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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종교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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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럽 종교 전쟁은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발표 이후 서유럽에서 일어난 일련의 종교적, 정치적 분쟁을 통칭한다. 종교 개혁으로 촉발된 이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지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대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정치적, 경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장기간 지속되었다. 주요 전쟁으로는 30년 전쟁, 위그노 전쟁, 네덜란드 독립 전쟁 등이 있으며, 이 과정에서 막대한 인명 피해와 사회·경제적 변화가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개신교 세력이 위축되고, 각 지역의 종교적 지형이 재편되었으며, 베스트팔렌 조약 등을 통해 종교적 관용과 국가 간의 세력 균형이 모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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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종교전쟁
개요
1648년 유럽의 종교적 분열 지도.
1648년 유럽의 종교적 분열 지도.
시기대략 1524년 ~ 1697년
위치유럽
원인종교 개혁
종교적 불관용
정치적 경쟁
결과다양한 국가에서 개신교 인정
국가 권력 강화
종교적 관용 증가
교전 세력
가톨릭 세력합스부르크 왕가
프랑스 왕국 (때때로)
기타 가톨릭 국가
개신교 세력네덜란드 공화국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스웨덴
덴마크-노르웨이
다양한 개신교 국가 및 도시
주요 전쟁 및 분쟁
종교 개혁 전쟁독일 농민 전쟁 (1524년~1525년)
슈말칼덴 전쟁 (1546년~1547년)
프랑스 종교 전쟁 (1562년~1598년)
80년 전쟁 (1568년~1648년)
30년 전쟁보헤미아 반란 (1618년~1620년)
팔츠 전쟁 (1620년~1623년)
덴마크 전쟁 (1625년~1629년)
스웨덴 전쟁 (1630년~1635년)
프랑스-스웨덴 전쟁 (1635년~1648년)
기타 분쟁아일랜드 동맹 전쟁 (1641년~1653년)
세 개의 왕국 전쟁 (1639년~1651년)
구십년 전쟁 (1688년~1697년)
주요 인물
가톨릭 지도자카를 5세
펠리페 2세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개신교 지도자마르틴 루터
장 칼뱅
올리버 크롬웰
구스타브 2세 아돌프

2. 역사적 배경

유럽 종교 전쟁은 '''종교개혁 전쟁'''으로도 알려져 있다.[6][7][8][9]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인쇄술의 도움으로 빠르게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교황청의 통제를 어렵게 만들었다. 1521년, 루터는 파문당했고, 이는 서방 기독교 내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루터교 사이의 분열을 심화시켰으며, 다른 개신교들이 교황의 권위에 저항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의 종교적 성격은 논쟁의 대상이었으며, 국가적, 왕조적, 재정적 이해관계와 같은 다른 요인들과 대조되었다.[1] 학자들은 이 시기 일부 유럽 전쟁이 종교 개혁으로 촉발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전쟁 (1494–1559, 가톨릭교도만 관련됨)이나 북방 7년 전쟁 (1563–1570, 루터교도만 관련됨)이 있다.[6] 다른 이들은 종교 간 동맹의 존재를 강조한다. 예를 들어 루터교 공작 작센 선제후 모리츠는 1547년 제1차 슈말칼덴 전쟁에서 가톨릭 황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지원하였고, 가톨릭 국왕 프랑스의 앙리 2세는 1552년 제2차 슈말칼덴 전쟁에서 루터교의 대의를 지원했다.[1]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이] 시기의 종교 전쟁은 주로 종교적 안전과 정치적 이익을 위해 치러졌다"고 주장한다.[1]

20세기 후반, 윌리엄 M. 라몬트를 포함한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은 1639년부터 1653년까지의 삼국 전쟁의 주요 원동력이 종교라고 주장했고, 존 모릴 (1993)은 이것이 "최초의 유럽 혁명이 아니라... 종교 전쟁의 마지막"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의회파 정치 선전을 연구한 글렌 버지스와 같은 역사학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2. 1. 종교 개혁의 시작

2. 2.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배경

3. 주요 전쟁 및 분쟁

신성 로마 제국은 종교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제국은 선출된 신성 로마 황제가 통치하는 사실상 독립적인 국가들의 집합체였으며, 14세기 이후 황제는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주로 배출되었다. 루터교는 1517년 비텐베르크에서 시작된 이후 독일과 후스 전쟁 (1419년-1434년)이 일어난 후스파 보헤미아 지역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마르틴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의 설교는 유럽 전역의 긴장을 고조시켰고, 북독일에서 루터는 지역 군주와 도시 엘리트의 지지를 얻어 교회를 장악하고 재건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를 비롯한 북독일 군주들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불법화 칙령으로부터 루터를 보호하고, 관청 종교 개혁을 통해 자신들의 영토에 루터교 예배를 강제했다. 교회 재산이 몰수되고, 루터교 종교 개혁을 채택한 대부분의 영토에서 가톨릭 예배가 금지되면서 제국 내 정치적 갈등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1522년 프란츠 폰 지킹겐이 이끄는 개신교 및 종교 인문주의 독일 기사들의 반란인 기사 전쟁이 일어났으나, 이는 오래가지 못하고 진압되었다. 하지만, 이는 1524년부터 1526년까지 벌어진 독일 농민 전쟁에 영감을 주었다.

독일 농민 전쟁은 급진 종교 개혁가들의 가르침에서 영감을 받은 민중 봉기로, 재세례파 농민, 마을 사람, 귀족들이 참여했다. 이 갈등은 주로 현대 독일의 남부, 서부, 중부 지역에서 발생했지만, 인접한 현대 스위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1525년 봄과 여름, 약 30만 명의 농민 반군이 참여했고, 당대 추산에 따르면 10만 명이 사망했다. 토마스 뮌처와 같은 급진 개혁가들은 혁명적인 종교 및 정치 교리를 전파했고, 농민 봉기는 모든 헌법 당국에 대한 전쟁으로 변질되었다. 1525년 5월 15일 프랑켄하우젠 전투에서 반군이 전멸한 후, 뮌처와 그의 농민 추종자 수천 명이 처형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반군의 요구를 거부하고 독일 통치자들이 봉기를 진압할 권리를 옹호했다.

