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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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급고각은 명나라 만력 연간에 모진이 설립한 서적으로, 84,000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600여 종의 서적을 출판했다. 급고각은 송, 원대 판본을 중심으로 희귀본을 수집하고, 정교한 교감과정을 거쳐 책을 간행하여 명성을 얻었다. 급고각에서 간행된 서적은 《십칠사》, 《진체비서》, 《육십종곡》 등과 같은 주요 서적과 희귀본들을 포함하며, 강서성에서 제작한 종이를 사용하여 '모초'라고 불리는 정교한 인쇄 품질을 자랑했다. 급고각본은 조선에 전래되어 서적 수요를 충족시켰으며, 정조는 급고각본 《설문해자》 간행을 칭찬하기도 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회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국내 여러 기관에 급고각본이 소장되어 있으며, 급고각 목판 유출과 관련된 사례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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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고각 | |
---|---|
기본 정보 | |
![]() | |
시대 | 조선 |
창건자 | 황윤석 |
위치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
소장품 | |
소장 서적 | 1만여 권 |
소장 문헌 | 《이재유고》 《기년아람》 |
관련 인물 | |
관련 인물 | 황윤석 |
2. 역사
모진은 명나라 만력 27년(1599년)에 태어나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천계 6년(1626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많은 땅을 상속받은 그는, 어머니의 지원을 받아 20명이 넘는 각수(목판 제작자)를 고용해 책판을 조각하고 서적을 출판하였다.
숭정 15년(1642년), 모진은 왕함회(王咸繪)에게 급고각의 모습을 그린 《우산모씨급고각도》를 의뢰했다. 이 그림에는 아홉 채의 건물과 두 곳의 연못, 그리고 이여정(二如亭)과 녹군정(綠君亭)이라는 정자가 묘사되어 있다. 모진은 이곳에서 책의 목판을 직접 교감하고 수정하였다.
모진이 소장한 도서는 84,000책에 달했으며, 급고각에서 출판한 서적은 경사(經史), 사곡, 소설, 필기류 등 600여 종에 이른다. 주이준은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에서 모진과 급고각을 호평했고,[3] 육세의(陸世儀)는 증모자진(贈毛子晋)이라는 시를 지어 급고각의 모습을 읊었다.
왕함회의 그림 속 두 개의 연못 중 하나는 강의 범람으로 사라졌고, 다른 하나는 1970년대에 농경지로 개간되면서 메워졌다.[4] 현재 급고각은 터만 남아 있다.
2. 1. 모진의 생애와 급고각 설립
모진은 명나라 만력 27년(1599년)에 태어났다.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한 그는, 어머니 과씨(戈氏)의 조언으로 과거를 보는 수재들이 사용할 책을 출판하기로 결심했다. 천계 6년(1626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수천 경에 이르는 땅을 상속받은 그는 어머니의 지원을 받아 20명이 넘는 각수(목판 제작자)를 고용해 책판 조각을 시작했다.숭정 15년(1642년) 모진은 왕함회(王咸繪)에게 급고각의 모습을 그린 《우산모씨급고각도》를 의뢰했다. 그림에는 아홉 채의 건물과 두 곳의 연못, 이여정(二如亭)과 녹군정(綠君亭)이라는 정자가 묘사되어 있다. 모진은 녹군정에 머무르면서 자신이 지휘해 찍어낸 책의 목판들을 직접 교감하고 수정하였다.
왕함회는 자신이 보고 그린 급고각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모진이 소장한 도서는 84,000책에 달했으며, 급고각에서 출판한 서적은 경사(經史)와 사곡, 소설, 필기류를 포함하여 600여 종에 달한다. 주이준은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에서 모진과 급고각을 "희귀본을 소장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으로, 중년에 와서는 오경과 십칠사, 그리고 시와 사 및 희곡의 극본과 당송 시기와 금원 시기의 별집과 패관에 해당하는 소설에 이르기까지 출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가 여러 지역을 통틀어 도서의 수집에 들인 공은 매우 크다고 정평이 나있다."[3]라고 호평했다. 육세의(陸世儀)는 증모자진(贈毛子晋)이라는 시를 지어 급고각의 모습을 읊기도 했다.
