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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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라 씨는 일본의 씨족으로, 미카와 키라 씨, 오슈(무사시) 키라 씨, 토사 키라 씨 등으로 나뉜다. 미카와 키라 씨는 가마쿠라 시대에 아시카가 요시우지의 서장자가 미카와국 키라 장원을 기반으로 시작되었으며, 무로마치 막부에서 높은 지위를 누렸으나, 센고쿠 시대에 쇠퇴했다. 오슈 키라 씨는 가마쿠라 시대에 오슈칸레이로 활약했으나 쇠퇴했고, 에도 시대에는 마키타 씨로 성을 바꾸어 고케가 되었다. 토사 키라 씨는 미나모토노 마레요시의 후손으로, 가마쿠라 시대부터 센고쿠 시대까지 도사국에서 세력을 떨쳤으나,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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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라씨 | |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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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 미카와국 |
| 가문 | 세이와 겐지아시카가 씨서류 |
| 시조 | 키라 오사우지 (미카와 키라 씨) |
| 기타 시조 | 키라 요시츠구 (오슈 키라 씨) |
| 종별 | 무가, 사족 |
| 주요 인물 | 키라 사다요시 키라 요리야스 키라 요시히사 |
| 주요 지류 | 이마가와 씨 (무가, 사족) 오슈 키라 씨 (무가, 사족) 아라카와 씨 (무가) 니시오 씨 (무가, 자작) |
| 미카와 키라 씨 | |
| 거점 | 미카와국 하즈군 키라 장원 |
| 가조 (미카와) | 키라 미쓰우지 (아시카가 미쓰우지) |
| 신분 | 고케 |
| 본가 | [[파일:Ashikaga mon rev.svg|25px]] 아시카가 씨 |
| 오슈 키라 씨 | |
| 거점 | 무사시국 |
| 기타 | |
| 로마자 표기 | Kira-shi |
2. 미카와 키라 씨
미카와 키라 씨는 가마쿠라 시대 세이와 겐지 아시카가씨의 당주 아시카가 요시우지의 서장자 오사우지가 미카와국 키라 장원에서 지주직을 맡으면서 시작되었다. 오사우지의 동생 요시츠구에게서는 오슈 키라 씨(후의 무사시 키라 씨)가 나왔다. 미카와 키라는 남북조 시대에 사이죠 키라 씨와 토죠 키라 씨로 분열되었다.
오사우지의 손자인 키라 사다요시는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가마쿠라 막부 로쿠하라 탄다이 토벌을 도왔고, 사다요시의 아들 미츠요시 이래 무로마치 막부에서 히키츠케가시라를 세습하였다. 미카와 키라는 아시카가씨 일문 중에서도 가문이 높았고,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아시카가 쇼군 가문 다음가는 대우를 받는 아시카가 고산케(아시카가씨 고잇카, 시부카와씨, 이시바시씨 포함)의 으뜸이었다. "고쇼(쇼군)가 끊기면 키라가 잇고, 키라가 끊기면 이마가와가 잇는다"라고 속되게 말해졌으며, 산칸레이 가문(시바 씨, 호소카와 씨, 하타케야마 씨)보다 가문, 격식이 상위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막부 정치에 관여하거나 슈고 다이묘로서 세습 분국을 형성하는 면은 억제되었다.
전국 시대에는 미카와・무사시 두 계통 모두 본령에 따라 약간의 세력을 유지하였다. 사이죠의 미카와 키라는 전국 시대 후기에 미카와 잇코잇키에 참가해 멸망했지만, 토죠 미카와 키라와 오슈 키라(마키타 씨)는 도쿠가와씨를 섬겨 에도 시대에 가명을 이었다. 미카와 키라 씨는 4200석, 마키타 씨는 1420석을 영유해 에도 막부의 고케가 되었지만, 전자는 당주 키라 요시히사(키라 코즈케노스케)가 연루된 아코 사건(주신구라) 때문에 영지를 몰수당했다. 그 후에 마키타 씨가 키라 성으로 복성하고, 더욱 후에는 미카와 키라 씨 분가의 하타모토였던 토조 가문(500석)도 키라 성으로 복성했고, 이 양가가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졌으며, 유신 후에는 양가 모두 사족이 되었다. 후자는 다이쇼 원년에 키라 요시미치가 사망한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2. 1. 가마쿠라 시대
가마쿠라 시대의 세이와 겐지 아시카가씨의 당주 아시카가 요시우지의 서장자 오사우지가 지주직을 맡고 있는 미카와국 키라 장원에서 성씨로 삼으면서 시작되었다. 오사우지의 동생 요시츠구에게서는 오슈 키라씨 (후의 무사시 키라씨)가 나왔다. 또, 미카와 키라씨는 남북조 시대에 사이죠 키라씨와 토죠 키라씨로 분열되었다.오사우지의 손자인 키라 사다요시는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가마쿠라 막부 로쿠하라 탄다이의 토벌을 도왔다. 사다요시의 아들 미츠요시 이래 무로마치 막부에서 히키츠케가시라를 세습하였다.
아시카가 요시우지(아시카가 가문 3대 당주)가 미카와 국 하즈 군 기라 장원(현 아이치현 니시오시 기라정)의 지토 직을 얻어, 이를 서장자 나가우지에게 양도한 것으로 시작된다. 당시 기라 장원은 고야하기 강의 동서로 뻗어 있었으며, 강의 동서를 각각 "동조", "서조"로 구분하여 불렀다. 나가우지는 서조의 니시오 성을 본거지로 삼았고, 동생 요시쓰구는 동조(성은 현 니시오시 기라정 마다라메 성산)를 본거지로 삼았다. 요시쓰구의 계통은 이후의 동조 기라 씨와 구별하여 전기 동조 기라 씨라 불리지만, 후에 무쓰 국으로 옮겨 오슈 기라 씨가 된다. 또한, 나가우지는 하즈 군 이마가와 장원을 은거지로 삼았으나, 그 차남 구니우지가 이를 계승하여 이마가와 씨의 조상이 되었다.