농민 전쟁 이후, 베스트팔렌의 뮌스터에서 신정 정치를 세우려는 시도가 있었다(1532–1535). 얀 판 레이덴은 왕으로 즉위하여 일부다처제를 합법화하고 공동 재산을 확립했다. 그러나 1535년 6월 24일 마을은 포위자들에게 점령되었고, 레이덴과 그의 추종자들은 처형되었다.

 A castle stands at the top of a steep hill, and its walls are being blown away in explosion and fire. The fortress is surrounded by mounted and foot soldiers and several units of mounted soldiers are racing up the hill toward the castle on its peak. Frans Hogenberg, a Dutch engraver, and artist of the 16th century, was living in the Electorate of Cologne during the war, and engraved this picture of the destruction of the Godesburg (fortress).
1583년 쾰른 전쟁 중 고데스부르크(Godesberg) 마을 위의 요새 파괴; 벽은 광산에 의해 파괴되었고 대부분의 수비수는 죽임을 당했다. 16세기 네덜란드 조각가이자 예술가인 프란스 호겐베르크가 조각했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 이후, 황제는 의회에서 승인되지 않은 모든 종교적 혁신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루터교 공들은 1530년 12월 슈말칼덴에서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여 제국적 조치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 1532년 황제는 "뉘른베르크 평화"를 제안하여 대결에서 물러났고, 이는 10년 이상 독일 땅에 평화를 유지시켰다.

평화는 슈말칼덴 전쟁 (1546년-1547년)으로 끝났는데, 이 분쟁은 카톨릭의 우세로 끝났고 황제는 아우크스부르크 잠정 협정을 부과했다. 그러나 다양한 개신교 세력은 잠정 협정을 거부했고, 1552년에 제2차 슈말칼덴 전쟁이 발발하여 1555년까지 지속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1555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 의해 서명되었으며, 독일의 루터교와 카톨릭 사이의 폭력을 종식시켰다. 독일 공들은 자신의 영토의 종교(루터교 또는 카톨릭)를 선택할 수 있었고, 각 주의 시민들은 통치자의 종교를 따라야 했다(''cuius regio, eius religio''의 원칙).

16세기 후반, 종교적 긴장이 강하게 유지되었고, 쾰른 전쟁 (1582–83)이 발발했다. 1606년 독일 자유 제국 도시 도나우뵈르트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이는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가 개입하도록 유도했다. 16세기 말, 라인 지역과 남부 독일은 대체로 카톨릭, 루터교는 북부, 칼뱅교는 중서부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에서 우세했다. 후자는 1608년에 복음주의 연합 동맹을 결성했다.

|thumb|250px|''전쟁의 대참상'' by 자크 칼로, 1632]]

1617년, 신성 로마 황제이자 보헤미아의 왕이었던 마티아스가 후계자 없이 죽을 것이 분명해지자, 그의 영토는 슈티리아의 페르디난트에게 넘어갈 예정이었다. 후스파였던 보헤미아가 페르디난트를 왕세자로 거부하면서 1618년 프라하에서 그의 대표가 투척되면서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30년 전쟁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주로 오늘날 독일 영토에서 벌어졌으며, 대부분의 주요 강대국이 참여했다. 처음에는 신성 로마 제국개신교와 가톨릭교 간의 종교적 갈등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유럽 대부분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전쟁으로 발전했다. 이 전쟁은 유럽의 주도권을 위한 프랑스-합스부르크 경쟁의 연장선이었다.

1631년 마그데부르크 약탈. 특히 크로아티아와 왈론 연대는 맹렬한 살육과 혼란을 일으켜 도시의 3만 명의 시민과 방어군 중 1만 명의 생존자만 남겼다. 이는 전쟁 최악의 학살이었다.


용병 군대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30년 전쟁의 주요 영향은 약탈하는 군대에 의해 샅샅이 긁힌 지역 전체의 황폐화였다. 광범위한 기근과 질병은 독일 국가의 인구를 황폐화시켰다.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의 일부인 뮌스터 조약으로 끝났다.

전쟁 기간 동안 독일 인구는 평균 30% 감소했다. 스웨덴 제국 군대만 해도 독일에서 2,000개의 성, 18,000개의 마을, 1,500개의 도시를 파괴했다.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어 사용 지역에 재앙을 초래했고, 제국의 권력은 오스트리아와 합스부르크 영토로 물러났다.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독립을 확정했다. 이 평화 조약은 독일의 가톨릭, 루터교, 칼뱅주의 종교 분열을 제도화했다.

1625년, 30년 전쟁의 일환으로,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는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인접한 니더작센의 루터교 통치자들을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에 대항하여 돕기로 동의했다. 크리스티안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과 틸리의 연합군 앞에서 후퇴해야 했다. 평화 협상은 1629년 뤼베크 조약에서 마무리되었는데, 이 조약은 크리스티안 4세가 프로테스탄트 독일 국가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면 덴마크-노르웨이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3. 1. 신성 로마 제국 내 분쟁

신성 로마 제국은 종교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제국은 선출된 신성 로마 황제가 통치하는 사실상 독립적인 국가들의 집합체였으며, 14세기 이후 황제는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주로 배출되었다. 루터교는 1517년 비텐베르크에서 시작된 이후 독일과 후스 전쟁 (1419년-1434년)이 일어난 후스파 보헤미아 지역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마르틴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의 설교는 유럽 전역의 긴장을 고조시켰고, 북독일에서 루터는 지역 군주와 도시 엘리트의 지지를 얻어 교회를 장악하고 재건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를 비롯한 북독일 군주들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불법화 칙령으로부터 루터를 보호하고, 관청 종교 개혁을 통해 자신들의 영토에 루터교 예배를 강제했다. 교회 재산이 몰수되고, 루터교 종교 개혁을 채택한 대부분의 영토에서 가톨릭 예배가 금지되면서 제국 내 정치적 갈등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1522년 프란츠 폰 지킹겐이 이끄는 개신교 및 종교 인문주의 독일 기사들의 반란인 기사 전쟁이 일어났으나, 이는 오래가지 못하고 진압되었다. 하지만, 이는 1524년부터 1526년까지 벌어진 독일 농민 전쟁에 영감을 주었다.

