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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시탄 다이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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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리시탄 다이묘는 일본 전국 시대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다이묘들을 지칭한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과 남만 무역을 통한 이익 추구로 인해 등장했으며, 오토모 소린, 아리마 하루노부 등이 대표적이다. 기리시탄 다이묘는 사찰과 신사를 파괴하는 등 종교적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바테렌 추방령과 에도 시대의 금교령으로 인해 정치적 압박을 받았다. 결국 기리시탄 다이묘는 멸망하고, 기리시탄들은 불교로 개종하거나 숨어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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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시탄 다이묘

2. 역사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전국 시대 일본에 포교를 하기 위해 각지의 전국 다이묘들에게 영내 포교 허가를 요청하는 한편, 다이묘 자신에게도 포교를 실시했다. 이후 일본에 온 선교사들도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당시 다이묘들은 남만 무역이나 무기, 탄약(특히 초석) 등의 지원을 받기 위해 선교사들의 환심을 사려 했고, 일부는 선교사들이 제시하는 이익을 얻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기독교로 개종한 다이묘의 영지에서는 기독교가 널리 퍼졌다. 이후 기독교 교리와 고산 우콘과 같은 기리시탄 다이묘의 활약에 감화되어 스스로 개종하는 다이묘들이 나타났고, 남만 무역과 관계없는 내륙 지역에서도 기리시탄 다이묘가 늘어났다. 하타케야마 다카마사나 롯카쿠 요시카타처럼 몰락한 후 개종한 다이묘도 있었다.

그러나 일부 기리시탄 다이묘와 그 부하들은 영지 내의 사찰이나 신사를 파괴하고 승려에게 모독을 가하기도 했다. 오무라 스미타다는 영내의 사찰과 불상을 대규모로 파괴했는데, 이는 『오무라향촌기』와 루이스 프로이스의 보고서(1563년 11월 14일)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파괴 행위는 선교사들이 이교 척결을 위해 기리시탄 다이묘에게 교사한 경우도 있었다. 이교 척결은 신에 대한 봉사이며, 그 대가로 신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준다는 믿음이 이러한 행동의 이유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 신다 센리는 이러한 소동을 스페인포르투갈에서의 유대교(세파르딤) 및 이슬람교(모리스코) 배척, 종교재판과 같이 매우 배타적인 16세기부터 17세기의 기독교(로마 가톨릭)가 타 종교를 배격하지 않던 당시 일본과 접촉하면서 발생한 비극으로 분석한다.

한편, 신불과 사찰에 대한 파괴는 기독교 전래 이전에도 불교 신자들 사이에서 행해졌고,[1] 오무라 스미타다가 기독교 세례 후 진언밀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는 점[2] 등 당시 일본인들은 불교와 기독교를 대립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겸종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 비판도 있다.

불교신도를 숭배하는 다이묘 중에는 승려들의 의견을 듣고 기독교를 사교로 간주하여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이는 가톨릭 신자와 일본 전통 종교 신자들 사이의 증오와 대립을 심화시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를 통일한 후 바테렌 추방령을 발포하면서 기리시탄 다이묘에 대한 정치적 압력이 강해졌고, 많은 다이묘가 개역되거나 신불로의 강제 개종을 강요당했다. 이로써 기독교 금교와 박해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613년(게이초 18년) 금교령이 내려지자 다카야마 우콘마닐라(필리핀)로 추방되었고, 아리마 하루노부는 사형당했다. 이후 기리시탄 다이묘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들의 영지에 있던 수많은 기리시탄은 불교로 개종하거나 가쿠레 기리시탄이 되었다. 구 아리마 영지에서 일어난 시마바라의 난과 같은 대규모 일치 때 살해되어 역사의 표면에서 사라진 경우도 있었다.

2. 1. 전국 시대 기독교 전래와 기리시탄 다이묘의 등장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전국 시대일본을 잘 이해하고, 먼저 각지의 전국 다이묘들에게 영내에서의 포교 허가를 요청했고, 더 나아가 포교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다이묘 자신에 대한 포교도 실시했다. 후에 일본에 온 선교사들도 마찬가지로 각지의 다이묘를 알현하여 영내 포교 허가와 다이묘 자신에 대한 포교를 실시했다.

당시 다이묘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포교의 대가로 남만 무역이나 무기·탄약(특히 당시 일본에서 생산할 수 없었던 초석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의 지원 등을 제시한 자도 있었고, 다이묘 측도 이러한 선교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더 많이 얻으려고 입신하여 환심을 산 자도 있었다. 입신한 다이묘의 영지에서는 특히 현저하게 기독교가 퍼지게 되었다. 그 후, 기독교 교리와 기리시탄 다이묘의 인덕과 활약상(특히 다카야마 우콘)에 감화되어 스스로 입신하는 다이묘가 나타나 남만 무역과 관계없는 내륙부 등에서도 기리시탄 다이묘는 늘어났다. 하타케야마 다카마사나 롯각 요시카타처럼 몰락한 후 개종한 다이묘도 있었다.

