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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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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로, 사르데냐에서 태어나 토리노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는 이탈리아 사회당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고, 1921년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에 기여했다. 무솔리니 정권 하에서 체포되어 옥중에서 헤게모니 이론 등을 담은 《옥중수고》를 저술했으며, 1937년 뇌일혈로 사망했다. 그람시는 문화적 헤게모니, 유기적 지식인, 진지전과 기동전 등 다양한 개념을 제시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 구조와 변혁 전략을 분석했다. 그의 사상은 좌파, 문화 연구, 비판 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 사회에도 민주화 운동, 시민사회 운동 등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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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16년의 그람시
1916년의 그람시
본명안토니오 프란체스코 그람시
출생1891년 1월 22일
출생지이탈리아 왕국 알레스, 사르데냐
사망1937년 4월 27일 (46세)
사망지로마, 이탈리아
서명
학문적 배경
모교토리노 대학교
주요 저서《옥중수고》
학파서양 철학
서구 마르크스주의
신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적 인본주의
주요 관심사정치
경제학
이데올로기
문화
주요 사상문화적 헤게모니
포드주의로서의 미국주의
헤게모니 집단으로서의 부르주아지
유기적 위기
소극적 혁명
서발턴
자본주의 권력에 도전하는 대항 헤게모니 구축
조음
진지전
전통적 지식인과 유기적 지식인의 구별
정치 경력
소속 정당PSI (1913–1921)
PCd'I (1921–1937)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장재임 기간: 1924년 8월 14일 – 1926년 11월 8일
이전: 아마데오 보르디가
이후: 팔미로 톨리아티
하원 의원재임 기간: 1924년 5월 24일 – 1926년 11월 9일
선거구: 베네치아

2. 생애

사르데냐 섬의 아레스 출신으로, 어린 시절 아버지가 투옥되고 자신은 사고로 신체 장애를 갖게 되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911년 장학금을 받아 토리노 대학교에 입학하여 톨리아티 등과 교류했다.

1913년 이탈리아 사회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활동을 시작했고, 대학을 중퇴한 뒤 사회당 기관지 『아반티 !』 등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19년에는 동료들과 주간지 「오르디네 누오보」(새로운 질서)를 창간하여 토리노의 공장 평의회 운동과 노동 운동을 이끌었다.

1921년 이탈리아 공산당(PCI)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고, 1922년부터 1923년까지 당 대표로 모스크바에 체류하며 코민테른 활동을 하고 율리아 슈흐트와 결혼했다.

파시스트 정권의 체포 영장 발부로 귀국이 어려워졌으나, 1924년 하원 의원으로 선출된 후 불체포 특권을 이용해 귀국했다.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장으로서 무솔리니 정권과 대립했다.

1926년 파시스트 정권에 체포되어 20년 4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옥중에서도 친구 피에로 스라파 등의 도움으로 집필 활동을 계속하여 30권에 달하는 노트(훗날 '옥중 수고')를 남겼으며[48], 헤게모니론 등 주요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과 학대로 건강이 악화되어 1933년 말부터 입원 치료를 받았고, 1937년 4월 석방 직후 뇌일혈로 사망했다[49].

2. 1. 유년 시절

1891년 1월 22일 이탈리아 사르데냐 섬의 알레스에서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4] 그의 아버지는 라치오주 가에타 출신의 하급 관리였고, 어머니는 사르데냐인 지주 가문 출신이었다.[5][11] 아버지 가계는 캄파니아주, 칼라브리아주의 유복한 집안과 알바니아계 이탈리아인의 후손으로,[5][6] 그람시 자신은 아버지 가족이 1821년경 알바니아를 떠났다고 믿었다.[7][8][9] 성씨 '그람시'는 알바니아의 마을 그람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10] 할아버지는 부르봉 왕가의 헌병대 대령이었으며, 아버지는 본래 변호사를 지망했던 지식인이었다. 어머니 역시 보카치오의 글을 읽을 정도로 지적 소양을 갖춘 여성이었다.

1898년, 아버지가 횡령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되면서[50] 가족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아버지의 투옥은 실제로는 지방 유지들과의 정치적 견해 차이 때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50] 이로 인해 어머니는 1904년 아버지가 석방될 때까지 삯바느질과 텃밭 농사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어린 그람시 역시 학업을 중단하고 여러 임시직에서 일하며 하루 열 시간 이상 노동하는 등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1905년부터 1907년까지 다녔던 산투 루수르주의 옛 카르타-멜로니 김나지움


4살 때 사고로[51] 척추에 장애를 갖게 되어 평생 병약했으며, 성인이 되었을 때 키가 150cm가 되지 않는 심한 곱추였다.[12] 최근에는 이러한 척추 기형이 유모가 떨어뜨린 사고 때문이 아니라, 결핵의 일종인 포트병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13] 몸이 약해 격렬한 놀이는 못했지만, 호기심과 상상력이 풍부하고 의지가 강한 소년이었으며, 친구들과 어울리고 독서와 나들이, 자연 관찰을 즐겼다.

아버지의 석방 후, 그람시는 학업을 재개하여 산투 루수르주에서 중학교 과정을 시작했고, 이후 칼리아리에서 학업을 마쳤다. 칼리아리에서는 사회주의자가 된 형 제나로와 함께 지냈다. 당시 그람시는 사회주의보다는 사르데냐 민족주의와 자치주의에 더 공감했으며,[14] 가난한 사르데냐인 농부와 광부들이 겪는 고통과 본토인들의 부당한 대우에 깊이 공감했다.[15][16] 이러한 경험은 그의 지적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사르데냐의 소외가 산업화된 북부 이탈리아의 특권 때문이라고 인식했으며, 이탈리아 본토 군대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던 사르데냐 민족주의 운동에 점차 기울었다.[17][18]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업에 정진하여 1911년 장학금을 받고 토리노 대학교에 진학했다.