독일 농민 전쟁은 급진 종교 개혁가들의 가르침에서 영감을 받은 민중 봉기로, 재세례파 농민, 마을 사람, 귀족들이 참여했다. 이 갈등은 주로 현대 독일의 남부, 서부, 중부 지역에서 발생했지만, 인접한 현대 스위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1525년 봄과 여름, 약 30만 명의 농민 반군이 참여했고, 당대 추산에 따르면 10만 명이 사망했다. 토마스 뮌처와 같은 급진 개혁가들은 혁명적인 종교 및 정치 교리를 전파했고, 농민 봉기는 모든 헌법 당국에 대한 전쟁으로 변질되었다. 1525년 5월 15일 프랑켄하우젠 전투에서 반군이 전멸한 후, 뮌처와 그의 농민 추종자 수천 명이 처형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반군의 요구를 거부하고 독일 통치자들이 봉기를 진압할 권리를 옹호했다.

농민 전쟁 이후, 베스트팔렌의 뮌스터에서 신정 정치를 세우려는 시도가 있었다(1532–1535). 얀 판 레이덴은 왕으로 즉위하여 일부다처제를 합법화하고 공동 재산을 확립했다. 그러나 1535년 6월 24일 마을은 포위자들에게 점령되었고, 레이덴과 그의 추종자들은 처형되었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 이후, 황제는 의회에서 승인되지 않은 모든 종교적 혁신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루터교 공들은 1530년 12월 슈말칼덴에서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여 제국적 조치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 1532년 황제는 "뉘른베르크 평화"를 제안하여 대결에서 물러났고, 이는 10년 이상 독일 땅에 평화를 유지시켰다.

평화는 슈말칼덴 전쟁 (1546년-1547년)으로 끝났는데, 이 분쟁은 카톨릭의 우세로 끝났고 황제는 아우크스부르크 잠정 협정을 부과했다. 그러나 다양한 개신교 세력은 잠정 협정을 거부했고, 1552년에 제2차 슈말칼덴 전쟁이 발발하여 1555년까지 지속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1555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 의해 서명되었으며, 독일의 루터교와 카톨릭 사이의 폭력을 종식시켰다. 독일 공들은 자신의 영토의 종교(루터교 또는 카톨릭)를 선택할 수 있었고, 각 주의 시민들은 통치자의 종교를 따라야 했다(''cuius regio, eius religio''의 원칙).

16세기 후반, 종교적 긴장이 강하게 유지되었고, 쾰른 전쟁 (1582–83)이 발발했다. 1606년 독일 자유 제국 도시 도나우뵈르트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이는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가 개입하도록 유도했다. 16세기 말, 라인 지역과 남부 독일은 대체로 카톨릭, 루터교는 북부, 칼뱅교는 중서부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에서 우세했다. 후자는 1608년에 복음주의 연합 동맹을 결성했다.

|thumb|250px|''전쟁의 대참상'' by 자크 칼로, 1632]]

1617년, 신성 로마 황제이자 보헤미아의 왕이었던 마티아스가 후계자 없이 죽을 것이 분명해지자, 그의 영토는 슈티리아의 페르디난트에게 넘어갈 예정이었다. 후스파였던 보헤미아가 페르디난트를 왕세자로 거부하면서 1618년 프라하에서 그의 대표가 투척되면서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30년 전쟁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주로 오늘날 독일 영토에서 벌어졌으며, 대부분의 주요 강대국이 참여했다. 처음에는 신성 로마 제국개신교와 가톨릭교 간의 종교적 갈등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유럽 대부분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전쟁으로 발전했다. 이 전쟁은 유럽의 주도권을 위한 프랑스-합스부르크 경쟁의 연장선이었다.

용병 군대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30년 전쟁의 주요 영향은 약탈하는 군대에 의해 샅샅이 긁힌 지역 전체의 황폐화였다. 광범위한 기근과 질병은 독일 국가의 인구를 황폐화시켰다.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의 일부인 뮌스터 조약으로 끝났다.

전쟁 기간 동안 독일 인구는 평균 30% 감소했다. 스웨덴 제국 군대만 해도 독일에서 2,000개의 성, 18,000개의 마을, 1,500개의 도시를 파괴했다.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어 사용 지역에 재앙을 초래했고, 제국의 권력은 오스트리아와 합스부르크 영토로 물러났다.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독립을 확정했다. 이 평화 조약은 독일의 가톨릭, 루터교, 칼뱅주의 종교 분열을 제도화했다.

1625년, 30년 전쟁의 일환으로,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는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인접한 니더작센의 루터교 통치자들을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에 대항하여 돕기로 동의했다. 크리스티안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과 틸리의 연합군 앞에서 후퇴해야 했다. 평화 협상은 1629년 뤼베크 조약에서 마무리되었는데, 이 조약은 크리스티안 4세가 프로테스탄트 독일 국가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면 덴마크-노르웨이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3. 2. 프랑스 종교 전쟁 (위그노 전쟁)

프랑수아 1세와 앙리 2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해 프로테스탄트 독일 제후들을 지원했지만, 국내에서는 루터교 사상의 확산을 억압했다.[33] 1550년대 제네바 등지에서 조직적으로 유입된 칼뱅주의 설교자들은 프랑스에 수백 개의 지하 칼뱅주의 회중을 설립하는 데 성공했다.[33]

프랑스 서부에 위치한 라로셸의 요새화된 항구는 두 차례의 장기간 포위를 거치며 프로테스탄트의 거점이 되었다.


