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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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업이는 한국 천주교 신자였으며, 순교자이다. 어린 시절부터 천주교 신앙을 지녔으며, 남편과 자녀를 잃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후 신앙생활에 더욱 헌신했다. 천주교 박해 시기에 체포되어 심문과 고문을 받았으며 순교했다. 1925년 시복되었고, 1984년 시성되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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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업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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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김업이 막달레나 |
출생일 | 1774년 |
사망일 | 1839년 5월 24일 |
축일 | 9월 20일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사망지 | 서울 서소문 |
직업 | 순교자 |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
시복자 | 교황 비오 11세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자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2. 생애
김업이는 다른 많은 초기 천주교 신자들과 달리 유년 시절부터 신앙을 가졌다. 깊은 신앙심 속에서 성장하며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순결을 지키며 살고자 했으나,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던 부모의 반대로 결혼해야 했다. 다행히 교우와 결혼했지만, 남편과 자식을 일찍 여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더욱 신앙에 매진하며 이웃에게 교리를 전파하는 데 힘썼다. 상냥한 성품 덕분에 많은 이들이 그에게 가르침받기를 즐거워했으며, 신앙에서 멀어졌던 한아기가 다시 신앙을 찾도록 돕기도 했다.
조선 조정의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다졌다. 1836년 9월, 한아기, 김아기 등 다른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옥중에서도 포도대장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며 신앙을 증언하는 등 굳건한 믿음을 보였다.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으며, 결국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다른 8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1]
2. 1. 김업이 막달레나
김업이는 다른 많은 초기 천주교 신자들과는 달리 어린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했다.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성장하며 거룩한 삶을 살고자 했으며, 여성으로서 주님을 가장 잘 섬기고 교회 가르침에 헌신할 방법을 고민했다. 어릴 때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순결을 지키기로 결심했으나,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던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혼해야 했다.주님의 은총으로 교우와 결혼했지만, 남편과 자식을 일찍 여의었다. 이후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더욱 신앙생활에 힘쓰며 이웃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상냥한 성품 덕분에 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배우기를 즐거워했다. 어느 날 한아기의 어머니를 만나, 신앙에서 멀어진 한아기를 함께 설득하여 회개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조선 조정의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교회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를 다졌다. 1836년 9월, 한아기, 김아기 등과 함께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옥중에서도 포도대장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며 신앙을 증언했다. 신앙을 버리라는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여 사흘간의 심의 끝에 1839년 5월 24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같은 날, 김업이를 포함한 아홉 명의 교우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형조 문서에는 "아무런 죄도 없는 이광헌과 권득인 등이 그릇된 종교를 추종하였기 때문에 처형받았다."[1]고 기록되어 있다.
순교자들의 시신은 형법에 따라 사흘간 형장에 그대로 두었다가, 앵베르 주교의 기록에 따르면 신자들이 4월 27일 새벽에 시신을 수습하여 주교가 마련한 묘지에 안장했다. 앵베르 주교는 가난 때문에 시신을 멍석으로 감쌀 수밖에 없었지만, 훗날 조선에 종교의 자유가 오면 이 시신들이 귀중한 유산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2. 2. 한아기 바르바라
한아기는 모친이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예수에 대해 배웠다. 어머니의 가르침과 모범 덕분에 깊은 신앙을 갖게 되었지만, 비신자와 결혼하면서 신앙을 실천하는 것을 잠시 중단했다.어느 날, 딸을 항상 걱정하던 한아기의 어머니가 딸을 보러 왔다가 집 앞에서 김업이 막달레나를 만났다. 서로 천주교 신자임을 알고 있던 터라, 한아기의 어머니는 김업이에게 인사를 건네며 손을 잡고 말했다. "막달레나 자매님,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김업이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라고 답했다. 한아기의 어머니는 "항상 걱정거리인 시집간 제 딸을 보러 왔습니다. 우리가 만난 건 하느님의 뜻인가 봅니다. 제 딸은 저보다 자매님 말씀을 더 잘 들을 것 같아요. 우리 함께 가서 이야기해 봅시다."라고 제안했고, 김업이도 "사실, 저도 그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며 동의했다.
결국 한아기의 어머니와 김업이는 한아기를 설득하여 회개하도록 이끌었다. 이는 한아기에게 은총의 시간이었다. 그녀는 과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그 후부터 교리를 열심히 배우고 실천하며 그리스도교의 덕성을 훌륭히 실천했다.
그러나 30세 때 남편과 세 명의 자식을 모두 잃는 비극을 겪었다. 이러한 불행 속에서도 그녀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친정으로 돌아온 한아기는 예비 신자들을 가르쳤고, 죽을 위험에 처한 이웃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또한 죄인들에게 회개를 권고하며 금욕적이고 순결한 삶을 살았다.
