는 1420년에 두 차례 십자군 원정을 선포했는데, 첫 번째는 보헤미아의 이단자들을 진압하기 위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1419년-1420년에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받던 동로마 제국 황제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와 외교적 접촉을 했다. 1420년 7월 12일, 교황은 오스만 제국에 맞서 지기스문트가 이끌 십자군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에게는 대사를 수여하기로 결정했다.[44]

1421년에 재결집한 십자군도 크게 패했고, 이후 후스파 토벌을 위한 십자군은 당분간 조직되지 않았다. 교황과 황제 등은 폴란드 왕국 왕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압력을 가해, 왕의 조카이자 후스파 군 사령관 지기스문트 코리부토비치를 후스파에서 이탈·퇴거시켰다. 1431년 1월 교황의 서거 직전에 십자군을 다시 결집했지만, 8월에 십자군이 후스파와 대치했을 때, 십자군 제후들은 후스파 군 앞에서 공포에 질려 싸우기도 전에 패주하여 크게 실패했다.[32]

3. 4.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

마르티노 5세는 1420년에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십자군 원정을 선포했다. 1419년부터 1420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받던 동로마 제국 황제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와 외교적으로 접촉했다. 1420년 7월 12일, 교황은 오스만 제국에 맞서 로마왕 지기스문트가 이끌 십자군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에게 대사를 수여하기로 결정하였다.[44][4]

3. 5. 브라치오 다 몬토네와의 전쟁

1423년부터 교황 마르티노 5세의 주요 관심사는 브라치오 다 몬토네에 맞서 재개된 전쟁이었다. 이듬해인 1424년 6월 2일 라퀼라 전투에서 자코모 칼도라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이끈 교황령-나폴리 연합군이 브라치오 다 몬토네의 군대를 무찔렀다. 브라치오는 며칠 후에 사망했다.[44]

같은 해, 마르티노 5세는 볼로냐를 획득했는데, 이때부터 볼로냐의 재정은 교황청 회계 담당자의 소관이 되었다.[44] 또한 그는 브라치오 다 몬토네를 교황 대리로 인정하는 전제로 그와의 전쟁을 끝냈으며,[44] 폐위당한 대립교황 요한 23세와도 화해하여 그에게 투스쿨룸의 추기경 칭호를 내렸다.

3. 6. 파비아-시에나 공의회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5년 후인 1423년 4월 23일 파비아에서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마르티노 5세는 자신을 대리할 사절을 파견했으나, 개회식 참석자는 대수도원장 2명뿐이었고 시간이 지나도 25명을 넘지 않았다. 게다가 전염병까지 돌아 공의회 장소를 시에나로 옮겼다. 시에나에서는 공의회 우위설을 주장하는 다수파와 교황권을 옹호하는 소수파 간의 논쟁이 벌어져 회의가 흐지부지되었다.[48]

결국 파비아-시에나 공의회는 프레쿠엔스 규정에 따라 7년 후인 1431년 바젤에서 다음 공의회를 열기로 하고 11개월 만에 해산되었다. 마르티노 5세는 공의회 우위설에 동의하지 않아 바젤 공의회 개최에 소극적이었으나, 공의회 소집일이 다가오면서 압박이 심해지자 줄리아노 체사리니 추기경을 공의회 의장으로 임명하는 등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공의회가 열리기 직전에 선종했다.[48]

3. 7. 유대인 정책

후스파 운동으로 인한 교회의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를 통해 교황 마르티노 5세로부터 1418년과 1422년에 이전의 특권을 확인받는 교서를 얻어냈으며, 수도사들에게는 온건한 언어를 사용할 것을 권고했다.[9] 그러나 교황 재위 말년에 그는 여러 법령을 폐지했다. 포를리에서 소집된 유대인 회의는 교황에게 대립 교황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가 공포한 억압적인 법률을 폐지해 줄 것을 요청하는 대표단을 보냈고, 이들은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다.[9]

1420년에는 로마의 유대인이 지불하던 세금을 이탈리아 유대인 전체의 공동 책임으로 헌출하도록 하였다.

또한, 1422년과 1429년에는 반유대적인 설교를 비난하고, 유대인 어린이에게 세례를 강요한 자를 파문하는 등 유대인 박해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39][40]

3. 8. 노예 제도에 대한 입장

Martinus Vla는 중세 시대 유럽에서 쇠퇴하던 노예 제도에 대해, 기독교인의 노예화는 비난했지만, 비기독교인에 대한 노예 제도는 허용하는 입장을 취했다. 1418년 아프리카에 대한 십자군을 승인하고,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교서(1441년)와 함께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승인했다.[10]

1425년 3월에는 기독교인 노예 거래자에게 파문을 위협하고 유대인에게 "불명예의 징표"를 착용하도록 명령하는 교서를 발부하여 기독교인 구매를 억제하려 했다.[11] 같은 해 6월에는 기독교인 노예를 무슬림에게 판매하는 자들을 아나테마로 선언했다.[12] 기독교인 노예 거래 자체는 금지되지 않았지만, 비 기독교인 소유주에게 판매하는 것은 금지되었다.[13] 카페의 제노바 상인에게 발부된 파문 교서는 기독교인 매매와 관련이 있었지만, 가자리아 법을 포함한 비엔나에 대한 이전의 금지령은 기독교인과 무슬림 노예 모두의 판매를 허용했기 때문에 효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14]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는 10명의 흑인 아프리카 노예를 Martinus Vla에게 헌납했다.[15] Martinus Vla는 식민지 확장을 지지했다는 견해도 있다.[16]

Martinus Vla의 노예 제도 금지가 노예 제도 자체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이교도 세력"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다.[17] 정치적 약세로 인해 르네상스 교황청이 순종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18]

4. 죽음

마르티노 5세는 1431년 2월 20일 뇌졸중으로 인해 향년 62세의 나이로 로마에서 선종했다.[44] 그의 유해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에 안장되었다.[44]

5. 평가

교황 선출 전에는 온화한 성격으로, 공의회주의에 유연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주변에서 예상했다. 그러나 선출된 후에는 기대와 정반대의 행동을 보였다. 공의회가 교황권을 제한하는 것에 반대하며, 재정 재건을 위해 교황청의 세제 개혁과 규율 개혁을 추진했다. 추기경들은 그의 강경한 자세를 두려워했고, 절대 군주에 비유되기도 했다. "교황 앞에 서면 추기경들은 움츠러들어 얼굴이 붉어지거나 파랗게 질렸다"고 한다.[35][36]

교황권뿐만 아니라 이단에도 엄격하게 대응했지만, 상황에 따라 관대한 대응으로 전환하는 유연성도 갖추고 있었다. 스페인에는 대립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있었으나, 내부 다툼을 막지 못하고 자멸하여 1429년에 퇴위하고 마르티노 5세에게 충성을 맹세하자, 마요르카 주교로 임명했다.[37] 요한 23세에게도 비슷한 처우를 하여 조반니의 중재로 투스쿨룸 주교로 삼았다. 다만, 1424년경에 만들어진 산 조반니 세례당에 있는 요한 23세의 묘비에 이의를 제기, 묘비문에 "한때 교황이었던 요한 23세"라고 쓰여 있어, 한때 정규 교황이었던 듯한 모호한 인상을 주는 묘비문의 변경을 명령했지만 피렌체는 따르지 않았고, 현재도 묘비와 함께 남아 있다.[38]

유대인에 대한 박해에도 반대하여, 1422년1429년에 반유대적인 설교를 비난하고, 유대인 어린이에게 세례를 강요한 자를 파문하기도 했다.[39][4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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