지하 칼뱅주의 설교와 귀족 계층과의 비밀 동맹은 정치적, 종교적 통제를 얻기 위한 직접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귀족들은 교회 재산과 수도원 토지를 차지하기 위해, 칼뱅주의의 가르침은 신성하지 않은 통치자를 전복해야 할 의무를 강조하며 종교 개혁을 지지했다.[33] 1560년 3월, 아무아즈 음모는 불만을 품은 귀족 집단이 어린 국왕 프랑수아 2세를 납치하고 가톨릭 기즈 가문을 제거하려 했던 시도였으나 실패했다. 1560년 루앙과 라로셸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이미지와 조각상 파괴가 발생했고, 이듬해 20개 이상의 도시와 마을로 확대되었다. 이는 상스, 카오르, 카르카손, 투르 등에서 가톨릭 도시 단체의 학살과 폭동을 유발했다.[33]

1560년 12월, 프랑수아 2세가 사망하고 카트린 드 메디치가 아들 샤를 9세의 섭정이 되었다. 그녀는 위그노 부르봉 가문에 우호적으로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생제르맹 칙령(1562년 1월)으로 위그노에게 도시 밖 공개 예배와 도시 안 사적 예배를 허용했다. 그러나 3월 1일, 기즈 가문의 일파가 바시쉬르블레즈에서 불법적인 칼뱅주의 예배를 공격하면서 칙령은 폐지되고 제1차 전쟁이 촉발되었다.[33]

루이 1세 드 부르봉, 콩데 공과 콜리니 제독이 이끄는 부르봉 가문은 영국의 지원을 받아 루아르 강을 따라 전략적인 도시들을 점령했다. 드뢰 전투와 오를레앙 전투가 주요 교전이었고, 1563년 2월 오를레앙에서 기즈 공작 프랑수아가 암살당했다. 카트린은 아무아즈 칙령(1563)을 통해 휴전을 중재하여 프로테스탄트 예배에 대한 통제된 종교적 관용을 규정했다.[33]

그러나 이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웠다. 네덜란드에서 종교적 불안이 커지면서 주변 지역의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었고, 위그노는 네덜란드에 대한 개입을 위해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567년 프로테스탄트 군대는 메오에서 샤를 9세를 붙잡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이는 제2차 전쟁을 유발, 롱쥐모 평화 조약(1568년 3월)으로 끝났다.[33]

1568년 9월, 제3차 전쟁이 발발했다. 카트린과 샤를은 기즈 가문과 동맹을 맺었다. 루이 1세 드 부르봉, 콩데 공 지휘하의 위그노 군대는 독일 프로테스탄트 민병대의 지원을 받았다.[34] 칼뱅주의자인 츠바이브뤼켄 백작 볼프강이 이끌었다.[34] 공작이 전투에서 사망한 후 만스펠트 백작과 네덜란드의 오라녜 공 빌럼과 그의 형제 루이와 헨리가 그의 뒤를 이었다. 위그노 자금의 상당 부분은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으로부터 나왔다. 가톨릭 측은 앙주 공작 앙리 (후에 앙리 3세)가 지휘했으며, 스페인, 교황령, 토스카나 대공국의 군대가 지원했다.[35]

1572년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


프로테스탄트 군대는 푸아투와 상트주 지역의 여러 도시와 앙굴렘 및 코냑을 포위했다. 자르나크 전투(1569년 3월 16일)에서 콩데 공이 사망하면서 콜리니 제독이 프로테스탄트 군대의 지휘권을 맡게 되었다. 콜리니와 그의 군대는 남서부로 후퇴하여 가브리엘 드 몽고메리 백작과 재결합했고, 1570년 봄, 그들은 툴루즈를 약탈하고 프랑스 남부를 관통하는 길을 뚫고 론 계곡을 따라 라 샤리테쉬르루아르로 향했다. 왕실 부채와 샤를 9세의 평화 추구[36]로 생제르맹 앙 레 평화 조약(1570년 8월 8일)이 체결되어 위그노에게 몇 가지 양보를 허용했다. 1572년, 프로테스탄트 앙리 드 나바르와 왕의 여동생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결혼식에 참석한 지역 가톨릭교도와 프로테스탄트 군대 사이의 고조된 긴장은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로 절정에 달했다. 이것은 1572년의 제4차 및 제5차 내전과 1573–1576년의 내전으로 이어졌다.[33]

앙리 3세는 1575년 랭스에서 즉위했지만, 제5차 전쟁이 이미 다시 시작되었다. 1576년, 국왕은 보리에 칙령에 서명하여 칼뱅주의자들에게 약간의 양보를 했지만, 1577년 짧은 제6차 내전이 일어났다. 기즈 공작 앙리 1세는 프랑스에서 가톨릭 대의를 보호하기 위해 가톨릭 동맹을 결성했다. 제7차 전쟁(1579–1580)은 플렉스 조약의 교착 상태로 끝났다.[33]

1584년 국왕의 막내 동생 앙주 공작 프랑수아가 사망하면서 취약한 타협은 끝났다. 앙리 3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살리카법에 따라 왕위의 다음 상속자는 칼뱅주의자인 나바르의 앙리였다. 기즈 공작의 압력으로 앙리 3세는 프로테스탄트교를 억압하고 나바르의 앙리의 왕위 계승권을 무효화하는 칙령을 발포했다.[33]

1584년 12월, 기즈 공작은 스페인 펠리페 2세를 대신하여 가톨릭 동맹과 조인빌 조약에 서명했으며, 펠리페 2세는 동맹에 상당한 연간 지원금을 제공했다. 상황은 제8차 전쟁(1585–1589)으로 악화되었다. 나바르의 앙리는 다시 독일 제후들과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에게 외국 원조를 요청했다. 16인 위원회의 영향력 아래 있는 파리의 가톨릭 신자들은 앙리 3세와 칼뱅주의자들을 격파하지 못한 그의 실패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1588년 5월 12일, 민중 봉기가 파리 시내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고, 앙리 3세는 도시에서 도망쳤다. 16인 위원회는 정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기즈 공작을 파리로 환영했다. 기즈 가문은 암호 문자를 상속자로 하는 해결책을 제안했고, 삼부회를 블루아에서 개최할 것을 요구했다.[33]

