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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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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관파천은 1896년 고종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친일 세력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이다. 이 사건은 친러 세력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으며, 약 1년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정부를 통치했다. 아관파천은 갑오개혁의 폐지와 친일 내각의 몰락, 친러 세력의 부상, 열강의 이권 침탈 심화, 독립협회의 반발을 초래했다. 결과적으로 대한제국 수립의 기반이 되었으나,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져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조선 강제 병합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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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
지도 정보
사건 개요
명칭아관파천
다른 명칭노관파천
아관노천
로마자 표기Agwan pacheon
Nogwan pacheon
Agwan Nocheon
영어 명칭Korea royal refuge at the Russian legation
한자 표기俄館播遷
일본어 표기がかんはせん
ろかんはせん
がかんろせん
러시아어 표기Бегство Коджона в русскую миссию
사건 정보
참가자고종
순종
장소한성부 중구 정동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날짜1896년 2월 11일 ~ 1897년 2월 20일
원인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된 고종이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파천함.
결과아관파천 이후 많은 이권이 러시아를 위시한 열강의 손에 넘어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함.
상세 정보
배경고종이 을미사변 이후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
러시아 공사관현재 서울 중구 소공동에 위치했던 러시아 공사관
의미'俄館'은 러시아 공사관을 의미
'播遷'은 왕이 멀리 떠돌아다님을 의미
'俄'는 청나라에서 러시아를 지칭하던 '俄羅斯'의 약자
'遷'은 거처를 옮긴다는 의미
관련 인물이완용
김윤식
추가 정보
옛 러시아 공사관 건물 (서울)

2. 명칭

1864년 조선 고종 1년 이후 조선왕조실록에는 러시아 제국을 한자로 ‘'''아라사'''’(俄羅斯)로 기록하였다.[22] 따라서 ‘아관’(俄館)은 러시아 공사관을 뜻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러시아를 ‘노서아’(露西亞)라고도 불렀기 때문에,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노서아'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은 1905년 대한제국 광무 9년 9월 5일 노서아-일본의 강화 조약(포츠머스 조약) 기록이 유일하며, 러시아 공사관을 ‘노관’(露館)이라고 칭한 것도 1897년 두 차례에 불과하다.[23] 아관파천 당시에는 “파천”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고, 나중에 붙인 명칭이다.

3. 배경

이 사건은 청일전쟁 이후 조선 왕실 내부의 당파 싸움이 격화되던 시기에 발생했다. 고종과 순종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서울 소재)으로 피신하여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약 1년 동안 조선 정부를 통치했다. 그들의 탈출은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며, 친러 인사인 이범진, 러시아 영사 칼 이바노비치 베버(Karl Ivanovich Weber) 등이 주도했다.

1900년경 촬영된 러시아 공사관. 경복궁(북쪽) 옆 언덕에 위치해 있었으며, 왕비 시해 직후 국왕이 사실상 감금된 곳과 인접해 있었다.


이 사건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한 왕의 쿠데타 공포와 그에 대한 반응으로 촉발되었으며, 조선 정치는 친일 개혁파에서 민비(후일 명성황후로 추존됨)와 연대했던 보수파로 이동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갑오개혁의 전면적인 폐지로 이어졌다.

구 내각 구성원들은 김홍집, 어윤중, 유길준 등을 포함하여 살해당하거나 도망쳐야 했다. 이범진과 이완용 등 친러, 친미 인사들이 새 내각에 등장했다. 러시아,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다른 서구 열강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적은 규모였지만, 무역 및 자원에 대한 특권이 러시아에 부여되었다. 일본은 여전히 조선의 가장 중요한 무역 파트너로 남아있었다.

이러한 이동과 관련 특권 부여는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조선 내부에서 광범위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반응은 결국 왕이 러시아 공관에 머문 지 1년이 조금 넘어 덕수궁으로 돌아오게 했다. 왕의 궁궐 복귀 후에도 러시아 경비병들이 계속 경호했다. 이는 1897년 이후 대한제국 선포, 즉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는 데 기여했을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 증대는 조선의 독립 종식으로 이어졌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더 많은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1905년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5년 후 일본은 조선을 병합했다.