왕함회의 그림 속 두 개의 연못 중 하나는 강의 범람으로 사라졌고, 다른 하나는 1970년대에 농경지로 개간되면서 메워졌다.[4] 급고각도 그 터만 남아 있다.
2. 2. 급고각의 모습과 운영

《우산모씨급고각도》에는 급고각의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숭정 15년(1642년)에 모진은 왕함회(王咸繪)에게 급고각 그림을 의뢰했다. 그림에는 아홉 채의 건물과 두 곳의 연못이 그려져 있으며, 연못 위에는 이여정(二如亭)과 녹군정(綠君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모진은 녹군정에 머무르면서 자신이 지휘해 찍어낸 책의 목판들을 일일이 교감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했다고 전해진다.[2]
왕함회는 자신이 그린 급고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급고각은 당대에도 그 명성이 높았다. 주이준은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에서 모진이 머물며 책을 간행하던 목경루(目耕樓)와 급고각을 두고 "희귀본을 소장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으로, 중년에 와서는 오경과 십칠사, 그리고 시와 사 및 희곡의 극본과 당송 시기와 금원 시기의 별집과 패관에 해당하는 소설에 이르기까지 출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가 여러 지역을 통틀어 도서의 수집에 들인 공은 매우 크다고 정평이 나있다."[3]라고 호평했다. 육세의(陸世儀)는 증모자진(贈毛子晋)이라는 시를 지어 급고각의 모습을 “높은 장서각에는 성 백 개를 두를 만큼의 서적이 소장되어 있는데 (중략) 휘장을 걷으니 물빛이 궤안에 아른거리고 그 서가들이 마치 물에 떠 있는 듯하며, 난산과 어우러진 풍경이 처마 기둥을 비추네. 변하고 변하는 세상에서 어찌 자문해야 하는지 봉우리를 감아 도는 생황 소리에 달도 함께 비춘다."(《부정시집》)라고 읊었다.
2. 3. 급고각 터의 현재
왕함회의 그림 속에 그려진 두 개의 연못 가운데 하나는 이후 강의 범람으로 사라졌고, 다른 하나는 1970년대에 농경지로 개간되면서 메워졌다.[4] 급고각도 그 터만 남아 있다.3. 급고각에서 찍어낸 책(급고각본)
모진의 급고각에서는 십칠사, 진체비서, 육십종곡 등 방대한 분량의 서적들과 희귀하고 독특한 서적들이 간행되었다.[5] 모진은 희귀한 사본을 수집하기 위해 "다른 집에서 책값으로 천금을 낼 때 이 집 주인은 천이백금을 냅니다"라고 써 붙이거나, "360일 내내 장사하러 다니느니 모씨 집에 책이나 한 권 파는 게 낫지"라는 속담이 유행할 정도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급고각에서 책을 찍어 내는 비용도 책 한 권당 은 3냥이 소요되었다.[5]
《상소합지고》에 따르면 급고각에서 사용된 종이는 장시성에서 맞춤 제작한 모변(毛邊)과 모태(毛泰)였으며, 그렇게 찍어낸 책들은 모두 원본과 똑같아 '모초(毛抄)'라고 불렸다.[6]
3. 1. 주요 간행 서적
모진의 급고각에서는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인 《십칠사》, 《진체비서》, 《육십종곡》 등 방대한 분량의 서적들이 간행되었고, 그 밖에도 희귀하고 독특한 서적들이 많이 간행되었다.[5]3. 2. 급고각본의 특징
모진은 희귀한 사본을 수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의 집 문에 "다른 집에서 책값으로 천금을 낼 때 이 집 주인은 천이백금을 냅니다"라고 써 붙일 정도였다.[5] 심지어 현지에서는 "360일 내내 장사하러 다니느니 모씨 집에 책이나 한 권 파는 게 낫지"라는 속담이 유행할 정도였다. 급고각에서 책을 찍어 내는 비용도 책 한 권당 3냥이 소요되었다.[5]《상소합지고(常昭合志稿)》에 따르면 급고각에서 책을 간행할 때 사용된 종이는 강서성에서 맞춤 제작한 것으로, 얇은 것은 모변(毛邊), 두꺼운 것은 모태(毛泰)라고 하였다. 그렇게 찍어낸 책들은 모두 원본과 똑같았고, 이를 '모초(毛抄)'라고 불렀다.[6]
3. 3. 후대의 평가와 영향