앙리 국왕은 블루아 성에서 기즈의 앙리와 그의 형제인 기즈 추기경 루이 2세를 함정에 빠뜨려 살해했다(1588년 12월 23일). 기즈 공작은 프랑스에서 매우 인기가 많았고, 동맹은 앙리 국왕에게 공개 전쟁을 선포했다. 파리 고등법원은 국왕을 상대로 형사 고발을 시작했고, 국왕은 사촌인 나바르의 앙리와 힘을 합쳐 동맹에 맞서 싸웠다.[33]

마옌 공작 샤를 드 로렌이 가톨릭 동맹의 지도자가 되었다. 동맹의 언론은 반 왕당파 팜플렛을 인쇄했고, 소르본 대학교는 앙리 3세를 폐위하는 것이 정당하고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1589년 7월, 자크 클레망이라는 수도사가 국왕과 면담을 하고 그의 비장에 긴 칼을 찔렀다. 클레망은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고, 임종을 앞둔 앙리 3세는 나바르의 앙리를 불러 국정의 이름으로 그에게 가톨릭교도가 될 것을 간청하며, 그가 거부하면 끔찍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살리카법에 따라 앙리를 자신의 상속자로 지명했다.[33]

1589년, 나바라의 앙리 4세는 남부와 서부를, 가톨릭 동맹은 북부와 동부를 장악했다. 가톨릭 동맹의 지도력은 마옌 공작에게 넘어갔다. 1589년 9월, 앙리는 아르크 전투에서 공작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앙리의 군대는 겨울 내내 노르망디를 휩쓸며 마을들을 점령해나갔다.[33]

|thumb|250px|앙리 4세의 아들 루이 13세의 통치 초반에는 1620년대의 일련의 위그노 반란을 포함한 국내 분쟁이 특징이었다.]]

앙리 4세는 파리를 점령해야 했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톨릭 동맹의 언론과 지지자들은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명의 순교자와 같이 프로테스탄트 잉글랜드에서 가톨릭 사제들과 평신도들에게 저질러진 잔학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퍼뜨렸다. 파리시는 칼뱅주의 왕을 받아들이는 대신 죽을 때까지 싸울 준비를 했다. 1590년 3월 14일, 이브리 전투는 앙리 4세의 또 다른 승리였고, 앙리의 군대는 파리를 포위했지만, 포위는 스페인의 지원으로 무산되었다. 앙리 4세는 "파리는 미사 한 번을 드릴 가치가 있다"는 말을 하며 1593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에 받아들여졌고, 1594년에 샤르트르에서 대관식을 올렸다.[33]

가톨릭 동맹의 일부 구성원들은 계속 싸웠지만, 앙리 4세의 개종으로 충분한 수의 가톨릭 신자들이 포섭되어 완고한 세력을 점차 고립시켰다. 스페인은 베르뱅 조약에 따라 프랑스에서 철수했다. 앙리 4세는 파괴되고 빈곤해진 왕국을 재건하고 프랑스를 단일 권위 아래 재통합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전쟁은 1598년 앙리 4세가 프로테스탄트에게 어느 정도의 종교적 관용을 허용한 낭트 칙령을 발표하면서 종결되었다.[33]

프랑스는 가톨릭 군주가 통치했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하여 독일과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를 지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 종교 전쟁 기간은 프랑스의 주요 유럽 강국으로서의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제거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가톨릭 세력이 재정비하고 회복할 수 있게 했다.[33]

3. 3. 네덜란드 독립 전쟁 (80년 전쟁)

스페인에 맞선 저지대 국가의 독립 투쟁은 스페인의 카를 5세가 저지대 국가의 주권을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이양하면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29] 펠리페 2세는 아버지와 달리 저지대 국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서투른 외교술로 인해 상황은 악화되었다.[29]

종교적 요소는 갈등의 주요 원인이었다.[29] 저지대 국가는 에라스무스의 자유주의적 전통을 따랐지만, 칼뱅주의를 비롯한 개신교가 확산되면서 종교 재판이 강화되었다.[29] 펠리페 2세는 스페인식 종교 재판을 도입하여 탄압을 강화했고, 이는 스페인에 대한 반감을 더욱 키웠다.[29]

칼뱅주의는 상업 중심지였던 저지대 국가에서 번성했다.[29] 상인들은 칼뱅주의 회중의 평신도 역할을 선호했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적인 위계질서에 반감을 가졌다.[29] 또한, 스페인의 일방적인 과세는 저지대 국가의 불만을 샀다.[29]

1559년, 펠리페 2세는 파르마의 마가렛을 총독으로 임명했지만, 그녀의 권한은 제한적이었다.[29] 종교 재판은 계속되었고, 개신교 탄압은 극심했다.[29] 1566년 타협으로 잠시 완화되었지만, 펠리페 2세는 이를 번복하고 종교 재판을 재개했다.[29] 이에 개신교도들은 성상 파괴 운동을 벌였고, 오라녜 공 빌럼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위한 반란을 일으켰다.[29]

펠리페 2세는 알바 공작을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했다.[29] 알바 공작은 1567년 고난 위원회(Council of Troubles)를 설치하고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했다.[29]
1567년 로테르담에 도착한 알바 공작(Duke of Alva)의 모습


네덜란드 지방의 종교 전쟁의 황폐함을 묘사한 판화


오라녜 공 빌럼은 군대를 조직해 저항했지만 패배했고, 80년 전쟁(1568–1648)이 시작되었다.[29]

알바 공작의 과도한 세금 부과는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 모두의 반발을 샀다.[29] 네덜란드 반군은 "거지들"(Beggars)을 결성하여 저항했고, 바다거지들은 해적 행위를 통해 스페인에 맞섰다.[29] 빌럼은 스페인과 싸웠지만, 가톨릭교도, 칼뱅주의자,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통일성은 부족했다.[29] 거지들은 가톨릭교도들에게 잔혹 행위를 자행했다.[30]