3. 1. 을미사변과 반일 감정 고조

1895년 10월 8일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하였다.[24] 을미사변 이후 조선 백성들의 반일 감정은 극도로 고조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24] 11월 28일에는 춘생문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범진 등이 고종을 납치하고 김홍집 총리 등을 살해하려는 반쿠데타를 계획했으나 친위대 대장 이진호의 밀고로 실패하고 러시아 공사관과 미국 공사관으로 도피했다.[6]

3. 2. 친러 세력의 대두와 러시아의 개입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자, 고종은 1895년 11월 28일 친미, 친러 세력을 동원한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6] 이 사건으로 친일 세력은 약화되고, 이범진, 이완용 등 친러 세력이 부상하였다.[6] 베베르는 공사관 보호를 명목으로 수병을 서울로 데려오는 등 조선 내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새 내각에는 이범진과 이완용 등 친러, 친미 인사들이 등용되었다.[6]

4. 진행 과정

청일전쟁 이후 조선 왕실 내부의 당파 싸움이 격화되던 시기에 고종과 순종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서울 소재)으로 피신하여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약 1년 동안 조선 정부를 통치했다. 이들의 탈출은 친러 인사인 이범진, 러시아 영사 칼 이바노비치 베버(Karl Ivanovich Weber) 등이 비밀리에 주도했다.

이 사건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한 왕의 쿠데타 공포와 그에 대한 반응으로 촉발되었으며, 조선 정치는 친일 개혁파에서 민비(후일 명성황후로 추존됨)와 연대했던 보수파로 이동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갑오개혁의 전면적인 폐지로 이어졌다.

김홍집, 어윤중, 유길준 등을 포함한 구 내각 구성원들은 살해당하거나 도망쳐야 했다. 이범진과 이완용 등 친러, 친미 인사들이 새 내각에 등장했다. 러시아,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다른 서구 열강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적은 규모였지만, 무역 및 자원에 대한 특권이 러시아에 부여되었다. 일본은 여전히 조선의 가장 중요한 무역 파트너로 남아있었다.

이러한 이동과 관련 특권 부여는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조선 내부에서 광범위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반응은 결국 왕이 러시아 공관에 머문 지 1년이 조금 넘어 덕수궁으로 돌아오게 했다. 왕의 궁궐 복귀 후에도 러시아 경비병들이 계속 경호했다. 이는 1897년 이후 대한제국 선포, 즉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는 데 기여했을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 증대는 조선의 독립 종식으로 이어졌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더 많은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1905년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5년 후 일본은 조선을 병합했다.

4. 1.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피신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왕세자는 1896년 2월 11일 새벽, 궁녀용 가마를 타고 경복궁을 빠져나와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7][8] 이 피신은 이범진 등 친러파와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주도하였다.[7]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당일, 민비 시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조희연[9], 우범선[10], 이두황[11], 이진호, 이범래, 권규진의 목을 러시아 공관에 가져오도록 하는 칙령을 내렸다.[8] 또한 민비 시해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실시되었고, 한성에서 발행되던 영문 잡지에 조사 결과가 게재되었다.[12]

같은 날, 고종은 신내각을 공시하여 총리대신에 김병시, 내무대신에 박정양, 육군대신 겸 경무사 이윤용, 법무대신에 조병직, 학부대신에 이완용, 궁내대신에 이재준을 임명하였다. 조희연[9], 유길준, 장보[13], 이진호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8] 전 총리 김홍집과 전 농상공부대신 정병하는 망명하지 않고 경무청 앞에서 폭도들에게 잡혀 참살당하고, 유체는 소각되었다.[14]

2월 18일, 인천에서 4000여 명의 폭도가 봉기하여 관아 관저를 파괴하였다.[15] 2월 21일, 내부참서관 서상섭과 신대균은 소요 지역 파주, 개성, 여주, 이천 등에 난민 진압에 관한 칙유 반포를 위해 파견되었다. 2월 22일, 이범진은 법무대신 겸 경무사가 되어 대원군파 숙청을 시작하였다.[16]