1836년 9월, 천주교 박해가 심해지면서 한아기는 김업이와 함께 체포되었다. 김아기 역시 같은 날 체포되어 세 사람은 함께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는 이미 남명혁 다미아노, 권득인 베드로, 박아기 안나, 이호영 베드로, 이소사 아가타 등 여러 천주교 신자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심문 과정에서 한아기는 혹독한 고문을 용감하게 견뎌냈다. 형리들이 고문을 끝냈을 때 그녀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신앙을 버리라는 요구를 끝까지 거부했다. 결국 한아기는 김업이, 김아기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1839년 5월 24일, 한아기는 김업이, 김아기를 포함한 9명의 교우들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갔다. 당시 순교 장면을 목격한 조신철 가롤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정해진 날에 보통 키의 사람보다 더 큰 십자가가 세워진 소달구지들이 감옥으로 보내졌다. 모두들 준비가 되어 있었고, 포졸들은 사형수들을 끌고 나와 그들의 팔과 머리카락을 십자가에 결박했다. 발받침대에 그들의 발이 놓여졌고,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
:그들이 서소문 앞의 내리막길에 왔을 때, 포졸들은 갑자기 발받침대를 치워 버렸고, 달구지꾼들은 소들이 곧바로 내리뛰도록 다그쳤다. 길은 거친 자갈밭이었으므로, 달구지가 덜컹거리며 팔과 머리카락이 십자가에 묶인 죄수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야기했다. 그 내리막길 밑에 사형장이 있었다. 포졸들은 죄수들을 십자가에서 끌어내리고 그들의 옷을 벗겼다. 망나니들은 그들의 머리카락을 들보에 묶은 뒤 그들의 목을 베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시간과 비슷한 오후 3시경, 한아기를 포함한 아홉 명의 순교자는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조선의 형법에 따라 시신들은 사흘간 형장에 방치되었다. 당시 형조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4월 12일[1], 아무런 죄도 없는 이광헌과 권득인 등이 그릇된 종교를 추종하였기 때문에 처형받았다.
앵베르 주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4월 27일의 새벽에 우리는 가까스로 시신들을 되찾았다. 우리는 내가 일찍이 마련해 둔 묘지에 그 순교자들의 시신을 묻었다. 나는 유럽식으로 그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값비싼 향수를 뿌리고 성유를 발라주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했고 그런 식으로 시신들을 입히는 것은 신자들에게 부담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겨우 멍석으로 감쌌다. 지금 우리는 천국에 많은 보호자를 모셨다. 나는 조선에 종교의 자유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으며, 그 날이 오면, 이 시신들은 귀중한 유산이 될 것이다.
2. 3. 김아기 아가타
1836년 9월, 김업이와 한아기가 체포될 무렵 김아기도 이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김아기가 그들과 함께 체포되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집에서 체포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세 사람은 같은 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감옥에는 이미 여러 천주교 신자들이 있었다. 주교의 제의를 숨겨주었다가 고발된 남명혁 다미아노, 십자고상을 만들어 팔다가 고발된 권득인 베드로, 남편과 자식의 배교에도 신앙을 지킨 박아기 안나, 그리고 이호영 베드로와 그의 누나 이소사 아가타 등이 함께 갇혀 있었다.
심문 과정에서 김아기는 포장의 질문에 "저는 예수와 마리아 밖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신앙을 버리라는 요구에도 "그들을 버릴 바에야 차라리 죽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굳건한 의지를 보였다. 그녀는 고문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굽히지 않았고, 포장은 결국 그녀를 다시 감옥으로 보냈다.
다른 천주교 수감자들은 감옥으로 돌아온 김아기를 "여기 예수와 마리아밖에 모르는 김아기 아가타가 오셨다."라며 기쁘게 맞이했다. 김아기는 이전까지 교리와 기도문을 잘 외우지 못해 세례를 받지 못했으나, 박해 기간 중 옥중에서 세례를 받은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 세례는 그녀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고, 그녀는 그 힘으로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견뎌냈다.
김업이, 한아기와 함께 김아기 역시 천주교 신앙을 버리기를 거부하여 사형 선고를 받기까지 사흘간의 심의가 더 필요했다.
마침내 1839년 5월 24일, 김아기는 다른 8명의 교우들과 함께 순교했다. 당시 순교 장면을 목격한 조신철 가롤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정해진 날에 보통 키의 사람보다 더 큰 십자가가 세워진 소달구지들이 감옥으로 보내졌다. 모두들 준비가 되어 있었고, 포졸들은 사형수들을 끌고 나와 그들의 팔과 머리카락을 십자가에 결박했다. 발받침대에 그들의 발이 놓여졌고,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
:그들이 서소문 앞의 내리막길에 왔을 때, 포졸들은 갑자기 발받침대를 치워 버렸고, 달구지꾼들은 소들이 곧바로 내리뛰도록 다그쳤다. 길은 거친 자갈밭이었으므로, 달구지가 덜컹거리며 팔과 머리카락이 십자가에 묶인 죄수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야기했다. 그 내리막길 밑에 사형장이 있었다. 포졸들은 죄수들을 십자가에서 끌어내리고 그들의 옷을 벗겼다. 망나니들은 그들의 머리카락을 들보에 묶은 뒤 그들의 목을 베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시간과 비슷한 오후 세 시경, 아홉 명의 순교자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형법에 따라 시신들은 사흘간 사형장에 방치되었다.