2. 2. 사회주의 입문

그람시가 공부한 토리노 대학교의 총장실


아버지가 석방되어 경제적으로 형편이 나아지자 그람시는 1908년 칼리아리 고등학교에 다시 입학하여 형 젠나로와 함께 살았다. 형 젠나로는 토리노에서 복무 중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동생에게 이탈리아 사회당(PSI)을 선전하는 팸플릿을 보내주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사르디니아는 매우 가난하여, 광부들과 농민들의 민중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으나 군대경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그람시는 자연스럽게 역사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11년 9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람시는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아 지역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토리노 대학교에 입학했다. 토리노는 당시 피아트와 란치아 공장이 들어서며 산업화가 진행 중이었고,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사회적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그람시는 문학, 언어학(마테오 바르톨리 교수에게 배움), 역사, 철학, 법학 등을 공부했으며, 팔미로 톨리아티와 같은 시기에 입학 시험을 치렀다. 그는 토리노의 사회주의 모임에 참여하고 사르데냐 출신 이민자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해 나갔다. 대학 시절 안토니오 라브리올라, 로돌포 몬돌포, 조반니 젠틸레, 베네데토 크로체와 같은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라브리올라가 "실천 철학"이라 명명한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1913년 말, 친구 타스카의 영향으로 이탈리아 사회당(PSI)에 입당하여 본격적인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19] 당시 공업도시 토리노에서는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이 활발했는데, 그람시는 1904년의 가두시위, 1912년1913년의 금속노동자 파업 투쟁 등을 지켜보며 토리노 노동자들의 강한 단결력과 잠재력을 확인했다.

1914년부터 그람시는 사회주의 신문 ''Il Grido del Popolo'' (민중의 외침)에 글을 기고하며 언론인으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915년에는 사회당 기관지인 Avanti!|아반티!ita 토리노판 편집위원회 활동, 사회당 지역주간지 《민중의 외침》(''Grido del Popolo'')에 사회, 정치, 노동운동, 제2 인터내셔널, 반전결의, 문화비평 등 다양한 주제로 정기적으로 글을 썼다. 그러나 뛰어난 학문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건강 악화, 그리고 점증하는 정치 활동으로 인해 1915년 4월 문학 시험을 마지막으로 대학을 중퇴했다.

1916년에는 ''Avanti!''의 피에몬테판 공동 편집자가 되었고, 토리노 노동자들의 교육과 조직 활동에도 참여했다. 같은 해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로맹 롤랑, 프랑스 혁명, 파리 코뮌, 여성 해방 등의 주제로 강연했다. 1917년 8월 혁명적 폭동 이후 사회당 지도자들이 체포되자, 그람시는 토리노의 주요 사회주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부상하여 당 임시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Il Grido del Popolo''의 편집자가 되었다. 또한 그해 《Avanti!》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염두에 둔 〈자본에 대한 혁명〉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2. 3. 대학생 시절과 언론 활동

1911년 그람시는 토리노 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으며, 이때 팔미로 톨리아티와 같은 시기에 시험을 치렀다. 토리노에서 그는 문학을 공부했고 언어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마테오 바르톨리 밑에서 수학했다.

그람시가 토리노에 머물던 시기는 피아트와 란치아 같은 공장들이 들어서며 산업화가 진행되던 때였고,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초기 산업 사회의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사회주의 모임에 자주 참여했으며, 사르데냐 출신 이민자들과 교류했다. 사르데냐에서의 초기 경험과 본토에서의 환경은 그의 세계관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1913년 말, 그람시는 이탈리아 사회당(PSI)에 가입하여 활동했다.[19]

그람시는 학문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재정 문제와 건강 악화로 어려움을 겪었다. 정치 활동에 대한 그의 헌신이 커지면서, 결국 1915년 초 24세의 나이로 학업을 중단했다. 이 시기 그는 역사와 철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쌓았으며, 대학에서 안토니오 라브리올라, 로돌포 몬돌포, 조반니 젠틸레, 그리고 당대 이탈리아의 저명한 지식인이었던 베네데토 크로체 등의 사상을 접했다. 특히 라브리올라는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실천 철학"이라 명명하며 옹호했는데, 그람시는 훗날 이 용어를 감옥 검열을 피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1914년부터 그람시는 사회주의 신문인 Il Grido del Popolo|일 그리도 델 포폴로it(민중의 외침)에 글을 기고하며 언론인으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916년에는 사회당 공식 기관지인 ''Avanti!''의 피에몬테판 공동 편집자가 되었다. 그는 정치 이론에 대해 명료하고 활발하게 글을 쓰는 작가로서, 토리노의 사회 및 정치 문제 전반에 걸쳐 날카로운 논평을 제시했다.

같은 시기 그람시는 토리노 노동자들의 교육과 조직화에도 힘썼다. 1916년 처음으로 대중 연설을 시작했으며, 로맹 롤랑, 프랑스 혁명, 파리 코뮌, 여성 해방 등 다양한 주제로 강연했다. 1917년 8월 혁명적 봉기 이후 사회당 지도부가 체포되자, 그람시는 토리노의 주요 사회주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부상했으며, 당 임시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고 Il Grido del Popolo|일 그리도 델 포폴로it의 편집장을 맡게 되었다.