4. 2. 친일 내각 숙청과 친러 내각 수립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당일 내각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하여, 유길준 등 친일 내각 대신들을 면직하고 이들을 체포하도록 명하였다.[25] 이어서 김병시를 내각총리대신에 임명하는 등 내각 인사를 새로 단행하였다. 이날 김홍집과 정병하는 백성들에게 살해되었고[25], 어윤중은 친일파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피신하던 중 산송 문제로 원한을 품은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26] 유길준, 조희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24]

새 내각은 이범진, 이완용 등 친러, 친미 인사들로 구성되었다.[24] 2월 11일 신내각 공시에서 총리대신에 김병시, 내무대신에 박정양, 육군대신 겸 경무사 이윤용, 법무대신에 조병직, 학부대신에 이완용, 궁내대신에 이재준이 임명되었다. 2월 22일에는 이범진이 법무대신 겸 경무사가 되어 대원군파 숙청을 시작한다.[16]

4. 3. 춘생문 사건 (1895년 11월 28일)

1895년 11월 28일, 이범진, 이완용 등은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려는 시도를 하였다.[6] 이들은 러시아와 미국 공사관에 잠복해 있었으며, 훈련대 교관인 미국인 다이(Dye), 미국인 선교사 등과 함께 고종을 납치하고 김홍집 총리 등을 살해하려는 반쿠데타를 계획했다.[6] 그러나 이 시도는 친위대 대장 이진호의 밀고로 실패로 돌아갔고, 관련자들은 러시아 공사관과 미국 공사관으로 도피했다.[6]

4. 4.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와 이권 침탈

러시아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체류하는 동안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19][21] 러시아는 경원, 경성의 채굴권, 압록강, 두만강, 울릉도의 삼림 채벌권 등 각종 이권을 요구하여 획득하였다.[16] 1896년 4월에는 경원군과 종성군 두 곳의 광산 채굴권을 획득하였고, 9월에는 두만강 상류 지역, 압록강 상류 지역, 울릉도, 무산의 삼림 벌채권을 취득하였다.[17] 또한 1896년 6월 12일에는 월미도 남서쪽 지역(44,316m2)을 임차하는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20]

러시아는 1896년 5월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 이후 일본과 야마가타-로바노프 협정을 체결하여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였다.[19][21] 일본과 러시아는 5월 14일에 '''제1차 일러 의정서'''를, 6월 9일에 '''제2차 일러 의정서'''를 조인하며 조선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19][21]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는 조선의 자주권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덕수궁으로 환궁하였으나, 러시아의 간섭은 계속되었다. 다른 열강들 역시 조선의 이권 획득에 가세하였다. 미국은 1896년 3월 운산군의 금광 채굴권, 경인선 부설권, 한성의 전등·전화·전차 부설권을 획득하였고,[17][18] 프랑스는 1896년 7월 경의선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4. 5. 고종의 환궁 (1897년 2월 20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문 지 1년여 만인 1897년 2월 20일에 덕수궁(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환궁 이후에도 러시아 경비병들이 고종을 경호하였다.

5. 결과 및 영향

이 사건은 청일전쟁 이후 조선 왕실 내부의 당파 싸움이 격화되던 시기에 발생했다. 고종과 순종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서울 소재)으로 피신하여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약 1년 동안 조선 정부를 통치했다. 그들의 탈출은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며, 친러 인사인 이범진, 러시아 영사 칼 이바노비치 베버(Karl Ivanovich Weber) 등이 주도했다.

이 사건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한 왕의 쿠데타 공포와 그에 대한 반응으로 촉발되었으며, 조선 정치는 친일 개혁파에서 민비(후일 명성황후로 추존됨)와 연대했던 보수파로 이동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갑오개혁의 전면적인 폐지로 이어졌다.

구 내각 구성원들은 김홍집, 어윤중, 유길준 등을 포함하여 살해당하거나 도망쳐야 했다. 이범진과 이완용 등 친러, 친미 인사들이 새 내각에 등장했다. 러시아,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다른 서구 열강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적은 규모였지만, 무역 및 자원에 대한 특권이 러시아에 부여되었다. 일본은 여전히 조선의 가장 중요한 무역 파트너로 남아있었다.