당시 형조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4월 12일[1], 아무런 죄도 없는 이광헌과 권득인 등이 그릇된 종교를 추종하였기 때문에 처형받았다.
앵베르 주교는 시신 수습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4월 27일의 새벽에 우리는 가까스로 시신들을 되찾았다. 우리는 내가 일찍이 마련해 둔 묘지에 그 순교자들의 시신을 묻었다. 나는 유럽식으로 그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값비싼 향수를 뿌리고 성유를 발라주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했고 그런 식으로 시신들을 입히는 것은 신자들에게 부담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겨우 멍석으로 감쌌다. 지금 우리는 천국에 많은 보호자를 모셨다. 나는 조선에 종교의 자유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으며, 그 날이 오면, 이 시신들은 귀중한 유산이 될 것이다.
2. 4. 체포와 투옥
1836년 9월, 김업이는 한아기와 함께 체포되었다. 김아기 역시 같은 날 구금되었는데, 이들과 함께 체포되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집에서 체포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감옥에서 그들은 이미 투옥되어 있던 다른 천주교 신자들과 합류했다. 이들 중에는 주교의 제의를 숨겼다는 죄목으로 고발된 남명혁 다미아노, 십자고상을 만들어 팔다가 고발된 권득인 베드로, 남편과 아들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며 감옥에 남은 박아기 안나, 그리고 이호영 베드로와 그의 누나 이소사 아가타 등이 있었다.
이들은 감옥에서 혹독한 심문과 고문을 겪었다. 첫 번째로 심문을 받은 박아기는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제 남편과 제 아들이 배교한 것이 뭐 어때서요! 저는 저의 신앙을 지키고 그것을 위해 죽기를 택했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다음으로 심문을 받은 한아기 역시 박아기 못지않은 용기로 고문을 견뎌냈으며, 심문이 끝났을 때 그녀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동안 김업이는 포장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며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고 있었다.
김아기는 심문에서 '예수와 마리아 밖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신앙을 고백했다. 포장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신앙을 버리라고 회유했지만, 김아기는 '그들을 버릴 바에야 차라리 죽겠습니다.'라고 답하며 고문을 견뎌냈다. 김아기는 교리와 기도문을 외우지 못해 그전까지 세례를 받지 못했으나, 박해 기간 중 옥중에서 세례를 받은 첫 번째 인물이다. 세례는 그녀에게 새로운 힘을 주어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견딜 수 있게 했다. 감옥으로 돌아온 김아기를 다른 수감자들은 '여기 예수와 마리아밖에 모르는 김아기 아가타가 오셨다.'라며 기쁘게 맞이했다.
2. 5. 심문과 고문
1836년 9월, 김업이와 한아기가 체포되었다. 김아기가 그들과 함께 체포되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집에서 체포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세 사람은 같은 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감옥에서 그들은 이미 수감되어 있던 다른 천주교 신자들과 합류했다. 그곳에는 주교의 제의를 숨겼다가 고발된 남명혁 다미아노, 십자고상을 만들어 팔다가 고발된 권득인 베드로, 남편과 자식이 배교했음에도 신앙을 지키며 감옥에 남은 박아기 안나, 그리고 이호영 베드로와 그의 누나 이소사 아가타가 있었다.
첫 심문은 박아기 안나가 받았다. 그녀는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형리에게 "제 남편과 제 아들이 배교한 것이 뭐 어때서요! 저는 저의 신앙을 지키고 그것을 위해 죽기를 택했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다음으로 한아기가 심문을 받았다. 그녀 역시 박아기 못지않은 용기로 고문을 견뎌냈으며, 고문이 끝났을 때 그녀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 사이 김업이는 포장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며 자신의 신앙을 증언했다.
이어서 김아기가 불려 나갔다. 포장이 "네가 천주교회를 믿는다는 것이 사실이냐?"라고 묻자, 김아기는 "저는 예수와 마리아 밖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포장이 "예수와 마리아를 버리면 목숨을 구할 수 있는데, 버릴 수 있겠느냐?"라고 회유했지만, 그녀는 "그들을 버릴 바에야 차라리 죽겠습니다."라고 단호히 거절했다. 그녀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본 포장은 그들을 모두 감옥으로 돌려보냈다.