1919년 4월, 그람시는 톨리아티, 안젤로 타스카, 움베르토 테라치니와 함께 주간지 ''L'Ordine Nuovo''(새로운 질서)를 창간했다. 같은 해 10월, 이탈리아 사회당은 내부 분파에도 불구하고 제3 인터내셔널(코민테른) 가입을 결정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L'Ordine Nuovo'' 그룹이 볼셰비키 노선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하며, 아메데오 보르디가의 반의회주의 노선에 맞서 이들을 지지했다.[20]

당시 당내 전술 논쟁 속에서 그람시 그룹은 1919년과 1920년 대규모 파업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난 노동자 평의회를 적극 옹호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람시는 이 평의회가 노동자들이 생산을 관리할 수 있는 핵심 수단이며, "정복과 통치를 위해 모든 계급을 준비시키는" 기구라고 보았다.[21] 그는 자신의 입장이 레닌의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와 일치한다고 생각했다.[22] 그러나 그의 이러한 입장은 조르주 소렐과 다니엘 데 레온의 영향을 받은 생디칼리즘적 경향으로 비춰져, 평의회를 단순히 부르주아지에 맞선 정치 투쟁 기구가 아닌 공산주의 사회의 기초로 본다는 점에서 보르디가로부터 비판받았다. 1920년 봄 토리노 노동자 운동이 패배에 직면했을 때, 그람시는 평의회를 옹호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2. 4.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탈리아 사회당(PSI)이 투쟁 정신을 잃고 자본가 및 지배계급과 타협하는 정당이 되어간다는 비판적 인식에서 이탈리아 공산당(PCI) 창당의 필요성을 느꼈다. 특히 노동자 평의회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못하자, 그람시는 레닌주의적 의미의 공산당 창설이 필수적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L'Ordine Nuovo'' 그룹은 이탈리아 사회당(PSI)의 중도주의적 지도부를 지속적으로 비판했으며, 아마데오 보르디가의 분파와 연대했다.

줄리아 슈흐트와 아들들


결국 1921년 1월 21일, 리보르노에서 이탈리아 공산당( Partito Comunista d'Italiait, PCd'I)이 창당되었다. 그람시는 보르디가와 달리 검은 셔츠단에 맞서 싸운 무장 반파시스트 단체인 ''인민의 아르디티''를 지지했다. 그는 창당 초기부터 당 지도부의 일원이었으나, 1924년까지는 규율과 중앙집권을 강조한 보르디가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23]

1922년, 그람시는 신생 공산당 대표로 러시아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그는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율리아 슈흐트(율리아 아폴로노브나 슈흐트, 1896–1980)를 만나 1923년 결혼했고, 두 아들 델리오(1924–1982)와 줄리아노(1926–2007)를 두었다.[24] 그람시는 둘째 아들 줄리아노는 생전에 보지 못했다.[25]

모스크바 모호바야 거리 16번지에 있는 그람시 기념 명판. "1922-1923년 이 건물에서 국제 공산주의 및 노동 운동의 저명한 인물이자 이탈리아 공산당 창립자인 안토니오 그람시가 활동했다."


그람시의 러시아 임무 시기는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부상하던 때와 겹쳤다. 그는 PCd'I 지도부의 생각과 달리, 파시즘에 맞서 좌파 정당들의 통일 전선을 구축하라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고 귀국했다. 코민테른은 PCd'I가 이 전선을 주도하기를 바랐으나,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이 더 컸고 공산당은 상대적으로 신생 조직이며 급진적으로 여겨져 다른 세력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은 공산당 주도의 연합이 정치적으로 고립될 위험이 있다고 보았다.

1922년 말과 1923년 초, 베니토 무솔리니 정부는 반대 정당 탄압을 시작하여 보르디가를 포함한 PCd'I 지도부 다수를 체포했다. 1923년 말, 그람시는 분열된 당을 재건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비엔나로 이동했다. 1924년, 그람시는 PCd'I의 지도자로 인정받았으며, 베네토 지역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가족은 모스크바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로마에 거주하며 당 기관지인 L'Unitàit(통일) 창간을 준비했다. 1926년 1월 리옹 당대회에서는 이탈리아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통일 전선을 촉구하는 그의 테제가 채택되었다.

1926년, 요시프 스탈린이 볼셰비키 당 내에서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그람시는 코민테른에 서한을 보내 레프 트로츠키가 이끄는 반대파를 비판하면서도 스탈린 지도부의 문제점 또한 지적했다. 당시 모스크바에 있던 당 대표 팔미로 톨리아티는 이 서한을 받아 읽고 전달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그람시와 톨리아티 사이에 지속적인 갈등을 야기했다.[26]

2. 5. 파시즘 탄압과 투옥

1922년 10월 로마 진군과 자본가, 제대군인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바탕으로 권력을 잡은 무솔리니파시스트 정권은 집권 초기인 1922년부터 1926년 사이에 노동운동에 대해 강온 양면 정책을 사용했다. 사회당과 공산당의 의회 진출은 허용하면서도,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과 같은 노동운동은 탄압했으며, 기독교 사회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이탈리아진보 세력을 억압했다.

