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교황 우르바노 6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교황 우르바노 6세는 1378년 로마에서 선출된 교황으로, 이탈리아 출신이다. 그는 교회 개혁을 시도했지만, 고압적인 태도와 성급한 개혁으로 인해 프랑스 추기경들의 반발을 샀다. 결국 프랑스 추기경들은 클레멘스 7세를 대립 교황으로 선출하며 서방교회 대분열을 초래했다. 우르바노 6세는 나폴리 왕국과의 갈등, 추기경 숙청 등 실책을 거듭했으며, 교회 통치에서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의 유일한 업적은 1390년 성년을 지정한 것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318년 출생 - 전록생
    고려 후기 문신 전록생은 충혜왕 때 등과하여 공민왕 때 기거사인, 전라도안렴사 등을 지냈고 홍건적의 난 당시 공민왕을 호종한 공으로 2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나, 우왕 즉위 후 이인임 세력에 의해 유배 도중 사망한 인물이다.
  • 1318년 출생 -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는 가마쿠라 시대 말에서 남북조 시대에 활약한 구게이자 무장으로, 고다이고 천황을 옹립하고 겐무 신정을 추진했으며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맞서 남조를 지지하며 활약했지만 21세에 이시즈 전투에서 전사했고, 사후 메이지 유신 이후 재평가되어 그의 충절을 기리는 신사가 건립되었다.
  • 1389년 사망 - 드미트리 돈스코이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킵차크 칸국 군대를 쿨리코보 전투에서 격파하여 '돈스코이' 칭호를 얻고 모스크바 크렘린을 건설했으며 몽골의 침입에 맞서 싸운 모스크바 대공이자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사후 정교회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1389년 사망 - 무라트 1세
    무라트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서 발칸 반도 정복, 영토 확장, 예니체리 군단 창설 등 제국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으나, 코소보 전투 직후 암살당했다.
  • 서방교회 대분열 - 교황 보니파시오 9세
    교황 보니파시오 9세는 서방 교회 대분열 시대에 1389년부터 1404년까지 재임한 로마 교황으로, 교황령에 대한 세속적 통치권 확립과 재건에 힘썼으나 아비뇽의 대립교황과 대립하고 성직 매매 등으로 비판받았다.
  • 서방교회 대분열 -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는 1378년 서방 교회 대분열 시기에 교황 우르바노 6세의 선출에 반대하는 추기경들에 의해 선출되어 아비뇽을 중심으로 교황청을 운영했으나 재정난을 겪고 1394년 사망했다.
교황 우르바노 6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존칭교황
이름우르바노 6세
직함로마 주교
본명바르톨로메오 프리냐노
교회가톨릭교회
임기 시작1378년 4월 8일
임기 종료1389년 10월 15일
선임자그레고리오 11세
후임자보니파시오 9세
대립 교황클레멘스 7세 (아비뇽)
축성1364년 3월 21일
문장
출생일기원후 1318년경
출생지나폴리 왕국 이트리
사망일1389년 10월 15일
사망지교황령 로마
다른 이름우르바노
이탈리아어 이름Urbano VI
라틴어 이름Urbanus VI
이미지
우르바노 6세 묘비
우르바노 6세의 묘비에 있는 모습

2. 생애 초기

이트리에서 태어난 바르톨로메오 프리냐노(Bartolomeo Prignano)는 독실한 수도사이자 교회법학자였으며, 아비뇽에서 교육을 받았다.[1] 1364년 3월 21일, 나폴리 왕국 아체렌차의 대주교로 서품되었다.[1] 이후 1377년에는 바리의 대주교가 되었다.[30][1]

프리냐노는 부교황청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소박하고 검소하며, 사업 감각이 뛰어나다는 평판을 얻었다. 또한 학문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당시 만연했던 족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알려져 있다.[2] 그러나 교황이 된 후에는 네 명의 조카추기경에 임명하고, 그 중 한 명을 나폴리의 통치자로 세우려 했다.[3] 루트비히 폰 파스토르는 그의 성격에 대해 "그리스도교적인 온화함과 자비심이 부족했다. 그는 본래 독단적이고 극도로 폭력적이며 경솔했다."라고 평가했다.[30][3]

3. 교황 선출 (1378년)

1378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선종하자 로마에서는 로마 출신 교황을 선출하라는 시위가 일어났다.[4] 교황좌가 다시 아비뇽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압박을 받은 추기경들은 1378년 4월 8일 나폴리 왕국 출신의 교회법학자 프리냐노를 우르바노 6세로 선출했다.[4] 그는 추기경이 아니었기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4]

프리냐노는 아비뇽에서 교육받았고, 1364년 아체렌차 대주교, 1377년 바리 대주교를 지냈다.[1] 부교황청장관으로 재직하며 검소함과 사업 감각으로 명성을 얻었으나,[2] 교황이 된 후에는 네 명의 조카를 추기경에 임명하고 그중 한 명을 나폴리 통치자로 세우려 했다.