급고각본은 후대의 많은 장서가와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오위업은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급고곡가》(汲古閣歌)를 쓰기도 했다.[7] 모진이 처음 자신의 일을 시작하면서 쓴 《급고각교각서목》(汲古阁校刻书目)에는 534종의 책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청나라 때 회도인(悔道人)이라는 사람이 빠진 것을 보충하여 44종의 책을 추가, 총 578종의 책을 편찬하였다.청나라 말기 도상(陶湘)은 급고각에서 찍어낸 서적들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하여 급고각에서 찍어낸 책 가운데 총 540종을 보유하고 있었다. 도상(陶湘)이 편찬한 《명모씨족각서목록》(明毛氏汲古阁刻书目录, 1권)에는 623종의 서적이 수록되어 있고, 그 가운데에는 도상(陶湘) 자신이 수집하지 못한 75종의 책도 포함되어 있다. 《명모씨급고각각서목록》(明毛氏汲古阁刻书目录) 서문에는 "포방곡(鲍芳谷)에게는 《급고각판존망고》 한 권이 있다"라고 했는데, 이는 회도인이 쓴 《급고각각판존망고》(汲古阁刻板存亡考)를 가리킨다. 다만 실제로 회도인은 포방곡이라고 부를 수 없고, 실은 청나라 사람 정덕무(郑德懋)이다.[7]
4. 한국에 전래된 급고각본 도서
급고각본은 명나라 말 청나라 초인 16세기~17세기에 조선에 전해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서적 유통 시스템이 붕괴된 조선에서는 다양한 서적 수요가 발생했고, 송나라 판본을 바탕으로 교감학적으로 높은 수준을 보였던 급고각본은 중국과 조선 양국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일본에까지 전해지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사기(급고각)|사기》, 《소학감주》, 《진서》가 소장되어 있다. 《사기(급고각)|사기》와 《소학감주》는 판심(版心)과 판 하구에 '급고각'이라고 새겨져 있어 급고각에서 인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기(급고각)|사기》는 이왕직 장관을 지낸 민병석과 박재문의 소장본이었다. 《진서》는 숭정 원년(1628년)에 모진의 급고각에서 간행한 '모본'을 토대로 청대에 찍어낸 청간본(淸板本)이다.[12]
국회도서관에는 《상서주소》, 《예기주소》, 《춘추좌전주소》, 《논어주소해경》, 《의례주소》, 《춘추곡량전주소》, 《춘추공양전주소》, 《맹자주소해경》, 《효경주소》, 《주례주소》, 《남당서》 등이 소장되어 있다. 《상서주소》는 숭정 5년(1632) 간기(刊記)와 함께 임창재의 기증으로 되어 있다.[11]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등에도 급고각본 《상서주소》가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국회도서관 소장본과 간기 및 판각 상태에 차이가 있어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13]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 《육방옹전집》은 판심 하단에 '汲古閣'이 새겨져 있지만, 봉면지에는 '虞山詩禮堂張氏藏板'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급고각에서 간행된 후 목판이 상숙 장씨에게 팔려 2책이 추가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책은 조선 후기 문신 이미의 장서인이 찍혀 있다.[14]
4. 1. 전래 시기와 배경
급고각본이 조선에 전해진 것은 명말청초(16세기~17세기)이다. 양란 이후 서적 유통 시스템이 붕괴된 조선에서는 다양한 서적에 대한 수요가 발생하였고, 이에 따라 송판본(宋板本)을 기반으로 교감학적으로 높은 수준을 보였던 급고각본은 중국과 조선 양국에서 각광을 받았으며, 일본에까지 전해지기도 했다.[8]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9]과 김정희[10]도 급고각본 서적을 접하고 관련 언급을 남겼다. 정조는 급고각본 《설문해자》 간행에 대해 "넓은 학식에 단아한 성품으로 옛것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을 어찌 흔히 볼 수 있겠는가. 후세의 경서에 어둡고 재물에 인색한 선비로 하여금 권할 바를 알도록 할 만하다."라며 칭찬했다.[11]4. 2. 조선 지식인 사회에 미친 영향
정약용(丁若鏞)[8], 김정희(金正喜)[9]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급고각본 서적을 접하고 관련 언급을 남겼다. 정조(正祖)는 급고각본 《설문해자》 간행에 대해 "넓은 학식에 단아한 성품으로 옛것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을 어찌 흔히 볼 수 있겠는가. 후세의 경서에 어둡고 재물에 인색한 선비로 하여금 권할 바를 알도록 할 만하다."[10]라며 급고각의 주인 모의(모진의 아들)를 칭찬하기도 했다. 이는 급고각본이 조선 지식인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4. 3. 한국 소장 급고각본 현황