{{blockquote|자신의 형제가 적의 계급에서 포로로 잡힌 것을 보고, 그들을 매달아 죽이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섬 주민들은 이러한 잔혹 행위에 격렬한 쾌락을 느꼈다. 그들의 눈에는 스페인인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어느 날 베르(Veer)의 외과 의사는 스페인인 포로의 심장을 잘라 배의 뱃머리에 못 박고, 마을 사람들에게 와서 그 안에 이빨을 박도록 초대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사나운 만족감을 느끼며 그렇게 했다.[30]}}

알바 공작의 아들 돈 파드리케는 잔혹 행위를 이어갔다.[31] 주트펜(Zutphen), 나르덴(Naarden) 등에서 학살이 자행되었고, 알크마르(Alkmaar) 포위전에서는 반군이 승리했다.[31] 하를렘(Haarlem) 포위전은 7개월간 지속되었고, 결국 스페인이 승리했지만 큰 피해를 입었다.[31]

스페인 가톨릭교도들이 오데워터를 침공하여 마을에서 도망치지 못한 모든 남녀노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앤트워프의 전투 장면


필립의 이복 형제인 돈 존이 스페인 군대를 지휘했지만, 스페인 광란으로 인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32] 빌렘은 네덜란드 지방들을 연합하려 했지만, 종교적 불관용으로 인해 실패했다.[32] 칼뱅주의자들은 가톨릭교도들을 탄압했고, 스페인은 파르마 공 알렉산데르를 파견하여 다시 남부 지방을 장악했다.[32]

|thumb|250px|1576년 마스트리흐트(Maastricht)에서 일어난 스페인 광란의 모습]]

마스트리흐트 포위전은 4개월 이상 지속되었고, 결국 스페인이 승리했지만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32] 빌럼은 암살당했고, 잉글랜드가 네덜란드를 지원하면서 스페인은 어려움을 겪었다.[32] 스페인 무적함대는 1588년 잉글랜드에 패배했고, 네덜란드의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32]

빌럼의 아들 나사우의 모리스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데벤터르, 흐로닝언, 네이메헨 그리고 주트펜을 탈환했다.

1592년, 파르네세는 사망하고, 1598년에는 펠리페 2세가 사망했다. 1609년 휴전으로 잠시 전쟁이 중단되었지만, 1621년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다. 30년 전쟁에 연루된 스페인은 결국 네덜란드에 양보하기로 결정했고, 1648년 뮌스터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 독립 전쟁은 종식되었다.

3. 4. 영국과 아일랜드의 종교 분쟁

영국과 아일랜드의 종교 개혁은 1533년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면서 시작되었다.[38] 당시 개신교 신자는 소수에 불과했으며, 대부분 잉글랜드 남부와 동부 도시에 거주했다. 잉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교회는 국왕과 의회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토머스 크롬웰과 토머스 크랜머 아래에서 교리와 관행에 대한 주요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개혁에 대한 첫 도전은 아일랜드에서 시작되었는데, 킬데어 백작 토머스 피츠제럴드는 이를 무장 봉기의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1534년 잉글랜드와 웨일스 군대가 아일랜드에 도착하여 피츠제럴드는 진압되었다.[38]

잉글랜드에서는 수도원 해산으로 인해 은총의 순례라는 가톨릭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종교 개혁에 반대하는 것은 반역죄로 규정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1549년에는 기도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실패했다. 1553년 잉글랜드의 메리 1세 치하에서 가톨릭이 부활한 후, 잉글랜드 남동부에서 개신교 봉기가 일어났지만 실패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은 갈등 속에서 시작되었다. 존 녹스는 추기경 비튼 암살에 가담한 죄로 추방당했다가 1560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성상 파괴 폭동을 일으켰다.[39] 기즈의 메리는 프로테스탄트 세력과 대립했지만, 에든버러 조약 체결로 프랑스와 잉글랜드 군대가 철수하면서 스코틀랜드 칼뱅주의자들이 현지를 장악하게 되었다.

1560년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귀국하면서 프로테스탄트 세력과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메리는 프랑스식 종교 관용을 지지했지만, 프로테스탄트 세력은 체이스어바웃 습격을 일으켜 메리를 폐위시키려 했다. 메리는 카버리 힐 전투에서 패배하고 로흐 레벤 성에 투옥되어 강제로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메리는 탈출 후 랭사이드 전투에서 패배하고 잉글랜드로 도망쳐 투옥되었다. 그녀의 아들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는 프로테스탄트로 성장하여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1569년부터 1570년까지 북부 봉기가 일어났지만 실패했다.

잉글랜드 내전은 종교적 갈등과 왕-의회 간 권력 다툼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찰스 1세는 위그노를 지원했으나, 의회는 왕의 종교 정책에 반대하며 자금 지원을 거부했다. 1642년 전쟁이 발발했고, 엣지힐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다. 1643년 제1차 뉴버리 전투에서 의회군이 승리했고, 1644년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 올리버 크롬웰의 활약으로 요크와 잉글랜드 북부를 장악했다. 1645년 의회는 뉴 모델 군을 편성했고, 1646년 찰스는 스코틀랜드에 항복했다. 찰스는 1649년에 처형되었다.

크롬웰의 승리 이후, 광대한 지역의 토지가 몰수되었고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은 코노트 지역으로 추방되었다.


아일랜드에서는 1641년 아일랜드 반란 이후 지속적인 전쟁 상태였다. 아일랜드 연합은 영국 왕당파와 동맹을 맺었으나, 라쓰민 전투에서 패배했다. 올리버 크롬웰은 1649년 아일랜드에 상륙하여 왕당파를 진압했다. 드라헤다 포위전과 웩스퍼드에서의 학살은 아일랜드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1653년까지 아일랜드 정복이 완료되었고, 가톨릭 소유 토지는 몰수되어 의회 채권자와 군인들에게 분배되었다.