우르바노 6세는 성급한 교회 개혁 선언과 고압적인 태도로 서방교회 분열을 야기했다. 루트비히 폰 파스토르는 그를 "그리스도교적인 온화함과 자비심이 부족하고 독단적이며 극도로 폭력적이고 경솔한 인물"로 평가했다.[3] 프랑스 추기경들은 1378년 9월 아나니에 모여 우르바노 6세의 선출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클레멘스 7세를 대립교황으로 선출했다.

3. 1. 선출 배경과 과정

1378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사망하자, 로마에서는 로마 출신 교황을 선출하라는 시위가 일어났다.[4]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추기경들은 서둘러 회의를 소집했고, 엄청난 압력 속에서 1378년 4월 8일, 바르톨로메오 프리냐노를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했다.[4] 그는 추기경이 아니었기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4]

프리냐노는 나폴리 왕국 이트리 출신으로, 독실한 수도사이자 교회법학자였다.[1] 아비뇽에서 교육받았고, 1364년 아체렌차 대주교로 서임되었으며, 1377년에는 바리 대주교가 되었다.[1] 그는 부교황청장관으로 재직하며 단순함과 검소함, 사업 감각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학문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2]

교황 선출 직후, 대부분의 추기경들은 로마를 떠났다.[4] 로마 시민들은 로마 출신은 아니지만, 같은 이탈리아 사람인 그를 받아들였다.

새 교황의 정통성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5][6] 프랑스파는 곧 새 교황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5] 우르바노 6세는 추기경들이 기대했던 온화한 인물이 아니었고, 오만하고 성난 사람으로 여겨졌다.[7] 니하임의 디트리히는 교황으로 즉위한 후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는 추기경들의 견해를 기록했으며,[7] 장 프루아사르, 레오나르도 브루니, 톰마소 데 아체르노,[8] 안토니노 피에로치 등도 비슷한 글을 남겼다.[9]

3. 2. 선출의 의미와 논란

1378년 콘클라베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후임으로 우르바노 6세가 선출된 것은 여러 의미와 논란을 낳았다.

우르바노 6세의 선출 배경에는 로마 시민들의 압력이 크게 작용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선종하자 로마에서는 시위가 일어나 콘클라베 장소를 포위하고 로마 출신 교황을 선출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4] 교황좌가 다시 아비뇽으로 돌아가는 것을 우려한 추기경들은 서둘러 1378년 4월 8일, 나폴리 왕국 출신의 프리냐노를 우르바노 6세로 선출했다. 그는 추기경이 아니었기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로마 시민들은 그가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점에 만족했다.[4]

그러나 우르바노 6세의 선출은 프랑스 추기경들의 반발을 샀다. 프랑스파 추기경들은 새 교황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31][32] 우르바노 6세는 온화하고 분별력이 부족했으며, 고압적인 태도로 추기경들을 모욕했다. 니하임의 디트리히는 추기경들이 교황의 거만함에 대해 말했다고 기록했고,[7] 프루아사르, 레오나르도 아레티노, 톰마소 데 아체르노,[8] 피렌체의 안토니누스도 비슷한 견해를 남겼다.[9]

결국 프랑스 추기경들은 1378년 9월 아나니에 모여 우르바노 6세의 선출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클레멘스 7세를 새로운 교황(대립교황)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서방교회 분열이 시작되었고, 프랑스 왕국, 나폴리 왕국,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포르투갈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등이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다. 반면 우르바노 6세는 신성 로마 제국, 잉글랜드 왕국, 헝가리 왕국 등의 지지를 받았다.

서방교회 분열 당시 아비뇽(빨강)과 로마(파랑)의 지지 세력 분포

4. 통치의 위기: 서방교회 대분열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1378년 3월 27일에 서거한 후, 로마 시민들은 로마 출신 교황 선출을 요구하며 선거를 방해했다. 추기경들은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1378년 4월 8일, 프리냐노를 만장일치로 교황 우르바노 6세로 선출했다.[4] 그러나 우르바노 6세는 즉위 직후 추기경들에게 과격한 설교를 하고, 뇌물과 선물 없는 교황청 운영, 추기경들의 연금 수령 금지, 사치스러운 생활 비판 등을 주장하며, 아비뇽 복귀 불가 선언으로 프랑스 왕 샤를 5세와도 사이가 멀어졌다.