조큐의 난 이후, 아시카가 씨는 슈고가 된 미카와 국에 많은 소령을 얻어 수많은 분가가 생겨났고, 나가우지는 그 총 지휘·감독권을 종가로부터 위임받는 입장에 있었다. 나가우지의 아들 미쓰우지는 시모츠키 소동에서 아다치 야스모리 편을 들었기 때문에 호조 씨에게 토벌을 받아 전사했고, 그 아들 사다요시는 겐코 3년 (1333년)에 종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 토벌을 위해 서쪽으로 향하는 도중 미카와 국에 머물렀을 때,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위해 일어설 것을" 진언했다고 전해지며, 이로 인해 다카우지는 로쿠하라 탄다이 공격을 감행했다는 일화가 있지만, 사료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2. 2. 남북조・무로마치 시대
가마쿠라 시대 세이와 겐지 아시카가씨의 당주 아시카가 요시우지의 서장자 나가우지가 미카와국 키라 장을 성으로 삼은 데서 시작되었다. 나가우지의 동생 요시쓰구로부터 오슈 키라 씨(후에 무사시 키라 씨)가 나왔다. 미카와 키라 씨는 남북조 시대에 사이조 키라 씨와 토조 키라 씨로 분열되었다.나가우지의 손자 키라 사다요시는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가마쿠라 막부 로쿠하라 단다이 토벌을 도왔고, 사다요시의 아들 미쓰요시 이래 무로마치 막부에서 히키쓰케 토닌을 세습했다. 미카와 키라 씨는 아시카가씨 일문 중에서도 가문이 높았고,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아시카가 장군 가문 다음가는 대우를 받는 아시카가 고산가(아시카가 씨 고이케, 시부카와 씨, 이시바시 씨 포함)의 으뜸이었다. "어소(장군)가 끊어지면 키라가 잇고, 키라가 끊어지면 이마가와가 잇는다"라고 속되게 말해졌으며, 산칸레이 가문(시바 씨, 호소카와 씨, 하타케야마 씨)보다 가문·격식이 상위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막정에의 관여나 슈고 다이묘로서 세습 분국을 형성하는 면은 억제되었다.
남북조 시대에 사다요시의 아들 미쓰요시는 적자 미츠사다와 함께 간오의 혼란에서 아시카가 타다요시 파에 속해 각지를 전전하며, 일시적으로 남조에 귀순한 후, 최종적으로 무로마치 막부에 항복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전기 토조 키라 씨가 무츠 국으로 이주한 후의 키라 장 동조의 피관층이 북조·타카우지 파로서 미쓰요시의 어린 넷째 아들 타카요시(요시타카)를 옹립하여 별가('''토조 키라 씨''')를 세웠기 때문에, 이후 사이조에 세력을 한정된 적류('''사이조 키라 씨''')와는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다투었지만, 후에 화해했다고 한다.
초대 나가우지의 은거소는 '마루야마 고쇼'라고 불렸지만, 무로마치 시대의 사이조 키라 씨 당주는 교토에 있었고, 아시카가 씨 일문 중에서도 시부카와 씨·이시바시 씨 두 가문과 함께 아시카가 고산가로서 별격의 격식을 갖추었다. 효죠슈에 대대로 임명된 가문 중에서도 키라 씨는 시키 효죠슈로서 타 씨 출신의 출세 효죠슈보다 중시되었지만, 한편 세습의 슈고 료코쿠를 형성하는 방향으로의 발전은 없었다.
동서 양 키라 씨는 남북조 시대 이래 약 1세기 동안 항쟁을 벌였고, 오닌의 난에서도 사이조 키라 요시자네가 동군, 토조 키라 요시후지가 서군에 각각 속해 싸웠다고 한다.
2. 3. 센고쿠 시대
가마쿠라 시대의 세이와 겐지 아시카가씨 당주 아시카가 요시우지의 서장자 오사우지가 미카와국 키라 장원에서 지주직을 맡으면서 성씨로 삼았다. 오사우지의 동생 요시츠구에게서 오슈 키라씨(후의 무사시 키라씨)가 나왔다. 미카와 키라씨는 남북조 시대에 사이죠 키라씨와 토죠 키라씨로 분열되었다.전국 시대에는 미카와・무사시 두 계통 모두 본령에 따라 약간의 세력을 유지하였다. 사이죠의 미카와 키라는 전국 시대 후기에 미카와 잇코잇키에 참가해 멸망했지만, 토죠 미카와 키라와 오슈 키라(마키타씨)는 도쿠가와씨를 섬겨 에도 시대에 가명을 이었다.
에이쇼 5년(1508년), 이마가와 요시타다의 아들 우지치카가 다시 도토미에 침공하여 동국의 슈고직을 획득하자, 키라 씨는 하마마츠 장을 지키기 위해 대관을 친 이마가와 측의 이오 씨로 교체했다. 친 시바의 오코치 씨는 이마가와 씨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고, 이오 씨의 본거지인 히키마 성을 빼앗아 도토미 복귀를 꾀하는 시바 요시타츠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마가와 우지치카는 에이쇼 14년(1517년)에 히키마 성을 탈환하여 오코치・고카이 씨 등을 멸망시켰다. 이 사이 키라 씨는 오코치 씨를 억제하지 않았고, 이오 씨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자세도 보이지 않아, 이마가와・시바 양 씨의 항쟁 사이에서 도토미의 소령 지배를 확보하기 위해 유연하게 대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바 요시타츠는 붙잡혀 본국 오와리 국으로 송환되었고, 하마마츠 장 대관 이오 겐렌은 이마가와 씨에 속하게 되었다.
사이조 키라 요시노부는 메이오의 정변 이후 아시카가 쇼군 가문의 가독 다툼에서 아시카가 요시타다(요시타네) 파에 속해 에이쇼 5년 요시타네의 쇼군 복귀에 공적이 있었다고 하여 미카와 슈고에 임명되었다는 설이 있지만[1], 키라 씨의 재경 봉공은 요시타네 정권의 약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확인되지 않게 된다. 같은 시기에 키라 씨는 이마가와・시바 씨의 항쟁 틈바구니에 놓이게 되고, 결국 도토미가 이마가와 씨의 분국이 된 결과, 사이조 키라 요시타카는 남겨진 소령이 있는 미카와로 하국하여 현지 지배에 전념하는 방침으로 전환했다.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장녀가 요시타카의 정실이었다는 것이 이마가와 씨의 계보에서 판명되었다[2]. 이마가와 씨는 키라 씨를 압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했지만, 하극상이라는 비판을 피하고 영국의 지배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본가인 키라 씨와의 양호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2].