그람시는 1924년 선거에서 이탈리아 공산당 소속으로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고, 1926년 1월에는 프랑스 리옹에서 열린 비밀 전당대회를 통해 정식으로 공산당 총서기로 승인받아 당의 지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무솔리니 정권의 탄압은 강화되었고, 그람시는 1926년 망명을 시도하던 중 파시스트 정권에 체포되어 20년 4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그람시의 옥중 수고 노트


어릴 때부터 신체 장애가 있었고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람시는 투옥 중 친구인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 등의 도움으로 책과 잡지를 계속 구독할 수 있었다. 또한 집필 허가를 받아 30권에 가까운 노트를 작성했는데[48], 이는 훗날 '옥중 수고'로 알려지게 된다. 그의 주요 사상인 헤게모니론 등은 대부분 이 옥중 생활 동안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감옥 내의 비위생적인 환경과 학대로 인해 그람시의 건강은 크게 악화되었다. 1933년 말부터는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결국 1937년 4월, 형기 감면으로 석방된 직후 뇌일혈로 사망했다.[49]

2. 6. 옥중 생활과 죽음

무솔리니 정부가 1926년 가을, 국가 파시스트당(PNF) 이외의 모든 정당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그람시는 그해 11월 경찰에 체포되었다. 경찰은 불법 정당 활동을 구실로 그를 체포했으나, 실제로는 무솔리니가 그의 선동술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다. 재판에서 수석 검사는 "그람시의 두뇌 활동을 20년간 정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30] 결국 20년 4개월 5일의 형을 선고받았다. 로맹 롤랑을 비롯한 유럽 지식인들은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하였다.

유아기부터 신체 장애를 안고 있었고 병약했던 그람시는 친구인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 등의 지원으로 옥중에서도 책과 잡지를 계속 구독했고, 집필 허가를 받아 30권에 달하는 노트를 작성했다.[48] 이는 훗날 '옥중수고'(Quaderni del carcere|콰데르니 델 카르체레ita)로 알려지게 되며, 헤게모니론 등 그의 주요 사상은 대부분 이 시기에 발전했다. 그러나 감옥 내의 비위생적인 환경과 학대로 인해 건강을 해쳤고, 1933년 말부터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1937년 4월, 형기 감면으로 석방되었으나, 이는 무솔리니 정권이 사실상 그의 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후에야 이루어진 조치였다. 그는 석방된 직후 뇌일혈로 사망했다.[49] 이는 그가 숨을 거두기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3. 사상

그람시는 수감 기간 중 역사와 정치 분석을 담은 30권 이상의 노트를 남겼다. 이는 감옥에서 작성되었다는 의미에서 《옥중수고》(Quaderni del carcere|콰데르니 델 카르체레it)로 알려져 있으며, 이탈리아의 역사, 국민주의, 그리고 그람시 고유의 마르크스주의 이론, 비판 이론, 교육 이론 등을 다루고 있다.

그람시 사상의 핵심적인 문제의식 중 하나는 자본주의 국가가 어떻게 안정성을 유지하며 지속되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혁명의 전망이 불투명해지고 자본주의가 안정화되는 현상에 대한 탐구로, 자본주의 붕괴를 필연적으로 보았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와 차이를 보인다. 그는 루카치 등과 함께 물질적 토대 분석보다는 문화, 의식, 국가와 같은 상부구조에 주목하여 '상부구조의 이론가'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고전적 정치경제학자들이 빠지기 쉬운 경제주의적 또는 기계론적 결정론을 비판했다.

당시 사회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파시즘의 등장은 중요한 과제였다. 많은 이들이 파시즘을 단순히 반동적 부르주아 운동으로 치부하며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간과했지만, 그람시는 자유주의 학자들처럼 서구 문명의 일탈로 보거나 독점 자본주의의 극단적 지배 형태로만 보지도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를 지지해야 할 프티 부르주아와 노동자 계급 일부조차 파시즘을 지지했다는 점에 주목하며, 이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람시 사상의 주요 개념들은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발전했다. 그는 자본주의 국가가 단순히 물리적 강제(coercion)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 사회 내에서의 이데올로기적 동의(consent)를 통해 지배력을 확보하는 헤게모니 개념을 발전시켰다. 또한 국가는 강제를 담당하는 정치 사회(경찰, 군대, 법률 등)와 동의를 창출하는 시민 사회(가족, 교육, 노조 등)의 결합체인 통합국가(stato integrale|스타토 인테그랄레it)로 파악했다. 이러한 헤게모니를 구축하고 전복하기 위한 전략으로 진지전기동전 개념을 제시했으며, 이 과정에서 피지배 계급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확산시키는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했다. 또한 다양한 사회 세력들이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으로 결합된 역사적 블록(blocco storico|블로코 스토리코it) 개념을 통해 사회 변동을 분석했다.

그람시는 역사가 객관적 법칙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서 참여하는 인간의 투쟁, 의지, 실천(praxis)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보는 비결정주의적 역사관을 가졌다. 이는 사회주의의 필연적 승리를 보장하지 않으며, 맹목적인 낙관주의나 비관주의 모두를 경계했다. 그는 철학적 유물론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취했는데, 이데올로기를 단순한 허위의식이 아니라 사회를 조직하고 동원하는 물질적 힘으로 간주하며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과 중요성을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그람시의 사상은 마르크스가 헤겔을 전도하며 물질적 토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다시 한번 상부구조의 중요성을 부각하며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를 보완하고 확장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상부구조가 절대적 자율성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물적 토대와 분리될 수 없는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며 역사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3. 1. 헤게모니 이론

