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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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아기 아가타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성인이다. 유교 집안에서 성장했으나, 친정 언니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을 지켰다. 1836년 체포되어 옥중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김아기는 천주교와 관련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런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천주교는 이교로 여겨졌지만, 1801년 신유박해로 이어졌다. 김아기와 남편은 천주교에 관심을 두지 않고 유교를 따랐다.[1]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고,[1]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2. 생애
어느 날,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된 친정 언니가 김아기를 찾아왔다. 언니는 김아기의 집에 있는 조상의 신주와 기이한 그림을 악의 극치로 여기며 버리라고 권했다. 언니의 말에 김아기는 깊은 열망을 느껴 신주와 그림을 불태웠다. 김아기는 하느님의 진리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어떤 곤경도 받아들이기로 했다.[1]
김아기는 늦게 천주교 교리를 배웠지만, "예수와 마리아" 밖에 모르는 여인으로 알려질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1]
1836년 9월 김업이, 한아기와 함께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곳에서 남명혁 다미아노, 권득인 베드로, 박아기 안나, 이호영 베드로, 이소사 아가타 등 다른 천주교 신자들을 만났다.[1]
1839년 5월 11일 남명혁, 권득인, 박아기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다음날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박희순 루치아 또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김업이, 한아기, 김아기가 천주교 신앙을 버리기를 거부하여 사형 선고를 받기까지 사흘간의 심의가 더 있었다.[1]
1839년 5월 24일, 김아기는 다른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조신철 가롤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시간과 같은 오후 세 시에, 아홉 명의 순교자가 순교하였다. 형법에 따라 시신들은 사흘간 사형장에 방치되었다.[1]
당시를 기록한 형조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앵베르 주교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2. 1. 천주교 입교 전
김아기는 천주교와 관련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유교를 지키며 살았다.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천주교는 이교로 여겨졌지만, 김아기와 남편은 천주교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1]
그러던 어느 날,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된 친정 언니가 찾아왔다. 언니는 김아기의 집에 있는 조상의 신주와 기이한 그림을 보고 "불필요한 미신"이라며 모두 버리라고 권했다. 언니는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라며 김아기에게 진실을 배우고 실천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1]
언니의 말에 감동받은 김아기는 집안의 신주와 그림을 모두 불태웠다. 이전까지 교회와 관계없는 삶을 살았지만, 하느님의 진리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앞으로 닥칠 어려움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1]
2. 2. 천주교 입교와 신앙 생활
김아기는 천주교와 무관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런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천주교는 이교로 여겨졌지만, 1801년 신유박해로 이어졌다. 김아기와 남편은 천주교 교리를 배울 기회가 없었고 위험한 것으로 여겨 관심을 두지 않고 유교를 따랐다.[1]
어느 날,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된 친정 언니가 김아기를 찾아왔다. 언니는 김아기의 집에 있는 조상의 신주와 기이한 그림을 악의 극치로 여기며 버리라고 권했다. 언니의 말에 김아기는 깊은 열망을 느껴 신주와 그림을 불태웠다. 이전까지 천주교와 관계없는 삶을 살았지만, 하느님의 진리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어떤 곤경도 받아들이기로 했다.[1]
김아기는 늦게 천주교 교리를 배웠지만, 신앙심은 빠르게 성장했다. 아침, 저녁 기도를 외우지 못해 "예수와 마리아" 밖에 모르는 여인으로 알려졌지만, 신앙심은 깊었다.[1]
1836년 9월 김업이, 한아기와 함께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곳에서 남명혁 다미아노, 권득인 베드로, 박아기 안나, 이호영 베드로, 이소사 아가타 등 다른 천주교 신자들을 만났다.[1]
심문에서 김아기는 "저는 예수와 마리아 밖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했고, "그들을 버릴 바에야 차라리 죽겠습니다."라며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포장은 김아기를 감옥으로 돌려보냈고, 다른 천주교 신자들은 "여기 예수와 마리아밖에 모르는 김아기 아가타가 오셨다."라며 반겼다. 김아기는 교리와 기도문을 외우지 못해 세례를 받지 못했지만, 옥중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는 박해 기간 동안 옥중에서 세례를 받은 첫 사례였다.[1]
2. 3. 체포와 투옥
1836년 9월 김업이와 한아기가 체포되었다. 김아기가 그들과 함께 체포되었는지, 그녀의 집에서 체포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셋은 같은 날 구금되었다.
김아기는 남명혁 다미아노, 권득인 베드로, 박아기 안나, 이호영 베드로, 이소사 아가타 등 다른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수감 생활을 하였다. 심문에서 "예수와 마리아 밖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신앙을 지켰고, "그들을 버릴 바에야 차라리 죽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에 다른 천주교도 수감자들은 "여기 예수와 마리아밖에 모르는 김아기 아가타가 오셨다."라며 그녀를 반겼다. 김아기는 박해 기간 동안 옥중에서 세례를 받은 첫 번째 인물로, 세례는 그녀에게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견뎌낼 새로운 힘을 주었다.
2. 4. 심문과 고문
김아기는 심문에서 "예수와 마리아를 버릴 바에야 차라리 죽겠다"라고 말하며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1]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킨 김아기의 모습에 다른 천주교 신자들은 "여기 예수와 마리아밖에 모르는 김아기 아가타가 오셨다"라며 반겼다.[1] 김아기는 기도문과 교리를 외우지 못해 박해 이전에는 세례를 받지 못했지만, 옥중에서 세례를 받았다.[1]
2. 5. 옥중 세례
김아기는 늦게 천주교 교리를 배웠지만, 신앙심은 빠르게 성장했다. 비록 아침과 저녁 기도를 외울 수는 없었지만, "예수와 마리아"를 진심으로 믿었다. 1836년 9월에 체포된 후, 감옥에서 다른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김아기는 교리와 기도문을 외우지 못해 세례를 받지 못했으나, 박해 기간 동안 옥중에서 세례를 받은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1] 세례는 김아기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고,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는 신앙을 굳건히 지키며 순교의 길을 걸었다.[1]
2. 6. 사형 선고와 순교
김아기는 1839년 5월 24일 다른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조신철 가롤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1]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시간과 같은 오후 세 시에, 아홉 명의 순교자가 순교하였다. 형법에 따라 시신들은 사흘간 사형장에 방치되었다.[1]
앵베르 주교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1]
3. 시복 · 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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