남은 본령인 미카와에서는 도조 키라 씨로부터 편휘를 받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안쇼 마쓰다이라 가의 마쓰다이라 기요야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할아버지)가 대두했지만, 덴분 4년(1535년) 12월에 기요야스가 죽자, 오와리 국의 오다 노부히데 세력이 니시미카와에 미치기 시작했다. 고바야시 테루히코에 따르면, 사이조 키라 요시사토는 덴분 9년(1540년)에 노부히데의 침공을 받아 전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교로쿠・덴분 초년 무렵, 도조 키라 씨에서는 모치히로가 사이조 키라 요시타카의 아들 요시아스(요시사토의 동생)를 양자로 맞이하여 동서 양 키라 씨의 근친 관계가 재생되었다. 그러나 도조 당주가 된 요시아스는 이마가와 씨에 대한 대항을 도모하고 미카와 지배를 꾀하는 오다 씨에 가담한다. 요시아스는 요시타카의 측실의 아들로 보이며 정실(이마가와 씨)의 피를 잇지 않았던 듯하지만, 양가인 도조 키라뿐만 아니라 친가 사이조 키라의 가독마저 원해서 사이조 중신과 다툰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친 이마가와의 사이조 중신에 대항하기 위해 오다 씨와 결탁했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사이조 키라 씨는 요시아키(요시아스의 동생)가 뒤를 이었지만, 양 키라 씨는 근친 관계가 되어도 여전히 분열 기미의 상황에 있었다. 요시아스는 덴분 18년(1549년)에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 패하여 붙잡혀 스루가에 억류되었고, 이마가와 씨는 사이조 키라 요시아키에게 도조 가문도 아울러 잇도록 명했다. 이렇게 이마가와 씨의 영향 아래 통일된 키라 씨는 이마가와 씨에게 예속되는 입장에 만족했다. 다만, 고바야시 테루히코는 덴분 23년(1554년)에 요시아스가 일단 이마가와 씨에게 용서받아 양 키라 씨를 이었지만, 코지 원년(1555년)에 다시 반기를 든 결과 요시아키가 계승하는 지위에 올랐다고 본다.
당시 이마가와 씨에게 키라 씨의 존재는 가격 질서상 고민거리였던 듯하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중신 다이겐 셋사이의 덴분 18년(1549년) 9월 5일자 서장은 키라 씨 당주를 "어전님"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수신인도 당주 본인이 아닌 "사이조 제노신", 즉 사이조 키라 씨 가신 앞으로 하고 있다. 현실 세계에서는 이마가와 씨는 스루가・도토미・미카와 3개국을 지배하고 있고 약소 세력인 키라 씨는 그 아래 종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찰례의 세계에서는 셋사이는 요시아스의 배신(가신의 가신)으로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키라 요시아키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주선으로 오와리 슈고 시바 요시마사 및 이를 옹호하는 오다 노부나가와 의를 맺으려 했지만, 요시마사와 회견 자리 순서를 둘러싼 다툼을 일으켰다. 그 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요시모토가 노부나가에게 죽임을 당하고 미카와 국에서 이마가와 씨의 세력이 후퇴하자, 그 지배를 목표로 하는 마쓰다이라 이에야스(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요시아키는 대립하게 된다. 요시아키는 젠묘 둑 전투나 후지나미나와테 전투를 거쳐 이에야스에게 항복한다. 에이로쿠 6년(1563년), 미카와 잇코잇키가 발발하자 이에 가담하여 다시 이에야스에게 패배,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씨의 인질 시대에 면식이 있었다는 요시아스에게 키라 씨의 가독을 상속시켰다.
2. 4. 에도 시대
무로마치 막부에서 히키츠케토닌을 세습하였다. 미카와 키라 씨는 전국에 많이 존재했던 아시카가 씨 일문 중에서도 가문이 높았고,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아시카가 장군 가문 다음가는 대우를 받는 아시카가 고산케(아시카가 씨 고잇카라고도 하며, 그 외에 시부카와 씨, 이시바시 씨가 있다)의 으뜸으로 자리매김했다. "고쇼(쇼군)가 끊기면 키라가 잇고, 키라가 끊기면 이마가와 씨가 잇는다"라고 속되게 말해졌으며, 마찬가지로 아시카가 일문인 삼관령 가문(시바 씨, 호소카와 씨, 하타케야마 씨)보다 가문, 격식이 상위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막부 정치에 관여하거나 슈고 다이묘로서 세습 분국을 형성하는 면은 억제되었다.전국 시대에는 미카와, 무사시 두 계통 모두 본령에 따라 약간의 세력을 유지하였다. 사이죠의 미카와 키라는 전국 시대 후기에 미카와 잇코 잇키에 참가해 멸망했지만, 토조 미카와 키라와 오슈 키라(마키타 씨)는 도쿠가와 씨를 섬겨 에도 시대에 가문을 이었다. 미카와 키라 씨는 4200석, 마키타 씨는 1420석을 영유해 에도 막부의 고케가 되었지만, 전자는 당주 키라 요시히사(키라 코즈케노스케)가 연루된 아코 사건(주신구라) 때문에 영지를 몰수당했다. 그 후에 마키타 씨가 키라 성으로 복성하고, 더욱 후에는 미카와 키라 씨 분가의 하타모토였던 토조 가문(500석)도 키라 성으로 복성했고, 이 양가가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졌으며, 유신 후에는 양가 모두 사족이 되었다. 후자는 다이쇼 원년에 키라 요시미치가 사망한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에도 시대에 요시야스의 아들 요시사다가 마쓰다이라 기요야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할아버지)의 여동생을 어머니로 둔 관계를 통해 에도 막부에 등용되었고, 그의 아들 요시야 시대에 구 키라 장 안에서 3000석을 영유했으며, 무로마치 이래의 문벌의 높이도 더해져 고케의 가계를 부여받았다. 이 이후의 키라 씨는 막부의 의전 관계를 총괄하는 가문으로서 존속한다.