헤게모니(Hegemony)는 본래 블라디미르 레닌과 같은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러시아 혁명과 같은 민주 혁명 과정에서 노동 계급의 정치적 지도력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용어였다.[29]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 개념을 크게 발전시켜,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 계급인 부르주아지가 어떻게 지배력을 확보하고 유지하는지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 틀로 확장시켰다.[29]

고전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의 내적 모순으로 인해 사회주의 혁명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적색 2년과 같이 가장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조차 혁명은 일어나지 않거나 실패했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더욱 공고해지는 듯 보였다. 그람시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자본주의 국가가 단순히 물리적 폭력이나 정치적, 경제적 강제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통해 피지배 계급의 동의를 얻어냄으로써 통치한다고 주장했다. 즉,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가치와 규범을 사회 전체의 보편적인 상식처럼 퍼뜨리는 문화적 헤게모니를 구축한다. 이를 통해 노동 계급을 포함한 다른 계급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와 동일시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혁명보다는 현상 유지를 지지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그람시는 부르주아지의 가치가 마치 사회의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가치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에 맞서기 위해, 노동 계급이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레닌이 문화를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한 부수적인 요소로 간주했던 것과 달리, 그람시는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헤게모니를 먼저 장악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람시에 따르면, 어떤 계급이 단순히 자신의 좁은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순수한 힘과 강압만으로는 현대 사회에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다. 대신, 지적이고 도덕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며 다양한 사회 세력들과의 동맹 및 타협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람시는 이러한 사회 세력들의 연합체를 조르주 소렐의 용어를 빌려 '역사적 블록'(historic bloc)이라고 불렀다. 이 블록은 특정 사회 질서에 대한 동의의 기반을 형성하며, 다양한 제도, 사회 관계, 사상 등을 통해 지배 계급의 헤게모니를 생산하고 재생산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그람시의 이론은 경제적 토대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가 사회 질서를 유지하거나 변화시키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강조했다.

그람시는 부르주아 문화적 가치가 민속, 대중문화, 종교 등과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헤게모니 문화 분석에서 이러한 요소들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특히 그는 가톨릭교회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과, 지식인 계층의 종교와 일반 대중의 종교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교회의 노력에 주목했다. 그람시는 마르크스주의가 르네상스 인문주의에서 나타난 종교에 대한 지적인 비판과, 종교 개혁 당시 대중에게 호소력을 가졌던 요소들을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마르크스주의가 사람들의 정신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종교를 대체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람시는 정치 또는 지배에는 두 가지 측면, 즉 강제(coercion)와 동의(consent)가 공존한다고 보았다. 어떤 지배 형태도 100% 강제나 100% 동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이 두 요소가 어떻게 결합되느냐에 따라 지배의 유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국가는 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포괄하는 복합적인 존재이다. 이는 국가를 단순히 자본가 계급의 지배와 착취를 위한 강제적 도구로만 간주했던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분석이다. 그람시는 국가가 강제와 동의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을 간파하고, 국가 기능의 복잡성에 주목했다. 이러한 관점은 현실주의 정치 이론의 선구자인 마키아벨리의 영향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람시는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국가의 기능이 더욱 확장되고 성숙해 간다고 보았다. 초기 경쟁적 자본주의 시대의 국가는 시장 질서에 최소한으로 개입하는 야경국가에 가까웠지만, 독점 자본주의 단계로 이행하면서 국가는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자본주의 생산 양식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나아가 복지 국가로 발전하면서 국가는 사회적 재생산을 주도하고 시민들의 삶 전반에 관여하게 된다.

국가는 공적 영역을 대표하며, 시민 사회(civil society)는 사적 영역을 대표한다. 그람시에 따르면 시민 사회(가족, 교육 제도, 노조, 언론 등)는 다양한 사회 집단과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표출하고 조직화하는 공간이며, 여기서 형성된 질서가 국가를 통해 공식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 기능이 확대되면서 국가는 시민 사회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여 헤게모니적 지배를 확립하려 한다. 이때 시민 사회는 국가가 동의를 창출하고 사회 구성원의 의식과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통로, 즉 국가의 '사적 네트워크'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통합국가(Integral State)이며, 이는 강제를 담당하는 정치 사회(political society, 경찰, 군대, 법률 제도 등)와 동의를 창출하는 시민 사회가 결합된 형태이다. 즉, 국가는 강제와 동의라는 두 기능을 모두 수행하며, 시민 사회를 포괄하면서 독재(강제)와 헤게모니(동의)를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헤게모니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지배하려는 기본 집단(fundamental group, 주로 경제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계급인 부르주아지나 프롤레타리아)이 단순히 자신의 이익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동맹 관계에 있는 다른 집단들의 이익을 일정 부분 수용하고 융합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헤게모니 집단이 되려면 자신의 편협한 조합주의적 이익(corporative interests)을 넘어서서 다른 집단의 이익까지 포괄하고 대변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치적 수준을 넘어 도덕적, 지적 수준까지 통합된 공통의 집단 의지가 창출될 때, 역사적 지배 블록(historical bloc)이 형성된다. 그람시는 역사적 블록 형성 과정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 '''변형주의'''(Transformism): 이는 '수동 혁명'(passive revolution)이라고도 불리며, 지배 집단이 동맹 집단이나 심지어 적대적 집단에서 나오는 새로운 요소들을 점진적으로 흡수하여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기존 지배 질서를 유지하려는 방식이다. 피지배 집단의 동의는 능동적이기보다는 수동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 '''확장적 헤게모니'''(Expansive Hegemony): 진정으로 다양한 계급과 집단의 이해관계를 폭넓게 융합하여 민족적, 민중적 의지로까지 확장되는 형태의 헤게모니다. 이는 더욱 능동적이고 광범위한 동의에 기반한다.