급고각본은 명나라 말 청나라 초인 16세기~17세기에 조선에 전해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서적 유통 시스템이 붕괴된 조선에서는 다양한 서적 수요가 발생했고, 송나라 판본을 바탕으로 교감학적으로 높은 수준을 보였던 급고각본은 중국과 조선 양국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일본에까지 전해지기도 했다.정조는 급고각본 《설문해자》 간행에 대해 "넓은 학식에 단아한 성품으로 옛것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을 어찌 흔히 볼 수 있겠는가. 후세의 경서에 어둡고 재물에 인색한 선비로 하여금 권할 바를 알도록 할 만하다."[10]라며 급고각의 주인 모의(모진의 아들)를 칭찬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8]과 김정희[9]도 급고각본 서적을 접하고 관련 언급을 남겼다.
이후 급고각에서 간행할 때 사용했던 목판들이 급고각 밖으로 유출되어 여러 곳으로 팔려나가기도 했다.
4. 3. 1. 규장각 소장 급고각본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사기(급고각)|사기》(古952.01-Sa41s-v.1-7, 전체 12책 중 7책)와 《소학감주》(小學紺珠, 奎中4914-v.1-9)는 판심(版心)과 판 하구에 '급고각'이라고 새겨져 있어 급고각에서 인쇄된 것임을 알 수 있다.[11] 《사기》는 이왕직의 장관을 지낸 시남(詩南) 민병석(1858~1940)의 소장본이었으며, 그 전에는 조선 후기의 문인인 추재(錐齋) 박재문(朴齊聞, 1787~?)이 소장했음을 책에 날인된 장서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같은 곳에 소장된 《국회도서관에는 급고각본 《상서주소》(尙書註疏, 古 181.212 ㄱ368ㅅ, 1-6책)가 소장되어 있으며, '皇明崇禎五年歲在玄黓涒灘 古虞毛氏繡鐫'라는 숭정 5년 임신(1632) 간기(刊記)와 함께, 장서인에 따르면 임창재(任昌宰)라는 인물의 기증으로 되어 있다.[11] 국회도서관에는 《상서주소》 외에도 《예기주소》(禮記註疏, 1-18책), 《춘추좌전주소》(春秋左傳註疏, 1-24책), 《논어주소해경》(論語註疏解經, 1-4책), 《의례주소》(儀禮註疏, 1-12책), 《춘추곡량전주소》(春秋穀梁傳註疏, 1-6책), 《춘추공양전주소》(春秋公羊傳註疏, 1-6책), 《맹자주소해경》(孟子註疏解經, 1-6책), 《효경주소》(孝經註疏), 《주례주소》(周禮註疏, 1-12책) 등의 유교 경전과 《남당서》(南唐書, 1-4책) 등이 소장되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등에도 급고각본 《상서주소》가 소장되어 있지만,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古1∼24∼20)은 간기가 국회도서관 소장본과 같은 해, 같은 발행처에서 간행되었음에도 간기와 본문의 판각 상태에 일부 차이가 있어 두 판본의 선후 관계를 밝히기 위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13]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 급고각본 《육방옹전집》(陸放翁全集, 고812.081육유, 전50책)은 판심 하단에 '汲古閣'이라고 새겨져 있지만 봉면지에는 '虞山詩禮堂張氏藏板'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처음 급고각에서 《육방옹전집》을 간행한 뒤 그 목판이 상숙 장씨(常熟 張氏)에게 팔렸고, 상숙 장씨는 원래 전48책이었던 급고각본에 2책을 더해 50권으로 늘려서 간행했기 때문이다.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본 《육방옹전집》은 조선 후기 문신 함광헌(含光軒) 이미(李瀰, 1725~1779)의 장서인이 찍혀 있어 그의 소장본임을 알 수 있다.[14]
4. 3. 2. 국회도서관 소장 급고각본
국회도서관에는 급고각본 《상서주소》(古 181.212 ㄱ368ㅅ, 1-6책)가 소장되어 있으며, '皇明崇禎五年歲在玄黓涒灘 古虞毛氏繡鐫'라는 숭정 5년 임신(1632) 간기(刊記)와 함께, 해당 도서의 장서인에 따르면 임창재(任昌宰)라는 인물의 기증으로 되어 있다.[11]국회도서관에는 《상서주소》 외에도 다음과 같은 급고각본 유교 경전과 서적들이 소장되어 있다.