이에 반발한 프랑스 추기경들은 즉위 5개월 후 아나니에서 모임을 갖고 우르바노 6세를 초대했으나, 우르바노 6세는 자신이 가면 구금되거나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참석하지 않았다. 교황이 불참하자 프랑스 추기경들은 8월 9일에 그의 선출이 무효라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사람을 뽑으라는 폭도들의 강압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어서 8월 20일에는 이탈리아 추기경들에게 교황좌가 사도좌 공석 상태라고 주장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리고 폰디에서 프랑스 왕의 지원을 받아[36] 9월 20일 제네바의 로베르를 교황으로 선출한다고 발표했다. 힐 알바레스 카리요 데 알보르노스의 뒤를 이어 교황군 지휘관으로 임명된 로베르는 호전적인 성격의 성직자로 스스로 클레멘스 7세라고 칭했다. 이로써 서구 대이교가 시작되어, 1417년까지 가톨릭 교회가 분열되었다.

우르바노 6세는 프랑스의 대립교황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모욕적인 표현을 듣고 파문당했다. 시에나의 가타리나는 프랑스 추기경들을 “사람의 탈을 쓴 악마들”이라고 비난하며 우르바노 6세를 지지했다. 콜루치오 살루타티는 이 분열의 정치적 성격을 “모두 눈이 멀었다”고 규정하면서, 프랑스 추기경들이 “진짜 교황을 찾은 것이 아니라 단지 갈리아의 교황을 택한 것 뿐”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37] 조반니 다 레냐노는 우르바노 6세의 선출을 옹호하는 《교회의 비탄》(De fletu ecclesiæ)을 저술하여 교황의 정통성에 대한 논쟁에 불을 붙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르바노 6세는 하루 만에 26명의 추기경을 서임하고, 교회 재산을 양도하여 전쟁 자금을 모았다. 1379년 말엽 클레멘스 7세는 아비뇽으로 갔고, 앙주 공작 루이는 교황령 일부를 합쳐 아드리아 왕국을 만들 야심을 품었다.[39]

우르바노 6세의 교황 인장(Bulla)

4. 1. 개혁 시도와 추기경들과의 갈등

우르바노 6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추기경들에게 과격한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교황청 운영에 있어 사례금과 뇌물을 주고받는 행위를 금지하고, 추기경들이 군주나 평신도로부터 연금을 받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추기경들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과도한 성직록 보유를 비난했다. 이러한 교황의 발언에 일부 추기경들은 그가 권력에 도취되어 이성을 잃었다며 분개했다.[36] 우르바노 6세는 프랑스 왕 샤를 5세에게 교황이 다시는 아비뇽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여 샤를 5세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이에 프랑스 추기경들은 크게 분노하여, 교황 선출 5개월 후 아나니에서 모임을 갖고 우르바노 6세를 초대했다. 그러나 우르바노 6세는 자신이 가면 구금되거나 살해당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참석하지 않았다. 교황이 불참하자 프랑스 추기경들은 1378년 8월 9일에 그의 선출이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들은 폭도들의 강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인을 교황으로 선출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8월 20일에는 이탈리아 추기경들에게 교황좌가 공석(사도좌 공석)이라고 주장하는 서신을 보냈다.[36]

이후 프랑스 추기경들은 폰디에서 프랑스 왕의 지원을 받아[36] 9월 20일 제네바의 로베르를 교황으로 선출한다고 발표했다. 힐 알바레스 카리요 데 알보르노스의 뒤를 이어 교황군 지휘관으로 임명된 로베르는 호전적인 성격의 성직자로, 스스로 클레멘스 7세라고 칭했다. 이로써 서구 대이교가 시작되어 1417년까지 가톨릭 교회가 분열되었다.

우르바노 6세는 프랑스의 대립교황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모욕적인 표현을 듣고 파문을 선고받았다. 시에나의 가타리나는 프랑스 추기경들을 “사람의 탈을 쓴 악마들”이라고 비난하며 우르바노 6세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콜루치오 살루타티는 이 분열의 정치적 성격을 “모두 눈이 멀었다”고 규정하면서, 프랑스 추기경들이 “진짜 교황을 찾은 것이 아니라 단지 갈리아의 교황을 택한 것 뿐”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37] 조반니 다 레냐노는 우르바노 6세의 선출을 옹호하는 《교회의 비탄》(De fletu ecclesiæ)을 저술하여 교황의 정통성에 대한 논쟁에 불을 붙였다. 이 책은 1378년에서 1380년까지 개정되었으며, 우르바노 6세는 이 책을 대량으로 배포했다. 그러자 프랑스 측에서는 이 책에 대한 수많은 반박글을 발표했다.[38]