요시야 다음은 요시후유가 상속했다. 그의 장남 요시나카는 아코 사건(주신구라)으로 유명하다. 겐로쿠 14년(1701년), 요시나카는 의전 지도를 관련하여 칙사 교오야쿠의 하리마 아코번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로부터 덴추 참격을 받았고, 나가노리의 할복 후, 겐로쿠 15년(1702년)에 오이시 요시오 이하 아사노의 유신들에 의한 혼조 키라 저택에의 습격을 받아, 다케바야시 다카시게에게 베여 목이 잘렸다.[4]。그 후, 당주 키라 요시치카(요시나카의 손자)가 개역되어 스와로 유배되었고, 자식이 없어 유배지에서 병사했다. 요시치카가 묻힌 나가노현 스와시 홋케지에는, 2018년(헤이세이 30년) 6월, "키라 요시치카 공 위령회"에 의해 제작된 "키라 요시치카 공 목조 좌상"[5]이 본당 안쪽에 안치되어, 매년 제사가 치러지고 있다.
요시후유의 차남 요시스케(요시나카의 동생)는 도조로 성을 바꾸어 분가했고, 500석의 일반 하타모토로서 막부에 출사했으나, 교호 17년(1732년), 요시스케의 손자에 해당하는 요시타카가 미카와 키라 본가가 끊어졌다는 이유로 키라로의 복성을 막부에 청원하여 허락받았다. 이 구 도조가의 키라가는 도조 성 시대와 마찬가지로 일반 하타모토로 남았으며, 고케의 격식은 부여되지 않았다.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500석의 하타모토로서 존속한다. 역대 당주는 니시노마루 쇼인반 등을 맡았다.
에도 시대의 키라씨 저택은 다음과 같다.
| 저택 이름 | 존속 기간 | 현재 위치 |
|---|---|---|
| 가치바시 기라 저택(에도 가미야시키) | 겐로쿠 11년(1698년) 9월 6일까지 | 도쿄도 지요다구 마루노우치 1-11-1 (퍼시픽 센추리 플레이스 마루노우치) |
| 고후쿠바시 기라 저택 | 겐로쿠 14년(1701년) 8월 19일까지[7] | 도쿄도 지요다구 마루노우치 1-9-1 (다이마루그란토 교토 노스 타워) |
| 혼조 기라 저택 | 겐로쿠 아코 사건 당일까지 | 도쿄도 스미다구 료고쿠 3-13-9 (혼조 마쓰자카초 공원) |
| 아자부 야마토초 기라가 중저택 | 도쿄도 미나토구 롯폰기 1초메 | |
| 아자부 잇폰마쓰 기라 저택(에도 시모야시키) | 도쿄도 미나토구 모토아자부 1-1-10~20 (오스트리아 대사관, 다이호지 등) | |
| 스나마치 긴자 오나기카와 기라 가문 포 저택(구라야시키) | 도쿄도 고토구 기타스나 3초메 ("고즈케 호리 거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
2. 5. 메이지 시대 이후
전국 시대에는 미카와・무사시 두 계통 모두 본령에 따라 약간의 세력을 유지하였다. 사이죠의 미카와 키라는 전국 시대 후기에 미카와 잇키에 참가해 멸망했지만, 토죠 미카와 키라와 오슈 키라 (마키타씨)는 도쿠가와씨를 섬겨 에도 시대에 가문을 이었다. 미카와 키라씨는 4200석, 마키타씨는 1420석을 영위해 에도 막부의 고케가 되었지만, 전자는 당주 키라 요시히사 (키라 코즈케노스케)가 연루된 아코 사건 (츄신구라)때문에 개역되었다.[6] 이후, 마키타씨가 키라씨로 복성하고, 게다가 후에는 미카와 키라씨 분가의 하타모토였던 토죠가 (500석)도 키라 성씨로 복성해, 이 양가가 메이지 유신까지 계속되어, 유신 후에는 양가 모두 사족이 되었다. 후자는 다이쇼 원년에 키라 요시미치가 사망한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3. 오슈 (무사시) 키라 씨
에도 시대에 기라 가문은 여러 곳에 저택을 보유하고 있었다.
| 저택 이름 | 위치 | 설명 |
|---|---|---|
| 가치바시 기라 저택(에도 가미야시키) | 도쿄도 지요다구 마루노우치 1-11-1 | 겐로쿠 11년(1698년) 9월 6일까지. 현재는 퍼시픽 센추리 플레이스 마루노우치. |
| 고후쿠바시 기라 저택 | 도쿄도 지요다구 마루노우치 1-9-1 | 겐로쿠 14년(1701년) 8월 19일까지.[7] 부지 약 약 250.84m2이며, 우에스기 쓰네요리(요시치카의 친부)가 건축비 이상을 제공했다.[8] 현재는 다이마루그란토 교토 노스 타워. |
| 혼조 기라 저택 | 도쿄도 스미다구 료고쿠 3-13-9 | 겐로쿠 아코 사건 당일 밤, 요시오가 거주하며 참살, 요시치카가 중상을 입었다. |
| 아자부 야마토초 기라가 중저택 | 도쿄도 | 현재 롯폰기 1초메.[9] |
| 아자부 잇폰마쓰 기라 저택(에도 시모야시키) | 도쿄도 미나토구 모토아자부 1-1-10~20 | 현재 모토아자부 다이코쿠자카, 잇폰마쓰자카. 맞은편에 조조지 은거소(만지 2년(1659년)까지는 아자부 히카와 신사[10])가 있었다.[11] 현재 저택 터에는 오스트리아 대사관・다이호지 등. |
| 스나마치 긴자 오나기카와 기라 가문 포 저택(구라야시키) | 도쿄도 | "고즈케 호리 거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현재 키타스나 3초메(니시 오지마 역에서 10분). |
3. 1. 남북조・무로마치 시대
나리요시 친왕의 고쇼반이었던 '''기라 사다이에'''는 고코쿠 6년(1345년)에 오슈탄다이의 전신인 오슈칸레이까지 출세하여, 무쓰다가 성을 거점으로 아시카가 정권의 오슈 통치 요직을 맡았다. 간오의 혼란이 발발하자 타다요시 측에 속하여, 오슈칸레이로 타카우지 측에 속한 하타케야마 구니우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러나 그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해 온 남조의 기타바타케 아키노부에게 다가 성을 함락당한다. 이후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쇼헤이 7년 3월(1352년 4월)에 다가 성을 탈환하고, 쇼헤이 8년 5월(1353년 6월)에는 남조 측의 거점 우쓰네 성을 함락시켜 오슈의 남조 세력을 붕괴시켰으나, 이 직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11]기라 미쓰이에가 오슈칸레이로 임명되어 하타케야마 구니우지의 아들 구니아키와 오슈 소다이쇼요시노리의 아들 요시모토와 다투게 된다. 그 사이, 중앙에서 타다요시를 살해한 타카우지는 시바 이에카네를 새로운 오슈칸레이로 파견했기 때문에, 오슈는 일시적으로 네 명의 칸레이가 병립하게 된다. 하타케야마 씨, 이시타 씨를 꺾은 미쓰이에의 사후, 아들 기라 모치이에가 뒤를 이었으나 어린 나이였기에, 미쓰이에의 숙부 기라 사다쓰네와 미쓰이에의 동생 기라 하루이에가 다퉜다. 조지 6년(1367년), 아시카가 요시자카는 시바 나오지와 기라 사다쓰네에게 오슈칸레이로서 하루이에를 추토하도록 명하고, 더 나아가 오슈 소다이쇼로서 이시바시 무네요시를 파견했다. 이 결과 하루에는 패하여 도주하고, 오슈 기라 씨도 옛날의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11]
