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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힐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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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힐라리우스는 5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으로, 사르데냐 출신이다. 그는 교황 레오 1세 치하에서 부제로 활동하며 교황청의 권리를 옹호했고, 제2차 에페소스 공의회에 교황 사절로 파견되어 교황의 권위를 옹호했다. 교황 재위 기간 동안 전임 교황의 정책을 계승하여 주교에 대한 교황의 통치권을 강화했으며,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교회의 문제에 개입하여 교황의 권위를 확립하려 했다. 또한 로마에 여러 건축물을 세웠으며, 468년 사망하여 성 라우렌시오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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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힐라리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경칭교황 성인
직함로마 주교
교회가톨릭 교회
재임 시작461년 11월 19일
재임 종료468년 2월 29일
선임자레오 1세
후임자심플리치오
출생지서로마 제국 사르데냐
사망일468년 2월 29일
사망지서로마 제국, 로마
매장지성 라우렌시오 성당 외부
축일11월 17일 (로마 가톨릭)
2월 28일 (동방 정교회)
공경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
교황 힐라리오 (뉘른베르크 연대기)
추가 정보
본명힐라리오

2. 초기 생애와 경력

힐라리오는 라틴어로 ‘명랑하다’, ‘들뜨다’라는 뜻이다. 사르데냐에서 태어났으며[3], 크리스피누스의 아들이었다. 교황 레오 1세 치하에서 수석부제로 봉사하며 로마 교황청의 권리를 위해 맹렬히 싸웠다.

2. 1. 제2차 에페소 공의회 파견

힐라리오는 사르데냐 태생으로 교황 레오 1세 밑에서 수석부제로 봉사하였다. 449년 힐라리오는 ‘강도 공의회’라고도 불리는 제2차 에페소 공의회에 교황의 사절로 파견되었다.[9] 힐라리우스와 푸테올리의 주교 율리우스는 제2차 에페소스 공의회에 교황 사절로 파견되었다. 교황 레오는 공의회에서 읽도록 사절들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수석 공증인은 황제의 서한을 먼저 읽어야 한다고 선언했고, 공의회가 진행됨에 따라 레오의 서한은 결국 전혀 읽히지 않았다. 힐라리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플라비아누스의 단죄에 격렬히 반대하며[5], 라틴어로 "Contradicitur"라는 단어를 외쳐 레오의 이름으로 그 판결을 무효화했다.[4]

에우티케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집된 공의회에서 그는 교황의 권위를 강력하게 옹호하였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플라비아노 대주교를 지지하고 나섰다. 레오 1세가 풀케리아 황후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제2차 에페소 공의회가 폐막한 후에 힐라리오가 공의회 결과를 교황과 풀케리아 황후에게 각각 전하기 위해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가려고 했지만,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쿠루스 주교의 방해로 그가 보낸 병사들에 의해 체포될 뻔 하였으나 가까스로 빠져 나왔다고 한다.[9]

이 일로 그는 공의회를 주재한 알렉산드리아의 교황 디오스코루스 1세의 심기를 건드렸다. 플라비아누스는 449년 8월 11일, 디오스코루스의 추종자들의 폭행으로 인한 부상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레오 1세의 서한에 수집된 풀케리아 황후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힐라리우스는 공의회 후 교황의 서한을 전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했지만, 로마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는 것을 막으려 한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코루스로 인해, 그는 교황에게 공의회 결과를 알리기 위해 탈출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5] 플라비아누스와 도릴라에움의 에우세비우스는 교황에게 상소했고, 그들의 서한은 힐라리우스에 의해 로마로 가져가졌을 것이다.[4]

3. 교황 재위 기간

힐라리오는 사르데냐 출신으로 교황 레오 1세 밑에서 수석부제로 봉사하였다. 449년 제2차 에페소 공의회에 교황 사절로 파견되어 교황의 권위를 옹호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플라비아노 대주교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쿠루스 주교의 방해로 공의회 결과를 교황에게 제대로 전달하기 어려웠으나, 가까스로 탈출하여 로마로 돌아왔다.[9]

교황이 된 힐라리오는 전임 교황 레오 1세의 정책을 계승하여 주교들에 대한 교황의 통치권을 강화하였다. 그는 교회 내 성직자들의 규율 강화에 힘썼으며, 갈리아히스파니아 교회에 대한 교황의 권위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또한 황제 안테미우스의 이교 관용 칙령에 반대하며 성령적대론파를 옹호하는 황제의 측근을 비판했다.[9]

3. 1. 갈리아 교회와의 관계

힐라리오는 전임 교황 레오 1세의 정책을 계승하여 주교들에 대한 교황의 통치권을 강화했다. 특히 갈리아 지역 교회에 대한 교황의 권위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9]

전(前) 대부제 헤르메스가 교황 레오 1세의 승인 없이 나르본의 주교로 착좌하자, 힐라리오는 462년 시노드를 소집하여 헤르메스의 주교품은 승인하되 명의주교로 제한하였다.[9] 또한, 교황 조시모 시대처럼 아를에 갈리아 지역 교회를 총괄하는 교황 총대리구를 세우려 했다. 이에 따라 갈리아 지역 교회는 매년 아를의 주교에 의해 시노드가 소집되었지만, 중대한 사안은 로마 교황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아를 주교의 승인 없이는 주교가 자신의 교구를 떠날 수 없었으며, 주교 수품 후보자들은 아를 주교의 관할권을 인정한 후에야 주교로 수품될 수 있었다. 교회 재산은 시노드의 허락 없이는 양도할 수 없었다.[9]