이러한 공방이 계속되던 중 우르바노 6세는 하루 만에 26명의 추기경을 서임하고, 교회 재산을 임의로 양도하여 전쟁 자금을 모았다. 1379년 말엽에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는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겼고, 앙주 공작 루이는 교황령인 에밀리아와 로마냐를 합쳐 아드리아 왕국을 세우려는 야심을 품었다.[39]

4. 2.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의 등장

교황 선거 5개월 후, 프랑스 추기경들은 아나니에서 모임을 갖고 우르바노 6세를 초대했으나, 우르바노 6세는 자신이 가면 구금되거나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참석하지 않았다. 교황이 불참하자 프랑스 추기경들은 1378년 8월 9일에 그의 선출이 무효라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들은 이탈리아인을 뽑으라는 폭도들의 강압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36] 이어서 8월 20일에는 이탈리아 추기경들에게 교황좌가 사도좌 공석 상태라고 주장하는 서신을 보냈다.

9월 20일, 폰디에서 프랑스 왕의 지원을 받은[36] 프랑스 추기경들은 제네바의 로베르를 교황으로 선출한다고 발표했다. 힐 알바레스 카리요 데 알보르노스의 뒤를 이어 교황군 지휘관으로 임명된 로베르는 호전적인 성격의 성직자로 스스로 교황 클레멘스 7세라고 칭했다. 이로써 서구 대이교가 시작되어, 1417년까지 가톨릭 세계가 분열되었다.

우르바노 6세는 프랑스의 대립교황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모멸적인 표현을 듣고 파문을 선고받았다. 그러자 시에나의 가타리나는 프랑스 추기경들을 “사람의 탈을 쓴 악마들”이라고 부르면서, 우르바노 6세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37] 콜루치오 살루타티는 이 분열의 정치적 성격을 “모두 눈이 멀었다”고 규정하면서, 프랑스 추기경들을 가리켜 “그들은 진짜 교황을 찾은 것이 아니라 단지 갈리아의 교황을 택한 것 뿐”이라며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37]

4. 3. 서방교회 대분열의 전개와 영향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1378년 3월 27일에 서거한 후, 로마 시민들은 로마 출신 교황 선출을 요구하며 선거를 방해했다. 추기경들은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1378년 4월 8일, 프리냐노를 만장일치로 교황 우르바노 6세로 선출했다.[4] 그러나 우르바노 6세는 즉위 직후 추기경들에게 과격한 설교를 하고, 뇌물과 선물 없는 교황청 운영, 추기경들의 연금 수령 금지, 사치스러운 생활 비판 등을 주장하며, 아비뇽 복귀 불가 선언으로 프랑스 왕 샤를 5세와도 사이가 멀어졌다.

이에 반발한 프랑스 추기경들은 즉위 5개월 후 아나니에서 모임을 갖고, 우르바노 6세의 선출이 무효라고 선언했다. 8월 20일에는 이탈리아 추기경들에게 교황좌 공석을 주장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후 폰디에서 프랑스 왕의 지원을 받은[36] 프랑스 추기경들은 9월 20일 제네바의 로베르를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선출했다. 이로써 서구 대이교가 시작되어 1417년까지 가톨릭 세계가 분열되었다.

우르바노 6세는 클레멘스 7세로부터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모욕적인 표현을 듣고 파문당했다. 시에나의 가타리나는 프랑스 추기경들을 “사람의 탈을 쓴 악마들”이라고 비난하며 우르바노 6세를 지지했다. 콜루치오 살루타티는 이 분열을 “모두 눈이 멀었다”고 규정하며, 프랑스 추기경들이 “진짜 교황을 찾은 것이 아니라 단지 갈리아의 교황을 택한 것 뿐”이라고 비판했다.[37] 조반니 다 레냐노는 《교회의 비탄》(De fletu ecclesiæ)을 통해 우르바노 6세의 선출을 옹호했고, 우르바노 6세는 이 책을 대량 배포했다. 이에 프랑스파 측에서 수많은 반박글을 냈다.[38]

이러한 상황에서 우르바노 6세는 단 하루 만에 26명의 추기경을 서임하고, 교회 재산을 양도하여 전쟁 자금을 모았다. 1379년 말엽 클레멘스 7세는 아비뇽으로 갔고, 앙주 공작 루이는 교황령 일부를 합쳐 아드리아 왕국을 만들 야심을 품었다.[39]

5. 8성인 전쟁과 나폴리 왕국과의 갈등

8성인 전쟁으로 피렌체의 자원이 고갈되고,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 의해 성무금지령까지 내려지자 피렌체는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교회 재산을 매각해야 했다. 1378년 7월 18일 티볼리에서 우르바노 6세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교황의 봉신으로 복귀하는 조약을 체결하여 성무 금지령이 해제되었다.[40]