찰스 1세의 처형은 스코틀랜드 내전의 역학 관계를 변화시켰다. 몬트 로즈 후작은 카비스데일 전투에서 패배하고 처형되었다.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에 상륙하여 언약에 서명하고 새로운 잉글랜드 공화국의 가장 큰 위협이 되었다. 크롬웰은 1650년 스코틀랜드에 도착하여 던바 전투에서 승리하고 에든버러를 점령했다. 1651년 인버케이싱 전투에서 승리한 후, 스코틀랜드 퍼스로 진격했다. 1652년, 왕당파 잔당의 저항이 완전히 끝났다.

''던바 전투에서의 크롬웰'', 앤드류 캐릭 고우 작


1688년 오렌지공 윌리엄의 잉글랜드 침공으로 명예 혁명이 일어났다. 1689년 신분 의회는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키고 윌리엄과 메리 2세에게 왕위를 제안했다. 1689년 자코바이트 봉기에서 스코틀랜드 남부와 저지대의 칼뱅주의 세력이 승리했지만, 많은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클랜들은 가톨릭 또는 성공회를 유지했다. 글렌코 학살은 1691년 새로운 개신교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데 늦은 맥도날드 클랜에게 가해졌다. 하이랜드 클랜은 이후 자코바이트 봉기에서 가톨릭 계승자들을 지지했다.

3. 5. 스위스 종교 분쟁

울리히 츠빙글리의 지도 하에 개신교 칸톤이자 도시인 취리히는 다른 개신교 칸톤들과 방어 동맹인 ''크리스틀리헤스 부르크레흐트''를 체결했으며, 콘스탄츠스트라스부르 도시도 포함되었다.[26] 이에 대응하여 가톨릭 칸톤들은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와 동맹을 맺었다.[26]

카펠 2차 전투에서 츠빙글리의 지지자들이 패배하고 츠빙글리 자신이 전사했다.


수많은 사소한 사건과 양측의 도발 이후, 1528년 5월 투르가우에서 가톨릭 사제가 처형되었고, 1529년에는 개신교 목사 J. 키저가 슈비츠에서 화형에 처해졌다.[26] 마지막 결정타는 바덴에 가톨릭 포크트를 임명한 것이었고, 취리히는 6월 8일 전쟁(카펠 1차 전쟁)을 선포[26], 투르가우와 장크트갈렌 수도원 영토를 점령했으며, 추크와의 경계인 카펠로 진격했다.[26]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동맹을 해체해야 했던 가톨릭 측에 그다지 유리하지 않은 평화 협정(''에르스터 란트프리데'')을 통해 공개적인 전쟁은 피했다.[26] 긴장은 본질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26]

1531년 10월 11일, 가톨릭 칸톤들은 카펠 2차 전쟁에서 취리히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26] 취리히군은 동맹 개신교 칸톤들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고, 울리히 츠빙글리는 24명의 다른 목사들과 함께 전사했다.[26] 패배 후, 취리히군은 재집결하여 추거베르크를 점령하려 했고, 그들 중 일부는 멘칭겐 근처의 ''구벨'' 언덕에 야영했다.[26] 에게리의 소규모 부대가 야영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고, 사기가 떨어진 취리히군은 퇴각해야 했으며, 개신교도들은 불리한 평화 조약에 동의해야 했다.[26] 스위스는 개신교와 가톨릭 칸톤의 혼합물로 나뉘게 되었고, 개신교는 더 큰 도시를, 가톨릭은 더 농촌 지역을 지배하는 경향이 있었다.[26]

1656년,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긴장이 다시 나타나 빌머겐 1차 전쟁으로 이어졌다.[26] 가톨릭 측이 승리하여 정치적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26] 1712년의 토겐부르크 전쟁은 가톨릭과 개신교 칸톤 간의 갈등이었다.[26] 1712년 8월 11일의 아라우 평화 조약과 1714년 9월 7일의 바덴 평화 조약에 따르면, 전쟁은 가톨릭의 헤게모니 종식으로 끝났다.[26]

3. 6. 스칸디나비아와 동유럽의 종교 분쟁

크리스티안 2세는 1524년 루터교로 개종했고, 덴마크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터교 설교자들의 덴마크 진출을 장려했다. 프레데릭 1세 사후, 전쟁이 발발했으나 크리스티안 백작이 승리하여 루터교가 확립되었다. 가톨릭 주교들은 투옥되었고, 교회 토지는 몰수되어 왕실 수입이 증가했다.

크리스티안 3세는 노르웨이 (1537년), 페로 제도 (1540년), 아이슬란드 (1550년) 에도 루터교를 강제로 확립했다. 덴마크-노르웨이는 1814년 킬 조약까지 노르웨이를 괴뢰 국가로 만들었다.[37]

30년 전쟁의 일환으로,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는 1625년 니더작센의 루터교 통치자들을 돕기 위해 군사적으로 개입했으나,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과 틸리의 연합군에 패퇴했다. 1629년 뤼베크 조약을 통해 크리스티안 4세는 독일 프로테스탄트 국가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덴마크-노르웨이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3. 7. 기타 분쟁

4. 주요 인물



나바라의 앙리 4세는 1589년 당시 남부와 서부를 장악했고, 가톨릭 동맹은 북부와 동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가톨릭 동맹의 지도력은 마옌 공작에게 넘어갔으나, 1589년 9월 아르크 전투에서 앙리에게 패배했다. 앙리 4세는 이브리 전투에서 승리한 후 파리를 포위했지만, 스페인의 지원으로 실패했다.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1594년에 샤르트르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앙리 4세의 개종으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그를 지지하여 가톨릭 강경파를 고립시켰고, 스페인은 베르뱅 조약에 따라 철수했다. 이후 앙리 4세는 1598년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프로테스탄트에게 종교적 관용을 허용하며 전쟁을 종결했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가톨릭 군주가 통치했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하여 독일과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를 지원했다. 프랑스 종교 전쟁으로 프랑스의 영향력은 약화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의 가톨릭 세력이 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5. 주요 조약 및 협정