멸망 위기에 처한 오슈 기라 씨이지만, 초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토우지에게 불려진 '''하루이에'''가 고즈케 국 아키마로 이주하면서 서서히 세력을 회복하기 시작한다.[11]
가마쿠라 공방 가문에 섬긴 오슈 기라 씨는, 공방과 같은 아시카가 씨의 흐름을 잇는 가문으로서 "가마쿠라 공방의 어일가"라는 특별 대우를 받아, "아시카가 어일가중", "무고하이중"으로 칭해졌다. 기라 나리타카 대에 무사시국 에바라군 세타가야(도쿄도세타가야구)에 세타가야 성을 구축하고, 그곳에 토착한다. 이후, 거점을 바꿀 때마다 "마키타 고쇼", "세타가야 고쇼", "세타가야 도노"라고 불렸다.[11]
3. 2.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에이쇼 5년(1508년), 이마가와 요시타다의 아들 우지치카가 다시 도토미에 침공하여 슈고 직을 획득하자, 기라 씨는 하마마츠 장을 지키기 위해 대관을 친 이마가와 측의 이오 씨로 교체했다. 친 시바 씨인 오코치 씨는 이마가와 씨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고, 이오 씨의 본거지인 히키마 성을 빼앗아 도토미 복귀를 꾀하는 시바 요시타츠를 받아들였다. 이에 이마가와 우지치카는 에이쇼 14년(1517년)에 히키마 성을 탈환하여 오코치・고카이 씨 등을 멸망시켰다. 이 사이 기라 씨는 오코치 씨를 억제하지 않았고, 이오 씨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자세도 보이지 않으면서, 이마가와・시바 양 씨의 항쟁 사이에서 도토미의 소령 지배를 확보하기 위해 유연하게 대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바 요시타츠는 붙잡혀 본국 오와리 국으로 송환되었고, 하마마츠 장 대관 이오 겐렌은 이마가와 씨에 속하게 되었다.[1]사이조 기라 요시노부는 메이오 정변 이후 아시카가 쇼군 가문의 가독 다툼에서 아시카가 요시타다(요시타네) 파에 속해 에이쇼 5년의 요시타네의 쇼군 복귀에 공적이 있었다고 하여 미카와 슈고에 임명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기라 씨의 재경 봉공은 요시타네 정권의 약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확인되지 않게 된다.[1] 같은 시기에 기라 씨는 이마가와・시바 씨의 항쟁의 틈바구니에 놓이게 되고, 결국 도토미가 이마가와 씨의 분국이 된 결과, 사이조 기라 요시타카는 남겨진 소령이 있는 미카와로 하국하여 현지 지배에 전념하는 방침으로 전환했다.[2] 또한, 이마가와 씨의 계보에서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장녀가 요시타카의 정실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2] 기라 씨를 압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했지만, 하극상이라는 비판을 피하고 영국의 지배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이마가와 씨로서는 본가인 기라 씨와의 양호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고 보인다.[2]
남은 본령인 미카와에서는, 도조 기라 씨로부터 편휘를 받는 입장이었다고 한다.[3] 안쇼 마쓰다이라 가의 마쓰다이라 기요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할아버지)가 대두했지만, 덴분 4년(1535년) 12월에 기요야스가 죽자, 이번에는 오와리 국의 오다 노부히데의 세력이 니시미카와에 미치기 시작했다. 고바야시 테루히코에 따르면, 사이조 기라 요시사토는 덴분 9년(1540년)에 노부히데의 침공을 받아 전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3]
교로쿠・덴분 초년 무렵, 도조 기라 씨에서는 모치히로가 사이조 기라 요시타카의 아들 요시아스 (요시사토의 동생)을 양자로 맞이하여, 동서 양 키라 씨의 근친 관계가 재생되었다. 그러나 도조 당주가 된 요시아스는 이마가와 씨에 대한 대항을 도모하고, 미카와 지배를 꾀하는 오다 씨에 가담한다. 요시아스는 요시타카의 측실의 아들로 보이며 정실(이마가와 씨)의 피를 잇지 않았던 듯하지만, 양가인 도조 키라뿐만 아니라 친가 사이조 키라의 가독마저 원해서 사이조 중신과 다툰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친 이마가와의 사이조 중신에 대항하기 위해 오다 씨와 결탁했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사이조 기라 씨는 요시아키 (요시아스의 동생)가 뒤를 이었지만, 양 키라 씨는 근친 관계가 되어도 여전히 이처럼 분열 기미의 상황에 있었다. 요시아스는 덴분 18년(1549년)에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 패하여 붙잡혀 스루가에 억류되게 되고, 사이조 키라 요시아키가 도조 가문도 아울러 잇도록 이마가와 씨에게 명해졌다. 이렇게 이마가와 씨의 영향 아래 통일된 키라 씨는, 이마가와 씨에게 예속되는 입장에 만족했다. 다만, 고바야시 테루히코는, 덴분 23년(1554년)에 요시아스가 일단 이마가와 씨에게 용서받아 양 키라 씨를 이었지만, 코지 원년(1555년)에 다시 반기를 든 결과, 요시아키가 계승하는 지위에 올랐다고 본다.