한편, 나폴리 왕국의 여왕 조반나 1세는 우르바노 6세를 버리고 관계를 청산했다. 우르바노 6세는 이에 맞서 조반나 1세를 파문하고 십자군 원정을 선포했다. 1381년 조반나 1세의 사촌 카를로 3세가 나폴리 왕위에 올랐고, 조반나 1세는 1382년 카를로 3세에 의해 암살당했다. 카를로 3세는 우르바노 6세에게 영토를 넘기기로 약속했지만, 앙주의 루이 1세 등의 침략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40]

로마에서 산탄젤로 성이 함락되자 우르바노 6세는 로마를 떠났고, 나폴리에서 카를로 3세를 압박하려 했으나 오히려 포로 신세가 되었다. 이후 카를로 3세와 우르바노 6세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우르바노 6세는 노체라에 포위되어 매일 파문을 선고받는 상황에 처했다.[41]

6개월 후, 우르바노 6세는 나폴리의 남작들과 제노바 총독 안토니오토 아도르노의 도움으로 제노바로 탈출했다. 그러나 함께 갇혔던 추기경들 중 일부가 교황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자, 우르바노 6세는 이들을 체포, 고문, 처형했다.[41]

1386년 카를로 3세가 사망한 후, 우르바노 6세는 루카로 거처를 옮겼다. 나폴리 왕국은 라디슬라오 1세와 앙주의 루이 2세 지지 파벌 간의 다툼으로 혼란스러웠고, 우르바노 6세는 이 상황을 틈타 조카 프란체스코 모리코티 프리냐니를 위해 나폴리를 차지하려 했다.

5. 1. 8성인 전쟁의 배경과 전개

8성인 전쟁은 민간인들에게 전례 없는 잔혹함을 야기하며 피렌체의 자원을 소모시켰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 의해 성무금지령이 내려진 피렌체는 전쟁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모든 성당을 개방해 교회 재산 10만 플로린을 매매하였다. 1377년 8월 볼로냐는 교회에 항복을 선언했으며, 피렌체는 1378년 7월 18일 티볼리에서 우르바노 6세에게 교회 재산 배상금으로 20만 플로린을 지불하고 교황의 봉신으로 복귀한다는 조약에 서명해 성무 금지령이 해제되었다.[40]

우르바노 6세의 옛 주인이었던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는 옛 나폴리 대교구장 주교가 자신의 봉건 영주로 임명되었다는 이유로 1378년 늦여름에 교황과의 우호 관계를 청산했다. 그러자 우르바노 6세는 그녀를 적대시하여 파문하고 십자군 원정을 선포했다. 곧 조반나의 사촌이자 적수인 카를로 3세가 1381년 6월 1일 나폴리 왕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조반나는 왕위에서 쫓겨나 1382년 카를로에 의해 암살당했다. 카를로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도록 도와준 것에 보답하기 위해 카푸아, 카세르타, 아베르사, 노체라, 아말피를 교황의 조카에게 넘기기로 약속하였다.[40]

카를로가 나폴리에 자리를 잡자마자 앙주의 루이와 사보이의 아메데오 6세가 그의 왕국을 침범했다. 이에 압박을 느낀 그는 당초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로마에서는 산탄젤로 성이 포위되어 장악되자 우르바노 6세는 어쩔 수 없이 로마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1383년 가을에 그는 자신이 직접 나폴리에 가서 카를로를 압박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나폴리에 간 교황은 카를로가 별다른 실권 없이 사실상 무늬만 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384년 9월 20일 루이가 사망하면서 양측 간에 잠시 화해가 이루어졌다. 카를로는 자유의 몸이 되자 자신의 봉건 영주인 우르바노 6세의 권위에 저항하면서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우르바노 6세는 카를로에 의해 노체라에 포위되어 매일 공격을 받았는데, 그는 장엄한 예식을 통해 그들에게 파문을 선고하였다.

6개월 동안 포위 공격을 받은 후, 루이와 라이몬도 델 발조 오르시니, 톰마소 디 산세베리노 등과 함께 했던 나폴리의 남작 두 명에게 구출된 우르바노 6세는 제노바 총독 안토니오토 아도르노가 보낸 갤리선 6척을 타고 제노바로 무사히 도주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노체라에 갇혀 고생했던 추기경들 가운데 몇몇은 교황을 제거하고 자신들 중의 한 명을 새 교황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음모가 발각되면서 우르바노 6세는 이들을 모두 체포해 고문하고 처형하였다.[41]

우르바노 6세에 대한 지지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들과 포르투갈, 잉글랜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와 독일의 제후들과 아빠스 대부분으로 줄어들었다.