그람시는 헤게모니 이론을 통해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혁명이 왜 어려운지를 설명했다. 러시아 혁명 당시 러시아는 국가의 강제적 기구(정치 사회)는 상대적으로 취약했지만, 시민 사회는 발달하지 못했다. 따라서 볼셰비키는 국가 권력을 급습하여 장악하는 기동전(war of maneuver)을 통해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구 사회는 강력한 국가 기구뿐만 아니라, 그 주변을 둘러싼 견고하고 복잡한 시민 사회라는 '참호 체계'(trench system)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서구에서는 국가 권력만 장악한다고 해서 지배 질서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는 시민 사회 곳곳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구 사회에서는 기동전이 아니라, 시민 사회의 각 참호(학교, 교회, 언론, 노조 등)를 하나씩 점령하며 장기적으로 헤게모니를 구축해나가는 진지전(war of position)이 필요하며, 이는 오랜 시간과 인내를 요구한다. 그람시는 이러한 진지전에서 노동 계급 대중을 이끌고 헤게모니 투쟁을 주도하는 유기적 지식인(organic intellectual)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 비해 혁명 과정에서 지식인의 역할을 더욱 중요하게 본 레닌이나 루카치의 관점과도 맥을 같이 한다.

3. 2. 진지전과 기동전

그람시는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지배 질서가 러시아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분석했다. 부르주아 지배 질서는 단순히 국가라는 강제기구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 사회라는 강력한 방어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러시아의 경우, 국가 기구가 상대적으로 취약하고 시민 사회의 발달이 미약했기 때문에, 혁명 세력이 국가 권력을 직접 타격하여 무너뜨리는 방식, 즉 기동전(機動戰, War of Maneuver)이 가능했다. 이는 러시아 혁명에서 볼셰비키가 보여준 전략이었다.

그러나 서구 사회는 달랐다. 서구에서는 국가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주변을 교회, 노동조합, 정당, 학교, 언론 등 다양한 시민 사회 조직들이 마치 참호(塹壕)처럼 둘러싸고 보호하고 있다. 이러한 시민 사회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대중의 동의를 확보함으로써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단순히 국가 기구를 장악하는 기동전만으로는 서구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렵다고 보았다.

이에 그람시는 서구 사회에 맞는 혁명 전략으로 진지전(陣地戰, War of Position)을 제시했다. 진지전은 시민 사회라는 '참호' 속에서 장기적인 투쟁을 벌여 헤게모니를 장악해나가는 전략이다. 이는 정치, 문화,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지배 이데올로기에 맞서 대항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고, 피지배 계급의 자발적 동의를 확보해나가는 지난한 과정을 의미한다. 그람시는 이러한 진지전을 통해 시민 사회의 헤게모니를 먼저 장악해야만 국가 권력의 변화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그람시는 서구 사회의 혁명은 러시아와 같은 단기적이고 직접적인 기동전이 아니라, 시민 사회 영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끈기 있게 헤게모니를 구축해나가는 진지전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 진지전에서 유기적 지식인의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3. 3. 유기적 지식인

그람시는 지식인을 크게 전통적 지식인유기적 지식인이라는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지식인은 특정 계급적 배경을 가지며, 인간의 의식, 관념, 사상 등 상부구조 영역을 담당하는 집단이다. 새로운 사회 계급이나 생산양식(하부구조)이 등장할 때, 그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세계관을 형성하며 전파하는 역할을 하는 지식인 집단이 함께 나타나는데, 이들이 바로 유기적 지식인이다. 즉, 유기적 지식인은 자신이 속한 계급의 집단적 의지를 모으고 확산시키는 특수한 임무를 띤다.

반면, 전통적 지식인은 본래 특정 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으로 출발했지만, 자신들을 탄생시킨 역사적 조건이나 생산양식이 변화하거나 사라진 뒤에도 마치 계급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다. 그람시는 예술가, 작가, 철학자, 성직자 등을 전통적 지식인의 예로 들었다.

그람시는 어떤 계급이 사회 전체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계급의 유기적 지식인 집단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유기적 지식인은 지도 집단의 세계관과 의지를 형성하고 널리 퍼뜨림으로써, 단순한 강압적 지배가 아닌 동의에 기반한 헤게모니적 질서를 창출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의 헤게모니에 맞서 사회 변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과 고유한 세계관을 대변할 유기적 지식인을 스스로 양성하고 조직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들의 유기적 지식인을 창출하는 동시에, 기존의 전통적 지식인들을 설득하고 동화시켜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람시가 생각한 진정한 유기적 지식인은 대중과 깊이 연결되어 이론과 실천을 결합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면서도, 다른 피지배 집단들의 이해관계까지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세계관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를 통해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저항 이데올로기를 제시하고 문화적, 사상적 헤게모니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는 궁극적으로 정치적 승리로 이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람시는 이러한 이데올로기 투쟁이 단순한 노동쟁의와 같은 경제적 투쟁보다 더 근본적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그람시는 이러한 유기적 지식인들의 조직적인 총체를 ''으로 간주하며, 레닌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아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3. 4. 역사적 블록

그람시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역사적 블록'''(blocco storico|블로코 스토리코ita)은 특정 역사적 시기에 사회를 지배하는 다양한 사회 계급과 세력들의 연합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동맹을 넘어, 경제적 토대와 정치, 문화, 이데올로기 등 상부구조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상태를 말한다.