이러한 이동과 관련 특권 부여는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조선 내부에서 광범위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반응은 결국 왕이 러시아 공관에 머문 지 1년이 조금 넘어 덕수궁으로 돌아오게 했다. 왕의 궁궐 복귀 후에도 러시아 경비병들이 계속 경호했다. 이는 1897년 이후 대한제국 선포, 즉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는 데 기여했을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 증대는 조선의 독립 종식으로 이어졌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더 많은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5년 후 일본은 조선을 병합했다.

5. 1. 대한제국 수립의 기반 마련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약화되었던 왕권을 회복하고, 친러, 친미 인사들로 구성된 새 내각을 구성하였다. 김홍집, 어윤중 등 구 내각 구성원들은 살해되거나 도피하였고, 이범진, 이완용 등이 새 내각에 등용되었다.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며 무역 및 자원 관련 특권을 얻었지만, 일본은 여전히 조선의 주요 무역 파트너였다.

러시아 공사관 체류 시기(1896년 2월 11일 ~ 1897년 2월 20일) 동안, 고종은 러시아 기술자를 고용하는 등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이 시기 러시아어 교사로 N. 비르코프(N. Birukov, Н. Бируков)가 고용되었고, 기계 공장에서는 러시아 기술자와의 고용 계약이 체결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조선 내에서 광범위한 분노를 야기했고, 결국 고종은 1년여 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하게 되었다. 고종은 환궁 이후에도 러시아 경비병들의 경호를 받았으며, 1897년 10월 12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에 즉위하여, 조선의 독립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5. 2. 열강의 이권 침탈 심화와 자주성 훼손

아관파천 기간 동안 러시아 제국을 비롯한 열강의 이권 침탈이 심화되었다. 러시아는 1896년 5월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 이후 일본 제국야마가타-로바노프 협정을 맺고, 경원과 경성의 채굴권, 압록강, 두만강, 울릉도의 채벌권 등 각종 이권을 요구하였다. 다른 서구 열강들에게도 무역 및 자원에 대한 특권이 부여되었으며, 일본은 여전히 조선의 가장 중요한 무역 파트너로 남아있었다.

고종이 다른 나라 공사관에 피신하여 다른 나라 군대의 보호를 받는 상황은 조선의 외교적 자주성을 크게 훼손한다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조선 내부에서 광범위한 분노를 일으켰고, 결국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되었다.

5. 3. 독립협회의 반발

청일전쟁 이후 조선 왕실 내부의 당파 싸움이 격화되던 시기에, 고종과 순종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서울 소재)으로 피신하여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약 1년 동안 조선 정부를 통치했다. 이 사건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한 왕의 쿠데타 공포와 그에 대한 반응으로 촉발되었으며, 조선 정치는 친일 개혁파에서 민비(후일 명성황후로 추존됨)와 연대했던 보수파로 이동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갑오개혁의 전면적인 폐지로 이어졌다.

구 내각 구성원들은 김홍집, 어윤중, 유길준 등을 포함하여 살해당하거나 도망쳐야 했다. 이범진과 이완용 등 친러, 친미 인사들이 새 내각에 등장했다. 러시아,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다른 서구 열강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적은 규모였지만, 무역 및 자원에 대한 특권이 러시아에 부여되었다. 일본은 여전히 조선의 가장 중요한 무역 파트너로 남아있었다.

이러한 이동과 관련 특권 부여는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조선 내부에서 광범위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5. 4. 러일전쟁과 일본의 조선 강제 병합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는 일본과의 갈등을 심화시켰고, 결국 러일전쟁으로 이어졌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1910년에는 강제로 병합하였다.