1386년 2월 24일 나폴리 국왕 카를로 3세가 사망하자 우르바노 6세는 같은 해 12월에 루카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카를로의 아들 라디슬라오 1세를 지지하는 파벌과 앙주의 루이 2세를 지지하는 파벌 사이에 나폴리 왕국을 놓고 서로 다투게 되었다. 우르바노 6세는 나폴리 왕국이 이처럼 무정부 상태에 빠진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조카 프란체스코 모리코티 프리냐니를 위해 나폴리를 손에 넣으려고 애썼다. 그동안 그는 비테르보페루자를 다시 장악하였다.

5. 2. 나폴리 왕국과의 관계

우르바노 6세의 옛 후원자였던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는 1378년 늦여름에 그를 버렸는데,[15] 부분적으로는 그녀의 전 대주교가 그녀의 봉건적 종주권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르바노 6세는 더 큰 문제들을 간과하고 일련의 실수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강력한 이웃 조반나 1세에게 등을 돌려 그녀를 클레멘스 7세의 완고한 당파로 파문하고 그녀에 대한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도록 허락했다. 곧 그녀의 적이자 사촌인 카를로 3세가 1381년 6월 1일 나폴리 왕국의 왕이 되었고 우르바노 6세에 의해 대관식을 치렀다. 조반나 1세의 권위는 박탈되었고 카를로 3세는 1382년 그녀를 살해했다.[40] 카를로 3세는 이러한 호의에 대한 대가로 카푸아, 카세르타, 아베르사, 노체라, 아말피를 교황의 조카에게 넘겨줄 것을 약속해야 했다.[17]

나폴리에 자리를 잡자 카를로 3세는 그의 새로운 왕국이 앙주의 루이와 사보이아의 아메데오 6세에 의해 침략당하는 것을 발견했다. 궁지에 몰린 그는 그의 약속을 저버렸다. 로마에서는 산탄젤로 성이 포위당하고 함락되었고 우르바노 6세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1383년 가을 그는 나폴리로 가서 카를로 3세를 직접 압박할 결심을 했다. 거기서 그는 사실상 포로가 된 자신을 발견했다. 루이의 죽음(1384년 9월 20일) 이후 첫 화해 후, 카를로 3세는 우르바노 6세의 봉건적 권력 주장에 저항할 자유를 얻었고 관계는 악화되었다. 우르바노 6세는 노체라에 갇혔고, 그 성벽에서 매일 포위자들에게 파문을 종, 책, 촛불을 사용하여 내렸다. 그의 머리에는 현상금이 걸렸다.

“교황 우르바누스 6세는 노체라 성에 포위되었다”, 조반니 세르캄비의 ''크로니체''에서


루이 편에 섰던 두 나폴리 백작 라이몬델로 오르시니와 톰마소 디 산세베리노에 의해 구출된 후, 6개월간의 포위 끝에 그는 제노바의 총독 안토니오토 아도르노가 보낸 6척의 갤리선을 타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와 함께 노체라에 갇혔던 추기경들 중 몇몇은 교황이 무능력과 완고함 때문에 추기경 중 한 명의 관리하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저항하기로 결심했다. 우르바노 6세는 그들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처형했다.[41]

1386년 2월 24일 카를로 3세의 죽음 이후, 우르바노 6세는 같은 해 12월 루카로 이동했다. 나폴리 왕국은 그의 아들 라디슬라오와 앙주의 루이 2세를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서 다투었다. 우르바노 6세는 뒤따른 무정부 상태와 그의 조카 프란체스코 모리코티 프리냐니를 위해 나폴리를 장악하려고 했다.

6. 추기경 숙청과 말년

우르바노 6세는 노체라에 갇혀 자신을 포위한 이들에게 종, 책, 촛불을 사용해 매일같이 파문을 내리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라이몬델로 오르시니와 토마소 디 산세베리노 등의 도움으로 탈출했으나, 자신에게 반기를 든 추기경들을 체포해 고문하고 처형하는 잔혹함을 보였다.[18]

이후 1388년 8월 로마로 돌아와 교황의 권위를 회복하려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는 낙마로 인한 부상이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독살설도 제기되었다.[43] 그는 죽기 전 1390년을 희년으로 선포하고 33년마다 희년을 지키도록 하는 칙서를 내렸다.[42]

6. 1. 추기경 숙청 사건

노체라에 갇힌 우르바노 6세는 성벽에서 매일 종, 책, 촛불을 사용하여 포위자들에게 파문을 내렸다. 그의 머리에는 현상금이 걸렸다.[18]