그러나 463년 비엔의 주교 마메르토가 아를 교구 소속인 디에의 새 주교 성성을 집전하면서 교구 간 분쟁이 발생했다. 힐라리오는 아를의 레온티우스를 교황 대리로 임명하고 갈리아 주교들을 소집해 시노드를 열게 하였다. 464년 2월 25일 소집된 시노드에서 마메르토 주교에게 경고가 내려졌고, 디에의 새 주교 성성은 인정되었으며, 아를 주교의 특권은 유지되었다. 갈리아의 주교들은 각자 자신의 권한을 지키고, 아를 주교 주재 하에 1년에 한 차례씩 시노드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3. 2. 히스파니아 교회와의 관계

힐라리오는 5세기에 교황권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있었던 히스파니아 교회에 대해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칼라오라의 주교 실바누스가 주교 서임 과정에서 교회법을 위반하여 문제가 되자, 타라고나의 수좌주교 아스카니우스가 교황 힐라리오에게 상소문을 올렸다.[9] 힐라리오는 수좌주교의 상소를 인정하여 실바누스에게 그의 처신과 관련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것을 촉구하였다.

얼마 후, 히스파니아 교회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여 로마에 보고되었다. 바르셀로나의 주교 눈디나리우스는 자신이 사망하기 전에 자신의 교구장직을 이를 후임자로 다른 교구의 주교였던 이레네오가 되기를 바란다는 유지를 남겼다. 타라고나 시노드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레네오를 바르셀로나의 새 주교로 인정하기로 결의하고, 교황에게 승인을 요청하였다. 이를 승인한 465년 11월 19일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서 소집된 로마 시노드는 당대 기록이 그대로 남아 보존되어 있는 가장 오래된 로마 시노드이다.[9] 이 시노드에서 힐라리오는 이레네우스 주교가 바르셀로나 교구를 떠나 이전 교구로 돌아가고, 스페인 주교들은 실바누스의 행위를 용서하도록 지시했다.[7]

3. 3. 이교에 대한 반대

힐라리오는 새 황제 안테미우스가 467년에 발표한, 이교에 대해 관대한 조치를 담은 칙령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9] 특히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는 성령적대론파 (마케도니아 학파)에 대한 황제의 호의는 그가 가장 총애하던 필로테우스와 교황 젤라시오 1세가 주고받은 서신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황제가 성 베드로 대성전을 방문한 날, 힐라리오는 황제에게 그동안 공공연하게 한 행동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였으며, 성 베드로의 무덤 앞에서 로마에서 이교주의자들이 회합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9]

3. 4. 건축 사업

힐라리오는 로마에 몇몇 성당과 기타 건물을 세우도록 하였다.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 부속 세례당의 두 기도실은 각각 성 요한 사도와 세례자 요한을 기리며 봉헌되었는데, 이는 과거에 그가 제2차 에페소 공의회에서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여겨진다.[9] 그는 세례당 안에 성십자가 경당도 세웠으며, 수도원들과 공중목욕탕 두 곳도 세웠다.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성당 인근에는 도서관들을 세우도록 하였다.[9]

4. 사망과 유산

힐라리오는 468년 2월 29일에 사망했으며, 성 라우렌시오 대성당에 안장되었다.[9] 그의 축일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11월 17일에[5], 동방 정교회에서는 2월 28일에 기념된다.[8]

교황 연대표》에 따르면, 힐라리오는 로마에 여러 성당과 기타 건물을 세우도록 하였다.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 부속 세례당의 두 기도실은 각각 성 요한 사도와 세례자 요한을 기리기 위해 봉헌되었는데, 이는 그가 제2차 에페소 공의회에서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그는 세례당 안에 성십자가 경당, 수도원, 공중목욕탕 두 곳을 세웠으며,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성당 인근에 도서관을 건립하도록 하였다.

힐라리오는 생전에 신경근병증으로 자주 고생했다고 전해진다.

참조

[1] 서적 Butler's Lives of the Saints: February A&C Black 1995
[2] 웹사이트 CATHOLIC ENCYCLOPEDIA: Pope Saint Hilarus https://www.newadven[...]
[3] 웹사이트 "Hilarius", Pontiffs, The Holy See https://www.vatican.[...]
[4] 웹사이트 Dioscurus http://www.newadvent[...] The Catholic Encyclopedia 1909-03-31
[5] 웹사이트 Pope Saint Hilarus http://www.newadvent[...] 2019-03-31
[6] 웹사이트 "Pope Hilarius". New Catholic Dictionary https://catholicsain[...] 2016-05-11
[7] 웹사이트 Barmby, J., "Hilarius, bp. of Rome", A Dictionary of Early Christian Biography http://www.ccel.org/[...] John Murray and Co. 1911
[8] 웹사이트 The Holy Orthodox Popes of Rome http://orthodoxengla[...] 2024-08-15
[9] 웹사이트 Pope St. Hilarus http://en.wikisource[...] Catholic Encyclopedia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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