역사적 블록은 헤게모니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헤게모니는 지배 계급이 단순히 강제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피지배 계급의 동의를 얻어 지배를 유지하는 상태를 뜻한다. 그람시는 정치적 수준에서 출발하여 도덕적, 지적 수준에까지 통합을 이루어내고, 추종 집단의 자발적 동의와 지지를 창출하여 공통의 집단 의지가 형성될 때 역사적 블록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헤게모니를 구축하고 역사적 블록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지배적인 기본 집단(주로 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 같은 기본 계급)이 자신의 편협한 조합주의적 이익을 넘어서야 한다. 즉, 기본 집단의 근본적인 이익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동맹하거나 추종하는 다른 사회 세력들의 이익을 수용하고 융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치적 수준뿐만 아니라 지적·도덕적 수준에서의 통합이 이루어진다.

그람시는 역사적 블록이 형성되는 두 가지 주요 방식을 제시했다.

  • '''변형주의'''(Trasformismo|트라스포르미스모ita): 이는 '수동 혁명'이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지배 집단이 잠재적으로 반대 세력이 될 수 있는 다른 집단(동맹 집단, 심지어 적대 집단)의 지도자나 능동적 요소를 점진적으로 흡수하여 그들의 반대를 무력화시키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기존의 지배 질서를 큰 변화 없이 유지하려 한다. 이는 피지배 집단의 수동적 동의에 기반한다.
  • '''확장적 헤게모니''':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다양한 계급과 사회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폭넓게 포용하고 융합하여, 그 범위를 민족적, 민중적 의지로까지 확장해 나가는 헤게모니를 의미한다. 이는 더욱 능동적이고 광범위한 동의에 기반한 역사적 블록을 형성한다.


그람시는 기본적으로 경제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계급(기본 계급)만이 역사적 블록을 주도하는 기본 집단이 되어 헤게모니를 창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그의 사상이 마르크스주의의 틀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기본 계급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다른 추종 계급 및 사회 세력에 대한 확실한 리더십을 확립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지식인, 특히 유기적 지식인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부르주아 계급이 시민사회 내에서 헤게모니를 구축하여 자신들의 역사적 블록을 유지하는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계급 역시 자신들의 유기적 지식인을 통해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새로운 세계관과 저항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다른 피지배 계급 및 사회 세력들의 이익을 포괄하는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고, 궁극적으로는 기존의 역사적 블록을 대체할 새로운 역사적 블록을 형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단순히 경제 투쟁을 넘어 이데올로기와 문화 영역에서의 장기적인 투쟁, 즉 진지전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3. 5. 기타

그람시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적 결정주의를 비판했다. 그는 경제적 요인만이 아니라 정치, 문화, 이데올로기와 같은 상부구조가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지며 역사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는 역사가 객관적인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진행된다는 기계론적 시각이나, 노동자 운동의 승리가 숙명론적으로 보장되어 있다는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그람시는 마르크스주의가 실천의 철학이며, 역사는 인간의 프락시스(실천)와 의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인간의 의지 역시 주어진 역사적 상황 속에서 발현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러시아 10월 혁명을 분석한 글 "다스 카피탈에 반대하는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반드시 자본주의 생산력의 완전한 발전을 전제하지 않음을 보여주며 결정론적 해석을 반박했다. 또한, 경제 투쟁에만 집중하고 정치 투쟁을 외면했던 이탈리아 생디칼리즘 조합원들의 경향을 '저속한 경제주의'이자 은밀한 개량주의, 자유주의와 같다고 비판했다.

철학적 유물론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하부구조를 반영하는 허위의식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물질성을 가지며 사회를 조직하고 동원하는 힘을 가진 것으로 간주했다. 즉, 상부구조와 이데올로기 영역의 상대적 자율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것이 단순한 반영이 아닌 물질적 힘을 가질 수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그람시의 이러한 비판과 이론적 확장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틀을 벗어난 것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설명하고 상부구조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를 보완하고 확장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모두를 경계하며, 사회 변화는 인간의 끊임없는 투쟁과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4.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안토니오 그람시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해당 섹션의 내용을 작성할 수 없다.

5. 비판

미국의 사회주의 잡지 자코뱅에 따르면, 그람시는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이탈리아 작가 중 한 명이며, 확실히 역대 가장 많이 인용된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이며,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옥중 수고''는 비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전 세계로 퍼지는 데 기여했다.[36]

그람시의 사상은 본래 좌파 진영에서 출발했지만, 오늘날 문화 연구 및 비판 이론 분야의 학술 논의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심지어 중도 정치나 우파 정치 성향의 정치 이론가들조차 그의 개념, 특히 헤게모니 개념에 주목하고 이를 인용한다. 그의 영향력은 신-그람시주의와 같은 현대 정치학 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그러나 그람시의 사상은 여러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일부 비판가들은 그가 사상을 통해 권력 투쟁의 개념을 조장한다고 비난한다. 이들은 현재 학계에서 논의되는 그람시적 철학 분석 접근법이 서구 문화 고전에 대한 비정치적 해석을 기반으로 하는 열린, 자유주의적 탐구 정신과 상충한다고 본다.[37][38] 또한, 그의 헤게모니 이론이 문화 문제에 대한 국가 개입을 정당화함으로써, 진정한 열린 사회에 필수적인 사상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사상 교환을 저해할 위험이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39][40] (그의 지식인 이론과 관련된 엘리트주의 비판 및 헤게모니 개념 자체의 모호성에 대한 비판은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룬다.)