당시 이마가와 씨에게 키라 씨의 존재는, 가격 질서상 고민거리였던 듯하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중신 다이겐 셋사이의 덴분 18년(1549년) 9월 5일자 서장은 키라 씨 당주를 "어전님"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수신인도 당주 본인이 아닌 "사이조 제노신" 즉 사이조 키라 씨 가신 앞으로 하고 있다. 현실 세계에서는 이마가와 씨는 스루가・도토미・미카와 3개국을 지배하고 있고, 약소 세력인 키라 씨는 그 아래 종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찰례의 세계에서는 셋사이는 요시아스의 배신(가신의 가신)으로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키라 요시아키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주선으로, 오와리 슈고 시바 요시마사 및 이를 옹호하는 오다 노부나가와 의를 맺으려 했지만, 요시마사와 회견의 자리 순서를 둘러싼 다툼을 일으키고 있다. 그 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요시모토가 노부나가에게 죽임을 당하고, 미카와 국에서 이마가와 씨의 세력이 후퇴하자, 그 지배를 목표로 하는 마쓰다이라 이에야스(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요시아키는 대립하게 된다. 요시아키는 젠묘 둑 전투나 후지나미나와테 전투를 거쳐 이에야스에게 항복한다. 에이로쿠 6년(1563년), 미카와 잇코잇키가 발발하자 이에 가담하여 다시 이에야스에게 패배,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씨의 인질 시대에 면식이 있었다는 요시아스에게 키라 씨의 가독을 상속시켰다.
3. 3. 에도 시대
에도 시대에 요시야스의 아들 요시사다가 마쓰다이라 기요야스(이에야스의 할아버지)의 여동생을 어머니로 둔 관계를 통해 에도 막부에 등용되었고, 그의 아들 요시야 시대에 구 키라 장 안에서 3,000석을 영유했으며, 무로마치 이래의 문벌의 높이도 더해져 고케의 가계를 부여받았다. 이 이후의 키라 씨는 막부의 의전 관계를 총괄하는 가문으로서 존속한다.[4]요시야 다음은 요시후유가 상속했다. 그의 장남 요시나카는 아코 사건(충신장)으로 유명하다. 겐로쿠 14년(1701년) 요시나카는 의전 지도를 관련하여 칙사 교오야쿠의 하리마 아코번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로부터 덴추 참격을 받았고, 나가노리의 할복 후, 겐로쿠 15년(1702년)에 오이시 요시오 이하 아사노의 유신들에 의한 혼조 키라 저택에의 습격을 받아, 다케바야시 다카시게에게 베여 목이 잘렸다. 그 후, 당주 키라 요시치카(요시나카의 손자)가 개역되어 스와로 유배되었고, 자식이 없어 유배지에서 병사했다. 요시치카가 묻힌 나가노현 스와시 홋케지에는, 2018년(헤이세이 30년) 6월, "키라 요시치카 공 위령회"에 의해 제작된 "키라 요시치카 공 목조 좌상"이 본당 안쪽에 안치되어, 매년 제사가 치러지고 있다.[5]
요시후유의 차남 요시스케(요시나카의 동생)는 도조로 성을 바꾸어 분가했고, 500석의 일반 하타모토로서 막부에 출사했으나, 교호 17년(1732년) 요시스케의 손자에 해당하는 요시타카가 미카와 키라 본가가 끊어졌다는 이유로 키라로의 복성을 막부에 청원하여 허락받았다. 이 구 도조가의 키라가는 도조 성 시대와 마찬가지로 일반 하타모토로 남았으며, 고케의 격식은 부여되지 않았다.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500석의 하타모토로서 존속한다. 역대 당주는 니시노마루 쇼인반 등을 맡았다.
'''기라 가문의 에도 시대 저택 위치'''
| 저택 이름 | 위치 | 비고 |
|---|---|---|
| 가치바시 기라 저택(에도 가미야시키) | 도쿄도 지요다구 마루노우치 1-11-1 | 겐로쿠 11년(1698년) 9월 6일까지. 현재는 퍼시픽 센추리 플레이스 마루노우치. |
| 고후쿠바시 기라 저택 | 도쿄도 지요다구 마루노우치 1-9-1 | 겐로쿠 14년(1701년) 8월 19일까지.[7] 부지 약 약 250.84m2이며, 우에스기 쓰네요리(요시치카의 친부)가 건축비 25000USD 이상을 제공했다.[8] 현재는 다이마루그란토 교토 노스 타워가 위치. |
| 혼조 기라 저택 | 도쿄도 스미다구 료고쿠 3-13-9 | 겐로쿠 아코 사건 당일 밤, 요시오가 거주하며 참살, 요시치카가 중상을 입었다. |
| 아자부 야마토초 기라가 중저택 | 현재 롯폰기 1초메[9] | |
| 아자부 잇폰마쓰 기라 저택(에도 시모야시키) | 현재 모토아자부 다이코쿠자카, 잇폰마쓰자카 | 맞은편에 조조지 은거소(만지 2년까지는 아자부 히카와 신사[10])가 있었다.[11] 현재 저택 터에는 오스트리아 대사관・다이호지 등이 있다. 도쿄도 미나토구 모토아자부 1-1-10~20. |
| 스나마치 긴자 오나기카와 기라 가문 포 저택(구라야시키) | 현재 키타스나 3초메(니시 오지마 역에서 10분) | "고즈케 호리 거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
3. 4. 메이지 시대 이후
기라 가문은 메이지 2년(1869년)에 사족에 편입되었다. 메이지 4년(1871년)에는 기라 타로 요시미치가 이 가문을 계승했다. 그는 메이지 31년(1898년)에 45세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다이쇼 원년(1912년) 8월 25일에 59세로 사망했다. 이 이후 미카와 기라 가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6]2017년 12월 15일에는 가고시마시 센간엔의 관음암에서 기라 요시히사의 명복을 비는 위령제가 열렸다. 기라 요시히사의 딸이 시마즈 쓰나타카에게 시집간 인연으로 세워진 것으로, 시마즈 가문 당주 등이 명복을 빌었다.[6]
기라 가문은 에도 시대에 여러 곳에 저택을 보유하고 있었다.