2. 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탄압과 바테렌 추방령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전국 시대일본을 잘 이해하고, 각지의 전국 다이묘들에게 영내에서의 포교 허가를 요청했으며, 더 나아가 포교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다이묘 자신에 대한 포교도 실시했다. 후에 일본에 온 선교사들도 마찬가지로 각지의 다이묘를 알현하여 영내 포교 허가와 다이묘 자신에 대한 포교를 실시했다.

당시 다이묘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포교의 대가로 남만 무역이나 무기·탄약(특히 당시 일본에서 생산할 수 없었던 초석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의 지원 등을 제시한 경우도 있었고, 다이묘 측도 이러한 선교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더 많이 얻으려고 입신하여 환심을 산 경우도 있었다. 입신한 다이묘의 영지에서는 특히 현저하게 기독교가 퍼졌다. 그 후, 기독교 교리와 기리시탄 다이묘의 인덕과 활약상(특히 고산 우콘)에 감화되어 스스로 입신하는 다이묘가 나타나 남만 무역과 관계없는 내륙부 등에서도 기리시탄 다이묘는 늘어났다. 하타케야마 다카마사나 롯카쿠 요시카타처럼 몰락한 후 개종한 다이묘도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에 입신한 다이묘와 그 부하들 중에는 영지 내의 사찰이나 신사를 파괴하거나 불태우고 승려에게 모독을 가한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오무라 스미타다가 영내의 사찰과 불상과 같은 우상을 대규모로 파괴한 것이 『오무라향촌기』와 루이스 프로이스의 보고서(1563년 11월 14일)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파괴 행위는 선교사 자신이 이교 척결을 위해 기리시탄 다이묘에게 교사한 경우도 있었다. 이교 척결이야말로 신에 대한 봉사이며, 그 대가로 신이 합전에서 승리를 가져다준다는 다이묘 자신의 욕망도 그 이유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소동은 스페인포르투갈에서의 유대교(세파르딤) 및 이슬람교(모리스코) 배척이나, 종교재판과 같은 16세기부터 17세기의 매우 배타적이고 첨예한 상태에 있던 기독교(로마 가톨릭)가, 타종 배격을 좋게 보지 않았던 당시 일본과 접촉함으로써 발생한 비극이었다고 역사학자 신다 센리는 분석하고 있다.

한편, 신불과 사찰에 대한 파괴는 기독교 전래 이전에도 열심인 불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행해졌던 것[1], 오무라 스미타다가 기독교의 세례 후에 진언밀교 등에 깊이 빠져 있었다는 것 등 당시 일본인의 대부분은 불교와 기독교를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겸종 가능하다고 보았다는 지적[2]에서, 단순히 불교와 기독교의 대립에 원인을 구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불교신도를 숭배하는 다이묘 중에도, 승려들의 의견을 듣고 외래 종교인 기독교를 사교로 간주하여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가톨릭 신자와 일본의 구래의 종교 신자들 사이에 증오와 대립을 심화시키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천하가 통일되자 바테렌 추방령이 발포되어 기리시탄 다이묘에 대한 정치적인 압력이 강해지고, 많은 다이묘가 개역 혹은 신불에 대한 개종을 강요당해(강제 개종), 기독교의 금교와 박해의 시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2. 3. 에도 시대 금교령과 기리시탄 다이묘의 소멸

1613년(게이초 18년) 금교령이 내려지자, 히데요시에게 몰락했음에도 배교를 거부한 다카야마 우콘마닐라(필리핀)로 추방되었고, 아리마 하루노부는 사형당했다. 이후 기리시탄 다이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의 영지에 있던 수많은 기리시탄은 불교로 개종하거나 가쿠레 기리시탄이 되었다. 극단적인 예로 구 아리마 영지에서 일어난 시마바라의 난이라는 대규모 일치 때 살해되어 역사의 표면에서 사라져 갔다.

3. 주요 기리시탄 다이묘

규슈, 간사이, 도카이 지역에 주요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있었다.

지역다이묘
규슈오토모 요시시게(소린),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스미타다
간사이다카야마 우콘, 고니시 유키나가, 가모 우지사토, 구로다 요시타카, 쓰쓰이 사다쓰구
도카이오다 히데노부[1]


3. 1. 규슈 지역

3. 2. 간사이 지역

3. 3. 도카이 지역

오다 히데노부[1]

참조

[1] 논문 中世における寺社焼き討ちの実態と神威超克の論理 戎光祥出版
[2] 논문 戦国時代における神仏唾棄行為について 戎光祥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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