라이몬델로 오르시니와 토마소 디 산세베리노 등 루이를 지지하던 두 나폴리 백작에 의해 구출된 후, 6개월간의 포위 끝에 제노바의 총독 안토니오토 아돌노가 보낸 6척의 갤리선을 타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와 함께 노체라에 갇혔던 추기경들 중 몇몇은 교황의 무능력과 완고함 때문에 추기경 중 한 명의 관리하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저항했다. 우르바노 6세는 그들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처형했는데, 연대기 작가 에질디오 다 비테르보는 이를 "수 세기 동안 들어보지 못한 범죄"라고 말했다.[18]

6. 2. 말년의 행적과 죽음

1388년 8월, 우르바노 6세는 수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페루자를 떠나 로마로 향했다. 그는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1390년에 희년을 선포하고, 33년마다 희년을 지내도록 칙서를 내렸다. 이는 교황 클레멘스 6세가 희년을 지낸 지 38년 만의 일이었다.[42]

로마로 가는 도중, 우르바노 6세는 나르니에서 타고 있던 노새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다. 10월 초 로마에 도착한 그는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반데레시 정부를 몰아내고 교황의 권위를 회복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는데, 낙마했을 때의 부상이 사망 원인으로 보이지만, 독살설도 제기되었다.[43]

성 베드로 대성전이 재건축 중이었기 때문에 우르바노 6세의 시신은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으며, 그의 석관은 말들에게 물을 주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뒤늦게 교회 역사학자 자코모 그리말디가 이 심각성을 깨닫고 석관을 수습하여 우르바노 6세의 시신은 정중히 안장될 수 있었다.[44]

우르바노 6세의 뒤를 이어 교황 보니파시오 9세가 선출되었다.

우르바노 6세의 묘

7. 유산과 평가



우르바노 6세는 1388년 8월, 수천 명의 군대와 함께 페루자에서 로마로 이동했다. 자금 마련을 위해 1390년에 희년을 선포했는데, 이는 이전 희년(클레멘스 6세 치하) 이후 불과 38년 만이었다.[20] 행군 중 나르니에서 짐승에서 떨어져, 10월 초 로마에서 회복해야 했다. 로마에서 '반데레시'의 공동 통치를 축출하고 교황권을 회복했으나, 얼마 후 사망했다. 추락으로 인한 부상이 사망 원인일 가능성이 크지만, 독살설도 제기되었다.[1] 그의 뒤를 이은 교황은 보니파시오 9세였다.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 당시 우르바노 6세의 유해는 석관이 말의 물통으로 쓰이게 될 위기에 처해 파괴될 뻔했다. 교회 사학자 자코모 그리말디가 그 중요성을 깨닫고 보존을 명령하여 석관은 구제되었다.[21]

우르바노 6세는 교회 통치에서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고, 다음 성년을 1390년으로 정한 것이 유일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보니파시오 9세가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었지만, 교회 대분열은 장기화되어 해결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카를로 3세와 루이 1세 안주의 아들들인 라디슬라오 1세와 루이 2세 안주는 나폴리 왕위 쟁탈전을 계속했고, 교회 대분열에 개입하여 혼란을 가중시켰다.[29]

7. 1. 긍정적 평가 (일부)

우르바노 6세는 경건하고 실무에 능한 인물이었다고 평가받는다.[22][23] 그는 아비뇽 교황청 상서원에서 근무했으며, 1363년 또는 1364년에 아체렌차 주교가 되었다.[22][23] 137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에 의해 바리 대주교와 교황청 상서원 장관에 임명되었다.[22][23]

7. 2. 부정적 평가 (다수)

우르바노 6세는 성급하게 교회의 개혁을 선언하고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온화함과 분별력이 부족했고, 추기경들을 모욕하거나 폭압적이고 거만한 태도를 보여 반발을 샀다. 1378년 9월, 프랑스 추기경들은 아나니에 모여 교황 선거가 협박 아래 이루어졌으므로 무효라고 주장하며, 프랑스 왕 샤를 5세의 지원을 얻어 클레멘스 7세를 새로운 교황(대립교황)으로 선출했다.[24]

프랑스, 나폴리,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 스코틀랜드가 클레멘스 7세를 지지하여 교회는 대분열 상황에 이르렀다. 우르바노 6세는 로마를 지키고 클레멘스 7세가 로마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며(클레멘스 7세는 아비뇽으로 물러났다), 반란한 추기경들을 파면하고 새롭게 29명의 추기경을 보충했다(그중 프랑스 추기경은 3명뿐이었다).[25]

우르바노 6세는 1382년 로마 왕 벤체슬라스의 여동생 안나와 잉글랜드 왕 리처드 2세의 결혼을 중재했고, 아비뇽 지지파인 나폴리 여왕 요안나 1세를 암살한 사촌 동생 카를로 3세의 나폴리 왕위를 승인했다. 그러나 카를로 3세와 대립하던 루이 1세 안주는 클레멘스 7세의 지지를 얻어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켰다.[27]