다른 수감자들은 돌아온 김아기를 보며 "여기 예수와 마리아밖에 모르는 김아기 아가타가 오셨다."라며 기쁘게 맞이했다. 김아기는 이전까지 교리와 기도문을 외우지 못해 세례를 받지 못했지만, 박해가 극심했던 시기 감옥 안에서 세례를 받은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 세례는 그녀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고, 그녀는 이 힘으로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견뎌낼 수 있었다.
2. 6. 순교
1836년 9월, 김업이와 한아기가 체포되었다. 김아기가 이들과 함께 체포되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집에서 체포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세 사람은 같은 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1]감옥에서 그들은 다른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주교의 제의를 숨겨두었다가 고발된 남명혁과 십자고상을 만들어 팔다가 고발된 권득인, 남편과 자식의 배교에도 신앙을 지키며 감옥에 남은 박아기, 그리고 이호영과 그의 누나 이소사 등이 함께 투옥되어 있었다.[1]
심문 과정에서 박아기는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제 남편과 제 아들이 배교한 것이 뭐 어때서요! 저는 저의 신앙을 지키고 그것을 위해 죽기를 택했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한아기 역시 혹독한 고문을 용감하게 견뎌냈으며, 고문 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김업이는 포도대장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며 신앙을 증언했다.[1] 김아기는 심문에서 "저는 예수와 마리아 밖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했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 신앙을 버리라는 요구에도 "그들을 버릴 바에야 차라리 죽겠습니다."라며 거부했다. 고문에도 그녀의 뜻은 꺾이지 않았고, 포장은 세 사람을 다시 감옥으로 보냈다.[1]
다른 수감자들은 돌아온 김아기를 "여기 예수와 마리아밖에 모르는 김아기 아가타가 오셨다."라며 기쁘게 맞이했다. 김아기는 이전까지 교리와 기도문을 외우지 못해 세례를 받지 못했으나, 박해 기간 중 옥중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는 그녀에게 새로운 힘을 주어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견딜 수 있게 했다.[1]
모든 심문과 재판이 끝난 후, 1839년 5월 11일에는 남명혁, 권득인, 박아기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다음 날에는 이광헌과 박희순에게도 사형이 선고되었다.[1] 김업이, 한아기, 김아기는 천주교 신앙을 버리기를 끝까지 거부하여 사흘간의 추가 심의 끝에 사형을 선고받았다.[1]
마침내 1839년 5월 24일, 순교의 날이 밝았다. 당시 상황은 조신철에 의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정해진 날에 보통 키의 사람보다 더 큰 십자가가 세워진 소달구지들이 감옥으로 보내졌다. 모두들 준비가 되어 있었고, 포졸들은 사형수들을 끌고 나와 그들의 팔과 머리카락을 십자가에 결박했다. 발받침대에 그들의 발이 놓여졌고,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1]
그들이 서소문 앞의 내리막길에 왔을 때, 포졸들은 갑자기 발받침대를 치워 버렸고, 달구지꾼들은 소들이 곧바로 내리뛰도록 다그쳤다. 길은 거친 자갈밭이었으므로, 달구지가 덜컹거리며 팔과 머리카락이 십자가에 묶인 죄수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야기했다. 그 내리막길 밑에 사형장이 있었다. 포졸들은 죄수들을 십자가에서 끌어내리고 그들의 옷을 벗겼다. 망나니들은 그들의 머리카락을 들보에 묶은 뒤 그들의 목을 베었다.
오후 세 시경,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시간과 비슷한 때에 아홉 명의 순교자가 처형되었다. 형법에 따라 그들의 시신은 사흘간 사형장에 방치되었다.[1]
당시 형조에서 기록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4월 12일[1], 아무런 죄도 없는 이광헌과 권득인 등이 그릇된 종교를 추종하였기 때문에 처형받았다.[1]
앵베르 주교는 시신 수습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4월 27일의 새벽에 우리는 가까스로 시신들을 되찾았다. 우리는 내가 일찍이 마련해 둔 묘지에 그 순교자들의 시신을 묻었다. 나는 유럽식으로 그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값비싼 향수를 뿌리고 성유를 발라주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했고 그런 식으로 시신들을 입히는 것은 신자들에게 부담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겨우 멍석으로 감쌌다. 지금 우리는 천국에 많은 보호자를 모셨다. 나는 조선에 종교의 자유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으며, 그 날이 오면, 이 시신들은 귀중한 유산이 될 것이다.[1]
3. 시복 및 시성
김업이 막달레나와 김아기 아가타 그리고 한아기 바르바라는 1925년 7월 5일에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2]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참조
[1]
문서
1839년 5월 24일 음력
[2]
뉴스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http://www.pbc.co.kr[...]
평화방송
201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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