| 저택 이름 | 위치 | 설명 |
|---|---|---|
| 가치바시 기라 저택(에도 가미야시키) | 지요다구 마루노우치 1-11-1 | 겐로쿠 11년(1698년) 9월 6일까지. 현재는 퍼시픽 센추리 플레이스 마루노우치. |
| 고후쿠바시 기라 저택 | 지요다구 마루노우치 1-9-1 | 겐로쿠 14년(1701년) 8월 19일까지.[7] 부지 약 2700평이며, 우에스기 쓰네요리(요시치카의 친부)가 건축비 이상을 제공했다.[8] 현재는 다이마루그란토 교토 노스 타워. |
| 혼조 기라 저택 | 스미다구 료고쿠 3-13-9 | 겐로쿠 아코 사건 당일 밤, 요시오가 거주하며 참살, 요시치카가 중상을 입었다. |
| 아자부 야마토초 기라가 중저택 | 현재 롯폰기 1초메.[9] | |
| 아자부 잇폰마쓰 기라 저택(에도 시모야시키) | 미나토구 모토아자부 1-1-10~20 | 현재 모토아자부 다이코쿠자카, 잇폰마쓰자카. 맞은편에 조조지 은거소(만지 2년(1659년)까지는 아자부 히카와 신사[10])가 있었다.[11] 현재 저택 터에는 오스트리아 대사관・다이호지 등. |
| 스나마치 긴자 오나기카와 기라 가문 포 저택(구라야시키) | "고즈케 호리 거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현재 키타스나 3초메(니시 오지마 역에서 10분). |
4. 토사 키라 씨
'''토사 키라 씨'''(土佐 吉良氏|とさ きらし일본어)는 헤이안 시대 말부터 전국 시대에 걸쳐 도사국 아가와군 남부를 지배한 코쿠진 영주로, 토사칠웅 중 하나였다. 본성은 미나모토씨(일설에는 타이라씨)였다. 처음에는 '희(希)'를, 나중에는 '선(宣)'을 통자로 사용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동생 마레요시의 후손으로 알려졌으나, 전국 시대에 대가 끊겼다. 이후 모토야마씨가 잠시 키라 씨를 칭했으나, 모토야마씨가 쇠퇴한 후에는 쵸소카베씨의 지류가 키라 씨를 칭했고, 이 역시 전국 시대 말에 단절되었다.
4. 1. 미나모토노 마레요시 계통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동생 마레요시의 후손으로 알려졌으나, 전국 시대에 대가 끊겼다. 이후 모토야마씨가 기라씨를 칭했으나, 모토야마씨가 쇠퇴한 후에는 조소카베씨의 지류가 기라씨를 칭했고, 이 역시 전국 시대 말에 단절되었다.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다섯째 아들 도사노 곤노스케 기요시의 계통으로, 그의 둘째 아들인 '''미나모토노 기보(기라 기보)'''를 시조로 한다. 기요시는 헤이지의 난으로 도사국에 유배되었다. 성장하여 형 요리토모가 거병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도 거병을 계획했지만, 요와 원년(1181년)[13] 기습을 받아 패사했다.
『기라 이야기』에 따르면, 기요시가 다니던 히라타 쓰네토오의 딸이 기요시가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 아들은 겐큐 5년(1194년), 아버지의 친구였던 야스노 유키무네와 함께 가마쿠라 막부를 연 숙부 요리토모를 알현했다. 요리토모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결국 인정하여 도사국 아가와 군 내 수천 관과 미카와국기라 장원(현 아이치현니시오시) 내 말 사육지 300여 관을 하사했다. 이 아들은 이후 '기라 하치로 기보'를 칭하며 도사 기라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기요시의 장남 다카모리의 계통이라고도 한다. 이상의 경위는 『기라 이야기』에서만 확인되며, 동시대 공식 기록에는 기술이 없기 때문에, 기보의 실존 자체를 의심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신사의 棟札에 "기라 헤이조이"라고 기재되어 있어 헤이씨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13]
기보의 후예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현재의 고치시 하루노초 홍오카를 중심으로 한 재지 영주가 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호조 씨의 피관적 존재였지만, 기보 이후 6대손인 기요・기히데 형제가 고다이고 천황을 섬겼고, 겐코의 난에서 로쿠하라 탄다이 공략에 공을 세웠다. 이후 잠시 동안, 시코쿠에서 남조측의 맹주로서 이요의 고노 씨 등과 행동을 함께 했다.
기오(기히데의 손자)가 도사 수호호소카와 씨의 산하로 들어간 이후에는 북조측이 되었고, 남조측이 농성하는 오타카사카 성(후의 고치성) 공격에 참가하는 등 했다. 기오 이후에는 적남 기사다, 그 동생 노부자네가 계승했다고 하지만, 이때부터 통자가 "'''키'''"에서 "'''노부'''"로 변경되었고, 형제에게 공통적인 문자도 없기 때문에, 노부자네에 대해서는 혈통의 변화도 지적되고 있다. 이 무렵부터 도사 수호직을 세습하게 된 호소카와 씨를 따랐던 것으로 보이며, 오닌・분메이 시대에는 노부미치가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장수로서 상경, 오닌의 난에서 군공을 세웠다고 한다.