6. 평가 및 의의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체류하는 1년간 모든 정치는 러시아의 수중에 있었으며, 당시 탁지부 고문 알렉세예프(Alexeev)는 사실상 재무장관이나 마찬가지였다.[24] 한편, 아관파천 이후 많은 이권이 러시아를 위시한 열강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24]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긴 후에 왕은 비로소 군주권을 회복한다. 이전까진 일본이 일본식 제대로 내각이라는 것을 만들어 친일적 인사를 총리대신이 되도록 하여 그가 일본공사관의 지시를 받아 국사를 결정하도록 했다. 왕은 1년 동안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빼앗겼던 군주권을 회복하고 왕정을 원상으로 돌렸다. 그리고 나라를 한 등급 승격시켜 제국으로서 재출발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황제는 광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근대화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27]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일본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그의 의도를 봐야 한다는 평가도 있지만, 자주적이지 못한 외세 지향의 행동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이 사건은 청일전쟁 이후 조선 왕실 내부의 당파 싸움이 격화되던 시기에 발생했다. 고종과 순종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서울 소재)으로 피신하여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약 1년 동안 조선 정부를 통치했다. 그들의 탈출은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며, 친러 인사인 이범진, 러시아 영사 칼 이바노비치 베버(Karl Ivanovich Weber) 등이 주도했다.

이 사건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한 왕의 쿠데타 공포와 그에 대한 반응으로 촉발되었으며, 조선 정치는 친일 개혁파에서 민비(후일 명성황후로 추존됨)와 연대했던 보수파로 이동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갑오개혁의 전면적인 폐지로 이어졌다.

구 내각 구성원들은 김홍집, 어윤중, 유길준 등을 포함하여 살해당하거나 도망쳐야 했다. 이범진과 이완용 등 친러, 친미 인사들이 새 내각에 등장했다. 러시아,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다른 서구 열강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적은 규모였지만, 무역 및 자원에 대한 특권이 러시아에 부여되었다. 일본은 여전히 조선의 가장 중요한 무역 파트너로 남아있었다.

이러한 이동과 관련 특권 부여는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조선 내부에서 광범위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반응은 결국 왕이 러시아 공관에 머문 지 1년이 조금 넘어 덕수궁으로 돌아오게 했다. 왕의 궁궐 복귀 후에도 러시아 경비병들이 계속 경호했다. 이는 1897년 이후 대한제국 선포, 즉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는 데 기여했을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 증대는 조선의 독립 종식으로 이어졌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더 많은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5년 후 일본은 조선을 병합했다.

6. 1. 긍정적 평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일본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왕권을 회복하고, 자주적인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27]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 동안 머물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추진하는 등, 이전까지 일본에 의해 제약받던 군주권을 회복하고 왕정을 복구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27]

6. 2. 부정적 평가

아관파천은 외세에 의존하여 국권을 훼손하고, 열강의 이권 침탈을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24]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동안, 모든 정치는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탁지부 고문 알렉세예프는 사실상 재무장관과 같았다.[24] 또한, 아관파천 이후 많은 이권이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에게 넘어갔다.[24]

청일전쟁 이후 조선 왕실 내부의 당파 싸움이 격화되던 시기에, 고종과 순종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해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는 친러 인사인 이범진과 러시아 영사 칼 이바노비치 베버 등이 주도했다. 이 사건으로 조선 정치는 친일 개혁파에서 민비와 연대했던 보수파로 이동하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갑오개혁은 전면 폐지되었다. 김홍집, 어윤중, 유길준 등 구 내각 구성원들은 살해되거나 도피했고, 이범진과 이완용 등 친러, 친미 인사들이 새 내각에 등용되었다. 러시아는 다른 서구 열강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규모였지만, 무역 및 자원에 대한 특권을 부여받았다. 일본은 여전히 조선의 가장 중요한 무역 파트너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조선 내부에서 광범위한 분노를 일으켰고, 결국 고종은 러시아 공관에 머문 지 1년이 조금 넘어 덕수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왕의 궁궐 복귀 후에도 러시아 경비병들이 계속 경호했다.