이후 우르바노 6세는 카를로 3세와 불화하여 전쟁을 벌였고, 반대파로 간주한 6명의 추기경을 고문했다. 그는 나폴리에 출진하여 참패하고, 노바라에서 농성하다가 나폴리 군에 포위되어 간신히 로마로 후퇴했다. 1389년 사망했는데, 나폴리 군에 포위되었을 때 넘어져 중상을 입은 것이 사인으로 여겨지지만, 독살설도 나돌고 있다.[27][28]

그는 교회 통치에서 어떤 업적도 남기지 않고 사망했고, 다음 성년을 1390년으로 정한 것이 유일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7. 3. 역사적 의의와 영향

우르바노 6세는 서방 교회의 대분열을 초래한 교황으로, 그의 성급한 개혁 시도와 강압적인 통치는 교회 내 분열을 심화시켰다. 프랑스 추기경들은 그의 선출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선출했고, 이는 1417년까지 이어진 서방 교회의 대분열을 야기했다.

그는 1390년을 희년으로 선포했지만, 이는 이전 희년 이후 불과 38년 만의 일이었다.[20]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교회는 정치적 혼란과 분열을 겪었으며, 나폴리 왕국과의 갈등은 그의 입지를 더욱 약화시켰다.[27][28]

우르바노 6세의 사망 원인은 불분명하며, 낙마로 인한 부상 또는 독살 가능성이 제기되었다.[1] 그의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 과정에서 파괴될 뻔했으나, 교회 사학자 자코모 그리말디에 의해 보존되었다.[21]

그의 사후, 보니파시오 9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지만, 서방 교회의 대분열은 계속되었고, 나폴리 왕위를 둘러싼 분쟁은 교회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29]

참조

[1] 논문
[2] 문서 In a letter to his master, Lodovico Gonzaga of Mantua
[3] 문서 Pastor 122; on the urgency of reforms, see the contemporary letters of Catherine of Siena
[4] 문서 Pastor 118
[5] 문서 Pastor 119f
[6] 서적 The Papacy https://archive.org/[...]
[7] 문서 Pastor 122
[8] 서적 De creatione Urbani VI opusculum
[9] 문서 Drawn together by Alfred von Reumont (ii, 1024), Pastor notes
[10] 서적 The Origins of the Great Schism
[11] 문서 "Quis non-videt vos non-verum Papam quærere, sed solum Pontificem natione Gallicum exoptare" (quoted Pastor 131 note)
[12] 학술지 Chaucer and John of Legnano
[13] 서적 Les Finances Pontificales a L'Epoque Du Grand Schisme D'Occident, 1378–1409
[14] 문서 Pastor 133
[15] 서적 La politica napoletana di Urbano VI Sciascia
[16] 문서 Pastor 136
[17] 웹사이트 Francesco Moricotti Prignano http://www.fiu.edu/~[...]
[18] 문서 "scelus nullo antea sæculo auditum" (Egidio da Viterbo, Historia viginti sæculorum) noted Pastor 137 note
[19] 문서 Richard II of England lost no time in confiscating properties of the French cardinals, and subsequently Richard alone responded to Urban's call for a crusade against Clement in France. (Pastor 134)
[20] 웹사이트 Holy Year of Jubilee http://www.newadvent[...] 2010-01-09
[21] 서적 The Death of The Popes McFarland Publishers
[22] 서적 新カトリック大事典 新カトリック大事典編纂委員会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26] 서적
[27] 서적 新カトリック大事典 新カトリック大事典編纂委員会
[28] 서적
[29] 서적
[30] 문서 Pastor 122
[31] 문서 Pastor 119f
[32] 서적 The Papacy https://books.google[...]
[33] 문서 Pastor 122
[34] 서적 De creatione Urbani VI opusculum
[35] 문서 Drawn together, Alfred von Reumont (ii, 1024), Pastor notes
[36] 서적 The Origins of the Great Schism https://archive.org/[...]
[37] 문서 "Quis non videt vos non verum Papam quærere, sed solum Pontificem natione Gallicum exoptare"
[38] 저널 Chaucer and John of Legnano
[39] 문서 Pastor
[40] 웹사이트 우르바노 6세의 조카 프란체스코 모리코티 프리냐니 http://www.fiu.edu/~[...]
[41] 문서 "scelus nullo antea sæculo auditum"
[42] 웹사이트 Holy Year of Jubilee http://www.newadvent[...] 2010-01-09
[43] 문서 Pope Urban VI
[44] 서적 The Death of The Popes McFarland Publisher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