종류 | 제목 및 권수 |
---|---|
유교 경전 | 《예기주소》(1-18책), 《춘추좌전주소》(1-24책), 《논어주소해경》(1-4책), 《의례주소》(1-12책), 《춘추곡량전주소》(1-6책), 《춘추공양전주소》(1-6책), 《맹자주소해경》(1-6책), 《효경주소》, 《주례주소》(1-12책) |
기타 | 《남당서》(1-4책) |
한편 급고각본 《상서주소》는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등 다수의 소장처에 소장되어 있지만,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古1∼24∼20)의 경우 간기를 보면 국회도서관 소장본과 같은 해에 같은 발행처에서 간행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간기와 본문의 판각상태에 일부 차이가 있어 두 판본의 선후관계를 밝히기 위한 후속 조사가 요구된다.[13]
4. 3. 3. 기타 도서관 소장 급고각본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등에도 급고각본이 소장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古1∼24∼20) 《상서주소》는 국회도서관 소장본과 같은 해, 같은 발행처에서 간행되었지만, 간기와 본문의 판각 상태에 차이가 있어 두 판본의 선후 관계를 위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13]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 급고각본 《육방옹전집》(陸放翁全集, 고812.081육유, 전50책)은 판심 하단에 '汲古閣'이라고 새겨져 있지만, 봉면지에는 '虞山詩禮堂張氏藏板'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급고각에서 《육방옹전집》을 간행한 뒤 목판이 상숙 장씨(常熟 張氏)에게 팔렸고, 상숙 장씨가 2책을 더해 50권으로 늘려 간행했음을 보여준다. 이 책에는 조선 후기 문신 함광헌(含光軒) 이미(李瀰, 1725~1779)의 장서인이 찍혀 있다.[14]
참조
[1]
간행물
尋訪汲古閣
蘇州雜誌
2003-06
[2]
서적
汲古閣書跋·重輯漁洋書跋
上海古籍出版社
2006
[3]
서적
靜志居詩話
人民文學出版社
1990
[4]
간행물
尋訪汲古閣
蘇州雜誌
2003-06
[5]
간행물
尋訪汲古閣
蘇州雜誌
2003-06
[6]
간행물
尋訪汲古閣
蘇州雜誌
2003-06
[7]
간행물
毛晋与汲古阁刻书考略
中國典籍與文化
2006-03
[8]
서적
다산시문집 제6권 시(詩) 송파수작(松坡酬酢)
[9]
서적
완당전집 제8권 잡지(雜識)
[10]
서적
홍재전서 제161권 일득록(日得錄)1 문학(文學) 1
[11]
웹인용
상서주소 - 국회도서관
https://docviewer.na[...]
[12]
웹인용
규장각 소장 중국본 귀중 도서 선본 해제 연구(서울대학교 규장각 원문검색서비스)
https://kyudb.snu.ac[...]
[13]
웹인용
국회도서관 소장 《상서주소》 - 임영정 해제 옥영정 감수(국회도서관 데이터베이스)
https://dl.nanet.go.[...]
[14]
논문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 中國本 古書의 가치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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