무로마치 시대의 도사국은 호소카와 씨에 의한 수호 영국제 하에 있었다. 기라 씨의 거점이었던 아가와 군 남부는 수호 대리격의 유력 국인 오타이라 씨의 지배 하에 있었고, 같은 지역의 모리야마 씨, 기즈카 씨 등과 대립했다. 1507년,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암살(에이쇼의 착란)된 것을 계기로, 도사 수호 대리의 호소카와 씨를 포함하여 각지의 호소카와 씨 일족은 교토로 상경했고, 오타이라 씨의 영향도 작아졌다. 이로 인해 도사는 수호에 의한 영지 지배가 끝나고 전국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기의 도사국은 맹주적인 존재인 도사 이치조 씨 아래, '''도사 칠웅'''(도사 칠 수호라고도 한다)이라고 불리는 기라 씨를 포함한 유력 7국인이 할거했다.
노부타다의 시대, 모토야마, 오타이라, 야마다 등의 여러 씨족과 함께 조소카베 가네쓰구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세력을 확대했다.[13] 호소카와 씨가 힘을 잃은 후의 도사에서는 도사 이치조 씨를 받들고, 노리쓰구의 시대에 이치조 씨로부터 이요 수호로 임명되어 최성기를 맞이했다. 노리쓰구는 덴분 연간에 스오에서 송학의 제일인자 난손 바-켄을 초빙하여, 도사 남학의 기초를 쌓았다. 그러나 바-켄의 강설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노리쓰구와 사촌 동생 노리요시뿐이었고, 노리쓰구의 적남 노부나오는 졸고 있었다고 한다.
노리쓰구가 사망하자, 노부나오가 가독을 계승했지만, 바-켄의 강설에 졸고 있는 인물로, 당주가 된 후에도 치정을 게을리했다. 그 이듬해에는 바-켄도 기라 씨를 떠나갔고, 노리요시는 이를 간했지만 금고형에 처해졌고, 에이로쿠 초기에 단식 자살하고 말았다. 이 무렵 도사 칠웅의 군웅할거가 격해져, 에이쇼 14년(1517년)의 에라누마 전투에서 다카오카 군의 유력자 쓰노 모토자네를 격파하고 도사 서부로 진출해 온 이치조 씨와, 도사 중앙부에 진출하여 아사쿠라 성을 축성한 모토야마 씨 양쪽에게 협공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스루가노카미 노부나오는 이치조 씨와 결탁하기로 결심했지만, 이로 인해 모토야마 씨는 기라 씨 공격을 결행했다. 모토야마 씨 측은 군을 둘로 나누어, 덴분 9년(1540년), 노부나오가 니요도가와에 사냥을 나간 틈을 노려 공격, 모토야마 시게토키에 의해 성주가 부재중이던 기라미네성이 함락되었다. 노부나오 역시 니요도가와에 온 군세와 응전했지만 격퇴당하여, 미나모토노 기요시 계통의 도사 기라 씨는 멸망한다.
기라 씨 멸망에는 여러 설이 있다. 『기라 이야기』에서는 에이로쿠 6년(1563년)에 조소카베 씨에게 공격받아 멸망했다고 하며, 에이로쿠 5년(1562년)에 모토야마 씨에게 공격받아 멸망했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자료나 모토야마 시게토키의 기라 성씨 참칭에서 신빙성은 희박하다.
4. 2. 모토야마 씨 계통
모토야마 씨는 기라 씨를 멸망시킨 후, 다이라 성(平城) 기라 씨를 칭했다고 한다. 이후 도사 이치조 씨가 이요 공략에 실패하는 틈을 타 아가와군 남부를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 그 지배도 십수 년 정도로, 이후 세력을 확장해 온 조소카베 씨에게 축출되었다.[3]4. 3. 쵸소카베 씨 계통
에이로쿠 6년(1563년), 쵸소카베 모토치카는 모토야마씨를 항복시킨 후, 자신의 친동생인 치카사다에게 노부나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여 키라 씨를 계승하게 하였다. 치카사다는 일문의 실력자로서 모토치카를 보좌하여 덴쇼 3년(1575년) 토사 이치조씨와의 전투(시만토가와 전투)에서 활약하였다.[2] 그러나 그의 아들 치카자네가 덴쇼 16년(1588년)에 모반 혐의로 살해당하면서, 쵸소카베씨 지족으로서의 토사 키라 씨도 2대 만에 멸망하였다.[2]5. 분국법 (키라 조항)
"법식" 13조와 "금제의 목" 10조로 구성된다. 키라 노부타테에 의해 제정되었다고 하나, 후세의 윤색이 이루어졌다.[1]
6. 키라 성
히로오카성(弘岡城)・키라가미네성(吉良ヶ峰城)이라고도 한다. 고치시 하루노정 홍오카카미 오타니에 있으며, 히로오카 평야가 한눈에 보이는 구릉 위에 있다. 남령과 북령의 2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초소카베씨의 지검장에는 기재가 없으나, 성의 서남쪽에 "니시노성(西ノ城)"이 기재되어 있어 성이 번성했을 때에는 이 두 성 체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토루와 건물 초석이 남아 "키라성터(吉良城跡)"로서 쇼와 35년(1960년) 하루노정 (현 고치시)에 의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참조
[1]
논문
永正前後の吉良氏について
科学研究費補助金成果報告書:代表研究者 青山幹哉
2007
[2]
서적
北条氏康の妻 瑞渓院
平凡社
2017-12
[3]
논문
三河吉良氏の断絶と再興
義周没後三〇〇年記念事業実行委員会
2006
[4]
간행물
忠臣蔵
兵庫県赤穂市 赤穂市総務部市史編さん室
1989-2014
[5]
PDF
広報にしお 平成30年12月1日号
https://www.city.nis[...]
2018-12-01
[6]
뉴스
吉良上野介を慰霊 島津家当主ら菩提弔う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17-12-16
[7]
문서
本所松坂町公園現地説明
[8]
문서
須田右近書状
[9]
서적
忠臣蔵史蹟事典 東京都版
五月書房
2008
[10]
문서
現在の氷川神社は一本松坂を南下した[[알젠틴 공화국]]領事館向かいに位置する。
[11]
서적
御府内場末往還其外沿革圖書
皇紀二千六百年記念「麻布区史」
1701
[12]
웹사이트
花岳寺由緒案内板
西尾観光公式web
西尾観光協会
[13]
서적
土佐国編年紀事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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