6. 유럽 종교 전쟁의 결과 및 영향

1590년경 종교 개혁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개신교 정부 및/또는 문화가 유럽 영토의 약 절반을 통제했다. 그러나 가톨릭 재정복의 결과로 1690년에는 약 5분의 1만이 남게 되었다.[19]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중반까지의 유럽의 종교 상황

유럽 종교전쟁으로 인해 인구 감소, 경제적 피해, 사회 구조 변화, 새로운 사회 계층의 등장이 나타났다.[40][41][42][43]

유럽 종교전쟁으로 인한 사상자
최소 추정치최대 추정치사건지역기간주요 대립 세력특징
4,000,00012,000,00030년 전쟁신성 로마 제국30년개신교(루터교, 개혁교회, 후스파) 대 가톨릭교회종교 전쟁으로 시작, 프랑스-합스부르크 정치적 충돌로 변질
2,000,0004,000,000위그노 전쟁프랑스36년개신교 (개혁교회) 대 가톨릭교회종교 전쟁으로 시작되어 대체로 그 성격을 유지
315,000868,0003국 전쟁그레이트 브리튼아일랜드12년개신교 (성공회, 개혁교회, 비국교도), 전쟁의 여러 분파에 분포한 가톨릭교회시민 전쟁, 종교-국가 관계 및 종교 자유 문제, 민족적 요소 포함
600,000700,00080년 전쟁저지대 국가 (신성 로마 제국)80년개신교 (개혁교회) 대 가톨릭교회종교(세금 및 특권)에 대한 분쟁이 독립 전쟁으로 발전
100,000200,000독일 농민 전쟁신성 로마 제국1년개신교 (재세례파), 가톨릭교회 대 개신교 (루터교), 가톨릭교회경제적 및 종교적 이유가 혼합된, 농민과 프로테스탄트/가톨릭 지주 간의 전쟁



이 수치에는 전염병, 기근 등으로 인한 민간인의 사망, 전투 중 군인의 사망, 가능한 대량 학살 및 집단 학살이 포함된다.[40] 나열된 전쟁은 사상자가 가장 심각했으며, 유럽의 나머지 종교 분쟁은 몇 년, 1년 또는 그 미만으로 지속되었고 훨씬 덜 폭력적이었다. 위그노 반란은 독일 농민 전쟁 이후 가장 피해가 컸으며 최대 10만 명의 사망자를 냈을 수 있다.

6. 1. 종교적 변화

1590년경 종교 개혁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개신교 정부 및/또는 문화가 유럽 영토의 약 절반을 통제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재정복의 결과로 1690년에는 약 5분의 1만이 남게 되었습니다.[19]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중반까지의 유럽의 종교 상황

6. 2. 정치적 변화

유럽 종교개혁의 정점이었던 1590년경, 프로테스탄트 정부 및/또는 문화가 유럽 영토의 약 절반을 통제했다. 그러나 가톨릭 재정복의 결과로 1690년에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약 5분의 1로 감소했다.[19]

6. 3. 사회·경제적 변화

유럽 종교전쟁으로 인해 인구 감소, 경제적 피해, 사회 구조 변화, 새로운 사회 계층의 등장이 나타났다.[40][41][42][43]

유럽 종교전쟁으로 인한 사상자
최소 추정치최대 추정치사건지역기간주요 대립 세력특징
4,000,00012,000,00030년 전쟁신성 로마 제국30년프로테스탄트 (루터교, 개혁교회, 후스파) 대 가톨릭교회종교 전쟁으로 시작, 프랑스-합스부르크 정치적 충돌로 변질
2,000,0004,000,000위그노 전쟁프랑스36년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 대 가톨릭교회종교 전쟁으로 시작되어 대체로 그 성격을 유지
315,000868,0003국 전쟁그레이트 브리튼아일랜드12년프로테스탄트 (성공회, 개혁교회, 비국교도), 전쟁의 여러 분파에 분포한 가톨릭교회시민 전쟁, 종교-국가 관계 및 종교 자유 문제, 민족적 요소 포함
600,000700,00080년 전쟁저지대 국가 (신성 로마 제국)80년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 대 가톨릭교회종교(세금 및 특권)에 대한 분쟁이 독립 전쟁으로 발전
100,000200,000독일 농민 전쟁신성 로마 제국1년프로테스탄트 (재세례파), 가톨릭교회 대 프로테스탄트 (루터교), 가톨릭교회경제적 및 종교적 이유가 혼합된, 농민과 프로테스탄트/가톨릭 지주 간의 전쟁



이 수치에는 전염병, 기근 등으로 인한 민간인의 사망, 전투 중 군인의 사망, 가능한 대량 학살 및 집단 학살이 포함된다.[40] 나열된 전쟁은 사상자가 가장 심각했으며, 유럽의 나머지 종교 분쟁은 몇 년, 1년 또는 그 미만으로 지속되었고 훨씬 덜 폭력적이었다. 위그노 반란은 독일 농민 전쟁 이후 가장 피해가 컸으며 최대 10만 명의 사망자를 냈을 수 있다.

6. 4. 한국에 주는 교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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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War and Religion after Westphalia, 1648–1713 https://books.google[...] Ashgate Publishing 2018-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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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문서 Op. Cit., Motley, Vol. II, p. 151.
[31] 문서 Ibid., p.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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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웹사이트 British Isles, 1641–52 http://necrometrics.[...] 2012-01
[43] 웹사이트 Victimario Histórico Militar http://remilitari.co[...]
[44] 서적 The Age of Wars of Religion, 1000-1650: An Encyclopedia of Global Warfare and Civilization, Volume 2 https://books.google[...] Greenwood Publishing Group 2006
[45] 서적 War and Religion after Westphalia, 1648–1713 https://books.google[...] Ashgate Publishing 2013
[46] 문서 Treaty of Münster 1648
[47] 웹인용 Which Countries have State Religions? http://economics.uch[...] University of Chicago 2006-08-30
[48] 서적 Reformation: Europe's House Divided 1490-1700 https://books.google[...] Penguin UK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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