사회주의자로서 그람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29]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PCI)을 이끌며 유로코뮤니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톨리아티는 당시 PCI의 노선이 그람시 사상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41][42] 하지만 그람시가 요시프 스탈린에 대해 점차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던 점을 고려하면, 그의 진정한 견해가 알려졌다면 오히려 당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폭력 문제에 대한 그람시의 태도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사회주의자 자코모 마테오티가 파시스트들에게 암살되었을 때, 그람시는 이 사건을 명확히 비난하지 않았다. 마테오티의 죽음은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에 위기를 가져왔지만, 그람시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역사가 장-이브 프레티뉴는 그람시를 포함한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파시즘 정권의 잔혹성을 과소평가하는 순진함을 보였다고 평가한다.

5. 1. 엘리트주의 비판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 개념과 그 역할에 대한 강조는 헤게모니 이론의 핵심 요소이지만, 일부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엘리트주의적 경향을 띨 수 있다는 비판을 제기한다. 이러한 비판은 그람시가 대중의 자발적인 역량과 창의성을 충분히 인정하기보다는, 사회 변혁 과정에서 지식인의 지도적인 역할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 스스로의 주체적인 힘보다는 지식인 집단에 의한 헤게모니 장악 및 지도 능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5. 2. 헤게모니 개념의 모호성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은 사회 분석에 있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지만, 몇 가지 비판에 직면하기도 한다. 주요 비판 중 하나는 헤게모니 개념이 지닌 포괄성과 추상성이다. 이 개념은 문화, 정치, 경제 등 사회의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며 동의와 강제의 복합적인 관계를 설명하려 하지만, 그 범위가 너무 넓어 때로는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이러한 추상성 때문에 헤게모니 개념을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이나 사회 현상 분석에 직접 적용하기 어렵다는 비판도 제기된다.[5] 즉, 특정 사회 내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계급, 정치 세력, 이익 집단 사이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관계를 '헤게모니'라는 단일한 틀로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의 다층적인 권력 관계와 갈등 양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다는 우려가 존재한다.

이러한 비판들은 헤게모니 개념의 유용성과 한계에 대한 지속적인 학문적 논의를 자극하며, 개념을 더욱 정교화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5. 3. 경제 환원론 비판

주어진 원본 소스(`source`)는 참고 문헌 목록으로, '경제 환원론 비판' 섹션의 본문 내용을 작성하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텍스트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공된 정보만으로는 요청하신 섹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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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서적 Gramsci's Common Sense: Inequality and Its Narratives https://archive.org/[...] Duke University Press
[31] 논문 Antonio Gramsci and his Relevance for the Education of Adults https://www.um.edu.m[...] 2008-06
[32] 서적 Leszek Kolakowski – Main Currents of Marxism – Its Rise, Growth and, Dissolution – Volume III – The Breakdown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33] 웹사이트 Anti-Duehring http://www.marxists.[...]
[34] 웹사이트 Dialectics of Nature http://www.marxists.[...]
[35] 웹사이트 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 http://www.marxists.[...]
[36] 웹사이트 How Antonio Gramsci's Ideas Went Global https://jacobin.com/[...] 2023-07-26
[37] 서적 Gramsci's Political Thought: Hegemony, Consciousness, and the Revolutionary Process Duke University Press
[38] 서적 Hegemony and Revolution: A Study of Antonio Gramsci's Political and Cultural The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39] 서적 Hegemony and Revolution: A Study of Antonio Gramsci's Political and Cultural The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40] 서적 Cultural Hegemony in a Scientific World Clarendon Press
[41] 서적 Gramsci's Political Thought: Hegemony, Consciousness, and the Revolutionary Process University of Oxford Press 1987-04-00
[42] 서적 Gramsci Contested: Interpretations, Debates, and Polemics, 1922–2012 Brill 2021-12-21
[43] 뉴스 'กรัมชี-ปิยบุตร’ สงครามศาสดา https://www.bangkokb[...]
[44] 웹사이트 Tra la rivoluzione e la Juve. La passione dei leader Pci per il calcio https://www.striscia[...] 2023-07-04
[45] 뉴스 I comunisti scendono in campo https://ilmanifesto.[...] 2023-07-04
[46] 간행물 La Juventus comunista https://www.rivistac[...] 2023-07-04
[47] 간행물 Gramsci e Togliatti, la rivoluzione e la Juventus https://www.startmag[...] 2023-07-04
[48] 문서 獄中ノートの冊数について、日本大百科全書は32冊とするが、集英社世界文学大辞典や世界大百科事典は30冊近くとする。
[49] 웹사이트 重岡保郎「グラムシ」日本大百科全書、小学館 https://japanknowled[...] ジャパンナレッジ 2020-08-27
[50] 서적 안토니오 그람시-옥중수고와 혁명의 순교자 살림
[51] 문서 그람시는 4살 때 사고로 등이 굽는 장애인이 되었으며, 신경성 질환 등의 병들에 시달렸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이 스물다섯의 청년으로 장성한 후에도 조그만 관과 수의를 준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람시가 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사회적 약자 곧 민중의 편에서 생각하는 진보적 지식인이 되게하였다. 자신이 장애인이니 민중들이 자본가와 지배계급의 폭력 곧 억압과 차별로 받는 고통이 자신의 고통으로 느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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