6. 3. 역사적 의의

아관파천은 조선 말기 복잡한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대한제국 수립과 열강의 침탈, 그리고 일본의 강제 병합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27] 현재까지도 아관파천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체류하는 1년 동안 모든 정치는 러시아의 수중에 있었으며, 당시 탁지부 고문 알렉세예프(Alexeev)는 사실상 재무장관이나 마찬가지였다.[24] 아관파천 이후 많은 이권이 러시아를 위시한 열강의 손에 넘어갔다.[24]

청일전쟁 이후 조선 왕실 내부의 당파 싸움이 격화되던 시기에, 고종과 순종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약 1년 동안 조선 정부를 통치했다. 이 사건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한 왕의 쿠데타 공포와 그에 대한 반응으로 촉발되었으며, 조선 정치는 친일 개혁파에서 민비(후일 명성황후로 추존됨)와 연대했던 보수파로 이동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갑오개혁의 전면적인 폐지로 이어졌다.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일본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그의 의도를 봐야 한다는 평가도 있지만, 자주적이지 못한 외세 지향의 행동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왕은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빼앗겼던 군주권을 회복하고 왕정을 원상으로 돌렸다.[27] 구 내각 구성원들인 김홍집, 어윤중, 유길준 등은 살해당하거나 도망쳐야 했으며, 이범진과 이완용 등 친러, 친미 인사들이 새 내각에 등장했다. 러시아,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다른 서구 열강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적은 규모였지만, 무역 및 자원에 대한 특권이 러시아에 부여되었다. 일본은 여전히 조선의 가장 중요한 무역 파트너로 남아있었다.

이러한 이동과 관련 특권 부여는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조선 내부에서 광범위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반응은 결국 왕이 러시아 공관에 머문 지 1년이 조금 넘어 덕수궁으로 돌아오게 했다. 왕의 궁궐 복귀 후에도 러시아 경비병들이 계속 경호했다. 이는 1897년 이후 대한제국 선포, 즉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는 데 기여했을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 증대는 조선의 독립 종식으로 이어졌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더 많은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1905년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5년 후 일본은 조선을 병합했다.

7. 관련 인물

참조

[1] 웹사이트 高宗(朝鮮、李朝)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22-04-24
[2] 웹사이트 金允植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11-04
[3] 웹사이트 李完用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22-04-24
[4] 웹사이트 NAVER韓国語辞書 https://ko.dict.nave[...]
[5] 웹사이트 weblio辞書 https://www.weblio.j[...]
[6] 간행물 朝鮮京城事変ノ顛末ニ関シ小村弁理公使ヨリ報告ノ件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7] 간행물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8] 간행물 韓国王露公使館ヘ播遷関係一件/1 明治29年2月12日から明治29年2月20日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896-02-11
[9] 기타 閔妃殺害事件の元訓錬隊大隊長
[10] 기타 閔妃殺害事件の元訓錬隊第二大隊長
[11] 기타 閔妃殺害事件の元訓錬隊第一大隊長
[12] 간행물 朝鮮事変ノ公報ト称スル書類ニ関シ京城駐在一等領事内田定槌ヨリ報告ノ件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896-05-19
[13] 기타 閔妃殺害事件の高等裁判所裁判長
[14] 간행물 韓国王露公使館ヘ播遷関係一件/1 明治29年2月12日から明治29年2月20日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896-02-14
[15] 간행물 韓国王露公使館ヘ播遷関係一件/1 明治29年2月12日から明治29年2月20日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896-02-19
[16] 간행물 各国内政関係雑纂/韓国ノ部 第一巻/8 明治29年3月25日から明治29年11月13日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896-07-12
[17] 기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1896-03-27
[18] 기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1896-04-15
[19] 간행물 2 韓国問題に関する日露両国間協商一件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0] 간행물 各国内政関係雑纂/韓国ノ部 第一巻/8 明治29年3月25日から明治29年11月13日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896-05-23
[21] 간행물 2 韓国問題に関する日露両国間協商一件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2] 간행물 함경 감사 이유원이 경흥 지방에 들어온 이국 사람들이 통상할 것을 청하는 것을 거절하였다고 보고하다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1864-02-28
[23] 간행물 조병식 등이 궁궐로 돌아올 것을 주청하다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1897-02-11
[24] 백과사전 아관파천 글로벌 세계 대백과
[25] 서적 고종실록 1896-02-11
[26] 뉴스 모함에 빠지다 https://www.brainmed[...] 브레인미디어 2015-09-14
[27] 서적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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